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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C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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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9월 11일 | ||
필리핀 군도 도민정청 북일로코스주 사라트 | |||
사망 | 1989년 9월 28일 (향년 72세) | ||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 |||
재임기간 | 제10대 대통령 | ||
1965년 12월 30일 ~ 1986년 2월 2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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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f89><colcolor=#f6d251> 배우자 | 이멜다 마르코스 | |
자녀 |
장녀 아이미 마르코스 장남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1] 차녀 아이린 마르코스 삼녀 에이미 마르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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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필리핀 대학교 법과대학 | ||
종교 | 가톨릭 | ||
신체 | 170cm[2] | ||
최종 당적 |
[[신사회운동당| 신사회운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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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
1(상원) 3(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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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대수 |
4(상원) 2, 3, 4(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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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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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그리고 현 필리핀 대통령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의 아버지이다.장장 20년간 필리핀을 철권통치하며 계엄령 선포, 민주주의 탄압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결국 경제 쇠락과 부정부패, 횡령, 독재, 사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불만이 터져 임기 후반엔 '피플 파워'라는 대규모 시위를 일어나게 만들었고, 결국 국민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불명예 퇴진을 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가 그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2. 생애
2.1. 초기
1917년 9월 11일에 북일로코스주 사라트(Sarrat)에서 변호사이자 하원의원이던 아버지 마리아노 마르코스[3]와 교사이던 어머니 호세파 에드랄린[4] 사이에서 태어났다. 페르디난드는 화교 + 일본계 + 일로카노인 혈통에 상당히 교육을 잘 받은 인물로, 마닐라에서 공부하다가 1930년대 후반 마닐라시 근교에 있는 필리핀 대학교에 진학해 법률을 전공했는데, 대학에서는 계속해서 수석을 차지했고, 후술할 재판을 받지 않았다면 계속 수석을 차지했을 거란 얘기가 있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마르코스는 실제로 1939년에 변호사 시험에 응시했을 때 평균 점수가 거의 만점이라는 92.35%를 차지하며 전체 1등으로 합격할 정도로 영리했다[5][6].1938년 12월에 마르코스는 아버지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훌리오 나룬다산(Julio Nalundasan, 1894~1935)을 1935년 9월 20일에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기소 내용에 따르면 이 살인 계획에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 2명도 관여했으며, 나룬다산의 집의 열린 창문에서 나룬다산의 등에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바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본인이었다고 한다. 증거가 명백했기에[7] 마르코스는 삼촌 1명과 함께 1939년 11월에 계획적 살인 혐의가 인정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8], 독학한 법률지식으로 스스로 변호하면서 대법원에 상소하여 1년 뒤인 1940년 10월 22일에 무죄 판결을 얻어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필리핀에서 꽤 인기를 얻어서 정치인이 될 중요한 자산을 얻게 된다. 이후 마닐라에서 법정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마르코스는 필리핀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다가 교전 중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 악명높은 죽음의 행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마르코스는 자신이 일본에 맞서 게릴라전의 핵심지도자로 활약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훗날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데 큰 뒷받침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게릴라 항전을 벌이던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다. 마르코스가 항일 게릴라전을 했다고 주장하는 시기는 20대 초반이라, 나중에 8,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했다는 주장과 겹치면 뭔가 석연찮게 된다. 스탠리 카노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오히려 친일 혐의로 아버지가 마을 사람에게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출처불명이다. 적어도 필리핀 육군에 장교로 입대해 참전한 것까지는 확실하지만 포로로 잡힌 이후의 행방이 묘연하다. 1980년대에 마르코스 정권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이걸 폭로한 책이 출간되었고,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에 의하면 마르코스는 실제로는 1942~45년 항일투쟁에 전혀 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참여했더라도 형식적으로만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르코스는 생전에 자신이 항일활동으로 전쟁 중에 33개의 훈장을 받았다고 자랑했으나, 실제로는 전쟁 중에 수여받은 훈장은 단 2개뿐이었으며, 그것도 마르코스의 상관들이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그는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지냈고, 필리핀 자유당원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지내고, 마닐라 시장직에도 당선되는 등 정치인으로써 승승장구했다.
주요 정치 경력을 거치고 상원의장이 된 마르코스는 전임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을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마카파갈이 이를 부정하고 재선에 출마하자 마르코스는 당적을 바꾸어 호세 라우렐의 국민당에 입당하였다. 국민당에 입당하자마자 마르코스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1965년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2. 첫 번째 임기
196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경선에서 패배한 후에 자유당에서 국민당으로 당소속을 바꾼 그는 1965년 대선에서 51.9%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대선 과정에서 마르코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자신의 항일투사의 이미지를 계속 홍보했는데, 당시 마르코스의 상대 후보들은 과거에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선거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경제발전과 정부개혁, 부정부패 척결을 외쳤다. 그리고 재임 초기에는 친미반공 일변도였던 필리핀의 외교노선을 바꾸어서 공산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고, 중소 경공업을 육성하면서 지방인프라 확충작업을 벌였는데 이 덕분에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서 빈곤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 보였다. 그는 수교를 맺으면서도 베트남에 필리핀군을 보내거나 필리핀 내의 공산반군을 때려잡는 행위는 계속 했다.
그러던 중 1966년 마르코스 대통령은 베트남 지원법을 통과시켰고, 연인원 10,000명 이상의 필리핀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비전투 활동에 참여하였다. 문제는 마르코스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입장 번복이었다. 필리핀 상원의장이었을 당시에 마르코스는 전임 대통령 마카파갈의 베트남 파병법에 반대하였고, 하원에서 통과된 지원법을 상원에서 지연함으로써 파병을 자연스럽게 폐기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런디 대통령에 당선되고서는 입 싹 씻고 파병에 찬성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이러한 태도 변화는 마르코스가 미국의 경제 지원 때문에 미국에 넘어갔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마르코스의 지지자들에게도 비난을 받았다.
어쨌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마닐라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1966년 미국을 방문했던 마르코스는 일본으로 가는 도중 " 마닐라에서 아시아 정상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다"라고 발표했고, 이 정상회담의 목적은 " 베트남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상황을 끝내고 베트남을 도우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이미 여러 곳에서 서술되었다시피 대한민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투병을 보낸 나라였기 때문에, 당연히 국정홍보용 기록영화인 대한뉴스에도 한 회분을 통째로 할애하다시피 하며 남겼다. #
한편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서 필리핀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뻔뻔스럽다", "대부분의 국가가 참여하지 않는다" 등으로 마르코스를 비판하였고, 이에 정상회담의 이름이 '마닐라 정상회담'으로 바뀌었다. 당시 반정상회담 시위에서 대학생들은 "양키 고 홈", "먼저 쏘고 나중에 대화하라 존슨", "헤이 존슨, 오늘은 몇 명이나 죽였나?" 등의 미국을 비판하는 구호나 "베트남: 핍박받는 자들의 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경찰들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과정에서 학생들은 신발을 잃고 피를 흘리기도 했다. 시위대는 그 과정에서 필리핀 국가인 Lupang Hinirang을 제창하고 대열을 유지한 채 경찰 앞에 섰지만, 결국 무자비한 진압 끝에 시위는 해산되었다. 이외에도 필리핀 전국에서 농민들이 경찰들에게 구타와 학살을 당했지만, 오히려 농민들을 학대한 관련 경찰관이 처벌받지 않고 승진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 비판을 받았다.
