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6:12:55

부흥운동


1. 개요

부흥운동(復興運動, revivalism)은 한국사에서 이미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던 일련의 과정들이고, 이 단어를 중국에서는 정치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화적인 의미에서 사용한다. 부흥은 쇠퇴했던 것을 흥하게 한다는 뜻이다.

2. 논의점

통일신라 이후 후백제 후고구려같은 부흥 운동을 '진짜 유민들'이 일으킨 게 아니라는 이상한 주장이 있지만, 멸망한 지 시간이 얼마 안 흘러야 하고 통일신라가 융화 정책을 시도라도 안 했을 상황에서만 있는 게 '진짜 유민'이란 관점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혼자 지어내는 얘기다. 이런 종류의 억지는 1945년에 조선인 따위는 없었고 죄다 일본 제국 신민이었다고 아직까지 헛소리하는 일본 우익들과 그 동조자들 또한 부리고 있으나, 이들 외엔 세상 어디에서도 진지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애초에 당대 정권에 대항한다면 망한지 오래된 나라 이름을 구태여 빌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많으며, 그런 게 통할 수 있는 조건은 유민 의식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 밖에는 없다.

이를 주도한 궁예 견훤이 기록상 둘 다 옛 삼국 기준 원신라 지역 출신이니 진짜 유민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나, 부흥 운동 주모자의 혈통과 출신지 가지고 부흥 운동 진위를 따지는 것 또한 더 생각해볼 부분이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 분명해지는 건, 연고권이 크게 없는데도 야심가가 재능만으로 해당 지역 주민들의 별도 국가 정체성을 이용해서 떨어져나가는게 가능할 정도로 분리주의 마인드가 강했음이며, 이는 동서고금 역대 세계사 부흥운동 성공자들 가운데서도 확인되는 현상이다.

국가 정체성은 국체가 소멸되었다고 사람들 마음에서 바로 사라지는 게 아니며, 상황이 바뀌면 그것이 백 년이든 오백 년이든 어떤 이유로든 정체성이 불식될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표출될 수가 있다. 물론 망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날수록 예전에 망한 국가에 대한 정체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은 복잡한 존재기에 이것이 수학 공식처럼 늘 어느 상황에서든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닐뿐이다.

물론 백제부흥운동의 경우 전라도=백제로 동일시한 건 오류지만, 충청도와 경기도만 백제며 전라도는 무조건 마한이므로 백제와 후백제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생각 또한 조선 시대에 생긴 행정구역 개념과 근대 들어 생긴 지역감정 대립 구도를 무리하게 밀어올리다 하게 되는 논리비약이므로, 역시 수정되어야 할 흔한 편견 중 하나다.

주로 잘 알려진 특정 시기에 한하는 영토를 떠올리면서 겹치네 안 겹치네를 하며 관계가 있다 없다를 따지는 족보도 없는 면적사관식 이상한 프레임에선 고려와 고구려도 별 상관 없으며, 특정 시기에 잘 알려진 강역의 일치에만 집착하는 견해는 상식적인 역사 해석에서 당연히 설 자리가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목록

3.1. 고구려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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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신라에게는 전쟁없이 항복했기에 당나라에는 저항이 거셌지만, 신라에게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당나라와 전쟁을 하는 신라에게 있어서는 지원세력이 필요했기에 신라와 협력했고, 신라 안에서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당나라로 강제한 이주한 일부 세력은 당나라에 저항해 발해를 건국했다.

신라 내부에 소속된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 조정에 비교적 협조적이었고, 9세기 후반에 들어 신라가 약화되자 궁예를 중심으로 모여 901년에 고려란 국호로 부흥한다. 궁예가 국호를 마진에 이어 태봉으로 자꾸 바꾸고 패서호족들을 탄압했으나 왕건이 역성혁명으로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로 국호를 되돌리게 된다.

