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20:28:05

제갈탄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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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의 사공(司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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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三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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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탄(諸葛誕)
諸葛誕
제갈탄
파일:제갈탄.jpg
시호 성후(成侯)
작위 조위 산양정후(山陽亭侯) → 고평후(高平侯)
손오 수춘후(壽春侯)
최종직위 조위 사공(司空)
손오 좌도호(左都護) 겸 가절(加節) 겸 대사도(大司徒) 겸 표기장군(驃騎將軍) 겸 청주목(靑州牧)
성씨 제갈(諸葛)
(誕)
공휴(公休)
생몰기간 ?년 ~ 258년 4월 10일
고향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사공 재임기간 257년 4월 24일 ~ 257년 5월 7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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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나라을 얻었고, 오나라을 얻었으며, 위나라를 얻었다.[2] - 세설신어
진계유(陳繼儒)[3]가 말하기를 "공명은 기산(祈山)에서 사마의를 막고, 공휴는 수춘에서 사마소를 쳤으니, 그 충간의거(忠肝義擧)가 제갈량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세 제갈씨를 말한다면 제갈량이 상등이고, 제갈탄이 그 다음이며 제갈근이 또 그 다음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공휴를 위하여 변무(辯誣)했다고 할 만하다. - 안정복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 겸 장군으로 자는 공휴(公休).

서주 낭야국 양도현 사람으로 제갈량의 친척이다.[4]

2. 나이

제갈탄의 나이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지인들이나 자식들을 통해 추정할 수는 있다.
  • 제갈탄은 제갈근(174년생), 제갈량(181년생)과 같은 항렬의 동생(족제)이었다. 따라서 태어난 시기의 상한선은 181년 이후다.
  • 하후현, 등양, 하안 등과 친했다. 등양의 출생시기는 불분명하나 하안은 196년 이전 출생이다. 하후현은 209년생이고 20세가 되던 해(228년)에 산기황문시랑이 되면서 조정에 출사했다.
  • 후한 시기에 출사한 기록은 없으나, 조비(220~226) 시기인 224년 무렵 상서랑이라는 관직을 역임하고 있었다.[5] 적어도 조비가 재위할 때는 성인이였으며, 조정에 출사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 딸인 제갈태비와 혼인한 사위 사마주 227년에 출생한 인물이다. 사마주와 제갈태비의 장남 사마근이 256년생인 점을 보면 제갈태비와 사마주는 240년대 말~255년 이전에 혼인했을 것이다. 또다른 사위인 왕릉의 아들 왕광은 251년 사망 당시 40여세였다고 한다.[6]
  • 막내아들 제갈정이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236년생)과 소꿉친구였다.

요약하자면 제갈탄은 대략 200년경 출생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아무리 늦어도 204년 이전 사이에 태어났으며 빠르게 잡아도 190년대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3. 정사 삼국지

3.1. 조비 시대

정사 삼국지에서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하후현, 등양 등과 교류하면서 이른바 '사총팔달'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을 얻으며 관직에 임용되었다고 한다. 애시당초 이 시절에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 적대 세력에 종사하는게 한두번도 아니고.[7]

문제 조비 대에 상서랑을 지낼 때, 두예의 조부인 두기와 더불어 조비가 탈 배를 시험하다 강풍으로 전복되어 둘 다 물에 빠졌는데, 호분 직책을 하고 있던 자가 제갈탄을 구하려고 하자 제갈탄은 제발 두기부터 구하라고 소리쳤지만 두기는 결국 익사하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강기슭에 표류해 살아남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3.2. 조예 시대

조예는 이처럼 명성 높은 이들을 매우 싫어하여 "명성이란 병풍에 그린 떡과 같으니 실속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고, 중서랑 노육을 시켜 관리의 성적을 평가해 임용하는 제도를 만들게 했다. 이런 연고로 면직당했다. 세어에 따르면 당시의 준걸인 산기상시 하후현, 상서 제갈탄, 등양이 무리를 지어, 서로를 품평하며 글을 쓰곤 하였는데, 이에 하후현의 부류 네명을 사총(四聰)이라 하였으며, 제갈탄 등 여덟명 모두를 팔달(八達)이라 하였다. 중서감 유방의 아들 유희, 손자의 아들 손밀, 이부상서 위진의 아들 위열의 삼인 모두 하후현, 제갈탄 등에게 견줄 바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세력를 받아들여, 삼예(三豫)라 하였다. 이들은 총 15인(十五)이었다. 조예는 이들이 겉만 화려할 뿐(浮華)이라 여겼으며 모두 관직으로부터 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게하였다.

