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20:11:45

유요(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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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전조 제5대 황제
유요 | 劉曜
출생 연대 미상
조위 병주 신흥군
(現 산시성 신저우시 우타이현)
사망 328년
전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5대 황제
319년 ~ 3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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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ece5b6> 성씨 유(劉)
요(曜)
부모 부황 선성제
모후 선명태후
배우자 원도황후, 헌문황후, 헌열황후, 유황후
자녀 9남 1녀
신장 9척 3촌(220cm)
영명(永明)
작호 중산왕(中山王)
연호 광초(光初, 319년 ~ 328년)
}}}}}}}}} ||

1. 개요2. 생애3. 일화4. 기타5. 가족 관계
5.1. 아내5.2. 자녀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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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초기 전조(前趙)의 제5대 황제.

전조의 창건자인 태조 광문제 유연(劉淵)의 족자[1]는 영명(永明)이었다. 그의 아들인 유희의 재위기간에 나라가 멸망해 묘호 시호가 일체 없다.

2. 생애

유요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 아저씨였던 유연이 양자로 삼아 길렀다. 유연이 한(漢)나라를 세운 뒤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크게 활약했다. 키는 9척 3촌[2]이었다.

태조 광문제 유연이 붕어한 후에는 열종 소무제 유총의 명령을 받아 311년 낙양을 공략하는 작전에서 총사령관급의 임무를 수행했다. 결국 석륵, 왕미, 호연안 등과 함께 낙양을 함락시키고 회제 사마치를 포로로 잡았다. 그런데 유요의 군사들은 무기 창고를 점령한 다음 서진의 역대 황릉을 도굴하다가 종묘을 불태우고 끝내 낙양까지 태워 버렸다.( 영가의 난) 그 뒤에 유요는 관중의 장안까지 진출했지만 한족 정권인 전량(前涼)과 안정태수 가필의 지원을 받은 서진 민제 사마업의 세력에게 다시 장안을 빼앗겼다. 이후 주로 진양(현재 산시성 타이위안 시)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316년에 다시 장안을 공격하여 외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끝내는 민제 사마업의 항복을 받아내어 사로잡았으며 관중을 평정하는 데 주력했다. 이렇게 유요의 군대는 관중 일대에서 사실상 군벌화했다.

318년, 폭군 유총이 붕어하고 효은제 유찬이 뒤를 계승했다. 그러나 한족 외척인 근준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유찬을 죽이고 평양의 유씨 황족을 몰살시킨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이때 광문제 유연과 소무제 유총의 자손들이 모두 죽어 유요가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趙公)으로 임명하여 근준을 협공했다. 근준은 석륵에게 패배한 뒤 내분으로 죽었고, 근준의 잔존 세력은 평양성과 함께 유요에게 항복했다. 이에 석륵은 분노하여 평양을 공격했으며 근준의 잔당은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도망쳤다. 하지만 유요는 그들을 모두 죽였다. 유요는 석륵에 의해 폐허가 된 평양에서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석륵은 평양 함락 이후 유요에게 화친을 제의했으나, 유요는 간신들의 말만 듣고 석륵의 사신 왕수를 간첩죄로 처형하여 석륵과 유요는 이때부터 적대관계가 되었다.

319년, 유요는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흉노의 후예임을 공식화했다. 같은 시기 석륵이 양국에서 또 다른 조나라를 세웠기에 흉노족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 갈족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로 구별한다. 유요는 또 한나라(전한, 후한, 촉한) 역대 황제[3]의 제사를 금해 관계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 뒤 저족 강족, 한족의 전량, 저족의 구지를 공격해 복속시켰다.

322년, 유요는 군사를 나누어 전량을 정벌했다. 유함은 기성, 호연안은 상성(桑城)을 치게 한 뒤, 유요 자신은 친히 주력 28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황하 인근으로 가 전량을 위협했다. 대대적인 공격에 놀란 전량의 군주 장무가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하자, 유요는 그를 양왕(凉王)에 봉하고 지절과 부월을 내렸다.

325년, 후조의 병주가 유요에게 항복했으며 동진의 사주도 유요에게 투항하자 유요의 군대는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을 포위했다. 이에 석륵의 6촌 동생인 석호가 구원군으로 와 유요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했다.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했으나, 군중에서 이유없이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했으며 병주와 사주 일대를 모두 잃었다.

325년, 이 패전으로 전조의 국력은 쇠퇴하여 잠시 굴복했던 전량이 다시 독립하게 되었고, 구지의 저항이 커졌다.