묘청의 난으로 인해 옛 고구려의 중심지인 서경의 대우가 박해지고 중심지인 개경에 대해 반항 의식이 강했으며, 고려 내부에서 무신들의 권력쟁탈로 나라가 혼란에 정통성이 약화되자 최광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개성 호족 자체가 고구려 유민들인 패서 계열 호족들이며, 서경은 고려 건국 세력들이 개성 사람들을 주로 사민시켜 육성시킨 것이 시초였기에 서경만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기에는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 이 황당한 명분 없는 고구려부흥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3.2. 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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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라는 고구려 부활보다는 백제 부활을 방지하는 데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웅진과 사비 일대에 적극적으로 신라 진골 출신을, 백제 왕가가 집중적으로 육성했던 제2수도권인 전북 일대에는 고구려 유민을, 그리고 전남 동부와 남부의 저개발 지역에는 원신라 지역 주민들을 사민했었다. 나름대로 매우 상식적인 조치였고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의 위기는 통일 후 경제적 그리고 행정적으로 꾸준히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다. 전반적으로 국가경제력이 성장하면서 지방 세력들의 실력 또한 상승했고, 행정적으로는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방 통치 체제는 중앙에서 파견된 태수들이 어느 정도는 일원적으로 행정력을 투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골품제가 여전히 강고했기에 실력이 성장한 지방 호족들은 중앙에 진출할 경로는 차단되고 지방에 이식된 다름아닌 옛 진골 출신들도 권력에서 밀리게 되며, 행정력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이 자기네 동네에서 자치와 자율을 누리는 폭도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되자 지방 호족, 지방에 심겨진 신라 진골 출신 귀족 모두 신라에 대해 불만을 쌓아가는 일이 발생한다. 즉 적어도 옛 백제 지역에 있는 이들은 그 조상이 백제든 고구려든 신라든 행복할 일이 없게 되었으며, 그래서 신라로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결국 다름아닌 원신라 지역 출신인 신라 장군 견훤이 백제를 부활시키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백제의 영토와 후백제, 이연년 형제의 난의 위치와 관련하면서 백제와 후백제는 영토 면에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괴이한 면적사관이 대두하는데, 이는 실제 역사와 완전히 관련이 없는 틀린 생각이다. 오늘날 서울이 수도였던 한성백제는 직할 통치 지역이 오늘날 일반 대중에게 널리 퍼진 인식과는 달리 목지국과 개전하기 직전에는 황해도 남부 일대와 경기도, 충청남도 약간 뿐이었으며, 충청도 일대에 널리 직할령을 뻗치게 된 건 4세기 초반이 지나서야 가능해진 사항이다. 이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고구려에게 빼앗긴 후엔 충청도에 중심을 두었다고 하지만 충북은 실제론 신라와 각축하던 지역이고 대전 일대도 오늘날 동대전 지역은 신라가 영유했었다. 그 시기 웅진 백제가 직할 경영하던 곳은 충청남도 대부분과 전북 상당 부분, 전남 지역 거점 몇 군데인데, 웅진 백제 또한 직접 지배 지역이 한성백제와 겹치는 지역 또한 많지가 않다. 그리고 분명코 알아야 할 것은 사비 백제 같은 경우 그 지배하던 영역 전체, 즉 충남, 전라도 전체, 경남 서부 등을 결국은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하여 무려 최소 120년 넘게 통치했다는 점이다.

후백제는 한편 교과서에서 주로 그리는 영토와는 달리 경상도 대부분과 충청남북도 상당 부분을 영유했고, 거꾸로 전남 지역은 고려에게 상당히 영역을 빼앗긴 형국이었는데, 경북 서부 외엔 그 영역이 전부 백제가 영유했던 지역임을 명심해야 한다. 게다가 사비 백제 같은 경우 교과서에서 칠을 해놓지 않아서 그렇지 무왕~ 의자왕 시절에는 충북 약간 지역과 경남 서부 일대도 수십 년 동안 영유했었는데, 후백제 같은 경우 의도적으로 노리고 한 건 아니었지만 견훤의 신라 영역에 대한 집착은 의자왕을 능가했기에 후백제 또한 충북 상당 부분과 경남 영역 전체를 손에 넣어, 적어도 이 방면에선 무왕~의자왕 시절 말기 백제와 오히려 판도가 비슷했다. 그러므로 영역 가지고 백제와 후백제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건 앞뒤 맞지 않는 짓이 된다.

