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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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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
이름 | 난징대학살 문서 |
Documents of Nanking Massacre / Les documents du massacre de Nank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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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소장 |
Central Archives of China The Second Historical Archives of China Liaoning Provincial Archives, China Jilin Provincial Archives, China Shanghai Municipal Archives, China Nanjing Municipal Archives, China The Memorial Hall of the Victims in Nanjing Massacre by Japanese Invaders |
등재유형 | 기록유산 |
등재연도 | 2015년 |
제작시기 |
1937년~
1938년 1945년~ 1947년 1952년~ 1956년 |
1937년 12월 17일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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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난징대학살, 남경대학살, 남경대도살 |
중국어 |
南京大屠杀(난징대도살) 南京大屠殺(난징대도살)[1] |
영어 |
Nanjing/Nanking Massacre(난징 대학살) The Rape of Nanjing/Nanking |
일본어 |
난징사건(南京事件)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난징대학살을 고발하는 책자 「난징의 강간」에 적힌 글귀
난징대학살을 고발하는 책자 「난징의 강간」에 적힌 글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해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군 패잔병을 수색하며, 6주동안 중국군 패잔병들과 난징 시민들을 죽인 사건. 지금까지도 일본 우익들이 끊임없이 부정하려고 노력하는 사안이며 이로 인해 중일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이다. 그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명[4]이며 최대 추정 숫자는 약 35만 정도이다.
일본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에선 한 학자가 약 9만 명 정도가 살해당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20~30만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난징 한 곳에서만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
2. 명칭 문제
중국에서는 南京大屠杀(난징대도살), 영어로는 Nanjing Massacre 또는 Decimation of Nanjing 일본에서는 ' 학살'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난징사건'으로 불렸는데 축소하려는 의도였다.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을 '오가사와라 사건'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하지만 근래에는 일본의 교과서에서도 '학살'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야마가와 출판사의 상세일본사(詳説日本史)와 도쿄서적에서는 여전히 난징사건(南京事件)이라고 부르지만 제국서원은 난징대학살, 기요미즈서원은 난징대학살사건, 야마가와 출판사에서는 상세세계사(詳説世界史)와 일본문화출판에서는 난징학살사건이라고 부르는 등이다. 또 2006년의 중일수뇌회담의 결과로 진행된 '일중역사공통연구'의 논문의 일본어판에서도 '난징학살사건'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3. 배경
1937년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난징점령 입성을 다룬 일본 아사히 신문 뉴스. 대부분의 전시 선전영화는 부대의 위민활동이나 대민지원 장면을 삽입해서 해당 지역을 해방시킨 해방군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상에는 민간인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킬 때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시작해 빠른 시일 안에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중국 정부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속전속결이 기본방침이었지만, 상하이 전투가 중국군의 저항으로 예상보다 길어지고 결국 우쑹 전투에서 중국군 피해의 절반이나 되는 큰 피해를 입고서야 승리를 거두게 되자( 중일전쟁 문서로.), 일본군은 참모본부의 불확대 방침도 무시하고,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군했다.
1937년 10월 9일 상하이가 함락된 후 국민정부 수뇌부들은 난징의 사수가 전략적, 그리고 전력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중국군은 이미 직전의 상하이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일본군도 중국군의 저항으로 피해가 있었지만 전투 막바지에 일본군은 타개책으로 중국군의 배후지인 항저우에 상륙하여 허를 찔렀다. 중국군은 급히 철수하여 포위섬멸 위기에서 겨우 벗어났으나 이 과정에서 전간기에 양성한 신식 정예부대를 비롯한 주력부대가 대타격을 입었다. 주력부대가 격파당한 상황에서 일본군을 저지하고 난징을 지켜낸다는 것은, 중국군의 상황으로는 사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유일하게 탕성즈 한 사람만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방어전을 주장해 난징 방위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았다. 11월 15일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시[5]으로 옮겨 철퇴하고 12월 10일 난징에 남아있는 중국군은 일본군의 최후통첩을 무시했는데 이에 일본군은 난징 점령작전을 개시했다. 일본군의 맹공에 피해가 크게 누적되자 12월 12일 탕성즈는 3일 간의 휴전을 통한 명예로운 항복을 하는 대가로 중국군을 철수시키는 방안에 대해 장제스에게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묵살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37년 12월 마쓰이 이와네가 결핵에 걸려 몸져눕자 사령관 대리로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 공략을 지휘하였다.
12월 12일까지 난징 일대의 중국군은 공세에 나선 일본군보다 수적, 질적으로 모두 열세였다.[6] 난징 방위군 총사령관인 탕성즈가 처음부터 난징 외곽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방어할 수 있는 여러 요충지역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방어 전략을 잘못 수립한 데다 화력과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12월 12일 일본군은 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켰고 일본군 전차대와 포병대의 공격에 성벽이 무너지면서 방어선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결국 탕성즈는 그날 오후 5시에 회의를 소집,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 다음에 참모들과 함께 8시에 우한으로 달아났다. 사령관이 사라진 난징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난징에 남아 계속 싸우거나, 난징을 어떻게든 벗어나는 등, 완전히 와해되었다.
양쯔강 주변은 살고 싶은 수십만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이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12월 13일 오전 4시에 난징의 정부청사가 함락되면서 난징은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자세한 사항은 난징 전투 문서 참조.
마쓰이 이와네는 일본군이 처음으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군대의 군기를 엄정히 유지할 것이며 난징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문화재 보존을 철저히 하고, 심지어 난징에 일장기도 게양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 소극적인 방침을 세웠으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대일본제국의 황군에게 지켜야 할 최저한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장병들을 부추겼다. 게다가 난징이 함락되자 " 난징에 살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바로 이 순간 탈출하지 못한 25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과 10만 이상의 중국군 패잔병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4. 상세
4.1. 전개
손쉽게 난징을 손에 넣은 일본군은 패잔병을 처리하기 위해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젊은 중국인 남자들'를 모아 처형하여 시신을 양쯔강에 버렸다. 안타깝게도 애시당초 인구의 90% 가량이 농업으로 먹고 살던 그 시대의 중국인들 중 모자를 오래 쓰지 않았거나 손에 굳은 살이 안 박힌 남자는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판해야 할 점이지만 칼로 난도질하거나 생매장까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전후에 난징 공략에 참전한 한 군인의 일기가 발굴되었는데, "심심하던 중 지나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는 문구가 등장하며 순순히 항복한 군인이나 일본군을 환영하는 민간인까지 보이는 족족 칼로 베거나 때려죽이는 등 참혹하게 살해하면서 달아나면 그건 또 그거대로 수상하다고 죽이고 그러면서도 왜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 달아나는지 알 수 없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본 사건에서 단일 규모로 가장 큰 사건은 무푸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대략 5만 7,000명의 민간인과 중국군 패잔병들이 죽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제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죽은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산에서 죽었는데, 이 일부 시체의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략 7천에서 8천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시체를 소각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군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양의 연료가 없었다. 실제로 무푸산 학살 후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시체를 태우려고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에 연료가 바닥나 결국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강에 버렸다. 샤관(下关/Hsiakwan)[8]으로 끌려온 중국인 포로들이 강을 따라 한 줄로 정렬해 있는 것을 목격한 종군 특파원 오마타 유키오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 번째 줄에 서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 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탕! 탕! 탕! 방아쇠가 당겨졌다. 포로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인 포로나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총검술 연습이나 목베기 시합에 사용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 제국 육군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100명인 중국인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다시 말해
100인 참수 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했다. 다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참수된 100인이 당연히
적군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사를 쓴 것이었다. 이후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기자는 이들이 민간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전해듣고 매우 허탈해했다. 심지어 이를 통해
진검으로 베는 기술을
연마한 잡것들도 있었다.100인 베기 초기록(엄청난 기록), 무카이 106 노다 105, 양소위 거기에 연장전.
