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6:20:01

8월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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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쿠데타
Августовский путч | 1991 Soviet coup d'état attempt
파일:attachment/소련 보수파 쿠데타/thisisrussia.jpg
국회의사당 앞에서 쿠데타군에 저항할 것을 연설하는 보리스 옐친
일시
1991년 8월 19일 ~ 21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원인
소련 공산당 보수파의 고르바초프 실각 시도 및 개혁·개방정책 반대
교전 세력
<rowcolor=#fff> 진압 측 반란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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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야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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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틀:깃발|]] 보리스 푸고
[[틀:깃발|]][[틀:깃발|]][[발렌틴 파블로프|
발렌틴 파블로프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바실리 스타로듀프체프
전력
모스크바 시민
소련 공수군
그 외 옐친파 소련군
알파 그룹
빔펠 그룹
제4근위전차사단
제2근위차량화소총사단
피해
시민 3명 사망 군인 3명 사망
결과
쿠데타 실패
고르바초프 신연방조약 실패
영향
옐친의 부상, 고르바초프의 실각
소련 붕괴 및 냉전 종식
1. 개요2. 발단3. 전개4. 절정5. 결말
5.1. 옐친의 부상과 고르바초프의 실각5.2. 소련 붕괴5.3. 쿠데타 주역들의 말로
6. 실패 원인7. 소련 붕괴 이후 평가8. 기타9. 당시 뉴스 보도10. 대중매체에서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991년 8월 18일, 소련에서 온건 개혁파인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연방 국방부 제1부위원장 올레크 바클라노프를 중심으로 한 소련 공산당 보수파들이 각종 급진 개혁 정책을 시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반발해 그를 실각시키려 시도한 쿠데타. 소련 붕괴를 주도한 보리스 옐친이 득세하게 된 사건으로, 신연방조약으로 연장될 수 있었던 소련의 숨통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날린 사건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보수파'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소련 유지를 지향하는 입장, 즉 기존의 소련 체제로 돌아가려는 반고르바초프 세력, 반동 세력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발단


1989년 동유럽 혁명은 동유럽 위성 국가들을 넘어 종주국인 소련에도 영향을 미쳤고, 1991년부터 이미 소련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연방 구성국들에서 벌어진 국민투표 결과로는 연방 유지가 더 높게 나왔지만,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이미 독립을 확정짓고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소련이 무너져가는 분위기에 반발한 공산당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가 무르게 대응한다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이내 그들은 소련을 유지하고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략무기 감축 협정을 조인한 뒤 크림반도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 틈을 타서 쿠데타를 감행했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에 돌아오기 하루 전 쿠데타 세력에 의해 크림반도의 별장에 감금되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난 고르바초프는 아침 식사를 하며 모스크바에서 있을 신연방 조약[3] 구상하고 있었다. 그때 올레크 바클라노프, 발레리 볼딘, 올레크 셰닌, 발렌틴 바렌니코프 장군이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과 총참모부 작전본부장 등 3명의 장성을 대동하고 들이닥쳐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라고 협박했다. 고르바초프는 당연히 크게 화를 내며 이를 거부했고 이에 장성들은 "고르바초프 씨, 당신을 연금하겠소."라고 통보했다. 고르바초프의 경호원들은 그의 수중 하에 있어 별장 내부에서 보호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 외부로 연락하거나 별장 밖을 나갈 순 없었다.

파일:attachment/소련 보수파 쿠데타/gorbachevmansion.jpg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감금되어 있던 포로스 별장.

쿠데타의 주역들은 올레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KGB 의장,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그리고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국제농업연맹 의장, 알렉산드르 티지야코프 산업교통통신위원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었고 이들은 야나예프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파일:external/graphics8.nytimes.com/YANAYEV-obit-articleLarge.jpg
왼쪽에서부터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올레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파일:attachment/소련 보수파 쿠데타/coup.jpg
8인 전원과 그 외의 쿠데타 가담 인원들.[4] 왼쪽에서부터 올레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바체슬라프 게네랄로프 고르바초프의 별장 경호를 담당하던 KGB 소령, 알렉산드르 티지야코프 산업교통통신위원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다시 오른쪽부터 발레리 볼딘 고르바초프 비서실장, 발렌틴 바렌니코프 국방부 장관 대리, 올레크 셰닌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장,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국제농업연맹의장,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파일:external/292fc373eb1b8428f75b-7f75e5eb51943043279413a54aaa858a.r38.cf3.rackcdn.com/world_09_2_temp-1313648193-4e4cae41-620x348.jpg
크렘린에 배치된 쿠데타군 T-80UD 전차[5]

쿠데타의 주역들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결성했고 8월 18일 4시부터 앞으로 6개월간 일부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이 기간 동안 국정운영은 바크라노프 연방국방위원회의 제1부위원장과 야나예프 부통령 등 8명으로 구성된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맡는다고 알렸다. 신임 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 대통령령으로 긴급 동원령을 발표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 문제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으며 소련 헌법 제127조 7항에 따라 대통령직을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행한다"고 보도했으며, 수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 군 트럭을 동원한 군인들을 모스크바 시내로 진주시켰고 방송국과 공항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장악했다.
쿠데타 세력은 나라의 경제 붕괴를 치유하고 국민의 생활 수준을 높이며 소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첫째, 헌법과 법률에 기초해서 새벽 4시부터 비상사태를 6개월 기한으로 선포하고
둘째, 소련 전 지역에서 소련 법의 통합을 선언하며
셋째,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설치하며
넷째, 소련 영내 전역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명령과 지시가 의무적이라고 선포했다.

대통령 대행을 자처하던 겐나디 야나예프는 담화문을 발표해서 소련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헌법과 법률을 유지하면서 오늘부터 비상사태가 선포됐다고 발표했고 비상사태 기간 동안 소련의 모든 권력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이양되며 현재까지 채택된 모든 조치는 잠정적이라고 말하고 이 조치가 소련 내전의 위험성을 사전에 막고 소련을 경제 파탄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필요성에 따라 취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잠정 비상조치 등으로 소련이 과거에 약속했던 모든 국제공약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선포하고 소련 국민과 각국 정부가 이번 비상조치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있길 희망한다고 미국 서유럽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행보도 취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온 세계가 우왕좌왕했으며 고르바초프의 생사와 행방에 대해 각종 예측이 쏟아졌고 소련 최고회의의 오치로프 국방안정보장위원회 부위원장은 고르바초프가 실각한 것 같다는 발표를 했다. 미국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고 이번 사태의 성격을 규명하지 않겠다고 입장 표명을 유보했으며 일본은 소련과의 안보협정이 날아갈까봐 전전긍긍했다. 영국은 걱정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라며 보수파 쿠데타가 세계평화를 위협한다고 비난했고 프랑스는 기다려 보자는 입장을 보였다. 독일은 충격을 받았다는 논평을 내놓았고 EC와 NATO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중국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8월 19일 13시~14시 경에 고르바초프 실각 뉴스가 긴급 속보로 타전되었고, 18시[6]부터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관련 뉴스 속보를 계속 내보냈다.

