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멸망전 吳滅亡戰 | 晉灭吳之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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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준에게 항복하는 손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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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279년 겨울 11월 ~ 280년 여름 4월 | |
장소 |
강릉, 도중, 강서, 횡강, 무창, 하구, 양양, 단양 우저, 판교, 서릉, 형문, 이도, 낙향, 뇌향, 강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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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사마염의 손오 정벌 결의. | |
교전국 | 서진 | 손오 |
군주 | 황제 사마염 | 황제 손호 |
지휘관 |
진남대장군
두예 익주자사 겸 용양장군 왕준 시중 겸 안동장군 왕혼 낭야왕 겸 진동대장군 사마주 건위장군 왕융 평남장군 호분 태위 겸 대도독 가충 |
승상군사
장제† 낙향독 손흠 ◎ 강릉독 오연† 서릉독(西陵督) 겸 진군장군 유헌† 정남장군 성거† 서릉감 정광† 단양감 성기 서릉독(徐陵督) 도준 유격장군 장상 의도태수 우충† 수군도독 육경† 이도감 육안† 상서시중 겸 독무창제군 우병 평형주사 손술 강하태수 유랑 장군 양옹 건평태수 오언 평서장군 시홍 도독 채기 ◎ 영수군독 종리순† |
참전장수 |
두예군 참군 번현 참군 윤림 참군 등규 양양 태수 주기 아문장군 주지 아문장군 관정 아문장군 오소 진남군사 유식 ━━━━━━━━━━ 왕준군 광무장군 겸 파동감군 당빈 낭중 하반 군사 장목 여남상 풍담 아문장군 장임 아문장군 이고 아문장군 마잠 아문장군 조명 아문장군 서조 도독 요현 도독 극견 ━━━━━━━━━━ 왕혼군 양주자사 주준 양주별가 하운 성양도위 장교 참군 진신 사마 손주 진오호군 이순 토오호군 장한 장군 장반 장군 설승 안동군사 유표 오강 ━━━━━━━━━━ 사마주군 낭야상 유홍 장사 왕항 ━━━━━━━━━━ 왕융군 건위참군 유교 참군 나상 ━━━━━━━━━━ 가충군 관군장군 양제 장하독 주륵 장사 등은 종사중랑 조거 ━━━━━━━━━━ 기타 아문장 장광 기독 기무현야 성양태수 석숭 예주자사 석감 |
장제군 호군[3] 손진† 부군사 제갈정 단양태수 심영† 유영 ━━━━━━━━━━ 기타 무릉감군 하막† 무위장군 주흥 ◎ 아문장군 공충 장군 유공 아문장군 맹태 손혁 역무장군 진대 평로장군 주명 |
병력 | 200,000여 명 | 90,000 ~100,000여 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지휘부 및 방어군 괴멸 |
결과 | 서진의 승리, 손오 멸망, 서진의 천하 통일 | |
영향 | 서진의 국정기조 상실 및 총체적 난맥으로 인한 국력 쇠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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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이 280년 손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전쟁으로, 중국 삼국시대의 종말이 되는 사건이다.2. 전쟁 발발전
2.1. 독발수기능의 난
263년 촉한이 위에 멸망당하고 불과 2년 후에 위마저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에게 제위를 선양하면서 멸망하여 서진이 건국되었다. 서진은 마지막 남은 오 정벌을 감행하려 했지만 오가 멸망당한 해는 280년으로 촉한 멸망 후로 무려 17년을 더 버텼다. 동맹인 촉한의 멸망으로 혼자 남았는데 이렇게 오래 버틴 이유는 서진 측에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진이 오랫동안 오 정벌을 미뤘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270년 옹주에서 일어난 독발수기능의 반란이었다.독발수기능은 수년 넘게 서진을 위협했을 만큼 강력한 군벌로 대두했고 이때문에 서진은 오를 토벌하려고 해도 독발수기능 때문에 장기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당장 독발수기능의 난이 끝나자마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고 봐도 분명하다. 즉, 한참 막장 테크트리를 타고 있던 손오보다 이민족의 난에 대한 대처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사마소와 등애가 촉한 정벌 기간 중 공통적으로 여기던 것이 바로 촉한을 멸하면 그 지역의 자원을 통해 3년 안에 오도 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등애는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한채 역적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으며 하필 사마소도 얼마안가 병사하니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진이 세워진 후에 이런 저런 정리 과정이 있었으므로 그걸 다 정리하고 3년간 촉의 자원을 이용한다치면 대충 270년 쯤에는 오나라를 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10여년간 지속된 독발 선비들의 난이 없었다면 오나라는 역사보다 더 일찍 무너졌을 것이다.
당장 당시 진왕이 되었던 사마소는 막 즉위한 손호에게 이런 협박을 하기도 했다.
(전략) 장차 전쟁을 멈추고 인자함을 일으켜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빌고자 편사에 명령을 내려
촉한을 평정하도록 하였는데 전역이 해를 넘기지도 않고 전군이 촉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 맹장과 모사, 조신과 뭇 선비들이 모두 하늘의 시기의 마땅함을 받들어 이미 정벌에 나선 군대로 적을 삼킨 기세에 힘입어 응당 깃발을 되돌려 동쪽을 향해 오나라의 국경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수군을 강에 띄워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며 육군은 남쪽으로 수레바퀴를 돌려 4군을 지나 성도의 기계와 파한의 곡식을 실어 나른 연후에 중군을 가지런히 하여 3방향에서 운집하면 12일도 채 되지 않아 강표를 평정하고 남하를 궤도에 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조는 촉을 정벌하던 원정을 심히 우려하여 비록 어지러움을 평정한 공로가 있지만 또한 촉의 백성들이 홀로 그 해를 당한 것을 슬퍼하니 면죽관에서 싸운 사람들 중에서 원수이하가 더불어 참륙당해 엎어진 시체가 땅을 덮고 피가 흘러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하나가 앞서 가도 뒤따라가는 유한을 참을 수 없거늘 하물며 다시 한번 뒤에서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군대를 돌리고 갑옷을 수습하며 남방과 더불어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고자 생각하였습니다. 무릇 힘과 세력을 헤아리고 물자와 험난함을 가늠하며 멀리 고대의 흥하고 폐하는 원리를 고찰하고 가까이 서촉의 안위의 효과를 거울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덕을 높이고 국조를 보전하며 위태로움을 피하고 순리에 따르는 것으로 자신을 굽혀 사해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인자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높은 경지요 위태로움을 밟고 구차하게 안전을 도모하며 덕을 무너뜨리고 국조를 뒤엎어 후세에 칭해지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거하는 바가 아닙니다. 지금 조정에서 서소, 손욱을 보내 편지를 드려 마음속의 생각을 밝히니 만약 편지가 면전에 도착하거든 반드시 약간이라도 의중에 남겨 전쟁하고자 한 생각을 돌리고 우호를 맺어 전쟁을 그치게 하여 더불어 한 집안이 된다면 은혜가 오회뿐만 아니라 중토에도 널리 퍼질 것이니 어찌 태평성대가 오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소(사마소)의 마음속의 거대한 소원인데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명을 얻을 수 없다면 천하가 모두 대동을 기대하니 비록 다시 한번 전쟁을 한다고 하여도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 될 것입니다.
