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02:51:28

청담사상

1. 개요2. 발생
2.1. 당시 현황2.2. 훈고학 시기 유학의 근본적인 한계2.3. 교조적 유가사상에 따른 후한 제국의 몰락과 심각한 파열2.4. 청담( 현학)의 발생과 죽림칠현2.5. 현학의 한계
3. 변질
3.1. 악화와 일단락3.2. 지속된 이유
4. 후일담5. 평가

1. 개요

淸談思想

청언(淸言) 또는 현언(玄言)이라고도 한다. 청담(淸談)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떠난, 맑고 깨끗한 담화(談話)
라는 의미이다. 이 사상은 조위· 서진· 동진시대에 크게 성행했고, 남조 남제· 남량시대까지도 그 영향이 계속되었으며 남진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유행한 사상으로 주로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현학과 함께 나타난 철학적 담론의 풍조로 노장사상을 기초로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정신적인 자유를 중시했다. 사상의 기초는 도가의 무위사상을 뿌리로 하고, 불가의 염세사상 등을 취하여 만들어졌다.

다만 전한 건국 이후 초기의 무위이치 사상과는 다르다. 도가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은 동일하지만 무위이치는 춘추전국시대 550여 년 동안의 기나긴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6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아방궁과 진시황릉 건축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와 가혹한 법 중심의 통치로 나라를 말아먹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다면 큰 일을 벌이기보다는 어지러워진 질서를 바로잡고, 잘 관리해 나라를 잘 돌아가게 하자는 사상이었다. 반면 청담의 무의이치는 당대의 해석방법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하는 일이 없어야만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에 가까웠다.

현학으로 인해 탄생한 청담사상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을 지나치게 추구했고, 후기에 들어서면 현실과 지나치게 유리되었다는 비판을 받으며 심지어 후대에는 이를 두고
청담이 나라를 그르쳤다
淸談誤國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한족 왕조의 귀족 지배층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청담의 본질이 왜곡되고, 비틀어지는 바람에 이른바 형식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후한 시대의 유교사상을 능가할 정도의 사회적인 폐해와 허례허식이 판을 쳤기 때문이다.

2. 발생

2.1. 당시 현황

후한 말기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면서 국가의 주요 통치이념이었던 유가 사상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인도로부터 불교가 들어오고 여러 도사들이 난립했던 당시 사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가의 사상이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애환을 달래기에는 힘에 부치는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고, 사회 고위층들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발전을 이루기엔 미진한 부분이 많았다.[1]

2.2. 훈고학 시기 유학의 근본적인 한계

유가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천하 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의 냉혹한 아귀다툼을 지속하던 시기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사상이었지만, 한고조 유방의 천하통일 이후 천하가 안정세에 접어들고, 또 생산량이 늘어나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발달하고 나자 ' 괴력난신'과 같은 신비적인 요소를 비롯해 삶의 본질이나 본질적 지혜나 천하의 기본 세계관과 같은 다음 단계의, 결국 호기심을 지닌 인간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의문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왜 그런가 하면…
  • 유가를 창시한 공자부터가 괴력난신을 근본부터 배제했기에 이를 담론으로 삼기 어려웠다. 유가에서 괴력난신의 배제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공자가 롤 모델로 삼았던 희단의 주나라부터가 바로 상나라의 점복이라든가 인신공양같은 것들을 타파하고자 들고일어났던 왕조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에서 큰 문제였던 '예(禮)'의 실종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사회 질서가 무너진 상황이라 하극상이 난무하고, 서로가 서로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절이라 차라리 서열을 정해 그 틀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건전한 상황이었다. 공자는 이 예가 실종된 상황을 괴력난신과 비슷하게 보고, 주공 단을 롤모델로 삼아 원래의 건전했던 시절(이른바 요순시대)로 되돌리려고 했었다. 이런 점 때문에 당대 유학이 한나라에서 오래 동안 발전할 수 있었지만, 형이상학적이거나 탈현실적인 담론을 다루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 당시 유학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사라진 유교 경전을 복원하기에도 바빴다. 한나라 시기에 주요 사상이었던 유가는 정확한 유학 경전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훈고학이었다. 그리고 유학이 본격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담론을 진지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건 먼 훗날 남송시대에 이르러 주희를 통해 유·불·선을 아우르는 성리학으로 나간 뒤였고, 이 시기 유학은 후대의 유학과 많이 달라서 저런 형이상학적인 얘기를 하기엔 역량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기존의 경전을 수집하고 해석하는데 전력을 쏟는 상황인데, 당시 훈고학이 주류이던 유교에서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가 올라오는 순간 그냥 말문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결국 당시 유가는 고대의 신화적·주술적 세계관을 가진 도교를 비롯한 많은 사상들과 결합한 형태로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려 했지만 역으로 이때문에 노장사상의 영향력이 민중 사이에 커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 당대의 주요 사상인 유가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선 법가 다음 가는 벙어리가 되었고, 현실적으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것에 치우치는 교조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다. 그것도 변질된 유교적 전통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마치 사서오경을 종교적 교리나 예언자의 가르침마냥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융통성 없이 지키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효도를 다하는 것임을 주장한 유가의 예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소 앞에서 삼년상을 치르다가 병이 들어서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남겨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여 불효를 하게 되는 사례가 생긴다던지, 아버지 묘소 앞에서 삼년상을 하다가 쓰러지자 어머니가 아들을 구하려고 이불을 덮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에게 불효한 사람이라고 평가가 급전직하하는 것과 같은 사례가 발생했다.[2]

