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3951a3><colcolor=#fff> 라도반 카라지치 Радован Караџић | Radovan Karadži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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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5년 6월 19일 ([age(1945-06-19)]세) |
유고슬라비아 FPR 몬테네그로 SR 페트니차 | |
학력 |
사라예보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의학대학원 |
직업 | 의사, 정치인 |
정당 | 세르비아 민주당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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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라지치와 믈라디치 |
옛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자치공화국인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 의사, 문학가.
스릅스카 공화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을 근거로 한 자치공화국이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에서 독립을 선언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과 세르비아 본국과 3국 통합을 추구하였다. 1995년 데이턴 협정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도 보스니아에 세르비아계가 워낙 많기 때문에 지도를 보면 스릅스카 공화국의 영역도 매우 큰 편이다. 그나마도 보스니아 전쟁 당시보다 엄청나게 줄어든 것이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인 1993년에는 보스니아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스릅스카 공화국이 전체 보스니아 면적의 72%를 차지[1]하였다. 지금은 보스니아 북동부 지역 전체 면적의 44%를 차지한다.
정치를 하기 전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겸 시인이었는데 같은 의사 출신인 독재자 아이티 프랑수아 뒤발리에나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와 비슷한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의사 겸 시인으로 활동했는데 1968년 첫 시집을 출간[2]하고 2005년까지 8권의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이던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도 1992년과 1994년에 두 차례 시집을 출간하였다. 스릅스카 공화국의 첫 국가의 가사를 그의 시집에서 따 왔으며 현재 스릅스카 공화국 국가인 나의 공화국 가사도 그의 시집에서 모티브를 따 왔을 정도다.
왼손잡이다. 1991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자치의회에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2. 생애
1945년 몬테네그로 북부의 소도시 페트니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왕당파 계열 무장 단체인 체트니크 출신이라고 한다.[3] 이후 사라예보로 가서 정신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병원에서 일하였다.1984년에 사기 혐의로 체포되어 수 년 간 재판을 받아 결국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이미 재판으로 인해 수년간 갇혀 있었음이 참작되어 징역살이는 면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해 세르비아 민주당을 창당했고[4] 1992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반발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이루고 있는 스릅스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이던 1994년 4월 22일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라도반 카라지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날짜 출처 사실 이 회담에서 카라지치는 밀로셰비치한테 전면적인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으나 밀로셰비치는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해 " 1993년 아테네 합의(밴스-오웬 안)을 걷어찬 대가로" 군사적 지원을 거절한 장면이다. 경제적 지원에는 합의했지만 밀로셰비치가 스릅스카에 대한 군사지원은 거부하였기 때문에 카라지치의 표정이 매우 안 좋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 미국 AP통신과 인터뷰한 영상.[5]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환인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난 후 1995년에는 수천 명의 무슬림 및 가톨릭교도 학살을 주도하였다. 이때 살해당한 사람들에는 무슬림인 보슈냐크인은 물론 헤르체고비나 지방에 살던 가톨릭 신자인 크로아티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6] 특히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전쟁범죄는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이며 그 외에도 40개월 이상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에 포격을 가하고 이 지역을 봉쇄해 민간인 약 1만 명을 숨지게 한 사건이 유명하다.
데이턴 협정으로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을 맞자 그는 1996년 3월 1일 재빨리 대통령직에서 중도 사임[7]한 후 종적을 감췄다. 데이턴 협정은 1995년 11월 체결됐지만 보스니아 전쟁은 1996년 3월 1일까지로 되어 있는데 이게 그의 중도 사퇴 날짜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가 사퇴하면서 세르비아 민주당(보스니아)에서 계속 대통령을 냈지만 그만큼 막장은 없었기 때문에 데이턴 협정을 파기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세르비아 민주당이 정권을 상실한 것은 2003년까지 가야 한다.
그는 처음 바로 세르비아를 가지 않고 1996년 7월 오스트리아로 간 후에 종적을 감췄는데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줄행랑쳤다가 스페인에서 세르비아로 이어지는 비행기를 타고 베오그라드에 들어갔다.[8] 이 때문에 그는 1999년에 와서야 세르비아에 들어가 정착했다.
보스니아 전쟁 이후 세계적으로 그 악명이 알려지면서 전쟁범죄자로 수배되었지만 세르비아인들의 도움으로 십여 년 간 잡히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가 그에게 5백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8년에야 뒤늦게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체포되었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로 뉴에이지 의사로 위장했다고 한다.[9]
라도반 카라지치가 체포된 날 밤 사라예보의 보슈냐크인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반대로 카라지치가 체포되자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는 카라지치는 죄인이 아니라는 항의 시위까지 일어났다.
