대한민국의 여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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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1981.1.15.~1990.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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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1990.1.22.~1992.10.5.) (1993.2.25.~1995.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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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1995.12.6.~1997.11.7.) |
민주정의당 (전두환계, 노태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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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자유당 | → |
신한국당 (민주계, 신민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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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당 (상도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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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국민당 (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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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공화당 (청구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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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국당 (민정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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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 (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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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연합 (청구동계, 민정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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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당시의 로고. | |
1회 지방선거 당시의 로고.[1] | |
<colcolor=#003990,#0070bb> 민주자유당 | |
영문명 | <colbgcolor=#fff,#1f2023>Democratic Liberal Party (DLP) |
등록 약칭 | 민자당 |
창당일 | 1990년 1월 22일 ( 3당 합당) |
당명 변경 | 1995년 12월 6일 ( 신한국당) |
해산일 |
1997년
11월 21일 ( 통합민주당과 합당, 한나라당 창당) |
중앙당사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5-1 ( 여의도동, 극동VIP빌딩) |
정치적 스펙트럼 | 우익 빅 텐트[2] |
대표위원 | 김윤환 / 4선 (10·11·13·14대) |
원내총무 | 서정화 / 3선 (12-14대) |
사무총장 | 강삼재 / 3선 (12-14대) |
정책위의장 | 김종호 / 4선 (11-14대) |
대통령/총재[3] | 노태우[4]/ 제13대 (1990.1.22.~1992.10.5.) |
김영삼[5] / 제14대 (1993.2.25.~1995.12.6.) | |
국제 조직 |
(1992년 10월 2일 가입) |
정책 연구소 | 여의도연구소 (1995년 2월 3일 설립) |
국회의원 |
166석 / 291석 (당명 변경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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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색 |
남색 (#003990)
|
파란색 (#0070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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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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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지지기반은 세대별로 보면 40대 이상이었고[9], 지역별로 보면 영남권에서 지지율이 높았으며,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도 어느 정도 지역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권에서는 지금보다 개발이 덜 되었던 인천과 경기도에서는 지지율이 잘 나왔던 편이었지만, 서울에서는 지지율이 낮았으며 충청도의 경우에도 통일국민당과 자유민주연합으로 제각기 이탈했고, 강원도도 1995년 1회 지선 때부터 2000년 16대 총선 때까지 한동안 스윙보터 성향을 보였다. 또한 TK에서도 김영삼에 대한 반감으로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PK보다 민자당 지지세가 약했다.
2. 성향
1990년 현재 보수정당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민주자유당은 보수정당들의 합당으로 장기집권을 한 일본처럼 한국의 자유민주당을 꿈꾸면서 이질적인 정치세력이 뭉쳐서 창당되었다. 이로 인해서 1980년대 집권여당이자 강경보수 성향의 1981년 창당된 민주정의당[10]과 1960~1970년대 집권 여당이자 마찬가지로 보수 성향의 1987년 창당된 신민주공화당[11], 그리고 1960~1980년대 앞의 군사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신민당- 신한민주당을 계승한 온건보수 성향의 통일민주당[12]이 ‘보수대연합’을 기치로 3당 합당을 통해서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권위주의적이고 냉전적 반공주의 성향이며 국민보수주의적이었던 강경보수세력과[13] 자유민주주의적이며 상대적으로 대북정책에 유연하며 자유보수주의적이었던 온건보수세력간의 다툼이 벌어졌다. 1990년대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온건보수세력이 민중당 출신 등 개혁적 인사를 영입하며 강경보수세력을 몰아냈다. 강경보수세력의 상당수가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는 등 분당을 하거나 역사 바로세우기 정책을 통해서 탈당하거나 15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며 사라진 듯 했으나, 1997년 외환 위기와 박근혜의 정계 입문 그리고 16대 대선 패배로 인한 이회창의 정계 은퇴를 틈타 강경보수세력이 다시 들어오면서 제16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당이 점점 우경화되어 갔으며[14], 이는 제17대 대통령 선거 경선국면 당시 친이와 친박의 계파갈등이 극에 달하고 이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이르기까지 상호 계파간의 공천학살이 반복되는 원인이 된다.2.1. 분파
- 중도 ~ 중도우파
-
민주계,
민정계 노태우 파벌 일부(김종인 등)
보수성향의 민주당계 정당, 노태우 파벌을 포함한 계파다. 민주당- 신민당- 신한민주당이라는 정통계보를 이어온 통일민주당이 창당할 때 양대 파벌 중 하나인 상도동계가 해당된다. 평민당이 분당되어 나간 이후로 통일민주당과 상도동계는 동의어가 되었다. 한나라당 창당 과정에서 통합민주당에서 온 민주계도 있지만 큰 의미가 없어서 사실상 상도동계와 민주계는 동의어다. 대체적으로 기존 민주당계 정당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했다. 과거 1950년대에는 자유당에 맞서 싸웠으며 1960~1980년대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이념은 자유민주주의였으며 민주화 운동의 주역 중 하나이다. 또 자유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반공주의를 주장하며, 각종 사회폐단과 구습을 점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자유보수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주로 우파적인 자유주의, 즉 경제적 자유주의와 보수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다만 문화검열이 김영삼 정권 때도 일정 부분 이뤄진 것을 보면 사회보수주의 성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보인다. 이들 민주계는 민주화 운동과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우들을 중심으로 보수가 아니라고 지금도 비난받는다. 또 진보진영에서는 민주계를 변절자 취급하면서 민주계의 민주화 운동을 부정한다. 다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으며 개혁보수의 뿌리로 여겨진다. 세대가 교체된다면 현재 보수의 뿌리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들 민주계를 부정하는 극우들은 개혁 자체를 반대하는 반면 민주계는 상대적으로 보수 내 분파 중에서 이념적으로 유연하기 때문이다.
꽤나 스펙트럼이 넓은 분파다. 민주계는 통일민주당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재를 수혈했는데 해체된 진보정당인 민중당 출신들도 대거 영입했으며[15] 운동권 출신 인사들도 꽤나 많이 영입했다.[16] 그래서 다른 두 계파는 거의 사멸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계파는 많이 남아있다. 중도 ~ 중도우파적 위치에 있다.
- 우파 ~ 극우
-
민정계
원래 창당 당시에는 최대규모를 자랑했던 거대 파벌이었다. 내부적으로 다시 보스에 따라서 강경한 전두환 파벌과 온건한 노태우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박근혜 정권을 끝으로 거의 사멸한 상황이다. - 전두환 파벌(극우): 자유민주주의와 민주화 운동에 적대적인 권위주의 이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반공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 내셔널리즘적 특성이 있는 국민보수주의 이념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극우파적 위치에 있다.