다만 독발수기능이 이끄는 선비족의 침입 때문만으로 10~20년 가까이 오 정벌이 미뤄진 것은 아니다. 서촉 동란 - 강유, 종회의 난과 서진 건국으로 인한 내부의 혼란, 육항이 건재할 시기엔 그가 만든 방어진이 진의 침공을 적절하게 방어하고 있었고, 육항 사후엔 양호가 오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결정적으로는 사마염 본인이 의욕이 적었던 등의 요인도 크다. 그리고 서진 내부의 권력 암투와 양호를 견제하기 위한 가충 일파의 견제 역시 한 몫 했는데, 당시 정세상 오 정벌을 반대하기에 가장 적절한 핑계로 독발수기능의 난만한 것이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군사 행동 지연의 기저에는 황제 사마염의 후계 문제가 있었다. 사마염의 아들 사마충의 문제는 이미 조야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손오 정벌 3년 전에 사마염이 병환으로 정무에서 잠시 이탈했을 때 황제의 친동생이자 큰아버지 사마사의 가계에 입적된 혈육인 사마유에게 제위가 이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는데,[4] 양호와 두예도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으며 손오 정벌이 시작되면 황제로부터 가절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정벌에 반대하는 가충보다 사마유가 유력하다고 생각해 그에게 큰 공적이 될 손오 정벌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마염의 보기에는 가충은 사마충의 장인으로 후계자 교체에 미온적으로 보였지만, 그는 사마유의 장인이기도 했기에 말을 갈아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사마염은 자신이 병환으로 누워있을 무렵, 형성된 후계자 교체 여론을 가충이 막지 못한 것인지 방조한 것인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절을 받는 총사령관에 가충, 전선군 지휘관에 두예를 임명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가충은 큰 공로를 세워 이길 수 없는 것을 걱정해 상표했다.
지금은 군을 일으켜 오를 토벌할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늙어 오와의 싸움에 견딜 수 없습니다.
조명이 있었다.
그대가 가지 않으면, 내(사마염)가 간다.
상기 두 사람의 대화에서 총사령관 취임을 거부하는 가충이 사마염의 후사와 관련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가 사마충의 계승에 전력을 다하는 입장이라면 사마유가 배제된 원정군 지휘권을 거부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황제가 직접 출진할 경우 태자인 사마충이 수도의 통치권을 위임받지만, 이는 사마유와 그를 지지하는 귀족관료들에게 자연스럽게 통치권이 넘어가면서 후계자 교체 여론이 다시 일어날 확률이 너무 높았다.지금은 군을 일으켜 오를 토벌할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늙어 오와의 싸움에 견딜 수 없습니다.
조명이 있었다.
그대가 가지 않으면, 내(사마염)가 간다.
사마염의 절충안은 가충을 사마충의 장인으로서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황제는 수도를 계속 장악하고, 태자는 혹여 있을지 모를 원정실패의 책임에서 비켜갈 수가 있다. 즉, 사마유가 공을 세울 기회와 사마충에게 흠결이 될 상황을 철저히 봉쇄하는 수를 찾을 때까지 황제의 의지로 손오 원정을 연기하였다는 것. 사마충이 태자로서 직접 흠결있는 행위만 하지 않는다면 서진 정권의 특성상 후계자 교체 여론을 황제는 단호히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5][6]
진서 무제기에 의하면 오나라 침공을 개시한 것은 279년 11월, 마륭이 난을 진압한 것은 12월의 일이다. 오나라 침공 개시가 난의 진압 시점보다 앞서 있고, 이 말은 독발수기능보다는 서진 내부 정치 문제가 더 컸다는 뜻이다.[7]
2.2. 수군 육성
한편 270년대부터 익주에 머물던 익주자사 왕준은 예전에 등애가 제안한것처럼 익주에서 선박을 만들고 수군을 조련하고 있었다. 당시 촉인(蜀人)들은 사당인 산천신사에 소나무와 잣나무을 심었는데, 왕준은 그걸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며, 신사는 파괴하고, 신사에 심어져 있던 송백들을 가져다가 선박으로 제조했다. 또, 왕준의 부하 하반은 입산해서 선박 재료를 가져오는건, 거리가 수백리에 달해서 매우 어렵기 때문에, 촉 지역 민간인들의 무덤에 대량으로 심어둔 나무들을 4할만 시가로 구입하여 조달하도록 하였다.[8] 즉, 당대 파촉 지방에서는 사당·묘지 주변에다가 송백(松栢)을 심어서 가꾸는 풍속이 있었다는걸 알 수 있는데 서진에서는 파촉의 풍속 덕분에 동오를 공격할 때, 신사와 묘지를 털어서 목재 조달을 쉽게 할 수 있었다. 또한 산천신사는 예법이 아니라고 몰아서 쉽게 조달할 수 있었지만, 민간 묘지에서는 시가로 조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박으로 쓰일 수 있는 재료를 조달할 수 있는 거목이 심어져 있는 묘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촉 지역 토착호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아마도 호족들과는 지나친 마찰을 빚지 않으려고, 일부분만 시가로 쳐줘서 조달하는걸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9]또, 동오에서는 엄청난 수군 수요 때문에 목재의 부족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이미 손권 시기에 건업성 건축 때 목재 부족에 시달렸고, 무창성의 목재를 뜯어서 건업성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당대 건업(건강)은 목재가 비싸서 성벽을 제대로 축조하지 못했고, 남제 시기가 되어서야 성벽이 완성되었다. 이후 남조의 예를 봐도 남조에선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 백성들은 대나무와 띠풀로 집을 지어서 화재에 취약해졌다. 목재 가격 상승으로 관곽을 구하기 어려워, 벽돌판으로 묘를 만드는 전실묘가 나타났다. 관을 만들 목재를 구하기 어려우니, 국가에서 관곽을 만들 목재를 하사하기도 했다. 목재 부족을 해소하려고, 절동 지역의 목재를 개발하여 운반해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장강을 지켜낼 함대 유지에는 지속적인 벌목이 필요했다. 후대의 기록으로 봐서 당대 선박의 수명 연한은 5년~7년으로 추산되며, 이는 함대 유지에 지속적인 벌목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된다. 기본적으로 오나라를 비롯한 남조는 장강 인근을 방어선으로 삼아 수군으로 국경을 방비했기에 꾸준이 지속적인 막대한 목재의 수급이 필요했으며 일단 조위와 서진의 수군이 손오를 기존까지는 압도하지 못했던 만큼 기본적으로는 평소에 유지하는 일정 규모 함대 이상으로 필요가 없으니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함대를 더 증설하기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촉한을 정벌하며 익주의 풍부한 삼림자원을 일거에 얻은 서진 수군이 목재 수급에 애를 먹던 손오 수군보다 내외적인 요건이 맞아 장강에서 물량으로 우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여러모로 서진 수군이 기존 조위의 수군보다 수준이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기존에 손오 측이 우위를 가진 경험으로 쌓은 뛰어난 수군 운용력을 물량으로 이길수 있는 규모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설상가상으로 왕준이 272~3년부터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배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강을 타고 흘러내리는 나뭇가루를 보고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오나라 사령관 오언은 손호에게 군사 증강(아마도 수군)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여러모로 하늘이 준 이때야 말로 서진이 천하통일을 할 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따라서 왕준이 하루 빨리 오나라 정벌을 속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문제로 인한 것이기도 했다. 왕준은 손호가 갑자기 죽어서 현명한 군주로 바뀌고 문신과 무관들이 각자의 자리를 얻으면 강적이 되며, 자신이 배를 만든 지 7년인데 날마다 배가 낡아 썩어가고 있으며 또한 본인의 나이가 이미 70인지라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데 3가지 중에 한 가지가 어긋나도 도모하기 어려우니 진실로 원하건대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즉 시간이 지나 오나라 정권이 바뀌며 오랜기간 수군을 운영한 이들의 경험을 한시에 살릴 수 있게 되어 수군을 다시 증강하고 서진의 수군과 대등하게 맞서거나, 수군을 육성한 왕준 본인이 죽거나, 배가 썩어버리거나 하면 서진이 아무리 파촉의 풍부한 목재를 순간적으로 손에 넣었다고 한들, 지속해서 익주민들의 종교적인 감정을 건드리면서 목재를 끊임없이 수급하는 일은 쉬운게 아니었던 것이다. 즉 서진 역시 한번에 많이 확보한 목재로 만든 배가 썩기 전에, 오나라 수군의 노하우를 그들이 다시 되살리기 전에,빠르게 정벌을 시작하여 단기간에 오나라 정벌을 이룰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2.3. 양호와 육항
촉 멸망 후에도 오에는 정봉과 육항, 주적이라는 당대 최고의 명장들이 아직 버티고 있었다. 비록 촉 멸망 후에 오 황제 손휴가 충격으로 병사하고 그 뒤를 폭군 손호가 잇긴 했지만, 오는 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체급을 가진 나라였으며 넓은 강을 끼고 있다는 이점 때문에 공략이 매우 어려웠다.그렇지만 오도 형주나 합비등으로 여러번 진출을 시도했지만 별 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으며, 서진 건국 후에도 몇 차례 교전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육항이 잘 막아냈고 양호도 육항의 지용을 크게 평가했다.