후백제가 멸망한 후 300년이 지나 1236년에 나주에서 이연년 형제가 담양에서 최씨 무신정권에 반감을 가진 사람을 모아 백제부흥운동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연년 형제의 조상이 후백제 견훤 정권에서 나름 대우받던 잘나가는 호족이었고, 이후 시기에서 그 집안이 그다지 두각을 일으키지 못했기에 백제를 이름을 걸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즉 일각의 생각과는 달리 백제와 아무 연관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삼한일통의 이념에 오히려 보다 충실했으며, 때문에 이들의 부흥운동에 대한 호응도나 성과는 견훤의 후백제만 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부흥운동이 비슷한 시기 고려 치하에서의 신라부흥운동보다 파급력이 떨어졌던 것도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3.3. 신라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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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시대에 멸망한 적이 없었으므로 신라 부활 시도는 고려 중기의 혼란한 무신정권시대에 국한된다.[1] 주요 주모자층은 고려 시대 때 향리 계층으로 떨어져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온 옛 신라 진골 출신들이었던 걸로 추정되며, 원신라지역 출신의 중앙 집권자였던 이의민이 이를 은밀히 지원하기도 했다. 후대 집권자인 최충헌이 경주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이의민 일파에게 떠넘기기 위해 기록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설득력이 적다. 이 신라부흥운동은 그 주모자나 호응 세력 전원이 기층 지방 민중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옛 진골의 후예였을 개연성이 높기에, 주모자의 개인적 욕심이나 야심 없이 기층 민중의 전반적인 적극적 호응이 있어야 진짜 부흥운동이라고 보는,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기엔 오히려 이쪽이 더욱 '정통'에 가깝다.

이 신라부흥운동이 벌어진 지역들(경남 거의 전역, 경북 동부)은 경주 외엔, 후삼국시대 당시 견훤의 대대적인 침공 이후 후백제에게 워낙 가혹하게 당하는 와중에 신라 왕실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하여 부득이하게 고려에게 투항했던 지역들이기도 했다. 나름대로 왕건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도 고려 왕실의 장악력이 약해지고 흔들리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호응도와 초반 기세만 보면 그 이백 년 전 고구려부흥운동이나 백제부흥운동보다도 거셌던 이 신라부흥운동은 거짓말 같이 쉽게 진압되고 말았다. 주된 실패 이유는 고려가 신라와는 달리 중앙 정부에 충성하는 지방 세력을 조직적으로 육성했었던 데 있었다. 통일신라 당시의 고구려부흥운동이나 백제부흥운동이 결국 성공했던 건, 이런 사태를 막으라고 신라 조정에서 지방에 이식했던 옛 신라 진골 혹은 6두품 등이 멀어진 혈연, 권력 다툼에서의 패배 등의 이유로 오히려 신분이 강등되어 중앙 정치와 기득권에서 완전 배제된 걸 견디지 못한 나머지,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기층 민중에게 오히려 영합하거나 아예 본인들 자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선동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신라부흥운동 같은 경우, 이미 고려의 지배층으로 편입되어 영화를 누리는 지역 기득권층 상당수가 이와 같은 움직임에 반대하여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중요한 차이였다. 때문에 로마의 동맹시 전쟁 당시 반로마 동맹 안에 구멍처럼 친로마 도시들이 숭숭 뚫려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부흥운동이 장악했던 지역도 강원도와 경상도 적지 않은 일대라 꽤 넓어는 보이지만 구멍처럼 관망파 내지는 적극적인 고려 찬성 지역들이 많이 뚫려 있었던 상황이었다.

