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 내 일본의 외교공관에 대한 내용은 주한일본대사관 문서 참고하십시오.
대한제국 내의 주요 외교공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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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일본공사관 [ruby(駐韓, ruby=ちゅうかん)][ruby(日本公使館, ruby=にっぽんこうしか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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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colbgcolor=#fff,#1F2023><colcolor=#b0313f,#ce4e5c>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6가길 6 | |
상급기관 | 일본 제국 외무성 | |
공사관 설치 | 1880년 | |
공사관 폐쇄 | 19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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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과 중구 예장동에 있었던 일본 제국의 옛 공사관이다.2. 역사
1876년(고종 13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일제는 4년 뒤인 1879년(고종 16년)에 조선에 공사관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대리공사로 임명한 뒤 조선에 파견했다. 당시 일본인은 한성 사대문안에서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부사는 돈의문 밖 천연동에 있는 경기중군영을 공사관으로 삼고 그곳에 입주했다. 경기중군영은 조선 후기 경기도 순영의 지휘관인 중군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에서 맑고(淸) 차가운 물(水)이 솟아난다 하여 '청수관(淸水館)'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1]반접관 홍우창이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청수관에 들어왔다고 보고하다
반접관(伴接官) 홍우창(洪祐昌)이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수행원 15인, 호위병 15명, 종자(從者) 4명이 오늘 신시(申時)에 관소(館所) 【청수관(淸水館)】 로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 고종실록》 16권, 고종 16년( 1879년 4월 24일(정묘) 1번째 기사 #
1년 뒤인 1880년(고종 17년) 11월에 하나부사가 정식 공사로 임명받으면서 청수관은 정식으로 공사관이 되었다. 이는 조선이 외국과 근대식 외교관계를 맺은 이래 처음 생긴 외교공관이었다.반접관(伴接官) 홍우창(洪祐昌)이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수행원 15인, 호위병 15명, 종자(從者) 4명이 오늘 신시(申時)에 관소(館所) 【청수관(淸水館)】 로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 고종실록》 16권, 고종 16년( 1879년 4월 24일(정묘) 1번째 기사 #
일본 판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와 수원들이 청수관에 들어오다
반접관(伴接官) 김홍집(金弘集)이, ‘일본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수원(隨員) 4인(人), 함장(艦長) 1인, 전어관(傳語官) 2인, 호위병(護衛兵) 22명, 순사(巡査) 10명, 종자(從者) 2명이 오늘 술시(戌時) 경에 청수관(淸水館)에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 1880년 11월 16일(경진) 1번째 기사 #
반접관(伴接官) 김홍집(金弘集)이, ‘일본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수원(隨員) 4인(人), 함장(艦長) 1인, 전어관(傳語官) 2인, 호위병(護衛兵) 22명, 순사(巡査) 10명, 종자(從者) 2명이 오늘 술시(戌時) 경에 청수관(淸水館)에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 1880년 11월 16일(경진) 1번째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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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임오군란 때 습격받는 일본공사관 | <colbgcolor=#fff,#1F2023> 불탄 일본공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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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교동 일본공사관 |
일제는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 및 피해 보상을 위해 조선과 《 한성조약》을 체결했고, 그 중 4조에 의거해 공사관 부지 및 건축비를 조선 측에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1885년(고종 22년) 1월 12일에 예장동으로 옮겼고 서양식 공관 공사를 시작했다. 그해부터 일본인들의 한성 거주가 허용되자 일본공사관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모여살았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정착한 곳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성을 쌓았던 곳이라 하여 '왜성대(倭城臺)' 혹은 '왜장대(倭將臺)'라 불렀다. 그리고 이 왜성대 일본공사관은 일제의 조선 침략 핵심 기지가 되었다. 1893년(고종 30년)에는 서양식 공관을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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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남산에 있었던 일본공사관 건물. 한국통감부 설치 이후 통감 관저로 바뀌었다. |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에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이곳에서 체결했다. 일주일 뒤인 8월 29일에 공식 발표를 하면서 조선왕조는 518년 역사를 끝으로 멸망했고, 조선은 1945년 8월 15일까지 34년 11개월 16일 동안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한국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개편되었으며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을 수탈하고 조선인을 탄압하는 식민통치기관으로 기능했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문서 참조.
8.15 광복 후 20년 뒤인 1965년에 대한민국과 일본은 외교관계를 재개했으며, 일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중학동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주한일본대사관 문서 참조.
2.1. 일제강점기 이후 건물 및 터의 역사
2.1.1. 청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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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일제강점기 청수관 자리에 들어선 향상회관[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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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현재 청수관 터[5] |
2.1.2. 구 통감관저
경술국치 이후 통감관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1939년 새 총독관저를 경복궁 옛 후원 자리(현재 청와대 자리)에 세운 뒤부터는 역대 통감과 총독들의 ‘업적’을 기리고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쓰였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시정기념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伊藤公)으로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8대 통감 총독들의 흉상이 놓여 있고 중앙의 테블- 그 위에는 벼룻집과 ‘잉크 스탠드’가 있고 좌우로 네 개의 의자와 한 개의 소파가 놓여 있다. ‘자, 이것으로서 완전히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임군을 섬기며 나아갈 길을 연 것이요’ 하며 ‘허허허…’ 하고 소리를 높여 웃는 옛 어른들의 환영이 눈앞에 움직이는 것 같다.
1940년 11월 22일 《 매일신보》 기사.