-
노태우 파벌(중도우파 ~ 극우, 온건 우파가 많았다.) 전두환 파벌이 냉전적
반공주의라면[17] 노태우 파벌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과 수교한 북방정책, 북한과의 회담과 유엔 동시가입, 각종 교류 등으로 볼 때는 냉전적
반공주의는 아니고 지금의
반공주의에 더욱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공개념, 노동자 임금 인상요구 수용, 김영삼 김대중과의 잦은 회동 및 경청, 최저임금제 도입, 재벌 규제, 의료보험 전국 확대 같은 정책들은 꽤나 진보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다. 물론 학생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은 많이 때려잡았고, 노동조건 개선에 대해 인색한 면모를 드러냈지만,[18] 사회적 요구는 자의든 타의든반에 받아들이기는 했다는것이다. 인사 등용도 성향, 지역에 속박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도 노태우 정부 인재들을 활용했다. 중도우파 ~ 극우파적 위치에 있다.
- 우파
3. 강령과 정책
강령
1. 우리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의 폭넓은 정치참여를 통하여 진취적이며 화합하는 정치문화를 정착시키고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2. 우리 국민의 창의와 활력을 북돋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형평과 균형을 통하여 모두가 잘 사는 복지경제를 실현한다.
3. 우리는 도의를 바탕으로 서로 돕는 미덕을 함양하고 정의와 양심이 지배하며 법과 질서가 존중되어 모두가 믿고 살 수 있는 공동체사회를 이룩한다.
4. 우리는 교육의 자율성과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국민 모두가 스스로의 개성과 능력을 발휘케 하여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민족문화를 창달한다.
5. 우리는 국력을 배양하고 민주역량을 발휘하여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앞당기며 자주적인 외교 노력과 적극적인 교류와 협동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주역이 된다.
1. 우리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의 폭넓은 정치참여를 통하여 진취적이며 화합하는 정치문화를 정착시키고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2. 우리 국민의 창의와 활력을 북돋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형평과 균형을 통하여 모두가 잘 사는 복지경제를 실현한다.
3. 우리는 도의를 바탕으로 서로 돕는 미덕을 함양하고 정의와 양심이 지배하며 법과 질서가 존중되어 모두가 믿고 살 수 있는 공동체사회를 이룩한다.
4. 우리는 교육의 자율성과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국민 모두가 스스로의 개성과 능력을 발휘케 하여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민족문화를 창달한다.
5. 우리는 국력을 배양하고 민주역량을 발휘하여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앞당기며 자주적인 외교 노력과 적극적인 교류와 협동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주역이 된다.
기본정책
1. 책임정치를 구현한다.
2. 성숙한 정치문화를 정착시킨다.
3. 고도 과학기술의 선진산업국가를 건설한다.
4. 경제정의를 실천한다.
5. 건전한 사회를 이룩한다.
6. 교육개혁을 꾸준히 실천한다.
7.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국민의 문화생활을 향상시킨다.
8. 지역간의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
9. 국토의 이용을 극대화한다.
10. 해양개발을 촉진한다.
11. 국민복지를 증진시킨다.
12. 공존공영의 노사관계를 정착시킨다.
13. 중소기업을 육성지원한다.
14. 농어민의 소득을 획기적으로 늘린다.
15. 노동자의 중산층화를 도모한다.
16. 청소년이 꿈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17. 여성의 권익을 보장한다.
18. 노인복지의 사회적 기반을 확충한다.
19. 장해자의 복지를 증진시킨다.
20.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한다.
21. 교통난을 해소한다.
22. 주택문제를 해결한다.
23.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외교를 펼친다.
24. 국가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한다.
25. 한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조국통일을 앞당긴다.
1. 책임정치를 구현한다.
2. 성숙한 정치문화를 정착시킨다.
3. 고도 과학기술의 선진산업국가를 건설한다.
4. 경제정의를 실천한다.
5. 건전한 사회를 이룩한다.
6. 교육개혁을 꾸준히 실천한다.
7.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국민의 문화생활을 향상시킨다.
8. 지역간의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
9. 국토의 이용을 극대화한다.
10. 해양개발을 촉진한다.
11. 국민복지를 증진시킨다.
12. 공존공영의 노사관계를 정착시킨다.
13. 중소기업을 육성지원한다.
14. 농어민의 소득을 획기적으로 늘린다.
15. 노동자의 중산층화를 도모한다.
16. 청소년이 꿈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17. 여성의 권익을 보장한다.
18. 노인복지의 사회적 기반을 확충한다.
19. 장해자의 복지를 증진시킨다.
20.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한다.
21. 교통난을 해소한다.
22. 주택문제를 해결한다.
23.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외교를 펼친다.
24. 국가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한다.
25. 한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조국통일을 앞당긴다.