당시의 실제 기사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투 도중 적 군인의 목을 벤 것이 아니면 100%
전쟁범죄니 두 장교 모두 당연히 전후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당했는데, 사형이 확정되기 직전까지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 기사를 펼치면서 자랑하던 이들이었지만 이 기사가 증거가 되어 자신들을 사형시키게 되자 왜곡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역시 전후 붙잡혔고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신문에 실릴 때는 아주 자랑스럽게 큰소리치던 이 인간도 본인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무죄를 주장하면서 왜곡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무카이, 노다와 같은 날 총살당했다.당시의 실제 기사
- [ 열람 주의 ]
- >난징 밖에 있는 연못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컬러 사진으로 찍었으면 더욱 섬뜩했을 것이다. 포로들에게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파게 하고, 포로는 그 구덩이 앞에 꿇어앉아 머리가 잘렸다. 많은 일본군은 칼솜씨가 아주 좋아 칼이 내리치는 순간 머리가 떨어지고 몸은 저절로 구덩이로 떨어진다. 상해에서 난징까지의 도처에서 여자
음부에
대나무 작대기를 쑤셔넣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상관은 우리에게 여자를
강간한 후 죽여야 한다, 되도록 때려 죽여라, 총과 총검으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일본 종군 사진기자의 증언
중국군 패잔병뿐만 아니라 여성도 학살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때 처녀건 유부녀건 소녀건 비구니건 가리지 않고 많은 여성들이 성폭행당했는데, 전후 재판에 따르면 약 2,000명의 여성이 성폭행당했다고 한다. 현재는 대략 8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도 상당수가 저런 식의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반항의 기미가 보인다거나, 탈출을 시도한다거나, 성병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죽음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며, 더 심하게는 특별히 이유가 없이도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독일의 전시강간과 연합군에 의한 독일 점령 기간의 강간에 필적하는 엄청난 규모의 강간 범죄다. 일련한 사건들로 인해 병사들 사이에서는 성병이 속출했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일본군 위안부다. 난징 곳곳에 위안소를 설치한 일본군은 중국과 조선, 대만 등지에서 여성들을 끌어들였고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넘어가 일본군을 따라갔던 수많은 여성들은 그 곳에서 수년에 걸친 위안부 신세가 된다.
숫자만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상기한 것처럼 문자 그대로 근친상간을 고문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고 하며, 아무 집이나 찾아가 어머니와 딸을 강간한 다음 울부짖는 모녀와 함께 우물 속에 던져버리고 그 안에 수류탄을 던진 다음 우물문을 막았다는 설도 있었다. 관련 자료(열람주의)
여자뿐만 아니라 어린 소년들도 강간한 경우도 존재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이 중국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에도 일본군들이 민가에 들이닥쳐 소년을 윤간하는 묘사가 등장한다.
당시 난징에 있던 서양인들의 기록과 제보에도 강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게다가 일본 제국 육군의 교범 자체가 민간인은 죽이고 그 지역은 모두 초토화하고 물자는 약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제6사단장 다니 히사오는 물론 같은 이야기를 다른 장교들도 태연히 떠들고 다니던 것이 당시 일본 육군 내의 분위기였으니 중국에 대한 멸시감+누적된 전쟁피로+교범에도 쓰여 있는 학살과 강간, 약탈의 공인, 부조리로 가득찬 전근대적인 군복무로 인한 사병들의 억압된 불만이 한꺼번에 결합하면서 제노사이드 인종청소로 폭발한 것이 난징 대학살이다.
4.2. 난징 안전지대
당시 나치 당원이자 지멘스의 사원이었던 독일인 존 라베가 주도해 난징에 남아 있던 외국인 선교사, 기업가, 소수의 조계지 경비대 소속 독일군, 외교관들과 같이 '난징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했는데 이는 난징 전투에 앞서 있었던 상하이 전투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만든 '상하이 안전구'를 본뜬 것으로, 난징 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해 약 2~30만 명의 중국인들을 일본군의 만행에서 보호하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자세한 것은 존 라베 문서로.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치 부역 혐의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존 라베 외에도 안전지대를 지킨 외국인들 중 상당수는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진링 여자대학에서 여성들을 지키고 기록을 남긴 미국인 윌헬미나 보트린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쳤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끝내 1941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일한 외과의사로 부상자들을 치료한 로버트 윌슨은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평생 시력 저하와 발작, 악몽을 겪었다. 그 외에도 발작 및 일시적인 기억 상실 등 정신질환 증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흑역사에 가깝지만 냉전으로 서방 국가와 대립할 때 중국[10]에선 1950년 신화일보 보도를 통해서 존 라베를 제외한 서방 국가 인물들의 공로를 무시하고 오히려 서양인들이 일본군과 협조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중국인들을 일본군의 칼밥으로 던져줬다는 등의 악질적인 반서방 프로파간다를 퍼뜨리기도 했다. 다행히 냉전이 끝나고 아이리스 장 등 난징 대학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들의 공로가 알려져서 현대에는 중국에서도 안전지대를 지킨 외국인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당시 안전지대 구축에 협력했던 선교사들 중에 조지 애쉬모어 피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인물로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주중 미국대사와 여운형을 접촉시키거나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은신처를 제공하였으며 무엇보다 훙커우 공원 의거 당시, 윤봉길을 직접 자신의 차에 태워 홍커우 공원까지 데려다 주고 이후 김구, 엄항섭, 안공근, 김철을 상하이에서 탈출시켜 주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락사항을 미국 전략사무국(OSS)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었다.
5. 이후
병석에 있다가 일어난 마쓰이 이와네가 한 말이다.
대력 6주가 지나고, 1938년 봄에야 종결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규모만 줄어들었을 뿐 전쟁범죄와 생체실험 같은 일들은 있었다.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당시의 주석인 마오쩌둥은 호기롭게 "우린 승전국이니 배상 따위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에선 중국에 배상금으로 최소 500억 달러는 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본 총리가 중국에 방문하고 배상금 문제까지 땡처리했단 뉴스를 들은 온 중국이 경악에 휩싸였고 특히 난징은 온 도시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울음바다가 되어 항의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지만 중국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공에서 통할 리가 없었다.