어쨌든 저런 것으로 말은 많았지만 상기했듯 1기 집권시에 경공업 수출은 호황이었던데다가 외채를 빌려서 9만여개에 달하는 학교 건물과 북로손 고속도로를 신축하는 등 각종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였고, 농업생산량 증가를 위해 신품종 도입에 나섰다. 필리핀의 볼도저 대통령인 셈이었다. 이에 따라 필리핀의 경제성장률이 급속히 올라가고 학교취학률도 급속히 올라가며 마르코스의 인기는 고공행진하였다. 이 때문에 1969년 대선 선거과정에서 군대와 관료조직을 활용해 매표행위를 벌이는 금권선거를 벌였음에도 1969년 대선에선 61.5%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면서 전후 최초의 재선 대통령이 되었고, 하원이 여소야대였던 1기 집권기와는 달리 상하원과 부통령직까지 국민당이 전부 차지했다.[9]
2.3. 본격적인 폭정의 시작
1970년, 학생들의 집회를 진압하는 경찰 |
하지만 마르코스가 재선에 나서는 과정에서 필리핀 정부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결국 마르코스가 재선된 직후에 필리핀은 금융위기에 처해버리고 만다.[10] 결국 마르코스는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경상수지 적자를 감축하기 위해 페소화 가치 절하를 단행할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페소화 가치하락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지며 마르코스의 지지율이 균열이 가기시작했고, 반대시위의 물결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결국 마르코스는 재임 2기부터 점차 독재자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1972년 9월 23일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의회를 해산한 후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계엄령 바로 다음 날인 1972년 9월 24일 새벽까지 반정부 인사와 야당 의원, 언론인들을 포함한 총 400명이 체포되고 그들 중 100명이 구금되었다. 이후 마르코스는 군부를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어 군부를 이용해서 군부독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72년부터 1976년 사이에, 마르코스는 6만 5,000명이였던 필리핀군을 4배가 넘는 27만 명으로 늘려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계엄령 과정에서 이전까지 '아시아에서 제일 언론이 자유로운 나라'로 여겨지던 필리핀의 언론 자유는 이 계엄령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계엄령 직후 필리핀에서는 7곳의 TV 방송국, 27개의 전국구 신문, 66개의 지역구 신문 및 292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폐쇄된다. 공공시설도 계엄령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해 계엄령 직후 시점에는 전기 회사, 전화 회사, 항공사까지도 폐쇄되었다. 이후 일부 언론사들은 활동을 재개하기는 했지만, 모든 뉴스 매체와 출판물들은 정부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마르코스에 비판적인 외국 언론인들은 추방당하거나 비자가 거부당했다. 그리고 1973년 7월 27~28일에는 부정선거 논란 속에서 계엄령 찬성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90.67%의 찬성표를 얻었다.
계엄령 직후 마르코스는 군 장교들에게 민간인의 생사여탈권에 대한 '특별한 권한'을 부여한다. 이들은 반정부 인사들에게 날조된 혐의나 불명확한 혐의를 적용하여 체포 영장과 기소 하나 없이 집에서 끌고 가 무차별적으로 감금한 후 ' 더러운 전쟁' 당시 남미의 군사정권이 쓰던 것과 비슷한 수법의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알프레드 맥코이(Alfred W. McCoy, 1945~)는 1975년부터 1985년까지 필리핀에서 군대에 의한 초법적 살인으로 3,257명 정도가 사망하고 3만 5천 명이 고문피해를 입었으며 7만 명이 투옥당했다고 추정했고, 사망자들 중 2,520명은 대중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시체가 절단되거나 훼손된 후 길거리 같은 공공장소에 내버려졌으며, 심지어는 아예 시체의 머리가 참수되어 거리에 전시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마르코스의 계엄령 시기에는 약 5만여명의 사람들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숙청이나 암살 등의 방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실제로 마르코스는 이런 만행들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묵인하고 심지어는 장려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마르코스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도 실시하여 자신에게 여전히 부족 사회로 본 필리핀 사회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왕이라는 이미지를 투영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마르코스는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필리핀 전역의 토착민들을 통치하는 '다투'의 이미지를 자신에 투영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사용된 필리핀의 5페소 동전에 본인의 옆모습을 새겨넣은 것은 물론이고, 마르코스는 '필리핀인 슈퍼맨' '미국에 대항한 유일한 대통령' 등으로 선전되었다. 심지어 마르코스는 하술하듯 자신의 집권 기간 동안 벤퀘트 주의 산악지역에 자신의 모습을 본뜬 거대 흉상을 세우기까지 했다.
이러한 폭정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과 8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베니그노 아키노를 중심으로 한 야당 지도자들의 반대가 심화되었으며, 학생들은 대학교에서 끊임없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마르코스 정권 타도를 외쳤지만, 경찰들이 몽둥이로 시위대를 공격했고 시위대에 최루탄까지 뿌려대면서 진압했다. 한편 지방에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재자를 몰아낼 수 없다"면서 무장투쟁을 시작했는데, 민다나오 섬과 술루 제도에 사는 소수민족인 모로인들과 마오이즘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중앙정부의 전복을 목표로 게릴라 활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르코스는 오히려 더욱 더 무자비한 고문과 학살, 테러로 맞서면서 게릴라들의 저항이 더욱 더 거세졌고 이로 인해 필리핀의 군대가 모두 게릴라와의 전투에 동원되는, 거의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실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기 전부터 수백 명의 모로인을 학살한 적이 있었지만, 계엄령 후로 모로족에 대한 탄압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필리핀군의 모로인들에 대한 학살은 매우 잔혹했는데, 실제로 마르코스가 집권할 동안 필리핀의 경찰, 육군, 일라가[11]는 최대 1만 명의 모로인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82년에는 술루 제도의 파타 섬에 필리핀군이 수개월간 포격을 가해 민간인 약 3천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학살의 계기는 어처구니없게도 1981년 2월 12일에 필리핀 육군이 모로족 반군에게 대패한 것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1983년에는 해군 함정이 민간 여객선에 발포를 하여 57명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 '통 우마포이 학살'의 희생자 대부분은 운동 경기를 보기 위해 배를 탄 민간인들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필리핀군은 마을을 불태우기 전에는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마르코스 치하의 모로인 학살 중 가장 악명이 높은 학살은 1974년 9월 24일에 일어난 '팔림방 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필리핀군은 팔림방의 연안 마을인 말리스봉에서 수많은 모로인 남녀들을 체포해 모스크에 감금하고는 한 달 동안 11~60세 정도의 모로인 남성들을 매일 밖으로 끌고 가고는 자신이 묻힐 구덩이를 스스로 파게 한 후 총살한 것은 물론에 사람을 생매장하거나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등의 방식까지 동원해가며 죽였는데, 이렇게 학살당한 남성이 무려 1,500여명에 달한다. 게다가 9~60세 정도의 여성 3천여명은 심문을 명목으로 최소 10명의 그룹으로 짜여진 후 해안에 정박한 해군 함정에 끌려가 군인들에게 폭행과 강간을 당했으며, 이에 저항하는 여성이 있으면 그 즉시 총살했고, 열사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어린이가 있으면 그 시체를 바다에 유기하기까지 했다.[12] 이렇게 연행된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대부분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계속 이 학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며, 필리핀군은 덤으로 이 마을의 가옥 300여채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이후 2014년 9월에 베니그노 아키노 3세 정부는 이 학살 피해자들을 '계엄령 피해자'로 공식 인정했다.