통감관저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었다. 1946년 4월에는 국립민족박물관이 들어섰고, 1950년에 국립민족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되면서 남산 분관으로 쓰였다. 1954년 6월에는 신설된 연합참모본부가 입주했고 국립박물관은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갔다.1940년 11월 22일 《 매일신보》 기사.
정부는 시내 중구 예장동에 있는 '연합참모본부 건물'을 개수 내지 증축해서 국무총리 관저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되어 있는바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합병조인을 하였던 구관은 건물이 낡았기 때문에 허물어 버리고 신관만을 개수 또는 증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1960년 9월 22일 《동아일보》 기사.
1960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통감관저를 국무총리 관저로 쓰려고 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져
중앙정보부가 생긴 이후 이 일대는 완전히 비밀스러운 공간이 되었고, 구 통감관저 건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혔다.1960년 9월 22일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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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통감관저 알림 표석 |
2016년 8월 29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통감관저 터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록, 피해기록, 일제 만행 기록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를 조성하여 개장했다. 대지의 눈[6], 세상의 배꼽[7]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를 기릴 수 있는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미술품을 만든 임옥상 작가가 2023년 6월 1심서 성추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자 9월에 철거했고, '세상의 배꼽'은 윤석남의 그림 및 서명이 새겨져 있다는 이유로 서울시여성가족재단에 보관되었다. # 이 조치가 논란이 되자 2024년 1월 서울시는 재조성 추진 계획을 마련하여 4월 15일부터 6월 17일까지 공모를 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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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통감관저 앞에 있던 하야시 곤스케 동상 | <colbgcolor=#fff,#1F2023> 잔디밭에 파묻힌 하야시 곤스케 동상 좌대의 판석 |
3. 주한일본공사관 기록물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유일 소장하고 있는 1894년부터 1910년까지의 주한일본공사관·통감부의 문서를 디지털화한 것으로 근대 한일관계사를 비롯한 국제 관계사, 정치사, 경제사 등 한국 근대사 연구의 기본적인 자료이다. 주한일본공사관·영사관과 일본 외무성, 각국 주재 일본 공사관·영사관과 일본 외무성 등이 주고받은 비밀 전보·공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본 경시청·헌병대의 비밀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명성황후 시해사건, 러일전쟁, 한일의정서·을사조약·한일신협약 체결, 고종의 강제 퇴위 관계, 안중근 의거, 국권 침탈 등에 관한 일본의 정책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내용이 매우 자세할 뿐 아니라 밀담이나 수정되기 이전의 초안들이 많아 정책의 집행 과정은 물론 수립 과정까지도 상세히 살펴 볼 수 있다. 이 기록에는 주한 일본 외교관들이 한국의 정치세력이나 열강의 동정에 대한 세밀한 정보를 첩보원을 통해 입수해 본국에 보고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모습도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소개글
주한일본공사관에서 본국 외무부에 송신한 기록물들은 대부분 국역되어 있다. 통감부에서 남긴 기록물들과 한데 묶여 있으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그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한말 당시의 일본의 행동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소개글
4. 역대 공사 (1880 ~ 1906)
이름 | 임기 시작일 | 임기 종료일 | 지위 | 비고 |
하나부사 요시모토 | 1880년 4월 17일 | 1882년 11월 6일 | 변리공사 |
1877년 ~ 1880년 조선차견 · 외무대서기관 겸 대리공사 |
다케조에 신이치로 | 1882년 11월 6일 | 1887년 8월 6일 | 변리공사 | |
곤도 마스키 | 1887년 8월 6일 | 1890년 12월 17일 | 대리공사 | |
가와키타 도시스케 | 1890년 12월 17일 | 1891년 3월 10일 | 대리공사 | 재임 중 사망 |
가지야마 데이스케 | 1891년 3월 24일 | 1892년 12월 16일 | 변리공사 | |
오오이시 마사미 | 1892년 12월 16일 | 1893년 7월 26일 | 변리공사 | |
오토리 게이스케 | 1893년 7월 26일 | 1894년 10월 15일 | 특명전권공사 | |
이노우에 가오루 | 1894년 10월 15일 | 1895년 8월 17일 | 특명전권공사 | |
미우라 고로 | 1895년 8월 17일 | 1895년 10월 17일 | 특명전권공사 | 을미사변 원흉 |
고무라 주타로 | 1895년 10월 17일 | 1896년 4월 8일 | 변리공사 | |
1896년 4월 8일 | 1896년 6월 11일 | 특명전권공사 | ||
하라 다카시 | 1896년 6월 11일 | 1897년 2월 23일 | 특명전권공사 | |
가토 마스오 | 1897년 2월 23일 | 1898년 11월 29일 | 변리공사 |
마지막 주조선일본공사 첫 주한일본공사 |
1898년 11월 29일 | 1899년 6월 1일 | 특명전권공사 | ||
하야시 곤스케 | 1899년 6월 1일 | 1906년 1월 31일 | 특명전권공사 |
최장 재임 마지막 주한일본공사 |
[1]
이괄의 난 당시 이괄군이 주둔하던 곳이기도 했다.
[2]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관훈동 일대.
[3]
한때 민중들의 방화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일본공사관에서 문서를 소각하다 불이 옮겨붙었다는 학설이 타당성을 얻고 있다.
[4]
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5]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
[6]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이 적혀있는 구조물.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란 문구가 상단에 있고, 그 옆에는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그림 〈끌려감〉이 조각되어 있다.
[7]
인위적으로 다듬은 큰 돌(배꼽을 형상화) 사방에 다듬지 않은 여러 돌들이 놓여있는 공간. 큰 돌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구절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총 4개 국어로 새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