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 Chính Phủ Lâm Thời Việt Nam Tự D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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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정부 | ||
<colcolor=#DA251D> 국기 | ||
1995 ~ 2013 | ||
성립 이전 | ||
베트남 공화국 | ||
국가 | <colbgcolor=#fff,#191919> 공민에게 고함 | |
역사 |
1995년 수립 2013년 해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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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사이공 (명목상) 가든그로브 (정부청사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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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 공화제 | |
국가원수 | 총통 | |
언어 | 베트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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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5년에 베트남 전쟁 패전으로 멸망한 옛 베트남 공화국의 후신을 자처한 망명 정부. 2013년 해체되었다.공산화된 베트남 정부의 전복과 베트남 공화국의 재건을 주장하였다.
2. 설립과 행보
국가를 부르는 모습
자유 베트남 임시정부는 응우옌 흐우 짜잉(Nguyễn Hữu Chánh, 阮有政)이 1995년 4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가든 그로브에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타도하고 남베트남을 재건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설한 망명 정부다.
2012년 기준으로 6,000명의 구성원과 전세계 망명 베트남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고 캄보디아- 베트남 국경 연선에 있는 비밀기지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전세계에 75개 지부가 있다고 주장했다. 2005년에 전 남베트남 군인혁명회의[1] 주석이였던 응우옌카인이 국가원수로 취임했다.
그러다가 2013년 제2대 정부 수반인 응우옌카인(Nguyễn Khánh)이 사망한 후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는 해체되었다. 만일 베트남을 수복했다면 "베트남 연방 공화국"을 성립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단일 국가에 익숙해진 베트남인들에게 연방제가 먹힐지가 의문이다.
반면 베트남 전복이 아닌 재분단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다. 남베트남 체제 회복 운동 참조.
3. 테러 활동
2000년 이후 국외 베트남 대사관에 주로 테러 활동을 해 왔다.- 2000년 5월 : 사이공 테러 미수 사건의 배후로 의심되었다..
- 2000년 8월 : 런던의 주 영국 베트남 대사관에서 일어난 방화사건에 관계가 있다고 의심받았다.
- 2001년 4월 : 프놈펜의 주 캄보디아 베트남 대사관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에 관계가 있다고 의심받았다.
- 2001년 6월 : 방콕의 주 태국 베트남 대사관에서 일어난 폭탄 설치 사건에 관련되었다.
- 2001년 8월 : 마닐라의 주 필리핀 베트남 대사관 폭파 계획 용의로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 회원 2명(그 중 1명은 일본인)이 필리핀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참고로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가 벌인 테러는 정부 소재지인 미국의 중립법을 위반하는 행위다.
4. 수반
4.1. 응우옌 흐우 짜잉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의 창설자인 응우옌 흐우 짜잉(Nguyễn Hữu Chánh)은 1952년 베트남국 빙딩성에서 태어났다. 베트남 공산화 이전에는 건축회사를 운영했다.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특공대를 조직하여 반공 활동을 하다가 1982년 미국으로 탈출하여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였고 사업하여 다시 번창하였다. 그리고 상기한 바와 같이 미국에서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를 결성했다.
2006년 사업차 방한했다가 4월 4일에 한국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는 굴욕을 겪었다. 사유는 베트남 정부와 체결된 범죄자 인도 협약과 그에 따른 베트남 정부의 요청이었다. 법무부는 이 사실을 열흘 후인 4월 14일에 확인하였고 짜잉이 베트남 국적을 유지 중이었기 때문에 인도조약에 따라 베트남에 보낼 계획이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남베트남 출신 망명자들을 중심으로 베트남 정부의 테러 배후설은 사실이 아니며 응우옌 흐우 짜잉은 김구, 김규식과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대대적인 석방 운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방한한 이유가 베트남 정부에서 보낸 공작원의 미인계에 속아서 넘어간 것이란 말이 있다. 기사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에서는 응우옌 흐우 짜잉이 저지른 범죄는 대부분 공모 단계에서 발각되거나 혐의가 있다고 의심될 뿐 직접적으로 연관된 증거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정치범으로밖에 안 보인다는 이유로 인도를 거절하고 2006년 7월 27일 그를 석방하였다. 범죄인 인도조약에 의거해 정치범은 인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짜잉은 "나는 한국 사법부의 정당한 판결을 믿었고 그것은 현실이었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살아있는 나라다."라고 감사를 표했으며 수 일 후 미국으로 출국했다. 영상
베트남 정부는 어떻게든 응우옌 흐우 짜잉을 베트남 본토로 끌고 오기 위해 재판 기간 내내 공안당국 책임자를 직접 서울에 파견해 꼬박꼬박 법정 증인으로 출석시키고 쩐 득 르엉 주석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친서까지 전달하는 등 거의 읍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인도 거부 판결이 나자 베트남 정부는 유감을 표했으며 짜잉을 인터폴과 공조하여 잡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이로 인해 한국과 베트남의 사이가 껄끄러워졌지만 8월에 이택순 당시 경찰청장이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곧 풀어졌다.
이 사람은 당시 한국 언론에서 '우엔 후 창'으로 불리는 일이 잦았으니 당시의 기사들을 찾아보고 싶으면 우엔 후 창이라고 검색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