그때 나타난 것이 바로 보리스 옐친이었다.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를 비난하며 전 소련 국민들에게 파업을 할 것을 촉구하며 서방의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리투아니아 대통령인 란스베르기스가 합세하여 리투아니아인들의 군중 집회를 촉구했다. 그는 저녁 6시 46분 탱크 위로 올라서서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위해 총파업을 하자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에 수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분노하여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파시즘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외치면서 인간 사슬을 형성하여 모스크바로 진입하는 군 탱크의 저지를 시도했으며, 일부 젊은이들은 탱크 위로 올라가 러시아 삼색기를 흔들면서 병사들에게 모스크바를 떠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편 소련의 쿠데타 소식에 전세계의 주가가 폭락했다.

3. 전개

저는 그 때 젊었어요. 혁명! 사람들이 탱크에 맞서 길거리로 나서는 걸 보면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리투아니아 빌뉴스, 라트비아 리가,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었죠. 빌뉴스에서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방송국을 사수했는데, 우린 그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어요. 그걸 보면서 "저 사람들도 하는데, 우리는 뭘 하는 거야? 우린 뭐 등신들인가?" 라고 속으로 되뇌었죠.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세컨드 핸드 타임>, 당시 모스크바 시민의 증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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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이후 하루가 지났지만 고르바초프의 행방은 해외에 알려지지 않았다. 외국의 우려에 야나예프는 고르바초프가 크렘린으로 되돌아왔다고 발표했으나 다시 그가 현재 크림의 별장에 계속 머무르면서 고혈압과 등의 통증을 치료하고 있다고 말을 번복했다.

한편 옐친의 봉기 촉구에 일부 군부대는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고 반기를 들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옐친을 지지하는 소련군과 시민들이 육탄벽을 쌓고 쿠데타군에 맞서서 저항하기 시작했고, 한편에선 공수부대가 옐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은 공수부대 사령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소련 시민들의 저항은 무척이나 거세졌고 시베리아에선 수천의 탄광 광부들이 전면 파업했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전면 파업과 함께 25만명의 시민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시민들은 장갑차와 전차를 공격하고 조종수들을 끌어내리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7]

발트 해 연안의 공화국들은 쿠데타에 반발하여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주둔하던 소련군은 각 공화국에 진주했지만 이들 발트 3국은 일제히 반란군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8]

이 즈음 서방은 소련 전역에서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자 러시아 공화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쿠데타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논평을 유보했던 부시 대통령은 8월 18일과 달리 8월 19일 공식성명을 통해서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실각시킨 집단의 행위는 잘못 자행된 기도이고 위헌적이며 발전을 저해한다고 비난하며 고르바초프를 지지했고, NATO 회원국 등과 전화 협의를 통해 쿠데타 세력에 공동 대처 방안을 협의하는 한편 소련에 대한 미국의 경제협조계획과 현 정권 하에서는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연계하여 금융 및 곡물 차관과 기술 지원, 소련에 대한 무역상의 최혜국 대우를 중단 또는 재고하는 방안과 국제금융기관에 대한 소련 가입을 저지하는 방안 등을 내놓았다.

유럽권 역시 쿠데타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는 고르바초프의 행정을 전복한 쿠데타 세력이 개혁을 기피하거나 서방과 맺은 각종 조약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경제제재조치로 대응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소련 지도부에서 평화적인 정치 일정의 제시 및 독일 주둔 소련군(ГСВГ)의 철수와 같은 각종 군축 조약의 이행 등을 강력히 촉구했다. 독일의 반응은 대략 "너네 돈 필요한 거 다 아는데 자꾸 까불면 혼자서 놀아야 할 거다."였다.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도 8,000만 달러의 소련 기술 지원을 동결했다.

EC도 계획된 소련 원조를 끊겠다는 경고를 보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세계평화의 증진에 기여한 고르바초프의 강제 퇴진을 비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쿠데타 세력이 서방과의 군축 협정 등을 준수하겠다고 발표하였고, 중국 공산당 보수파들이 소련 보수파들을 지지할 것이란 분석에 쿠데타 세력의 성공이 점쳐지고 있었다. 8인 국가비상위원회는 8월 26일에 예정된 연방최고회의를 소집해 이미 선포한 비상사태를 인준받은 뒤 곧바로 물가 인하 단행과 같은 몇가지 경제적 당론을 제시하고 강력한 언론 통제 등을 통한 중앙집권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4. 절정