4. 당가
작사는 김병걸, 작곡은 김강섭이 맡았다.듣기[19]
(1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달린다 세계로 미래로 개혁의 큰 물결로 꿈과 희망을 민주 복지 통일의 선봉에 서서 세계속의 한국을 이끌어 나가자 (후렴) 아 세계로 미래로 힘차게 가는 그 길 그 길에 우뚝 선 민주자유당 (2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뭉쳤다 하나로 뭉쳤다 희망의 새 정치로 더 크고 넓게 자유 평화 통일의 역군이 되어 세계속의 한국을 드높여 보자 |
5. 역사
5.1. 창당 배경
자세한 내용은 3당 합당 문서 참고하십시오.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한 정당 | |||
여당 |
(127석) |
→ |
[[민주자유당| (217석)[20] |
야당 |
[[통일민주당| (59석) |
||
[[신민주공화당| (35석) |
기존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은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야권 분열로 정권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전체 299석 가운데 125석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이루어진 ' 제5공화국에 대한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 등에서 탈탈 털리면서 민주정의당은 야당과의 합당을 통해 정국을 돌파하려고 했다.[21]
처음에 민정당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진보 세력을 미리 견제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보수대연합'을 주장, 자당과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모두 참여하는 4당 합당을 추진했다. 자당을 포함한 이 4개 당이 지역 기반과 중심 인물만 다를 뿐 이념 스펙트럼과 정책 노선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니, 범보수로 묶일 수 있는 4당이 하나로 합쳐 거대한 보수정당을 창당하면 압도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 이에 반발하는 민주당계 일부가 이탈하거나 원외 재야 세력이 뭉쳐 진보정당을 만든다 해도, 아무리 이들이 선전한다고 한들 절대 합당세력인 자신들을 이길 수 없는 거대 보수정당 중심의 1.5당 구도가 정착되어 안정적으로 장기 집권을 꾀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22]
하지만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였던 노태우 대통령이 당시 의석수 기준으로 제1야당이었던 70석의 평화민주당에게 합당을 제의했을 때, 이 당의 수장이었던 김대중 총재는 공식적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반면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는 합당 제의에 응했고, 결과적으로 평화민주당을 제외한 3당의 합당이 성사되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는 3당 합당을 전격 발표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양대 세력 중 한 곳이었던 통일민주당 의원들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김영삼 총재의 개별 설득 끝에 대부분 합당에 응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끝까지 합당에 반대하며 통일민주당을 이탈한 의원은 부산 해운대구의 이기택, 부산 중구의 김광일, 부산 영도구의 김정길, 부산 동구의 노무현, 서울 영등포갑의 장석화 5명뿐이었고, 신민주공화당에서는 대전 동구갑의 김현 의원만이 합당 반대 의견으로 이탈[23]했다. 한편 무소속이었던 정몽준 의원과 유한열 의원이 3당 합당에 합류를 선언, 통합 신당은 총 의석수 299석 중 217석(민정 127 + 민주 54석 + 공화 34 + 무소속 2)을 보유한 초거대 여당으로 출범하였다. 이로써 노태우 정부의 골머리를 썩히던 여소야대 정국은 한순간에 극도로 기울어진 여대야소 구도로 전환되었다.
5.1.1. 당명을 둘러싼 잡음
민주자유당이란 이름은 일본 자유민주당과 어순이 반대인데다 유력 정당간의 합당[24]이라는 형성과정의 유사성[25], 의석의 과반을 넘는 집권 거대 보수 정당이라는 점 등이 비슷했다. 이 때문에 이름을 자유민주당에서 따왔다는 속설이 야권에서 돌기도 했다.이와 관련해 김영삼 총재의 경우 신당 창당 과정에서 일본의 자유민주당을 여러 번 강조했다고 하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외국 나가서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부정하기도 했다.[26] 한편 김종필은 이미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자민당과 교섭이 잦았던데다 자민당의 정국 안정 수완을 높이 샀기에 일본 자민당의 예를 여러차례 강조했다. 민자당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은 노태우 대통령의 말실수[27]를 두고 같은 해 2월 연설에서 10월 유신도 메이지 유신을 따라하더니 신당도 그렇다면서 일본 자유민주당 한국 지부라고 하지 그러냐고 비꼬았다. 결국 실증성보다는 이런저런 정황상의 심증이 속설을 부풀린 셈이다.
사실 자유와 민주는 별로 특이하다고 할 것도 없이 전통적으로 한국 정당명에 흔히 붙었던 단어였다. 실제로 이미 1960년대에 야권 계열에서 창당된 같은 이름의 자유민주당도 존재했던 데다 민주자유당 이후에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쪽도 어감이 비슷하긴 마찬가지. 또 초창기 창당 과정에서는 민주통일당 등의 다른 당명이 거론되기도 했다. 더구나 그렇게 의미심장한 이름이라면 불과 창당 5년, 대선 3년만에 바꿀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28], 반면 그런 민자당을 "김영삼당"[29]인 신한국당으로 바꾼 김영삼이 더 압박이란 해석도 있다.
노태우 회고록 등에서 보듯, 민정계 인사들은 민자당 창당을 정치 안정의 초석으로 보았다. 그래서 훗날 민정계, 공화계를 축출하고 민자당이라는 '좋은 이름'을 바꿔서 총선과 대선에서 졌다라고까지 해석했다. 미련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정당명 개명은 민정계를 축출하고 민주화를 추진하며 자신의 슬로건인 "신한국 창조"를 상징하는 당연한 마무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당 자체가 한국판 자민당을 꿈꾼 노태우, 김종필 등과 김영삼의 동상이몽, 오월동주였을지도 모른다.
5.2. 집권에서 개명에 이르기까지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도 이루지 못했던 전체 의석의 2/3를 확보했다. 그랬기 때문에 1990년 당시에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자민당의 55년 체제처럼 "90년 체제"가 이루어질 것이란 분석이 상당히 우세했다.마땅한 차기 대선 후보가 없는 민정당과, DJ나 YS와의 정면승부에서 승산이 없는 JP는 내각제에 적극적이었지만, 내각제 개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태우와 김종필, 김영삼은 합당 당시 내각제 개헌을 하기 비밀리에 약속했으나, 김영삼은 합당 직후 당초의 약속을 깬다. 내각제 합의 비밀 문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언론에 유출되어 내각제에 반대하던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김영삼은 자신이 내각제를 하겠다고 합의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밝히며, 내각제를 할 수 없다고 표명한 것이다. YS가 3당 합당에 찬성한 이유가 DJ와 후보 단일화 문제로 싸우기 싫었던 것임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었던 것.[30]
합당하고 나서도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의 계파 갈등이 상당했다. 이를 두고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민당처럼 하하호호하기에는 기존 지지층의 차이도 너무 컸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하며 김영삼을 지지하던 민주당 지지층과 반공, 경제발전을 이유로 민정당을 지지하던 민정당 지지층간의 간격이 너무도 컸고, 공화당 지지층들도 민정당과 그냥 합당하기에는 뭔가 꺼림직한 것은 매한가지였던지라 지지층의 화학접 결합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날치기가 심심하면 벌어진데다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나고 더군다나 물가상승률마저 높아졌기에 1990년 양대 재보궐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1991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기초의회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생각보다 선전을 거두었고,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막판 계란 투척 사건과 야권 단일화 실패, 투표율 저조로 광역의원 선거에서 564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웠다.