사실 장료와 만총이 너무 쩔어줘서 잘 모르는 사실인데 합비와 건업 사이의 강은 위/진이나 오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장료, 만총의 맹활약으로 인해 사람들이 합비가 무조건 위나라가 강한 곳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공격하는 쪽이 불리한 지형이며, 이후 조휴가 합비로 오나라를 공격할 때마다 서성에게 막혀 분통을 터뜨리다 사망했다. 조진과 하후상은 반장에게 패했고 조비가 친정을 가서도 서성이 가짜 성벽을 만들어 조비를 공포에 떨게 했다. 여기서 공격작전을 해서 성공한 유일한 장수가 감녕 하나뿐이었으니[10] 어느쪽으로도 철옹성이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벌어지는 전투는 거의 대부분 수비군의 승리로 끝났다.
2.4. 손호의 폭정
하지만 육항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는 망국을 맞이하기 전부터 사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궁지쟁과 손준, 손침 형제의 집권기의 내분으로 인해 중요 인재들이 죽고 내부가 무너지기 시작한 이래 초대 황제 손권의 아들들 중에 살아남은 인물은 없었다. 6남이자 3대 황제인 손휴마저 죽고 그 뒤를 이은 게 하필 이궁지쟁으로 희생된 손화의 아들 손호였다. 유선은 난세를 헤쳐나갈 군주로서 능력이 부족하고 놀기 좋아했으나 적어도 학정이나 가렴주구를 일삼은 폭군은 아니었고, 아직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해서든, 마음속으로든 옛 조국이 망한 걸 한탄할 정도로 촉한에 충성하는 신하들도 많이 있었다.그런데 손호는 유선보다 한술 더 떠서 자신에게 간언하는 신하들을 죽이고 사치를 일삼았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손호가 나중에 오나라가 멸망한 것은 자신의 부덕이라며 여러차례 한탄한 기록들을 보건대 손호는 내부적으로는 숙청정치를 펼쳐 손량 이후 무너졌다가 손휴에 의해 재건되기 시작한 오나라의 황권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려고 노력했고 황실을 화려하게 꾸며 그 권위를 높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신료들을 죽이거나 무리하게 서진에 대한 공세를 폈지만 이런 시도는 손호 본인의 자질이 부족했던 관계로 성공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270년대 육항의 죽음을 전후로 손오의 신하들이 서진으로 도망가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서진에서도 오의 내부 상황을 주시하고 정벌 타이밍을 계속 잡으려 했지만 앞서 말했던 이민족, 정치 문제 때문에 미루고 있었다.
2.5. 곽마의 반란
한편 오나라에서는 손호의 폭정이 이어지는 와중인 279년에 손호가 교주, 광주의 호구를 조사해 조세를 거둬들이고 백성을 징집하려 하자 곽마가 이에 반발해 하전, 왕족, 오술, 은홍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광주, 남해, 창오, 시흥 등을 함락하고 관리들을 죽였으며, 이에 손호가 등수에게 1만 명, 도준에게 7천 명의 군사를 주어 곽마를 토벌하게 했고 도황에게는 수하의 사람들을 포함해 합포, 울림 등 여러 군에서 병사들을 인솔해 동, 서의 군대가 함께 곽마를 공격하게 했다.3. 전쟁 발발
3.1. 정벌 감행
그러다 오에서 육항이 죽자 양호는 기회는 지금이라며 황제 사마염에게 오 정벌을 주청했지만 가충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양호는 살아서 오 정벌을 보지못한 채 눈을 감게되었는데, 죽기 전에 자신의 후임으로 두예를 추천했다. 279년 왕준이 사마염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오 정벌을 할 것을 주장한 상소를 올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힘들다고 했다.- 손호가 폭정을 저지르고 있으니, 손호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세워지면 강력한 적이 된다
- 자신은 정벌 준비를 위해 배를 7년이나 만들었는데, 이대로 가면 배가 그대로 썩는다
- 자신의 나이가 70이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에 사마염이 오 정벌을 하기로 결심했지만 왕혼으로부터 손호가 북쪽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논의해 다음 해에 출병하기로 하는데, 하반이 손호는 나오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지금 상황을 이용해 기습하면 될 것이라 상주했다. 두예도 표문을 올려 지나치게 보고를 듣다가 큰 계책을 버리고 적을 놓아주어 걱정거리가 생기면 안되며, 다음 해를 기다린다면 하늘과 사람의 일은 항상 같을 수 없고 더욱 어려워질 수 있기에 스스로 훗날의 걱정을 끼치면 안된다고 상주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회답이 없자 두예는 다시 상소를 올려 양호가 비밀리에 폐하와 계획을 시행하려 한 것은 일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비교해 하는 것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크고 실패하더라도 공로만 세우지 못할 뿐이며, 만약 중지하면 손호가 두려워서 살아날 계책으로 준비하게 되면 다음 해에 시행해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사마염이 장화와 바둑을 두고 있을 때 두예의 상소가 도달하자 장화가 바둑판을 밀어넣으면서 폐하의 나라의 군사는 강력하고 부유하지만 손호는 폭정을 저질러 현명한 사람을 주살하니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사마염은 오 정벌을 허락했다. 가충, 순욱, 풍담이 오 정벌을 반대하였으나 사마염이 크게 화를 내자 가충이 사죄했다.
겨울 11월에 오 정벌을 위한 군사를 크게 일으켜 진군장군 겸 낭야왕인 사마주는 도중, 안동장군 왕혼은 강서, 건위장군 왕융은 무창, 평남장군 호분은 하구, 진남대장군 두예는 강릉으로 나아가고 익주자사 겸 용양장군 왕준과 파동감군 당빈은 파촉에서 나아가게 했다. 왕준은 출발할 때 자신의 시중을 드는 아문장군 이연이 말 타기를 다투자 참수해 장수들이 숙연해졌다.
