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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백범일지 | |||
기타 | 피 묻은 적삼 · 경교장 · 묘소/기념관 · 대장 김창수 · 드라마 김구 |
1. 개요
1933년 8월 1일 중화민국 상해특별시 프랑스 조계 영길리에서 김구, 안공근, 정화암 등의 지시를 받은 청년 몇 명이 안창호 계열인 옥관빈(玉觀彬, 1890. 1. 18 ~ 1933. 8. 1)을 ' 일제의 밀정'이라는 명목으로 암살한 사건.김립 피살 사건과 함께 김구가 조상이 화교인 한국계 중국인을 대상으로 벌인 암살 사건이다.
2. 상세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실업가
옥관빈에 대한 중국의 평가[1]
도산
안창호는 독립전쟁을 위해 매우 필요한 활동으로 재정 마련을 들었다.
독립운동은 참가자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재정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다. 도산은 그걸 잘 알았고 자금운동과 재정 마련을 매우 중요시했다.[2][3]옥관빈에 대한 중국의 평가[1]
미주동포들에게는 "직접 독립운동하는 게 아니라도 재정을 감당하는 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했으며 "수입의 20분의 1을 독립군에게 보내서 지원해 달라"고 호소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내가 며칠 후에는 피 흘리는 이에게 절하겠소만은, 오늘은 돈 바치는 이에게 절하겠소”[4]
도산은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재정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고 했는데 그 원인을 유교라고 주장했다. 유교의 원인으로 재를 천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치열하게 하는데 자금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며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자를 낮추어 보는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상 돈이 안 나오는 이유는 우리 국민은 돈이 없어도 일이 되는 줄 아는 까닭… 그래서 독립도 글자나 말만으로 되는 줄로 아는 까닭”
그리고 모든 조직적 활동은 재정 지원에 따른 뒷받침이 중요하다고 수없이 강조하고 다녔다.[5]
도산은 독립전쟁과 재정 문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다녔다.
"전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이요? 곧 무기와 전술이요. 또한 무기와 전술보다도 일층 필요한 것은 무기를 사용할 군자금이외다. 군비가 있고 군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작전계획이 있나니, 군인 없는 무기를 누가 사용하며, 군자 없는 전술을 무엇으로 활용하리오."
“여러분, 독립전쟁을 하자 하자 하지만 말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금전을 준비하시오.”
“대한의 독립군은 먼저 돈을 많이 모으는 사업에 힘을 써야 하오"[6]
“여러분, 독립전쟁을 하자 하자 하지만 말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금전을 준비하시오.”
“대한의 독립군은 먼저 돈을 많이 모으는 사업에 힘을 써야 하오"[6]
그리고 독립운동가 중에서 재정 마련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비판했다.
“나는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소비자뿐이고 생산자가 일인도 없음을 볼 때 나의 가슴이 답답합니다."[7]
도산은 "무슨 일이든지 하고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돈을 바치는 일이 곧 독립운동"이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다 일하시오. 여기서 할 일이 없거든 서북간도에 가서 농업을 하시오. 독립운동하노라 하면서 노는 자는 독립의 적이오."[8]
따로 일해야 돈을 벌 수 있고 그렇게 돈을 벌어야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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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관빈의 모습[9] |
이런 활동에 충실한 안창호의 측근 중에는 옥관빈(玉觀彬, 1890~1933)이 있었다. 옥관빈은 1890년 1월 18일 평안도 양덕현 현내방(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옥윤(玉潤, ? ~ 190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평안남도 평양부 율리면 상사리 성원시장[10], 중화군 동두면 하산리[11] 무진시장(현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으로 이주했다.