그러나 공천 잡음으로 인한 무소속 후보자 난립 + 군 부재자 투표 부정사건 + 안기부 흑색 선전물 배포사건이 겹쳐지면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9석만을 확보하며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다.[31][32] 한편 1992년 10월 2일, 김종필 대표위원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민주연합(IDU) 당수회의에 참석, 가입의결을 받고 수락연설을 하면서 정회원이 되었고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을 거쳐서 2020년 현재 국민의힘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정계와 공화계 중 일부가 이종찬을 중심으로 새한국당을 창당해서 독립했다. 이종찬과 같이 당을 나간 사람들은 특히 YS에게 원한이 컸던 박철언, 이 외에도 김용환, 장경우, 이영일이 있었다. 다만 일부는 다시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33] 다만 이 때만 해도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 민정계 인사들과 공화계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34] 이후 김영삼이 14대 대선에서 승리하고, 정주영이 조직한 통일국민당에 압력을 넣어 붕괴시키면서 이들 중 일부를 끌어들여 안정 과반 확보에도 성공한다. 1994년 12월 19일 여의도연구소 재단의 설립을 발표하고 21일 당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시기에 김영삼은 민주계의 부족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재야세력 및 운동권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대표적인 정당이 바로 1992년에 해산된 진보정당인 민중당이다. 1994년 민중당의 지도부였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가 입당하였다. 이외에도 김성식, 정태근의 경우 민중당에 이어 2차 꼬마 민주당을 거쳐서 한나라당 창당 때 합류했으며, 그 외 박형준, 김용태, 신지호, 차명진, 임해규 등이 존재한다. 이름만 들어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2020년대 현재 보수정당에서 중량감이 있는 인물들이다. 일부는 지나치게 우경화되어서 강경우익이 되었지만 상당수가 중도~ 중도우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개혁보수의 원천이자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스펙트럼이 너무 커져서 계파로서 의미가 없지만 민중당계로 불러도 될 정도다.
한편 재집권 후 YS계와 JP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각종 당직에서 JP계가 축출되자 1995년 2월 김종필을 위시한 공화계와 일부 민정계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그리고 1995년 2월 3일에는 여의도연구소 재단법인의 설립을 허가받으며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정당연구소를 세웠고 4월 15일에 개소했다. 이 연구소가 2013년에는 여의도연구원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2020년 현재 국민의힘의 정책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생겨나며 처음으로 치른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15개 광역단체장 중 5곳만을 건지고, 서울에서는 서울특별시장은 물론 강남구와 서초구를 제외한 모든 구청장을 내주면서 패배한다.
1995년 11월 하순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노태우가 구속되고, 김영삼의 대선 자금과의 연관성을 밝히라는 요구가 커지자, 당 쇄신 및 다음 총선을 대비하고자 당명을 바꿀 것을 검토한다.[35] # 이후 12월 들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한 후[36]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 중에 민정계와 공화계는 민주계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다. 반면 민주계는 김영삼을 따라 들어오거나 영입된 몇몇 인사들에 불과했다. 이후 1995년 초에 김종필과 김영삼 양자 간의 갈등이 지속되자 일부 민정계와 공화계가 이에 가담해서 당을 나갔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를 중심으로 해서, 8선의 박준규 등의 대구경북권의 민정계와 충청권의 공화계 상당수가 짐을 싸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이후 통일국민당으로 이탈했던 세력들이 신민당으로 간판을 갈았다가, 다시 자민련으로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처남인 김복동 의원이다.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의 다수는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다.
흥미로운 건 민자당이 간판을 내리자 자민련은 쾌재를 부르며 "정통 보수" "원조 보수" "민자당 적통"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사실 자민련은 창당 전에도 민자당이 통일한국당으로 당명 개정을 추진하자 그럼 우리가 민자당으로 창당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민자당은 당명 유지를 선언했다. 이 시기 당명 변경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이미지 변신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동시에 개혁공천[37]과 함께 민정계 중심+민주계, 공화계의 1강 2약 구도는 민정계 대거 탈락+민주 중심의 구도로 바뀐다. 수도권에서 분열 상태에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와 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했다.[38] 15대 총선 이후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민정계는 점점 쇠퇴하였다.
5.3. 개명 이후
당명 변경으로 이미지 쇄신을 노렸던 신한국당은 1996년의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과반 확보에 실패하고[39][40],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41] 이는 정통 여당 신한국당(민주자유당)과 정통 야당 민주당(통합민주당)의 결합이라고 선전되었다.[42] 이로서 탈당한 JP의 자민련과, DJ의 동교동계를 제외한 상당수의 舊 야당파(비 호남파) 정치인들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야권의 영남 출신들이 대거 사라지면서 지역감정이 가장 강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어쨌든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당명을 다시 바꾼 보람도 없이 대선에서 불과 1.6%차로 석패하면서, 결국 이들의 여당으로서의 입지는 막을 내렸다. 한국판 자민당이 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1+1이 반드시 3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43][44]
6. 보수의 중시조
새정치국민회의가 민주당계 정당의,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의 중시조로 평가받듯이 점차 보수정당의 중시조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커져가고 있다. 왜냐하면 1987년 6.29 선언으로 민주화된 이후에 1988년 2월 25일에 출범한 제6공화국이 탄생하고 만들어진 첫번째 보수정당으로 독재세력으로 평가받는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과 다르게 보수적이지만 민주주의 체제를 긍정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또한 한국의 정당계보에서 산업화 세력을 자임하는 반공독재, 군부독재를 추구한 정치세력들과 보수적 민주화세력이었던 통일민주당이 합당해서 탄생한 정당이었는데 옹호자는 보수대연합, 비판자들은 야합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민주와 독재의 대결로 점철되었던 시대는 타협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져서 199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의 대결로 프레임이 전환되었다는 상징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민자당이 탄생하고 199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에 대한 언급이 늘어났다.
