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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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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공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 여공작 작센알텐부르크의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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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영국 조지 3세의 왕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Charlotte zu Mecklenburg-Strelitz
파일:Allan_Ramsay_-_Queen_Charlotte_(Royal_Collection)1.jpg
<colbgcolor=#C9E1EA,#694E4B> 이름 독일어 조피 샤를로테
(Sophie Charlotte)
영어 소피아 샬럿
(Sophia Charlotte)
출생 1744년 5월 19일
신성 로마 제국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 미로
사망 1818년 11월 17일 (향년 74세)
영국 잉글랜드 큐 큐 팰리스
장례식 1818년 12월 2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배우자 조지 3세 (1761년 결혼)
자녀 조지 4세, 프레더릭, 윌리엄 4세, 샬럿, 에드워드, 어거스타, 엘리자베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아돌푸스, 메리, 소피아, 옥타비우스, 알프레드, 아멜리아
아버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공작
어머니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공녀
형제 크리스티아네, 카롤리네, 아돌프 프리드리히 4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조피 루이제, 카를 2세[1], 에른스트 고틀로프, 고트헬프,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서명 파일: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서명.sv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시절3.2. 결혼3.3. 왕비3.4.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흑인 혼혈설6. 여담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영국의 국왕 조지 3세 아내.

남편 조지 3세와 금슬이 매우 좋아 사이에서 무려 15명의 자식을 낳은 걸로 유명하며, 조카인 루이제(10명), 프리데리케(13명)와 함께 대표적인 다산의 왕비였다.

온화하고 다정한 성품으로 인해 남편의 신뢰 뿐만 아니라 가정적인 면모도 많이 보여줘 영국인들에게도 사랑받았던 왕비다.

2. 작위

파일:Coat of Arms of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svg
문장

3. 생애

3.1. 어린시절

1744년 5월 19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에서 카를 루트비히와 작센 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당시 샤를로테의 백부가 공작이었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해 두 오빠인 아돌프 프리드리히와 카를이 공작이 된다. 샤를로테의 부모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가 신성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자주 복무해야 해서, 어머니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가 샤를로테를 포함한 10남매의 교육을 집중적으로 도맡았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샤를로테의 백부와 아버지가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는 샤를로테의 오빠의 권리를 위해 정치적으로 나서면서 아이들의 교육을 신경쓰지 못하게 되었다. 나중에 샤를로테가 영국의 왕비가 될 쯤 외교 문서에서 그녀의 교육 수준이 매우 열악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3.2. 결혼

1760년에 영국의 조지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손자인 조지 3세가 22세의 나이로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영국의 왕위계승자였던 조지 3세에겐 여러 혼담이 있었는데 대부분 가족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2]
파일:조지 3세-샬럿 왕비 결혼식.jpg
결혼식
아무튼 조지 3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서둘러 결혼을 해야 될 상황이 되자 여러 후보들을 조사한 결과 샤를로테가 영국의 왕비로 낙점됐다. 샤를로테가 왕비로 낙점된 이유는 그녀가 작은 공국 출신의 공녀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이 낮을 것이며, 궁정의 음모 등에 익숙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3] 1761년 8월 말에 샤를로테는 단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영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9월 8일, 영국에 도착한 지 단 6시간만에 조지 3세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3.3. 왕비

영국에서 결혼한 샤를로테는 샬럿 왕비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록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였지만 조지 3세와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는데, 조지 3세는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정부를 두었던 것과 달리 아내인 샬럿에게만 충실했다고 한다. 이러한 행복한 결혼 생활의 결과로 샬럿 왕비는 1762년 8월에 맏아들인 웨일스 공 조지를 낳았고, 이후에도 9남 6녀에 달하는 수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샬럿은 왕비로 재위한 지 20년 넘게 수많은 자녀들을 낳으면서 그들의 양육에 집중하느라 궁정의 음모와 복잡한 정치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면서 사적인 삶을 살았다.[4] 다만 정치에 대해서만 멀리했을 뿐이지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5] 이후에도 예술, 과학 자선사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했다.

샬럿 왕비는 다른 왕족들처럼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독일 출신 예술가를 선호했고, 남편 조지 3세와 함께 헨델의 작품에 대해 경의를 보냈다. 유명한 음악가인 모차르트도 여행 중에 영국을 방문했고 샬럿 왕비와 조지 3세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국왕 부부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굉장히 감탄했다고 한다.[6] 다양한 분야의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도 많이 후원했는데 샬럿 왕비는 그중에서도 특히 세밀화를 좋아했다. 이러한 후원 덕분에 샬럿 왕비와 그녀의 가족들의 초상화가 아직까지도 많이 남겨져 있다.