옥관빈은 도산 안창호가 교장으로 활동한 대성학교에 다닐 때부터 도산을 열렬히 숭배하면서 추종자가 되었다. 졸업 후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신민회에 가입해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12] 1911년 105인 사건 당시 도산의 최측근 차이석(車利錫)과 함께 일본 제국 경찰에게 잔인한 고문과 끔찍한 폭행을 당했다. 차이석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을 포함해 옥관빈, 곽림대(郭林大) 같은 여러 사람들이 "고문을 받아 거의 병신이 되었다"고 할 만큼 잔인한 고문이었다.[13] 그는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검사 측의 공소로 2심이 개정되어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모살미수 혐의로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고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5월 24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었다. 이후 원심 판결 중 유죄가 선고된 부분이 파기되어 대구복심법원에 이송되었다가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원심 판결인 징역 5년이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 후에는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중국에 귀화해 중국인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또한 평소 장제스를 추종[14]해 일찍이 중국국민당에 입당해 중요 당직을 맡아서 활동하는 한편 삼덕양행(三德洋行)을 설립하는 등 자본주의 활동에도 충실하며 줄곧 풍족한 생활을 영위했다.[15] 그리고 고려 관련 불교 문화재인 항주 고려사(杭州 高麗寺) 복원운동을 주도하면서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16]
그런데 이런 모습을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좋지 않게 보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만 해도 돈이 부족해서 허덕이고 있었는데 옥관빈은 부자로 생활하면서 불교 문화재 복원에 큰 돈을 쏟아부으면서 사교계에 두각을 나타냈던 게 고깝게 보였다.[17]
그러나 옥관빈은 당시에도 안창호 측과 가깝게 지냈다. 예로 안창호의 측근이자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측으로 같이 참여했던 송병조와도 지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송병조와 같이 있다가 일본 제국 경찰이 습격해오자 송병조는 빠져나가고 자기 혼자 남아서 일본제국 경찰의 협조 요구를 거부한 적도 있다.[18]
그리고 당시에도 옥관빈은 도산 측에게 재정 지원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옥관빈은 아무에게나 돈을 지원해 주지는 않았다. 예로 아나키스트들은 믿지 못해서 아나키스트들이 지원을 요구하면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만은 의심없이 믿은 걸 물론이며 그를 숭배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재정을 지원해 줬다. 옥관빈에게 자금을 받은 도산 안창호는 이 자금을 당연히 독립운동 지원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자금은 이봉창 의거가 일어날 수 있는 재정으로도 쓰였다.[19]
1928년 옥관빈은 안창호를 통해 김두봉 같은 독립운동가가 운영하는 인성학교에 2,000원을 기부해 주었다. 국내의 재외동포위문회가 보내온 자금은 1,000원이었는데 옥관빈이 보낸 자금은 2,000원이었다. 옥관빈의 기부한 액수는 굉장히 높았다. 그런데 이때 김구는 옥관빈을 좋지 않게 봤던 듯하다.[20][21]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후 몸을 피하지 못한 안창호가 일본 제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활동하지 못하자 김구 세력은 안창호 측근 세력이었던 이유필, 송병조 세력들과 대립하였다. 이유필과 송병조 측은 안창호 측근이자 흥사단원이자 국민대표회의에 안창호를 따라 개조파로 참여한 인사들이었다.[22] 이들은 김구 일파가 고의적으로 안창호에게 피신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1월 아나키스트의 대부 중 한 명이었던 이회영이 일제에 의해 체포당한 뒤 순국했다. 김구는 이를 조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회영의 조카이자 이석영의 아들인 이규서와 엄항섭의 처남이자 연미당의 동생인 연충렬이 밀고한 것을 알고 처단했다. 이를 통해 김구는 상해거류민회 회장인 이용로가 일제의 밀정임을 알아차렸다. 이규서는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의 초대 위원이었으며 이용로도 상해 흥사단의 일원이었다.[23] 이로 인해 김구의 흥사단 계에 대한 의심이 극대화된 것으로 추측되며 아나키스트와의 연합전선도 이 과정에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김구와 안창호의 정치적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기존 임시정부 문제로 옹호파, 개조파, 창조파로 갈등과 대립이 있었는데 김구는 이승만 정부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개조파로 활동하며 이동휘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다. 이후 안창호 측과 대립하며 반대 활동을 하였다. 예로 1926년 5월 임시 의정원에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했는데 김구는 안창호 국무령 선임 반대운동을 하였다.[24] 결국 안창호는 임시정부에 도착한 당일 선임 13일 만에 사퇴해야 했다.