동쪽과 서쪽의 군대가 20여만 명이었고 가충은 사지절, 가황월, 대도독으로 삼고 관군장군인 양제를 부장으로 삼았으며, 가충이 오 정벌은 이롭지 못하다면서 스스로 늙어 원수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자 사마염은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자신이 가겠다고 하자 가충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중군을 거느리고 양양에 주둔해 여러 군대를 통제하고 조절했다.
3.2. 여섯 방향으로 진군
두예가 강릉, 왕준이 서릉으로 향하고 왕혼이 횡강을 나왔고 호분은 하구로 나아갔으며, 사마주는 낭야상 유홍을 시켜 장강에 이르러 오나라의 새수를 바치게 했다. 또 장사 왕항을 시켜 장강을 건너 변경 지역을 지키던 수비병들을 공격해 도독인 채기를 사로잡았고 이 때 참수하거나 항복받은 자가 5, 6만을 헤아렸다.왕융은 참군인 나상, 유교에게 선봉을 맡겨 무창으로 진격했으며, 오의 장군 양옹, 무창독 손술, 강하태수 유랑, 상서시중 겸 독무창제군 우병 등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왕융에게 항복했고 두예, 왕혼 등은 오나라 주둔지인 진과 초소인 수를 공격해 가는 곳마다 승리했다.
진나라 측에서는 건업으로 직접 쳐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지역으로 공격루트를 정했고 이 여섯 방향 모두 형주 또는 옛 촉한 지역에서 출발해 뚫고 들어가는 루트로만 구성되어 있다.
3.3. 파촉에서 장강을 돌파하다
진나라에서 오를 공격하기 전에 건평태수 오언이 진나라의 촉 지역에서 배를 만드는 것을 깨닫고 방비하는 병력을 늘리자고 건의했지만, 손호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오언은 장강에 쇠사슬과 쇠말뚝을 이용한 진을 설치했다.장강에는 모래 사장 요충지에 나란히 쇠사슬로 강을 가로 질러 뱃길을 끊어놓으면서 길이가 1장이 넘는 쇠막대기를 강 가운데 몰래 설치해놓고 전선을 맞이해 막게 했는데, 왕준이 사방으로 100보가 되는 큰 뗏목을 수십 개 만들어 풀을 묶어서 사람처럼 만들어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게 하고는 물을 잘 아는 사람에게 뗏목을 타고 먼저 가게 해서 쇠말뚝에 부딪치게 해 쇠말뚝이 뗏목에 붙어서 내려가게 했다.
또 길이가 백여 장이고 크기가 수십 아름인 커다란 횃불을 만들어 참기름을 부어서 배의 앞에 달아놓고 쇠사슬에 부딪혀 여기에 불을 붙여 태우니, 쇠사슬이 녹아서 끊어지자 배가 나아가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11]
왕준은 장강을 돌파해 2월 1일에 당빈과 함께 단양감 성기를 격파했고, 3일에는 서릉에서 무창감 겸 진남장군인 유헌, 의도태수 우충, 서릉감 정광, 정남장군 성거를 죽였다. 5일에는 형문, 이도에서 승리해 이도감 육안을 죽이고 8일에는 악향을 공격해 편장군 겸 중하독 육경을 죽였으며, 평서장군 시홍이 왕준에게 항복했다.
진나라가 침공하기 전에 종리순이 신릉에 성을 쌓아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이전의 오나라의 장수들이 이 곳에 성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진군이 신릉성을 세웠고 종리순은 진군의 공격에 맞서다가 전사했다.
3.4. 파죽지세
두예의 명령으로 휘하의 아문장인 주지, 관정, 오소 등에게 명령하고 800명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밤 중에 장강을 건너 낙향을 습격하면서 기치를 많이 걸어두고 파산에 불을 놓도록 했다.그러자 낙향독 손흠이 두려워해 강릉독 오연에게 북쪽에서 내려온 여러 군사들이 장강을 날아서 건넌 것 같다고 전했으며, 주지 등이 군사를 낙향성 밖에 매복시켜두고 손흠이 군사를 파견해 왕준을 막으려 했지만 대패하고 돌아갔다. 주지 등이 매복한 군사를 움직여 손흠의 군사를 뒤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자 이를 알지 못한 손흠은 곧바로 진나라의 군사들이 손흠의 장막으로 가서 손흠을 사로잡혔으며, 왕준이 먼저 위에 손흠의 머리를 얻었다고 보고했다가 두예가 살아있는 손흠을 보내자 낙양의 사람들이 이를 큰 웃음거리로 여겼다.
이어서 강릉으로 진격하고 승리해 17일에 강릉독 오연을 참수하고 원강, 상강의 남쪽으로 내려가자 교주와 광주에 인접한 군에서는 풍문을 듣고 인수를 보내 항복했으며, 이 때 참수되거나 사로잡힌 자로 오의 도독과 감군이 14명, 아문장이나 군수는 120여 명이었다.
18일에 사마염이 조서를 통해 왕준, 당빈이 파구를 평정했으니 호분, 왕융과 함께 하구, 무창을 평정해 물길을 따라 멀리 내려가 말릉으로 곧바로 전진하게 했으며, 두예에게는 형주 남쪽을 평정하고 군사를 나누어 왕준, 당빈에게 보태고 가충은 군사를 이동시켜 항현에 주둔하게 했다.
주변에서 '군사들이 남방의 풍토에 익숙지 않고 지리가 험하니 시일을 기다렸다 공격하자'고 건의하자 두예는 지금 군사들의 기세는 대나무를 쪼개는 것처럼 급하고 빠른 성세이니 오히려 속공을 펼 때라고 답하고 즉시 군사를 몰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계책을 알려주어 지름길로 건업으로 가게 했다.
3.5. 오군이 우저에서 진군과 맞서다
왕융이 대군을 통솔해 장강에 이르면서 오의 아문장인 맹태를 이기고 기춘, 주 2개의 현을 함락하고 호분은 하구를 나아가 강안을 함락했다. 횡강에서 나온 왕혼은 참군 진신, 성양도위 장교를 보내 심양의 뇌향을 함락했으며, 이어서 오의 아문장 공충을 공격해 전멸시켰고 오의 무위장군 주흥 등 5명을 포로로 사로잡았고 진오호군 이순에게 고망성을 지키게 했다. 왕혼은 이어서 오의 장군 유공을 격파해 사로잡거나 참수한 자가 많았고 오의 역무장군 진대, 평로장군 주명 등이 왕혼에게 항복했다.오나라의 주군인 손호가 왕혼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승상 장제를 시켜 무리 3만 명을 이끌고 호군 손진, 부군사 제갈정을 인솔해 장강을 건너 맞아서 싸우게 했는데, 오군이 우저에 도착해 단양태수 심영이 이 곳에 군사들을 모아두고 오기를 기다렸다가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제가 오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누구나 다 알 것이고 촉 지역에 있던 군대가 이 곳에 도착하면 많은 무리들이 마음으로 놀라워 두려워 정돈되지 못할 것을 걱정해 따르지 않았다.