7. 역대 전당대회
자세한 내용은 민주자유당/역대 전당대회 문서 참고하십시오.8. 역대 지도부
총재 및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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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 |||
<rowcolor=#003990,#0070bb> 제1·2대 노태우 |
제3·4대 김영삼 |
|||
대표최고위원 및 대표위원 | ||||
<rowcolor=#003990,#0070bb> 초대 김영삼 |
제2대 김종필 |
제3대 이춘구 |
제4대 김윤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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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총재
- 1대 : 노태우 (1990.5.9 ~ 1992.5.18)[45]
- 2대 : 노태우 (1992.5.19 ~ 1992.8.27)[46]
- 3대 : 김영삼 (1992.8.28 ~ 1995.2.6)[47]
- 4대 : 김영삼 (1995.2.7 ~ 1995.12.6)[48]
8.2. 대표최고위원/대표위원[49]
- 1대 : 김영삼 (1990.5.9 ~ 1992.8.27)
- 2대 : 김종필 (1992.8.28 ~ 1995.1.20)[50]
- 3대 : 이춘구 (1995.2.7 ~ 1995.8.20)
- 4대 : 김윤환 (1995.8.21 ~ 1995.12.6)
8.3. 원내총무
원내총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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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동영 |
제2대 김윤환 |
제3대 김종호 |
제4대 이자헌 |
제5대 김용태 |
제6대 김영구 |
제7대 이한동 |
제8대 현경대 |
제9대 서정화 |
||
- 1대 : 김동영 (1990.2.16 ~ 1990.10.11)
- 2대 : 김윤환 (1990.10.12 ~ 1991.2.18)
- 3대 : 김종호 (1991.2.19 ~ 1991.12.3)
- 4대 : 이자헌 (1991.12.4 ~ 1992.5.22)
- 5대 : 김용태 (1992.5.23 ~ 1993.3.2)
- 6대 : 김영구 (1993.3.3 ~ 1993.12.22)
- 7대 : 이한동 (1993.12.23 ~ 1995.2.8)
- 8대 : 현경대 (1995.2.9 ~ 1995.8.21)
- 9대 : 서정화 (1995.8.22 ~ 1995.12.6)
8.4. 사무총장
사무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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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준병 |
제2대 정순덕 |
제3대 김윤환 |
제4대 이춘구 |
제5대 김영구 |
제6대 최형우 |
제7대 황명수 |
제8대 문정수 |
|
제9대 김덕룡 |
제10대 김윤환 |
제11대 강삼재 |
||
- 1대 : 박준병 (1990.2.16 ~ 1990.11.6)
- 2대 : 정순덕 (1990.11.7 ~ 1991.2.18)
- 3대 : 김윤환 (1991.2.19 ~ 1992.3.27)
- 4대 : 이춘구 (1992.3.28 ~ 1992.5.22)
- 5대 : 김영구 (1992.5.23 ~ 1993.3.2)
- 6대 : 최형우 (1993.3.3 ~ 1993.4.13)
- 7대 : 황명수 (1993.4.14 ~ 1993.12.22)
- 8대 : 문정수 (1993.12.23 ~ 1995.2.7)
- 9대 : 김덕룡 (1995.2.8 ~ 1995.7.3)
- 10대 : 김윤환 (1995.7.4 ~ 1995.8.21)
- 11대 : 강삼재 (1995.8.22 ~ 1995.12.6)
9. 출신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 ||||||
번 | 이름 | 대 | 임기 | 선출 방식 | 정당 | |
취임일 | 퇴임일 | |||||
6 |
노태우 (1932 ~ 2021) |
13 |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
1987년 대선 직선 36.6% |
민주정의당 (1988 ~ 90) 민주자유당 (1990 ~ 92) 무소속 (1992 ~ 93) |
7 |
김영삼 (1927 ~ 2015) |
14 |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
1992년 대선 직선 42.0% |
민주자유당 (1993 ~ 95) 신한국당 (1995 ~ 97) 무소속 (1997 ~ 98) |
10. 역대 선거 결과
- 1991년 광역의원 선거 - 564/868 득표율 40.6%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전체 의석수 득표율 49.83% (원내 1당) (149/299) 7,923,718표, 전국구 득표율 38.5% [51]
-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 김영삼 득표수 9,977,332표, 득표율 41.96% 당선
11. 민주자유당 출신 정치인
민주자유당 소속이었던 정치인 | |||
소속기간 | 이름 | 직위 | 비고 |
1990년 3월 ~ 1992년 9월 18일 | 노태우 | 초대 총재 |
※ 13대
대통령 ※ 민주자유당 창당 |
1990년 3월 ~ 1995년 12월 6일 | 김영삼 | 2대 총재[53] |
※ 14대
대통령[54] ※ 자유당 3대 국회의원 ※ 민주당(1955년) 4. 5대 국회의원 ※ 민정당 6대 국회의원 ※ 신민당(1967년) 7.8.9.10대 국회의원 ※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초대 대표최고위원 ※ 14대 국회의원직 사퇴 ※ 신한국당 명예총재 |
1990년 3월 ~ 1995년 2월 9일 | 김종필 | 대표최고위원 |
※ 11, 31대
국무총리 ※ 민주공화당 6.7.8.10대 국회의원 ※ 유신정우회 9대 국회의원 ※ 신민주공화당 13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2대 대표최고위원 ※ 자유민주연합 총재 |
1990년 3월 | 박태준 | 최고위원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32대 국무총리 ※ 1963년 대한민국 육군 소장 예편. ※ 1981년 민주정의당 제11대 국회의원 ※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 ※ 구 포항제철( 포스코) 회장 |
1990년 3월 | 김재광 | 상임고문[55]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1988년 국회부의장 ※ 충청북도 청주시[56] 출신 ※ 1993년 사망 |
1992년 ~ 1995년 12월 6일 | 이명박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 ※ 15대 선거법 위반 의원직 상실.[57] ※ 한나라당 소속 → 새누리당 소속 → 무소속 ※ 2009년 6월 7일 청계재단 설립 ※ 17대 대통령 ※ 32대 서울특별시장 |
1990년 3월 ~ 1995년 12월 6일 | 김무성 |
의사국장 의원국장 |
※ 삼동산업(주) 대표이사 ※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국회행정실장, 기조실차장 ※ 1994년 제48대 내무부 차관 ※ 김영삼 대통령후보 추대위 총괄국장 ※ 제14대 김영삼 대통령후보 정책보좌역 ※ 대통령 민정비서관, 대통령 사정비서관 ※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 부산 남구을) ※ 한나라당 16대 국회의원( 부산 남구) ※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 2007년 박근혜 경선후보 조직총괄본부장 ※ 2008년 7월 한나라당 복당 [58] ※ 2008년 5월 18대 총선에서 친박무소속연대 출마 당선 ※ 한나라당 18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 2014년 7월 ~ 2016년 4월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당대표) ※ 새누리당 19대 국회의원(부산 영도구) ※ 새누리당 20대 국회의원(부산 중구·영도구) ※ 2017년 1월 ~ 11월 바른정당 고문 |
. | 박희태[59]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정의당 13대 국회의원 ※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 ※ 한나라당 16대~18대 국회의원 ※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당대표 ※ 2010년~ 2011년 18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 새누리당 상임고문 |
. | 구상찬 | . |
※
1990년~
