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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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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이나 그 외 나라의 용어는 황실/왕실 용어 및 별칭 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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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왕(女王, Queen regnant)은 여성 이다. 여성 황제 여제(女帝)라고 하고, 전반적인 여성 군주는 여주(女主)라고 한다.

남편이 국왕인 왕비와 달리 여성 본인이 왕인 경우이다. 여왕의 남편은 국서(國壻)라고 한다. 영어에서는 여왕과 왕비 둘 다 Queen이라고 하기 때문에 오역하기 쉽다. Queen은 여왕이나 왕비로 딱 맞게 번역되는 단어가 아니라 그저 King의 여성형이다. 풀어서 표기하면 여왕은 Queen regnant이고, 왕비는 Queen consort이다.

2024년 1월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양위로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주권국가의 여왕은 당분간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

2. 역사

2.1. 동아시아

동아시아에서는 서자 계승이 가능하므로 딸에게의 계승이 불필요하여 여왕이 드물었고, 특별한 경우로 여왕이 나오더라도 부계 계승만 하는 종법제 때문에 여왕의 자녀가 왕위를 세습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1]

동아시아의 여성 군주들은 7세기에 몰려있는데, 일본에서 스이코 천황이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즉위하였으며 이후 꾸준히 여성 군주가 등장했다. 신라에서도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이 시기에 나타났으며, 중국 당나라에서도 측천무후가 등장했다.

2.1.1. 한국

한국사에서는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했다. 선덕여왕(덕만공주), 진덕여왕, 진성여왕 이렇게 3명의 여왕들이 있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골품제와 연관이 크다. 성골이어야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성골 남자가 모두 죽어버린 상황이었고, 여기서 진골 남성들보다는 성골 여성들에게 왕위 계승의 우선권이 있었던 것. 성골 여성들조차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자,[2] 그제서야 진골 남성 중 가장 유력자였던 김춘추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두 여왕 이후에는 한동안 여왕이 없었다가, 47대 헌안왕이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자 여왕 논의가 나왔다. 그러나 헌안왕이 " 유교적 관점[3]에 의하면 여자를 국왕에 올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본받을 수 없다"고 고사하였고, 대신 왕족 중에서 똑똑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고자 해서 테스트를 거쳐 김응렴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이었다. 결국 신라의 3번째 여왕은 30여년 뒤에 즉위한다.

진성여왕의 경우 골품제와는 연관이 없지만, 오빠인 50대 국왕 정강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전례를 들어 왕위를 넘긴 것이다. 그런데 진성여왕 스스로가 훌륭한 전례가 되어, 그 이후로는 한국사에서 다시는 여왕이 탄생하지 못했다.[4] 물론 시대가 갈수록 국풍이 사라지고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고려나 조선대쯤 가면 여왕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으므로, 진성여왕의 실정이 아니었더라도 여왕은 더 이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본래는 그냥 '왕(王)'으로도 적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 자를 붙인 '여왕(女王)'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이 선덕왕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는 영묘사를 창건한 군주가 '선덕여왕'이라고 나온다. 다만 중국 사서에서는 선덕여왕보다 앞선 여왕들인 야마타이국 동여국의 여왕들을 가리키며 여왕이라는 말을 진작부터 쓰고 있었고, 신라 37대 왕이 선덕인지라 구별을 위해 여왕이라는 호칭으로 바꿔서 표기하기도 한다.

이를 보면 신라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 가야, 조선 등 직계나 방계의 남자 왕족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한국사의 다른 역대 왕조들과는 달리 '되도록 남자가 왕을 하지만, 적당한 남자가 없을 땐 여자도 왕을 못할 건 없다' 정도의 의식이 있었던 듯하다. 간혹 이를 두고 신라의 여권이 주변국보다 높았다고[5]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실제로 신라에서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한 기록이 동시대 고구려 백제, 중국보다 많이 있어서 주목을 받기도 한다. 중국 측 기록인 신당서의 신라전에서도 '신라의 재래시장에서는 부녀자들이 모든 장사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에 있는 정창원 신라 양탄자 유물은 귀족 여성의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

다만 이런 주장들에는 현대의 남녀평등 사상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단지 신분의식이 공고했기 때문에 왕위가 넘어가는걸 막으려는 것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주변국들은 물론 내부적으로도 "쟤네가 왕 자리 안 뺏기려고 별 짓을 다 하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여져 여왕통치기에 신라는 안팎으로 위기를 맞았다.