또한 당시 쿡 선장이나 뱅크스 박사가 수집한 여러가지 다양한 식물들이 왕립 식물원인 큐 가든에 있었을 정도로 식물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극락조화"[7]를 좋아해서 이 꽃을 샬럿을 위해 "Strelitzia Reginae"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고아원과 여성 전문 병원을 설립하기도 했고, 여성 교육에도 많이 관심을 가졌다.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자신의 딸들에게도 수준 높은 교육을 지원했지만 가정적으로는 매우 엄하게 대했다고 한다.[8]

1780년대 이후에 조지 3세의 정신병이 재발하면서 샬럿 왕비는 매우 힘들어했다. 샬럿 왕비는 1788년 이후에 머리가 점차 흰머리로 바뀌어 갔고, 조지 3세가 반복되는 정신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자 덩달아 샬럿 왕비도 굉장히 고생했다고 한다.

3.4. 사망

1810년에 막내딸인 아멜리아 공주가 사망하자 조지 3세의 정신병이 더욱 심해졌다. 이를 본 샬럿은 매우 가슴 아파하며 1812년 이후부터 남편하고 떨어져 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들 웨일스 공 조지가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1816년에는 손녀인 샬럿 공주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드 공자랑 결혼했지만, 1년 만인 1817년에 사산을 하고 얼마 안 있어 사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샬럿 공주가 다다음대의 유일한 합법적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으로 영국에선 계승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정작 샬럿 왕비는 15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그들이 낳은 적자나 적녀는 샬럿 공주 단 한 명 뿐이었던 것. 딸들은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결혼을 늦추거나 아예 하질 않았고, 아들들은 사생아만 수십 명을 낳았을 뿐 결혼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결국 1818년 11월 17일, 74세의 나이로 아들 웨일스 공 조지의 곁에서 눈을 감았다. 샬럿 왕비의 죽음을 전해들은 남편 조지 3세는 아내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미 이 때 조지 3세의 정신병 자체가 매우 악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후 샬럿의 유해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고 약 1년 후 남편 조지 3세도 세상을 떠나면서 샬럿의 곁에 안장되었다. 아쉽게도 약 6개월 후 그토록 바라던 적손주들인 케임브리지의 조지 공자[9] 켄트의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녀[10] 그리고 컴벌랜드의 조지 공자[11]의 출생은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colbgcolor=#FFF3E4,#331c00>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공작
(Duke Charles Louis Frederick of Mecklenburg-Strelitz)
<colbgcolor=#FFFFE4,#323300>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
(Adolf Friedrich II, Duke of Mecklenburg-Strelitz)
<colbgcolor=#E4FFEC,#00330f>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 1세
(Adolf Friedrich I, Duke of Mecklenburg-Schwerin)
브라운슈바이크다넨베르크의 마리아 카타리나 여공작
(Duchess Marie Katharina of Brunswick-Dannenberg)
슈바르츠부르크존데르스하우젠의 크리스티아네 에밀리 공녀
(Princess Christiane Emilie of Schwarzburg-Sondershausen)
슈바르츠부르크존데르스하우젠 공
크리스티안 빌헬름 1세
(Christian William I, Prince of Schwarzburg-Sondershausen)
바르비뮐링겐의 안토니 지빌레 여백작
(Countess Antonie Sybille of Barby-Mühlingen)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공녀
(Princess Elisabeth Albertine of Saxe-Hildburghausen)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1세
(Ernest Frederick I, Duke of Saxe-Hildburghausen)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Ernest, Duke of Saxe-Hildburghausen)
발데크의 조피아 헨리에테 여백작
(Countess Sophia Henriette of Waldeck)
에어바흐에어바흐의 조피아 알베르티네 여백작
(Countess Sophia Albertine of Erbach-Erbach)
에어바흐에어바흐 백작
게오르크 루트비히 1세
(George Louis I, Count of Erbach-Erbach)
발데크의 아말리아 카타리나 여백작
(Countess Amalia Katharina of Waldeck)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조지 4세
(George IV)
1762년 8월 12일 1830년 6월 26일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슬하 1녀[12]
2남 요크와 올버니 공작 프레더릭 왕자
(Prince Frederick, Duke of York and Albany)
1763년 8월 16일 1827년 1월 5일 프로이센의 프리데리케 샤를로테 공주[13]
3남 윌리엄 4세
(William IV)
1765년 8월 21일 1837년 6월 20일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슬하 2녀
1녀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샤를로테
(Charlotte, Queen of Württemberg )
1766년 9월 29일 1828년 10월 5일 프리드리히 1세
4남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1767년 11월 2일 1820년 1월 23일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슬하 1녀[14]
2녀 어거스타 소피아 공주
(Princess Augusta Sophia)
1768년 11월 8일 1840년 9월 22일
3녀 헤센홈부르크 방백비 엘리자베트
(Elizabeth, Landgravine of Hesse-Homburg)
1770년 5월 22일 1840년 1월 10일 헤센홈부르크 방백 프리드리히 6세
5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Ernest August I)
1771년 6월 5일 1851년 11월 18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
슬하 1남 1녀[15]
6남 서식스 공작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왕자
(Prince Augustus Frederick, Duke of Sussex)
1773년 1월 27일 1843년 4월 21일 레이디 어거스타 머레이
슬하 1남 1녀
레이디 세실리아 언더우드
7남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16]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
1774년 2월 24일 1850년 7월 8일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테 공녀
슬하 1남 2녀[17]
4녀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부인 메리 공주
(Princess Mary, Duchess of Gloucester and Edinburgh)
1776년 4월 25일 1857년 4월 30일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프레더릭 왕자[18]
5녀 소피아 공주
(Princess Sophia)
1777년 11월 3일 1848년 5월 27일
8남 옥타비우스 왕자
(Prince Octavius)
1779년 2월 23일 1783년 5월 3일
9남 알프레드 왕자
(Prince Alfred)
1780년 9월 22일 1782년 8월 20일
6녀 아멜리아 공주
(Princess Amelia)
1783년 8월 7일 1810년 11월 2일

