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5 01:44:55

사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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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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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기(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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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해 유총 유요
104 · 105권 「석륵전(石勒傳)」 106 · 107권 「석계룡전(石季龍傳)」
석륵 석계룡
108권 「모용외전(慕容廆傳)」 109권 「모용황전(慕容皝傳)」
모용외 모용황
110권 「모용준전(慕容儁傳)」 111권 「모용위전(慕容暐傳)」
모용준 모용위
112권 「부홍등전(苻洪等傳)」 113 · 114권 「부견전(苻堅傳)」 115권 「부비등전(苻丕等傳)」
부홍 · 부건 · 부생 부견 부비 · 부등
116권 「요익중등전(姚弋仲等傳)」 117 · 118권 「요흥전(姚興傳)」 119권 「요홍전(姚泓傳)」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홍 요홍
120권 「이특등전(李特等傳)」 121권 「이웅등전(李雄等傳)」
이특 · 이류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전(呂光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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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모용수전(慕容垂傳)」 124권 「모용보등전(慕容宝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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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권 「걸복국인등전(乞伏國仁等傳)」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126권 「독발오고독발이녹고독발녹단전(禿髪烏孤等傳)」
독발오고 · 독발이녹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전(慕容徳傳)」 128권 「모용초전(慕容超傳)」
모용덕 모용초
129권 「저거몽손전(沮渠蒙遜傳)」 130권 「혁련발발전(赫連勃勃傳)」
저거몽손 혁련발발
}}} ||
서진 추존 황제
太祖 文皇帝
태조 문황제
파일:attachment/samaso.jpg
사마소 초상화 (오른쪽 인물. 왼쪽 인물은 사마유)
묘호 태조(太祖)
시호 문왕(文王) → 문황제(文皇帝)
작위 신성향후(新城鄉侯) → 진왕(晉王)
출생 211년
사망 265년 9월 6일
능묘 숭양릉(崇陽陵)
재위 조위의 진왕(晉王)
264년 ~ 265년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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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司馬)
소(昭)
자상(子上)
부모 아버지 사마의, 어머니 장춘화
형제 9남 2녀 중 차남
동복형 사마사, 이복동생 사마륜
자녀 서진 세조 무황제 }}}}}}
1. 개요2. 정사3. 연의4. 평가5. 기타6. 가족 관계7. 미디어 믹스

1. 개요

사마의 장춘화 차남으로 사마사의 친동생이다. 211년 출생, 265년 사망.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의 부친.

사마소 사후 아들 사마염이 진왕이 된 후에는 사마소에게 문왕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이후 조환에게 선양을 받고 황제가 된 후에는 묘호를 더해 태조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하였다. 진왕으로의 재위 기간은 264년부터 265년 9월 6일까지. 자는 자상(子上).

2. 정사

238년 의 대신으로 신성향후(新城鄉侯)라는 지위를 받았다. 249년에는 사마의, 사마사와 함께 고평릉 사변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 사마의는 모든 획책을 사마사와 함께 도모했는데, 이 과정에서 차남인 사마소는 완전히 소외당했고 그가 아버지와 형에게 전말을 듣게 된 것은 거사 바로 전날(!)이었다. 덕분에 사마사는 거사 전날에 마음 편히 자는데도 사마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마사가 하후현을 죽일때도 눈물을 흘리며 구명을 요청했다.

실재하는 그의 군 경력은 낙곡대전에 참전한 것을 시작으로, 북벌을 시도하는 강유와 교전하거나, 왕릉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사마의의 출병에 동행하는 등 나름대로 군사 경험을 쌓아나갔다. 다만, 252년에 있었던 동흥 전투에서 그는 독회북제군사(督淮北諸軍事)로서 준 사령관급 위치에 있었으나, 제갈각, 정봉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는 부하 왕의[1]로부터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직언을 듣고는 격노하여 왕의를 처형하였다. 이후 동흥 전투 당시 동관에서 패전한 책임을 지고 작위 일부를 잃었다.