3.3. 조방 시대

조예 사후 조상이 정권을 잡자 친하던 하후현과 등양이 득세해 정시 초년 다시 어사중승, 상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뒤에 양주자사가 되어 소무장군까지 올랐고, 조상 일파가 실각하는 와중에도 사마의는 그를 계속 기용해서 왕릉 토벌할 때 진동장군에 산양정후의 작위까지 받고 가절도독양주제군사(假節都督揚州諸軍事)하고, 산양정후(山陽亭侯)로 봉했다. 또한 사마씨 집안과도 인척 관계를 맺어 사마의의 아들 사마주에게 딸 제갈태비를 시집보냈고, 막내아들 제갈정은 훗날 진 무제가 된 사마염과 어려서 서로 친하게 지냈다.[8]

252년 3월에는 오나라의 주이가 공격하자 격파해 3만 여명을 죽였다고 하며, 12월에 제갈각(諸葛恪)이 동관(東關)에서 병사를 일으켰을 때, 제갈탄을 파견하여 군사들을 지휘하여 토벌하러 가도록 했다. 그는 적과 싸워서 패하고 돌아왔으므로 진남장군(鎮南將軍)으로 전임되었다. 이는 사마사가 정권을 잡아 오나라의 동흥을 공략하려 하자 호준과 함께 나아가 싸웠으나 제갈각이 펼친 기습작전으로 패해 관구검과 자리를 맞바꾸는 형식으로 벼슬이 깎여 진남장군 예주도독을 맡은 것이다.

사실상 같은 지위에서 자리만 바꾼 것이고 동생 사마소의 작위를 깎은것 외엔 처벌하지 않겠다고 한 사마사의 말대로 처벌 같지 않은 처벌이었지만 말이다.

3.4. 조모 시대

255년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 손잡고 사마사에게 반기를 들자 제갈탄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예주의 관리와 백성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제갈탄은 사자를 베고 천하에 공포하여 사람들이 관구검과 문흠의 흉악한 음모를 알도록 했다. 대장군 사마사는 동쪽 정벌에 오르면서 제갈탄으로 하여금 예주의 군대를 지휘하여 안풍진(安風津)을 건너 그 제압에 앞장서 근거지였던 수춘을 빼앗았다. 수춘에 있던 10만여 명의 백성은 관구검과 문흠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모두 성문을 부수고 나와 산과 연못으로 흩어져 떠돌았으며, 간혹 오나라로 흩어 도주해 들어가기도 했다.

제갈탄은 회남에서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그 공으로 진동대장군, 의동삼사가 되어 다시 양주도독을 맡았다. 256년 겨울, 이 혼란을 틈타 오의 손준이 쳐들어 오는 것도 격퇴해 좌장군 유찬을 베어 그 머리를 수도로 보내고 그의 관인과 부절을 손에 넣었다. 승진하여 고평후(高平侯)로 봉해졌으며, 식읍 3천5백 호를 받았고,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전임되었다. 256년 겨울, 오(吳)나라 적이 서알(徐堨)로 향하려고 했다. 조정에서는 제갈탄이 지휘하는 병사와 말로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고 계산하였는데, 제갈탄은 또 10만 명의 병사를 요청하여 수춘을 지키고, 또 회수에 임하여 성을 쌓아서 침략에 대비하기를 원했다. 마음속으로는 회남을 지키려고 했다. 조정에서는 제갈탄이 의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살펴 알고 있었지만 선제 이래의 오래된 신하라는 점을 고려하여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여 처리하려고 했다.

3.5. 제갈탄의 난과 최후

전에 친하게 지내던 하후현, 등양 등이 조상과 가까운 사이라 이들을 제거한 사마씨 일족을 늘 두려워한 나머지 양주 일대에서 민심을 모으며 근거를 확보하려 했으며,[9] 이 낌새를 눈치챈 사마소는 후환을 제거할 생각으로 심복 가충을 파견해 소환령을 전했다.

