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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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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월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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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월폴 | 스펜서 컴프턴 | 헨리 펠럼 | 토머스 펠럼홀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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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펠럼홀스 | 존 스튜어트 | 조지 그렌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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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윌리엄 피트 | 윌리엄 그렌빌 | 스펜서 퍼시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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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디즈레일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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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본명 |
존 러셀 John Russe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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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2년 8월 18일 |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미들섹스 메이페어 | |||
사망 | 1878년 5월 28일 (향년 85세)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서리 리치몬드 파크 | |||
재임기간 | 제32대 총리 | ||
1846년 6월 30일 ~ 1852년 2월 21일 | |||
제38대 총리 | |||
1865년 10월 29일 ~ 1866년 6월 26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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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 작위 | 1대 러셀 백작[1] | |
부모 |
아버지 6대 베드퍼드 공작[2] 존 러셀 어머니 조지아나 엘리자베스 바잉 |
||
배우자 |
애들레이드 리스터 (1807~1838 / 결혼: 1835 / 사별: 1838) 프랜시스 러셀 백작부인 (1815~1898 / 결혼: 1841) |
||
자녀 | 앰벌리 자작 존 러셀 (1842~1876) 외 5명 | ||
학력 | 에든버러 대학교 (자연철학 / 중퇴) | ||
정당 |
(1813~1859) (1859~18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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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32/38대 총리.1861년 러셀 백작(Earl Russell) 작위를 수여받아 초대 러셀 백작이 되었다.
2. 생애
제6대 베드포드 공작 존 러셀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예로부터 유서깊은 휘그당 성향의 가문으로, 그 역시 이러한 가풍의 영향을 받았다. 1801년 유명한 퍼블릭 스쿨 중의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9살의 나이로 입학했으나 3년 후 건강 문제로 인해 자퇴하고 대신 가정교사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이 시기 휘그당의 유명한 거물 정치인 찰스 제임스 폭스를 만났고, 그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평생동안 폭스를 롤모델로 삼았다고 한다.이후 1809년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 유럽 각국을 여행했으며, 1814년에는 엘바 섬으로 여행을 가 당시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 1세와 만났다고 한다.
1813년 대학 졸업 이듬해 20살의 나이로 하원의원이 되어 의회에 입성했다. 이는 그의 의향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의향에 가까워,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의무감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15년에는 빈 체제와 프랑스의 부르봉 왕정복고를 비난했으나 많은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 이때문인지 1817년 의원직을 사임했으나, 이듬해 다시 선거에 출마해 의회에 복귀한다. 이후 1820년대 동안 휘그당의 주요 개혁 지도자로 활동하며, 정부의 모든 공직자가 성공회식 성찬식을 받도록 한 법안을 폐지하는데 기여했다. 이 법안이 비국교도, 특히 가톨릭교도의 공직 진출을 제한하는 데에 활용되었기 때문이었다.
1830년 휘그당이 30여년만에 정권을 차지하자, 찰스 그레이 내각에 병사들의 급여 지급을 담당하는 군 급여관으로 입각했다. 내각의 일원으로서 선거제도와 의회 개혁을 줄창같이 부르짖었고, 덕분에 인구 비례에 따라 의석을 합리적으로 재배분하고[3], 부르주아와 중산층 남성에게 선거권을 확대하는 '1832년 개혁법(Reform act of 1832)'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에 참가하는 등, 개혁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이후 한술 더떠, 기존에 아일랜드 주민들이 누구나 믿는 종교에 관계없이 '아일랜드 성공회'에 십일조를 내야 했던 것을, 아일랜드 내 성공회 신자 비율에 비해[4] 십일조가 과도하다며 십일조의 일부를 교회에게 가는 것이 아닌 빈민 구제 등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 주장은 내각 내의 분열을 불러오게 되었고, 결국 사퇴한다.
그러다 1834년 하원에서 휘그당 당수가 되었으나, 그가 주장한 아일랜드 십일조 개혁을 부정적으로 본 윌리엄 4세는, 영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군주의 자의에 의해 의회를 해산하고 보수당 내각을 지명한다. 그러나 당시 보수당이 의회에서 소수였기에, 불과 5개월만에 내각이 무너지고 만다. 이후 휘그당 내각이 다시 성립되자, 이번엔 내무장관으로 입각했으며 1839년에는 전쟁 및 식민지 장관으로도 임명된다. 내무장관 시절 노동쟁의를 벌이다 체포되어 호주 유배형을 선고받은 톨퍼들 지역 농업 노동자들의 형량을 낮출 것을 탄원해 이루어 냈으며, 결혼법을 개정해 가톨릭 교도와 국교도, 또는 개신교도가 결혼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사형 집행의 빈도를 줄이는 법안들을 연이어 발의해 통과시켰다. 덕분에 이후로 영국에서는 살인에 한해서만 사형이 집행되게 된다. 한편, 사람의 출생과 결혼, 사망에 대한 정보를 공공 영역에 등록하고 관리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다 1841년 보수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야당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아일랜드에서 감자 농사가 실패하며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하자, 대체 식량을 찾기 위해 옥수수에 대한 관세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총리 로버트 필이 이를 추진했으나 내각과 여당의 격렬한 반대에 부딫히자 전격적으로 사임, 이에 빅토리아 여왕은 러셀을 총리로 지명한다. 그러나 휘그당이 소수당이었던 탓에 내각 구성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로버트 필이 다시 총리로 취임했다. 이후 필은 여당 내의 극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옥수수 관세 폐지를 강행한다.