사실 꼭 현대의 남녀평등까진 아니더라도,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상당히 이례적이다. 동시대 중국 당태종은 " 신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기 때문에 남들이 우습게 본다. 당나라 황실 종친을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하면 어떻겠느냐??"고까지 하며 신라와 선덕여왕을 조롱했다. 그리고 자기가 죽고 51년 후 자기 후궁이 황제가 됐다. 그 당시 기준으로도 신라의 여왕 즉위는 주변국에서는 특이 케이스로 봤다는 것이다.

신라에서도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불만을 품은 세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비담의 난이 일어난 명분도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표면적 명분으로 성별을 걸고 넘어진 것을 보면 여왕의 통치를 탐탁지 않아 하는 여론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헌안왕 사례도 "신라 사회에서 이론적으로는 여성의 즉위가 가능했지만, 한편으로는 헌안왕 본인을 비롯해 여성의 왕위 계승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히 존재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신라 멸망 이후에는 여왕이 존재했다는 사실로 고려~조선 천 년 동안 까였다. 김부식 삼국사기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그래도 왕이라고 기록은 했는데, 조선시대에는 제대로 된 왕도 아니라고 해서 여주(女主)로 주로 불렸다. 동사강목 등 조선시대 여러 사서의 사론에선 앞의 두 여왕은 "나라가 안 망한 게 다행이다", 진성여왕은 "이래서 신라가 망했다"로 주로 요약되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게 함정

사실 여왕의 등장은 여권에 대한 개방적인 시선이 아니라 골품제로 인한 꽉막힌 신분제에 의한 것이다. 즉, 이들도 성골 진골을 나눌 것이 아니었다면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남성이 즉위했을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는 자신들의 악습인 골품제를 놓지 못 했고 무열왕계는 이를 타파하려고[6] 하였으나 실패했고 신라는 여전히 진골이 집권했다.[7] 이는 고구려와 백제인이 최대 6두품까지 오르지 못 했고 최치원의 예에서 보듯이 당대 불만이 점차 쌓여가면서 사회현상으로 대두됐고, 신라는 민족 융합을 제대로 이뤄내지 못 한 채 후삼국으로 분리되었다.

공식적으로 성별이 여자인 국왕은 한국사 왕조 중에서 신라에만 존재했지만, 국왕이 어린 관계로 섭정에 오른 왕비가 권력을 휘두른 사례는 의외로 꽤 많다. 특히 성에 관해 매우 보수적이었던 조선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왕에 준하는 권세를 누렸던 문정왕후가 있는데, 그 영향으로 인해 그녀의 무덤인 태릉도 왕릉급으로 건설되었다. 여왕에 준하는 여주(女主) 및 여군(女君)이라는 호칭도 발견되는데, 문정왕후 윤씨가 정미사화에서 여주(女主)라 불렸고, 정순왕후 김씨는 섭정할 때 여주(女主)나 여군(女君)을 자칭했다.

2006년 대한민국에서 대한제국 황손 이해원이 여황제로 옹립된 사건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2.1.2. 일본

2.1.2.1. 황족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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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증손녀 이하 여성 후손이 갖는 왕작 지위 및 칭호이다. 다만, 군주가 아니고 황족으로서의 왕작이다.
2.1.2.2. 여성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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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천황은 일본 역사상 10대 8명으로, 스이코 천황, 고교쿠·사이메이 천황, 지토 천황, 겐메이 천황, 겐쇼 천황, 고켄·쇼토쿠 천황, 메이쇼 천황, 고사쿠라마치 천황이 재위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대일본제국 헌법 구 황실전범, 그리고 현행 황실전범에서는 여성 천황을 허용하지 않는다.
2.1.2.3. 기록상의 여성 군주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여왕이 등장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우선 중국의 정사 삼국지와 한국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 토요가 있었다. 그 외, 사적(史蹟)으로만 전해지는 타부라츠히메와 산아이 이소바(サンアイイソバ)가 있다.

2.1.3. 중국

중국 역사상 측천무후 1명만 논란의 여지 없는 여제이고, 역사학자에 따라 원고낭 진석진까지 여제로 보아 최소 1명부터 최대 3명의 여제가 있었다.