세어에 따르면 사마소가 이미 조정을 장악했을 무렵, 장사 가충은 이로써 참좌를 마땅히 보내어 사정장군들을 위로해야 한다 하였는데, 사마소는 이를 올바르게 여겨서 가충을 수춘으로 보냈다. 가충은 돌아와 사마소에게 말하길 "제갈탄이 양주에 주둔하여 위명이 있으니 백성들은 제갈탄에게 의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소환한다면 필히 돌아오지 않고 반란을 미숙하게 일으켜 화가 적을테지만 불러오지 않는다면 반란이 지체되어 화가 더욱 클 것입니다." 가충의 조언을 들은 사마소는 제갈탄을 사공으로 삼았다.

제갈탄전에 인용된 《위말전》에 따르면 가충이 선양 얘기로 제갈탄을 떠보자 제갈탄은 얼굴색을 바꾸고 "경은 가예주( 가규)의 아들이 아니오? 위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나라를 저버리고 황실을 다른 사람에 줄 수 있겠소? 듣고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위 황실에 목숨을 바치겠소."라고 대답했다. 가충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257년 5월, 조정에서 제갈탄에게 사공 직책을 준다고 불렀으나 두려움을 느낀 그는 사마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데, 양주자사 악침을 급습해 죽이고 수춘에 주둔하며, 제갈정과 부하인 장사 오강로 보내 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제갈탄은 회남과 회북에서 둔전하고 있던 십수만의 병사와 양주에서 새로 4~5만의 정병을 모으고 1년분의 식량을 비축한 후 성문을 닫고 수비에 임했다.

위군이 수춘을 포위하자 수차례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으며, 오의 원군도 패배하자 해를 넘겨 제갈탄과 문흠의 포위망 공격도 실패했다. 포위망이 지속되고 군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투항자가 속출했고, 문흠과 향후의 전략에 대해 의견 차이가 생기자 결국 문흠까지 죽였다.[10] 그 때문에 문앙, 문호 형제까지 위군에 투항했고 사마소는 이를 이용해 그들에게 벼슬을 준 뒤 수십기를 이끌고 성 주변을 돌면서 심리전을 펴게 했다. 제갈탄 측의 사기는 이를 계기로 급락해 기회를 틈탄 위군이 맹공을 퍼부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제갈탄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싸웠으나 이내 호분이 이끄는 군세에 궤멸당하면서 전사했다.

제갈탄의 삼족은 멸족당했으며[11], 참수된 머리는 낙양에 보내졌다. 오로 건너간 아들 제갈정은 그대로 눌러앉아 오가 망할 때까지 장수로 지냈으나 서진 건국 이후 훗날 오까지 진에게 멸망당하자(...) 사마염은 제갈정을 불러 시중에 임명하려 했으나, 제갈정은 끝내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서 여생을 마쳤다.[12]

4. 평가

위진 교체기를 서술할 때 복잡한 존재 중 하나. 왕위 찬탈의사를 내비치며 떠보는 가충에게 발끈한 기록이 있다. 그런가하면 위말전에는 황제 조모를 협박한(...) 기록도 있다.
양주자사 악침은 오로지 속일 뿐이며, 신과 오나라가 내통한다 유세하여, 또 이르기를 조서를 받아 마땅히 신의 자리(臣位)를 대신해야 한다 하였는데, 날이 지나갈수록 버릇없습니다. 신은 나라의 명령을 받들어, 자립하여 죽더라도, 이단으로 끝마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악침의 불충에 분하여, 오로지 보병과 기병 7백명을 거느려서 이달의 6일에 악침을 토벌하니, 바로 그 날에 그의 머리를 베어, 머리를 담은 상자를 역마를 통해 전송하옵니다. 이와 같이 성조(聖朝)의 명신(明臣)으로써, 신은 곧 위(魏)의 신하입니다. 명신이 아니라면, 신은 곧 오의 신하입니다.

배송지는 위말전의 제갈탄이 악침을 죽인 후 그의 수급을 조정에 보낸 표를 보고 위말전이 전하는 모든 것이 비루하다 생각하며 제갈탄이 표(表)에서 말하는 바가 곡해되었으리라 의심되며,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하후현, 등양과 친했지만 사마의 사돈에 관구검, 문흠의 난 때까진 사마씨 정권에 협력하는 등, 사마씨에 붙어 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반란을 일으킨 모습은 충신같기도 하나 오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진의가 의심스럽다.