왕혼은 오군이 성양으로 향하는 것을 알고 왕혼은 사마 손주, 양주자사 주준, 성양도위 장교 등을 보냈으며, 3월에 장제 등이 장강을 건너 왕혼의 부장인 성양도위 장교를 양하에서 포위하자 장교를 포함한 7천 명이 항복했다. 제갈정이 이들을 모두 죽이려 했지만 장제가 반대하자 제갈정은 이들이 거짓 항복임을 간파해 진언했지만 장제가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장제는 토오호군 장한, 양주자사 주준과 서로 대치하자 심영이 단양병 5천 명을 이끌고 여러 번 수비진을 함락하고 진나라의 군대를 세 번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로 인해 심영이 퇴각하면서 무리들이 혼란에 빠지자 진나라의 장군인 설승, 장반이 혼란한 틈을 타 오군을 공격하면서 오나라의 군사들이 무너졌으며, 거짓 항복을 했던 장교는 뒤에서 오나라의 군대를 공격해 판교에서 격파했다. 제갈정이 수백 명을 인솔해 숨어서 도망치다가 장제를 보고 달아날 것을 권고했지만 장제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제갈정은 달아나고 진나라 군사들의 공격으로 장제, 손진, 심영 등이 전사해 7천 8백여 명이 참수되자 오나라 사람들은 왕혼의 무력에 크게 떨었다.
장제의 오군을 격파하고 양주별가 하운이 주준에게 빨리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곧바로 건업을 향할 것을 권하자 주준이 왕혼에게 이를 이야기해 건업으로 향할 것을 권했지만 왕혼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4. 오나라의 멸망
사마염이 처음에 조서를 내려 왕준에게 건평으로 내려가서 두예의 통제를 받았다가 건업에 도착해서는 왕혼의 통제를 받게 했는데, 두예가 강릉에 도착해 여러 장수들에게 만약 왕준이 건평을 탈취하면 물길을 따라 멀리까지 달려가게 되어 위엄있는 이름이 이미 나타나게 되니 자신에게 통제받지 않게 할 것이고 만약 공략하지 못한다면 명령이 시행될 수 없을 것이라 했다.손호가 유격장상 장상에게 수군 만 명을 이끌고 왕준을 막게 했지만 장상은 진나라의 깃발을 보자마자 항복했으며, 3월 9일, 오나라 조정에서는 수백 명의 관리들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손호에게 잠혼을 죽일 것을 요청했다. 손호는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들의 요구에 따랐다. 손호는 당연히 그 놈으로 백성에게 사죄할 것이라 말했을 뿐이지만 그 무리들은 '예!'라고 대답하면서 나란히 일어나 잠혼을 잡았으며, 손호가 계속해서 그만두기를 말했지만 무리들이 이미 잠혼을 도륙했다.
서릉독 도준이 1년 전에 교주에서 일어난 곽마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 7천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다가 진나라의 군사가 공격한 소식으로 인해 무창에 주둔했다가 3월 11일에 건업에 돌아왔다. 도준이 수군 상황에 대해 물어본 후에 촉의 배는 모두 작다면서 2만 명의 병사를 얻어 큰 배를 타고 싸운다면 그들을 격침시킬 수 있다고 했으며, 손호가 병사들을 모아 도준에게 이끌고 가게 했지만 다음날 도준이 출발하기도 전에 병사들이 모두 달아났다. 사실 이전부터에 오나라의 군대는 각지에서 패사를 면치 못했고 승상 장제가 이끄는 중앙군조차도 도준이 복귀하기 전에 이미 괴멸했으니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오나라의 멸망은 막을 수 없는 상황에 가까웠기에 병사들이 저항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도준이 좀 더 일찍 도착했다면 몰라도 대세가 기울었던 것이다. 이에 손호는 외삼촌 하식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도준의 표를 얻어보니 말하길 무창 이서(형주)는 더불어 다시 수비하지 못한다하는데 수비하지 못하는 것은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성이 견고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병사와 장군들이 전투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탄식했다.
왕준이 서릉에 이르자 두예가 편지를 보내 이미 서쪽의 울타리를 부쉈으니 건업을 함락시키라고 하자 왕준은 기뻐했고 강의 흐름에 따라 삼산에 이르렀다. 왕혼은 아직도 군대를 주둔시키고 전진하지 못하고 있어서 왕준에게 편지를 보내 잠시 들러 일에 관해 논의하자고 했지만 왕준은 돛을 펴고 지나가면서 바람이 이로우니 정박할 수 없다고 보고하면서 건업으로 향했다.
이 때 사마주, 왕혼 등이 모두 오나라 변방 근처까지 도달했고 제갈정, 손혁 등이 사마주에게 항복했으며, 오나라의 사도인 하식, 건위장군 손안 등이 인신과 부절을 왕혼에게 보내 투항 의사를 전달했다. 손호가 광록훈 설영, 중서령 호충의 진언에 따라 태상 장기 등을 시켜 왕준, 사마주, 왕혼에게 각기 사자를 파견해 항복 편지를 전했는데, 15일 건업에 왕준이 8만 명을 이끌고 가장 먼저 도착했다.
손호는 석두성에서 망국의 예법을 갖춰 백마가 이끄는 흰 수레에 피부를 들어내고 스스로를 결박하고서 입에는 옥을 머금고 양을 끌었다. 대부들은 상복을 입고 관리들은 관을 실은 수레를 끌며 태자인 손근(孫瑾)과 손근의 동생인 노왕 손건(孫虔) 등 21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군문에 당도하였다. 왕준은 친히 결박을 풀어주고 옥을 받아들고 관을 불태웠으며 초청해 만났다. 도적(圖籍)을 거둬들이고 창고를 봉인했는데 군중에서 사사로이 취한 것이 없었다.
왕준이 거두어들인 지도와 호적이 4개 주, 43개 군, 313현, 52만 3천 호, 관리 3만 2천, 군사 23만, 남녀 호구 230만이었으며, 미곡은 280만 곡, 선박은 5천여 척, 후궁 5천여 명이었다.
5. 추후 부흥 시도
오나라의 관료들은 대부분 항복해서 진나라의 관리를 지냈고 손호의 폭정으로 쫓겨나거나 실망해 물러났던 이들은 양주자사 주준을 통해 등용되었으며, 석위, 제갈정, 범평, 진훈처럼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다가 여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었다. 282년에 오나라의 옛 장수였던 완공과 백봉이 군사를 일으켜 건업을 공격하고 양주를 포위했는데, 진나라의 서주자사인 혜희에게 토벌되어 오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그러나 이렇게 진 무제(武帝) 태강(太康) 3년에 오를 평정한 후에도, 강남 동요엔 "국축육(局縮肉), 수횡목(數橫目), 중국은 마땅히 패망할 것이며, 오나라가 마땅히 돌아올 것이다." 또 "궁문의 기둥(건업궁의 기둥)이여, 결코 썩지 마십시오, 오나라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이는 30년 후입니다."라고 했다.[12] 또 "닭이 울면 날개를 치지 않으니(서로 돕지 않으니), 오나라가 돌아오는 것은 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흘러퍼졌다. 당시 오나라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손씨의 자손"이라고 일컬었고, 때문에 연이어서 반란을 일으켰다. '횡목'의 네 글자는 오나라가 망한 후부터 원제가 흥한 지 사십 년을 가리키는 말로 진나라 원제가 강동에서 흥한 것은 모두 동요의 말과 같았다. 동진이 세워지고 진나라 원제는 마음이 약해져서, 북인을 뜻하는 '국축육(局縮肉)'인 자들은 배척했다.