2009년부터 7년 동안 계속된 카라지치 재판에는 1만 1천 500개의 증거물이 제출되고 증인 586명이 법정에 나왔을 정도로 기나긴 재판이 이루어졌고 선고가 나는 당일에는 재판장이 판결문 요약을 읽는 데만 90분이 걸렸다. 결국 2016년에 보스니아 내전 당시 무슬림 8000명 학살을 지시하고 사라예보의 민간인 10000여 명을 죽게 한 혐의가 인정되어 1심에서 징역 4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항소했지만 2019년 항소심에서는 오히려 형량이 더 올라가서 최종적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영국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전해졌다. #
카라지치의 재판 장면.
카라지치에 대한 1심에서 대한민국의 권오곤 재판관이 선임재판관을 맡았는데 나토 국가나 이슬람 국가 출신의 인물이 선임재판관을 맡을 경우 중립성에 대한 논란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접점이 거의 없는 권오곤 재판관이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권오곤 재판관의 퇴임 후 인터뷰에 따르면 카라지치가 밀로셰비치보다는 재판에 조금 더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권오곤 재판관을 부를 때 밀로셰비치는 '미스터 권'으로만 불렀지만 카라지치는 '재판관님'이라고 부르며 존칭을 사용했고 재판정에서 기립하라는 명령을 밀로셰비치는 무시한 반면 카라지치는 응했다고 한다.
그의 생애에 대한 영상도 있다.
# 그가 옥중에서 전화를 통해 외부행사에 참석하여 논란이 되었다.
3. 기타
- Remove Kebab에서 물을 마시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한다.[10][11] 노래의 내용 자체가 그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이유로 양웹에서는 그를 "Water Man/Water Guy"라고도 부른다.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마이너 갤러리에서는 위의 리무브 케밥 밈과 로마 숭상, 반터키 정서의 영향으로 ‘카라지추’라고 불린다. Serbia Strong의 가사 중에서 ‘카라지치여, 당신의 세르비아인들을 이끄소서’라는 대목에서 카라지추~ 보디 스르베 스보예~라고 들리기 때문인 듯. 그래서 개추를 대신하는 말로 카라지추를 쓰기도 했다. 지금은 사장된 밈이다.
- 전범재판 중 상당히 기묘하게 웃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 Karadžić이라는 철자법 때문에 '라도반 카라드직'이라고 알려진 경우도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카라지치[kâradʒitɕ\]이며 이 쪽이 실제 발음에도 가깝다.
-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터 밀란)의 팬이다. 입덕 계기는 시니사 미하일로비치와 데얀 스탄코비치였다고 한다.
[1]
나머지 28%가 전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데 나머지 면적의 대부분은
크로아티아의
괴뢰국인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 비중 16%)이 차지하였다.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전체 보스니아 면적의 23%를 차지하였으며
무슬림 보스니아는 고작 5%에 불과하였다. 전체 보스니아 인구의 52%가
보슈냐크인이었음에도 이들은 전체 보스니아 면적의 5%밖에 안 되는 공간에 몰려 살아야 했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미국의 협박으로
1994년 크로아티아가 헤르체그보스니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였고
1995년
3월에 와서야 크로아티아가 헤르체그보스니아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반환하였다. 완전히 헤르체그보스니아가 멸망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헤르체고비나 자치주로 내려간 것은
1998년
6월 11일이었다.
[2]
카라지치는 16살 때인
1961년
유고슬라비아 신문 공모전에서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3]
반면 보스니아 전쟁 당시 전쟁범죄를 주도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군사령관이었던 라트코 믈라디치는 부모 일가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체트니크와 대립하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출신이었다.
[4]
세르비아 본토의
민주당과는 이름만 같은 별개의 정당이다. 세르비아 본토의 민주당이 중도에서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정당이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도 가맹한 반면 이 세르비아 민주당은 극우 정당이다.
[5]
영상을 보면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세르보크로아트어 특유의 억양이 조금 있긴 해도 영어를 프리토킹할 정도로 잘하여 통역을 쓰지 않고 미국인 기자와 인터뷰를 한다.
[6]
세르비아인은
정교회, 크로아티아인은
가톨릭을 믿어 둘 사이는 예전부터 좋지 않아 서로 툭하면 공격하고 죽이기 일쑤였다.
우스타샤 참조.
[7]
카라지치는
1994년 대통령직에 재선됐기 때문에 원래 임기는
1998년까지였다.
[8]
카라지치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내전에서 잔혹행위를 저지른 범죄자들의 다수가 서유럽 국가들로 도피했으며 현지에서 재판을 받거나 체포되어 국제재판소로 인도된 바 있다.
[9]
심지어 실명 그대로 개인 홈페이지까지 운영했을 정도이다.
[10]
[11]
대체용 움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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