아버지의 쿠데타로 인하여 형과 함께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아버지와 형이 차례로 죽자, 자신이 그 직위를 계승했다. 직위명은 대장군(大將軍) 시중(侍中)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史) 녹상서사(錄尙書事).[2]

정사에 따르면 사마사가 관구검 문흠의 반란을 진압하고 회군 중에 사망하였기에, 사마소가 대신 군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한다. 낙양의 조모는 군을 수도 밖에 머무르게 하고 사마소 혼자 입궐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종회의 건의를 채용한 사마소가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낙양으로 진군하였고, 이 때문에 조모는 할 수 없이 사마소에게 사마사가 생전에 가졌던 모든 직위를 그대로 물려주게 되었다.

257년 제갈탄의 난이 일어나자 종회, 가충을 참군으로 삼고, 왕기, 주태, 석포, 호분를 이끌어 난을 진압했다. 이때 토벌군 소속인 만위, 만장무가 병을 이유로 토벌군에서 빠지려하자 만위를 서민으로 강등하고 만장무를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또한 제갈탄이 죽고 난이 진압되자 제갈탄을 따르던 병사들이 그를 따라 죽겠다고 했는데, 보통은 이럴 경우 이들의 의기에 감복하여 살려주고 미덕의 일화로 남는데 모두 죽이는 등 잔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반면에 항복했던 문앙, 문호, 당자, 전단 등 오나라 인물들은 살려주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260년 4월 사마소는 진공, 상국의 지위와 구석을 조모로부터 하사받았으나 거부하고 받지 않았다. 당연히 이건 아직 그러한 대우를 받기 부족했던 사마소에게 일부러 예전의 찬탈 지망생들이나 받을만한 직위들을 퍼부어서 사마소를 높은 데서 떨어뜨리려고 했던 조모의 고단수 책모로써, 이걸 받아들이면 사마소는 동탁이나 훗날의 환씨 일가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는 거부하면서 겸손을 가장하여 황제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술수가 더 적합했다. 조모는 때문에 사마소의 행위에 분노를 느낀 바도 있고, 아니면 258년 동오의 실권자 손침이 황제 손휴에 의해 토벌된 것에 자극을 받았던 가능성도 있고 해서 사마소를 토벌하려 했다. 조모는 5월에 갑자기 '사마소의 마음은 행인들도 알고 있소.[3] 짐은 이대로 계속 치욕을 감당할 수 없소. 오늘이야말로 경들과 함께 사마소를 치러 나가겠소'라면서 사마소를 참살하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상서 왕경, 시중 왕침, 산기상시 왕업을 불러 품안에서 조서를 꺼내며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조모는 이들을 믿었기에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은 것이지만 왕침과 왕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왕경은 홀로 말렸다. 그래도 조모는 꿋꿋히 강행했으나, 병권이 이미 사마씨에게 장악된 상황이라 변변한 병사들을 모을 수 없었고 조모가 부릴 수 있는 병력은 노복이나 환관들뿐이었다. 왕침과 왕업은 왕경에게 자신과 함께 사마소에게 알리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왕경은 거절했다. 이에 둘은 사마소에게 일러바쳤고 계획은 누설되었다.