신라 말기에 고구려부흥, 백제부흥을 외치는 반신라운동이 초반 동참 지역은 적었어도 꽤 응집력은 있었던 것관 대단한 차이를 보인다. 한편 흥미로운 건, 김헌창의 난 때부터 신라 왕실에게서 이탈했다가 후삼국 시대에는 엉뚱하게 후백제의 견훤에게 영합했던 경북 서남부가, 이 신라부흥운동에도 거의 호응하지 않았음이다. 고려 정체성이 이런저런 역사적 배경 탓에 오히려 신라 정체성보다도 강했던 경북 서북부는 더욱 강경하게 신라부흥운동 진압에 나선 것 또한 특이한 상황이다.

3.4. 발해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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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고려부흥운동

한국사의 다른 왕조 국가들이 멸망 후 그래도 크고 작은 규모의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과 달리 고려 조선 건국 초기 왕씨 학살로 왕조의 씨가 말라버려 이렇다 할 부흥운동을 하지도 못했고 조선 왕조의 존속 기간 동안에도 고려부흥운동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고려 왕조의 옛 구심점도 왕씨 학살로 완전히 사라져버렸기에, 몇 번 일어난 반란도 고려 부흥을 내걸고 한 건 없었다.

다만 사찬읍지인 고령지에 따르면, 이성계 공양왕을 폐위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고려의 안동장군 이미숭, 진서장군 최신 등이 고려를 부흥시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니산, 덕대산, 운라산성 등에서 패하고 상원산에 성을 지어 항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마저도 이성계가 공식적으로 조선을 개창[2]하자 군사를 해산했다고 한다.

3.6. 대한제국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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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임병찬이 만든 독립의군부라는 단체에서 고종의 복위를 내세웠지만 일제에 발각당해 실패했고, 1919년에 고종이 사망[3]하자 일본을 몰아내고 구 대한제국 황실이 다스리는 국가를 재건하려던 복벽운동은 흐지부지되고 공화정 수립이 대세가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구 대한제국 황족을 추대하여 제국을 다시 세우자고 주장하는 황실 복원론자들이 있긴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농담으로도 거론된 적이 없고, 일반인들도 그런 게 있다는 거 자체를 모르거나 가십거리 정도로만 치부하는 사람이 대다수라서, 영향력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3.7. 한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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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항거하여 한민족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헌신한 한국독립운동 역시 부흥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4. 외국의 사례

넓게 보면 나라 없는 민족의 국가 수립 시도, 독립운동이나 옛 왕실 왕정복고를 하려는 시도 또한 부흥운동에 포함된다고 할 수도 있다.

4.1. 아시아

4.1.1. 동아시아

4.1.1.1. 중화권 몽골
4.1.1.1.1. 계승 국가 및 잔존국
원 국가가 멸망하기 전 분열되어 자립한 정권이나 후한이나 남송 같이 전 국가를 계승한 국가로 여겨지는 경우, 일반적인 부흥 운동에 비해 정통성이 짙은 국가들이다.
4.1.1.2. 일본

