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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세르비아 왕국 네마니치 왕조의 스테판 두샨(Stefan Dušan,1308~1355)에 의해 세워진 제국.1346년부터 1371년까지 25년간 존재했다.
2. 역사
2.1. 스테판 두샨의 건국과 전성기
동로마 제국이 내분으로 쇠퇴하자 세르비아는 그 틈을 이용하여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테살리아, 에피로스를 점령하고 최대 영토를 이룩했다. 확장된 세력으로 스테판 두샨[1]은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2]'를 자칭했다. 이후 로마 제국의 법을 기본으로 하고 서유럽식 봉건제와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 법인 '두샨 법전'을 편찬했다. 스테판 두샨의 치세에 세르비아의 교육률이 매우 높아졌으며, 학교와 수도원도 점차 늘어났다. 또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예술계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이 당시 세르비아 제국은 스테판 두샨의 명으로 해적들을 잡아들여 최대한 상인들과 외국인들의 안전을 보장하였으며, 로마제국이 만들었던 길을 이용해 와인이나 가죽, 그외 생산품들을 수출하며 번영을 누렸다. 또한 철광석, 금과 은과 같은 광석들도 사시인[3]들의 감독 아래 채굴되어 수입을 크게 벌어들였다.
2.2. 몰락과 멸망
하지만 스테판 두샨이 1355년에 갑자기 죽고 그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즉위하자,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우선 새로 넓힌 지방을 아직 완전히 세르비아의 지배하에 통합시키지 못했고[4], 알렉산드로스와는 달리 스테판 우로시 4세에게는 당시 19세였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Stefan Uroš V)가 있었지만 그는 성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후와 궁정 관료들에게 매달리기만 하는 나약한 인물이었다.[5]이러다 보니, 정복지이던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저항하며 도로 독립하려고 하고 내전에 시달린다. 이 와중 마리차강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대패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런 가운데 무능한 스테판 우로쉬 5세는 1371년에 35세에 후계자 없이 죽었다. 이 때를 제국의 멸망시점으로 본다.
3. 이후의 역사
3.1. 라자르의 세르비아 공국
그러자 세르비아는 그대로 전국시대로 돌입. 그 후 가장 강력한 지방 귀족이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1329~1389)가 등장하여 세르비아 공국을 창건했다.[6]한편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세르비아 제국을 재창건한다는 과제를 내걸고 세르비아의 통일을 위한 전쟁을 일으켰고, 세르비아의 모든 귀족들을 대표하는 맹주 비슷한 자리에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당시 발칸 반도에서는, 신흥 세력인 오스만이 나날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3.2. 1차 코소보 전투: 세르비아 공국 vs. 오스만 술탄국
라자르는 2번에 걸쳐 오스만을 물리쳐, 당시의 술탄 무라트 1세가 발칸 정복을 단념할까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발칸 반도에서의 세력 확장은 신하들에게 맡긴 채 자기 자신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다른 투르크계 공국들을 정복하는 데 여념이 없던 무라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결심했고, 3번째 전투인 1389년 1차 코소보 전투에서 라자르를 쓰러뜨리는 데에 성공하지만 자기 자신도 전사하고 만다.다만 애매한 것이 누가 무라드를 쓰러뜨렸는지도 기록에 따라 다르고, 아예 전사가 아니라 전투가 끝난 뒤 전장을 둘러보다 죽은 척 하고 있던 세르비아 기사에게 암살당했다거나 포로로 잡힌 기사가 무라드를 알현하기를 청했고 그 자리에서 암살당했다는 등 다양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 1차 코소보 전투는 전투 자체는 무승부였으나, 아나톨리아 반도 주둔군 일부를 차출하여 발칸에 보내면 되는 오스만과는 달리 코소보 한 번에 모든 걸 쏟아부은 세르비아에는 더 이상 싸울 병사가 없었다. 즉 전투에서는 지지 않았으되, 전쟁에서는 진 셈.
3.3. 라자르의 후손, 스테판 라자레비치와 주라지 브란코비치
결국 라자르가 이룩한 세력은 아들인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이어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가 되어야만 했고, 이후 헝가리와 오스만 사이를 오가며 나름 이익을 챙겼다.일단 오스만 술탄국은 바예지드 1세가 앙카라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내전이 벌어졌고,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143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헝가리는 세르비아를 문서상으로는 봉신으로 삼았지만 봉신이 되는 대가로 영토를 할양해주는 등 후원하여, 사실상으로는 동맹국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세르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쌓아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당시 발칸 반도 최대의 광산지대 가운데 하나인 노보 브르도(Novo Brdo)가 고향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중세 세르비아 최후의 경제적, 문화적 중흥기를 이룩, 오늘날에는 세르비아 정교의 성인으로 추증되어 있다.