사방에 탱크가 깔려 있었어요. 하지만 탱크에 탄 사람들은 살인자가 아니었어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한 채 새파랗게 겁에 질려 있는 어린 청년들이었어요. 할머니들은 삶은 계란이나 블리니를 그들에게 나눠주었어요. 의사당 주위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것을 보고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모두들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어요. 우리가 못할 건 없다는 확신이 모두에게 있었어요.
-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 <세컨드 핸드 타임>, 당시 모스크바 시민의 증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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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반발은 사그라들긴커녕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화염병으로 쿠데타 군의 탱크에 맞서자 쿠데타군은 국회의사당을 공격했다. 시민들은 고르바초프에게 여전히 충성하고 있던 KGB 알파 그룹과 합세하여 바리케이드를 쌓고 쿠데타 군을 맨몸으로 막아섰다.[9] 이미 국가비상대책위원회의 명령은 먹혀들지 않고 있었고 통금령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반 쿠데타 세력의 중심에는 옐친이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KGB를 내세워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하며 한 발 물러서자 옐친에게 힘이 실렸다. 옐친은 전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와 함께 쿠데타 군을 맹비난했다. 옐친은 항쟁을 촉구했고 셰바르드나제 역시 파업과 불복종을 촉구하며 쿠데타 세력을 희망없는 모험이라고 조롱했다. 반쿠데타 세력은 자꾸 늘어 정교회 세력도 옐친을 지지하기 시작했다.[10] 시위 인파는 50만에 육박했다. 파업은 연방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해외에 퍼진 소련 외교관들도 옐친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도 옐친에게 충성을 선언하며 쿠데타 세력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당시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 의사당 앞에서 "옐친! 옐친!" 의 연호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옐친이 이때만 해도 러시아 민주주의의 투사로 인기가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연설은 전차 위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흔히 "Yeltsin tank speech"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은 연설 전문.[11]
러시아의 시민 여러분, 1991년 8월 18일과 19일 밤, 이 나라의 합법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셨습니다.
그분의 해임과 관련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이렇듯 비합법적인 쿠데타와 마주하고 있있습니다. 모든 어려움들과 호된 시련들을 그들 때문에 겪어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민주화 과정은 더욱더 폭 넓게 진행되어지고 있으며 또한 더이상 그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시민들은 그들 자신들이 가진 운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헌법을 위반해온 조직들의 통제 불가능한 권력들은 지금 시대에 와서 그 존재와 움직임에 있어서 만만찮은 한계에 부딪쳤으며,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 공산당 기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러시아의 지도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단일화와 러시아의 단일화를 위한 연방조약 체결을 위한 노력을 향한 단호한 입장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슈에 관한 우리의 입장은 이 조약 준비의 상당한 가속화를 허용하는가 하는 점에 달렸으며, 또한 이 조약은 8월 20일이라는 조인될 날짜의 결정과 모든 공화국들에 그 조약의 내용이 대등하게 적용될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로 인해 아마도 내일 있을 조인[12]은 무효화될 것입니다.
아무튼,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의해 진행된 이러한 발전들이 오히려 공산당 수구 세력의 분노를 치솟게 하였으며, 또한 이렇듯 그들에게 있어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면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들을 그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이렇듯 무책임하고 모험적인 행위를 시도하도록 그자들을 몰아붙인 셈입니다. 고로, 이러한 쿠데타의 현실화는 이미 일찍감치 이루어졌던 셈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동원한 '힘에 의한 이러한 조치들'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전세계의 사람들이 지켜볼 적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구성원들로부터 결코 신용을 얻지 못할 것이며, 국제사회 내에서 우리 러시아 및 여타 연방 구성원들의 위신을 손상시킬 것이고,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고립을 초래함으로서 과거 냉전체제 시절의 상황으로 우리를 되돌려보낼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 모두가 우리에게 이른바 저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위원회'의 권위라는 것이 이렇듯 불법적인 것임을 밝혀주는 셈입니다.
고로 우리는 이렇듯 쿠데타 세력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법적인 '위원회'의 모든 결정들과 지시사항들을 규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역 세력의 조직들이 헌법상의 법률들과 러시아 대통령의 포고문들을 확고히 준수해줄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저 쿠데타의 주모자들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이렇듯 러시아의 시민들에게 이야기하며 또한 이 나라의 보편적인 헌법상의 발전을 위하여 국가의 반환을 저자들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나라의 대통령 고르바초프께서는 지금 우리 러시아인들 및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구성원들에게 말 할 기회를 주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늘 지금 그분은 쿠데타 세력들에 의해 어딘가에 연금되신 상태입니다. 쿠데타 세력은 그분과의 연락을 방해했습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인민 대표자 임시 회의를 즉시 개최할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동포들이 저렇듯 부끄러움과 양심을 모조리 상실한 온건파 쿠데타 주모자들의 횡포와 무법함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군인들에게 우리의 시민들을 위한 명백하게 뚜렷한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위해서 싸울 것을 이렇듯 간청하는 바이며 또한 온건파 ----세력 쿠데타 조직의 개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이 관철될 때까지, 우리는 저자들에 대한 전세계 시민들의 무한한 공격을 호소할 것입니다.
1991년 8월 19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쿠데타 세력은 당황하여 사분오열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세력은 미국과 유럽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반발이 본인들 예상을 초월한 것도 있었지만) 전국에서 들끓는 반발을 억누르지 못했다. 상황이 부정적임을 눈치챈 핵심 인사들이 슬금슬금 사퇴를 선언하며 발을 빼기 시작했고 동원된 군부대들도 이탈하여 옐친에게 합류했다. KGB 의장 크류츠코프는 자신들의 고르바초프 축출이 정당했음을 과시하고 타협을 위해 옐친에게 크림 반도로 가서 고르바초프를 데려가도 좋다고 했지만 이미 사태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8인 국가비상사태위원회들은 모스크바 공항을 통해 출국을 시도했다. 이에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의회는 이들의 체포 명령을 내렸다. 직후 그간의 실세로 거론되던 야나예프 대통령 권한 대행과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의장이 실각하고 군부의 강경 소장파들이 실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원회위원인 야조프 국방장관과 파블로프 총리가 물러나고 모이쉐프 소련군참모장이 국방장관에 오르면서 강경파들이 발악에 가까운 실력 행사에 나섰다.

8월 21일 자정, 8대의 장갑차가 시민들이 차벽으로 만든 바리케이드를 밀어내면서 국회의사당 진입을 시도했다.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져 장갑차들을 불태워버렸고, 탈출하던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세 명의 시민들이 숨지자 시위는 더더욱 거세졌다.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모스크바 시내를 피바다를 만들지 않고서는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결국 소련군은 모스크바 봉쇄를 풀고 철수해 버렸다.

사태가 누구에게 유리한지 눈치챈 일본은 쿠데타 세력을 맹비난하며 소련에 대한 긴급식량원조, 원유, 정조를 비롯한 4개 분야의 지원을 중단하면서 대소 경제제재에 돌입했다. 내각은 아예 외교 라인을 쿠데타 세력이 아니라 옐친과 연결할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갖고 쿠데타 세력을 불법적인 쿠데타 음모자라고 맹비난하며 비정상적인 무리들과 관계를 갖지 않겠다며 입장을 표명, 모든 경제 협력 조치를 종결했다.

시위 인파는 꾸준히 늘어 결국 100만에 다다랐다. 쿠데타 세력의 몰락은 기정사실이었다. 결국 공항을 통해 달아나려던 국가비상사태 의원들은 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자살했고 고르바초프는 50시간만에 연금에서 해방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와 크렘린에서 다시 집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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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르바초프가 공항에서 귀환해서 한 연설이다.
이번에 쿠데타가 실패한 것은 1985년 이래에 우리가 추진해온 개혁과 개방정책이 비로소 그 결실을 거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련 사회와 소련 국민의 태도에 큰 변화가 있었고 바로 이것이 이번 쿠데타를 막아낸 원동력이었습니다.