4.1.2. 동남아시아

4.1.2.1. 베트남
4.1.2.2. 캄보디아
4.1.2.3. 태국
4.1.2.4. 말레이시아

4.2. 남아시아

4.2.1. 인도 아대륙

4.2.2. 아프가니스탄

4.2.3. 티베트

4.3. 중앙아시아

4.4. 서아시아

4.5. 유럽

4.5.1. 남유럽

4.5.1.1. 로마 제국
4.5.1.2. 남슬라브계 국가
4.5.1.3. 이베리아 반도
4.5.1.4. 중세 이후 이탈리아

4.5.2. 서유럽

4.5.2.1. 영국
4.5.2.2. 프랑스

4.5.3. 중부유럽

4.5.3.1. 독일
4.5.3.2. 폴란드, 리투아니아
4.5.3.3. 헝가리

4.6. 아프리카

4.6.1. 북아프리카

4.6.2. 서아프리카

4.7. 아메리카


[1] 마의태자가 부흥운동을 시도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정사에서는 경순왕의 항복에 반대해 금강산에 은거해 소극적으로 저항했다는 정도이고 적극적으로 고려 정부에 대항했다는 근거는 없다. 여러 창작물에서 마의태자를 김치양이나 함보와 연결해 각색한 것이 실제 역사상의 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2] 조선은 이성계 즉위 직후 국호를 바로 조선으로 바꾸지 않고 한동안 고려의 국호를 유지했었다가 명나라에게 조선 국호 승인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조선이라는 국호를 쓸 수 있었다. 즉 초기의 이성계는 조선 국왕이 아니라 고려 국왕으로 즉위해 있었다. [3] 순종도 있었지만 순종은 백치설, 성불구설이 세간에 돌아다닐 정도로 그다지 인기도 권위도 없는 이미지였는데,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런 소문이 조선 땅에서 퍼지긴 했다. 그나마 그 순종조차도 1926년 사망해 복벽운동의 구심점은 완전히 사라진다. [4] 초(楚), 제(齊), 연(燕), 조(趙), 위(魏), 한(韓). [5] 영자영을 비롯한 진나라 왕족들은 진 멸망 후 함안에 입성한 항우한테 학살당했고, 옛 진나라땅에 분봉된 장한, 사마흔, 동예는 항우한테 항복한 인사들이라 진나라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했다. [6] 중국사를 통틀어서 가장 성공한 부흥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한고조가 지방에 왕족들을 분봉해서 세력을 키운게 한 것이 부흥운동 성공에 도움을 줬다. [7] 한나라 황족 출신 경시제 유현을 황제로 추대했으나 1대만에 끝났다. [8] 이쪽은 현한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전한을 계승한 왕조이다. [9] 정통성 여부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의 여러 왕조에서도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 지금도 삼국지 팬덤에서는 촉빠 위빠의 치열한 키배(...)를 유발하는 떡밥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촉한정통론 조위정통론 문서 참고. [10] 마지막 황제 유선이 항복한 이후 독자적으로 부흥 세력을 이끌었다. [11] 제갈첨을 닮은 외모를 이용해 반진복한의 구호를 내세웠다. [12] 비수대전으로 전진이 휘청거리자 다시 자립했다. [13] 왕조의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없으나, 건국자가 당나라의 국성 사성받았고 명분상 계승을 표방했다. [14] 당태종의 후손을 자처했다. [15] 금나라가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자 그 틈을 타 자립한 거란족 국가 부흥 운동이다. [16] 남송 수도 임안 함락 이후 단종 소제를 옹립하고 승상으로서 부흥운동을 이끌다가 포로가 되었고, 마지막 부흥군마저 괴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처형되었다. [17] 문천상이 포로로 잡힌 이후 황제의 스승으로서 부흥운동을 이끌었으나, 애산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소제와 함께 자결했다. [18] 애산 전투에서 황제와 육수부가 자결한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전투를 지휘하여 포위망 돌파에 성공한 후 부흥운동의 불씨를 살리려 했으나, 태풍으로 인해 마지막 남송 부흥군과 함께 수장되었다. [19] 초기에는 백련교 교주 한산동을 송 황제로 추대하여 송나라 부흥을 추구했다. [20] 1236년 몽골에게 진압당했다. [21] 몽골 제국 계승을 주장했지만 티무르 칭기즈 칸 의 부계 혈통이 아닌 모계 혈통을 물려받았고, 몽골 고원이 아닌 중앙아시아에 위치했다는 한계가 있다. [22] 몽골계 국가지만 칭기즈 칸 의 후손이 아닌 티베트 출신 불교 지도자 대칸으로 추대했다. [23] 보르지긴 가문의 일원인 데므치그돈로브를 수장으로 삼았지만 이 아닌 주석을 칭했으며, 일본 제국 괴뢰국에 불과했다. [24] 스스로 명나라를 잇는다기보다는 명의 신하로서 명을 복원하겠다는 명분을 세웠다. [25] 명나라 계승을 주장했지만 정작 반군의 수장인 오삼계는 청의 대륙 정벌에 협력하고 남명의 마지막 황제를 살해한 인물이었다. 