이후에도 김구 측은 안창호 측과 지속적으로 갈등, 대립하였다.[25] 1933년 이후 백범 김구는 송병조 측과 "혁명자금" 문제로 대립을 벌였다. 결국 김구 측은 프랑스 조계에서 송병조 측을 습격하는 테러를 벌였다. 이후 옥관빈도 김구 쪽에게 테러 대상이 되었고 결국 살해당했다.[26] 옥관빈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김구에게 협력했던 쪽이 정화암과 아나키스트 세력이었다. 두 세력은 안공근을 통하여 김구와 연결되어 있었다.[27] 이후 옥관빈의 형 옥성빈[28]도 같은 해 12월 암살당했다.
3. 증언의 의문점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옥관빈을 살해한 후 발표한 옥관빈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①국내에서 이미 귀순하여 일제의 밀정으로 상해에 옴, ②무역상을 개설하고 중한 양국 사정을 정탐, ③중국인으로부 터 만여금을 편취, ④신문 및 전단을 활용하여 한국의 혁명자를 이간, ⑤유림대표 김창숙 등 혁명자를 체포케 함, ⑥1932년 제1차 상해사변 때 중국 군정을 정탐하여 일본군에 넘김, ⑦참호용 목재 등을 일본군에 헌납, ⑧폭력단을 조직하여 혁명운동자 암살을 기도, ⑨신변 보호를 위해 일본영사관이 지급한 권총을 과시.
하지만 이 중 대다수가 근거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데다 ⑤의 경우 정작 김창숙은 자신을 밀고한 사람으로 유세백, 박겸을 지목했으므로 사실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1차 상해사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옥관빈의 공장이 파괴되는 등 ⑥과 다소 모순되는 실례가 있어 그 근거가 의심스럽다. [29]
또 총독부 문서 어디에도 옥관빈에 대해 ‘배일선인’·‘불령선인’ 이라는 언급은 있을지언정 그가 총독부의 밀정이라는 증거는 없다.
옥관빈 살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화암의 증언도 이상하다. 정화암의 주장에 따르면 "옥관빈이 흥사단원의 아내와 불륜하고 나오다가 살해를 당했다"고 증언했다가[30] 다른 회고에선 "옥관빈은 굳게 닫힌 뒷문(철문)의 사잇문을 조용히 열면서 밖으로 몸을 내밀었"으며 "옥관빈은 정사에서 느꼈던 쾌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잔인하리만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잇문을 조용히 닫고 발길을 옮겼"다가 가슴에 총탄을 명중당해 살해당했으며 "엄형순은 구둣발로 옥관빈의 몸뚱이를 제치고 절명한 것을 확인한 다음 유유히 걸어나와서 인파 속에 묻혔다"고 증언했다.[31]
그러나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 경무국 정무과에서 조사한 내용은 정화암의 증언과 다르다. 당시 옥관빈은 사촌인 옥성빈을 방문하려고 그 집에 들른 것이었는데 공공조계 경찰면허 11424번을 소지한 운전사 팅킹당이 운전하는 3572번 자가용을 타고서 옥성빈 집에 도착했던 것이었고 옥관빈은 사촌 집을 나와서 차 쪽으로 걸어오다가 등 뒤에서 여러 총탄을 맞았으며 옥관빈은 차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 보도에 쓰러졌다. 옥관빈 바로 근처에 있었던 운전사는 암살자를 보지도 못했다. 암살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옥관빈을 사살하고 사라진 것이다.[32]
4. 원인
원인 중 하나는 위에서 설명했듯 김구와 안창호 계열의 갈등과 대립이었다. 또 다른 원인은 아나키스트들의 원인이었다. 옥관빈은 도산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 줬으나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아니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옥관빈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나 “내가 목숨을 내더라도 이건 너한테 못주겠다”고 강경하게 거부하며 아나키스트들을 야단치고 욕을 하며 내쫒았다.[33]당시 아나키스트들은 허무주의를 띄었다. 정화암은 만주에서 민족해방운동 기지건설을 시도했으나 실패해서 중국 관내로 철수했고 일제가 승승장구하자 희망도 잃었으며 생활난도 심해 괴로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허무주의에 빠져들었고 가진 자를 향해 테러를 하였다. 이것은 가진 자들한테 자산을 빼앗는 건 정당하다는 '약탈론'에 근거한 활동이었다.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가진 자들한테 돈을 빼앗는 행위를 거리낌없이 하였다.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인식에 따르면 이것은 가진 자들에게 강탈당한 것을 되찾는 행위일 뿐이므로 도덕적 결함이 없는 정당한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나키스트들은 "략"이라 칭했다.[34] 그런데 옥관빈은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나키스트들의 요구를 강하게 거부했다. 이것은 아나키스트들이 옥관빈에게 원한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35]