일단 제갈탄은 그 본인이 사마의의 사돈이지만 세설신어에 따르면 왕릉의 사돈이기도 하고, 게다가 하후현, 등양 등과도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사마씨/반 사마씨 모두에게 라인이 열린 친목왕이었다는 것. 따라서 고평릉 사변 이후 양 세력간의 대립이 수면으로 떠오르던 시점에서 분명히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 터이다.

헌데 이후 그의 행동은 분명히 사마씨 라인을 선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왕릉의 난 당시에도 사마의는 스스로 출병하는 한편 그에게 진동장군 직을 내리며 경계를 강화했고, 관구검-문흠의 난 당시에는 협조를 요청하는 그들의 사자를 베고 스스로 난의 진압에 앞장서 수춘을 함락시킨 인물이 바로 제갈탄 본인이었다. 어쩌면 양 쪽 모두에 선이 닿아 있었던 탓에,이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도 모른다.(다만, 관구검/ 문흠과는 애초에 사이가 안좋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기껏 지금까지 사마씨의 사냥개(狗) 노릇 잘해서 살아남아 놓고 왜 막판에 와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 평가가 매우 갈리고 동흥전투 관련 기록은 한진춘추라는 한 사서 내에서 기록이 상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의외로 앞뒤가 맞는다. 사마의 사돈과 사마씨 정권에 일시적으로도 협력했다는 것, 오나라의 힘을 빌리려 했다는 것을 종합해보면 제갈탄은 근본적인 조위의 근왕파였고 사마씨에 원한은 있지만 힘이 없었기에 참아야만 할 수밖에 없어서 사마씨 정권에 일시적으로나마 협력했고, 오나라를 끌어들인 것은 자기 힘으로 근본적인 원한을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오나라의 도움을 빌리려는 시도를 했다고 해석하면 희한하게 앞뒤가 제대로 맞는다. 요약하자면 박살은 내고 싶은데 힘이 없어서 고분고분하는 흉내를 내야 했던 것. 자치통감도 이런 관점에서 제갈탄의 행동동기를 설명한다.

세설신어는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 셋을 일컬어 '촉은 용을 얻고, 오는 범을 얻었으며 위는 개를 얻었다'라고 평한다. 셋 중에서는 역량이 가장 못한 인물로 받아들어진다. 그럼에도 당대 위나 오에서 명망이 드높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개'라는 표현은 멸칭이 아니라 '공이 있는 자'로 해석될 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때문에 세설신어의 평은 부당하며 제갈탄의 공이 제갈근보다도 높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후대에는 있다. 제갈각, 제갈첨과 가까운 세대인데 굳이 제갈량, 제갈근과 비교했다는 사실도, 제갈탄의 명성에 대한 증거로 볼 수도 있다.
제갈탄 수하에 있던 수백 명은 투항하지 않은 죄를 지었으므로 참수당하게 되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
“제갈공(諸葛公)을 위해 죽으니 여한이 없다.”
제갈탄이 인심을 얻은 것은 이와 같았다. - 삼국지 <위서> 제갈탄전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그를 따르던 군사 수백이 항복을 택하지 않고 모두 죽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순사한 전횡의 빈객들에 견주는 평가가 동시대에 나올 만큼 인망은 높았다고 보인다. 판단과 처신이 좋았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세설신어에서 나온 일화로는 사위가 딸에게 "장인어른은 미남인데 당신은 왜 그런 거냐."라고 디스했다는 것을 볼 때[13] 외모가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다. 제갈량은 정사 삼국지에 미남이라고 공인된 인물이고, 제갈근도 얼굴이 나귀같다며 손권이 놀리기는 했지만 외모가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고[14] 나온 걸 볼 때 제갈씨 자체가 외모 유전자가 괜찮은 걸지도? 왕광의 부인 제갈씨는 못생겼다매

5. 가계

6.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집안 조카라는 이유로 중용되지 못하다가 제갈량이 죽은 다음에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연의의 창작이다.[16]

또한 연의에서는 충심 깊은 제갈씨 일족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위 조정에 신명을 다하겠다며 속을 떠보는 가충을 꾸짖는 장면으로 나온다. 위말전의 일화를 가지고 각색한 듯. 또한 제갈량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오강이 제갈탄의 사자로서 손오에 지원을 요청하는 장면에서 손오의 공신 제갈근이 아닌 타국의 중신인 제갈량의 혈연관계를 내세운다.