6세기에 북위에서 여제인 원고낭이 나타났지만, 여자아기를 남자아기로 속인 사기 즉위였고 재위 기간이 1일에 불과해 의미가 없었다.

7세기에 이웃나라인 야마토 정권(일본), 신라(한국), 동여국(티베트), 참파(베트남)에서 계속 여왕이 나타났고, 중국 민간에서 여제를 자칭한 진석진까지 나타나니,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측천무후가 황위를 찬탈해 여제가 되는데 성공했다.

측천무후 직후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 며느리 위황후, 손녀 안락공주 총 3명이 여제가 되려고 시도했으나 다들 실패하면서 이후 중국에 여제는 없었다. 북송의 섭정 장헌명숙황후 유씨도 여제를 꿈꿔 황제의 복장을 입었다.

여성 군주가 거의 없었던 한족과는 달리 소수민족은 여성 군주가 가끔 있었기 때문에 소수민족의 역사까지 반영할 경우 일본보다 여성 군주 수가 더 많아진다. 예시로 수당시대 티베트에 여왕이 대대로 다스린 동여국이 있었다.[8]

2.2. 유럽

유럽은 여왕이 어느 정도 있었는데, 기독교의 영향으로 일부일처제가 자리 잡아 서자 계승이 불가능하여 딸의 계승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Jure uxoris'라고 여왕의 남편을 공동 왕으로 삼았으나 점차 여왕이 기혼이라도 단독으로 재위하게 되었다. 다만 유럽에서는 여성의 즉위를 막는 살리카법이 존재해 살리카법을 철저하게 따른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여왕이 없었다.

유럽에서는 살리카법을 철저하게 따르지 않는 한 모계 계승이 인정되었고, 여왕은 본인이 임신을 하기 때문에 후계자의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로웠으나, 최고 권력자가 직접 임신을 해야 하는 높은 위험 부담이 있었다. 군주정 하에서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후계자 생산이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통치자가 후계자를 하나 낳는데 거의 1년간 전념해야 하는 상황은 체제의 안정을 몹시 위협하는 단점이었다.

더욱이 준 살리카법을 따르는 왕정국가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권이 인정될지언정 왕위 계승은 남성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여성에게 왕위 계승권이 돌아오는 상황이라 함은 왕가에서 왕위에 적합한 남성의 씨가 말랐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여왕이 직계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 특히 출산 중 급사할 경우 제대로 된 왕위 계승권자가 남아있지 않을테니 이후의 정국은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이어질 수 있다는걸 의미했다. 여왕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엘리자베스 1세의 경우에도 여왕이라는 이유로 인해 늘 군주로서 약점을 갖고 있었다.

현대까지 남아있는 유럽 왕실들은 대부분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 개정해 미래에는 여왕이 쉽게 나타날 전망이며, 가까운 미래의 유럽 국가에서는 남성 국왕보다 오히려 여왕이 더 많아질 것이다. 현재 입헌군주제 국가들 중 스페인[9] 노르웨이[10], 스웨덴[11][12], 벨기에[13], 네덜란드[14][15] 모두 차기 또는 차차기 왕위 계승자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3~40년 후 이들이 차례로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면, 유럽에서 남성이 국왕으로 재위하는 국가는 대공국이나 공국을 합쳐도 영국 덴마크,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된다.[16]

2.2.1. 덴마크

총 2명의 여성군주를 배출했다. 당장 올해 1월까지 여왕이 지배한 국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왕들이 넘버링으로 이어지고 또 한시대의 끝을 의미하는데, 마르그레테 1세는 크누트 왕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바이킹 왕조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후손들의 종말을 의미했고 마르그레테 2세는 그다음으로 600년 가까이 지속된 독일계 왕조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이후 글뤽스부르크 왕조는 프랑스계로 넘어간다.

2.2.2. 영국

영국은 총 15명의 여성 군주를 배출했다.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가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여왕이라서 세계에서 여왕으로 가장 유명한 국가가 되었으며, 또한 20세기 중반부터 2022년까지 재위한 엘리자베스 2세의 포스 덕분에 현대인들에게도 여왕으로 유명하다.[17]

영국 여왕들은 선왕 직계의 딸로서 여왕이 된 경우가 의외로 잘 없다. 이전의 왕이었던 남자 형제나 언니의 뒤를 이었거나, 아예 방계 왕족으로 왕이 된 경우가 많다. 메리 1세는 선왕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였고, 엘리자베스 1세는 선왕 메리 1세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앤 여왕 메리 2세의 친 여동생, 빅토리아 여왕 윌리엄 4세의 조카였다.