다만 마오쩌둥이 한 배상을 받지 않겠다는 발언 자체는 단순히 이겼으니 돈 필요 없다는 똥배짱이 아니라 국제외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결정에 해당했다. 당장 난징 대학살의 피해국이었던 대만도 일본으로부터 사실상 배상을 포기한 바가 있으며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으로부터 갓 상임이사국 자리를 뺏어 온 입장에서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수교국을 늘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이 대만과 단교할 뿐만 아니라 배상금까지 물어주면서 중국과 수교한다는 것은 일본의 국내정치에 상당한 부담을 안기는 일이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정치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배상금을 포기한다고 한 것이다. 당시 대만도 난징 대학살에 대해 일본에 어떠한 배상 요구를 하지 않았으므로 중국 측이 다시 이를 문제삼기는 어려웠던 측면이 많았으며 발언 자체는 마오쩌둥이 하긴 했지만 1970년 이후 마오쩌둥은 루게릭병으로 거동이 불편했고 일선 실무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중수교-미중수교는 국정을 총괄하던 저우언라이의 결정이었다. 사실 마오쩌둥의 일본 관련 발언 자체는 배상을 받지 않겠다는 발언보다는 일본이 침략해 줘서 감사하다는 쪽을 문제삼는 게 더 맞긴 하다. 심지어 중일수교는 소련이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 도쿄 재판에서 황실의 일원었기 때문에 기소를 면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의 죄를 뒤집어 쓰고 중지나방면군 총사령관 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었던 마쓰이 이와네가 사형당했다. 이후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일본 정부에 의해 황적이탈 및 자택 몰수 등의 처벌을 받았다. 제6사단장으로 대학살에 직접 참여했던 다니 히사오(谷寿夫) 중장도 1947년 2월 6일 난징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4월 26일 총살되었다.
중국계 미국인 2세인 아이리스 장은,《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12][13]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14] 이 책은 서구 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장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 대사를 생방송으로 반박하면서 미국 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한국어/영문 할 것 없이 위키백과 항목의 상당수와 나무위키의 이 항목의 많은 부분도 이 책을 참고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런 왜곡 등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였던 아이리스 장은 이후 일본 극우의 표적이 되었으며 상당한 살해 협박과 위협에 시달렸다. 후속타로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각종 막장 사례와 잔학한 실태 때문에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 했다고 하며 결국 2004년 11월 9일 우울증으로 인해서 자살했다. 한편 일본 극우들은 "아이리스 장의 유서에는 일본 극우에 관한 기술은 없다"면서 장이 자살한 건 자신들의 협박 때문이 아니라며 우기며 더 나아가서는 "장이 거짓말을 꾸며낸 데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했다"고 주낭하고 있다.
2010년 중국 난징에서 난징 대학살 73주년을 기념하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 통곡의 벽'이라는 대규모 추모식을 열었다. 홀로코스트만큼 중국인들에게 매우 가슴 아픈 사건이기 때문에 바이두 백과의 "南京大屠杀"(난징대도살) 문서에 들어가면 페이지 전체가 흑백으로 되어있고[15] 중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나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넷 우익들의 반달을 우려해 일반 회원이 편집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중국 정부는 2014년 1월에 난징대학살 관련 기밀 문서를 공개하였고 6월에는 위안부 관련 자료와 더불어 난징대학살과 관련된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하였다.
2015년 10월 10일,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22년 7월에 난징의 쉬안짱사에 마쓰이 이와네 등 일본 전범 4명의 위패가 2018년부터 지난 2월까지 이 사찰에 봉안됐던 것으로 알려져 중국인들의 분노를 샀다. # 이후 중국의 종교당국이 전수조사하는 등 강도 높은 조사를 가졌는데 우아핑이라는 32세 여성이 일본 전범의 위패를 봉안할 것을 의뢰한 것으로 밝혀져 붙잡혀서 조사받게 되었다. # 본인은 난징 대학살의 진상에 대해 알게 된 뒤 계속 악몽에 시달리자 '고통에서 벗어나자'라는 생각에 전범들의 위패 봉안을 의뢰했다고 말했다.
6. 일본
일본에서 난징 대학살을 대하는 자세는 3가지로 나뉜다. 대규모 학살을 인정하는 대학살파(大虐殺派), 학살을 아예 부정하는 부정파(不定派) 혹은 환상파(まぼろし派), 그리고 이 중간에 있는 학살은 있었으나 사상자의 규모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는 중간파(中間派)가 있다.이제까지의 일본 여론에서는 대학살파가 주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본 극우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서 중간파와 부정파가 그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말이 있다. 관련기사
일본 내부에서의 대학살파/부정파/환상파 간의 논쟁 상황은 보수 언론 미디어워치가 일본어 위키백과의 관련 항목들을 한국어로 대거 번역하여 공개한 바 있으므로 개략 확인 가능하다. ( 난징사건 / 난징사건 논쟁 / 난징사건 논쟁사 / 난징사건의 증언 / 난징사건의 피해자수 / 100인 참수 경쟁 )
6.1. 대학살파
6.1.1. 학계
일본 학계에서 현재까지는 주류.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 왜곡 시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이들이 일본 내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그래도 어쨌든 제대로 역사를 인식하는 정상인들이며 학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일본에서도 No more Nanjing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행태에 반대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비정부단체라고 무시만 할 것은 아닌 게, 이 단체가 발촉한 지 얼마 안 되어 난징 대학살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가 나왔다.
당연히 일본 학계에서도 난징 대학살이 정설이다. 이건 중국에서도 알고 있다. 난징 대학살을 소설이라고 하는 책이 나오자 많은 일본 학자들이 반박했으며 이건 중국 논문에도 설명되어 있다.[16] 난징 대학살의 대표적인 학자는 호라 토미오, 후지와라 아키라가 있으며 후지와라 아키라는 실제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었던 학자로서 치밀한 실증연구로 부정파는 물론 중간파까지 이기고 대학살을 학계로 중론으로 만든 것으로 명성이 높다.[17] 난징 대학살 기념관장 朱成山 연구원도 후지와라 아키라를 전문적인 역사지식을 갖춘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라고 평가했다.[18] 더불어 그는 후지와라 아키라와 더불어서 호라 토미오와 같은 학자들의 글을 우월한 일등급 저서라고 평가했다.[19]
당연하지만 일본 난징 대학살 논쟁의 승자는 후지와라 아키라와 호라 토미오 세력이다. 난징 대학살이 현재 일본 학계의 정설이고 이 학자들은 중국과 세계의 학자들도 인정한다.