1992년 민주자유당 정책위원장 보좌역[60] ※ 2006년~ 2008년 한나라당 강서(갑)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 2006년 한나라당 서울시당 뉴타운 정책개발위원장 ※ 2008년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중국 특사 ※ 2008년~ 2011년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서울 강서갑) |
. | 박대해 | . |
※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 ※ 통일민주당 국회 총무실 행정부실장 ※ 민주자유당 동래구 을(연제) 지구당 사무국장 ※ 한나라당 연제구지구당 부위원장, 중앙위원 ※ 한나라당 대선경선후보 박근혜 선대위 연제구 본부장 ※ 2008년 한나라당 제18대 국회의원( 부산 연제구) |
. | 노재봉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
. | 이만섭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 | 최병렬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
. | 김종인 | . |
※ 민주정의당 11대 국회의원 ※ 민주정의당 12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새천년민주당 17대 국회의원 ※ 더불어민주당 20대 국회의원 ※ 제 24대 보건사회부 장관 ※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
. | 김광수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상실 ※ 국회의원직 사퇴 |
. | 최영한[61] | . |
※
통일국민당에서 민자당으로 당적을 옮김. ※ 통일국민당 14대 국회의원 |
. | 박재홍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
. | 강용식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 | 김영수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 | 김영진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 | 이현수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 | 이재명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 | 김영순 | .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탈당 |
12. 여담
- 일본 만화나 소설에서 사실상 자유민주당을 등장시킬 때, 껄끄러움을 피하려고 '민주'와 '자유'를 뒤집어서 역순으로 써서 '민주자유당'이라는 가공의 당명을 만들어내서 쓰기도 한다. 다만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반까지 진짜로 민주자유당이라는 정당이 존재했다. 사회당과의 연정에 반대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민주클럽과 자유당이 합당해 창당한 정당이었지만 1950년에 자유당이라는 명칭으로 개칭되었고, 이후에 1955년에 민주당과 합당되면서 현재의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민주당과 앞 글자가 '민'으로 겹쳤기 때문에, 신문이나 선거 방송 등에서 정당 이름을 간략화할 때 한 글자로 줄이지 않고 그 대신 각각 '민자', '민주' 이렇게 두 글자로 줄였다. 가끔 '자'로 줄여 쓰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마저도 1995년에 자유민주연합이 분당되면서 글자가 겹치게 되었기 때문에 사장되었다.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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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7.~1951.12.) →
자유당 (1951.12.~1960.4.) 한국민주당 (1948.7.~1949.2.) 민주국민당 (1949.2.~1949.11.) 대한국민당 (1949.11.~1951.12.) |
장면 내각 | 민주당 (1960.8.~1961.5.) | |
박정희 정부 |
민주공화당 (1963.12.~1979.10.) 유신정우회^[1]^ (1973.3.~1979.10.) |
|
전두환 정부 | 민주정의당 (1981.1.~1988.2.) | |
노태우 정부 | 민주정의당 (1988.2.~1990.1.) → 민주자유당 (1990.1.~1992.10.) | |
문민정부 | 민주자유당 (1993.2.~1995.12.) → 신한국당 (1995.12.~1997.11.) | |
국민의 정부 |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 →
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자유민주연합 (1998.2.~2001.9.) 민주국민당 (2001.4.~2001.9.) |
|
참여정부 | 새천년민주당 (2003.2.~2003.9.) → 열린우리당 (2004.5.~2007.2.) | |
이명박 정부 | 한나라당 (2008.2.~2012.2.) → 새누리당 (2012.2.~2013.2.) | |
박근혜 정부 | 새누리당 (2013.2.~2017.2) → 자유한국당 (2017.2.~2017.3.) | |
문재인 정부 |
더불어민주당 (2017.5.~2022.5.) 더불어시민당^[A]^ (2020.3.~2020.5.) |
|
윤석열 정부 |
국민의힘 (2022.5.~현재) 국민의미래^[A]^ (2024.2.~2024.4.) |
|
[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 |||||||
제5공화국 ~
문민정부 (1981 ~ 1998) {{{#!wiki style="margin: 0 -10px 3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4px -1px -9px;" |
▲ 제5공화국 이전 | ||||||
민주정의당 | 한국국민당 | ||||||
신민주공화당 | 정당등록취소 | 통일민주당* | |||||
민주자유당 | 민주당에서 분당 | ||||||
민주자유당 | 통일국민당 | 신정치개혁당 | |||||
민주자유당 | 새한국당 | 신정치개혁당 | |||||
신민당 | |||||||
민주당에 합당 | 신민당 | ||||||
민주자유당 | 자유민주연합 | ||||||
자유민주연합 | |||||||
민주당※ | 신한국당 | 자유민주연합 | |||||
신한국당 | 국민신당 | ||||||
한나라당 | |||||||
*
3당 합당으로 보수정당에 합류 ※ 한나라당 창당으로 보수정당에 합류 |
|||||||
▼ 문민정부 이후 | |||||||
동일시기 타정당: 진보정당(제1공-노태우) 진보정당(문민-이명박) 민주당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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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의 체질을 대대적으로 혁신하기로 하면서 로고가 변경됐다. 기존에는 당명까지 "통일한국당"으로 개칭할 예정이었으나, 당 안팎의 반발로
당 로고와 당 대표만 교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당 대표 자리에서 사실상 쫓겨난
김종필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2]
민주계는 중도~중도우파, 공화계는 우파, 민정계는 우파~극우로 분류된다.
[3]
동시에 당 총재직도 겸임.
[4]
1992년 8월 28일부터 9월 18일까지 명예총재직 역임.
[5]
1992년 8월 28일 당 총재 취임.
[6]
현재 국민의힘의 국회 내 회의실에 산업화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민주화의 상징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이 같이 걸려 있을 수 있게 된 시초가 된 정당이다. 민주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보수적인 군부세력과 보수+진보적인 민주화세력이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놓고 대립하는 구도였으나 민주화 이후 제6공화국 사회가 민간인 정치인들의 문민정권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는 가치와 이념 위주의 정치로 바뀌게 되었다.
[7]
보수주의 정당의 복지국가 전략:영국과 한국의 보수주의 복지정치
[8]
2024년 현재 국민의힘은 공식적으로는 자당 및 그 계열 정당 출신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3명만을 사진까지 걸어놓고 인정하고 있으며, 김영삼은 국민의힘 계열 정당 출신 대통령 중 유일하게 사망 시점까지 전직 대통령 예우를 제공받았다. 국민의힘 계열 다른 대통령은 전부 예우가 박탈당했고 공식적으로는 흑역사 취급 중이다. 그렇기에 김영삼이 만든 민주자유당은 국민의힘 입장에서 근본이 되는 정당으로 기릴 수밖에 없다.