명나라 계승보다는 한족 국가 부흥 운동에 가깝진 했다. [26] 한족 출신 청나라 관료 장쉰이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복위시켜 일시적으로 청나라를 복원한 사건 [27]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일본 제국 괴뢰국에 불과했으며, 공식적으로도 중화제국으로서의 청나라 부흥이 아닌 만주족 독립 국가를 표방했다. [28] 대만 으로 축출된 장제스 총통이 무력으로 대륙을 수복하기 위해 입안한 작전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력 차이 때문에 결국 실행되지 못했고, 리덩후이 총통 시절에 완전히 포기했다. 지금은 중화민국 중심의 양안통일을 추구하는 세력 평화통일을 내세우지 무력통일을 추구하지는 않고 있다. [29] 두 국가 모두 선비족의 일파인 탁발부가 세운 국가다. [30] 모두 요나라 황실의 후예들이 건국했는데, 서요는 다른 요나라 계승 국가들과 달리 중앙아시아에 위치했다. [31] 몽골 제국의 침략과 야호령 전투 이후 금나라가 화북과 만주로 영토가 분열되었는데 금나라 장수 포선만노가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을 토벌하는 데 실패한 것과 몽골 제국으로 인하여 금나라 본국과의 연락이 끊어지자 만주에서 독립하여 세워진 국가이다. [32] 중원 에서 축출된 원나라 황제가 세웠지만, 원 황제 칭호 사용은 3대만에 끝나고, 이후에는 몽골 대칸 칭호만 사용했다. [33] 명나라 황족들이 강남 지방에 각기 세운 정권들. 이게 핵심이다. [34] 헤이안쿄에서 축출된 헤이케 세력의 최후의 저항 [35]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가문이던 호조씨 잔당이 호조 도키유키를 중심으로 가마쿠라 막부 재건을 모토로 들고 일어난 사건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진압되었다. [36] 호조씨와는 같은 조상을 공유했지만 호조씨에서 직접 이어지는 가문은 아니다. [37] 겐무 신정을 이끌던 고다이고 덴노 교토를 탈출한 후 수립한 정권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허수아비인 북조와 대립했다. [38]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한 이후, 교토를 탈출하여 오다 정권에 반대하는 다이묘들의 지지를 받아 부흥운동을 이끌었으나 실패했고,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한 이후 항복하여 직접 조정 쇼군직을 반납했다. [39] 대정봉환을 통해 공식적으로 에도 막부가 소멸했지만,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여전히 실권을 가지고 있던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요시노부가 메이지 덴노의 조정에 항복한 이후에도 막부 잔당들은 저항을 계속했지만, 에조 공화국 세력까지 항복하면서 완전히 종식되었다. [40] 마지막 류큐 국왕 쇼타이의 삼남과 사남으로, 일본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가진 번국으로라도 류큐 왕국을 부활시켜 달라는 복번 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했다. 현재 남아있는 류큐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왕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독립할 것을 지향하고 있기에, 류큐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데 성공하더라도 류큐 왕국이 부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41] 호꾸이리에 의해 쩐 왕조가 멸망한 후 일어난 부흥운동 [42] 레러이 명나라에 맞서 쩐까오를 황제로 추대하여 일어났지만, 정작 명군이 물러난 이후에는 레러이 본인이 직접 황제로 즉위하여 후 레 왕조를 세웠다. [43] 막당중 찬탈하여 막 왕조를 세우자, 찐씨 응우옌씨가 협력하여 막 왕조를 타도하고, 후 레 왕조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후 대월은 북부의 찐씨 정권과 남부의 응우옌씨 정권으로 분열되었고, 레씨 황제들은 찐씨의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44] 막 왕조가 후 레 왕조의 유신들에 의해 멸망하자, 잔존 세력이 의 지원을 받아 까오방 지방에서 정권을 유지했다. [45] 응우옌 왕조의 초대 황제 [46]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수도 후에를 탈출한 후, 프랑스에 맞서는 근왕 봉기를 일으켰으나, 결국 사로잡혀서 북아프리카 알제리 유배되었다. [47] 독립운동 시도가 발각되어 아들에게 양위했고, 아들마저 독립운동을 시도하다 발각되자 아들과 함께 동아프리카 레위니옹으로 유배되었다. [48] 독립운동을 시도했다가 발각되어 물러난 아버지로부터 양위받았으나, 그 역시 독립운동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아버지와 함께 동아프리카의 레위니옹으로 유배되었다. [49] 베트민에 의해 제정이 폐지된 후, 베트남국의 국가원수가 되어 북부의 베트민 정권을 타도하고 응우옌 왕조를 부흥시키려 했으나, 