그리고 후한 말기에는 청의(淸議)라는 사상이 존재했다. 이 사상은 주로 청류파에서 유행했는데, 당시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천하의 기둥이라 여기고, 고결한 선비로 자처하면서 같은 부류끼리 모여 조정의 정사를 논하고 인물을 품평했다. 그리고 이들은 지방에 주로 거점을 두어 현지의 민심을 향론(鄕論)이라는 것으로 취합해서 조정에 전달하며, 동시에 민심을 다독이는 일을 했다. 이런 사상은 향거리선제에서 인재 추천과 품평을 중시하면서 계속 발전했다.

하지만 중앙정권은 당고의 금 같은 사건을 일으켜 조정에 끼치는 청류파의 영향을 막았다. 그러자 청류파들은 중앙정부와의 정면 충돌을 자제하고, 각자의 거점인 지방에서 세력을 늘리면서 민심을 자기 편으로 돌리는 데 주력했으며, 이 중에서 청류파의 중심 인물인 곽태처럼 평론을 적당히 하고, 과다한 비난을 하지 않아 당시의 중앙집권세력인 환관들의 미움을 사지 않아서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했다.[3]

2.3. 교조적 유가사상에 따른 후한 제국의 몰락과 심각한 파열

결국 이렇게 교조화된 후한 말기의 유가는 정작 유가사상에서 목표로 하는 충성, 효도, 예절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부작용을 보이게 된다.

당시 교조화된 유가사상은 현실과의 엄청난 괴리를 가저왔다. 한 나라의 어버이여야 할 황제가 적접 벼슬을 사고 팔거나, 정통성이 있기는 한데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외척에게 휘둘리는 등의 상황이 일어나도 당대의 학자들은 이를 제대로 지적할 수가 없었다.

이런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더더욱 교조화되었고 역으로 이런 교조화된 유가적 전통을 엄격히 지켜 엄청난 정치적 자산을 획득한 이도 있었다. 바로 원소로 원래는 얼자에 불과했던 원소가 그렇게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다른 사람은 3년상도 하기 힘든데도 아버지와 정실인 어머니까지 더한 6년상을 완벽하게 해냈기 때문이었다. 훗날을 보자면 원소의 이런 행동도 어디까지나 쇼였을 뿐 진정한 효자는 아니었지만 당대의 유학자들 입장에선 이 위선을 유교적인 틀 안에서 지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4] 이런 일이 쉼 없이 반복되다 보니 후한 말기에는 교조적으로 유가적인 전통을 따르다가 이리저리 털리며 몰락하는 지식인 vs 비윤리적인 선택을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는 제후와 그 가신들로 대표되는 혼란이 막을 올렸다.

여기에 더해 후한 말기의 혼란 및 조씨의 위나라가 사마씨의 진나라로 교체되는 등 잦은 정치적 격변이 발생하면서 지식인과 귀족 사회에서는 정치에 실망하여 은둔하거나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세속의 일이나 민생에 관한 논의를 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서 산림에 은거하여 청정무위의 담론을 나누었다는 산도, 왕융, 유영, 완적, 완함, 혜강, 상수 등의 죽림칠현이 등장했다.

2.4. 청담( 현학)의 발생과 죽림칠현

실질적으로 청담 및 현학 사상을 창시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위나라의 하안 왕필(王弼)이었다. 이들은 노장사상을 기초로 《 논어》와 《 주역》 등 유가의 경서를 새롭게 해석하며 무와 유, 명교(名教)와 자연 등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에 관한 철학적인 논의를 이끌었다. 특히 하안은 마약인 오석산을 개량 및 보급, 권장해서 현실을 잊고 명상에 빠지는 방법까지 창안했다. 이런 청담사상의 시초격인 현학에 대해선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비록 초창기 주요 연구자들인 하안이 사마의가 일으킨 고평릉 사변에서 참살당하고, 왕필이 젊은 나이에 병사했으나, 이른바 3현이라고 불리는 《 도덕경》, 《 장자》, 《 주역》에 대한 연구와 해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학(玄學)의 학풍이 크게 성행했다. 하후현, 왕연, 완적, 혜강, 상수, 곽상, 배위 등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둘러싼 고도의 철학적인 논변이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노장사상에 기초해 세속적인 가치를 초월한 정신적인 자유를 강조하고, 명분과 형식에만 집착하는 유학을 비판하며, 3현을 기초로 한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논의를 중시하는 풍조가 나타났으며 이를 청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실제적으로도 청담사상의 기초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죽림칠현은 청담의 풍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유가에서 강조하는 명교를 초월해 무위자연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속적인 명예나 이익, 예의를 초월하여 활달한 행동을 일삼았으며 현대의 시각에서도 정도를 벗어난 행동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보이는 행동은 겉보기에는 자유분방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유가사상을 깊이 믿고 있었다. 완적이 정작 자신의 아들은 음주 행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혜강이 《가계》(家誡)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아들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예절과 주의사항을 훈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기까지의 청담사상은 비록 시대의 한계는 있었으나 나름대로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 청의사상을 이어받아 백성들을 위로하고, 스스로도 청렴·결백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유지했다. 특히 재산을 모으거나 권력을 탐하는 것을 비루하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사치와 탐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 불의한 중앙정권에 대한 저항사상을 이어나갔다. 저항의 방식으론 적극적 저항에서 소극적 저항, 그리고 세상에 미련을 끊어버리고 자연에 심취해 살면서 출사를 거부하는 식으로 표현했다.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사상이 광범위하게 유행을 타면 인간의 머리수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 경제 기반이 마비가 되어버리므로 당연히 위정자들은 이 가능성을 경계했다. 일종의 현대 투표거부운동 같은 의미였다.
  • 허례허식에 사로잡힌 당대의 유가사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탐구를 함으로서 생각의 다양성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유가사상을 버린 것도 아니라서 유가사상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을 허례허식을 버리면서 추구하기도 했다.[5]