이는 진서 오행지, 송서 오행지에 나오는 기록으로 오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손씨의 후예들과 옛 오나라인들은 진나라 정권에 계속 저항했다. 이 때문에 사마염은 촉인들은 얌전한데 오인들은 통일 이후에도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저항이 심하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동진 이후로 오나라의 토착 오성 귀족들을 강남 남조 정권에서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런 민심의 여파 때문이었다.
6. 후일담
손오가 멸망하는 순간 손오는 4개 주(양주, 형주, 교주, 예주), 가구 52만 3,000호, 인구 230만 명, 병력 23만 명, 관리 32,000명, 식량 280만 섬, 배 5,000척, 궁녀 5,000명의 규모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유력자에게 복속된 인구 혹은 유랑민이 많았기 때문에 실제 인구는 위나 촉과 마찬가지로 최소 몇 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3]촉한멸망전때 만큼은 아니지만 손오 정벌과 관련된 인사들의 결과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주요 인물들의 포상 내역을 보면, 적극적으로 정벌을 주장하였고 이를 완수한 두예는 「춘추좌전」 해설서 집필이 마지막 행적이 되었고,[14] 일선 지휘관 중 공이 큰 왕준은 대장군 직함을 받았지만 운신의 폭이 좁아졌으며,[15] 사마염에게 손오 정벌을 설득해낸 장화는 도독유주제군사가 되어 잠시 수도를 떠났으나 사마염이 죽고 사마충이 즉위했을 때 중앙정부로 돌아와 황후 가남풍의 총애를 받다가 가남풍이 사마륜에게 숙청당할 때 본인도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사마유를 지지한 인물들은 힘을 잃은 반면, 원정에 끝까지 부정적이었던 사마충의 장인 가충을 공신에 포함을 시킨 조치에 대해 와타나베 요시히로 교수는 황제 사마염의 직계 혈육에게 후사를 넘기기 위한 편파성이 있었음을 주장한다.[16]
오 멸망 후 손호는 낙양으로 끌려가 4년 후에 사망했고 손호의 후궁 5천여 명은 사마염이 거둬들여 자신의 후궁에 넣는 등 사치와 향락을 벌였다. 그리고 서진도 통일한지 얼마 안 되어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이라는 중국사 최대의 국가 막장 테크를 밟고 멸망하면서 중국은 삼국시대보다 더한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사마씨 정권은 오나라의 중심지인 강남으로 옮겨 명맥을 이었는데, 오나라가 세운 탄탄한 기반이 동진 중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당장 오나라 수도 건업이었던 동진의 수도 건강을 두고 왕도가 왕자(王者)의 땅이라고 평한 것도 이런 이유이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동진을 살린 주요 공신들 가운데 강남을 평정해 그 공이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도간은 오나라의 유민이었다. 사실 장강 유역과 그 남쪽지역들은 화북평야가 뻥 뚫린 화북에 비해 산악지대가 많아서 평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단순 인구수는 많아도 그 포텐셜을 발휘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실제로 파촉을 제외하고라도 강남만을 통일한 사례는 손오와 동진 단 둘 뿐여서 남중국사에서 주유와 도간 둘은 그 평가가 강남에서 중국을 통일한 주원장 그 다음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동진은 그 기반과 중흥공신을 오나라에서 얻은 셈이다.[17]
7. 평가
손침을 제거한 것 빼고는 손휴 정권은 딱히 잘한 게 없었고 촉이 위에게 항복했을 때인 264년에 손휴는 죽는다. 이 위급 상황에 황제에 등극한 것이 20대 초반이던 손호로 예전 황태자였던
손화의 아들이다. 손호는 오나라에 힘을 북돋아 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손호는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들 어떠랴. 어찌됐던 간에 긴 관점에서 보면 어차피 진나라에 질 터였다.
일반적으로 손호를 부도덕적이고 강압적인 군주라 비난받는데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몇 개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많은 부분이 망국의 군주는 부도덕하며 마땅히 망할만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손호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잔혹하거나 성급한 행동은 나오기 마련이다.
보다시피 창립자인 조조, 유비, 손권 이후 매우 적은 숫자의 후계자만이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나라의 정부가 좀 더 생기있고 중앙 집권적이었다면 260년대의 재앙에 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나라 조정의 혼란은 국가 자체가 근본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며 창립자 이후 어떤 군주라도 실권을 갖기는 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
이런 내부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나라가 오랜 기간 동안 독립을 지킨 이유가 있는데 바로 협곡부터 바다까지 길게 나있는 장강이다. 당시 군사력으로는 이 장강을 뚫고 내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긴 어려웠다.
(중략)
...그렇기에 당시 전투에서는 수비측이 극도로 유리했으며, 적이 약점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다가 적이 내보인 취약점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합리적인 전술이 되었다. 기다렸다가, 약점을 파악하고, 공격한다는 프로그램은 빠른 판단력과 용기가 필요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수비측에 유리했다. 군령장 같은 것을 쓰고 온 것이 아닌 이상 조금 정도의 후퇴는 복구 가능했고, 준비 잘 된 수비벽을 뚫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기에 공격자는 언제든지 균형을 잃고 무너질 수 있었다.
이 이론은 수군에도 적용 가능하다. 앞서 말했듯 적벽에서의 패배 이후 조조는 강릉과 강릉 수군을 잃었다. 이 때문에 위의 수군은 한수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고 이 길은 늪과 습지대를 지나야 했고 측면공격에도 취약했다. 한수를 제외하면 위나라에게 장강으로 통하는 길은 없었고, 조비가 장강 하류에서 도하를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이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강변에 구축된 진지가 없기에 배는 언제나 회수에서 운하나 육로수송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이것만으로는 오나라의 수군에 상대가 안 됐다. 강릉, 무창, 유수구 그리고 건업에 있는 수비군은 필요한 곳 어디든지 지원을 갈 수 있었고 오나라 손에 수군이 있는 한 북쪽에서의 공격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당연하게도 오나라 역시 장강을 벗어나 땅을 얻는데 실패했으며, 합비와 수춘의 방어선을 결국 뚫지 못하고 장강과 회수 사이는 양측의 습격과 파괴로 무인지대가 되어 버린다. 인구와 확장의 측면에서 이 오랜 대치는 오에 불리하게 작용했고 마지막에 촉이 항복하자 위는 상류로부터 수많은 수군을 보내 오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의 평가 #
일반적으로 손호를 부도덕적이고 강압적인 군주라 비난받는데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몇 개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많은 부분이 망국의 군주는 부도덕하며 마땅히 망할만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손호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잔혹하거나 성급한 행동은 나오기 마련이다.
보다시피 창립자인 조조, 유비, 손권 이후 매우 적은 숫자의 후계자만이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나라의 정부가 좀 더 생기있고 중앙 집권적이었다면 260년대의 재앙에 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나라 조정의 혼란은 국가 자체가 근본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며 창립자 이후 어떤 군주라도 실권을 갖기는 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
이런 내부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나라가 오랜 기간 동안 독립을 지킨 이유가 있는데 바로 협곡부터 바다까지 길게 나있는 장강이다. 당시 군사력으로는 이 장강을 뚫고 내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긴 어려웠다.