할 수 없이 조모는 그나마 모인 소수의 부하들을 데리고 친히 북을 울리며 사마소를 치러 출병했다. 도중에 둔기 교위 사마주를 만나자 고함을 질러 물리치고 운룡문과 지거문을 나섰다. 그러나 동화문 앞에서 사마소가 보낸 가충이 지휘하는 정예 병력에 가로막히고 겁먹은 병졸들이 흩어지자 스스로 검을 빼들고 싸웠다. 하지만 병사들은 감히 황제를 공격할 수 없어 이러저리 몸을 피하기 바빴다. 이 때 가충의 부하였던 성제가 망설였으나, 가충이 '사마공께서 너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은 오늘을 위해서였다. 뭘 망설이는가?'라며 다그치자 병사들은 그제서야 공격했다. 이때 성제가 닥돌하여 조모를 창으로 찌르고 칼로 등을 꿰뚫었고 조모는 연(輦)에서 떨어져 죽었다.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황제를 죽인 꼴이 되자 사마소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졌다. 이를 무마하고자 사마소는 조모가 명원황후를 시해하려 했다고 둘러대며 조모 시해의 책임을 모두 성제, 성쉬 형제에게 떠안겼다, 이후
"신이 듣기로 신하의 절조는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고 군주를 섬기는 도의는 감히 재난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 일에 발생한 변고는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재앙은 마치 화살이 발사된 것 같으니 신은 진실로 몸을 바쳐 죽음을 지키고 오직 운명의 판단을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략이 위로는 황태후를 위험하게 하고 종묘를 전복시킬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신은 부끄럽게도 신하의 우두머리이고 대의는 국가를 편안히 하는데 있는지라 끝없이 경고를 하며 황제의 수레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성제가 망령되이 진중에 들어가 이로써 커다란 변고가 발생하게 됐으니 신은 슬프고 고통스러워 오장육부가 찢어질 것 같습니다. 성제는 국군을 범하고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혔으니 죽여도 부족하므로 그의 가족들을 잡아다 정위에게 넘겨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명원황후는 이 말을 들어 성제의 삼족을 멸하였다. 공경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왕 조우의 아들 상도향공 조환을 황제로 세웠다. 하지만, 성제가 단지 실행자에 불과하다는 건 사마소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다 알았으므로, 이 후 선양의 정당성이 크게 떨어져 서진의 건국은 촉한 정벌 이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중국인들은 한진춘추에 나오는 사마소가 조모 시해 후 "천하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겠는가"라고 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기서 천하사람이란 백성이 아니라 대귀족들이다. 사마씨도 귀족세력이고 귀족들의 지지로 올라갔는데 황제를 살해한 일을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확신을 못하겠다는 뜻이다.' 이 해석이 정말로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대 중국인들이 사마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있을것이다.

사마소는 조환을 황제로 옹립한 뒤, 3월 조서를 내려 대장군부에 사마 1명, 종사중랑 2명, 사인 10명을 증치했다. 이후 사마소는 오보단 촉을 쳐야한다고 말하고 촉을 취하고 3년 뒤에 파촉의 순류를 따라 수륙으로 양동 작전을 펼친다면 이것은 우나라를 멸망시키고 괵나라를 평정하는 것이요 한나라를 삼키고 위나라를 겸병하는 형세라고 했다. 사마소가 계산해보건대 촉나라의 전사는 9만 명 정도 되는데 성도를 수비하고 나머지 군을 지키는 군대는 4만명보다 적지 않을 것이고 나머지는 불과 5만 명 정도이니 강유를 답중에 묶어 놓아 그로 하여금 동쪽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고서 곧바로 낙곡에 이르러서 촉나라의 공허한 지방으로부터 출병하여 한중을 습격하여 병력을 분산시키고 검각과 관두의 험요지를 떨어뜨리면 유선은 우매하므로 항복할 것이라고 하면서 등애와 종회로 하여금 촉한을 정벌하도록 명령하였다.[4]

동년 10월, 한참 촉정이 이루어지던 중 사마소는 그토록 사양하던 진공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촉정과 동시에 그토록 사양하던[5] 진공의 자리를 받은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애당초 촉정 이후 사마소는 진공-진왕까지 불과 1년여 사이에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고 종회와 몰래 촉정을 논의한 이후 신료들에 반대에도 불구하고 촉한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즉, 촉한을 멸한 공으로 진나라 개국의 반석을 세우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촉한을 멸한 후 곧바로 진왕이 되었다. 이것은 이미 일반적인 선양으로 제위를 강탈하기엔 사마씨가 저지른 것이 너무나도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적어도 조조는 헌제의 주변 황족들이나 신하들을 많이 살해하거나 시해했어도 황제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헌제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며 국구가 되었지만, 사마씨는 황제 하나는 폐위하고 다른 황제 하나는 백주 대낮에 처참하게 살해해버린 전대미문의 패역을 저질렀다. 명분이 매우 부족하기 그지 없던 것이다. 사마소의 촉정은 바로 이런 바탕하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6]