6.1.2. 문화
모토미야 히로시의 《나라가 불탄다》는 이 사건을 넣었더니만 항의를 받아 작가가 실의에 빠져 연재를 빨리 끝내 버렸다. 이 만화가 일본의 자칭 순수한 범아시아주의와 일본 중심의 대동아공영권의 대립과 좌절을 그려서 고까운 장면이 많음에도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오히려 작중에서는 킬킬대며 일본인에게 오물을 뒤집어씌우는 식으로 비겁하게 중국인이 묘사되거나 이시와라 간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등 괴상한 우익적 표현도 상당 부분 있는데 이런 조치를 당한 것이다.무라카미 하루키의 《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상당히 사실에 가깝게 언급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극우들에게 많은 항의를 받았다.
그나마 테즈카 오사무의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는 그 실태에 대해 꽤나 자세히 언급되지만 만화 자체가 실제 역사보단 픽션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구성이라 작중 나오는 '히틀러 유대인 음모론'처럼 학살 부분도 테즈카가 각색한 픽션으로 알고 있는 일본 독자가 많다.
6.2. 부정파
당시 난징의 참상을 찍은 일본 기자들의 사진 중 상당수가 검열로 전쟁 후에야 나오게 되었다.[20] 어느 기자는 관련 기사 및 소설을 쓰다가 고등계 경찰에 끌려가서 처참한 꼴을 당했다.[21]전범 재판에서도 중요 증거로 인정받았고 심지어 일본의 역사학자들조차도 이 사건을 실제 사건으로 인정을 하고 있지만 극우 세력은 아직도 이걸 부정하고 있다. 아예 부정하는 측은 학살 자체가 없었다는 게 기본 입장이다.[22] 사망자는 대부분 전쟁에 휘말려 죽은 민간인, 탈출하다가 배가 전복된 군인들이라는 것. 혹은 더 나아가서 중국군이 시민들을 학살해 놓고 일본군이 죽였다고 누명을 씌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23]
이 난징대학살 부정파론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아지아대학 교수가 있다. 이 사람은 대표적인 극우파로 대표 저작이 < 난징 사건 증거사진을 검증한다.>다. 이 책의 내용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사진에 나와 있는 것들을 분석하고 '이래서 날조' 이런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는 '중국인이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다닌 것.' 혹은 ' 장제스의 국민정부의 날조극' 이라고 쓴 것이다. 물론 그게 근거가 될 턱이 없었고 결국 이 작자는 난징 대학살 생존자한테 제대로 걸려서 중국 난징 대법원에 법정소송에 강제로 끌려가 패소당했다. #
이들의 주장을 들면 다음과 같다.
- 난징 시내의 인구문제.
- 반론: 난징 시내의 인구문제는 그 범위상의 문제고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적십자 사 및 안전지대의 자료를 보면 학살 자체가 없기보다는 숫자의 차이에 불과하다. 몇만이라도 학살당하거나 강간당하는 것과 인구문제는 무관한 문제다. 사실 이 기준이라는 게 '학살의 지역이 난징 시내인가? 난징을 포함한 주변 지역인가?'로 달라진다. 일반적인 일본의 시각으로 나오는 도시의 규모를 보면 사망자 수십만은 어렵다[24]는 게 이런 논지다. 실제로 난징 학살은 천황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다. 일반적으로 이런 시각을 가진 쪽은 난징 시내에서의 학살만 규정한다. 중국 정부의 입장은 그 주변지역도 같이 보는 셈이다.[25] 말도 안 되는 과장이 아니면 어차피 주변에서 벌어진 학살이라면 포함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몇십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한 것. 더불어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날의 남경시의 범위와 당시의 남경직할시의 범위는 10배가 넘어갈 정도로 차이가 난다. 중화민국 시절의 남경시는 559.28km2만, 오늘날의 남경시는 6,582.31km2다. 둘 중 어디의 기준을 적용할지에 따라 그만큼 수치도 달리 나올 수 있다. 참고로 중화민국 시절의 남경시는 양쯔강 유역을 포함하지 않으나 오늘날의 남경시는 대한민국의 서울 한강처럼 양쯔강 일대를 포함한다. 비슷하게 흔히 600만으로 통칭되는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들도 강제수용소에서 가스학살로 죽은 사람들은 120만명 가량이다.
- 미국과 중국이 제시하는 사진은 대부분 조작이거나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복식 등이 다르다는 점.
- 여러 증언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전혀 그런 사건이 없었다는 점.
- 반론: 당장 위의《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부터 읽어 보자.
- 한도 가즈토시[29]의 의견: 당시 부대의 상황이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난징 진입때 남쪽으로 진입했던 부대는 별 다른 일이 없었다.
- 반론: 그러나 참전증언자로서는 자신이 겪은 일만 본다면 얼마든지 다른 주장이 가능하다. 오히려 참전 증언자로서 학살을 증언하는 사람도 대단히 많고 중립적인 입장인[30] 외국인들이 본 일본군의 학살 증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극우세력들은 외국인 안전구역에서 참살된 민간인만 피학살자 수에 넣는다. 심지어 중국군이 민간인 복장으로 도망가다 죽었고 민간인들은 그 옷을 주워입다가 중국군에게 참살되었다는 논리로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피학살 시체 대부분은 중국인이 죽이고 죄를 일본에 덮어 씌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 2ch의 넷 우익들은 난징 대학살은 한국인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중국 웹에 퍼트려 한국과 중국을 상대로 이간질을 시도하기도 했다.[31][32] 그런데 이것이 중국인들에 의해서 "날조"로 드러나자 2ch 넷 우익들이 의식했는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말을 바꿔 버렸다.[33]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혼란 상태에 빠진 난징 시민들이 한간[34] 색출 사냥 과정에서 일본군이 난징성에 입성해 치안유지 등에 힘을 기울였다.'는 식으로 기술해 만행을 전면 부정하는 등 오히려 미화하고 있어서 문제다.
난징대학살에서 일본군 소속 조선인 부대가 대거 가담했다는 인터넷상의 유언비어에 대한 반박글들. # #
일본 아마존닷컴 유저들은 난징 대학살을 다룬 <난징의 강간>을 날조라며 부정하고 모욕하고 있다. 중국 아마존닷컴 유저들과 강하게 충돌하는 것은 덤. 일본 아마존 평가.
비단 일본인들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일부 와패니즈들 중에도 난징 대학살은 일본을 국제적으로 망신주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류가 존재한다.