무려 9남 6녀의 15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는데 엄청난 사실은 이 많은 자녀들을 모두 샬럿 왕비 본인이 낳았다는 점이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8남, 9남, 6녀 3명은 부모보다 빨리 요절했다.

5. 흑인 혼혈설

이에 대해서는 그녀의 조상이자 포르투갈 왕국 국왕 아폰수 3세 정부였던 마드리가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포르투갈 최남단에 위치한 알가르베( 파루의 옛 지명) 출신이였는데, 알가르베는 무어인의 오랜 통치로 인해 현재까지도 그들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유럽 대륙에 속하지만 아프리카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마드리가나 역시 북아프리카에서 온 조상을 둔 흑인이거나 흑인 혼혈이였을 것이라는 설이 있는 것. 다만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인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샬럿은 마드리가나의 16대손으로, 마드리가나가 유색인종이였더라도 이미 손주나 증손대쯤부터 외양이 가계도를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백인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금발벽안이던 다이애나 스펜서의 6대조 외할머니 역시 인도인 어머니를 둔 아르메니아인이었다.[19][20]

정리하자면 샬럿의 16대조 할머니인 마드리가나조차 흑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으며, 만일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엔 무려 520여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 없다. 더군다나 마드리가나와 그녀의 후손들의 초상화 역시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 샬럿과 그 조상들의 DNA 검사를 해보지 않는 이상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예정이다.

6. 여담

  • 프랑스 왕국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1755년생)와 친분이 있었다. 두 왕비는 만난 적은 없으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아 친분을 유지했었다.[21]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녀가 많은 샬럿 왕비의 편지에 의례적인 답장을 보냈지만, 8남 옥타비누스 왕자를 낳은 샬럿에게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끝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자 샬럿 왕비는 큰 충격을 받았고, 남편의 나라인 영국에서도 똑같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많은 걱정을 했다.
  •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편 조지 3세는 샬럿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 그녀의 이름을 딴 케이크를 선보였는데, 이 케이크의 이름이 바로 샬럿 로얄(Charlotte Royal)이다.
  • 남편과의 관계가 매우 좋아 다산할 만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자식 농사는 실패했다.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아들들은 정략결혼한 본부인과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아서 정부를 끼고 살았고[22], 딸들은 조지 3세 부부가 시집보내는 걸 꺼렸다.[23] 결국 조지 3세의 아들들 중 몇 명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허락받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겠다며, 아예 정부와 사실혼 관계로 동거하며 사생아를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조지 3세의 아들들은 자식을 아예 낳지 못하거나 정부에게서 낳은 사생아만 남기고[24] 줄줄히 사망했고, 결정적으로 장남 조지 4세의 외동딸 샬럿 어거스타 공주가 요절하면서[25] 영국의 왕위 승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가까스로 샬럿 왕비와 조지 3세의 4남 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외동딸인 빅토리아가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
    그 손녀인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공과의 사이에서 많은 적자녀들을 낳았고, 그 자녀들이 많은 유럽 왕실과 혼인을 했다. 그렇기에 아주 먼 후손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론 샬럿 왕비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최대 도시인 샬럿의 유래가 되었으며 플로리다 남서부의 두 번째로 큰 항만인 샬럿 하보(Charlotte Harbor) 역시 원래는 '카롤루스 아브리고(Carlos abrigo)'라고 불렀으나 후에 영국이 점령한 뒤 이름을 바꿨다.
  •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왕비다. 국왕의 배우자 중에서도 필립 공에 이어 두번째로 오래 재임했다.