이후 등애와 종회의 갈등으로 혼란이 발생하자, 함희 원년 봄 정월 감거를 보내 등애를 잡아왔다. 을축일 사마소가 천자와 함께 서정을 위해 장안에 주재하였다. 이때 여러 왕후들이 모두 업성에 있었는데 종사중랑 산도에게 군사 사무의 처리를 명하고 업성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호군 가충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 여러 군대를 감독하며 한중에 거수하도록 하였다. 종회가 이에 촉에서 촉한의 구신 강유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감군 위관, 우장군 호열이 종회를 공격하여 죽였다.

당초에 종회가 촉국을 공격하던 때 서조속 소제가 사마소에게 말하길 “종회는 믿기 어려운 사람이니 그로 하여금 출병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사마소가 웃으면서 말하길
“촉나라를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쉬운데도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안 된다고 했지만 유독 종회만이 나와 의견을 같이 하였네. 촉을 멸망시키고 난 후에 중원의 장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촉국의 남겨진 백성들은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품을 테니 비록 반란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한들 그렇게 할 능력이 없네”
라고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사마소의 예견처럼 되었다.

결과적으로 실제 지휘관들은 죽거나 공을 세우지 못하고 끌려가거나 했으니 그 공은 결국 사마소가 빼앗아 독차지한 셈이 되었다.

그 후 조환은 3월 기묘일, 사마소가 촉정을 위해 장안에 있다가 낙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마소의 작위를 왕으로 올리고 이전의 봉토를 합해 20군으로 증봉하였다. 여름 5월 계미일 천자는 무양선문후를 진선왕으로 무양충무후를 진경왕으로 올렸으며 이후 중무군 신창향후 사마염을 진나라의 세자로 봉했다. 본디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가충의 반대로 장남인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목했던 것. 이후 사마소는 12개의 끈이 있는 면류관을 쓰고 천자의 깃발을 세우며 출입할 때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고 금근거를 타며 6마리의 말을 묶고 오시부거를 갖추어 쓰고 모두와 운한을 설치하며 팔일무를 악무로 쓰고 악대는 종을 4열로 늘어놓고 쓸 수 있으며 지위를 연왕보다 높게 하였다.

왕비를 왕후로 높이고 세자를 태자로 높이며 왕녀, 왕손의 작호를 전부 황제의 예법과 동일하게 하였다. 궁중의 금기중에 번잡하고 세세한 것들과 법식 중에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은 모두 사마소가 주청을 올려 없앴다. 진나라에 어사대부, 시중, 상시, 상서, 중령군, 위장군 등의 관직을 설치했다. 가을 8월 신묘일에 중풍으로 쓰러져 노침에서 죽으니 당시 나이가 55세였다. 9월 계유일 숭양릉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문왕이라 하였다. 이후 아들인 사마염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묘호를 더해 사마소를 태조 문황제로 추존하였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자가 자상(子尙)이라고 나온다. 연의에서 그려지는 그의 모습은 제갈량의 북벌에서 그가 아버지와 형과 함께 자주 종군했다고 제갈량에게 털린 것으로 그려지지만, 형과 마찬가지로 사마소 생전의 종군 경험 중 대부분은 나관중의 창작이다.[7] 실재하는 그의 군 경력은 제갈량의 북벌 이후 낙곡대전 정도. 대부분의 행적은 정사와 비슷하다.