2.5. 현학의 한계

그러나 정시 연간 현학을 뒤집고 일어선 하내 사마씨로 대표되는 당대의 권력가는 현학을 좋게 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사마소 종회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죽림칠현혜강을 불효죄로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은 당대의 지식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청담사상에서 저항이라는 의미는 이 시점을 계기로 해서 사라졌다. 안 그래도 청담사상의 저항은 소극적인 회피에 가까워서 애초부터 약했는데[6] 이 시점에서 청담사상의 유일한 정치적 의견은
모든 게 잘 풀리고 태평성대이니 가만히 놔두면 된다
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현학은 기본적으로는 유가사상에 속하지만 사실상 유가사상이 아닌 속성을 많이 가졌으므로[7] 연구와 사색에 있어 높은 수준이 필요했다. 그래서 높은 성취를 이룬 하안이나 왕필 같은 사람들은 호학 및 중용과 멋부림을 동시에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기본적으로 현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특성이 현실과 분리되어 공상을 하기에 좋다는 위험성은 제거하지 못했다.

하안· 왕필· 하후현 같은 당대의 일류 지식인들이 위진교체기때 처형당하거나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자, 현학의 선을 넘어버린 청담사상은 저자거리의 도사 나부랭이들이 읊어대는 혹세무민 혹은 황당무계한 주술적인 무당질을 받아들이거나 결합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청담사상은 죽림칠현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이 추구했기 때문에 권력자나 지식인층에서 일종의 최첨단 유행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위·진시대 고위 관료들의 청담 및 고담준론은 당대의 위기를 해결하는데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장 당대 청담사상의 일인자였던 왕연은 태위라는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조정내에 고담준론이 성행하는 풍토를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동해왕 사마월의 시신을 분봉지에 묻어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수도 낙양에서 도망치다가 갈족의 장수 석륵에게 잡혀 포로가 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덤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남흉노의 수장인 유연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하기도 했다.[8] 게다가 혼자 최후를 맞은 것이 아니라 무려 100,000명에 이르는 사람들과 같이 최후를 맞았는데, 이들은 서진의 친왕들을 포함한 낙양 수비 병력의 주력이었다. 덕분에 서진의 황제인 회제 사마치는 병력 부족 상태에 시달리다가 낙양이 함락되면서 체포당한 후 나중에 치욕적인 대우를 받고 끔살당했다. 이것이 바로 한족 역사상의 3대 치욕들 중 첫 번째였던 영가의 난이었다.

3. 변질

3.1. 악화와 일단락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담사상은 죽지 않은채 동진 왕도에게로 이어졌다. 동진시대 초기에는 긴급상황이라 미약했지만 곧 정세가 안정되자마자 수도인 건강에서 청담사상이 이전보다 더욱 꽃을 피웠다. 이런 청담의 성행은 학문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던 강남 지역에 중원의 새로운 학문을 전파했다는 점에서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또한 청담의 허례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면 앞서 언급했듯이 서진 정권의 중심축이었던 하내 사마씨부터가 명교를 지향하고 현학을 배척하면서 왕숙의 이론을 국학으로 밀었고, 이런 현학에 비판적인 하내 사마씨의 학문적인 성향에 힘입어 현학이 성하더라도 한편으로는 크게 비판받었던 것이 사마진 당대의 학문적인 성향이었던 것이다. 동진시대에 이르면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인한 서진 멸망에 대한 반성으로 극단적인 방달함이 지양되고, 실질에 좀더 힘썼으며, 유교(명교名敎)와 현학이 지향하는 자연이 하나라는 사조가 정착됨과 동시에 유학과 현학을 함께 공부해야 한다는 사상이 늘어났다.