결국 이런 악행들 때문에 마르코스는 1975년 3월에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이 꼽은 세계 최악의 지도자 6위에 등극하게 되는데, 참고로 이 조사에서 마르코스 바로 밑인 7위를 차지한 지도자가 다름아닌 김일성이었단 것을 감안하면, 마르코스의 폭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자료
이에 여론이 악화되자 마르코스는 1981년 1월 17일에 8년간이나 지속된 계엄령을 해제했지만, 계엄령을 해제했다고 해서 마르코스의 독재가 완화되거나 민주화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적 이유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계엄령이 시행될 때보다 더 늘었으며, 덤으로 마르코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임기 6년의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1981년 6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공갈, 협박, 매수를 이용한 부정한 방법을 한 끝에 선거에서 88% 이상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3번째로 필리핀 대통령이 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르코스는 집권 말기에 국제 사회와 가톨릭 교회의 압력으로 마르코스는 자신을 비판하는 일부 신문의 발행을 허용했지만, 그대로 신문을 폐쇄할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정권의 핵심이 되기 시작했다. 1954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결혼한 이멜다는 미인대회 우승자로, 굉장히 사치스럽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멜다는 1972년의 계엄령 선포 이후에는 필리핀의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었는데, 그녀는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정부와 산업체의 요직에 친척들을 임명해서 비난을 샀으며, 그녀 자신도 수도 마닐라 시장직(1975년~1986년)과 주거환경장관직(1979년~1986년)을 역임했다. 또한 마르코스는 자신의 친척이나 아들 딸들을 각각 자신의 핵심 요직에 앉혀서 측근 정치를 실시했고, 결국 측근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이후 상황은 안 봐도 개판 그 자체인데, 마르코스의 부정부패, 막장 경제정책과 이멜다 마르코스의 사치로 인한 국가 재정의 파탄, 외채 상승, 그리고 상승하는 실업률과 빈부격차가 발생하며 경제가 점차 막장이 되어갔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계엄령 기간 동안 마르코스 정권이 외채 이자가 낮은것을 이용하여 외채를 많이 빌렸는데 초기에는 코코넛 등 원자재 가격상승으로 경제성장이 재개되었지만, 1970년대 말에 외채위기에 직면하면서 이것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르코스 정권 당시 목재 제품은 필리핀 최고의 수출상품이었는데, 마르코스 정권 당시에 나무가 얼마나 많이 벌목되었냐면 1980년대에는 필리핀 나무가 한동안 고갈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천 개의 섬들로 이뤄진 국가 특성상 전국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빈번히 일어났다. 특히 필리핀 공산당 산하 신인민군(NPA) 및 모로족(수니파 무슬림 집단) 독립운동단체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각각 내전을 치르느라 군대가 총동원되어 온 나라가 전시체제나 다름없었다.
2.4.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사건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2세(Benigno Simeon "Ninoy" Aquino Jr. 1932 ~ 1983). |
마르코스는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에게 국가 반역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미국이 개입하자 사면해서 미국에 망명을 보냈다. 항상 그렇듯 미국의 목적은 마르코스에 대한 견제 목적이었다. 망명지에서 아키노는 돌아왔지만, 니노이가 항공기에서 내리자마자 롤란도 가르만이라는 자가 뒤쪽에서 튀어나와 니노이를 암살했다. 암살장면 "우리 조국은 암살을 서비스처럼 주는 나라"라면서 죽음을 암시하긴 했으니, 어쩌면 죽음을 이미 각오했을지도 모른다.
아키노 암살 사건이 터지자 그에 대한 해명을 위해서 마르코스가 사건을 독립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독립위원회를 만들고 조사하게 했는데, 독립위원회는 이듬해 "군의 고급장교들이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최종 결론을 발표했다. 마르코스 정부는 청부 살인업자인 롤란드 갈만을 진범으로 지목했지만 마르코스 정권 최고수뇌부에 의해 주도된 정치적 암살이었다는 견해가 필리핀과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필리핀 야당은 아키노를 태운 여객기가 공항에 도착한 뒤 아키노를 호위하려고 비행기에 올라탄 보안요원들이 아키노를 살해하는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의 증언을 발표했다. 현재는 마르코스가 이때 투석 중이었음을 근거로 측근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게 중론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때 마르코스의 통제력이 현저히 떨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키노 암살은 마르코스 정권이 전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필리핀 전역에서는 연일 마르코스 하야를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아키노의 장례식엔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 독재자 마르코스를 규탄했고, 거리에는 아키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 물결이 일었다. 그리고 베니그노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는, 아키노가 암살당하자 남편의 뜻을 잇기 위해 반정부 지도자로 나서 민중들을 이끌게 되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유명했는가 하면, 아키노가 암살당한 공항은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으로 이름까지 바꾸게 된다.
2.5. 몰락: 에드사 혁명
한편 마르코스는 바닥까지 추락한 신뢰도를 형식적으로라도 회복하고 정권유지 기반을 다져 재신임을 할 목적으로, 1986년 대통령선거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1987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선거를 1986년 1월로 앞당겨서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할 것을 발표했다. 결국 선거는 1986년 2월 7일 치러졌는데, 필리핀 야당의 통일후보 코라손 아키노와 마르코스의 대결이나 다름없었다. 선거 결과는 코라손 아키노에 대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마르코스의 승리라고 선언되었다.마르코스 정권은 1986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 때 개표 중간 정산 때 야당 후보인 코라손 아키노의 표가 많이 나오자 개표 중지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알고 보니 마르코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방송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려다가 국민들의 엄청난 저항이 일어났다. 필리핀 국회는 마르코스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남프렐(NAMFREL, 자유선거 국민운동본부)은 코라손 아키노의 승리를 발표했다.
이에 필리핀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언론이 "이 선거는 부정선거"라고 주장했고, 대규모 부정선거에 대한 폭로와 증거가 속속 드러나자 이에 분노한 필리핀 국민들이 코라손 아키노가 이끄는 반정부 운동에 합세했다. 이에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내려 국민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상황은 굉장히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의 인권탄압과 부정부패를 묵인해 온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미소화해와 냉전종결의 분위기 속에 마르코스 정권에게 등을 돌렸으며, 필리핀군 수뇌부 내에서 마르코스의 부패에 불만을 품고 개혁을 도모하던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군 세력이 마르코스 정권 타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마르코스의 제자'라는 인식까지 생길 정도로 마르코스의 최측근이었던 후안 폰세 엔릴레[13][14] 필리핀 국방장관과 피델 라모스 필리핀 육군 대장은 마르코스에게 퇴임을 요구하며 하며 코라손 아키노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군대를 이끌고 대통령궁으로 진격하기까지 했다.
아키노 암살 이후 시민혁명의 물결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야당의 편에 서서 개혁을 지지하던 후안 폰세 엔릴레(Juan Ponce Enrile) 국방장관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마르코스 대통령의 퇴임을 촉구하면서, "군 통수권을 국민들이 선출한 진정한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에게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코라손 아키노를 지지하는 엔릴레 국방장관과 피델 라모스(Fidel Valdez Ramos) 부참모총장이 이끄는 개혁파 군부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마르코스는 군부개혁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종교계도 마르코스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마르코스 세력에 몰려 마닐라 시내 중심부에 있는 아기날도 캠프로 피신해 있는 개혁파 장교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은 바로 필리핀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는 하이메 신 추기경이었다.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국가인 필리핀에서 추기경의 영향력은 막강했는데, 추기경은 “여러분, 캠프 아기날도를 둘러쌉시다.”라고 하였다.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치는 추기경의 호소에 불과 몇 시간 만에 정부군 진압에 맞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 캠프 주위에 시민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또한 아기날도 캠프 주변과 중심 도로인 에드사(EDSA) 거리를 묵주와 꽃을 든 시민들이 가득 메우기까지 했다.