나는 소련과 전 세계에 쿠데타 추종자들이 저지른 음모와 대통령이 나에게 가한 위협, 그리고 그들이 내게서 얻어내고자 했던 것을 낱낱이 밝히겠습니다. 내일 늦어도 모레까지는 소련 최고 회의에 출석해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나는 쿠데타 주모자들에게 굴하지 않고 사태에 의연하게 대처해 온 국민에게 그리고 끝까지 정부를 믿고 따른 데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극소수에 불과한 쿠데타의 주종자들은 소련이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비판해 왔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문제를 구실로 국민을 선동해 소련사회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그들의 야욕을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음모는 실패했으며 이는 다름 아닌 페레스트로이카의 승리였습니다. 그들은 불법적으로 병력을 동원해 나의 거처를 포위하고 나와 가족을 위협했으며 나의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결국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쿠데타 주종자들에게 용감하게 맞서 싸운 소련 국민과 나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보여준 러시아공화국 지도자들과 국민 특히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과 소련 연방 최고회의 그리고 노동자, 농민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사건은 새삼 우리들의 자부심을 일깨워 줬습니다. 우리 앞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사실로 인정하며 따라서 나는 휴가 중에도 오늘날 소련이 봉착하고 있는 이 문제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휴가 중에도 식량, 연료, 금융문제 소련통화 시장정책 소련의 정치적 미래 등 이 모든 현안에 대해서 나는 깊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쿠데타 주종자들은 소련이 이 과도기에 겪고 있는 문제들을 교묘히 이용하려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이 문제들을 이용해 이 나라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고자 음모를 꾸몄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모한 도박이었으며 나는 나를 찾아온 자들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나는 소련 최고회의의 소집을 요청했으며 오로지 그곳에서만 모든 것을 이야기할 생각이었습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감히 일국의 원수인 나를 국민과 전 세계로 부터 격리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의 도덕성과 내 가족들을 짓밟으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5. 결말

5.1. 옐친의 부상과 고르바초프의 실각

권좌를 되찾은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즉각 공산당에 대한 대숙청에 들어갔다. 8명의 주요 쿠데타 인물 중 내무장관 푸고는 자살했고 나머지 일곱명은 체포된 상태였다. 쿠데타를 지지했던 군부 원로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원수도 자살했다. 고르바초프가 복귀 이후에 두문불출하던 사이, 숙청을 선두지휘한 것은 옐친이었다.[13] 옐친은 군의 공산당 조직을 모두 해체하고 공산당 세포조직을 모두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고르바초프의 귀환을 환영하는 집회를 가졌다. 옐친은 고르바초프에게 연정을 제안할 정도로 정치적 입지가 확대되어 있었다. 옐친은 국회의사당에서 호기로운 연설을 했다.
지난 3일 동안 우리가 추진해 온 소련의 개혁정책이 결코 반전될 수 없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아직도 소련에는 역사의 시계를 멈추고 되돌리려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또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국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았습니다. 개혁과 개방을 향한 소련의 정치적 진로와 지도자들 맨손밖에 없는 국민이 지켜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리의 시민들이 소련 헌법과 헌정을 지켜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개혁을 담보하는 가장 확고한 보장이라고 믿습니다. 지난 3일 동안 암흑의 시대를 겪으며 우리는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의 개혁정책은 아직도 그 뿌리가 취약하며 연방제도는 지극히 보수적인 성격의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아직도 소련 사이에는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소련 사회구조 전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개혁은 미룰 수 없음이 이번에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사회 구조전체가 바꿔야만 합니다.

우리의 사회는 보다 융통성 있고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또한 각 공화국의 권익이 지켜질 수 있느냐 이를 위해서 우선 연방조약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사태로 연방조약에 조인이 늦어지고 있습니다마는 이것도 더 이상 지연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미 합의된 연방조약의 내용이 연방국의 권리를 지키기에는 너무 미흡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이 점도 보다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조인될 연방조약에는 지난 3일 동안 우리가 겪었던 쓰라린 체험이 반영돼야 할 것입니다. 소련이 그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부적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루츠코이 부통령이 지금의 여러분에게 이점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또한 러시아 공화국의 경제계획에 대해서도 루츠코이 부통령이 말씀드릴 것입니다. 한마디로 러시아 공화국의 경제는 환골탈태의 변화를 겪어야만 합니다. 끝으로 언론의 자유가 신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3일 동안 우리는 언론 통제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생생하게 겪었습니다. 바로 비상대책위원회가 이 점을 어떻게 악용하는가를 우리가 생생하게 보아왔습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법령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긴밀하게 협력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앞으로 우리는 연방정부와 긴밀한 협력 하에서 연방과 공화국의 단계 등 필요한 모든 개혁조치를 추진해 갈 것임을 밝힙니다. 러시아공화국과 모스크바 시민들이 평온을 암흑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업적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3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의사당의 수고를 위해 분투해 오신 여러분에게 치하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고르비아체 대령과 콘스탄틴 리바노비치 장군의 공이 더욱 빛납니다. 이 자리에서 많은 의원들과 공무원들이 서류를 들고 다니던 손에 기관총을 들고 지난 3일 동안 싸워 왔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공화국을 대표해서 군부와 맨손에서 영웅적인 투쟁을 해 온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감사와 치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오늘의 승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연설이 끝난 이후 러시아 국회의사당에서 소련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 국기가 게양되었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은 소련 보수파들이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의 붕괴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미리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이번 사태로 인해 보수파들의 정치적 입지가 사라져버렸지만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이들을 확실히 짓밟기 시작했다. 이번 사태의 최고 수혜자는 당연히 옐친이었다.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는 옐친을 역사와 운명의 사람으로 극찬하며 앞으로 고르바초프가 옐친에게 끌려다닐 것으로 예측했는데 나중에 소련 해체의 과정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미 고르바초프는 옐친에게 권력의 반은 넘겨줘야 할 것이라고 예측되었고, 결국 그 해가 가기 전에 소련이 망해 그나마 반도 지키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은 일제히 옐친에 대한 찬사를 보냈고 미국 언론들은 옐친을 영웅으로, 그리고 앞으로 돈독해질 미소 관계의 주역으로 떠올렸다. 서방의 중단된 원조도 일제히 재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9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만나 신연방조약 조인 문제 등을 논의하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재개했지만 이미 그는 완전히 실각한 거나 다름없었다.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대대적인 자치를 요구했고 발트 3국과 몰도바 등 6개 공화국은 아예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 쿠데타로 야기된 거대한 역사의 물결은 고르바초프의 반대파들을 쓸어갔지만 고르바초프 본인도 쓸어 버렸다.

연방을 유지해야 할 소련의 주요 인물들은 이 쿠데타로 완전히 실각한 후였다.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측근으로 믿었던 인물들까지 대거 쿠데타에 동참하면서 고르바초프 본인이 "실망했다." 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친구들이 다 배신을 했으니[14] 쿠데타에 적극 앞장섰던 KGB는 이미 시민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경찰들이 구경만 하는 동안 KGB 청사로 몰려가 KGB 창시자 펠릭스 제르진스키 동상을 박살내고 러시아 국기를 게양했다. 본부의 푯말엔 철십자가 그려졌다. "니들이 나치와 다를 게 뭐냐"는 의도로 행해진 것이다. KGB 요원들은 건물 안에 숨어서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쿠데타가 벌어지는 동안 편을 정하지 못했던 외무장관 베스메르티니크는 기회주의자로 몰려 비난을 당하다가 결국 사임했다. 셰바르드나제는 고르바초프도 사실 쿠데타 세력과 한패였던 것이 아니냐고 고르바초프를 공격했고 고르바초프는 거의 대응도 못했다. 길거리에선 공산당 간부들이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판이었다.