난징 대학살 날조설에서 더 나아가 중국군 민간인 학살설까지 주장하는 글(번역문) 링크의 블로그 게시글 원문(원번역문)은 비공개 상태다. 해당 블로거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사건을 예로 들면서 '우리(한국인)가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에 대해 알아볼 때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터키측, 아르메니아측의 입장을 모두 들어보듯 난징 대학살 사건도 과거의 역사로 인한 감정은 접어두고 정확한 판단을 위해 일본측, 중국측 모두의 입장을 들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게시한 것은 일본의 극우 인사들도 넘쳐나는 반박 사료들로 인해 내세우지 못하는 '난징 대학살 날조설'에 '중국 병사 민간인 학살설'까지 펼치는 인터넷 게시글 번역문뿐이다. 2차 게시자인 블로거 본인은 일본측의 것이든 중국측의 것이든 주장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되어야 한다며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한 것 같으나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도 중국인들만 있었던 게 아니며 가해자인 일본의 극우파 인사들도 근거를 갖춘 반박이 불가능해 '과장된 것이다' 정도의 주장만 했다. 이미 가해자는 누구였고, 피해자는 누구였고, 피해상황의 규모와 정도[35], 정황까지 다 결론이 난 참사를 다시 '양쪽의 입장' 운운하며 끌고 와 정작 근거라고 올리는 건 일본[36]측 만의 입장이 담겨 있는 인터넷 게시글 번역문[37] 뿐이니 저 블로그 게시글은 양비론적 입장에 입각하여 적힌 것이라 할 수도 없다.
6.3. 중간파
일본 극우의 "그런 사건 없었다, 중상모략이다."라는 주장과 별개로 "중국 국내에서도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않았고, 중국 정부의 선전 활동으로 내용이 과장되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긴 있다. '30만은 오버고 실제로는 5~8만 정도가 아닌가?' 라는 내용들이다. 일본의 극우 언론사 산케이신문도 2015년 2월 16일자 기사에서[38] 30만명설은 학술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고 서술했다.실제로 전 세계에서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중국의 기록을 100% 신뢰하는 쪽으로 난징뿐 아니라 주변 도시 지역에서의 학살 범위를 포함하는 학파[39]와 실제의 인구조사 및 남경 안전지대의 인구 수와 증언을 분석해서 난징 시내에서 학살당한 피해자만 계산해 8만에서 10만 정도로 보는 파가 있다. 이 두 학파의 공통점은 피학살자의 수에는 관계 없이 일본이 벌인 학살이라서 일본의 100% 잘못이고 양 측의 공동조사및 일본의 사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40]
실제로 전후에 실질적인 통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대략적인 추산치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중국측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8만 안팎으로 보는 의견이 대다수다. 위에서 말하는 '부정파와 똑같은 사람들'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위에서 '8~10만'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이중에서 '당시 중국군이 도심지를 방어선으로 사용하는 시가전 상황시 일본군이 군인으로 오해해 민간인을 죽였거나 실제로 밀정(스파이) 역할을 하던 민간인들을 색출하는 작업에서 오인해서 학살하는' 이러한 논리도 있지만 이것은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자. 이들이 말하는 것은 '인구 통계치가 명확하지 않고 중국 측의 자료에 신빙성이 결여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정해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난징 사건 자체도 비극이지만[41] 더 비극은 학살 피해자의 후손들은 아직도 중국 정부에 의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42]
7. 기타 국가
7.1. 미국, 유럽
미국 같으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국과 같이 연합하여 일본과 싸워 마침내 중국이 중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국가다. 때문에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미국의 노년층들은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그 중에는 종군 기자로 활동하며 중국인들과 연합하여 난징의 상황을 취재하여 일본군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증거 자료로 보관하기까지 한 사람도 있다..유럽 국가들도 미국과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약간 의외의 사실은 나치당원이었던 존 라베가 중국인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43] 존 라베는 독일이 일본을 말려줄 것이라고 믿고 히틀러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썼지만 편지는 히틀러에게 전달되지도 못했고[44] 이런 행동이 문제가 되어서 본국으로 불려들어가는 처지가 된다.
러시아는 소련 시절부터 대학살파 의견이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아예 맹목적으로 반서방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을 밀어주면서 빼도 박도 못한 대학살파 측이다. 러시아도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민간인 학살을 겪었고 시베리아에 일본군이 출병한 러시아 내전 당시에도 민간인 학살을 연해주에서 여러 차례 겪었다.
7.2. 대한민국 및 아시아
대한민국은 노태우 정부 이전까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지 않아 일본 편을 들었다는 낭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중화민국은 1990년까지 한국의 맹방이었고 그 중화민국 정부가 바로 이 학살의 피해국이다! 1988년에 나온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난징 대학살이 "남경대학살"이라고 짧게 다루어진다. 중화민국이 1980년대까지 한국에선 자유중국 즉 " 중국"을 뜻했고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은 " 중공"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역사적 사건은 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모두 제대로 다루었다.다만 인터넷상에서는 그냥 중국인이 대량으로 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 극우들이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 항상 쓰는 말들인 난징 페스티벌, 난징 대축제[45] 등을 그대로 베껴 와서 심각하게 조롱하는 혐중 성향 네티즌들이 있고, 2010년대 후반~2020년대에 들어 안 그래도 그 동안 쌓이던 한국의 혐중 감정이 제대로 폭발하면서 학살을 조롱하는 글이 많아졌다.
한국 외의 아시아 국가들도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타이완에서는 오늘날 타이완을 지배하고 있는 중화민국 정부나 중국 대륙 출신의 외성인들은 당연히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며 난징 대학살에 이를 간다. 하지만 반대로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일부 극단적인 본성인들은 2.28 사건으로 인해서 중국국민당과 중국 대륙에 대한 반감이 아주 심하다.[46] 극단적인 이들 중에는 혐중으로 난징 대학살 사건을 찬양하면서 그 피해자들을 조롱하거나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 일본을 옹호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 극우 쪽에서 난징 대학살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주장들에도 동조하는 경우가 잦다. 대만에서 난징 대학살과 관련하여 일본을 비판하는 의견과 일본을 옹호하는 의견이 동시에 나오는 이유는 이러한 대만 내에서의 외성인과 본성인의 갈등에서 기인한다.
다만 본성인이라고 다 대학살을 조롱하는 것은 아니고 당연히 진심으로 추모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대만 사회에서도 난징 대학살의 부정은 중국 대륙, 싱가포르, 해외 화교 사회와 마찬가지로 금기시되며 대만 정부 차원에서도 난징 대학살과 일본의 전쟁 범죄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본성인=대독파라는 공식 자체가 잘못되기도 했고.[47] 그리고 대독파라고 다 난징대학살을 부정하거나 조롱하는 것도 아니다.