서진이 멸망한 후 왕도, 사안 등으로 대표되는 동진의 지배층 명사들은 청담을 숭상했으나, 다만 그 용의는 과거 위•진시대 현학의 약간은 미치광이 같은 모습과 염세적인 풍조와는 같지 않았다. 그들은 정권의 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서 청정무위를 받아들이고, 청담명사를 숭상하며 그들의 협조로 강남 사회의 질서를 안정시켜 나아갈 목적으로 청담을 받아들었다. 이렇듯 서진에서 내려온 동진의 청담가들은 꽤나 유능한 인물들이었으며, 이는 서진의 청담가들이나 현학자들이 후대의 악평마냥 무조건 무능한 인물들만은 아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러나 이 사조는 독립적인 사상을 형성하지 못하고, 동진 이후 남조에선 사라졌는데, 하필이면 동진 이래 불교가 현학과 융합하며 발전하더니 나중엔 아예 현학을 대체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서진 때 이미 낙양 및 장안에 180개의 절과 3,700여 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서진의 혼란기 이후 유학은 쇠퇴하고 혼란을 초래한 현학도 힘을 쓰지 못하는 와중에 불교가 전 계층을 만족시키는 사상을 제공하게 되었다. 현세에 허덕이는 일반 백성들에겐 사후의 안락을 약속하고, 지배층에겐 지배의 정당성을 주었다.[9] 동진의 역대 황제들도 불교를 숭상했으며,[10] 동진 멸망 이후 유송· 남제· 남량· 남진 같은 남조의 황제들은 매우 깊이 불교를 숭앙한 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당대에 성행하던 불교와 현학이 결합한 것은 중국으로 유입된 외래종교였던 불교가 중국화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현학과 불교의 결합은 역설적으로 현학이나 청담의 급격한 퇴보를 낳았다. 불교가 거의 국교 수준으로 숭앙되던 양나라에서 이런 현상이 특히 심해 양나라가 후경이 일으킨 대란으로 사실상 박살나는 시기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현학만 남은 청담은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악화되었다
  • 청담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다. 권력층이거나, 유명한 지식인이거나, 적어도 재산이라도 많아야 했다. 물론 신분은 귀족이나 적어도 호족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이 뛰어나더라도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애초부터 청담에의 참가가 불가능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청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며, 미천한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 청담을 나눌 장소도 중요했다. 경치가 좋고 자연을 직접 느끼면서도 지체가 높으신 분들이 불편함이 없는 곳을 택해야 했으므로 아무 곳에서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이는 결국 후술하듯 자신의 집과 땅의 경치를 자랑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 청담을 나눌 때 담객들은 반드시 먼지떨이 모양의 불자(拂子)[11]를 손에 들어야 했다. 이 불자는 사불상의 꼬리에 손잡이를 단 것이었고, 손잡이의 재질에 옥 등의 귀한 자재를 써야 했다. 그리고 청담을 나눌 때 불자를 살살 흔들어 마치 신선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다. 대화를 나눌 때 별 필요가 없는 호화로운 사치품이 있어야 했으며, 쓸데없는 분위기의 연출을 중요시했으니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 청담의 내용은 주로 기존의 경전을 다루었다. 그리고 경전에 적힌 내용을 논할 때 전통적인 논법에서 벗어난 기상천외한 말을 할수록 추앙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밀한 추론이나 논지 전개 따위는 필요가 없었고, 단지 사람들이 감탄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심지어 왕연은 《노자》를 해설할 때 제멋대로 이론을 수정하고, 적혀있는 기록을 제멋대로 삭제하는 행위까지 전개했다.
  • 청담을 끝낼 때 어떤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해도 수습만 가능하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즉 공부를 가장한 사치스러운 학자 놀이에 불과했다.
  • 얼토당토하지 않은 조건까지 붙은 결과, 학술이나 문예 관련 모임이라기보다는 고대 관심충 귀족들의 놀이모임이 되어 버렸다.
이 시점에서 청담사상에 따른 지식인이란 속세에 벗어난 척 하는 학자놀이를 위한 호화 사치품과 환경을 준비할 수 있으신 높으신 분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청담사상은 크게 변질되었으며 말 그대로 국가를 망치는 사상으로 전락했다. 이때부터의 청담사상을 공담(空談)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 뜻은 말 그대로 청담을 위한 청담사상, 즉, 말만 그럴싸한 헛소리이며 무의미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기득권의 입장에서 청담은 실질적으론 단순한 유희에 불과하지만, 겉보기에는 선현의 뜻을 이어받은 기품높은 현자로서 사회의 존경까지 받을 수 있었다.

양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고씨의 북제로 간 안지추는 《안씨가훈》이라는 책에서 양나라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양나라의 전성기 때 사족의 자제들은 모두 널찍한 옷을 입고 높은 모자를 썼다. 그리고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옷에는 향을 뿌렸으며, 얼굴은 깨끗하게 면도를 한 후에 분과 연지를 발랐다. 집을 나설 때는 차양이 긴 수레를 탔으며 집에서는 비단방석에 앉았고, 양옆에는 골동품을 진열해놓은 다음 공리공론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겉보기에는 신선과 같았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시험을 보게 되면 대신 시험을 볼 사람을 찾아 시험을 치르게 하고, 조정의 연회가 있으면 미리 사람을 시켜 좋은 시구를 짓게 한 후, 그걸 외우기만 해서 현장에서는 앵무새처럼 그대로 말하기만 했다. 그리고 관직에 나가서는 실무가 없는 청관만 하려고 했다.