7. 대중매체에서

영화 조지 왕의 광기에서는 헬렌 미렌이 연기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에서 등장하며 자세한 내용은 샬럿 왕비(브리저튼) 문서 참고. 흑인 혼혈설에 맞춰 흑인 배우인 골다 로스휴벌이 연기했다. 샬럿 왕비의 젊은 시절을 다룬 프리퀄 드라마 샬럿 왕비: 브리저튼 외전에서는 인디아 암아티피오가 연기한다.

[1]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의 아버지. [2] 조지 3세는 1758년에 리치몬드 공작의 딸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 결혼에 대해서 뷰트 백작이 반대했다. 조지 3세의 조부인 조지 2세는 손자가 친척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조피 카롤리네와 결혼하길 원했지만, 조지 2세의 맏며느리이자 조지 3세의 어머니였던 웨일스 공비 오거스타가 반대했다. 어거스타도 아들이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프리데리케와 결혼하기를 희망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3] 실제로 샤를로테는 왕비가 된 이후에도 자신과 관련된 일을 제외한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4] 산책할 때도 시종들을 대동하는 게 아니라 부부끼리만 오붓하게 즐기는 걸 낙으로 삼았으며, 샬럿 왕비는 버킹엄 저택(별칭: Queen of House)에서 살았다고 한다. 샬럿 왕비가 살았던 집이 바로 지금의 버킹엄 궁전이다. [5] 특히 미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만 정치적 문제의 개입을 싫어했다. [6] 샬럿이 아리아를 부를 때 모차르트는 플루트를 불렀으며, 1765년 1월에 모차르트가 6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샬럿에게 선물했다. [7] 원산지가 남아프리카 산 [8] 실제로 살럿의 딸들은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고 모후를 보필했다고 한다. [9] 1819년 3월 26일 생. 7남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의 장남. [10] 1819년 5월 24일 생. 4남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장녀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왕위를 물려받아 빅토리아 여왕으로 즉위했다. [11] 1819년 5월 27일 생. 5남 컴벌랜드와 테비오데일 공작 어니스트 어거스터스 공작의 장남. 훗날 하노버 왕국의 게오르크 5세로 즉위했다. [12] 웨일스의 샬럿 공녀 [13]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장녀이다. [14] 빅토리아 여왕 [15] 게오르크 5세 [16] 테크의 메리의 외할아버지다. [17] 테크 공작부인 메리 애들레이드 공주 [18] 숙부 윌리엄 헨리 왕자( 조지 3세의 동생)의 아들로 친사촌간이다. [19]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이애나의 6대조 외할머니인 엘리자는 스코틀랜드 시골 대가문의 아들이자 인도로 정착해 사업을 하던 테오도르 포브스의 저택 가정부로 일하며 그의 사생아 딸인 캐서린을 낳았다. 테오도르 포브스는 딸 캐서린을 스코틀랜드 본가로 보내 교육받게 했을 뿐더러 그녀 앞으로 많은 재산을 남기고 사망했다. 때문에 캐서린은 사생아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영국인 사업가와 결혼할 수 있었고, 외증손녀인 루스가 귀족인 퍼모이 남작과 결혼해 다이애나의 어머니인 프랜시스를 낳은 것. 아르메니아인 가정부의 후손이 겨우 6대조 만에 왕세자비까지 된 것이다. [20] 게다가 본인의 손녀랑 결혼한 남자 프란츠 폰 테크 역시 어머니로부터 순수 유럽인이 아닌 헝가리 마자르족의 혈통을 이어 받았고 그 조상중에 쿠만족의 족장이었던 어버 샤무엘이 있었으며, 그는 유대인이었다는 소문도 있었기에 유럽왕실에서 순수 유럽 백인 왕조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21] 마리 앙투아네트와 샬럿 왕비의 취향이 서로 비슷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영국식 스타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22] 이 중에서도 최악은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조지 4세로 아내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와 결혼한 지 1년 만에 별거하고, 이후엔 아예 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캐롤라인을 영국에서 쫓아내 왕비로서 대관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다. [23] 조지 3세는 자신의 딸들이 누이들처럼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여담으로 조지 3세의 딸들은 아무도 자식을 낳지 않았다. [24] 거의 모든 유럽 왕정에서는 사생아의 왕위 계승을 엄격히 금지했다. [25] 샬럿 공주는 장남 조지 4세의 유일한 정실 부인 소생의 외동딸로, 조지 3세의 손자녀들 중에서도 왕위 계승 서열이 가장 높았다. 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실상 미래 영국의 여왕이 될 것이 확실시 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