사마소가 대권을 더 오래잡아서인지 그의 아들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반영한 셈인지 형인 사마사보다 더 타고난(?) 기린아로 묘사된다. [8] 그리고 연의에서는 사마사가 죽을 때 동생에게 '무거운 짐을 드디어 덜을 수 있고 이제 네 차례다'라는 둥 야심가적인 면모는 동생에게 넘어간 대신 형으로서의 책임감, 의무감을 느끼는 모습을 더 부각시킨다. 실제로는 사마사가 진정한 야심가였고 사마소는 형의 급사로 비교적 예기치 못하게 짐을 떠맡은 상황에 비하면 정반대의 서술이며, 대중 매체에서도 이런 식으로 사마사, 사마소 형제를 묘사한다.

4. 평가

진(晉)의 기틀을 완성했으나 위의 조조,조비처럼 황가 시해라는 전무후무한 패륜을 저질러 당대에 황제가 되지는 못한 인물. 멀쩡한 황제를 백주대낮에 죽이고 책임도 안 지는 전무후무한 찬탈 지망생이었고 때문에 당대에나 후대에나 엄청난 비난을 받지만, 애초에 조위 건국 과정이 정상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는 편은 아니었다. 서진의 무리한 등장은 애초에 후한 조정을 온갖 술수로 무력화하다가 탈취한 조위의 등장에서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외로 사마소 자체는 권력자가 되기 전까지는 다른 사마씨들보다 어딘가 어수룩하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물론 사마의도 제갈량과의 결전에서는 병사들도 거의없이 텅빈 성에서 혼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제갈량을 거문고의 음악 소리만 듣고 10만대군의 절대 우세속에서도 적당히 놓아주는 풍류를 보이거나 촉의 비난,도발에도 철저히 수성 전략만 하면서 사신에게 제갈량의 노년과 건강을 걱정하고 적당한 대치 균형 전략과 병사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상당히 현명한 인간적인 면모들도 있었다. 사마소도 권력을 잡기 전에는 아버지의 쿠데타를 하루 전에 안다든가, 하후현과의 친분을 이유로 이 하후현을 죽이려고 할 때 말리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또한 예전 사마의 3부자가 제갈량의 식량기지 화공에 타서 죽을뻔했던걸 비가 내려서 기사회생으로 살아난것처럼 철롱산 정상에서 촉나라 강유에게 갇혀서 군사들이 물고갈과 기아에 허덕이자 사마소가 철롱산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죽을 결심을 하면서 군사들에게는 촉에 항복해서 목숨을 건지라는등 비범한 인간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는 철롱산에 하나밖에 없는 샘물에 물이 넘치도록 기도를 올려서 샘물이 말라버리면 자신은 그자리에서 죽고 군사들은 촉에 모두 항복해서 목숨을 건지라고 지시했는데 샘물이 넘쳐흘러서 촉을 격파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나서는 부형에 뒤떨어지지 않는, 어쩌면 그 이상으로 냉혹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잡을 때 행적이나 용인술을 보면 그의 리더십이나 정치력에 문제가 꽤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형 사마사는 부하들의 패배의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는 냉철한 판단력이 있었고, 사마사 시기에 핵심 군사 참모인 부하와 우송만 봐도 그렇게 흠잡을 인물들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한 조방을 죽이지 않고 폐위시켰으며, 조방의 황후도 폐위만 시켰지 죽이진 않았다. 후세 사람들이 사마사를 도덕적으로 역적이자 불충이라 하지만 살벌한 당시 정황을 보면 사마사는 사실 조조보다도 뛰어난 자제력을 보였던 것이다. 사마사는 자신에 반대하는 자는 냉혹하게 제거하지만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에게는 관대한 간웅의 인간미 또한 있었다. 그러나 사마소를 사마사와 비교해보면, 그의 찬탈 행로는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관성에 이끌려 형의 레일을 충실히 밟아왔으되 스스로 새로운 레일을 깔지는 못했다.