[9]
20대, 30대 층에서는 지지율이 저조했다. 김영삼만 해도 1980년대 후반에는 당시 20대인 86세대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1992년 대선에서 20대에서 지지율이 겨우 20%대가 나왔을 정도로 지지율이 저조한 인물이 되었다. 또한 1990년대 당시의 40대 이상 층은 당대에 제3지대 정당을 지지했던 층까지 죄다 보수정당을 지지하게 되어서 보수 성향이 2/3 이상으로 고착화된 반면, 30대 이하 층은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기를 거쳐 민주당계 정당의 강력한 지지층이 되었다가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경합 우세를 차지하며 스윙보터화되었다.
[10]
하나회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서 창당되었던 정당으로 강경보수 성향
전두환의 파벌과 온건보수 성향
노태우의 파벌로 나눠졌는데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태우 파벌의 주도로 합당에 참여하였다.
민정계로 불린다.
[11]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박정희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김종필이 창당한 정당이다. 공화계로 불린다.
[12]
창당 당시의 양대 파벌 중 하나였던
동교동계가 탈당한 이후
상도동계만 남았던 정당이다.
[13]
다만
북방정책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민정계 중에서도 노태우 파벌은 냉전적 반공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14]
이에 반발하여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으로 합류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며, 그 중에서도 주로
통합민주당 출신들의 이탈이 두드러졌다.
[15]
대표적으로 민중당 대표였던
이우재, 사무총장이었던
이재오 등이 있었고 이외에도 노동운동계의 전설이었던
김문수나
차명진,
박형준 등도 이에 해당한다.
[16]
이러한 행보는
신한국당 시절에도 그대로 이어져
민주당계 정당으로부터 "극우와 극좌를 모두 영입하니 보수인지 진보인지 모르겠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17]
다만 전두환도 집권기때는 자기가 향락적인 성향을 지닌것도 있고해서, 교복자율화나 프로스포츠 출범, 에로영화 규제완화같은 문화적으로는 제법 리버럴한 정책을 펴기는 했었다. 물론 검열은 여전히 심했기 때문에 반쪽짜리이기는 했다.
[18]
1988년 당시에는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연간 3000시간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19]
해당 당가는 당명 개칭 이후인 신한국당의 당가이지만, 후렴구 부분을 제외하면 기존 민주자유당 당가와 동일하다.
[20]
127+59+35=221석이지만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장석화 의원과 신민주공화당
김현 의원이 참여하지 않았고 무소속
유한열,
정몽준 의원이 입당하며 최종 217석이 되었다.
[21]
실제로 84년도부터 민정당에서 자민당을 모델로 한 '
2000년대 장기 집권 계획'을 계획하기도 했다고. (
#)
[22]
실제로 당시 4당 합당이 성사되고 (후술한 대로) 민주당계 일부의 이탈과 무소속 의원 2인의 합류까지 완료됐다면 통합 신당 민주자유당은 국회 전체 299석 중 무려 287석(...)에 달하는, 일당우위를 넘어
일당제 수준인 사상 초유의 거대 여당이 될 수 있었다. 합당으로 독재 국가 만들기 만약 4당 합당이 현실이 된 뒤 계속 유지됐다면
대한민국은 옆나라
일본처럼 정말 1.5당 체제인 일당우위지배가 고착화되었을 수도 있다. 민주자유당과 자유민주당의 사이좋은 장기집권? 결과적으로 한국 정치의 역동성이 사실상 소멸하는 것은 물론, 군사정권 시절 '반독재'를 기치로 모였던
민주당계는
더불어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전성기는커녕 독자 세력화를 통한 집권조차 꿈꾸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23]
김현 의원은 이듬해인 1991년
통일민주당 탈당파 5인이 결성한
민주당에 합류했다. 당시 이 민주당은 '꼬마민주당'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24]
더구나 자유(보수) + 민주의 구도라는 점이 그렇다.
[25]
한국의 경우는 평민당, 일본의 경우는
일본사회당이 부상할 때 이루어졌다.
[26]
90년 2월 9일자 동아일보
[27]
당시 초대 총재 겸임. 첫 전당대회 날부터 실수로 민주자유당을 자유민주당이라고 불렀다... (90년 5월 12일자, 5월 7일자 동아일보, 1990년 5월 7일자 매일경제 참조)
[28]
사실 공화당, 민정당이야 그렇다 치고, 민자당의 정당사 5년은 최근의 정당사 가운데서는 '그나마' 나름 오래간 것이긴 사실이다. 또 그 반면으로
한나라당이나
자유민주연합이 1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심오한 뜻을 품은 당 의미도 아니었다.
[29]
1992년 당시 김영삼 후보의 선거 슬로건이 '신한국 창조'였다.
[30]
JP는 훗날 YS와 결별하고 DJ 측과 연합하면서 다시 내각제 개헌을 공동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하나, 약속은 또 지켜지지 않았다. 이건 사실 DJ 측도 내심 바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을 넘는 의석을 움켜쥐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31]
총선 직후 무소속 의원 영입으로 14대 국회가 개원할 때는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였다.
[32]
사실 자민당도 처음 선거인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 125석 가운데 고작 61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기는 했다. 다만 참의원에서 별개의 교섭단체인 추풍회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지지세를 굳히는데 성공, 장기 집권의 길을 열게 되었다.
[33]
새한국당 잔류파는 이종찬을 따라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34]
이들을 소위 신민주계로도 부른다.
[35]
이때는 아직 5.18 특별법 제정을 하겠다는 발표를 하기 전이었다.
[36]
현역 민자당 국회의원이었던
허삼수,
허화평도 구속되었다!
[37]
혹은 민정계 몰아내기
[38]
00년, 04년 총선에서도 계속 진행된 이런 '탈민정계' 흐름은 16대 국회에 당선된 소위 민정계 의원이 이상득, 박희태, 강재섭 등 소수였다는 것으로 잘 드러난다. 한편 공화계 역시 지역들의 표심 변화와 탄핵 역풍으로 쇠퇴하게 되어, 17대 국회에서 자민련은 4석의 소수당으로 전락한다.
[39]
이는 수도권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구경북에서 자민련과 민정계 축출에 의한 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준 영향이 크다. 관련 해프닝으로 방송 3사의 공동 조사에서
신한국당이 무려 175석을 얻는 걸로 나타났지만, 예측이 완전히 빗나가면서(실제 결과는 139석)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참고로 1995년 지방선거 때 MBC에서 예측 보도를 했는데, 이 때는 15개 광역단체장 당선자를 전부 맞혔다.)