프랑스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50] 결국 왕정복고에 성공하긴 했지만, 제1왕국 시절과는 달리 실권을 총리에게 빼앗기고 허수아비로 살다 죽었다. [51] 아유타야 멸망 직후에 딱신이 버마를 몰아내고 건국한 뒤 구 아유타야 세력들을 통합했고 비록 톤부리 왕조는 딱신 1대로 끝났지만 짜끄리 왕조가 이 기반을 그대로 물려받아 현재의 태국이 되었다. [52] 티무르 제국은 초기에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후기에는 아프가니스탄 헤라트를 중심으로 했지만, 티무르의 후예 바부르가 세운 무굴 제국은 인도 아대륙에 위치했다. [53] 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 바라크자이 왕조를 타도하고 두라니 왕조를 재건하려 했으나, 실권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54] 630년 동돌궐 멸망 후 682년 건국. [55] 다만 몽골 고원에 위치했던 위구르 제국과 달리, 하서 위구르는 간쑤성과 하서 회랑 일대에 위치했었다. [56] 네부카드네자르 3세, 네부카드네자르 4세가 주도했으나 다리우스 2세에 의해 진압당했다. [57] 호타크 왕조에 의해 수도 이스파한이 함락된 이후 부흥운동을 이끌었고, 나디르 샤의 도움을 받아 왕조를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 나디르 샤에 의해 폐위되었고, 나디르 샤는 타흐마스프 2세의 아들 아바스 3세를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했다가, 찬탈하여 아프샤르 왕조를 세웠다. [58]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계속 로마 황제를 자칭하다가 피살되었다. [59] 갈리아에 위치했던 서로마계 국가 [60] 서로마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가 일으킨 전쟁. 단 엄밀히 말하면 ' 로마' 부흥의 목적은 당연히 맞지만 '서'로마 부흥의 목적은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서로마 시절부터 있었던 구 로마 원로원의 범국가적인 기능을 제거하고 시의회(참사회) 정도로 전락시켰다. 이유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 시 및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와 행정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구 로마 원로원은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영어 위키 Roman Senate(로마 원로원) 중, 'Many senators had been killed and many of those who had fled to the east chose to remain there, thanks to favorable legislation passed by Emperor Justinian, who, however, abolished virtually all senatorial offices in Italy.' [61] 4차 십자군 이후 아나톨리아에서 동로마 제국 유민들이 건국했고,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여 제국을 재건했다. [62] 4차 십자군 이후 동로마 제국 유민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수립한 제국 [63] 4차 십자군 이후 그리스 서부 이피로스에서 건국된 동로마 제국계 국가 [64] 1261년에 재건된 동로마 제국이 14세기에 황족을 분봉하여 수립했고, 1453년에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존속하다가 1460년에 멸망했다. [65] 페터르 2세라고 자칭했다. [66] 페터르 3세라고 자칭했다. [67] 이전의 부흥운동들과는 달리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68] 오스만 제국에 맞서 부흥운동을 이끌었으나 결국 실패했고, 당시 헝가리 영토였던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69] 서고트 왕국 잔존 세력이 코바동가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물리치고 건국했다. [70]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했던 우마이야 왕조와는 달리 후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했다. [71] 마지막 베네치아 도제 루도비코 마닌의 손자 다니엘레 마닌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활을 위해 수립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군에게 진압당하고 프랑스 파리 망명했다. [72] 덴마크 스벤 왕에게 빼앗긴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에드먼드 2세 사후 잉글랜드 왕위는 다시 덴마크인에게 넘어갔다. [73] 덴마크인 국왕이 죽은 후 앵글로색슨 귀족들에 의해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되어 잉글랜드 웨식스 왕조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해럴드 2세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패사하면서 잉글랜드는 다시 이민족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74]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앵글로색슨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운 상태였고, 결국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에게 항복했다. 