이에 마르코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결국 필리핀 대통령 자리에서 사임하는 조건으로 1986년 2월 25일 오후 9시에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마르코스를 몰아낸 일련의 시민 불복종 운동 내지 혁명은 보통 '피플 파워', ' 에드사 혁명'으로 칭해진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마르코스의 망명은 미국 CIA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처음엔 필리핀의 2.7 대선에서 마르코스가 저지른 엄청난 부정선거에 대해 "부정선거는 여야 양자에서 똑같이 저질렀으며 코라손 아키노는 마르코스에게 협력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 발언에 대해 미국과 전 세계의 여론이 비판적이자 레이건은 "마르코스가 책임이 크다"고 꽁무니를 뺀 뒤, 필립 하비브(1920~1992)를 대통령 특사로 파견해 필리핀이 반미로 돌아서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15]
마르코스는 망명을 가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는 호화 물품들을 챙겨갔는데, 실제로 마르코스는 망명을 가는 와중에도 7억 1,700만 달러 상당의 현금 상자 22개, 보석 상자 300개, 20만 달러 정도의 금괴, 1억 2,400만 달러 상당의 미국, 스위스, 케이맨 제도 은행에 대한 예금 전표, 그외 여러가지 사치품들을 챙겨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살아있던 마르코스의 노모는 이미 8년 전부터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상황이라 아들을 따라가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고, 건강이 하도 악화된 나머지 아들이 축출되었단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16]
2.6. 말년과 안장
마르코스의 망명 생활은 전혀 비참하지가 않았는데, 마르코스는 가족들과 같이 호놀룰루에 있는 호화 주택에서 살면서 주에서 가장 비싼 곳 중 하나에서 쇼핑과 고급 식사를 즐겼으며, 심지어 1987년에는 미국 하원 외교 소의원회에 마르코스의 대화 테이프가 제출되며 1만 명의 용병과 최대 1800만 달러 정도의 무기[17]를 동원해 고국으로 돌아와 코라손 아키노 정부를 전복시키고는 코라손 아키노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까지 폭로되었다. 그 후 마르코스는 한동안 아키노 정부를 인정하지 않다가 1988년에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ABC 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아키노 정부를 인정하며 아키노가 공산주의 반군과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그러나 이렇게 망명 와중에도 호의호식하던 마르코스는 1989년 1월 15일에 폐렴으로 입원하게 되었고, 신장과 심장병까지 겹치며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갔는데, 사망 직전에는 본인을 방문한 당시 필리핀의 부통령 살바도르 라우렐(Salvador Laurel, 1928~2004)에게 '필리핀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묻어주는 조건으로 부당하게 얻은 재산의 90%를 필리핀 국민들에게 반환하겠다'고 뒤늦게 후회의 말을 전했지만, 아키노 정부와 아내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89년 9월 28일에 망명지 호놀룰루에서 72세 생일 17일 후에 사망했는데,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병이었다. 측근에 따르면 죽기 전 남긴 말 중 "구두 3,000켤레가 아깝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한동안 방부처리되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시신[18] |
마르코스는 하와이 오아후 섬에 있는 일본식 사원인 뵤도인 사원에 있는 개인 영묘에 안장되었으나, 1993년에 필리핀 정부는 마르코스의 시신을 고국으로 옮겨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마르코스 일가족은 국립묘지 안장을 주장하며,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미라 형태로 필리핀 북부의 고향마을에 18년째 임시로 안장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1989년 사망한 후 하와이에서 먼저 장례를 치르면서 방부 처리를 했고, 1993년에 필리핀에 기념관을 지었을 때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남편의 시신을 이장하면서 아예 말끔하게 미라로 만들도록 장의사들에게 부탁하여 유리관에 저렇게 전시해 놨는데, 국립묘지의 대통령 묘역에 안장이 허용될 때까지 저렇게 미라로 안장해놓겠다고 했다.
마르코스 가족과 필리핀 마르코스의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국립묘지 안장을 촉구했지만, 이에 대해 베니그노 아키노 3세 필리핀 대통령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 문제에 대해 거부한다고 버티고 있었다. 아키노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군사 계엄 시절 희생된 많은 피해자가 있고, 그들은 아직도 국가로부터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국립묘지 안장은 안 된다."며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그 다음 대통령인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마르코스의 국립묘지 안장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결국 2016년 11월 18일 필리핀의 국립묘지인 Libingan ng mga Bayani의 대통령 묘역에 마련된 석곽묘에 이장되었다. 장례식은 국장이나 사회장까지는 아니고 군장으로 치러졌다고 하며, 이멜다 마르코스를 비롯한 가족들과 친지, 측근, 명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지지자들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물론 마르코스를 증오하는 젊은 층들은 장례행렬 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며 반대했다.( CNN 필리핀, 경향신문, 사진일람, 영위백)
3. 가족 관계
-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
- 장녀 이멜다 마르코스 2세 (일명 아이미 마르코스): 1955년생. 1984년 일로코스 노르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나, 아버지가 축출되면서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러나 12년 이후 귀국해 다시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10년 이래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를 지내고 있다. 2019년 5월 아들에게 주지사직을 넘기고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
- 외손자 매튜 조셉 마노톡 (Matthew Joseph Manotoc): 아이미 마르코스의 막내아들. 2016년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서 지방의원에 당선되었고, 2019년 어머니의 뒤를 이어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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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일명 봉봉 마르코스): 1957년생. 외아들로, 23세 때 마르코스의 고향인 일로코스 노르테 주의 부주지사를 지낸 이래로 정계에 입문했다. 1986년 마르코스가 축출되면서 잠시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1991년 귀국, 이후 일로코스 노르테 주에서 다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같은 동네에서 주지사와 하원의원직을 번갈아 지냈다. 2010년 상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2016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해 3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특히 마르코스가 태어난 곳인 사랏(Sarrat)에서는 무려 97.5%를 득표했다. 하지만 결국 낙선했다.
역사책을 수정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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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기어코 2022년 대선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연히 반대측에선 우려가 나왔다. - 차녀 아이린 마르코스
- 3녀 에이미 마르코스: 마르코스 부부가 입양한 자녀.
마르코스는 1949년부터 카르멘 오르테가(Carmen Ortega)라는 여성과 같이 살며 사실혼 관계로 세 자녀를 두다가 1953년 8월에 약혼한 상황이었으나, 1954년 4월에 이멜다 트리니다드 로무알데스(Imelda Trinidad Romualdez)라는 미인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 만난지 고작 11일 만인 1954년 4월 17일에 결혼하고는 1남 2녀를 뒀다. 사실 페르디난드는 이멜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11일 동안 하루에 1개씩, 총 11개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냈으나 그럼에도 그녀가 마음을 두지 않자 언젠가 영부인이 될 생각은 없냐고 물어봤고, 이에 이멜다는 결혼을 승낙했다. 이렇게 결혼한 이멜다 마르코스는 1975년부터 1986년까지 마닐라 주지사를 지냈고,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벽 때문에 '인류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인물'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것은 물론이고 마르코스의 사후에도 필리핀 사람들 대다수는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용서할 수 있어도 이멜다 마르코스는 용서할 수 없다'라고까지 말할 정도다.