밭을 갈고 풀을 뽑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수확을 하는지도 몰랐다. 피부는 연약하고 뼈는 약해 잘 걷지도 못하고 몸이 약한 데다가 기운도 없어서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지 못했다.[12]
이런 것이 문벌귀족 사회 전체의 유행이 되어 구품관인법과 결합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 관료들이 실무를 외면한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국가의 봉급을 받는 사람들이 청담사상에 빠져 실무가 뭔지도 모르고, 가급적이면 실무가 없는 청직으로만 몰렸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청담사상의 현실은 덧없다는 이야기가 왜곡된 것이었다. 하안이 일찍이 요·순조차도 죽을 힘을 빼고서야 세상 사람들 조금 좋아지게 했던 것에 불과한데 속인인 우리가 세상을 위할 때 더 무엇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으니 힘써 무엇을 바꾸려 하지 말고, 돌아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놔두면 된다고 말하며 저술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하안이 말했던 것은 고수가 되어 뭐가 정상이고 자연스러운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헛심 빼지 말고 그렇게 돌아가도록 놔두라는 것이었지, 그냥 놀라는 얘기는 아니었다.[13] 따라서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탁직이라고 불리는 실무가 많은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과중한 부담을 주는 데다가 실무를 맡은 몇 안 되는 사람이 권력에 집착하거나 부패하면 답이 없어지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즉, 앞서 서술되었던 것처럼 하안·왕필·하후현이이니까 멋도 부리면서 실무도 가능했던 거지 얼치기가 따라하면 그냥 죽도 밥도 못되었다.
  • 열심히 일하는 것을 비천하게 여겼다. 역시 만만치 않게 큰 문제점이었다. 청담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냥 놀기만 했다면 다행이었는데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매우 비천하게 생각했으며, 동류에 끼워주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 결과가 나쁘면 나쁜대로 천박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발악해 봐야 고상한 귀족에게 범접할 수 없다, 결과가 좋으면 좋은 대로 가만히 놔 둬도 모든 게 잘 돌아가는 이 세상의 순리를 뒤틀리게 하려고 발악한다면서 노력과 일 그 자체를 사악한 것으로 치부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구품관인법에 따라 인재의 추천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들이라 문제가 더 컸다. 더욱이 탁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성실히 일해도 고위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부패와 탐욕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론 탁직 중에서도 탁요직이라 하여 청요직처럼 제대로 못하면 경력에 얼룩이 생기지만 제대로 하면 출세에 좋은 자리들도 있었는데 문벌귀족 중에서 권력욕이 많다든가 한 경우에는 일부러 청요직을 마다하고 탁요직에 가는 이들도 있었다. 이랬기에 청직 출신들이 탁요직 인사들과의 정치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출세에 탐닉해서 모두가 비천하다고 여기는 일까지 자처하는 탁요직 인사들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할 가능성은 극도로 희박했다.
  • 온갖 귀족주의의 온상이 되었다. 문벌귀족의 성격을 구품관인법과 함께 수립하고, 문벌귀족들이 끼리끼리 모여 당파를 결성해 타인을 배척하면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증상을 심화시켰다. 이는 앞서 설명한 청담을 나누려면 격이 맞아야 한다는 괴상한 법칙을 심화시킨 결과였다.
  • 호화·사치 풍조가 뒷구멍으로 만연했다. 얼핏 보기에는 청담사상이 청빈과 함께 자연을 벗으로 삼는 것을 강조하므로 호화로운 사치와는 연관이 없을 듯하나, 바로 이 이론을 뒤틀어서 해악을 끼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자연과 벗을 삼을 만한 곳에서 청담을 논하기 위해 경치가 좋은 곳을 점거해 주변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내쫒고 사유지로 삼거나, 아예 자기 집 앞마당에서 청담을 논하기 위해 집 주변의 땅을 강제로 뺏앗은 후 기암괴석을 뽑아다가 마당에 박고 정자를 건설하며 연못을 파고 거기서 청담을 논한 것이었다. 그래놓고 자신은 물욕이 없다고 선언하는 파렴치함을 보였다.
  • 모순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겉으로는 청빈하게 보이기 위해 돈이나 재물이라는 것이 꿈에라도 보인다면 몸을 깨끗이 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며, 관직에 뜻이 없음을 알리기 위해 몇 차례나 온 조정의 사신을 돌려보내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비천한 하인이나 노비를 시켜 돈과 재물을 받아챙기고, 더 높은 관직에 화려하게 오르기 위해 자신의 맘에 드는 관직이 올 때까지 거절[14]하는 개수작을 부렸다.
  • 현실을 망각하고 실속 없이 허례허식이 늘어났다. 앞서 언급한 사불상의 꼬리로 만든 불자는 애교로 볼 정도로 평소 사는 곳을 신선 같이 꾸미는 데 열중했다. 이것도 모자라 기본적인 경서에 대한 교양도 없는 상태에서 패션만 최첨단을 걸었다. 물론 현실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청담사상이 현실적으로 거의 효과가 없는데도 꾸준하게 이어지자 고위층과 학자들은 하나같이 실무를 외면하며 꼼수만 부리기 시작했고, 탁직에 종사하며 실무에 투입되던 이들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하여 사회 전체를 퇴락시켰다.
  • 중원의 학문 전반이 정체되었다. 현실주의자들은 청담에 따른 허례허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리사욕과 명예욕에 만족했고, 정말 학문에 큰 뜻을 품은 학자들조차 허무맹랑한 공리공담과 망상을 진정한 학문이라 여기며 신선놀음에 집중하고 말았다. 때문에 위진남북조시대엔 별 의미없는 복잡한 사교 및 취미 활동이 학문의 정수라고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 현실과 격리된 공상에 푹 빠진 공담이 된 청담이 지속된 결과[15] 청담 이외에 인문학적인 발전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후경의 대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도 청담은 끊어지지 않았다. 양나라 형주의 강릉 지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원제(元帝) 소역 554년에 서위의 군대가 맹공격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용광전에서 백관들에게 《노자》를 강의했다.[16] 이 강의에는 무장들도 갑옷을 입고, 강의에 참석해야 했으며 양양까지 서위군이 당도했다는 긴급한 소식을 들었을 때만 며칠 동안 잠시 강의를 중단했다가 사태가 잠잠해지는 것 같으면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덕분에 양나라는 멸망했으며 원제 소역은 11월에 강릉이 포위되고 외성의 서문이 열려서 서위군이 들어오자 절망하면서
10,000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
라고 말한 후 내성 안 동죽각전에 비치된 고금도서 140,000권을 모두 불살라 없애고 내성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12월에 내성까지 함락된 후 포로로 잡혀[17] 최후를 맞았다.