당장 사마소는 사마사 생전 당시에도 동흥 전투의 패전 책임을 묻는 왕수의 아들 왕의(王儀)를 죽이는 행보를 보이며 형과는 달리 일처리가 다소 감정적이었고, 이 때문인지 후에 제갈탄이나 종회가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마소의 행적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고귀향공 시해, 이 시해 자체도 현위[9] 황제를 권신이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살해한 역적 짓이라 사마씨 정권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굉장한 문제지만 사마소는 이 모든 책임을 조모에게 덮어 씌웠으며, 자신의 최측근 정치 깡패 가충에게도 최소한의 책임을 지게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사실상 명령만 받았을 뿐인 말단 실무자들만 죽여 사실상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신을 반항하거나 방해하는 세력에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것은 아버지나 형과 비슷하지만 적어도 사마의나 사마사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들까지 사마소처럼 자신에 입지가 불리하다 싶으면 책임전가하거나 비정하게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아끼거나 자신의 책임을 자신이 지었다.

사마소 본인은 조모가 죽자 막상 어찌할 바를 몰라서 쩔쩔맸는데 조모의 친위 쿠데타에 황제를 죽이길 망설이는 부하들에게 '사마공이 이럴 때를 위해 너희를 키워 주신 것이다'라며 가충이 살해를 부추긴 정황을 보면 사마소는 언제든지 황제가 거슬릴 경우 죽여 없앨 생각을 해놓았으면서 막상 정말로 죽여버린 다음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걸 가충이 단독으로 실행했다고 해도 문제인게 사마소는 이런 막나가는 짓을 저지르는 가충의 전횡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그를 통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사마소가 당황한 행적을 보면 조모가 죽은 것은 진짜 돌발 상황일 가능성도 꽤 있지만, 애초에 조모의 친위 쿠테타 직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사마소 측에서 대비를 했다고 사서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사마소는 황제를 죽일려고 마음을 먹은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조모를 무조건 생포한 다음 나중에 유폐하든 독살하든 했어야 하는데, 대체 누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황제가 백주대낮에 창 맞아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게 사마소의 결단이 아니라 정말 가충의 독단이었다고 해도 이런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인물을 버리긴커녕 끝까지 비호한 게 사마소이다. 이러고도 역적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면 그건 도둑놈 심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마소의 정권 탈취 과정은 어수룩하고 냉정함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럼에도 사마소가 사마염에게 물러준 치세는 태평한 치세였다고 정사 삼국지 위서에선 적고 있다. 갑자기 어디서 황색옷 입은 신비한 거인이 나타나서 지금은 마땅히 태평한 시대라고 말했다 얘기인데 이 기록이 나타나자 마자 바로 사마염에게 선양했다는 기록이 바로 뒤를 잇는 것을 보면 대놓고 속보이는 선양을 위해 꾸민 도참일 뿐이었다.

보면 사마소는 다른 인재라면 몰라도 유독 정치 깡패로서는 최고지만 참모로나 관료로서 최악의 인물인 가충을 끝까지 비호하면서 가충을 죽여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양신 진태를 사실상 버렸으며 등애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자기 눈밖에 났다고 일족을 사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충 같은 인물을 자신의 기호에 맞는다고 세력가로서 사마씨 황제를 떠받들게 만들었다. 결국 이건 아들 사마염 대에서도 문제의 소지를 만들었고 가충 일가의 전횡은 결과적으로 서진 멸망의 시초를 부르는 사태까지 만들게 된다. 진 황권이 이 사건으로 인해 미약해졌다는것은 100%. 거기에 조모 살해 사건 탓에 사마소는 결코 황제로 즉위할 수는 없게 되었고, 끝내 신하의 몸으로 죽었으니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었던 건 부정할 수 없었다.

5. 기타

2016년 2월 16일 중국 정부는 사마소지심 로인개지(司馬昭之心, 路人皆知)라는 성어[10]를 들며 한반도의 사드 배치에 대해 반발했다. 이것만 봐도 중국에서 사마소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조모 참살이 준 충격이 그만큼 크기 때문인데 아버지 사마의는 실제 어쨌든 생전에 권신에 그쳤기에 현대에는 그의 공적과 처세에 주목한 추종자들이 꽤 있지만 황제를 참살한 역신 사마소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실질적으로 찬탈의 레일을 깐 형 사마사보다도 훨씬 나쁘다. 사마소가 자신의 아버지 형보다 더 욕먹는 경우가 황제 시해도 있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후안무치하게 명령대로 한 것밖에 없는 부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것이다.