그러다 필이 폭동 진압법을 밀어붙이다 의회에서 빠꾸를 먹고 이에 사임해버리자, 빅토리아 여왕은 다시 러셀을 총리로 지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달리 내각 구성에 성공한다. 이는 옥수수 관세 폐지의 여파로 보수당이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필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첫 총리 재임 기간, 교육공무원에 대한 연금을 도입하거나 교사 연수를 위한 보조금을 확충하였고, 지방 공공 목욕탕 및 세탁소를 설립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였으며,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와 13세 이상 어린이의 노동시간을 최대 하루 10시간으로 제한하는 등의 여러 개혁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1848년에는 런던의 하수도, 배수 시설을 계획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도 하수도위원회(Metropolitan Commission of Sewers)'를 설치했으며, 공중보건법을 제정해 잉글랜드와 웨일스 각 지역에서 공공 위생 및 보건, 식수 품질 관리 등을 관리하는 '지역 보건위원회'를 설치했다. 이후 유대인이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의원 취임을 위해 기독교적인 의례를 치르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은 상원에서 두번이나 부결되었고, 3년 후 다시 법안을 상정했으나 이번에도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결국 1858년에야 유대인 구제법이 통과되며 법안이 제정된다.
그러나 아일랜드 대기근에 대한 대처는 매우 참혹했다. 처음에는 공공사업 계획을 통해 빈민을 관리함으로서 대기근을 해결하려 했는데, 이 조치는 완전한 실패였다. 이후 정책을 바꾸어 빈민들에게 숙박시설과 고용을 제공하는 '작업장'에 일부 빈민을 수용한 후 나머지는 무료 급식소를 통해 구제하도록 했으나, 문제는 이를 시행할 비용이 지주들에게 대부분 돌아가는 바람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이 동안 10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인이 사망하고 수백만 명이 해외로 이주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아일랜드에 뿌리내린 지주제도였는데 이것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1851년 12월 외무장관 헨리 존 템플이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멋대로 승인하자 이 문제로 대립하다 그를 외무장관에서 해임했는데, 그가 의회에서 불신임결의안을 제출하고, 이게 통과되어 버리는 바람에 1852년 2월 총리직에서 내려온다.
이후 여왕의 명으로 인해 수립된 보수당의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내각이 재무장관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제출한 예산안이 부결되는 바람에 불과 10개월만에 사임한 후, 이어 보수당 내 필파인 애버딘 백작 조지 해밀턴고든이 필파와 휘그당 간의 연정으로 총리가 되자, 재무장관으로 입각했다가 얼마 후 사퇴하고 대신 하원의장으로 취임한다. 이때 1832년 개혁법을 개정해 선거권을 크게 확대하고, 인구 비례에 따라 의석을 다시 배분하는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크림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러셀은 크림 전쟁에 적극적이었고 러시아의 영토 야욕을 막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애버딘 백작은 전쟁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둘은 이때문에 갈등을 빚게 되었고, 여기에 영국군이 초기에 군사적으로 상당한 삽질을 한 것에 대해 의회에서 압박이 가해지자 결국 애버딘 백작은 총리직을 사임하고 만다. 이후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이 총리에 취임하자 식민지 장관으로 취임한다. 이후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하자 내각에서 사임한다.
이후로는 파머스턴 내각의 주된 비판자로서, 그가 추진하는 여러 호전적인 외교정책을 일관적으로 비난하는 한편 저번에 무산된 선거권 확대 개혁과, 교육 보조금 확충을 주장했다.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고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릴 것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제2차 파머스턴 내각이 수립되었을 때는 둘 사이가 다소 호전되어, 이번에는 외무장관으로 내각에 입각한다. 재직 기간 동안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대해 이탈리아 민족주의를 옹호하고 오스트리아를 비판하도록 정책 기조를 바꾸었고, 통일 이탈리아가 국제적 지지를 받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1861년에는 러셀 백작 작위를 받고, 하원에서 상원으로 옮겨갔다. 이후 파머스턴이 1865년 갑자기 사망하면서 총리가 되었으나, 당 내 분열로 인해 보수당의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에게 정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후 정계를 사실상 은퇴했다.
195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그의 손자인데,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존 러셀이 엘바 섬에 유배되어있던 나폴레옹을 만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