그나마 메리 2세 엘리자베스 2세는 아버지 다음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메리 2세는 아버지 제임스 2세를 쫒아낸 의회가 옹립한 왕이었고, 엘리자베스 2세는 태어날 때만 해도 둘째 왕자였던 조지 6세의 딸이었다.

2022년 엘리자베스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찰스 3세가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차기 국왕 차차기 국왕 모두 남성이기 때문에 다시 여왕이 등장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2.2.3. 스페인

스페인 역사상 여성 군주는 총 17명으로, 16세기까지 각국에서 여성 군주가 16명 나왔고,[18] 통일 왕국 성립 후 프랑스의 보르본 왕조가 스페인에 들어서면서 살리카법이 생겨 한동안 여왕이 없다가 1830년에 살리카법이 폐지되어 이사벨 2세 여왕이 즉위했다.

스페인의 현 국왕 펠리페 6세도 아들이 없고, 장녀 레오노르 공주와 차녀 소피아 공주 뿐이다. 따라서 펠리페 6세가 사망하거나 생전 양위를 하여 왕위에서 퇴위할 경우, 스페인은 다음대에 여왕이 즉위할 것이 확정적이다.

2.2.4. 네덜란드

네덜란드 여왕은 3명 뿐인데 살리카법 때문이 아니라 왕실이 19세기 와서야 만들어져서 그렇다.

네덜란드는 1890년부터 2013년까지 123년간 빌헬미나 여왕, 율리아나 여왕, 베아트릭스 여왕 3대에 걸쳐 여왕이었다. 때문에 한때 '여왕의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다. 베아트릭스 여왕 다음으로 그 아들인 빌럼알렉산더르 국왕이 즉위했으나, 그 또한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이다. 따라서 빌럼 국왕이 사망하거나 퇴위하면 그 다음 대에서는 거의 확정적으로 또 여왕이 나올 것이다.

2.2.5. 러시아

러시아의 여성 군주는 총 12명인데, 그 중 4명은  러시아 제국의 여제들로, 러시아의 초대 임페라토르(황제)인 표트르 1세 사후 그 아내인 예카테리나 1세를 시작으로 2대, 4대, 6대, 8대 황제가 여성이었다.

여제들이 연속으로 즉위한 것은 아니지만 여제들 사이사이의 남자 황제 3명이 모두 단명하여 사실상 여제들이 연달아 재위하는 것처럼 연표가 형성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여제 시대는 1720년대부터 1790년대까지 70여년 동안 이어지다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파벨 1세가 여제 계승을 금지하여 끝났다.

2.2.6.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역사상 여성 군주는 단 2명 뿐이다. 고대에 마르코만니족의 여왕 프리티길 암브로시우스와 교신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오랫동안 살리카법 때문에 여왕이 없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아들이 없던 카를 6세가 국본조칙으로 여성 계승권을 인정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여성 군주가 나타났다. 단 그때 오스트리아 대공이 겸임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여성의 즉위가 불가능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도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가 아닌 황후로서 통치했다.

2.3. 중동

중동에서는 서자 계승이 가능하니 딸에게의 계승이 불필요하여 여왕이 드물었다. 중동의 여왕들은 오히려 남편에게서 권력을 넘겨받는 부부 상속을 통해 즉위한 사례들이 많았으며, 유럽과는 반대로 왕이 아내를 공동 군주로 삼은 사례도 종종 있었다.

현대에 들어서도 중동에 남아있는 군주정들은 전제군주제 또는 군주가 실권을 가진 명목상 입헌군주제이고 왕위 계승법이라는게 옛날 시대부터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여왕은 여전히 드물다.

2.3.1. 이집트

고대 이집트 수천년 동안 여성 파라오는 매우 드물게 나타났는데, 왕비들 중에서 남편이 죽은 후 단순한 섭정을 넘어 직접 파라오가 되는 사례가 간혹가다 있었다.