이렇게 나라를 몇 번이나 정체시키고 멸망으로 향하는 것을 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담사상은 끈질기게 남아 남진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했으며 결국 청담이고 뭐고 관심없이 말년까지 부국강병에만 힘을 쓴 수문제 양견의 수나라가 남진의 암군 진숙보를 멸망시킨 후에나 일단락되었다.

3.2. 지속된 이유

청담사상이 초기의 사회 비판적 요소를 상실하고, 공담으로 변질되자, 당연히 당대에도 많은 비판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청담사상은 별 다른 견제구 없이 거진 300년 이상 귀족 및 학자층에 꾸준히 유행했다. 이는 위진남북조시대를 지나면서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사회 불안정과 부패가 만연했으며, 이런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청담이 꽤나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400여 년 동안 이어진 한 왕조의 붕괴 이후 중원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 했고, 이는 삼국시대로 대표되는 거대한 혁명 및 내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청담사상의 현학적인 요소는 이러한 사회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 자기만의 학문에 끝없이 파고 들게 만드는 효과를 가저왔으며, 결과적으로 남조 역대 왕조들의 정권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유교&불교&도교적인 요소가 모두 결합되어 당대 귀족들의 입장에선 학문적인 만족감을 가지기에 매우 적절한 요소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담으로 변질된 청담사상은 귀족 지배층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사실 청담을 유행하게 만든 이런 사회 불안정과 부패는 지도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 분출점을 망상과 공담으로 돌리게 만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무 것도 피드백을 받을 수 없는 지도층의 문제로 인해 사회 불안정과 부패가 발생했고 그러자 지도층이 청담사상에 빠져들며 그럼 또 다시 태업의 결과로 부패와 사회 불안정이 가속화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되었다.

사치스러운 현실 도피와 허례허식을 권장하는 식의 공담으로 변질된 이런 청담에 의해 부패의 무한루프가 300년 이상 이어진 결과, 그 전까지 재평가를 받고 있었던 기존의 유교 & 도교 & 불교 사상 전반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청담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지나치게 현실과 유리된 고담준론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4. 후일담

천하통일을 달성한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는 훈고학을 다시 관학으로 삼아 과거제를 정비하고, 유학자인 공영달을 시켜 오경의 해석들을 집대성한 유학 참고서인 《오경정의》를 만들도록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강력한 해설서는 역으로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을 불렀고, 결국 학문의 본격적인 발전을 막아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거기에 유·불·선의 합일을 주장한 위진시대 현학의 영향이 당나라의 유학에 아직 남아 있었다.[18] 당나라 후기부터는 고유 이념의 복원과 중국 고문의 계승 등을 주장한 한유, 이고 등의 고문 운동이 유교의 부활에 불씨를 지폈다.