7.3. 그 외
아프리카, 중남미, 오세아니아 등 전반적으로 난징 대학살 사건에 대해서 대학살파 입장을 표명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한때 반중 감정이 심했던 아프리카에서는 부정파 의견을 따른 적도 있었다. 물론 2010년대부터는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기는 하지만.8. 중화권과의 마찰
일본이 그리도 애쓰는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애로사항이 꽃피게 만들고 있는 문제다.[48]상임이사국인 중국이 이 문제와 댜오위다오/ 센카쿠 열도 분쟁을 들먹이면서 결사반대하기 때문인데 이스라엘이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에 별로 반대하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다.[49]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 관련 일본 측 사료들을 모두 모은 자료집을 발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측이 원 사료의 사진촬영이나 복사를 강력하게 거부하는 통에 중국의 연구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꼈다고 한다. 현대 역사학에서는 유일한 자료가 아닌 한 필사된 자료의 신빙성은 상당히 낮게 보며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의 주관적 관점이 개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맞다면 일본이 지금도 미국 빽을 믿고서라도 원본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2012년 2월 20일 난징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당시 나고야시 시장이었던 카와무라 타카시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던 일이다."라는 망언을 하는 바람에[50] 결국 난징시장은 나고야와의 자매결연을 맺는 것을 전격 취소하기로 조치했다. # 다행히 일본 정부 측에서는 이에 대해 중국 정부에 사죄하고 난징 대학살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라는 종래의 의견을 확고히 했다. #
심지어 친일 국가라고 일본에서 좋아한다는 타이완에서조차도 난징 대학살 사건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타이완을 지배하는 중화민국 정부가 대학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당시 난징은 중화민국의 수도였다.[51]
2014년 6월 일본 정부는 중국의 위안부 및 난징 대학살 자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철회를 요구하였지만 당연히 중국 정부는 강하게 거부했다. 2015년 10월에 해당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반발하며 극도의 유감을 표하였다. 카와무라 야스히사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10일 담화를 발표하고 “난징 대학살을 둘러싸고 일·중 간에 견해 차가 있고 이 문건은 중국의 일방적 주장에 따라 신청된 것으로 완전성이나 진정성에서 문제가 있다”며 “중립·공정해야 할 국제기구로서 문제가 되는 일이며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일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네스코의 지원금을 끊을 수도 있다[52]라며 협박하는 등 뒤끝을 보여줬다. 당연히 이에 대해서 세계인들의 반응도 매우 부정적이다.
결국 일본이 퉁저우 사건을 내걸었다. #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기습공격한 걸 학살이라고 주장했다.
9. 관련 미디어물
- 황시 - 2008년작.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독일의 합작이다. 어거스트 러쉬에 등장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주인공 ' 조지 호그'로, 주윤발이 조력자 '잭'으로 등장한다. 영국인 종군기자인 조지는 중국에 들어와 일본이 벌인 난징대학살을 보고 충격받고 경악하며 이것을 세상에 고발하고자 하나, 일본군에게 덜미를 잡혀 참수되려는 순간 잭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가 일본군들을 몰살시키고, 정말 중국인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다면 60명의 고아가 모인 '황시'로 가 보라는 조언을 던지며 조지는 황시 고아들을 돌보던 여자 리 피어슨과 함께 고아들을 전쟁의 참혹함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한다. 엔딩크레딧에 실화의 주인공인 중국인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그 영국인 종군기자는 자신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었다고.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은 초반에만 등장하는 사건의 발단부 같은 역할이고 황시로 가게 된 후부터는 고아들과의 일상과 전쟁으로 인한 아이들 강제 징집 등의 중국과의 마찰 등을 다룬다.
- 존 라베 - 2009년작. 독일인 플로리안 갈렌베르거 감독의 작품이고 독일/프랑스/중국 합작 영화다.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중국판 쉰들러로 불리는 존 라베에 대한 작품이다.
- 난징! 난징! (南京! 南京!) - 2009년작. 영어 제목은 City of Life and Death(삶과 죽음의 도시). 중국의 루 추안 감독이 만들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93% 스코어를 받았다. 다른 난징 영화와 달리 서구에서도 평가가 좋은 편. 존 라베가 나온다.
- 진링의 13소녀 (金陵十三釵) - 2011년작. 고전소설인 홍루몽의 등장 인물들인 금릉십이채에서 제목을 따왔다. 영어 제목은 The Flowers Of War. 배트맨으로 유명한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을 맡았다. 예고편 스틸사진 공개당시 베일이 존 라베를 모델로 한 성직자라고 잘못 알려졌으나, 실은 미국 선교사 미니 보트린의 일기에 영감을 받아 쓴 옌거링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며 크리스천 베일은 여러 이유로 성직자 행세를 하게 된 장의사 역할을 맡았다. 중국의 감독 장예모가 감독을 맡았다. 영상미는 뛰어나지만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는 별로 없는 중화 애국주의 프로파간다 영화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 남경 외국인 구역으로 간신히 탈출한 중국군 부상병과 기생들이 크리스찬 베일의 보호로 여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 점령군 장교는 자신들의 승전 기념 연회에 초빙할 여학교 합창단원을 모집하게 되고 결국 기생들이 여학생들을 대신해서 여학생으로 분장해서[53] 점령군에게 간다는 스토리. 2년 전에 나온 루 추안 감독의 난징! 난징!에 비해 서구 평론가의 평가는 영 좋지 않다. 일본군이야 당연히 답이 없는 악마집단으로 묘사하였지만 중국군경우엔 애국심을 너무 강조한다. 심지어 단체로 자폭공격하는 장면에선 '당시 중국인들은 애국심이 있어서 당연히 그렇게 했다'는 게 직접 내레이션으로 나온다. 2009년작 난징! 난징!에 비하면 매우 단순하고 프로파간다 색채가 강하다. 그나마 장예모의 전작에서 보여주는 미적인 아름다움이나 웅장한 화면구성은 꽤 볼 만하다. 문제는 그런 미적인 아름다움을 즐길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점.
- 49일·제(四十九日·祭) - 2014년작 후난 위성TV에서 제작한 드라마.
- 난징 1937(南京1937 Don't Cry, Nanking) - 1995년작 영화.
9.1. 그 외 매체
모토미야 히로시의 "나라가 불탄다"는 난징 대학살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극우의 항의를 받아 연재가 중단되었다.그린호넷의 파트너인 케이토는 <그린 호넷: 오리진>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일본군에 입대했지만 난징 대학살의 참상을 보고 빡쳐서 자신의 부대와 부대장을 살해한 뒤 일본군의 군수공장 등을 사보타지하다가 부상을 입은 걸 그린 호넷이 도와줘서 미국으로 피신했다는 설정이다. 케이토는 원래 일본인으로 설정되었지만 40년대에는 한국인이나 필리핀인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난징 대학살 등으로 일본인의 이미지가 영 안 좋아져서 그렇게 되었다.
바이오쇼크에서 이수종 박사는 난징에서 거주하다가 쳐들어온 일본군에게 아편을 팔면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은하영웅전설의 블러디 나이트도 난징대학살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맨발의 겐에서 구라모치라 하는 인물이 구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을 때 중일전쟁 때 중국 군인과 민간인을 마구 학살했다고 자랑하는데 정황상 이 사건으로 보인다.