그러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누이 아르시노에 2세 근친혼하고 그녀를 공동 파라오로 삼은 것을 시작으로 근친혼 부부가 공동으로 재위하게 되었는데, 이는 왕가의 신격화 작업을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여성 파라오가 많이 나왔으나, 그들 대부분은 남성 파라오와 공동 통치자였고 단독으로 재위한 여성 파라오는 몇명 없었다.[19]

그러나 이집트에 이슬람교가 도래한 후의 여왕은 샤쟈르 알 두르 뿐으로, 그녀는 아이유브 왕조에서 맘루크 왕조로 왕권을 넘기는 중간 다리 역할로서 잠깐 재위했다.

2.3.2. 예멘

성경에서 등장하는 전설적인 시바의 여왕이 군림했다는 시바는 예멘사의 사바로 비정되고 있다.

예멘의 주요부를 약 90년간 지배한 술라이히 왕조에서는 건국자 알리 앗 술라이히가 아내 아스마를 공동 군주로 존중했고, 그 뒤를 이은 아흐마드도 이를 따라서 아내 아르와와 공동으로 통치했다. 아르와는 남편 사후 약 40년간 단독으로 재위했고, 시바의 여왕에 빗댄 '셰바의 작은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3. 목록

3.1. 실존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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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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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한국어 여왕()
한자 (여왕)
독일어 regierende Königin
러시아어 Царствующая королева
몽골어 Хенри хаан
베트남어 Nữ vương
스페인어 Reina reinante
아랍어 ملكه حاكمه
영어 Queen regnant
이탈리아어 Regina regnante
일본어 [ruby(女王, ruby=じょおう)]
중국어 [ruby(女王, ruby=nǚwáng)]
포르투갈어 Rainha reinante
프랑스어 Reine régnante
힌디어 शासिका रानी
에스페란토 Reĝino reganta

[1] 정확히 말하면 '여왕의 자녀로서만' 왕위를 물려받은 모계 계승이 없다. 일본의 지토 천황이 손자 몬무 천황에게, 겐메이 천황이 딸 겐교 천황에게 황위 세습을 했지만 과거 일본 황족은 근친혼을 해 이들의 아버지도 황족이라 부계 계승에도 해당한다. 당중종 당예종 측천무후의 아들이긴 하지만 이들은 측천무후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당고종의 아들로서 즉위한 부계 계승이었다. [2] 물론 성골 남자가 이미 없으니 후사가 있더라도 진골이었을 것이다. [3] 서경을 인용했다. [4] 기록에 남아 있는 진성여왕에 대해서는 진성여왕 문서를 참조. [5] 특히 성리학 교조주의가 심화된 조선시대와 비교해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6] 정확히는 기득권인 진골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이는 왕권의 상승을 불러일으키니 무열왕계가 평등주의 사상을 지닌게 아니라 전근대적인 시선으로 본 것이다. [7] 이후 장보고의 난에서 보듯이 진골들은 왕위 다툼을 위해 권력다툼을 이어 갔으며 신라 내정이 크게 악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동아시아 중세의 대표적인 사회 현상인 호족의 발흥으로 이어졌다. [8] 다만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중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논외이다. [9] 레오노르 왕세녀 [10] 잉리드 알렉산드라 왕세손녀 [11] 빅토리아 왕세녀, 에스텔 왕세손녀 [12] 특히 이쪽은 현 왕세녀의 첫 자녀가 딸이기 때문에 여왕 즉위가 확정적이다. 거기다 현 국왕인 칼 구스타프 16세의 나이가 78세로 2024년 기준으로는 아직 활동이 가능한 나이라지만 엄연한 고령이라 매우 가까운 미래에 왕세녀인 빅토리아에게 양위로 물려줄 가능성이 높다. [13] 엘리자베트 왕세녀 [14] 카타리나아말리아 왕세녀 [15] 이쪽은 현 국왕의 자녀가 모두 딸이기 때문에 만약 현 왕세녀가 승계를 포기해도 여왕은 반드시 탄생한다. [16] 영국과 덴마크, 룩셈부르크의 경우 절대적 맏이 상속제를 채택하지만, 영국은 차기 차차기, 덴마크는 차기, 룩셈부르크는 차기 차차기가 모두 남성이라 여왕이 나오려면 멀었다. [17] 지금 현대인들에게 여왕을 떠올려 보라고 질문한다면 십중팔구 엘리자베스 2세가 제일 먼저 튀어나올 것이다. [18] 그 중 나바라 왕국의 여왕이 7명으로 유독 많다. [19] 여성 파라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조차도 어린 남동생이나 아들을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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