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22:08:55

새뮤얼 케니언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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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1960년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1963년 12월 5일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1967년 6월 23일 육영수 영부인 대한민국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 12월 7일 홍기 영부인 대한민국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이순자 영부인 대한민국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손명순 영부인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이희호 영부인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권양숙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김윤옥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문재인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김정숙 영부인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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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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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빌헬미네 뤼브케 영부인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 2월 1일 2월 7일 이스마일 나시루딘 국왕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7일 틍쿠 인탄 자하라 왕비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시리낏 끼띠야콘 왕비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5일 장제스 총통 중화민국
1968년 5월 10일 5월 18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반티에우 총통 남베트남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티마이아인 제1부인 남베트남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하마니 디오리 대통령 니제르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아이샤 디오리 영부인 니제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 엘살바도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영부인 엘살바도르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가봉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조세핀 봉고 영부인 가봉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 세네갈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영부인 세네갈
1980년 5월 11일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 5월 14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1981년 6월 25일 수하르토 대통령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5일 시티 하티나 영부인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9일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1년 6월 29일 틍쿠 아프잔 왕비 말레이시아
1981년 7월 6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필리핀
1981년 7월 6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필리핀
1981년 10월 13일 로드리고 카라소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1년 10월 13일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영부인 코스타리카
1982년 5월 10일 사무엘 도 대통령 라이베리아
1982년 6월 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자이르
1982년 6월 7일 보비 라다와 영부인 자이르
1982년 8월 25일 압두 디우프 대통령 세네갈
1982년 12월 21일 케난 에브렌 대통령 터키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대통령 수단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영부인 수단
1983년 9월 10일 후세인 1세 국왕 요르단
1983년 9월 10일 누르 왕비 요르단
1984년 4월 9일 하사날 볼키아 국왕 브루나이
1984년 4월 21일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 카타르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감비아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치렐 자와라 영부인 감비아
1985년 5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 파키스탄
1985년 5월 20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6년 9월 4일 4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영국
1986년 9월 4일 4월 16일 보두앵 국왕 벨기에
1987년 4월 7일 아메드 압달라 대통령 코모로
1988년 11월 3일 이스칸다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8년 11월 3일 자나리아 왕비 말레이시아
1989년 11월 3일 11월 20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서독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프랑스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다니엘 미테랑 영부인 프랑스
1990년 6월 21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대통령 파라과이
1990년 11월 5일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 헝가리
1991년 9월 13일 아즐란 샤 국왕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13일 투안쿠 바이눈 왕비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25일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멕시코
1992년 8월 13일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과테말라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피델 라모스 대통령 필리핀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영부인 필리핀
1994년 11월 7일 11월 21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대통령 칠레
1994년 12월 5일 12월 9일 레흐 바웬사 대통령 폴란드
1995년 2월 7일 2월 16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1995년 2월 21일 3월 6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독일
1995년 3월 28일 4월 3일 젤류 미테프 젤레프 대통령 불가리아
1995년 6월 26일 7월 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 9월 26일 9월 29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아르헨티나
1996년 7월 23일 9월 4일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과테말라
1996년 7월 23일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브라질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스페인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왕비 스페인
1996년 11월 26일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국왕 말레이시아
1996년 12월 10일 12월 15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우크라이나
2000년 2월 22일 3월 3일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 이탈리아
2000년 2월 22일 3월 6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
2006년 3월 12일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 알제리
2007년 3월 26일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2007년 3월 28일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국왕 카타르
2009년 5월 1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카자흐스탄
2009년 11월 12일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페루
2012년 5월 30일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 스웨덴
2012년 11월 21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2018년 10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2019년 하랄 5세 국왕 노르웨이
2021년 6월 14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 오스트리아
2021년 6월 16일 펠리페 6세 국왕 스페인
2021년 6월 16일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비 스페인
2021년 8월 25일 이반 두케 대통령 콜롬비아
2021년 9월 21일 보루트 파호르 대통령 슬로베니아
2023년 7월 13일 안제이 두다 대통령 폴란드
2023년 11월 21일 찰스 3세 국왕 영국 }}}}}}}}}

새뮤얼 캐니언 도
Samuel Kanyon Doe
파일:Samuel_Kanyon_Doe_-_Liberian.jpg
출생 1951년 5월 6일
라이베리아 그랜드게데
사망 1990년 9월 9일 (향년 39세)
라이베리아 몬로비아
역임 1980년 4월 12일 ~ 1990년 9월 9일
국적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 라이베리아
사인 총살형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라이베리아의 21대 대통령으로 1980년 4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전임 대통령 윌리엄 톨버트 사형시키고 라이베리아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에 올랐던 인물이자[1] 독재자.