328년 후조의 석호가 전조를 공격하니 유요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크게 이긴 후, 낙양을 포위하고 사주 일대를 탈환했다. 그러나 낙양 포위전이 장기화가 되자 유요는 긴장이 해이해졌고 지루해지자 술을 마시고 도박에 빠졌다. 이때 석륵이 반격하니 낙양성 북서쪽 금용성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유요는 술에 취한 채 전투에 임했다가 크게 패배하고 도주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후조군의 포로로 잡혔다. 석륵은 일단 유요를 수도 양국으로 압송한 후, 유요에게 그의 장남 유희에게 보내는 항복 편지를 쓰게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석륵은 분노한 나머지 유요를 죽였다.

유요의 아들들과 일족들은 모두 전조가 멸망할 때 처형당했지만 유요의 딸 안정공주 유씨는 살아남았다. 안정공주는 석호의 첩이 되어 나중에 석호가 황제로 즉위하자 귀인 유씨가 되었다. 유씨는 태조 무황제 석호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인 석세를 낳았다. 하지만 유요의 외손자인 석세는 제위에 얼마 있지도 못하고 석준에게 쫓겨났으며 그의 어머니 유씨와 함께 죽었다.

3. 일화

이전에 유요는 낙양을 함락시키고, 서진 제2대 황제인 혜제 사마충의 황후였던 양헌용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는데 이때 일화가 유명하다. 유요가
"사마씨 꼬맹이와 나를 비교하면 어떤가?"
라고 물으니 양헌용은
"사마충은 암군으로 나라를 말아먹어 이 꼴로 만들었는데 비교할 게 있나요? 공(유요)을 보자 진짜 남자가 어떤지 알게 되었죠."
라면서 전 남편인 사마충을 깠다. 유요는 양헌용을 총애해서 나중에 황제로 즉위하자 그녀를 황후로 삼았고, 양헌용은 유요와의 사이에서 장남 유희를 비롯한 세 아들을 낳았다.

322년에 양황후가 죽었는데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장인 양현지를 위해 영원릉(永垣陵)을 만들어 이장시키고 그녀는 현평릉(顯平陵)에 장사지냈다. 유요는 그녀를 기리고자 엄청난 돈을 들여 그녀와 그 부친을 위해 능묘를 만든 것이었다.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밤낮을 쉬지 않고 건설했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의 희생이 많아지자 원망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무덤 건설 공사를 위해 그 부지에 있었던 오래된 무덤을 밀어버리고 시체들은 황야에 버렸는데 그 시체들에서는 악취가 나고 전염병이 돌아 이에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호소했다.
"두 묘는 만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하여 하루 60,000명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지금까지 600만 명의 공력이 들어갔습니다. 벌써 3개의 연못을 만들었고 높이가 100척이나 되는 산만한 언덕이 생겼습니다. 뼈들이 온 땅에 널려 있고 인부들의 탄식 소리가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또한 나라와 폐하와 황후에게도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요는 복지부동이었고, 끝내 두 개의 능을 완성시켰다. 특히 현평릉은 양황후가 이미 묻혔지만 나중에 자신을 합장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하지만 훗날 유요가 석륵에게 죽임을 당하고 전조가 멸망할 무렵, 황후 양헌용이 묻혔던 현평릉은 표적이 되어 도굴되고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4. 기타

진서》에 유요가 붙잡혀 폐위되는 과정을 후조를 세운 유목민 세력인 갈족의 언어로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갈족이라는 민족의 정체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터라서, 이 내용이 언어학자들에게 대단한 떡밥을 제공하고 있다. 즉
"秀支替戾岡 僕谷劬禿當"
이라는 문장이 그것인데, 여기서 수지(秀支/si̯u-ci̯e)는 군(軍)을, 체려강(替戾岡/tʰei-let, lei-kɑŋ)은 나오다(出)를, 복곡(僕谷/bok, buk-kuk, yok)은 유요의 오랑캐 직위 이름(劉曜胡位)을, 그리고 구독당(劬禿當/ɡi̯u̯o-tʰuk-tɑŋ)은 붙잡다(捉)를 일컫는다고 해설되어 있다.

