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3 15:03:40

아몬 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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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아몬 괴트
Amon Göth|Amon Goth
파일:아몬 괴트 얼굴.jpg
본명 아몬 레오폴트 괴트
Amon Leopold Göth
신체 193cm, 120kg
국적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출생 1908년 12월 1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1946년 9월 13일 (향년 37세)
폴란드 공화국 크라쿠프 몬텔루비치 교도소
소속 친위대 (1930 ~ 1945년)
최종 계급 친위대 대위[1][2]
SS - Hauptsturmführer
배우자 올가 야나우체크 (이혼)
아나 가이거 (이혼)
가족 아몬 프란츠 괴트 (아버지)
베르타 괴트 (어머니)
모니카 헤르트비히 (딸)
예니퍼 티에게 (외손녀)

1. 개요2. 생애
2.1. 크라쿠프의 도살자2.2. 체포 및 최후
3. 기타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 상류층 출신의 SS 대위이자 폴란드 크라코프 유태인 강제수용소장으로, 일명 크라코프의 도살자(The Butcher of Płaszów)라고 불리며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2. 생애

1908년 에서 출생했다. 17세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을 한 뒤 활동을 하다가 독일로 망명했으며, 1943년 2월 11일에 하인리히 힘러에게 명령을 하달받고 첫 임무를 시작했다. 그 일은 80제곱미터의 크라쿠프 - 프와슈프 집단수용소 건설을 감독하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유대인들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집단수용소는 1달 만에 전부 완공되었다. 이후 게토를 청소하는 임무에 파견된 괴트는 일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프와슈프의 새로운 수용소로 이송시켰다.

크라쿠프 강제수용소의 소장이 된 괴트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너희들의 신이다."라며 헛소리를 지껄어댔으나, 강제수용소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던 괴트에게 반발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다른 지역의 게토를 청산할 때는 30 ~ 90명에 달하는 어린이와 여성을 개인적으로 총살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유대인들도 기차에 태워져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대부분이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후 셰브니(Szebnie) 강제 수용소의 청산을 명령받은 괴트는 요제프 그르지멕에게 이 명령을 위임했으며, 자신은 한스 캘러만을 도와 유대인 대량학살에 협조했다. 1943년 9월 21일 ~ 1944년 2월 3일 사이에 청산은 거의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1,000명이 인근 숲으로 끌려가 총살당했으며, 나머지는 아우슈비츠로 보내지자마자 가스실에서 죽임당했다.

2.1. 크라쿠프의 도살자

파일:아몬 괴트 말.jpg
프와슈프 수용소장 당시 아몬 괴트의 모습
1943년 7월 28일, 아몬 괴트는 게토 청산과 유대인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슈츠슈타펠 산하의 섹션 F에 배치되었다. 1944년 4월에는 지금까지 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친위대 중위(SS - Obersturmführer)를 건너뛰고 친위대 대위(SS - Hauptsturmführer)로 2계급 특진한다.

1944년 5월 초, 10,000명이 넘는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프와슈프 강제수용소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괴트는 새로 들어올 유대인들을 위해 5월 14일, 수용소에 존재하는 모든 어린이들을 유치원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5월 15일 괴트는 극소수의 유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그의 인간 도살이 시작되는 시점도 이때부터였다.
파일:아몬 괴트 총.jpg
As a survivor I can tell you that we are all traumatized people. Never would I, never, believe that any human being would be capable of such horror, of such atrocities. When we saw him from a distance, everybody was hiding, in latrines, wherever they could hide. I can't tell you how people feared him.
생존자로서 저는 우리 모두가 외상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인간이라도 그러한 공포와 잔학 행위를 할 수 있을거라고 결코,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멀리서 우리를 보고 있을 때면, 우리는 숨을 곳이라면 어디든지 숨었습니다. 그게 심지어 변소라고 해도 말이죠.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두려워했는지는 감히 말할 수조차 없을겁니다.
헬렌 조나스 로렌츠바이그 (Helen Jonas Rosenzweig)
크라쿠프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몬 괴트는 살인에 거리낌이 없고 오히려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괴트는 매일같이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는데, 자신의 군견인 롤프와 랄프에게 사람을 찢어 죽이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유대인들이 조금만 느리게 움직이거나 앉아있는 모습을 본 순간 저격총으로 쏴 죽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스프가 짜다는 이유로 유대인 요리사를 총살했으며, 자신의 두 하녀에게도 심각한 폭행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한 구성원이 탈주하거나 위반을 저지를 경우에는 팀 전체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작업반의 모든 두 번째 구성원을 총살했다. 거기다가 탈주한 유대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작업반을 불러다가 줄을 세운 뒤 랜덤으로 쏴 죽였다. 한번은 이런 방식으로 25명을 총살했으며,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총합 8,000명 ~ 12,000명을 죽였다고 한다.