수많은 라이베리아인이 살해되고 난민으로 전락한 라이베리아 내전의 원인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동시에 역사상 가장 잔인한 최후를 맞은 독재자 중 하나로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윌리엄 톨버트와 갈등이 많았던 그는 쿠데타[2][3]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격해서 대통령인 톨버트와 그의 지지자 26명을 처형하고, 뒤이어 10일 뒤인 1980년 4월 22일에는 이미 처형당한 전임 대통령 윌리엄 톨버트의 형이자 상원의장인 '프랭크 톨버트(Frank E. Tolbert)', 하원의장 '리차드 아브롬 헨리즈(Richard Abrom Henries)', 외무부 장관 '찰스 세실 데니스(Charles Cecil Dennis)' 등 톨버트 행정부 각료 13명을 공개적으로 사형시켰다.[4] 이와 함께 새뮤얼 도는 '민족구제위원회(People's Redemption Council)'라는 군부 통치기구를 세우고 헌법을 정지시켰으며,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딱 5년 간만 군사 통치를 한 뒤 1985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기로 발표하면서 라이베리아의 지도자로 올랐다.[5] 그 후 친미 반공 정책을 펴면서 미국의 지지를 얻으면서 원조를 받아냈고 이를 바탕으로 어찌저찌 나라를 이끌고 갔으나, 정작 새뮤얼 도의 라이베리아 국내 권력 기반은 취약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4년간 총 7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며, 그는 이 시도들을 모두 진압하기는 했으나 갈수록 의심이 많아지면서 억압 통치를 펼쳤으며 이에 동반하여 국내 경제 역시 악화되면서 민심을 잃어갔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민심을 잃은 계기가 바로 1985년 10월 15일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였는데, 새뮤얼 도 본인이 약속했던 선거였으나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던 그는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하지만 부정선거를 행했음에도 50.9%라는 겨우 과반을 넘는 득표를 해서, 가까스로 대통령직에 당선됐다. 부정선거를 통해서 어떻게든 권력 유지에는 성공했으나 새뮤얼 도의 권력 기반은 여전히 불안했는데, 1985년 11월 12일에는 기오(Gio)족 출신으로 1980년 도의 쿠데타에 가담했던 '토머스 키옹파(Thomas Quiwonkpa)' 장군이 이끄는 기오족과 마노(Mano)족의 병사들이 도 정권에 반발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하여 키옹파 및 사무엘 도 정권에 반기를 든 기오족과 마노족의 일원들은 11월 15일 처형되었다.[6] 이제 믿을 사람이 없어진 새뮤얼 도는 1986년 1월 6일 대통령직에 취임한 이후 더더욱 강경한 강압 정책을 폈는데, 자신을 지지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부족들을 잔인하게 공격하고 탄압함과 함께 본인 부족 출신 사람들만 요직에 앉히면서 대내적으로는 전반적인 민심을 잃었다. 이를테면 도는 대통령직에 취임한 직후, 자신의 출신부족인 크란(Krahn)족만으로 구성된 라이베리아군(AFL, Armed Forces of Liberia)을 기오족과 마노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파병하여 쿠데타에 대한 보복으로 기오족과 마노족을 학살했는데 그 희생자만 약 3,000명 가량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탈냉전의 기조가 확대되면서 미국은 친미 반공을 내세우면서 막장 독재 정치를 펴는 새뮤얼 도에게 굳이 지지를 보낼 필요가 없어지게 됐기에 지지를 철회하고 라이베리아로의 원조를 줄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대외적인 새뮤얼 도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1989년 12월 24일 찰스 테일러를 중심으로 규합한 반군 세력에 의해 내전이 발발하자 이미 민심을 잃은 상태였던 새뮤얼 도의 정권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이에 정부군은 1990년 7월 29일에 발생한 '몬로비아 교회 학살 사건(Monrovia Church massacre)' 등을 일으키면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이후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이 사실상 새뮤얼 도를 포기해버렸고, 새뮤얼 도는 수도인 몬로비아를 포위한 반군에 맞서 대통령 관저에서 농성했지만 답이 없었다. 절망한 그는 주라이베리아 미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한다. 1990년 8월 5일부터 미해병대에 의해 '샤프 엣지 작전'이 실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미 라이베리아에 와 있던 상황이었는데,[7] 새뮤얼 도는 미군이 자신의 안전보장만 해주면 곧바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미대사관에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미 새뮤얼 도와 그의 정권을 버렸기에 그의 안전보장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부담을 떠안을 의사는 더욱 없었기에 그의 요청은 거절당한다.