제갈량의 병법을 높게 평가했는지 자신이 아끼는 장수 진협에게 문제가 촉한을 멸망시킨 후에 제갈량의 진법과 그것을 운용하는 방법, 갑을교표치(甲乙校摽幟)로 지휘하는 요령 등을 진협에게 주라는 영을 내렸다. 진협이 지휘하는 부대는 진형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기강이 매우 삼엄하였다.

사마소 말년에 후계자이자 진나라 초대 황제로 사마유가 될 뻔했다. 사마유는 사마사의 친자가 아닌, 사마소의 차남으로 사마사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그렇기에 [11] 사마소는 본래 진은 형님이 세운 나라라고 하면서 사마유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사마소가 신하들에게 사마염이 후계자라는 정통성을 각인시키고 후에 일어날 수 있는 후계자 분쟁을 조기에 제거하기 위해 쇼맨십으로 일부러 떠봤다는 의견도 있다.[12] 그 외로 애초에 사마염보다는 사마유에게 마음이 잠깐 더 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원론적인 견해도 있다. [13]
여담으로 진서 문제기에 있는, 사마소가 진왕에 즉위할 때 당대의 허수아비 위나라 황제 조환이 내렸던 이라고 쓰고 사마씨 일당이 열심히 썼다고 읽는 진왕 책봉 조서를 보면 사정을 아는 후세 사람이 비웃게 되는 대목들이 있다.

이 조서는 사마소가 왜 진왕이 되어야 하는지 그 공로를 언급하는데 ' 관구검, 문흠의 반란에 이르러 공은 백성들을 구조하고 어루만지며 명을 받들어 병사를 일으켜 군사를 통솔하는데 법도가 있는 바 이로 인해 회수(淮水) 양안이 안녕을 얻었다.'라는 대목은 관구검의 난 진압이 사마사의 공이니 사마소가 형의 공을 가로챈 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파촉이 누차 침범하여 소란을 일으키니 서쪽 지방이 안녕하지 못했는데 공은 기이한 책모를 내어 지점을 가리켜 작전을 하달하니 천리 밖에서 승리를 얻을수 있었다. 단곡(段谷)의 싸움에서 기회를 타서 크게 이겼으니 장수를 참하고 깃발을 뽑아 죽인 적군의 숫자를 만 단위로 헤아렸다.'라는 건 대목은 실제 공보다 뻥튀기[14]'촉장 10명을 죽이고 수급 천 개를 얻었다'고 등애 개인에게 벼슬을 내리고 치하하기 위해 내린 조서로서 기록되었다.]에 자신이 일족을 주멸시킨 등애의 공을 빼앗아 자신의 공으로 만들었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자화자찬과 남의 공 빼앗기 및 부풀리기는 이 대목에 비하면 그저 조족지혈에 불과한 것이다.
종전 왕실에 재난이 있었는데 변고가 왕실 내부에서부터 말미암았으나 다행히 공의 위령에 힘입어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다. 종묘의 위기를 안전으로 바꾸고 국가를 패망으로부터 안녕으로 향하게 하였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대목은 사실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것이다. 문장 자체를 고쳐 사실대로 쓴다면, 아마도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종전 왕실에 명군이 있었는데 희망은 왕실 내부로부터 말미암았으나 불행히도 역적의 위세에 힘입어 어려움이 생기고 말았다. 종묘의 안전을 위기로 바꾸고 국가를 안녕으로부터 패망으로 향하게 하였다.

가히 후세 사람들에게 심심할 때 큰 웃음을 주려고 일부러 이렇게 썼는지, 아니면 정말로 이전의 찬탈자였던 조씨가 몇십 년도 못 가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도 사마씨의 천하가 천년만년 갈 거라고 근자감이라도 있었는지 모를 대목이다. 어쨌든 진짜 사실을 아는 후대 사람들 입장에서 읽는다면 웃픈 문장이다.