여러 학자들이 이 문장을 튀르크어족[4][5] 내지는 예니세이어족[6]에 속하는 언어로 보아 재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혹은 아리아인과 연관지어 고대 영어 혹은 고대 노르드어를 참고해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문장인 Fylki dragan, Prōcūrātor clūs tūr takan[7]으로 재구성한 시도도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황이다. #

최근에는 시베리아 중부에 살고 있는 소수 종족인 케트족과의 연관성을 찾는 학자들이 늘어났다. 케트어 예니세이어족[8]에 속하는데, (羯)의 중고한어 발음 'Kiat'와 '케트'(Ket)의 발음이 유사한 점, 갈어의 동사 어미 -ŋ이 예니세이어족의 일반적인 동사 어미와 동일한 점, 갈어 단어 '구독당'(劬禿當)의 재구 발음 "kot-o-kt-aŋ"이 케트어 문장 "d-kas-a-qos-n"(그들이 잡을 것이다)과 유사한 점을 근거로 한다. 다만 "kot-o-kt-aŋ"의 /t/ 발음이 케트어 발음 /s/에 해당되는 품포콜어 발음 /t/의 특성을 보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동아시아 제어 연구의 권위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갈족이 몽골 북부에 거주했던 예니세이어족 계통의 민족인 품포콜족 친연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품포콜어의 형제격 언어인 아린어에서 싸움을 'Kel'이라고 하는데, 이는 재구된 갈어에서 군대를 의미하는 'Suke'의 두 번째 음절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나 연관성이 의심되어 보빈은 이를 흉노어에서 온 차용어라고 제시했다.

5. 가족 관계

5.1. 아내

  • 원도황후(元悼皇后) 복씨(卜氏) - 유요의 첫 번째 부인으로 유요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고, 즉위한 후 원도황후로 추존했다.
  • 헌문황후(獻文皇后) 양씨(羊氏) - 이름은 양헌용(羊献容). 원래는 서진의 혜제 사마충의 황후였으며 영가의 난 때 사로잡힌 후 유요의 부인이 되었다. 복씨가 사망하고 유요가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었으며 322년에 사망했다.
  • 헌열황후(献烈皇后) 유씨(劉氏) - 헌문황후 양헌용이 사망한 후 맞아들인 황후로 326년에 사망했다.
  • 황후(皇后) 유씨(劉氏) - 이름은 유방(劉芳). 물론 한고조와는 무관하다. 헌열황후 유씨의 사촌 여동생으로 헌열황후 사망 후 맞아들인 황후이다. 유요가 석륵과 싸우다가 패사한 후로는 기록이 없다.

5.2. 자녀

  • 태자(太子) 유희(劉熙) - 헌문황후 양헌용의 소생으로, 부황 유요가 석륵에게 처형당한 후 뒤를 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대항을 하지 않고 수도 장안을 버린 후 달아났으며 나중에 유씨 황족 및 고관대작 등과 함께 사로잡혀 석륵에 의해 처형되었다.
  • 임해왕(臨海王) 유검(劉儉) - 원도황후 복씨 소생
  • 남양왕(南陽王) 유윤(劉胤) - 원도황후 복씨 소생
  • 장락왕(長樂王) 유습(劉襲) - 헌문황후 양헌용 소생
  • 태원왕(太原王) 유천(劉闡) - 헌문황후 양헌용 소생
  • 회남왕(淮南王) 유충(劉沖) - 생모 미상
  • 제왕(齊王) 유창(劉敞) - 생모 미상
  • 노왕(魯王) 유고(劉高) - 생모 미상
  • 초왕(楚王) 유휘(劉徽) - 생모 미상
  • 안정공주(安定公主) 유씨 - 후조 제3대 태조 무황제 석호의 부인이 되어 그의 아들 석세를 낳았으나, 내란에 휘말려 아들과 함께 석준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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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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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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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척 조카. [2]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220cm가 나온다. [3] 전한 태조 고황제(유방), 후한 세조 광무제(유수), 촉한 열조 소열제(유비), 효회제(유선). [4] 1922년 핀란드의 외교관이자 언어학자인 구스타프 J. 램스테트가 재구한 문장으로 Sükä talıqın bügüg tutun!(전쟁에 나가 복곡을 잡아라!)이었다. [5] 1948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루이스 바쟁이 재구한 문장으로 Süg tägti ıdqaŋ boquγıγ tutqaŋ!(군대를 보내어 공격하고, 지휘관을 잡아라!)이었다. [6] 미국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이 재구성한 문장으로 suke t-i-r-ek-ang bok-kok k-o-t-o-kt-ang(군대가 나갔으니 복곡을 잡아올 것이다)였다. [7] 군대가 나오면 프로쿠라토르[9]를 잡아 탑에 가두리라. [8] 이 어족을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 및 유전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 알래스카 캐나다 서부의 원주민 어족인 나데네어족과 묶는 데네예니세이어족이라는 가상의 어족 학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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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대 로마에서는 황제 속주의 행정관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