(중략)
...그렇기에 당시 전투에서는 수비측이 극도로 유리했으며, 적이 약점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다가 적이 내보인 취약점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합리적인 전술이 되었다. 기다렸다가, 약점을 파악하고, 공격한다는 프로그램은 빠른 판단력과 용기가 필요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수비측에 유리했다. 군령장 같은 것을 쓰고 온 것이 아닌 이상 조금 정도의 후퇴는 복구 가능했고, 준비 잘 된 수비벽을 뚫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기에 공격자는 언제든지 균형을 잃고 무너질 수 있었다.
이 이론은 수군에도 적용 가능하다. 앞서 말했듯 적벽에서의 패배 이후 조조는 강릉과 강릉 수군을 잃었다. 이 때문에 위의 수군은 한수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고 이 길은 늪과 습지대를 지나야 했고 측면공격에도 취약했다. 한수를 제외하면 위나라에게 장강으로 통하는 길은 없었고, 조비가 장강 하류에서 도하를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이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강변에 구축된 진지가 없기에 배는 언제나 회수에서 운하나 육로수송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이것만으로는 오나라의 수군에 상대가 안 됐다. 강릉, 무창, 유수구 그리고 건업에 있는 수비군은 필요한 곳 어디든지 지원을 갈 수 있었고 오나라 손에 수군이 있는 한 북쪽에서의 공격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당연하게도 오나라 역시 장강을 벗어나 땅을 얻는데 실패했으며, 합비와 수춘의 방어선을 결국 뚫지 못하고 장강과 회수 사이는 양측의 습격과 파괴로 무인지대가 되어 버린다. 인구와 확장의 측면에서 이 오랜 대치는 오에 불리하게 작용했고 마지막에 촉이 항복하자 위는 상류로부터 수많은 수군을 보내 오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의 평가 #
만약 손호가 폭정을 펼치지 않았으면 이보다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하는 시각[18]도 있는데, 17년을 버티긴 했지만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결국 오도 멸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촉한이 존속한 상황이면 몰라도 촉한이 망한 순간 이미 세력균형은 서진으로 쏠려버렸고 게다가 오(吳)의 군사력이 감당하기엔 전선이 너무 넓어졌다. 촉한이 망한 순간 위진은 오나라를 공략할 고속도로를 얻었다. 가뜩이나 양번이 서진 영토라 육지로 남군과 이어져 있어서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파촉까지 넘어갔으니 오나라의 형주는 서쪽과 북쪽의 적을 모두 막아야하는 형국이었다. 괜히 등애가 촉한 멸망 직후에 수년 후에 손오마저 정복할 수 있다고 한 게 아니다. 이때 손오는 아직 손휴 치세였고, 육항, 시적, 정봉 등 유능한 상장들이 생존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19] 다만, 등애나 왕준 모두 의견을 개진한 시점이 고령의 나이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즉, 자신의 생전에 직접 천하통일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70세 즈음으로 추측되는 등애나 70대인 왕준이 해당 주장을 하는 시기를 넘겨버리면 군에 종사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상황이므로 오를 정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설득력이 높은 근거를 뒷받침하는 것이 당연하다. 종합하자면 촉을 점령함으로써 오나라는 이전보다 더 취약해졌던 상황(손휴 역시 오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죽었다.)이었고, 왕준의 주장은 지금 오가 어지러울 때 무너뜨릴 수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끌면 기껏 오나라를 공격한다고 준비했던 것들이 망가지니 미룰 이유가 없다는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다만 손호의 실책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육항이 죽을 때 촉이 망하는 바람에 서릉(=이릉)을 방비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면서 군사를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손호는 듣지 않았고, 왕준의 계략에 넘어가 서릉 방면 담당자를 변경하는 등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오언이 왕준이 배를 준비하는 것을 눈치채고 군사 보강을 청했을 때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진서 무제기를 보면 진나라로 투항하는 장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20] 그리고 이 중에는 종실인 손씨들도 여럿 있었다. 이는 내부 정치의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수들이 전사하며 치열하게 투쟁한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한 것이 오나라의 멸망이다. 오 멸망전은 서진의 대오전선 군비확충 > 물량에 압살되기 시작 > 최전방 관리자들 패사 > 정예 총동원해 벌인 대회전 패배 > 대세가 기울자 투항 & 귀부 & 도주 > 새수 반납 등 침략전 성공의 정석을 밟아가면서 단계적으로 시행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오나라도 만만치 않게 저항했다. 두예의 파죽지세로만 기억되는 오나라의 멸망전이지만 사마주가 오군 5~6만명을 전투 끝에 참수하거나 항복시켰다는 기록,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 장제가 이끄는 3만명이 불리한 상황에서 일대 회전을 벌여 일부 진군의 항복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패했다는 기록, 장강 중류의 핵심 방어거점인 강릉의 군대가 두예에게 저항하다가 격파되었다는 기록, 곽마의 난으로 수만명의 군대가 난을 진압하기 위해 싸우러가서 병력이 분산되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이렇게 오군은 각지에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열세를 뒤엎진 못했다.
이 전쟁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형( 육안, 육경)을 잃었으며 본인도 포로 신세가 된 육기는 오멸망전을 두고 자신의 저서 변망론에서 '손호 치세 초기엔 자신의 아버지 육항을 비롯한 뛰어난 신하들이 보좌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죽고 이들의 공백을 미쳐 채우지 못했던 시기에 진이 처들어와 오가 망한 것이지 촉이 망해서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오나라에 여러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는 위기를 막아낼 능력이 있는 장군들과 신하들이 존재했었고 오가 망하는 그때는 마침 그럼 사람들이 없었던 것일 뿐이다.'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육기는 아버지 육항의 시대와 오멸망전을 동시에 겪은 세대인 만큼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오나라의 지휘관들을 비교할 수 있었던 입장이라 이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21][22] 역시 오나라의 장수였던 오언 역시 '손호는 영명한 군주였고 뛰어난 신하들이 그를 도왔으나 대세를 역전시키는 데는 실패했을 뿐'이라고 사마염 앞에서 술회한 것을 보면 당대 오의 패장들 입장에선 불과 몇년 전 선대에 비해 오가 멸망할 당시엔 좋은 장수가 많이 없었고, 열심히 싸웠지만 상황이 중과부적이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을 완수한 서진은 통일과 거의 동시에 기강이 헤이해졌고, 20여년 후, 팔왕의 난에서 사마씨 본인들끼리 싸우며 국력을 낭비하는 한편, 매년 일어나는 홍수, 우박, 지진 등 자연재해,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군 덕에 마침내 이민족에게 2명의 황제가 죽는 치욕을 겪게 된다. 또한 서진 말에는 북방 이민족과 청주에서 들고 일어난 왕미 말고도 형주, 양주 일대에서는 두도, 진민 같은 반란군이 활동했는데 이는 사마예, 왕도, 왕돈, 도간 등의 활약으로 진압하며 진 황실은 오나라 손씨가 발전시킨 강동에 의지하여 버텨나가게 된다.
동진은 옛 오나라와 비교했을 때, 회남을 소유하고 있었고 북방에서 전란을 피해 내려오는 유민들로 인해 군대와 인민도 그보다는 더 많은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오나라 손씨정권이 낙후된 강남을 80여년간 열심히 개발했기에 동진은 그 기반 위에서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세력구도가 6:2:1로 평가되는 삼국 시대 위:오:촉한 구도와는 달리, 동진은 적어도 3 정도는 되었고 6이라 할 수 있는 화북 지역은 조씨의 위나라가 화북을 통일했을 때와 달리 오랫동안 통합이 어려운 상태였던 것도 동진 이래 남조가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어주었다.