6. 가족 관계

7. 미디어 믹스



[1] 왕수의 아들. [2] 강유의 직위와 거의 같다. 강유의 경우 대장군 독중외군사 녹상서사 영양주자사. [3] 사마소지심로인소지(司馬昭之心路人所知)의 유래. [4] 결과적으로 사마소의 예상은 세부적으로 틀렸지만 적중했다. 사마소가 이렇게 나올것은 강유도 알고 있었기에 고립을 피하려고 음평과 양안 교두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유선이 씹었음에도 등애와 제갈서는 강유를 붙잡는 데 실패하였고 결국 검각을 위군의 주력이 돌파하지 못했지만 유선의 항복을 정확히 예측했다.. 또 촉한의 병력은 사마소의 예상보다 많은 10만 2천 명[email protected](제갈첨이 이끌다가 등애와의 싸움에서 전멸한 병력, 기타 양안 관구 함락 당시 소모된 병력 등) 정도였으니 이 역시 오차 범위 이내에서 맞췄다고 할 수 있다. [5] 조환의 조서에 따르면 여덟아홉이나 사양했다고 한다. [6] 이런 논리는 배수가 '대진이 용흥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우주를 깨끗하게 하는데 있어 용촉(庸蜀)으로부터 시작하였다'라고 언급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은 후일 '사마씨는 진짜 정통인 촉한을 멸함으로써 정통이 되었다'는 촉한정통론으로까지 이어진다 볼 수 있다. [7] 연의의 강유의 2차 북벌에서 사마소가 철롱산 정상에서 촉한의 강유의 군대에 갇힌 철롱산 포위전도 연의의 창작이다. [8] 사마의가 제갈량의 계략으로 조예에게 의심을 받아 쫓겨난 이후 한탄할 때 사마사는 조심스럽게 '위주가 아버님을 써주시지 않아서 그러냐'고 물었던 반면 사마소는 '머지않아 조정에서 아버님을 부르실 거다'라고 날카롭게 분석했고, 실제로 곧 조정에서 사마의를 다시 소환했다 [9]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써서 자주 틀리는 표현인데, 황제나 왕 따위는 일종의 신분이지 직업이나 직무가 아니라서 전직, 현직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ex) 제위, 왕위, 복위 [10] ‘사마소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도 다 안다’는 뜻으로 사마소에게 시해당하는 조모가 했던 말이다. 사마소가 겉으로는 충성하는 듯하지만 길가는 사람도 그게 아니라는 걸 잘안다는 의미로 한반도 사드는 북한을 겨냥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의미다. [11] 사마사 생전에 사마유가 양자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사마사가 죽은 후에 사마사의 가계로 입적 되었는지 불확실. [12] 천하는 사마사의 것이다라고 하는 발언 자체의 의도를 이와 같이 생각해 보면 '네, 그렇습니다.'하면서 동조할 신하는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내부 숙청에 거리낌이 없는 사마소를 상대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13] 만약 사마유가 사마사 생전에 양자로 입적 됐으면 그 당시에 후계자 없는 형을 위해서 아들을 바쳤으나 사마사가 급사하니 족보가 꼬여서 떠봤다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고, 아니면 사마사 사후에 사마유를 사마사의 가계로 입적했으면 큰 아들 사마염보다 더 높은 서열을 작은 아들인 사마유에게 프로젝트처럼 후계자리를 의도적으로 마련했고 마음이 사마유에게 더 갔다는 견해의 무게가 더 실린다. [14] 단곡 이전 서부 전선에서 수만 명을 연이어 잃고 침울해있던 조모가 모처럼의 승리에 기뻐하면서 사로잡고 죽인 자가 만 명이라고 신하들 앞에서 뻥튀기 한 걸 여기선 아예 전사자 만 단위로 또 부풀린 것이다. 정작 이 공로의 진짜 당사자인 등애의 열전에는 실제 단곡에서 그의 승리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