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21:18:10

사마준(후한)


사마진 추존 · 비정통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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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800080> 추존 황제
고조 선황제 세종 경황제 태조 문황제
<rowcolor=#800080> 추존 존령
정서부군 예장부군 영천부군
경조부군
<rowcolor=#800080> 비정통 황제
조왕 원제 성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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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2대
선문후 충무후
추봉
정후 · 성후
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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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추봉
舞陽亭侯 | 무양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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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존령
潁川府君 | 영천부군
묘호 없음
시호 무양정후(舞陽亭侯) → 영천부군(潁川府君)
생몰 113년 ~ 197년 (향년 84세)
신체 197cm, 115cm(허리 둘레)
사마(司馬)
준(儁)
원이(元異)
부친 예장부군
모후 불명
정실 불명

1. 개요2. 생애3. 사후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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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기의 인물로 사마량의 아들이며 사마방의 부친, 사마의의 조부, 사마소의 증조부, 사마진을 세운 사마염의 고조부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

기록에 따르면 학식이 넓고 고대의 유풍을 좋아했으며 신장이 8척 3촌[1]이나 되었고, 허리 둘레는 10위[2]나 되었으며 풍격이 비범했다고 한다.

낙양령을 지내면서 주변 호족들과 수도에서는 그를 와호(臥虎)라고 불렀으며, 영천태수까지 이르렀고 이후에는 197년에 사망했다.

3. 사후

조위에서 무양정후(舞陽亭侯)로 추봉했다가 266년, 사마염이 진을 건국하자 영천부군(潁川府君)으로 격상되어 칠묘에 안치되었다.

사마예가 건강으로 천도해서 진나라를 중흥하면서 회제를 칠묘에 안치하려고 친진(親盡)한 영천부군의 묘위를 제거했다가 온교의 건의로 묘위를 다시 세웠다.

사마예의 손자인 성제 때에 이르러서는 8대조이기 때문에 철거되면서 이후로는 다시 세워질 일이 없어야 했지만, 사마예의 또다른 아들인 간문제가 즉위하면서 묘위가 다시 세워지기도 했다.

4.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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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군 이전[추존][43]
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 )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 [3] 친부는 의양성왕 [4] 친부는 안평헌왕 [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 [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 [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 [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 [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 [13] 친부는 회남충장왕 [14] 여기까지 서진 [15] 친부는 오효왕 [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 [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 [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 [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 [23] 친부는 진무제 [24] 친부는 제헌왕 [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 [26] 친부는 제헌왕 [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 [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 [29] 여기부터 동진 [30] 친부는 진문제 [31] 윤통(閏統) [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 [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 [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 [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 [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 [37] 친부는 남궁현왕 [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 [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 [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 [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 [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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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197cm가 나온다. [2] 현재 기준으로 계산하면 115cm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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