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20:43:25

에밀리오 아기날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768 0%, #284687 20%, #284687 80%, #003768); color: #f6d251;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필리핀 제1공화국|
제1공화국
]]
[[필리핀 자치령|
자치령
]]
[[필리핀 제2공화국|
제2공화국
]]
[[필리핀 자치령|
자치령
]]
<rowcolor=#f6d251>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에밀리오 아기날도 마누엘 케손 호세 라우렐 세르히오 오스메냐
[[필리핀 제3공화국|
제3공화국
]]
<rowcolor=#f6d251>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마누엘 로하스 엘피디오 키리노 라몬 막사이사이 카를로스 가르시아
[[필리핀 제3공화국|
제3공화국
]]
[[필리핀 제4공화국|
제4공화국
]]
[[필리핀|
제5공화국
]]
<rowcolor=#f6d251>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코라손 아키노 피델 라모스
[[필리핀|
제5공화국
]]
<rowcolor=#f6d251>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조지프 에스트라다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로드리고 두테르테
<rowcolor=#f6d251> 제17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

<colbgcolor=#233f89><colcolor=#f6d251>
필리핀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이 파미
Emilio Aguinaldo y Famy
KGCR[1]
파일:아기날도 컬러.jpg
출생 1869년 3월 22일
필리핀 도독령 카윗
(現 필리핀 카비테주 카비테엘비에호)
사망 1964년 2월 6일 (향년 94세)
필리핀 케손시티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899년 1월 23일 1901년 3월 23일
학력 산토 토마스 대학교
산후안 대학교
직업 정치인, 독립운동가
가족 배우자:힐라리아 아기날도(1896~1921)[2]
마리아 아곤칠로(1930~1963)
슬하 2남 3녀
신체 163cm
종교 기독교 ( 로마 가톨릭)
파일:President_Emilio_Aguinal_Official_Portrait_at_Malacañang_Palace.jp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3. 평가4. 참고자료

[clearfix]

1. 개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

2. 생애

당시 필리핀 독립운동가 대부분처럼 아기날도도 메스티소 출신이며, 무장독립 단체인 카티푸난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지도자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주도권 경쟁을 벌였고, 후기에는 보니파시오가 밀려나 아기날도가 정권을 잡게 된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자, 리베라 총독의 공세에 밀려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던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를 몰아내고 필리핀 제1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침공 때문에 제1공화국이 패망하자 아기날도는 미군에게 잡혔다 풀려난 뒤 은거했다.

이후 필리핀 자치령이 수립되자 대선에 출마했지만 마누엘 케손에게 낙선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에 협력한 혐의로 전후 잠시 징역을 살았다. 그래도 전후에 복권되어서 필리핀 민주주의에 대한 자문역을 맡았다가 1964년에 사망했다.

3. 평가

필리핀의 독립을 이끈 국부로서 국민 영웅으로 추대되어 왔으나, 2010년대에 들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안토니오 루나(Antonio Luna) 장군 둘을 처형한 것과 일본 제국의 필리핀 점령기 동안 일본 제국과 협력한 것에 관해 부정적인 평가도 증가했다.[3]

최근에는 아기날도가 아닌 보니파시오를 초대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을 정도.

4. 참고자료



[1] 필리핀 내에서 수여하는 기사작위이며,이름은 리잘의 작위이다. 대표적인 수여자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니노이 아키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코라손 아키노, 피델 라모스 등이 있다. [2]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3] 기존에 평가가 좋았던 것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 시절 일본과의 관계 개선 차원에서 띄워진 측면도 있다. 오노다 히로오가 극악무도한 전쟁범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특변사면된 후 일본으로 송환되어 천수를 누린 것 또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