주요 기관에선 옐친의 올라간 권위를 상징하듯이 소련기와 러시아 공화국 깃발이 동시에 나부꼈다. 옐친은 공식적으로 소련의 권력의 절반을 고르바초프로부터 넘겨받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할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직무 수행이 불가능해질 경우 대통령 권한대행을 부여받기로 되었다. 만약 옐친이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시에는 고르바초프가 옐친의 업무도 맡는 형식이었지만 뭐 연방 소속 공화국의 대통령과 연방 대통령이 맞먹는 상황에서 누가 맛간 건지를 보면...

소련의 내각은 빠르게 옐친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KGB 의장과 내무국방관에 가빈다카빈 전 내무장관과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 공군참모총장이 임명되었고 러시아 공화국 내무장관엔 빅토르 바라니코프가 임명되었는데 모두가 옐친의 지지자 또는 핵심 측근들이었다. 사실 이 자리엔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사람들을 임명해 놨는데 옐친의 반대로 도로 물려야 했다. 공화국 회의에 나온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에게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옐친은 삿대질을 하며 "어서 명단을 읽으시오."라고 큰소리를 치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

옐친의 공산당의 잔여 세력에 대한 숙청도 철저했다. 옐친은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와 소련 텔레비전 라디오 위원회를 비롯한 친공산당 언론을 쿠데타 세력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프라우다를 비롯하여 소베츠카루시아, 글라스노스트, 라보티아트리 분아, 모스코프스프라우다, 스나미아 등 6개 일간 신문이 정간되었으며 소련 텔레비전 라디오의 메인뉴스 프로그램인 브례먀도 전면적으로 폐지되었으며[15] 타스 노보스티 두 통신사의 사장은 유언비어 유포죄로 전격 해임되고 국유화되었다. 남은 것은 이즈베스티야 트루드,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등 3개 신문뿐이었다. 한편 옐친이 임명한 샤포슈니코프 국방장관은 대대적인 숙군 사업을 실시하여 군 고급 장교의 80%를 숙청했다.

그리고 8월 25일 일요일 마침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브례먀 텔레비전을 통해 공산당 서기장 사임을 선언했고 정치국, 서기국, 당중앙위원회가 쿠데타를 막지 못해 쓸모가 없었다면서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해체했다. 군, 국가기관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금지됐으며 공산당 자산도 모두 압류되었다. 발트 3국 몰도바의 독립도 승인됐다. 고르바초프는 내각의 신임안 여부를 표결에 부쳤고 소련의 해체는 사실상 확정되고 말았다. 이에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1991년 8월 29일 밤, 소련 최고 입법기구인 연방최고회의는 공산당 활동을 소련 전역에서 정지시키는 내용의 결의안을 표결에 상정해 찬성 283 반대 29 기권 52표의 압도적 표차로 승인했다. 이유는 공산당 조직들이 쿠데타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16] 고르바초프는 비상 대권을 박탈당했고 고르바초프의 지기이자 연방최고회의 의장 루키아노프는 면책 특권을 박탈당하고 쿠데타 동조 혐의로 체포되었다.[17]

5.2. 소련 붕괴

한편 일부 공화국들의 독립 소식을 들은 우크라이나가 연방 잔류 의사를 철회하고 8월 24일에 독립을 선포했다.[18]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현 조지아), 벨로루시 공화국이 독립 대열에 참여했다. 전국의 레닌 동상 제르진스키 동상이 박살났으며 공산당 건물은 완전히 포위당했다. 여러 공화국들도 앞을 다투어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은 소련 잔류 의사를 표명했지만 뭐 결과는 모두가 잘 알다시피... 그리고 이들 국가들도 다른 공화국들의 소련 이탈을 보고 결국 다 빠져나갔다.

파일:attachment/소련 보수파 쿠데타/fallofrenin.jpg

9월 4일, 소련 인민대표대회는 소련을 느슨한 주권국 연방 형태로 재편하기로 결정했으며 동시에 신헌법 제정 때까지의 과도체제를 출범토록 하는 제도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새 연방을 구성하게 될 과도체제로는 기존의 연방최고회의를 상원과 하원 격에 해당하는 연방위원회와 공화국위원회로 양분하였다. 과도 연방정부에 관한 결의안은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연방대통령과 각 공화국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된 집단 지도체제인 국가 평의회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했다.

9월 5일 ABC 통신은 고르바초프, 옐친을 데리고 미국 시민들과 대담을 가졌는데 몰락하는 소련의 위상을 상징하듯이 매우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피터 제닝스(진행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두 분 사이가 어떤지 물어보라고 요청하시더군요.

옐친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나의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가 소련 대통령으로써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 한때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했지만 지금은 아주 쉽습니다. 둘 사이의 많은 어려움들이 이제는 다 지나갔습니다.

(중략)

질문1: 공산주의 체제 국가가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르바초프 대통령: 우리가 경험한 역사를 통해 공산주의는 실패한 것이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소련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교훈이 될 것입니다.

옐친 대통령: 공산주의는 미사여구로 꾸며진 유토피아적인 발상들입니다. 다른 공산국가들도 차차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질문2: 나는 지난 83년 KAL 007기 폭발사고 희생자 유족회 회장입니다. 269명 희생자들의 사체를 반환하거나 보상할 용의는 없습니까?

옐친 대통령: 유족회와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어떤 어려움이든 도울 준비가 돼 있습니다.


질문 3: 현재 쿠바에서는 많은 소련군이 주둔해 있는데 이들은 철수시킬 용의는 없으십니까?

(고르바초프와 옐친 모두 당황해서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 하라고 손짓을 했다, 군중의 박장대소)

고르바초프 대통령: 옐친 대통령께서 대답하시죠.

옐친 대통령: 현재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처럼 쿠바에서도 점진적으로 철수시킬 계획입니다.


질문4: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미국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외국 지도자인데 소련에서는 그렇지 않더군요. 이를 개선할 복안이 있습니까?

고르바초프 대통령: 정치 개혁을 계속해 나가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언론을 이용하거나 거짓 각본을 짜는 등의 정치술수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자유 진영의 종주국 미국의 시민들 앞에서 공산주의의 실패를 공산주의의 종주국의 수장들이 확인해 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후 1991년 9월 10일 소련 정부는 대한항공기의 블랙박스를 사실 회수했음을 밝혀 그동안 블랙박스 찾느라 개고생한 미국과 일본의 뒤통수를 본의 아니게 쳤다. 9월 11일에는 쿠바에서 소련군 철수가 결정되었다.