프랑스 문서에 의하면 김구 측 인물들이 송병조 측 인물을 테러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탓에 옥관빈이 중국 국민당 장군에게 테러범 당사자들을 신고하려고 했다. 김구 측 인물들이 그런 이유 때문에 옥관빈을 살해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후 김구와 송병조 측은 화해했는데 내부끼리 유혈 충돌을 그만하자는 것이 이유라고 한다.[36]
개인적으로는 다소 오만했던 성품도 불행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창호는 그를 두고 “才가 德보다 뛰어나다(才勝德)”고 지적했다고 한다.[37]
5. 친일밀정설에 대한 진상규명
옥관빈이 친일 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는데 결론은 증거 없는 무혐의라 결론났다. 친일파가 아니란 악마의 증명은 없지만 혐의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에 의하면 분명 한인애국단의 활동이므로 김구가 모를 수 없다. 2020년 10월 26일 검색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38] 김립 피살 사건이나 치하포 사건과 달리 김구가 완전히 침묵한 사례다. 달리 말하면 옥관빈 친일밀정설은 김구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주장도 아닌 것이다.
-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3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40]
-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41]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하였다.[42]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제외되었다.[43] 친일파란 증거가 없어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44]
- 옥관빈을 친일 밀정이라고 주장한 정화암의 증언도 검토되었다. 친일인명사전 "주요전거" 중 정화암의 증언이 포함되었다.[45] 증거가 아니라 전거로 검토되었다. 150여명의 학자들이 편찬위원을 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측은 2001년 7월 20일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 동안 회의하였다. [46] 옥관빈은 무혐의였고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 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 조선족과 정체성이 다름)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47] 중국에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48] 한국에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를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6. 여담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옥관빈을 독립운동 관련 인물로만 소개하고 옥관빈 피살에 대해선 침묵했다.[49]김구의 아들인 김신의 회고록인 조국의 하늘을 날다에선 옥관빈을 친일 부역자로 서술하였는데, 백색테러 등의 해방 후 김구의 행적 및 치하포 사건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사자명예훼손 등의 명목으로 여러 번 고소했었던 전적을 보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옥관빈이 친일파라는 글이 보이는데 출처를 추적해 보니 그런 사이트 중 일부가 루리웹으로 추정된다.
위키백과에서도 옥관빈이 친일파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설명하고 있다. # 그런데 105인 사건을 함께 겪었던 윤치호가 그를 일본의 밀정으로 지목했다는 서술는 사실과 다르다. 되려 윤치호는 그가 밀정이라는 소문에 대해
(1921년 4월 15일 요일)
양주삼 씨 말로는, 옥관빈이 일본인들의 밀정으로 변신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 옥씨는 내가 본 조선인 청년들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 중의 하나다. 그는 1911년부터 1915년 까지 음모사건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비범하게 잘 견뎌냈다. 이런 유형의 인물이 반역자가 되었다는 걸, 난 도히 믿을 수가 없다.[52]
라고 일기에 적었다.
옥관빈이 피살된 이후 여운형에게 그 소식을 듣고
(1933년 8월 21일 월요일) 여운형 군이 강산 외금강에 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 그는 옥관빈 씨가 1주일쯤 전에 상해에서 암살되었다고 말했다. 옥씨는 약을 특허 내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 돈을 번 후, 다년간 원한을 품은 이들의 표적이 되어왔다고 한다. 그는 공적인 대의명분을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도와줄 법한 학생조차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잘 보여 자기의 신변을 보호해왔다고 한다.[53]
라고 들은 바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을 과대해석한 듯하다.