8. 기타 창작물에서
삼국지연의에서 마지막화 1화에서만 잠깐 다루고 마는 사건이라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국가인 촉이 멸망한 촉한멸망전보다는 관심을 덜 받는다. 그럼에도 삼국시대 최후의 전투이자 대단원을 다루는 전투이기에 삼국지 시리즈 등의 게임에서도 가끔 이 전투를 다룰때가 있다.삼국지 6에서는 전술 시뮬레이션 모드 사마의편에서 오 토벌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플레이어는 진나라군을 조작해 오나라군을 격파해야 하는 것으로 나왔다.
삼국지 14 오평정전 손호 클리어(점수 스코어 C) |
서진에는 오나라를 멸망시킨 장군들이 26명 포진되어 있는데 두예, 왕준, 왕혼, 주지 같은 능력치가 뛰어난 장군들이 많고 승리하기 위해 함락시켜야 할 도시가 건업뿐이라 크게 유리하다. 반면 오나라 최후를 다루는 시나리오답게 여기서 등장하는 오나라 장수 18명의 열전을 보면 거의 다 오멸망전에서 패사했다거나 최후까지 저항하다 항복했다는 기록들만 있을 정도로 암울하며 도황, 오언, 심영 정도 외에는 믿을만한 장군들이 부족하기에 맞서싸우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오나라는 승리하기 위해선 진나라보다 더 많은 도시들을 함락시켜야 하고 가장 능력치가 좋은 도황은 본래 역사상 오멸망전에서는 참여하지 않은 장군이라 이벤트를 통해 나중에야 지원을 온다. 때문에 오 입장에서 이 전기제패를 B 이상을 받고 클리어하는건 사실상의 엔드 콘텐츠로 분류될 정도로 매우 어렵다.
[1]
진멸오지전
[2]
결박을 짓는 것이 아니라 풀어주는 모습이다. 뒤에서 관을 불태우는 모습 역시 관례적인 항복 절차이다.
[3]
진서 왕혼전에서는 대장군
[4]
아버지 사마소부터 큰아버지인 사마사의 뒤를 맡게 된 전례, 사마소 본인도 생전 "이 천하는 형님의 천하"라고 천명하며 작은 아들인 사마유를 사마사의 대를 이어가도록 했고, 재능과 인품 또한 형인 사마염을 압도해서 조비/조식를 버금갈만한 후계다툼이 있었고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겨우겨우 제위에 오른 과거가 있어서 결코 사마염 입장에서는 간단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5]
후한 이후 수립한 정권들은 각각 화덕(촉한), 토덕(조위), 금덕(손오) 등과 같은 오행사상과 신비한 천문 현상을 정통성의 근거로 삼았지만, 서진은 특이하게 황제 즉위를 정당화하는 예언서나 창업군주의 신격화없이 공자가 저술 및 편찬하였다는 오경(五經)을 정당성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학자로서 사마 가문의 높은 위상 덕분에 가능한 근거였다.
[6]
당시 유학은 종교적 색채가 매우 강하여 공자는 메시아, 오경은 절대적 율법이자 예언서로 치환할 수 있다. 게다가 공자의 저서 어디에도 후계자가 심각한 지적 장애가 있을 경우, 교체해도 된다는 문구는 없었기에 사마염이 적장자상속을 주장하면 서진 정권의 귀족관료들은 사마충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참고로 유학에서 종교색이 완화되기 시작한 것은 송대 주희의 성리학 이후이다.
[7]
다만 독발수기능의 세력은
사마준에 의해 크게 약화되었고, 마륭에게 주어진 군사는 불과 3,000 명의 정예병뿐이었다. 그러나 이 병력만으로 마륭은 난을 완전히 진압할 수 있었으니 이는 서진이 오나라를 정벌 할 수 있을 정도로 독발수기능의 세가 크게 약화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8]
화양국지의 기록.
[9]
후일 남조가 익주지방을 다시 정벌하면서 수세적이었던 이전보다 더 공세적으로 수군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던것도 이런 연유로 보인다. '
목재는 (나라살림에) 중요하므로 나무를 심으면 이득이 열배'라는
관자의 말처럼 산림자원 보존과 조림의 필요성은 전근대에도 분명히 있었으나 전근대엔 항상 인구가 늘어날수록 목재 수요가 공급을 초월하므로 이게 잘 지켜지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파촉에서는 사당이나 무덤 주변에다가 꾸준히 조림하는 관습이 있어서, 양질 목재를 꾸준히 만들어주니까 그걸 가져다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0]
감녕도 100인 결사대로 실질적인 군공은 못 올리고 위나라에게 겁만 줬다.
[11]
사서는 이렇게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나무의 무게에 못이겨 끊어졌을 것이다.
[12]
참고로 태강 3년 기준 30년 후는 영가 7년인데 영가라는 말에서 보듯 영가의 난 시기다. 심지어 312년에는 서진에 황제가 없었는데 311년에 서진 황제 사마치가 항복하고 313년에 서진의 마지막 황제인 사마업이 즉위한다. 이후로는 사마예가 건업에서 진나라의 여명을 이어간다.
[13]
고대에는 세금 거둘 목적으로 호구를 파악하기 때문에, 세금을 기대할 수 없는 가구는 애초에 통계 자체를 내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평소
후한의 인구가 6,000만명 이었다가 위촉오 삼국 정립 후 갑자기 1,000만명도 안 나오는 현상은 진짜로 인구가 이렇게 줄어든 게 아니라, 유력자에게 복속되거나 유랑민이 되는 인구가 많아서 수천만 명이나 통계에서 빠진 것이다. 그리고 서진도 막장일로를 달리다가 이후 혼란 끝에 망하고 수백년간 혼란기가 지속되면서 인구 규모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 건 당나라 때부터나 가능했다.
[14]
평화로운 말년을 보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큰 공을 세우고 곧장 정계은퇴를 한 것은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다.
[15]
원정기간 사이가 벌어진 왕혼을 두려워 했다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의 취약함을 보여준다.
[16]
최소한 손오 원정 3년 전 무렵부터, 병석에서 일어난 사마염은 사마충에게 후사를 넘기기로 결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17]
또 다른 주요 공신인
감탁은 감녕의 증손자고
우담은 우번의 손자였다. 이런 오나라 유민, 유신들의 활약은 강남의 토착귀족인 교성이 남조 주요 지배층으로 도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8]
왕준이 오나라 정벌을 주장할 때 의견 중에 손호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세워지면 강력한 적이 된다고 말한 바가 있다.
[19]
거기다 손휴가 죽을 것을 감안하고 저 말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게 손휴는 고작 30세에 들어간 젊은 황제였으며, 손호가 황제가 된 것도 손휴 사후 복양흥의 결단 때문이지 원래는 손휴의 아들이 태자로 있었다.
[20]
가장 유명한게
보천의 배신으로, 육항이 아직까지 살아있어 신속하게 진압되었기에 망정이지 그가 죽은 뒤였으면...
[21]
확실히 오멸망전 시기에 동오는 이전까지 동오 최고의 명장들이었던 육항, 시적, 정봉에 버금가는 인재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22]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서진 쪽에서도 인정한 사실인데, 서진의 명장
양호 또한
육항이 살아 있을 시절에는 공격할 생각을 접고 대치하는 것으로 응하다 육항이 죽고 나서야 동오 정벌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