한편 갈수록 상황이 막장으로 치닫자, 이에 1990년 8월, ECOWAS[8]는 라이베리아에 국제합동군인 ECOMOG[9]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10] 내전으로 인해 무너진 라이베리아 국내 질서를 회복시키고, 반군과 정부군 간의 휴전을 중재하며, 새뮤얼 도의 사임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운명의 1990년 9월 9일, 수도 몬로비아에 ECOMOG가 세운 기지에 새뮤얼 도가 방문했다.[11] ECOMOG는 일종의 국제평화유지군인지라 수개 국가의 군대가 모였고, 군사 업무도 각국 군대가 교대로 행했는데 경비가 교대하는 동안의 혼잡한 틈을 타 자신의 부하였던 프린스 존슨이 설립한 INPEL[12]이 난입하여 새뮤얼 도의 경호병력과 ECOMOG를 제압하고 새뮤얼 도를 체포하여 INPEL의 진지로 압송했다.[13] 프린스 존슨이 기다리던 INPEL의 진지로 연행된 새뮤얼 도는 심각한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도는 존슨에게 필사적으로 대화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존슨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부하에게 명령하여 12시간 동안 그의 귀와 발가락, 손가락을 잘라내는 가혹한 고문을 가했으며 그 후에 총살형에 처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조리 녹화해 전세계에 공개하였다. 영상(성인인증 필요) 남은 시체는 머리가 삭발되고 담뱃불로 화상을 입은 채로 먼로비아 거리에 나체로 전시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라이베리아 문서 참고.

3. 기타

파일:새뮤얼 케니언 도의 방한 당시 우표.jpg
그가 방문했을 당시 발행된 우표
1982년 5월 9일부터 13일까지 5일간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했다. 이때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를 수여하기도 했는데, 도는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고 하며[14] 이 이후 스스로를 '도 박사(Dr. Doe)'로 자칭했다고 한다. 당시 방한했을 때 유창순 국무총리와 만난 자리는 여기를 참고하고, 내한 및 국립묘지 참배는 여기를 참고하길 바란다.

라이베리아 50달러 지폐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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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뮤얼 도 이전까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모두 미국계 라이베리아인이었다. [2] 쿠데타 당시 계급은 육군 상사였으며, 그의 나이는 고작 만 28세였다. [3] 도보다 더 젊은 나이에 권력을 잡은 비군주 지도자는 북한 김정은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각각 만 27세), 아이티 장클로드 뒤발리에(만 19세)도 있지만, 이들은 카다피를 제외하면 아버지( 김정일/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권력을 세습받은 거라 자력으로 집권한 비군주 지도자 중에서는 카다피를 제외하면 최연소 국가원수인 셈이다. 게다가 카다피는 무려 42년 동안 초장기 집권했기에 어린 나이에 집권했다는 이미지가 옅어졌다. [4] 처형된 톨버트 행정부 각료들은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발가벗은 채 모욕당하며 수도 몬로비아를 행진해야 했으며, 행진이 끝난 후 해변에서 공개 총살됐다고 한다. [5] 라이베리아의 헌법이 정지된 상태이기에, 대통령직으로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민족구제위원회 의장(Chairman of the People's Redemption Council)' 자격으로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이다. [6] 토머스 키옹파 장군은 처형 당시 고작 만 30살이었다. [7] '샤프 엣지 작전(Operation Sharp Edge)'은 라이베리아 내전에 휘말린 미국 시민을 보호하고 대피시키기 위해 행해진 작전이었다. [8]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9]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모니터링 그룹,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10] 이 파병 결정에는 몬로비아 교회 학살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11] 새뮤얼 도가 어째서 이날 ECOMOG의 기지를 방문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2] 라이베리아 독립 애국 전선, Independent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13] 이 제압 과정에서 새뮤얼 도의 경호병력 약 80명이 살해됐으나, ECOMOG의 인원은 INPEL의 지시에 잘 따랐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고 전한다. [14] 새뮤얼 도는 정규교육을 고등학교까지만 받았다. 다만 1984년 기준 라이베리아의 문맹률이 거의 66%에 이르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외로 상당한 엘리트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