다만 한유와 이고의 관점은 달랐는데 한유가 불교를 배척한 순수한 유교를 논했다면, 이고는 불교사상을 채택하여 심성(心性)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였다. 국가가 공인한 《오경정의》(五經正義)의 주석에 만족하지 않고, 선대의 현학자들처럼 불교 노장, 선학(禪學) 같은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여 《복성서》(復性書)를 저술했다. 《복성서》는 한유《원성》(原性)과 더불어 인간의 본성을 논한 것으로 송대(宋代) 정주학의 선구가 되었다. 또한 훈고학의 경전 해석이 성현의 마음을 탐구하는데 적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했고, 공자, 자사, 맹자에 연결되는 유교 종사 계보의 정통론을 만들었다. 이런 이고의 사상은 신유학 사서삼경, 역전경주(驛傳競走) 중시와 도통사상 중시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는 현학의 시대가 끝나고 훈고학적인 관점을 국가가 강제하려고 했어도, 근본적으로 본디 유학이 형이상학을 논하는 학문이 아니다 보니 철학적인 토양에 다른 사상을 유합하는 과정이 어쨌든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19]

5. 평가

청담은 형이상학적인 주제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확대를 가져와 중국 철학의 이론적인 수준을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동진시대 후기에는 불교 사상의 영향도 수렴하여 노장사상과 불교와 유교가 융합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고, 이는 남송시대 이래 신유학에 영향을 미쳐 주희의 성리학, 명대 후기 왕양명 양명학이 출현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노장사상에 기초해서, 탈속한 기풍을 강조하는 간결하고 정순한 예술적 풍조를 일으키는 데도 기여했다. 나아가 명교(名敎)를 벗어난 각 개체 스스로의 전개와 발전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주의적인 자아의 자각과 개체 의식의 확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세속적인 가치를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주제에 관한 현리만을 논의하는 청담은 본질부터가 공론에 치우쳐 민생을 돌보지 않게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진짜배기 철학자들 사이를 벗어나 귀족 사회 전체에 청담이 유행하게 되면서 삶에 대한 쾌락적이며 방관적인 태도가 만연하게 되었으며, 세속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 은둔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낳았다.