[40]
그 다음 총선인
2000년 총선에선
새천년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된다는 예측이 등장했으나 이 역시 빗나가면서 출구조사 무용론이 나온다. 이후로도 총선 출구조사 결과는 번번히 망신을 당했고, 반면 대선이나 지방선거의 광역 결과는 매우 잘 맞추는 경향을 보면 표본의 크기 차이 문제라고 봐야한다.
[41]
김영삼이 민정계 색을 지우기 위해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듯이 역시 이회창 대선 후보가 김영삼 색을 지우기 위해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 임기말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는건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박근혜도 한나라당의 이름을
이명박 색을 지우기 위해
새누리당으로 변경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위기에 몰리자 새누리당도
자유한국당으로 개명했다.
[42]
형식은 신설 합당이지만, 실질은 흡수 합당으로 인식된다. 통합민주당의 거두
이기택이 2000년 총선 공천에서 바로 짤리기도 했다.
[43]
애초에 득표율부터가 30% 중반에서-40% 초반대로 생각외로 시너지 효과를 못냈고, 20대와 30대층으로부터 지지율이 별로 높지 않았다.
[44]
DJP 연합을 통해 여당 지위를 얻은 새천년민주당 역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분당과 하향세 등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다만 새천년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것에 비해 한나라당은 여전히 대형 정당으로 남았다는 차이점이 있다.
[45]
1990.5.9.~1992.5.18. 제13대 대통령 겸임
[46]
1992.5.19.~8.27. 제13대 대통령 겸임
[47]
1992.8.28.~12.18.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
1992.12.19.~1993.2.24. 제14대 대통령당선인 겸임
1993.2.25.~1995.2.6. 제14대 대통령 겸임 [48] 1995.2.7.~12.6. 제14대 대통령 겸임 [49] 김종필부터는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최고위원이 아니라 총재 단일지도체제 아래 속한 '대표위원'이다. 민자당이 창당될 당시에는 총재 아래 대표최고위원 1명(민주계 김영삼)과 각 계파별 최고위원 1명씩을(민정계 박태준, 공화계 김종필) 전당대회에서 선출하는 혼합형 지도체제였다. 그러나 19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정계를 대표하던 최고위원 박태준은 김영삼과의 갈등 끝에 탈당하고 만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민자당 당헌을 개정하여 최고위원제를 폐지하고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은 민주정의당과 똑같은 임명직 대표위원으로 격하시키는 지도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김종필은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에서 임명직 대표위원으로 입지가 약화되었다. [50] 1993년 4월 9일부터 1995년 1월 20일까지는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최고위원이 아니라 총재 단일지도체제 아래 속한 '대표위원'이었다. 그래도 김종필의 위상이 있기에 총재급 위상을 가진 대표로 김영삼 정부 초반에는 사실상 실세이자 2인자 정도로 어느정도 정권 지분과 행정부 내부의 영향력을 가졌다. [51] 과반수 확보(194석->149석)에 실패하여 패배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민주당도 크게 의석 수(75석->97석)를 늘린 건 아니고 오히려 제3당인 통일국민당이 선전했다. [52] JP계가 자유민주연합으로 빠져나갔다는 걸 감안하면 비교적 선전한 편이었지만 민주화 + 지방자치제 직후였기에 패배로서 여겨졌다. 특히 서울특별시장 선거 패배와 서울특별시 지역 구청장 선거에서 서초구청장, 강남구청장 제외한 23곳을 내준 것이 패배의 결정적인 증거이다. [53] 대표최고위원이었다가 총재로 변경 [54] 민주자유당 관련 전직대통령 중 그 예우를 사망 시점까지 정상적으로 제공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55] 김재광 국회부의장 [56] 청주-청원 통합 이전의 청원군. [57] 링크 [58] 프로필 [59]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D%9D%AC%ED%83%9C [60] 구상찬-위키백과 [61] 최불암과 동일인물이다. 정치 활동은 본명으로 했다.
1992.12.19.~1993.2.24. 제14대 대통령당선인 겸임
1993.2.25.~1995.2.6. 제14대 대통령 겸임 [48] 1995.2.7.~12.6. 제14대 대통령 겸임 [49] 김종필부터는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최고위원이 아니라 총재 단일지도체제 아래 속한 '대표위원'이다. 민자당이 창당될 당시에는 총재 아래 대표최고위원 1명(민주계 김영삼)과 각 계파별 최고위원 1명씩을(민정계 박태준, 공화계 김종필) 전당대회에서 선출하는 혼합형 지도체제였다. 그러나 19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정계를 대표하던 최고위원 박태준은 김영삼과의 갈등 끝에 탈당하고 만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민자당 당헌을 개정하여 최고위원제를 폐지하고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은 민주정의당과 똑같은 임명직 대표위원으로 격하시키는 지도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김종필은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에서 임명직 대표위원으로 입지가 약화되었다. [50] 1993년 4월 9일부터 1995년 1월 20일까지는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최고위원이 아니라 총재 단일지도체제 아래 속한 '대표위원'이었다. 그래도 김종필의 위상이 있기에 총재급 위상을 가진 대표로 김영삼 정부 초반에는 사실상 실세이자 2인자 정도로 어느정도 정권 지분과 행정부 내부의 영향력을 가졌다. [51] 과반수 확보(194석->149석)에 실패하여 패배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민주당도 크게 의석 수(75석->97석)를 늘린 건 아니고 오히려 제3당인 통일국민당이 선전했다. [52] JP계가 자유민주연합으로 빠져나갔다는 걸 감안하면 비교적 선전한 편이었지만 민주화 + 지방자치제 직후였기에 패배로서 여겨졌다. 특히 서울특별시장 선거 패배와 서울특별시 지역 구청장 선거에서 서초구청장, 강남구청장 제외한 23곳을 내준 것이 패배의 결정적인 증거이다. [53] 대표최고위원이었다가 총재로 변경 [54] 민주자유당 관련 전직대통령 중 그 예우를 사망 시점까지 정상적으로 제공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55] 김재광 국회부의장 [56] 청주-청원 통합 이전의 청원군. [57] 링크 [58] 프로필 [59]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D%9D%AC%ED%83%9C [60] 구상찬-위키백과 [61] 최불암과 동일인물이다. 정치 활동은 본명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