그러나 마르코스는 결혼 후에도 불륜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1968년부터는 도비 빔즈[19][20]이라는 이혼녀 출신의 미국인 여배우와 2년여간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가 도비 빔즈가 몰래 침대 밑에 녹음기를 설치하여 녹음된 음성 기록들이 1970년에 폭로되어 필리핀 내에서 큰 스캔들로 비화되었다. 이때 필리핀의 대학생들은 대학교 캠퍼스의 라디오 방송국에다 마르코스의 은밀한 녹음을 쉴틈없이 틀어대며 마르코스를 조롱했다[21]. 그런데도 마르코스는 1970년경에 또다시 플레이보이지 모델 출신인 에블린 헤계시(Evelin Hegyesi)와 관계를 가지고 아날리자 요제파(Analisa Josefa)라는 딸을 낳기까지 했는데, 아날리자 요제파는 후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외에도 마르코스 일가는 여러 요직을 역임했는데, 실제로 마르코스는 친척들에게 정부 관련 업무를 맡겼고, 종종 현금 수입이 있는 기관이나 국유 기업을 담당하게 했다. 페르디난드의 여동생 엘리자베스 마르코스-케온(Elizabeth Marcos-Keon)은 1971년부터 1983년까지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를 역임했고, 남동생 파시피코 마르코스(Pacifico Marcos, 1919~?) 역시 필리핀 의료 의원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광업, 코코넛 정제 및 경영 컨설팅과 관련된 최소 14개의 민간 기업을 통제하거나 보유했다. 게다가 마르코스의 어머니도 아들이 집권할 동안 10개 이상의 회사의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르코스 부부의 장녀인 아이미 마르코스(Imee Marcos, 1955~) 역시 1984~1986년까지는 단원제 의원을 역임했고, 1998~2007년까지는 하원의원을 역임한 후 2010년부터 2019년까지는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를 역임하다가 주지사직에서 물러난 직후에는 필리핀의 상원의원이 되어 2023년 현재까지도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가 집권할 동안 엄청난 사치를 즐겼는데, 보석과 맨션들을 즐겨 구매한 것은 당연했으며 그녀가 대학교 생활을 할 때에는 교실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는다는 대학교 자체 정책을 깨고는 그녀가 수업하는 강의실 한정으로는 에어컨을 설치하도록 했으며, 심지어는 자녀를 필리핀에 두고 유럽을 여행할 때에 자녀들에게 모유를 수유하기 위해 아버지가 보낸 필리핀 항공의 특별 항공편을 모유 택배로 쓰기까지 했는데, 이 때문에 필리핀 항공의 많은 비행이 지연되거나 취소되어 유럽에 살고 있거나 유럽을 여행하던 많은 필리핀인들이 불평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녀는 3개의 대학교와 1개의 고등학교의 졸업증을 위조하여 2번이나 공개적으로 최우등으로 졸업한 것처럼 학력을 위조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 프린스턴 대학교를 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인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경영학 석사 학위를 위조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이미 마르코스는 살인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기도 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75년에 청소년에게 지역 사회 문제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고 정부의 개발 노력을 청소년에게 알리는 정부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카바탱 바랑가이(Kabataang Barangay)라는 청소년 조직을 만들고 장녀인 아이미 마르코스를 회장으로 앉혔는데, 1977년 8월 31일에는 그녀가 연사로 참여한 포럼에서 아르키메데스 트라자노(Archimedes Trajano, 1956~1977)라는 대학생이 "카바탱 바랑가이를 대통령의 딸이 맡아야 합니까? 대통령의 딸이 아니었다면 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나, 아이미 마르코스는 이 말을 듣고 짜증을 냈으며, 결국 트라자노는 아이미 마르코스의 경호원들에게 끌려가 무자비한 구타와 고문을 당한 끝에 동년 9월 2일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물론 언론 통제로 인해 이 사건은 신문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이 사건 때문에 아이미 마르코스는 아버지의 축출 직후에 트라자노의 어머니의 소송으로 1986년에 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살인 혐의로 유죄가 인정되어 징벌적 손해배상금으로 250만 달러, 어머니에게 정신적 고통 배상금으로 125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판견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아이미 마르코스는 2016년 11월에는 '아버지가 집권할 동안 난 권력을 가지기엔 너무 어렸다[22]'는 황당한 발언을 남겨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며, 2018년 10월에는 아버지 집권 하에서의 인권 침해에 대해 '법정에서 입증되지 않은 정치적 고발'이라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장남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역시 고모의 뒤를 이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일로코스 노르테 주지사를 역임했고, 아버지의 사후에도 하원의원과 상원의원도 지내면서 아버지의 만행을 정당화하며 이에 대한 사과를 거부한 것을 넘어[23] 늦어도 2016년부터 지지자들을 동원해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 등지에 '편향된' 언론이 간직한 '숨겨진 역사'라며 아버지의 집권기가 필리핀의 황금기였다고 선전했고, 덤으로 이 주장의 출처가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인 것처럼 가장했다. 이는 필리핀의 신세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결국 '봉봉 마르코스'는 2022년에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차녀인 아이린 마르코스(Irene Marcos, 1960~)는 1983년에 당시 가치로만 1,030만 달러가 든 결혼식을 올리고 아버지의 축출 후에는 1985년 9월에 대통령 전용 요트인 앙 파굴로(Ang Pangulo)에서 호화 파티를 즐기는 영상이 유출되어 구설수에 올랐고,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르코스 부부의 자녀 중에서는 유일하게 공직에 오르지 않고 아버지를 부적절하게 미화하지 않으며 비교적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4. 부정부패
2004년 발표된 글로벌 투명성 보고서에서, 마르코스는 세계에서 2번째로 부패한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사실 부정부패는 이 조사에서 1등을 먹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350억 달러로 마르코스보다 더한 수준이지만, 최소한 수하르토는 빼돌린 돈을 인도네시아 내부에 대부분 투자(?)해서 돈이 빠져나가지 않은 반면, 마르코스는 돈을 갈취해서 그 돈을 해외로 빼돌렸기 때문에 질이 더 나쁘다고 평가받는다.[24] 이후 아키노 정권과 라모스 정권에서 마르코스의 부패에 대해 조사단이 꾸려져서,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있을 동안에 마르코스와 그의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측근들이 얼마나 뇌물을 받고 횡령했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규모가 수십 억 달러에 달한다는 증거와 진술들이 쏟아졌다고 한다. 워낙 마르코스 일가의 부정부패가 심했던 나머지 마르코스 일가의 부정부패는 기네스북에 '정부의 가장 큰 절도'로 등재되었을 정도였으나, 2022년 필리핀 대선을 앞두고 이 기록은 삭제되었다.실제로 마르코스가 빼돌린 돈만 해도 1987년 기준으로 50억~130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라고 하는데, 2022년을 기준으로 인플레이션 비율을 계산한 바에 따르면 이 돈은 약 130억~340억 달러로 추정되는데, 이는 대략적으로 약 16조~41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심지어 1987년 기준으로 필리핀의 GDP는 겨우(?) 377.9억 달러로 추계되었다. 심지어 이 금액도 일부라는 주장이 있는데, 마르코스 시대의 저명한 경제학자 지저스 에스타니슬라오(Jesus Estanislao)는 마르코스가 집권할 동안 300억 달러를 횡령했다고 보고 있으며, 심지어 1995년 10월 31일자 연합뉴스 기사에 의하면 마르코스가 빼돌린 돈이 500억 달러라는 주장도 있다.[25] 참고로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서 받은 연봉은 13,500달러였는데, 이것도 마르코스가 퇴진한 1986년 기준 필리핀의 1인당 GDP(605.7달러)의 약 22.3배에 달하고 프랑스의 1인당 GDP(13,567달러)와 이렇다할 차이가 없는 거액이었다.
마르코스는 필리핀 재무부, 해외 원조, 미국 정부의 군사 원조[26]에서 막대한 금액을 횡령해 스위스, 미국 등의 해외 은행에 비자금을 조성하고 필리핀과 유럽, 미국, 이스라엘 내의 부동산을 자신의 측근들의 이름으로 사들였다. 실제로 1980년대 초에 마르코스 일가는 맨해튼에 있는 건물 4채를 사들였다.
덤으로 마르코스는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와 함께 세계구급 사치로도 악명이 높았는데, 대표적으로 이멜다의 '구두 콜렉션'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멜다는 마르코스의 재임 당시 수천컬레의 고급 구두를 수집했으며, 마르코스가 추방된 이후 대통령 궁에 남아 있던 구두만 최소 1,220켤레라고 한다. 실제로 떠도는 이야기 중에서, 이멜다가 덥다고 바기오에 피서를 가 있을 때, 파티를 할 곳이 없다고 "파티장을 지어 달라"고 생떼를 부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곳이 현재까지 바기오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국제 회의장인 '컨벤션 센터'라고 한다. 그리고 그게 다 지어지자 파티를 하는데, 설탕이 모자라자 군용 헬기로 설탕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덤으로 마르코스 일가가 소유한 별장만 필리핀 내에만 최소 50채에 달했고[27], 이 별장 관리에 든 비용만 1985년 한 해에만 당시 가치로 1,050만 달러[28]가 들었다고 한다.
물론 사실 여부까지는 확실친 않으나, '군용 헬기로 설탕을 날랐다'는 소문까지 전해졌다는 것은 엄청난 사치를 했단 뜻. 이 양반이 얼마나 해 쳐먹었으면, "필리핀을 광산업으로 부흥시켰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그 광산업은 바로 It's Mine(내 것이야). 그래서 하와이로 쫒겨나고 얼마 뒤에는 미국 정부가 마르코스와 그의 아내 이멜다 마르코스를 밀수 혐의로 기소했는데 감옥에는 안 가고 얼마 안 있어서 풀려났다.