같은 날 베이커 미 국무장관 등 서방 35개 나라의 외무장관들이 대거 모스크바에 모였다. 목적은 CSCE 유럽안보협력회의 인권회의였지만 실상은 소련의 새 지도부의 의견을 교환하기 위함이었다. 회의에서 고르바초프가 참석하여 소련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도록 협조해 준 세계 각국의 관심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밝히고 이 같은 각국과 소련간의 연대감은 소련이 더 이상 세계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는 의사를 밝히며 소련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다.

9월 22일에는 군사개혁위원회가 설치되어 소련군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실시되었다. 의사당 방어를 지휘한 콘스탄틴 코베츠 장군이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9월 24일에는 옐친이 1992년 1월 1일부로 군사요충지로 외국인에게 철저히 폐쇄되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개방할 것을 선언했다. 9월 26일에는 대대적인 연로 장성 예편과 소련군을 300만명 선으로 감축하고 국방부는 민간기구로 전환할 것이라는 샤포슈니코프 국방장관의 발표가 있었다. 10월 6일에는 미국의 단거리 핵무기 폐지 방침에 호응하여 소련이 모든 전술 무기의 핵탄두와 핵포탄을 제거하겠다고 발표했다.

1991년 12월 8일 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최고 의장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벨로루시 최고 지도자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가 만나 소비에트 연방의 창설 조약을 소멸하는 것에 합의를 보고 독립국가연합을 창설함에 따라 소련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고르바초프는 끝까지 해체에 반대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 없게 되자 12월 25일 소련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고 1992년 1월 독립국가연합의 출범과 함께 소련은 해체되었다.

5.3. 쿠데타 주역들의 말로

쿠데타에 동참했던 주요 인물들은 1994년에 옐친 대통령의 지시로 사면받았다. 겐나디 야나예프는 2010년에 사망했고 발렌틴 파블로프는 푸틴에게 충성하다가 2003년에 죽었다. 그 외에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자살한 보리스 푸고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은 천수를 누렸다.

천수를 누리고 죽은 대표적인 인물은 드미트리 야조프 당시 국방장관으로, 1924년에 11월 8일에 옴스크 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조국전쟁이 일어나자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입대했다. 그는 자신보다 최소 한 살 더 위의 후보생들과 함께 초급 장교 교육 과정을 밟았고, 1942년에는 붉은 군대의 육군 보병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그는 볼호프 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 소속의 소총병 소대장으로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4년에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엔 1953년에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에는 근위보병연대장을 거쳐 장성으로 진급하는데 성공, 32군단과 4군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한 바르샤바 조약군 소속의 중부집단군 사령관과 극동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쿠데타에 가담하기 직전에는 리투아니아 독립운동을 진압하려 군을 파병했다. 2019년에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BBC 기사). 이후 고르바쵸프가 집권한 지 2년이 된 해인 1987년에 당시 야조프는 대장 계급을 단 채로 소련 국방부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1990년 4월 28일에 그는 소비에트 연방 원수가 되었다.[19] 허나 상술했듯이 8월 쿠테타에 주역으로 참여했다가 옐친이 이끄는 개혁파와 소련 시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실각했다가 1994년에 사면받아 소련 해체 이후인 그 이후엔 군 원로이자 군사 교육 기관의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야조프는 소련 붕괴 이후에도 생존해 있던 유일한 소비에트 연방 원수였고 2020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는데 김정은 직접 애도를 표했다.[20]

6. 실패 원인

사실 강경파 쿠데타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관련기사 우선 쿠데타를 기획한 강경파들이 주권국가연맹을 창설하는 신연방조약을 저지하기 위해 너무 즉흥적으로 거사를 치르느라 준비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쿠데타군은 언론과 통신을 장악하지도 못했고, 군부를 통제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옐친의 인기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그를 건드리면 더 큰 민중의 반발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옐친을 내버려 둔 것은 큰 실수였다. 옐친이 매우 신속하고 단호하게 움직여 반쿠데타 운동을 총지휘한 것이 패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건파들은 개혁을 막고 종래의 체제를 지켜나가자는 구시대적인 비전밖에 제시하지 못했는데, 이미 오랜 경기 침체에 지친 소련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1964년에 흐루쇼프가 물러나고 브레즈네프가 등극했을 때는 흐루쇼프 본인이 농업정책의 실패와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 무기력한 대처를 했던 연유로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이 되어도 대다수의 공산당원이나 인민들은 그대로 받아들였고 아직은 소련이 지속적으로 성장했을 때였기도 했고 동유럽 공산국가들도 건재했을 때여서 소련 자체에 대한 반발이 커지지는 않았지만, 8월 쿠데타 당시에는 이미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체제가 뒤바뀐 뒤였고 소련 자체도 이미 일부 공화국들이 이탈하는 등 흔들리고 있던 상황인데다가 러시아에서 공산당을 탈당한 옐친이 야당 세력을 자처하며 이미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여타 지역이라고 해서 온건파의 입지가 탄탄하지 않았다. 게다가 서방 세력이 고르바초프에게 신속히 지지를 선언한 것도 쿠데타 세력의 입지를 좁힌 중요한 원인이었다.

소련 강경파는 옐친이 이끄는 시위대를 천안문 6.4 항쟁처럼 진압하지 못했다. 쿠데타 과정에서 죽은 민간인도 3명에 그쳤고[21][22], 강경파가 보리스 옐친이 이끄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부를 장악했어도 분리 독립을 막을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반발에 부딪쳤을 것이다. 이미 소련 내에서 공산당의 통치는 종막을 고하고 있었으며, 일부 공화국은 독자적인 독립 움직임까지 보였다. 체제가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인원들이 일방적으로 이를 되돌리려 했지만, 이에 반대해 레닌그라드, 키예프, 모스크바 등 전 연방에서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즉 강경파 쿠데타가 성공했어도 소련이 유지되기는 어려웠다.[23]

현실성을 따진다면 차라리 '강경파 쿠데타가 없었다면 소련이 신연방조약에 의한 느슨한 주권국가연맹의 형태로라도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입장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어쨌건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소련을 완전히 해체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쿠데타 이전인 91년 3월 실시한 소련 존속에 관한 전연방 국민투표 결과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발트 3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몰도바를 제외한 나머지 9개 구성국에서는 소련 존속을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24]

고르바초프의 구상대로 신연방조약이 체결되었다면 정 독립을 원하는 6개 구성국에 대해서는 독립을 인정하더라도[25] 나머지 9개 구성국은 (중앙집권적인 소련 시대보다는 각 구성국의 자치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 형태로라도 소련의 명맥을 이어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26]. 그런데 쿠데타의 주도세력은 소련 중앙정부였고, 소련 체제의 기반 역할을 해 줘야 했던 세력이었다. 결국 8월 쿠데타의 실패로 쿠데타를 주도한 소련 중앙정부와 소련 공산당이 완전히 무력해지면서 고르바초프 역시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력해졌고, 이 때문에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해 소련 역시 완전한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결국 8월 쿠데타의 지향점이 '소련의 유지' 에 있었다고 본다면, 실현 불가능한 목적을 위해 무리수를 사용하다 결국 그나마 실현 가능한 목표까지 실패한 전형적인 정치적 패착이었던 셈이다.