9.2. 관련 문헌
- 아이리스 장, 난징대학살
- Jean-Louis Margolin, e réévaluation du massacre de Nankin #
- 니시노 루미코, 731부대 이야기
9.3. 관련 문서
- 학살
- 대량학살
- 마닐라 대학살 - 이쪽도 난징대학살에 묻혀서 그렇지 사상자 숫자는 난징대학살에 비해서도 결코 적지 않다. 마닐라 대학살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벌인 것이라면 난징 대학살은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을 때 벌인 것이란 점에선 난징대학살이 훨씬 엽기적인 점이라 할 수 있다. 실제 난징대학살이 다른 일본군의 범죄보다 관심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규모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을 때 벌어진 점이었다는 것이다.
- 홀로코스트
- 일본의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 - 폭탄과 소이탄 등을 민간인 지역에 쏟아부어 수많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 100인 참수 경쟁
- 존 라베 - 난징에 남겨진 50~60만명 중에서 반수가량 살아남은 건 순전히 그의 공이다. 해당 문서로.
- 사카이 사부로 -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하함과 동시에 난징 대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는 발언을 했다.
- 인종청소
[1]
바이두 백과의 문서이다. 맨 위의 사진이
국민혁명군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임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것이고, 문서 전체가 암울한 분위기의 흑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2]
한어병음으로는 Qián shì bù wàng, hòu shì zhī shī.
[3]
원전은 "
사기
진시황본기"
[4]
출처 링크1,
출처 링크2.
[5]
중국 삼국시대에 파, 영안으로 알려진 그 곳
[6]
난징 전투에선 일본군이 중국군보다 병력이 훨씬 많았다. 중국군이 최대 15만, 일본군은 최대 20만.
[7]
사건 당시 결핵으로 본토에서 요양 중이었다.
[8]
당시 난징 시내 북쪽의 지역으로, 양쯔강 남안에 있었다. 한국 웹에는 아이리스 장의 저서 <
난징 대학살>에서의 번역명 '시아크완'으로 알려져 있다.
[9]
참고로 리슈잉은 생존해서 이 사건의 증언자로 활동했으며, 난징 대학살을 조작이라고 주장한 일본 우익 작가를 상대로 미국 법정에 소송을 걸어 승소하기도 했다. 2004년 지병으로 죽었다.
한국 기사
[10]
여기에서의 중국은
중국공산당 치하의 중국으로, 난징학살에서의 중국은
중화민국 국민정부로 그 주체가 다르다.
[11]
이후 이 일로 인해 부하 관리 실패로
도쿄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사실 부하들의 죄로 사형을 당해 억울한 감도 있겠지만 본인이 상하이에서 직접 민간인 총살을 명한 적이 있어서 아예 무죄라고 할 순 없으나, 종신형에 그친 전범들도 소수의 민간인을 살해한 전적이 상당하기때문에 부하 관리 소홀의 책임에 더 큰 무게가 실어진 감이 없지 않아있다. 재판을 담당한 연합군 측 검사는 "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마쓰이의 죄는 부하들의 죄였다. 종신형으로 충분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2]
2006년에 내용이 더 보강되어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현재 절판)이라는 책이 나왔다.
2014년《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이 재판되어 나왔다.
[13]
원제: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1997
[14]
다만 지나치게 감정적인 쪽으로 흐른 면이 있으며 전문 역사학자가 아니다 보니 교차검증에서 여러 약점이 드러나 우익들이 이를 근거로 난징대학살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 난징 대학살을 긍정하는 일본 학자들도 이 점을 지적했다. 이후 아이리스 장의 후속작들은 성장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였다.
[15]
원래
바이두는
중국에서 가슴 아프다고 여겨지는 사건에 관한 검색을 하면 페이지 전체가 흑백으로 뜨도록 되어 있다.
[16]
"这些论调都遭到日本洞富雄教授、藤原彰 教授、本多胜一记者等正直学者的驳斥" - 高兴祖, 驳“虚构”论者对南京大屠杀事件的新攻击. 호라 토미오, 후지와라 아키라 같은 정직한 학자들이 반박을 했다는 내용이다.
[17]
그 예로 일본군 측 기록에 대한 치밀한 편집이 있다.
李一杰 吴绍沅, 日军士兵战场日记译者序
[18]
肯定派又被称为“东京审判派”,其学者主要以洞富雄、藤原彰和笠原十九司等具有历史学专业背景,理性和学术性较强的学者组成的“南京事件研究调查会”为代表。"中日邦交正常化对南京大屠杀史学研究与传播的影响与展望, 朱成山
[19]
在中国研究南京大屠杀方面还是空 白的时候 日本有不少人都已经出了有关南京大屠杀 的书籍 。如洞 富雄 、藤原彰 、本多胜一等 ,他们认为南京大屠 杀是肯定发生过 的事。但是 ,由于 日本战后教育的 误导,日本现在不少人 ,包括 日本政要对南京大屠杀 的认知是十分糟糕 的。-
http://cul.cssn.cn/sjs/sjs_sjxds/201506/W020150611361659760718.pdf
[20]
흔히 접하는 사진의 원판들 옆에는 빨간 도장으로 검열이 찍혀 있다.
[21]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22]
이들이 제시하는 숫자는
미군 진주 때 죽은 일본 민간인보다 적다고 한다.
[23]
극우
에로게 제작사인
앨리스 소프트에서 제작, 판매한
대제국에서는 이 조작설을 채용했다.
[24]
히로카네 겐지의 만화 "정치 9단"의 주인공의 시각이 이렇다.
[25]
굳이 예를 든다면
서울에서 북한군에 의한 학살이 벌어졌는데 그 범위를
종로구까지 하는지,
양천구까지 하는지의 문제다. 아니면 아예
광명시나
부평구 쪽에서 학살당한 인원도 넣는지의 문제다.
[26]
아예 말도 안되는 복식이 아니라 칼라가 이상하다는 식의. 개중에는 "난징이 함락된 게 12월(겨울)이었는데 사진에 나온 일본군은 여름 군복을 입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본의 저널리스트가 취재한 당시 난징 주둔 일본군 소속 장병이었던 노인이 "
동절기인데 보급이 제때 안 와서 겨울인데도 여름 옷 입고 다니고 그랬다"고 직접 증언함으로써 논파됐다.
[27]
오히려 어설플 수밖에 없는 게 맞다. 일본군의 진검술인 군도의 조법은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만 가르쳤고 모든 장교와 부사관이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진검술이 전군에 배포된 것은 1942년이다. 즉 난징대학살 때는 모든 군인이 진검술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설픈 자세는 오히려 신빙성을 크게 강화시키는 근거가 된다. 연기라면 오히려 정확한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28]
다만 인정할 것은
흑태양 731의 사진이나 진짜
군벌 사진을 실제 사진으로 소개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29]
다만 그가 난징대학살 자체는 인정하며 국가 차원에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억하자.
[30]
심지어 존 라베처럼
동맹국(
추축국) 소속의 나치당원도 있다.