5. 선거 이력
<rowcolor=#f6d251>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9 | 필리핀 하원의원 선거 | 북일로코스 2구 |
|
- (%) | 당선 (1위) | 초선 |
1953 | 필리핀 하원의원 선거 | 재선 | ||||
1957 | 필리핀 하원의원 선거 | 3선[29] | ||||
1959 | 필리핀 상원의원 선거 | 2,661,153 (41.62%) | 초선 | |||
1965 | 필리핀 대통령 선거 | 필리핀 |
[[국민당(필리핀)| 국민당 ]]
|
3,861,324 (51.94%) | ||
1969 | 필리핀 대통령 선거 | 5,017,343 (62.24%) | 재선 | |||
1981 | 필리핀 대통령 선거 |
[[신사회운동당| 신사회운동당 ]]
|
18,309,360 (88.02%) | 3선 | ||
1986 | 필리핀 대통령 선거 | 10,807,197 (53.62%)[30] | 낙선 (2위) |
6. 소속 정당
<rowcolor=#f6d251> 소속 | 기간 | 비고 |
|
1946 - 1965 | |
[[국민당(필리핀)| 국민당 ]]
|
1965 - 1972 | |
[[신사회운동당| 신사회운동당 ]]
|
1978 - 1989 | 창당 |
7. 여담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은 상당히 소박했는데, 악명 높은 사치 행각과 비교하면 거의 금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마르코스는 '간소한 필리핀 음식'을 선호하여 고기는 잘 먹지 않는 대신 생선, 해산물, 야채를 좋아했고, 가장 좋아한 음식은 디넨뎅(Dinendeng)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선 튀김을 곁들인 야채 수프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봉봉' 마르코스의 음식 취향이 아버지와 상당히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마르코스 자신은 평소에 고기를 자주 먹지는 않았지만, 고기를 아예 싫어하는 것은 아니어서 의외로 샐러드 드레싱에 듬뿍 찍은 튀긴 갈비도 별미로써 좋아하긴 했었다고 한다. '봉봉' 마르코스의 선호 음식 목록 이런 면모는 사치는 했으나 생일행사를 제외한 평소의 식사는 검소했던 로버트 무가베[31]와 북한의 김씨 3대의 별장과 비견될 만한 초호화 주택에 살면서도 서민적인 식사를 즐겨 먹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비슷하다. 물론 소탈한 식생활로 식비는 절약했으나 그의 부정부패와 재산 착복은 변치 않았으므로 이런 식습관이 그의 사치에 면죄부가 될 순 없다. 애초의 독재자나 부패한 부유층에게 있어서 절약과 검약은 돈을 쓰지 않는 행위가 아니며, 본인의 기준으로 쓰잘데기 없는 것에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32]
- 필리핀 역사상 두 번째로 이원집정부제를 실시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원래 필리핀은 미국식 대통령제를 실시하여 부통령(Pangalawang Pangulo/Vice President) 및 장관(Kalihim/Secretary)들로 행정부가 운영되었지만, 80년대 마르코스 임기 때는 이원집정부제를 실시하여 수상(Punong Ministro/Prine Minister) 예하의 상(Ministro/Minister)들이 행정부를 운영하였다. 이후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미국식 대통령제로 행정부가 운영되었다.
- 2022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 무렵에 봉봉 마르코스의 지지자들은 일명 '탈라노 골드(Tallano gold)'라며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하기 전에 필리핀 군도는 타게안 탈라노(Tagean Tallano) 일족에 의해 단일 '마하를리카 왕국'으로 다스려졌으며, 페르디나드 마르코스 일가의 막대한 재산은 사실은 마르코스가 탈라노 왕족에게 변호사로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해준 대가로 받은 것이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왕족이 마르코스에게 '단독 소유자' 자격으로 제공해준 금이 19만 2천~40만 톤이라거나[33] 탈라노 왕가의 금이 바티칸에 자금으로 보내졌거나 세계은행을 시작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등의 황당한 주장들을 쏟아냈으며, 심지어 호세 리잘이 사실은 처형에서 살아남았다는 역사왜곡까지도 저질렀다. 결국 이 가짜 뉴스는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필리핀 중앙은행조차 반박 성명을 발표했으며, 전술했듯 워낙 비상식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소리들만 나와서 결국 봉봉 마르코스 본인조차 인터뷰에서 이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
독재자로 욕을 먹고 있지만, 지금도 필리핀에선 마르코스 시대를 살기 좋았다는 식으로 미화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고 한다. 특히 SNS를 통해 그를 접하는 게 대부분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런 경향이 강하다고 하다. 이런 미화와 추억보정이 엮여
그의 아들이 2022년 기어코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경제 말아먹었다는 외부의 평이 있는 것과 별개로 필리핀 내부에선 경제를 살렸다는 식의 정반대 인식도 있는듯하다. 실제 필리핀의 경제가 마르코스 정권 시기에 수치상 높진 않지만 성장하기는 했다.
# 다만 1962년 약 3억 6천만 달러였던
필리핀의 부채가 1986년에는 283억 달러가 되었는데
자료, 이걸 계산하면 국가 부채가 80배 가까이 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실제로 자료를 놓고보면 마르코스가 경제를 살렸다고 보긴 어렵다. 첫 번째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막장 정치가 시작된 1972년의 통계와 1980년에 있던 통계를 비교해보면, 1972년에 비해서 필리핀의 농업 생산이 30%가 감소했으며, 1972년과 1980년 사이에 임금 근로자의 평균 월 소득이 20%가 하락했다. 실업률 또한 급증해서, 통계에서 드러난 결과 1985년 필리핀의 실업률은 27.65 %였는데 1972년 6.30%였던 걸 감안했을 때 거의 4배가 늘었다. 또한 그가 몰락할 당시 필리핀의 상위 10%가 필리핀 하위 60%만큼의 소득을 벌어들일 정도로, 빈부격차가 극해졌다. 구글 검색만 해봐도 필리핀의 1인당 GDP가 그래도 성장한 건 도리어 민주화 이후다.
