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론 少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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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朴世堂
1629년( 인조 7년) ∼ 1703년( 숙종 29년)
[clearfix]
1. 개요
조선의 문신, 유학자.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자의 해석만 따르지 않는 자주적인 경전 주석으로, 윤휴와 함께 노론계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렸다.본관은 반남이다. 호는 서계(西溪), 잠수(潛叟), 서계초수(西溪樵叟)이다. 소론계이며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 수십 명의 제자를 키웠고, 소론의 영수 남구만이 그의 처남이다.
문집 서계집(西溪集)이 전한다.
2. 생애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의 손자, 대사헌, 대사간, 이조참판을 지낸 박정(朴炡, 1596 - 1632)의 넷째 아들이다.[2][3][4] 이름이 비슷한 박세채와는 8촌 사이이다. 박세당은 박응천의 증손, 박세채는 박응복의 증손인데 응천ㆍ응복은 모두 박소의 아들로서 형제이다. 육촌인 박세성(조부 박동선의 형 박동민의 손자)의 5대손이 순조의 사친(생모) 수빈 박씨이다.1629년 이조정랑 후보 물망에 올랐던 나만갑이 갑작스런 김류의 디스에 이은 인조의 파직 명령으로 이어졌고, 뜬금없이 그와 가까운 관계였던 부친 박정은 남원부사로 좌천된다. 박세당은 부친의 임소인 남원 관아에서 출생하였다. 1632년(4세)에 부친이 3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고, 1635년(7세)에 큰 형 박세규가 23세로 병사한다. 다음해에는 병자호란이 터지며 원주와 청풍을 거쳐 두 형과 조모, 모친과 함께 안동으로 피난하였고, 다음해까지 청주와 천안을 떠도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다. 글도 10세가 넘어서 둘째 형인 박세견(朴世堅, 1619 - 1683)에게 배웠고, 13세부터 고모부인 정사무에게 배우며 학업을 시작한다.17세에 의령 남씨와 혼인하였고 형편이 좋지 않아 십여년 처가살이를 한다. 동갑인 처남 남구만과 한 집에 살며 절친하게 지내고 함께 공부하며 학문, 시사 토론, 시문을 쓰며 큰 영향을 주고 받는다. 1648년 장남 박태유[5]가 출생하였고, 1649년 모친이 1650년에는 셋째 형 박세후가 사망한다.[6] 1654년 차남 박태보가 출생한다. 1654년 중형 박세견이 문과에 급제하였고[7], 박세당은 32세인 1660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다.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 병조좌랑 역임 후 1662년 사간원 정언이 된다. 당시 대간의 일에 충실하며 지위나 당론에 관계 없이 의견을 표명하였다. 공조판서 김좌명, 대사성 이은상 제수를 비판하였다. 링크 이어 인사 추천을 한 원두표를 탄핵하기도 했다. 링크[8] 1663년에는 지평으로 도승지 임의백을 강력하게 탄핵하였다. 링크 친분과 대상을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탄핵으로 박세당을 둘러싼 시선은 곱지 않아지고 있었다.
이어 공의, 사의 논쟁이 발발한다. 교리 김만균이 조모가 호란 당시 사망한 일로 청의 사신 영접을 거부한다며 사직한다. 도승지 서필원이 국왕의 행사 배종을 거부한 것은 공사 구분을 못한 지나친 처사라며 그를 비판하였고, 송시열의 서인 산당 계열에서는 북벌 명분론을 유지하기 위해 김만균을 지지한다. 박세당은 서필원을 강하게 지지하였고, 산당에게 박증휘, 조원기, 오시수, 윤심과 함께 오사(五邪)로 지목된다.[9] 링크 현재로 비유하자면 좌표 찍힌 것이다. 송시열과 산당의 배척을 받으며 한계를 절감한 박세당은 1664년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생을 목도하고 소를 지어 올린다. 1666년에 부인 의령 남씨가 사망하였다.[10] 그 와중에 현종에게 應求言疏를 올리며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한다. 40세의 박세당은 문신들이 매월 제출해야하는 월과를 3차례 짓지 않으며 파직되어[11] 결국 관직에서 물러난다.[12] 낙향해 경기도 양주 수락산의 남쪽 골짜기인 석천동으로 물러나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이후 2차례만 출사했는데. 1670년 통진 현감(通津 縣監)으로 백성 구휼을 위해 부임한 것과 1673년 영릉(寧陵)의 천장[13] 임무를 2개월 수행하였던 것이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하는 생활이었고 실제 농부가 되었다. 농부, 야인들과 어울리며 종일 논밭에 살았다고 한다. 가난에 시달리며 조정에서도 그를 구휼하자는 논의가 종종 올라왔다. 출사하라는 명이 내려와도 다시 나아가지 않았고, 1668년에는 벼슬을 거부한다며 장형에 처해진 바도 있었다. 링크[14]
49세에 박태보가 유배되었다. 52세(1680년)에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며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2세에 대학사변록, 53세에 노자사변록, 59세에 장자사변록, 중용사변록, 60세에 논어사변록, 61시에 맹자 사변록, 63세에 상서사변록, 65세에 모시사변록을 간행한다.[15] 그러나 이 기간 동안 1686년에는 박태유가 사망하고 1689년에는 박태보가 인현왕후의 폐위, 훗날 경종의 원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추국을 받고 사망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였고,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지중추부사에 제수되나 나아가지 않았다.