변질된 몇몇 청담가들은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나 허례허식을 일삼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도리어 이런 행위를 서로 드러내면서 그것이 마치 유명한 사람들만이 행하는 예술적인 권위나 어떤 유세인 양 여겼다. 이처럼 조정이나 재야를 막론하고 모두 청담만을 일삼고 나랏일을 보는 데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자, 조정과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조위 말기의 하안 왕필을 숭앙한 서진시대의 청담가 왕연 석륵에게 살해당하기 전
"만일 우리가 허무를 숭상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비참한 말로에 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 청담을 즐긴 동기는 대부분 정치적인 박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좀 더 높은 정신적, 학문적 단계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 명사들의 지나친 청담이 나랏일을 그르쳤던 것도 사실이다. 청담의 본질이 본래 '철학적 현리를 탐색하는 것'이라는 점에 비춰봐서도, 기괴한 행동이나 현실과 유리된 행동을 했던 일부 청담 사상가들의 행태는 비판의 여지가 많다고 할 수 있다.
[1] 사실 이때의 유가사상은 일국의 중심 사상이 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던 탓이 컸다. 분서갱유같은 사건도 있어서 전혀 체계화가 되지 않았고, 유가 자체가 술이부작(=기술하되 지어내지 않는다)을 주요 사상으로 내세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유가사상을 체계화한 것이 바로 남송시대의 대학자 주희였으며, 주희의 성리학이 이후 유가사상의 메인 스트림이 된다. [2] 이런 것과 관련해서 맹자가 한 말을 인용해보자면 맹자는 남녀가 친히 주고받지 않는 것은 예의이지만 물에 빠진 형수를 건져올리기 위해서 손을 잡아당기는 것은 임기응변이며, 그러지 않는다면 이리나 승냥이와 다를바 없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러니 이 시대는 맹자의 관점에서 이리나 승냥이가 득실거리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3] 그래서 곽태에 대해 후세에 쓴 역사서의 기록 중에는 "청담의 주위를 맴돌면서 세상 일에서 점차 멀어져갔다"는 비난이 더해졌다. 이 때문에 곽태를 청담사상의 창시자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의 행적은 개인적인 피난행위에 가까우므로 실제적인 창시자라고 여겨지기는 어렵다. [4] 아버지와 정실인 원술의 어머니의 상을 완벽히 치렀다는 표면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빡빡한 기준들을 하나도 거스르지 않은 만큼 진정성을 의심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5] 죽림칠현의 일원 중 한 명인 혜강을 아버지로 둔 혜소는 팔왕의 난 때 서진의 바보 황제로 제2대 황제였던 혜제 사마충을 지키다가 살해되었다. 즉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충(忠)'을 실현한 사람이다. [6] 당장에 혜강을 제외하면 모두 결국 벼슬살이를 했다. 심지어 혜강조차 원래는 벼슬을 하다가 버리고 은거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죽림칠현은 그 이미지와는 달리 은거인조차 아니었는데 이들 전원은 명사였고, 그런 명사인 사람 일곱 명이 우르르 몰려다녔으며 심지어 수도인 낙양과 가까운 산양에서 살았기에 세간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7] 애초에 현학은 《노자》·《장자》·《주역》 세 경전을 중시했는데 《노자》와 《장자》는 당연히 도교 계열이었고, 《주역》도 《논어》나 《맹자》 같은 사상적인 계열의 유교경전은 아니었다. 예시로 진시황 시기에 다른 유교 서적은 탄압받았으면서도 《주역》은 점을 치는 용도로 여겨져 탄압을 피해간 바 있었다. [8] 다만 이 부분은 서진 제국의 군권이 황족인 사마씨 종친들에게 모두 집중되어 있었고, 동해왕 사마월이 죽은 상태에서 이성 대신이 군권을 휘두르기가 쉽지 않았던 당대 서진의 상황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었다. [9] 불교계가 불교 전파에 적극적이었던데다가 현학과 불교의 공통점 때문에 명사와 명승이 교류하면서 자연스레 둘이 결합되기까지 했다. 이런 현상은 대제 손권 치하의 동오에서부터 보이는데 손화가 태자였을때 위소(=위요)와 동궁에 들어간 승려가 있었다. [10] 실제로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는 선양하고 1년 뒤 자결을 강요받자 불교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내세에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하니 그냥 죽여달라고 했고 결국 아버지처럼 질식사 당했다. [11] 시대적 배경으로는 동진 시기부터의 육조시대에 불교가 매우 흥성한 영향에서도 기인한다. 진삼국무쌍 7에서 사마의가 이것을 무기로 쓰는데, 청담의 시초인 하안 같은 이들을 박해하긴 했지만 사마의가 청담이 성행했던 서진 동진의 시조였음을 감안하면 나름대로는 적절하다고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한편으로는 본문에서 언급한 청담과 불교가 깊게 결합한 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12]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마약의 일종인 오석산의 영향이 컸다. 오석산은 주로 황화수은 결정인 주사와 함께 가루로 섭취했는데, 수은의 부작용으로 피부가 창백해지고 신경 조직에 피해를 입게 되어 결국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오석삭 속의 비소의 영향으로 여러모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에는 최적화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극약을 먹으면서 담론하는 것이 청담사상의 로망이었다는 것이다. [13] 당연한 것이 놀고 자빠진 자들은 고위 관료가 되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승진이 막히고 실무가 외면받으며 일하는걸 비천하게 여기고, 온갖 사치가 만연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일 리가 없지 않은가? 더 문제점은 이들은 아래에서 나오듯 호화로운 사치를 누리며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노력에는 아주 열심(…)이었다. [14] 다만 이런 벼슬 사양은 청담사상만의 특징이 아니긴 하다. 고구려 고국천왕 시기의 국상인 을파소 역시도 처음에는 중외대부라는 직책과 우태의 지위를 받았으나 그 자리로는 자신의 기량을 펼치기가 어렵다고 여겨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기엔 부족하다는 말로 거절했다가 본의를 알아챈 고국천왕이 국상의 자리를 제수하자 받아들였다. 즉 원하는 벼슬을 얻기 위해 벼슬을 사양하는건 이 시대의 특징이 아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이런 관습이 만연하여 구한말에는 아예 이런 관습을 금지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다. 금지를 해야 할 만큼 많았다는 것이다. [15] 당장에 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들이, 한나라 시대에는 명사들이 당나라 및 송나라 시대에도 당송팔대가와 사대부들이, 명청시대에도 양명학과 고증학 학자들이 활약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이들에 비견되는 집단이 삼국시대 말기의 죽림칠현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는다. [16] 물론 이러한 행동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유교 국가에서 했던 경연 역시 시작은 공자· 맹자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나 역사서로 해도, 중반 이후부터는 여기서 주제를 뽑아 실무를 논하는 국무회의의 자리를 겸했다. 원제 소역은 그저 비생산적으로 경전 그 자체를 강론해서 문제가 된 것이었다. 《 도덕경》은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사회와 개인의 관계, 자유와 규제의 조화 등에 이르는 문제까지도 생각할 여지를 주는 고전이라 조선시대 경연과 같은 방식으로 강의와 토론이 이루어져서 도교 경전에서도 실무에 대한 화두를 꺼내고자 했다면 못 꺼낼 화두가 없었을 것이다. [17] 서위군의 병사가 면전에서 "너는 책들을 왜 태웠는가?" 비웃었다고 한다. [18] 어쨌거나 이래서 당나라 유학은 별볼일 없다는 식으로 후대 유학자들의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한국의 성균관의 경우, 홈페이지에서 '그러나, 당은 육조(六朝)의 천박하고 겉만 화려한 기풍을 이어받아 경서로써 인재를 선발했지만 사실은 시(詩)와 문(文)으로 등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학자들이 시문에 열중했으나 유학에는 소홀하여 사상적인 깊이는 볼만한 것이 없었다'고 당나라 유학을 노골적으로 비난한다. # 한나라부터 송나라 이전까지를 모두 유교의 침체기로 규정하였지만 그래도 한, 위진남북조에 대해서는 특별한 평론은 안 했는데 당나라만은 대놓고 돌직구를 때렸다. [19] 이때문에 한유나 이고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신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한유처럼 노장이나 불교를 강경하게 배척하면서도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처럼 불교나 노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공격당하거나, 혹은 정말로 해당 사상의 영향을 받는 모습이 나오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신유학이 노장사상이나 불교에 영향을 안받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