옥관빈의 7촌 재종질(再從姪) 옥인찬은 부친 옥성빈과 7촌 재종숙 옥관빈의 암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설이 있음에도 광복군에 복무하였고 8.15 광복 후 귀국해 성악가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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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
[2]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2
[3]
실제로 이러한 면모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평안도를 기반으로 둔 신흥지주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평안도 자체가
안창호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평안도 지주들은 안창호가 주장한 것처럼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돈을 버는 ‘신흥 지주’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4]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0~261
[5]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1
[6]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 2, 1993, 261
[7]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2
[8]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2
[9]
193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
[10]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당시 옥관빈의 주소지가 '평안남도 평양군 율리면 상사리 성원시장'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1911년 당시 평양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평양군이 아닌 평양부였으며 '상사리'라는 지명도 율리면에는 없었고 평양 부근
증산군 반석면에 있었다. 증산군 반석면 상사리는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사천리다.
[11]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는 당시 옥관빈의 주소지가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하산리 무진시장'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중화군 동두면에는 '하산리'라는 지명이 없었고 오히려 관내에 무진시장이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무진장리'가 있었다.
[12]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 64
[13]
차이석, 안창호 선생 피포 정형 및 그 약력, 장석흥, 2005, 237
[14]
상해 옥관빈, 버드나무 그늘(8월의 수필), 異域의 孤影, 동광 제24호, 1931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6&itemId=ma&synonym=off&chinessChar=on&position=0&levelId=ma_014_0230_0330)
[15]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 58~59쪽
[16]
조영록,
일제강점기 杭州 高麗寺의 재발견과 重建籌備會, 한국 근현대사 연구 53, 2010, 54~58쪽
[17]
조영록, 일제 강점기 杭州 高麗寺의 재발견과 重建籌備會, 한국 근현대사 연구 53, 2010, 67~68
[18]
국가보훈처,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한국독립운동 사료 3, 2016, 해제 11, 23~24
[19]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 63~64
[20]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64
[21]
당시 화폐 가치를 환산하면 2,000원은 1,800만원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22]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50~51
[23]
1931년 12월 원동임시위원부 회의록에도 이름이 남아 있다. 동명이인일 수 있으나 1926년 흥사단 뉴욕지방대회 회의록에도 이름이 올라온 것으로 보아 미국에서 상해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이용로는 1935년에
엄순봉,
이규창,
백정기,
정화암 등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24]
오영섭, 안공근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숭실사학회 35, 2015, 244쪽
[25]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백범 검구, 도산사상연구 8, 2002, 184~188
[26]
국가보훈처,한국독립운동 사료 :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3, 2016, 323~324
[27]
이정식,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409쪽; 정운현, 정창현, 안중근가 사람들, 역사인, 2017, 200
[28]
마찬가지로
105인 사건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29]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 58~61
[30]
이정식,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8~409
[31]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157
[32]
국가보훈처, 한국독립운동 사료 :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 3 2016, 77~79
[33]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근현대사 연구 63, 2012, 65쪽
[34]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 운동편, 2015, 284~286
[35]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근현대사 연구 63, 2012, 65~66쪽
[36]
국가보훈처,한국독립운동 사료 :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3, 2016, 323~324
[37]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근현대사 연구 63, 2012, 51쪽
[38]
김구, 도진순, 《백범일지》, 돌베개, 2002
[39]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18
[40]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1,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2,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3,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4, 2009
[4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20
[42]
《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
[43]
《친일인명사전 1》;《친일인명사전 2》;《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4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9220&PAGE_CD=S0200
[45]
《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5~1037
[46]
《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
[47]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66
[48]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
[49]
김구의 아들인 김신 역시 자신의 회고록에 옥관빈을 밀정으로 서술해 놓았다.
[50]
친일인명사전에서도 이런 점을 친일파의 기준으로 세우지 않는다. 수록 기준과 선정 기준을 참고하자.
[51]
물론
민족문제연구소도 인지를 못 해서 넣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김구의 인지도를 볼 때 인지를 못 했을 리는 없다.
[52]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역사 비평사, 2001, 593쪽.
[53]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6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