[31]
2ch 넷 우익들이 퍼뜨린 '
조선인 학살자 명단'을 면밀히 살펴보면 대부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군, 경찰 부분에 있는 이름들 그대로 퍼 온 것들이다. 참고로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한 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이 전세가 불리해질 무렵인 1943년부터다. 지원병제는 1938년 4월부터. 그런데 난징 대학살은 1937년 12월에 시작되어 1938년 2월에 끝났다. 즉, 조선인 지원병제는 난징 대학살이 이미 끝난 지 2달 후에야 시작되었으며 다시 말해 일본군의 조선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난징 대학살에 가담한 일 자체가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32]
심지어 중국 웹사이트에는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가 이끄는 15사단 소속 '조선인 부대'가 난징 대학살에 앞장섰다는 말도 나돌았으나, 1925년부터 1938년 4월까지 일본군 '15사단'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도쿄(東京)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난징 대학살에 가담한 한국 출신 148명의 전범이 유죄를 선고받아 23명이 사형당했다는 설도 중국 웹사이트에 나돌았으나, 군사재판이나 난징 전범재판에서 한국인이 난징 대학살 전범 판정을 받은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2차 대전 후 열린 각종 군사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판결받은 한국인은 148명인데, 이들은 1942년 8월 이후 강제 동원돼
동남아에서 근무한 포로감시원(129명)과 통역 16명, 필리핀 방면의 군인 3명뿐이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이 주소의 링크로 이동할 것.
#
[33]
난징 대학살을 한국인이 저질렀다는 루머가 중국 웹에서 크게 퍼져서 난징대학살 재난동포기념관 주청산 관장이 직접 한국인은 없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34]
漢奸. 중국에서
매국노를 지칭하는 단어.
[35]
심지어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실제 희생자 수가 집계된 수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36]
정확히 말하면
극우.
[37]
심지어 블로거 본인이 번역한 것도 아니다.
[38]
산케이신문에서 연재한 역사전쟁 9부.
http://www.sankei.com/politics/news/150216/plt1502160004-n1.html
[39]
그럼에도 30만은 과장이고 최대 20만, 최소 10만 정도로 본다.
[40]
피학살자의 숫자가
중국이 제시하는 수보다 적다고 무조건
일뽕으로 몰지 말자. 난징대학살의 규모를
난징 시내로 한정해서 해석한 거지 그 외의 지역들에서 학살이 없었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41]
그런데 전후 민간단체에 의해 수습된 가매장된 시체만 하더라도 11만이 넘는다.
양쯔강에 그냥 던져져버린 상당수의 시체 등은 제외하고도 말이다. 양쯔강에 던져 버린 시체들까지 합하면 실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42]
중국 정부는 일본과 수교할 때 "우리는 전쟁의 승자다. 승리했는데 뭐하러 보상금을 받냐?"는
마오쩌둥이 이런 호기로운 발언을 했고 배상을 포기했다. 다만 이런 뻘호기 때문만은 아니고 이미 대만섬의 중화민국도 대일배상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체제 선전을 위해서 불가피한 면모가 있기도 하다.
[43]
하지만 나치 독일은
충칭 대공습 때 독일 대사관으로 대피하러 오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문을 잠궜다.
[44]
중간에 가로채졌다고 한다.
[45]
당연하겠지만 난징 페스티벌, 난징 대축제는 난징 대학살을 전격적으로 부정하는
2ch에서 생긴 말이다.
[46]
장제스 동상을 훼손하는 사건 정도는 양반이고
2.28 사건과는 무관한
쑨원의 동상마저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정도다.
[47]
만약 '본성인=무조건 대독파'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리덩후이 이래로
범록연맹은 항상 80%가 넘는 압도적 지지율로 장기집권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참고로 대만 인구에서 외성인은 모부계 혼혈 전부 다 합쳐서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밖에 안 되며 적게 잡히는 경우 10%대 초반까지로도 집계된다.
[48]
다만 이 사건이 없었더라도
커피 클럽이 존재하는 한 또다른 상임이사국이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49]
그러나
폴란드,
네덜란드,
체코,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스,
불가리아,
나미비아 등
제2차 세계 대전 때나
제국주의
독일에게 전쟁 피해를 입었던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1차 대전 이전에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와 관련해 독일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선정에 반대하고 있다. 당장 이들 나라들을 제외하더라도 유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넷이(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거나 전쟁을 경험한 나라다. 반면 중국은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찬성하는 편이다. 다만 이는 정치적으로 봐야 한다.
유대인들이
독일에게 크게 당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 유대인들의 사실상
모국인
이스라엘은 유럽이 아닌 중동에 위치해 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독일과의 나쁜 기억은 과거일 뿐이고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싶어도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충돌할 건덕지가 없다. 게다가 현대 독일은 오히려 역사적 과오를 청산한다는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서포터 중 하나다 보니 굳이 서로 감정이 상할 이유도 없다. 비슷한 예로
동남아 국가들이 일본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은 이유도 일본이 과거사를 왜곡하는 건 아니꼬울지언정 어차피 가까이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국에게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남아 국가들은 잠깐 쳐들어온 일본보다 수십수백년 동안 식민지배하고 괴롭혔던 유럽 열강들에 대한 반감이 훨씬 심한 데다가 현재진행형으로 패권을 휘두르며 위협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어느 정도 협력하고 있는 상태이며, 이는 2020년대 이후의
한국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반면 중국은 일본과 인접한 데다가
반서방 진영의 맹주이기 때문에
원교근공의 논리에 따라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고 이스라엘도 유대인들이 독일 옆에 자리를 폈다면 마찬가지로 독일이 과거사 반성을 암만 철저히 해도 상임이사국 같은 문제에서는 견제했을 것이다.
[50]
그것도 대충 뱉은 말도 아니고 난징시장을 바다 건너 나고야에까지 초대한 자리에서 대놓고 면전에서 그런 망언을 한 것이다.
[51]
현재
중국 대륙의 통치국은
중국공산당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중일전쟁 내내
마오쩌둥은 이때가 역전의 기회라며
중국국민당에 대한 뒷공작이나 벌이고 있었다. 같이 열심히 싸워도 모자랄 판에 동맹에게 사보타주를 벌이는 멍청한 짓거리를 한 것. 심지어 마오쩌둥은 전후 전 일본 육군 장성에게 침략해줘서 고맙다는 망언을 했다가 결국 참다못한 전 일본 육군 장성에게 대학살로 희생된 중국 국민들은 안 불쌍하시냐며 한소리 들은 적도 있다. 심지어 일본 천황과 일본 총리에게도 말이다!
[52]
"Chief Cabinet Secretary Yoshihide Suga said Monday the government will consider stopping financial contributions to UNESCO or reducing the amount, given the U.N. body’s decision to add Chinese documents on the Nanjing Massacre to the “Memory of the World” program" (Suga says Japan may pull plug on financial contributions to UNESCO, 2015).
[53]
이 과정에서 1명이 모자라게 되자, 이전에 있던 신부의 양자인 소년이
여장하고 가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