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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395> 출생 | 1925년 8월 8일 |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보산스키샤마츠[1] | |
사망 | 2003년 10월 19일 (향년 78세)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 |
재임기간 | 1990년 5월 26일 ~ 2000년 10월 13일 |
정당 |
[clearfix]
1. 개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정치인, 법률가,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보스니아의 초대 민선 대통령으로 유고슬라비아에서의 독립을 이끌었다.2. 생애
1925년 8월 8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보산스키샤마츠(Bosanski Šamac)의 보슈냐크인 가계에서 태어났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슬림 형제단을 본뜬 젊은 무슬림(Mladi muslimani) 운동의 창설에 기여하였다. 이 당시에 제13무장산악사단에 입대했다는 논란이 존재하는데 그의 유족들은 해당 논란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유고슬라비아 시절에 왕성한 이슬람 관련 저술 활동을 하며 여러 번 투옥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저술이 1970년에 발표한 '이슬람 선언'으로 그가 중형을 받는 데에 결정적 증거로 이용되었으며[2], 세르비아 측이 보스니아를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로 만들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에 대한 명분을 제공하였다.
유고슬라비아의 다당제 실시 이후 민주행동당의 창설 맴버가 되었고, 자유선거에서 승리하여 보스니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이후 일어난 보스니아 전쟁 동안 내내 보스니아군을 이끌며 사라예보에 있었다.
데이턴 협정 체결 당시 보스니아 전쟁에서 적으로 싸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프라뇨 투지만과 함께 찍힌 사진. 상당히 어색하게 박수를 치는 3명과 뒷배경의 빌 클린턴 포함 정부인사들이[3] 킬링 포인트이다.
데이턴 협정 이후 이제트베고비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의 대통령으로 있었으며, 2000년 10월에 건강 문제로 사임하였다. 특히 심장 건강이 매우 나쁜 편이었다.
2003년 10월 19일, 집에서 넘어진 부상을 회복하던 도중 사라예보 코세보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 한편, 그 역시 전쟁범죄에 연루된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가 조사 중이었으나 그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어떤 혐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가 사망하여 공소권은 사라졌으므로 앞으로도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3. 여담
그 역시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된 다른 국가들의 대통령들과 같이 권위주의적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래도 그의 정적들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프라뇨 투지만, 라도반 카라지치 등과 비교하면 학살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확실하다.생전의 모습들이 굉장히 노안이지만, 놀랍게도 숙적 중 하나인 프라뇨 투지만보다 연하이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치하 당시에 숱하게 고생한 것 때문에 노화가 빨리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2006년 8월 11일, 그가 안장된 무덤에 폭탄 테러가 발생하였다. 현 시점까지 용의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
이슬람 관련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고, 근본주의 국가 끝판왕인 이란과의 커넥션을 펼친 등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어떻게 보면 이슬람 근본주의자 같지만, 그의 통치기간 내내 보스니아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며, 그의 생전 사진들도 깔끔하게 수염을 밀고 양복을 차려입은 것들로 가득한 것을 보면 적어도 진지하게 보스니아의 신정국가화는 생각하지 않았고, 보스니아인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슬람을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또한 전쟁의 참화가 일기 전에는 보스니아 내 민족들의 화합을 주장하며, 독립을 거부하는 세르비아계에 대해서도 대화를 시도하는 등 인간도살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1990년대 한국의 언론에서는 그를 일생을 반공으로 일관하고 실용주의적인 이슬람교 민족주의자라고 띄워줬다. 반이슬람 정서가 퍼지기 전의 시대고, 인종청소의 피해를 입고 있는 비극의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라 이러한 미화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서적들과 전기는 애초에 보스니아가 한국에서 유명한 나라가 아니다 보니 애석하게도 번역된 서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4. 가족관계
아내인 할리다 레포바츠(Halida Repovac) 아래 3명의 자녀를 뒀고, 아들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도 보스니아의 6대 보스니아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임기를 지냈다. 아버지와 다르게 그는 짧기는 하지만 수염을 기르고, 샤리아를 받아들일 것을 선동하며 이에 입각하여 군대에서 히잡과 수염을 허가하라는 헌법 소원을 내고,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으며,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의 기원이 보스니아인이라는 민족주의적인 발언을 하는 등 수많은 논란을 만들고 있다.5. 매체에서
튀르키예의 TRT-1에서 그의 생애를 다룬 알리야라는 드라마를 제작하였다.세르비아에서 보스니아 전쟁 당시 만든 조롱 노래인 "이봐 알리야 안녕(Ој Алија Аљо)" #이 있다. 이외에도 이 당시 만들어진 세르비아의 노래에는 거의 항상 알리야를 디스하는 내용이 있다. 대부분 알리야가 무슬림인 것을 노려서 깐다.
6. 관련 링크
보스니아 대통령 이제트베고비치(포커스) - 조선일보 (1995.06.17)<보스니아 평화협상 주역들> - 조선일보 (1995.11.22)
[1]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릅스카 공화국 샤마츠(Šamac / Шамац).
[2]
여기에서 이상적인 이슬람 국가로
파키스탄이 거론되었다. 원래 파키스탄은
이슬람 모더니즘과 이슬람에 기반한 민족 정체성을 근간으로 하여 세워진 국가였는데 이후 집권한 군부가
이슬람주의를 후원하면서 우리가 아는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 파키스탄이 만들어졌다.
[3]
왼쪽부터
펠리페 곤살레스
스페인 총리,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