1703년 박세당이 74세에 지은 이경석의 신도비명에서 송시열을 비판한 것으로, 과거 사변록의 내용까지 탄핵의 대상이 되어 김창협. 김창흡 형제를 위시한 노론의 공격을 받고 사문난적으로 지목된다. 박세당은 삭탈관직되어 전라도 옥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판윤 이인엽이 박세당의 아들인 박태보의 절개를 생각할 것과 고령의 박세당에게 유배를 보내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는 상소를 올려 유배는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박세당이 죽은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 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다음해에 다시 문정(文貞)이라고 개시(改諡)하였다.
2.1. 이경석 신도비명 사건
1702년 박세당은 이경석의 후손에게 묘비명 찬술을 부탁받고 자신의 마지막 글을 지었다. 이경석 묘비명 링크 생전에 송시열과 대립했던 박세당은 송시열이 이경석을 수이강 사건으로 조롱한 것을 비판하며 신도비명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人其來敬)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人其來敬)
이 글을 보고 분개한[16] 노론과 송시열의 당여들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여겨 숙종에게 비문과 저서인 『사변록』을 불태우고 머나먼 벽지로 유배보내라고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다.[17] 숙종은 노론의 요구를 받아들여 비문과 『사변록』을 불살라버리게 된다.[18]
3. 사상
박세당의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추구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해 노 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박세당이 당시 조선의 통치 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고 보는데는 이론(異論)이 없다.[19]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린 도가 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스로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이러한 학문 경향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보위에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 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도가 사상을 연구했다는 이유로 당시 유교를 국교로 하던 조선에서 많은 비난을 당했다. 유학자로서 도덕경과 장자를 주석한 것 부터 그의 학문의 독자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당시 농업 기술에 대해서 다룬 '색경(穡經)'이 포함된 서계집의 저자이며 특히 색경 때문에 초기 실학자(중농주의)로 분류되는 일이 많은 인물. 잦은 탄핵으로 인해 정치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 수락산 석천동으로 물러나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이 반영된 저서다. 각 지방의 농경법을 연구한 농법기술서로 서문과 상 · 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유명한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다. 농사를 부끄럽다 하면서 밥을 먹는 것은 부끄럽지 않으냐?"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
조세걸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조세걸은 김수증의 곡운구곡도첩의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2]
참조: 김세정, 명재 윤증과 서계 박세당의 학문과 교유(交遊) 관계
[3]
박정은 인조반정의 공신 중 한명이다. 정사공신 3등. 그러나
나만갑과 함께 김류에게 밉보인 바가 있다. 홍문관 응교 시절 남이공 사건 때 얽혀 함평현감으로 좌천된다. 시호는 충숙(忠肅)
[4]
박세당의 셋째 형 박세후가 명재
윤증의 누이와 혼인하였다. 박태보는 윤증의 제자이기도 하다. 혼맥, 학맥이 연결되어 윤증과 친밀할 수 밖에 없는 관계로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에는 윤증과 박세당이 서로에게 보낸 서신이 각각 22편, 26편이 수록되어 있다.
[5]
朴泰維, 1648 ~ 1696, 호는 백석(白石)이다. 1681년 문과 급제 후 지평, 병조좌랑을 역임하였고, 훈척
김익훈을 탄핵한 바 있다. 또한 송시열이 제기한 태조존호 문제를 둘러싸고 그와 대립하였다. 상관의 탄핵을 많이 한다고 하여 숙종이 평안도로 발령을 냈고, 그곳에서 풍토병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어 1685년 사직 후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명필로 유명하며 조선에
안진경의 서체를 선구적으로 도입하였다고 한다. 그의 서첩은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수원역사박물관 소장.
링크
[6]
후사가 없어 박세당의 차남 박태보가 양자로 입적한다.
[7]
동부승지, 병조참의 역임.
[8]
원두표의 언급에도 나오듯이 원두표는 박세당의 부친 박정의 친구이다. 그럼에도 거리낌없이 비판하였다.
[9]
삼간(三奸)도 있다. 이경휘, 윤형성, 유상운.
[10]
1667년 광주 정씨와 재혼하였다. 후처와의 사이에서 아들 박세한(朴泰翰)과 딸 둘을 얻었다.
[11]
고의 였을 것이다.
[12]
'재주와 힘이 미약하여 세상에 무엇인가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세상 또한 나날이 퇴락하여져 이를 바로잡기 어려워졌다.'
[13]
동구릉에 있었으나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14]
이 시기 경험이 바탕이 되어 농업서 색경(穡經)을 지었다.
[15]
친우 윤증은 노장사상에 대한 관심과 주석서 간행에 대한 우려를 전한 바 있다.
[16]
동양에서 올빼미는 인식이 좋지 않은 새인데(멀게는 주공단이 자신을 음해하는 자들을 올빼미에 비유하는 시를 지어 자신을 억울함을 호소한 바 있다.) 그걸 송시열에 비유했으며 올빼미에 비유해 송시열을 착하지 않고 군자가 아닌 자라고 욕한 것이다. 노론에서 송시열을 송자라고까지 했으니 뚜껑이 열릴 일이다.정작 수이강 사건으로 인해 군자라 하긴 뭣한건 안비밀
[17]
재야에 머무르던
김창협,
김창흡 형제도 참전하였다.
[18]
이경석 신도비는 50년이 지난 1754년
이광사[20]의
글씨를 받아 겨우 건립되었는데 노론에 의해 글자가 깎여나가고 땅에 파묻혔다. 이후 1979년 이경석의 후손들은 비석을 재건하고 옆에 새로 글씨를 새긴 신도비를 함께 세워 오늘날 이경석의 묘에는 2개의 신도비가 있다.
[19]
반주자학자보다는 탈주자학자(脫朱子學者)로 보는 입장도 대두되고 있으며,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관점도 존재한다.
[20]
이광사의 종고조부가 이경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