소련 온건파 쿠데타의 본질은 비록 약화되었지만 공화국 정부와 소련 정부의 요구사항을 절충시켜 주권국가연맹이라는 형태로 소련을 유지시키려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기존 소련 공산당과 정부관료들로 대표되는 노멘클라투라가 거부하고 지도력을 차지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를 전복시킨 사태였다. 이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와 옐친의 정치적 야심보다 소련 해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쿠데타는 중앙정부 지도자(고르바초프)가 진행하던 개혁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전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노멘클라투라의 이기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고, 이 상황에서 소련 중앙정부가 유지될 정당성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 결과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택하게 되었고, 옐친이 이에 영합하면서 소련은 1991년 12월 8일 벨라베자 조약으로 완전 해체되었다.

탈북한 전 주영 북한 공사였던 태영호가 저서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쿠데타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8월 20일에 아래와 같은 논평을 남기며 쿠데타 실패를 예견했다고 한다.
" 외무성이 올린 문건에는 쿠데타 세력이 성공해 소련 정세가 안정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내가 볼 땐 성공하기 어렵다.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시민과 노동자를 동원해 지지 집회를 조직해야 한다. 공수부대와 탱크를 앞세운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군인들이 쓰는 쿠데타 방식이다.[27] 공산당은 그러면 안 된다. 공산당대회를 열어 고르바초프를 비판하고, 시민과 노동자들로 군중집회를 열어야 한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당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이미 소련 공산당이 변질됐기 때문이다. 비상사태위원회가 당원을 동원하지 않고 군대에 의존하는 것을 보면 쿠데타는 실패할 것 같다. 우리가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말라."
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70~71쪽

과연 그 다음 날인 21일에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으니 김정일의 예측이 들어맞은 셈이였다. 그 누구보다도 소련 붕괴를 가장 탐탁지 않게 여겼을 김정일도 저렇게 생각했을 정도니 실패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았던 셈.

7. 소련 붕괴 이후 평가

하지만 정작 소련이 해체되고 체제가 전환된 후, 러시아 내에서만큼은 쿠데타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달라졌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이 쿠데타를 공산주의의 부패와 종말을 보여준 사건이라기보다는 지도층 간의 단순한 권력 다툼 정도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나아가 쿠데타 실패를 안타까운 일로 보는 의견도 상당한 편이다. 옐친이 집권하고 시행한 급진적인 개혁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는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혼란이 몰아닥쳤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자유와 자본주의의 풍요를 꿈꾸며 쿠데타군 진압을 도운 러시아인들은 되려 빈민층으로 전락했고, 옐친을 도운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급격한 체제 전환은 러시아에 엄청난 부작용과 진통을 가져왔다. 화폐발행량 폭증, 예금동결조치와 무분별한 가격자유화 등의 조치로 인해 1992년에만 물가상승률이 2000%, 1993년에 1000%를 넘으며, 실질임금이 폭락하고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으며[28] 실업률도 급증하여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 또한 기존의 사회복지제도 또한 무너지며 제기능을 못했는데 이로 인해 대다수의 시민들은 체제가 전환되면 자유롭게 서방 상품을 구매하고 해외여행도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처참히 박살난 채 당장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하기 힘든 곤궁한 처지로 내몰리며 빈곤층으로 전락해 버렸다.[29] 더군다나 현대 러시아에까지 이어지는 만성적이고 극심한 부정부패도 이때부터 곪아터진 문제였다. 경찰과 군인을 비롯한 공무원들의 임금이 크게 낮아지는 바람에 아예 뇌물을 받지 못하면 생활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30] 당연히 치안도 막장이 되었고 마피아들도 이 시기에 급격히 창궐했으며 혜택을 입은 사람들도 경호원을 별도로 고용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기존의 공산당 관료들은 이런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기는커녕 부패한 자본가로 진화했다. 진작에 자본주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자본가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던 자들은 반체제 인사와 국유재산을 부정한 방법으로 사유화했다. 그로 인해 이들은 악덕 자본가가 되어 강도 정치인들과 더불어 러시아 부정부패의 중핵이 되었다. 이들로 인한 극심한 부정부패와 양극화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31]

이런 무수한 부작용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평가는 푸틴이 집권하고 러시아 사회가 회복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고르바초프의 권력이 약해지더라도 최소한 소련 유지가 가능할 정도의 영향력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미 소련 내 분위기가 막장이 되면서 공산당의 재집권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대부분은 8월 쿠데타가 그냥 헛짓거리였다는 것이 공통된 입장이다.

특히나 푸틴이 강경책으로 구 소련 구성국 여러 나라들에게 자꾸 어그로를 끌거나 영토 갈라먹고 괴뢰국 만드는 짓을 하면서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나머지 구 소련 구성국 대부분이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하게 되면서 아르메니아와 벨라루스, 대다수의 중앙아시아 국가를 제외하고는 러시아와 철천지 원수가 되거나 확실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고르바초프가 구상한 대로 일부 영토는 잃더라도 구 소련 영토를 대부분 보존한 상태에서 주권국가연맹 체제로 가는 게 나았다.