7. 미디어 믹스

창작물에서는 삼국지연의의 기조를 이어 '제갈씨 보정'과 '충신 보정'을 받아서 비교적 괜찮게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7.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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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진삼국무쌍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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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삼국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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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반삼국지

반삼국지에서는 조카 제갈첨의 말빨에 넘어가 촉에 투항한다.

[1] 조모가 조서를 내려 반란자로 규정한 때다. [2]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개가 제갈탄이다. 다만 이 개(狗)가 사실은 공구(功狗)라서 공이 있는 자라는 설도 있다. 명나라의 신하인 방효유는 제갈탄이 개라 한 것은 가충 일파가 꾸며낸 것으로 여겼다. [3] 명나라의 문인. 자는 중순(仲醇). [4] 당시 양도현에 제갈씨 집성촌 이 있었다. 삼국지에는 다른 제갈씨 인물들도 여러 명( 제갈서, 제갈직) 더 나오는데 이들 역시 다 같은 낭야 출신이다. [5] 이때 두예의 조부 두기와 함께 조비가 탈 예정인 배를 타서 시험하다가 배가 좌초당하면서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남았다. [6] 다만 부부간의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일은 흔하다. [7] 순욱하고 순심 형제들도 있고 곽도 곽가 역시 친척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원소 원술 같은 경우는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 아예 각자 군웅이 되어 서로 싸운 수준이다. 물론 원소와 원술은 말만 친척이지 애초부터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은 견원지간이기는 했다. 게다가 제갈씨는 삼국 모든 나라에서 고관대작을 낸 가문이다. 촉한의 제갈량 계열, 손오의 제갈근 계열하고 제갈직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도 있다), 조위는 제갈탄하고 제갈서 등. 심지어 조위 내에서 권력을 잡은 사마씨에게 제갈탄은 숙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혼맥이 있기도 했다) 같은 집안 출신인 제갈서는 친 사마씨 라인으로 서진에서도 승승장구했다. [8] 제갈탄의 또다른 딸은 왕릉의 아들 왕광의 부인이 되었다. 다만 선후관계는 불명으로 어느 쪽이 언니인지 알 수 없다. 중국 위키에서는 장녀가 사마주의 부인인 제갈태비, 차녀가 왕광의 부인이라 되어 있다. [9] 제갈탄은 하후현과 친했을 뿐 아니라 비슷한 경우의 왕릉이나 관구검이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불안해했다. 그 때문에 재물을 풀어 민심을 얻고, 일가나 양주의 협객 수천명을 먹이며 자신을 지키게 했다. [10] 정사에 따르면 문흠이 양주자사로 있던 시절부터 서로 사이가 나빴다. [11] 사마주와 결혼한 제갈태비는 목숨을 건졌다. [12] 낭야왕 사마주의 아들 동안왕 사마요는 제갈탄의 외손자였는데, 혜제 때 문앙을 역적으로 몰아 멸족시켜 외할아버지 제갈탄, 외삼촌 제갈정, 그리고 백부 사마사를 간접적으로 죽인 원수를 갚았다. 사마주의 장손, 즉 자신의 외증손자인 사마예가 나중에 동진을 건국한다. [13] 왕공연(왕릉의 아들 왕광)이 제갈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방에서 그녀에게 묻길 "신부의 낯색이 어찌 공휴(제갈탄) 어르신을 닮지 못하고 기품이 없소?"라고 하였다. 이에 신부가 답하길 " 대장부이신 당신께서도 언운(왕릉) 어르신을 닮지 못했는데, 하물며 한낱 아녀자인 제 어찌 영걸인 아버지를 닮았겠습니까."(...) [14] 나귀같다고 한건 순전히 그의 긴 귀 때문이다. [15] 왕릉의 난 이후, 곽회의 부인 왕씨도 왕릉의 누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에 걸려 죽을 뻔했으나, 곽회의 탄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관구검의 난 이후 ‘출가한 여자는 연좌제가 붙을 땐 친정집이 아닌 시가(媤家)의 구성원으로 계산되어 처리하라’는 법령이 내려지기 전까진 출가한 여성도 거의 예외없이 처형당했음을 알 수 있다. [16] 애시당초 이 시기에는 한 가족에서 적대적인 다수의 세력에 종사하고 있는게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조조와 원소의 중진들은 상당수가 서로와 친족이며, 순욱 순심은 아예 친형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