2.2. 체포 및 최후

파일:아몬 괴트 수감.jpg
1944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재판을 받기 전에 전쟁이 끝났고 전선이 궤멸당하면서 혼란기 바드 톨즈의 요양소에 숨었으나 1945년 2월, 미군에 체포되었다. 이러고도 전후 자신의 죄는 하인리히 힘러가 시켰으며, 자신의 행위는 모두 상부의 지시에 따라 수용소장의 권한 하에서 이루어진 합법적 행위라는 헛소리나 지껄이며 폴란드 정부에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폴란드 측은 괴트의 탄원을 기각하였다. 결국 1946년 폴란드 크라쿠프에 위치한 폴란드 최고 국립 법원이 구형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아몬 괴트의 처형 영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에 보면 처음 두 번은 밧줄이 끊어져서 실패했고 세번째에서야 제대로 집행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인 Bloody Tales에 나온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영상은 괴트가 아니고 루트비히 피셔(Ludwig Fischer)라는 변호사이자 정치인이라고 한다. 이 쪽 또한 괴트처럼 나치 전범이였고 전후에 폴란드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보니 혼동된 듯 하다.

그런데 2015년, 아몬 괴트의 외손녀인 예니퍼 티에게[3]가 쓴 책이 출판되었다. 제목은 My Grandfather would have shot me(내 할아버지는 날 총으로 쐈을 것이다). 왜 제목이 이렇냐면 그녀가 흑백혼혈[4]이기 때문이다! 즉 나치당 기준에서 열등인종으로 분류되어 절멸수용소에 끌려갔을 것이라는 의미. 이 외손녀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에 대해 알게 된 연유가 드라마틱하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글을 읽었고 이를 통해 자신이 쉰들러 리스트에도 나온 그 나치 장교의 외손녀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전에 그걸 모르고 이스라엘에서 살면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텔아비브에서 살면서 바로 쉰들러 리스트를 TV를 통해 재미있게 보았는데 그 악랄한 수용소장이 내 할아버지일지 꿈에도 몰랐다며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와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여하튼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이 책은 뉴욕 타임즈 선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3. 기타

  • 여자와 술, 돈을 매우 좋아했으며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에 120kg에 달하는 비만 환자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찍힌 사진들을 보면 뱃살이 많다. 머그샷을 찍을 시점에서는 살이 조금 빠진 상태로, 턱살이 사라지고 얼굴도 반쪽이 되었다.
  •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개인사에 대한 묘사가 없지만 두 번 결혼해서 자녀가 있었으며 현재도 자손들이 남아있다. 1939년에 첫 아들이 불분명한 병으로 죽는 비극을 겪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더는 쉰들러의 비서로 일하다가 1942년 괴트와 처음 만나 1943년부터 2년 간 동거했고, 정실부인인 아나 괴트[5]가 남편과 이레네 칼더와의 관계를 알게 된 후에 아몬 괴트는 이혼 당했다. 아몬과 칼더 사이에서 낳은 마지막 아이인 모니카 헤르트비히[6]는 아직도 생존 중이며, 2002년 Ich muß doch meinen Vater lieben, oder?(그럼에도 아버지를 사랑해야겠죠?)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7] 위에 소개된 예니퍼 티에게가 그녀의 딸이다. 티에게는 어린 시절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생모인 헤르트비히와 떨어져 지냈기에 가족사를 늦게 알았다고 한다.
  • 괴트의 정부인 루트 이레네 칼더는 괴트가 전쟁영웅이며 연합국에게 희생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고 자신이 사람들을 도와야 했었다고 "쉰들러"라는 다큐멘터리에 나와 인터뷰를 가진 직후인 1983년 자살했다고 한다. 다만 칼더는 생전에 자신은 수용소에 가본 적도 없고 괴트의 범죄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이 아닌 걸 넘어 그냥 택도 없는 개소리일 것이다. 괴트와 칼더가 데이트를 하는 사진이 많이 남아있는데, 주위에 경비부대원이 있는 감시탑 등의 시설물이 대놓고 보인다.


[1] 미국 국방군에서는 중위의 계급이다. [2] 이전까지는 친위대 소령이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생전에 찍힌 그의 계급장은 명백히 대위의 것으로,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아예 2계급 특진 전인 소위의 계급장을 달고 있다. 다만 유대인 처리에 뛰어난 두각을 보여서 소령 후보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3] Jennifer Teege, 1970년생. [4] 아버지가 나이지리아인이다. [5] Anna Göth, 결혼 이전의 성은 Geiger이며, 1938년에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영문위키에서는 아나 괴트를 두 번째 아내라고 서술해놨지만, 아닐 가능성이 높다. 독문위키에는 그녀가 이미 1938년 아몬 괴트와 결혼해 세 자녀(1939년생, 1940년생, 1941년생)를 낳았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이레네 칼더는 아몬 괴트와 1942년에 처음 만났다. [6] Monika Hertwig, 1945년생. [7] 유튜브에는 헤르트비히가 영어로 인터뷰하는 영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