3.4.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
세르비아는,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1427년에 세상을 떠난 후 친족으로 뒤를 이었던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마저 1456년에 죽은 뒤 공작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면서 오스만 제국에게 완전히 합병되고 만다.계승 분쟁 과정에는 세르비아 제국 때까지만 해도 세르비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스니아 왕국이 끼어들었다. 보스니아 왕은 주군으로 모시고 있던 헝가리 왕에게 '제 아들을 세르비아 공작에 앉힐게요. 그럼 세르비아랑 보스니아가 합쳐져서, 이교도에 맞서 훨씬 튼튼한 완충국이 될 거임' 이라고 제안했고, 당시의 헝가리 왕 마차시 1세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에 이웃나라의 왕자를 공작으로 모시게 된 세르비아인들은 이미 나라가 기울었다고 인식했고, 게다가 보스니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에 가톨릭을 강요했기 때문에, 1456년에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에 침공했을 때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4. 평가
세르비아 역사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성기이지만, 너무나도 짧았기에 세르비아 우익들이나 세르비아 환빠들이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그래서인지 세르비아 대체역사소설 중에는 세르비아 제국이 잘 유지되어 오스만 제국까지 몰아내고 유럽을 호령한다는 소설도 있다.[7][8]한편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신음했던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에 맞설 위대한 영웅의 전설을 만들어서 현실의 괴로움을 잊으려 했는데,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영웅이 세르비아의 민담에 등장하는 마르코 크랄리예비치(Marko Kraljevic 1335~1395년)다. 그는 실제로 세르비아의 역사적 인물이었던 마르코 왕자가 모델이다. 세르비아의 전설에서 그는 초인적인 힘과 용맹을 발휘하여 오스만 군대와 맞서 싸워 그들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역할로 등장한다. 마르코 크랄리예비치 문서 참조.
5. 강역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의 저서 '비잔티움 제국사'의 한국어 번역본 부록에 있는 지도 |
[1]
'두샨' 은 별칭이고, 공식 칭호는 스테판 우로시 4세(Stefan Uroš IV). 네마니치 왕조의 역대 국왕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스테판' 이었기에, 별명을 가진 왕이 많다. 여담으로 이 때문에 '스테판' 이라는 이름은 세르비아 제국의 상징과도 같이 되어, 아래에 소개하는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도 독립군주로 행세하면서 자신의 이름에 스테판을 덧붙였고 세르비아 제국에서 독립한 보스니아 왕국의 첫번째 왕도 자신의 이름에 스테판을 더했다.
[2]
세르비아어로는 '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 그리스어로는 'βασιλεὺ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Σερβίας καὶ Ῥωμανίας', 영어로는 'King and Emperor of the Serbs and Romans'이다. 단 세르비아어 명칭으로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Грка, Emperor of the Serbs and Greeks)'라는 직함을 사용하기도 했다. (참고로 'Emperor of the Serbs' 문서의 세르비아어 위키백과 타이틀은 '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방 세력을 상대로 한 라틴어 명칭으로는 'I(m)p(erator) Roma(niae)(Emperor of Romania)' 또는 'I(m)p(erator) Ro(ma)io(ru)m(Emperor of the Romans)'을 사용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을 상대로도 자신이 '로마 황제'에 올랐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3]
саси. 세르비아 왕국 시절이였던 13세기부터 광석이 풍부했던 발칸 반도 국가들, 즉 불가리아나 세르비아로 건너왔던
작센족들이다. 현재는 모두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4]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
마케도니아 제국이 어찌 됐던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처럼 단명하지는 않은 스테판 두샨은 '두샨 법전' 이라는 법령을 반포하여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지만, 세르비아의 왕으로 즉위했을 때부터 헤아려도 24년밖에 안 되는 치세 동안 전통적으로 세르비아의 영토였던 곳과 새로 정복한 영토 사이에 일치감을 심기에는 무리였다.
[5]
실제로 스테판 두샨은 '강인한 왕(the Mighty)' 이라는 별명을 받으며 대왕으로 인정받았지만, 스테판 우로쉬 5세가 받은 별명은 '약한 왕(the Weak)' 이었다.
[6]
라자르가 창건한 세르비아는 원래 'Moravian Serbia'라 불렀는데, 라자르 본인은 슬라브어로 공작을 뜻하는 '크네즈(knez)'를 칭했기 때문이다. 1403년에 나라 이름이 '세르비아 전제군주국(Serbian Despotate)'이 되는데, 그 아들인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가 1403년에 우호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데스포티스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7]
스테판 두샨의 후계자가 슈테판 우로시 5세가 아니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였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상당히 늦추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라자르는 생전에 황제는커녕 왕도 칭하지 못했지만, 세르비아 민담에서는 '라자르 황제'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8]
특히 세르비아라는 나라 자체가 전체적으로 패권을 잡고 열강으로 성장하기는 커녕 침략을 당한 역사가 대부분이다 보니 이 시절을 더더욱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