다만 완전히 몰락하진 않고 윌리엄 1세의 아들 헨리 1세 시대까지 중앙정계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했다. [75] 잉글랜드군에 패하여 처형되었다. [76]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로버트 브루스으로 즉위하여 스코틀랜드 왕국이 부활했다. [77] 스코틀랜드 영연방 왕국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당이다. 이와 달리 공화국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은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은 맞지만, 스코틀랜드 왕국 부흥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78] 일시적으로 요크 왕조 에드워드 4세를 타도하고 복위했지만, 다시 폐위되었다. [79] 랭커스터 왕조의 방계 출신으로 보즈워스 전투에서 요크 왕조의 리처드 3세를 패사시키고 튜더 왕조를 세웠다. [80]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폐지된 왕정을 부활시켰다. [81] 명예 혁명 이후에도 제임스 2세와 그의 남계 후손에게 적법한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한 세력 [82] 프랑스 왕당파 프랑스 제1공화국에 맞서 일으킨 반란 [83] 나폴레옹 전쟁 이후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왕국이 일시적으로 부활했던 시대 [84] 왕당파의 지지를 받아 프랑스 대통령이 된 인물로,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으로 추대하여 왕정복고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왕당파는 샹보르 백작의 부르봉 본가를 지지하는 정통왕당파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을 지지하는 오를레앙파로 분열된 상태였고, 오를레앙 가문 출신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을 우려한 샹보르 백작 본인이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 이전의 공화국들보다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되면서, 왕당파는 프랑스 정계에서 사실상 소멸했고, 지금은 극우 정당 국민연합마저 왕정이 아닌 공화국 체제를 지지하고 있다. [85] 2차 대전 이후 서독에서 나치당 국방군 출신 인사들이 창당하여 나치 독일의 부흥을 꾀했다. 일부 지방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지만, 1952년 서독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그래서 현재 독일에서 활동하는 극우 정당들은 나치와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당명을 사용하거나 당명에 민주를 집어넣어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척하는 꼼수를 써서 정당 해산을 피하고 있다. [86]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 직전에 일어났다. [87] 이 봉기가 실패한 뒤로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따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88] 1768년 알리 베이 알 카비르가 주도했다. [89] 이후 맘루크들은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인 메흐메트 알리에게 1811년 대량으로 숙청당하면서 목숨을 잃었고, 세나 술탄국으로 도피한 맘루크들도 1820년 메흐메트 알리의 수단 침공으로 완전히 망하게 되었다. [90] 다만 덴디 왕국은 송가이 제국만큼 영토를 넓히지는 못했다. [91] '제국'으로서의 잉카가 스페인의 침략으로 멸망한 뒤 추대된 꼭두각시였던 망코 잉카 유판키가 스페인에 맞서 빌카밤바에서 잉카 잔존 세력을 이끌었다. 이 때 망코 잉카가 세운 정권은 그의 손자 투팍 아마루가 1572년에 스페인군에 의해 처형되면서 멸망했다. [92] 잉카 제국 황족 출신은 아니고 원주민 호족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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