- 외국에선 일반적으로 마르코스 시기에 경제가 파탄났다고 인식하는 편이다. 이원복 교수도 2006년 저서 <가로세로 세계사> 2권 등지에서 마르코스를 필리핀의 경제를 말아먹은 독재자로 그렸다. 그러나 마르코스가 정권을 잡기 전인 1965년 전까지도 필리핀의 1인당 GDP는 겨우 187달러로 인도네시아, 태국보다는 살짝 높았지만 말레이시아(310달러), 싱가포르(517달러)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국내엔 이 당시 필리핀이 잘 살았다는 식의 루머가 퍼져있기도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즉, 마르코스 때나 이전이나 비슷했단 소리. 마르코스 시기 필리핀 경제는 엄청 높진 않아도 어쨌든 말년 500달러 선으로 성장하긴 했다. 허나 말년인 1983년부터 다시 하락세에 접어들게 되면서 필리핀 경제를 말아먹었다는 인식이 생긴 것.( #1, #2, #3)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한때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충복으로 불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마르코스는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레이건에게 선거자금 7백만 불을, 1982년 중간선거 때 친 마르코스 성향의 의원들에게 1천만 불을, 1984년 미국 대선 때 레이건에게 5천만 불의 선거자금을 각각 제공한 전력이 있기 때문. 또 마르코스는
미국의 벡텔사 중역이던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을 염두에 두고
필리핀 내 건설 및 엔지니어링 공사 대다수를 벡텔에 수주하는 등 레이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34]
그래서 피플파워 혁명이 터지자 레이건은 마지못해 마르코스 대신 코라손 아키노를 택했다는 의견도 있다. 단적인 예로 1986년 2월 27일 백악관 국무회의실 밖에서 기자들이 필리핀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논평을 요구하느라 웅성거릴 때, 레이건은 곁에 있던 국방위원회 위원장 데이비드 패커드에게 기자들을 가리키며 "Sons of BXXches(개X끼들)"라고 욕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 다만 몇 시간 뒤 백악관 대변인 래리 스피크스(1939~2014)는 "레이건이 욕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며, 대신 패커드에게 "It's sunny and you're rich"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자 기자들은 'SOB'라고 씌어진 티셔츠를 입기 시작했는데, 이는 ' 백악관 프레스센터 지하층에서 일하는 사나이'라는 뜻의 'Son of a Basement'의 약자이고, 3월 5일에 기자들과의 정기조찬 회식 석상에서 레이건은 시치미를 뚝 뗀 채 'SOB' 티셔츠를 펴 보였다. 그 뒤에는 'Save Our Budget'이고 쓰여져 있었다고.[35]
한편 레이건은 마르코스를 저버린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레이건독트린을 수정하였다. 1986년 3월 13일 하원에 내보인 정책교서에서 ' 미국 정부는 친소좌익 정권과 반공친미 독재자 모두와 결별할 것'이라는 식의 내용을 내놓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는데, 그 골자는 ' 제3세계 독재자에 대해 너무 일찍 지원을 철회해선 아니 되고 지원을 지속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라는 이도저도 아닌 기회주의적 면모를 보였다는 것.[36]
이후 이 정책은 '저강도 전쟁 전략' 및 '보수대연합 전략'으로 이어졌다는 평도 있다. 김인걸 교수의 1998년 저서 <한국현대사 강의>에 따르면, 이 전략은 한국에서도 1986년 개헌공방과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 긴박하게 추진됐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1990년 3당 합당으로 실현됐다는 평이다.
- 전 외무부장관 이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가 마닐라 방문 기간 중 마르코스를 평가한 적이 있는데, 마르코스의 얼굴이 알차게 생겼다며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가 하면, 마르코스는 후진국 대통령 주제에 거만한 인간이라고 맹비난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는 박정희 필리핀 방문 거절로부터 시작하여 마닐라 정상회담 당시 푸대접에 이르기까지 마르코스가 일련의 외교적 결례로 박정희의 속을 긁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르코스 정권기의 필리핀이 추락하고 결론적으로 필리핀이 후진국이 되면서 정확히 평한 게 됐다.
- 다만 위의 마르코스와 박정희의 갈등과는 별개로 마닐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한국과 필리핀은 1969년 8월에 항공운수 협정, 1969년 11월에 비이민여권의 사증수수료 면제협정, 1970년 8월에 문화 협정, 1970년 9월에 외교관 및 관용사증 면제협정, 1970년 4월에 신무역 협정 등 여러 협정을 체결한 바 있고, 70년대 한국에서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실시할 적 마르코스는 직접 농림부 장차관을 비롯한 많은 필리핀인들을 한국으로 보내 농협제도 및 새마을운동을 시찰시키는 등 외국 국가원수 중 새마을협력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1979년 10.26 사건 때 박정희가 피살당한 뒤 마르코스는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으며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를 조문보내 당시 박근혜 영애를 위로하도록 하기도 했다.
-
한편, 국내에선 문구마다 발언자가 바뀌는 요상한 경향이 있다만 박정희 등이 이 당시 필리핀이 부럽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는 류의
루머가 있는데, 실제로는 그런 말을 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또 이와 비슷한 루머로 당시 서울의
장충체육관을 건설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 대신 필리핀이 지어줬다는 식의 얘기가 국내에 이상하게 많이 퍼져 있으나, 이것 역시 거짓이다.
사실 장충체육관은 필리핀과 아무 연관이 없다. #, #, # 그럼에도 이게 정치 고위층에까지 퍼진 루머라, 2011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 또한 이게 사실인줄 알고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얘기했다가 까이기도 했다. # 잘못된 사실이 추억보정과 미화를 거쳐 사회 각계각층에 뿌리내린 걸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이 외에 미국 대사관, 경제기획원(현 문화관광부) 등의 청사 건설에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다는 설도 있으나 전부 확인되지 않은 추측의 영역이다. 그리고 아주 만약에라도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던 게 사실이라고 한들, 몇몇 기술자가 '참여'한 것과 '지어줬다'는 다르다. 또 돈 주고 고용한 게 '지어줬다'가 될 수는 없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몇몇 사람이 건설에 참여한 걸로 따진다면 밑도 끝도 없다.
확실하게 검증이 되는 '사실'은 당시 필리핀은 기업 단위로 한국에 건물을 지은 적도 없고 지을 수 있는 역량과 기술도 없었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건축물을 지을 때 미국 기업에 의뢰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다.[37] 마르코스가 쫓겨나고 민주화가 이뤄지던 시기의 필리핀과 한국을 보면 그러니 이게 얼마나 황당한 루머인지 알 수 있다. 1987년 한국의 1인당 GDP가 $3,510.99이었을 때, 필리핀은 고작 $579.70이었다. 한국은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 (특히 200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통해 2010년대 1인당 GDP 3만불까지 성장했다.
- 100주년 탄생 우표가 제작됐을 때 필리핀서 찬반여론이 있었다. #
7.1. 마르코스의 거대 흉상
마르코스 집권 당시에 벤퀘트 산간지역에 지어진 콘크리트 흉상. |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마르코스는 필리핀 관광청을 동원해 벤퀘트 주의 산간지역에 3㎢ 넓이의 '마르코스 공원'의 중심으로 삼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본뜬 30m 높이의 콘크리트 흉상을 만들어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려고 했으며, 이 흉상을 만들기 위해 당시까지 그 인근에 살던 이발로이족들은 강제로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이발로이족들은 마르코스가 1986년에 쫓겨나자 이 흉상에 깃든 마르코스의 영혼에 대한 퇴마 의식을 하기 위해 돼지와 물소를 도살하여 얻은 피를 이 흉상에 부었다. 그리고 이 흉상은 마르크스가 사망한 해인 1989년에 좌익 반군의 폭격으로 왼쪽 귀가 손상되었으며, 2002년 12월 29일 새벽에 이 흉상 안에 ' 야마시타 골드'의 일부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보물 사냥꾼들에 의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다.
8. 참고 문헌
- 가로세로 세계사 2권: 동남아시아, 동방의 천년 문명이 열린다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6. p186~188.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3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p136~138.
[1]
필리핀 제17대 대통령
[2]
당시
필리핀인치고는 키가 큰 편에 속한다. 현재 기준으로도 필리핀 남성 평균 키보다 더 크다. 참고로 아내인 이멜다는 키가 172cm로 남편인 페르디난드보다도 크다.
[3]
Mariano Marcos, 1897~1945. 2차 대전 동안 일본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미 육군 소령 로버트 레이펌(
Robert Lapham)이 이끄는 필리핀 게릴라 루손 게릴라 무장군(LGAF)에게
두 팔을 물소에 묶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하는 방법으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4]
Josefa Edralin, 1893~1988. 남편과 달리 아들이 물러난 후에도 2년을 더 살다 죽을 정도로 장수했다.
[5]
이런 좋은 머리 때문인지 마르코스는 실제로 긴 연설을 좋아해서 20~25페이지짜리 연설문을 '기억 속에서' 낭독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6]
다만 마르코스는 필리핀 역사상 가장 높은 변호사 시험 점수를 받은 사람은 아닌데, 실제로는 1954년 변호사 시험에서 평균 96.7%를 기록한 플로렌츠 레갈라도(Florenz Regalado, 1928~2015) 전 대법관이 가장 높은 점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참고로 레갈라도는 구제법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1986년에는 현 필리핀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행정부 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7]
마르코스는 실제로 필리핀 대학 소총 팀의 일원이자 전국 소총 챔피언이었으며, 마르코스의 라이플이 필리핀의 예비 장교 훈련단 무기고의 총기 선반에서 발견되었던 것과 달리 필리핀 대학 소총 팀 리더가 쓰던 라이플은 사라져 있었고(심지어 후자의 총이 바로 범행에 사용된 총이었다.), 결정적으로 모든 피고인 중 이 무기고에 접근할 수 있던 사람이 마르코스밖에 없었다.
[8]
참고로 아버지와 다른 삼촌은 법정 모독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9]
재미있게도 박정희도 1971년 총선과 대선에서 선거를 염두에 두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새마을 운동을 통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작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물론 결과는 좀 달랐는데 마르코스는 초압승을 거두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확인한 반면에, 반면에 박정희는 대선에서 신승과 총선에서의 부진으로 체면을 구겼다는것이다. 다만 둘이 다른 길을 걷데 된것은 마르코스는 세수부족을 무작정 수출에 목을 매서 해결하려했던 반면에, 박정희는 부동산 장사로 충당하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10]
그리고 이 경제위기가 필리핀이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가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필리핀은 왜 유독 뒤쳐졌는지에 원인으로 거론된다.
[11]
Ilagâ, 필리핀 남부에 기반을 둔 기독교 극단주의 성향의 준군사 조직. 1970년대에 모로인에 대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으며, 심지어
식인까지 저지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2]
게다가 이 학살에 가담한 필리핀의 군인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여성에게 남편과의 성관계를 강요하거나 심지어는 모스크 안에서도 여자를 강간하면서 그 광경을 그녀의 가족들로 하여금 강제로 지켜보게 했다.
[13]
Juan Ponce Enrile, 1924~. 법학 교수 출신이었고, 마르코스가 상원의원이었을 시절부터 마르코스의 개인 법률 문제를 전담했으며,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후 1970년부터 1986년까지 필리핀의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으며(사실 1971년 8월 27일부터 1972년 1월 4일까지 상원의원 출마를 위해 잠깐 국방부 장관 자리에서 사임한 적이 있는데, 그 기간 동안 국방부 장관은 마르코스 본인이 직접 역임했다.), 마르코스의 계엄령 준비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마르코스의 퇴임 후에도 엔릴레는 한동안 국방부 장관을 계속 역임하다가 마르코스의 후임인
코라손 아키노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선동한 것이 발각되어 1986년 11월 23일에 국방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엔릴레는 처벌은 커녕 활발한 정치 활동을 이어나가 1987~1992/1995~2001/2004~2016년까지 3번이나 상원의원을 역임했으며, 1992~1995년에는 하원의원을 역임했고, 심지어 2008년부터 2013년까지는 상원의장도 역임했다. 2016년에 상원의원 임기가 끝난 후 비교적 조용히 살다가
2022년 6월 30일에 마르코스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무려 98세라는 어마어마한 고령으로 대통령 법률 고문으로 정치에 복귀하며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사임시킬 정도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2024년 2월 14일 100세 생일을 넘겼다. 너무 장수한 나머지 필리핀의 풍자가들과 네티즌들은 그의 장수를 밈 소재로 만들 정도. 예를 들어 '엔릴레는 선사 시대와 성서적 사건을 목격했다' 등.
필리핀의 엔릴레 밈 모음집
[14]
참고로 엔릴레는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24주기이던
2007년 8월 21일에 아키노 암살 혐의로 투옥된 군인 14명에 대한 사면을 검토해야 한다는 말을 남긴 바가 있으며, 심지어
2018년 9월 23일에는 마르코스 치하의 민간인 학살을 전면 부인하며 '
베니그노 아키노 주니어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
[15]
원 출처:
뉴스위크 1986년 2월 24일자 p16~19. <Reagan's Double Take>.
[16]
다만 페르디난드는 자신을 위한 사치품들은 밥먹듯이 사고 그 돈들은 꼬박꼬박 지불한 것과 달리 어머니의 병원비는
단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결국 마르코스 어머니의 병원비는 코라손 아키노 행정부가 대신 지출하게 되었다.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1988년 5월 4일에 어머니가 고국에서 사망하자 마르코스는 장례식에 참석을 하지 못한 대신 흰 백합을 조화로 보내기는 했다.
[17]
탱크과 열추적 미사일 등을 동원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18]
필리핀에서는 민간인 사망자들도 이런 식으로 방부처리한 뒤 조문객들에게 공개하는 게 일반적이다.
[19]
Dovie Beams, 1932~2017. 참고로 그녀가 필리핀에 온 이유는 마르코스가 의뢰하고 자금을 지원하여 제작된 마르코스의 거짓된 항일투사 경력을 찬양하는 영화인 마하를리카(Maharlika)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20]
참고로 마하를리카는 필리핀
루손에 있는 고대
타갈로그 사회의 봉건 전사 계급을 의미하는 말인데, 마르코스는 필리핀의 민족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고속도로, 방송국, 대통령궁의 리셉션 구역에 '마하를리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21]
이 스캔들 때문에 영화 '마하를리카'는 마르코스 집권기에 상영이 금지되었고, 1987년에야 겨우 개봉했으나, 평론가들에게는 완성도가 떨어진다며 'D급 영화'라는 혹평을 받았다.
[22]
참고로 이버지가 축출될 시점에 아이미 미르코스의 나이가 31세였다.
[23]
심지어 1999년에는 자신의 아버지의 독재로 인한 피해자들에게 '그들은 사과를 원하지 않고 돈을 원한다. 내 가족이 잘못한 경우에만 사과하겠다.'라는 막말을 남기기도 했다.
[24]
그러나 국가에 끼친 해악은 3위인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가 더 큰데 이쪽은 아예 도둑정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버릴 정도로 부정부패를 했다.
[25]
물론 이는 당시 필리핀의 GDP를 감안하면 가능성이 전혀 없다.
[26]
그 중 일부는 필리핀 군대를 베트남에 파견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마르코스가 처분할 수 있는 막대한 재량 자금이었다고 한다.
[27]
참고로
김정일이 가진 별장이 최소 33채에 달했다.
[28]
필리핀 기록 관리 및 기록 보관소의 책임자였던 리카르도 마나팟(Ricardo Manapat, 1953~2008)의 말에 따르면 1,050만 달러는 '48,000명의 작은 마을'을 1년 동안 먹일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29]
1959.12.30. 상원의원 선거에서 출마를 위해 사직
[30]
에드사 혁명으로 부정 선거 다시 투표 결과로 47.50%를 득표율이고, 6,787,556표를 얻어서 낙선하였다.
[31]
로버트 무가베 항목을 참고해 보면 알겠지만, 그는 생일 때는 자신의 나이의 맞춘 90kg대 케이크 세트를 주문하고 으리으리한 생일파티로 돈을 뿌린 데 반해 실생활에서의 일반적 식사는 매 끼를 간소하고 적게 섭취하였고 운동을 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했다.
[32]
이와 비슷하게 마르코스는 거뜬히 능가하는 돈을 횡령한
수하르토도 호화로운 식사를 좋아하기는 커녕 오히려
컵라면을 즐겨먹었을 정도로 식생활이 소박했던 사람이었다. 다만 수하르토는 애초에 본인은 사치를 즐겼다는 어떠한 주장도 없다는 것은 감안해야 하는데, 실제로 수하르토가 퇴임 후에 거주했던 집도 마르코스의 별장과는 정반대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위 유지 수준만 충족시킬 정도로 소박했다.
[33]
참고로 2022년 기준으로 금을 채굴하기 시작한 이래 채굴된 금의 총량이 20만 1,300톤 정도다.
[34]
출처: <Nation> 1986년 4월 5일자. 'Minority Report' p478.
[35]
출처: <타임> 1986년 3월 17일자
'Son of a ...(휴 시디 글.)'
중앙일보의 동년 3월 8일자 기사
[36]
출처: <한미 갈등의 해부> - 문창극 저. 나남. 1994. p84.
[37]
Nation, 1986.4.5 'Minority Report' p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