8. 기타

9. 당시 뉴스 보도

10. 대중매체에서

  • 공각기동대 시리즈: 쿠데타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강경파들이 집권하자 냉전이 연장되면서 미소간의 긴장이 극심해지다가 결국 3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서로 몰락하게 되었다.
  • 워게임: 레드 드래곤: 쿠데타군이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구금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성공으로 끝났다는 가정으로 시작되는 시나리오가 있다. 중앙유럽의 동맹국들이 몰락한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공산주의 국가들인 북한과 중국에 군사적 지원을 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된다. 갑작스런 극동아시아 지역의 군비 증강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USS엔터프라이즈가 동해상에서 소련 잠수함에 피격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2차 한국전쟁이 발발하게된다.
  • 풀 메탈 패닉!: 이때의 쿠데타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보수파가 집권하게 되고 아프간을 재침공한다.
  • 세계대전 III: 쿠데타가 2년 빠른 1989년 일어났고 소련 군부가 전면에서 쿠데타를 주도해 군사정권을 세운 후 미국과 핵전쟁을 벌여 인류가 멸망한다.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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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 · 어머니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 아내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 딸 이리나 미하일로브나 비르간스카야
관련 인물 블라디미르 레닌 · 보리스 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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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관련 정치인 빌 클린턴 · 블라디미르 푸틴
사건 · 사고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 8월 쿠데타
관련 전쟁 제1차 체첸 전쟁(1994~1995) ·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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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조지아 [2] 당해 6월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는 제외. [3] 공산주의가 이데올로기로서의 힘을 잃어가고 소련이 해체되는 시대적 흐름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자본주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개혁된 소련의 체제를 선언하는 조약이었다. [4] 뒤에 적혀 있는 러시아어는 '애국자'(파트리오트)라는 뜻이다. 영어의 Patriot과 유사한 이유는, 둘 다 라틴어 patriota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5] 이 사진은 8월 쿠데타와 소련 붕괴, 냉전 종식의 상징으로 자주 쓰인다. 트럼페터의 T-80UD 모형의 박스아트가 바로 이 사진이다. [6] 1991년 당시 오후 정규 방송 시작 시간은 18시였다. 1990년까지는 17시 30분이었으나 걸프 전쟁 전후로 정규 방송 시간을 30분 늦추었다. [7] 친 옐친파 소련군들은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무기를 기꺼이 나눠주었으며, 시민들도 군에게 지원받은 총기로 쿠데타군에 거침없이 맞서 싸웠다. [8] 과거 발트 3국으로 진압하러 갔던 소련군 지휘관인 조하르 두다예프는 시위대를 면담 후 그들의 편으로 돌아섰으며, 급식 차량 지원 및 부상자 치료 등 오히려 시위대들을 인도적으로 지원하자 소련군 수뇌부가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주둔했던 소련군이 반발하면서 상부의 명령에 항명까지 하여 결국 포기한 일도 있었다. [9] 알파 그룹은 초반에는 쿠데타군에 의해 시민들을 진압할 목적으로 모스크바 시내에 투입되었으나 일선 지휘관과 병사들이 모스크바 시민들의 설득과 호소를 듣고 이를 부당한 명령으로 간주하고 곧바로 부대 전체가 이탈해 시민들과 합류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 공수군의 병력들도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원호하고 쿠데타 군과 결사항전을 벌이며 맞서 싸웠다.(옐친이 미리 소련 공수군을 손을 써 장악했다. 91년 8월 쿠데타 영상을 보면 소련 국기가 아닌 러시아 공화국의 국기를 꽂은 탱크부대도 대다수가 보이는데 옐친 측의 병력으로 확인된다.) [10] 정교회 세력은 당시 소련 정치권 내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즉 쿠데타 일당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지지세력마저 등을 돌리게 한 셈이었다. 1990년에도 소련 국가가 울려퍼지는 영상에서 정교회 사제들이 대거 그 행사에 참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1]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 구성국 중에서 1위의 형님 국가였다. 그 국가의 수장인 옐친이 무려 쿠데타 세력을 보수 세력이라고 맹비난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외치니 지지자가 많았던 것이다. [12] 고르바초프가 구상 중이던 신연방 조약을 의미한다. 쿠데타가 일어난 날은 다름아닌 신연방조약이 발효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13] 고르바초프 또한 두문불출했을 뿐이지 이 사태를 벌인 공산당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고 옐친에게 전권을 맡겨서 그들에 대한 숙청을 지시했다. [14] 취소선이 쳐지긴 했지만 쿠데타를 벌인 인물들 대다수가 고르바초프가 임명하거나 신임했던 인물들이었다. 고르바초프 입장에서는 지인들 및 친구들이 배신을 때린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15] 원채 친 고르바초프적인 논조를 띄었으나 보수파 쿠데타 와중에 보수파에 우호적인 논조를 보인 게 문제가 되어 폐지되었다. 이후 소련 텔레비전 라디오 위원회가 개편 과정을 거쳤고, 이후에 소련 해체로 공중분해되어 수십여개 방송사로 쪼개졌다. 한편 브례먀는 1994년 12월에 부활하게 된다. 물론 친 옐친적 논조를 띄게 된 건 덤. [16] 게다가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이유는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이 전원 급진 개혁파였기 때문이었다. [17] 옐친은 1년전인 1990년 소련 공산당이 개혁개방에 커다란 걸림돌과 방해가 된다고 당 대회에서 대놓고 비난을 퍼부은 후 자발적으로 공산당을 탈당한 전력이 있다. 게다가 당시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자마자 소련 공산당에 대한 무능, 부정부패에 대한 비난을 마음껏 퍼부어 댔고, 부끄러움을 느낀 일부의 공산당 간부들은 옐친의 이런 발언에 대해 수긍하거나 유구무언이었지만 대다수의 공산당 간부들은 적반하장으로 옐친을 욕해대기 바빴다. 그러나 옐친을 따르는 소련 공산당 내의 급진 개혁파 또한 그를 따라서 공산당을 마음껏 비판한 후에 옐친과 함께 탈당했다. [18] 옐친과 고르바초프는 우크라이나 독립에 비판적이었지만 이미 우크라이나의 소련군을 우크라이나군으로 만들어 군권을 장악한 우크라이나에 뭘 할수가 없었다. [19] 1년 후인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마지막 원수가 되었다. [20] 야조프는 극동군관구 사령관 재임 당시 김일성과 어느 정도 친분 관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소련이 80년대 말부터 실시한 개혁개방과 그 여파로 발생한 붕괴는 북한에게도 큰 타격을 가져오고 말았다. 따라서 그걸 막으려고 했던 야조프가 안 고마울래야 안 고마울 수 없다. [21] 이는 쿠데타 과정에서 사망한 군인 수와 완전히 똑같다. [22] 드미트리 코마르(22세), 블라디미르 우소프(37세), 일리야 크리체프스키(28세). 이들도 시위 과정에서 죽은 게 아니라 국회의사당 인근 터널에서 기갑부대 바리케이드로 막는 과정에서 군인들에게 총에 맞아 죽었다. 이를 감안하면 사실상 시위 과정에서 죽은 민간인은 0명인 셈.(이는 벨벳 혁명과 동급이다) 당시 기갑부대를 지휘한 사람이 훗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 총사령관을 역임하게 될 세르게이 수로비킨 대위로, 그는 민간인 사살 혐의로 몇 달간 구금된 후 옐친에게 사면받았다. 이들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참여했고, 고르바초프는 "민주주의를 교살하려는 자들의 길을 막은" 이들의 용맹함을 칭찬하며 이들에게 소련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23] 당장 세계 각국으로부터의 엄청난 맹비난 및 경제제재가 따라올 것이고, 국제 연합의 상임이사국 자리도 간당간당하거나 아에 유엔 내에서 왕따로 전락할 확률이 매우 높다. [24]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은 특히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그간 자신들의 문화와 민족성, 그리고 독립 의지를 탄압해 온 러시아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25] 사실 해당 6개국의 독립 요구는 상당 부분 민족주의적 입장에도 근거한 것이라 쉽게 달래는 것은 불가능한 문제였다. [26] 사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의 9개 구성국이면 영토로든 인구로든 소련의 대부분을 유지 가능했다. [27] 물론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쿠데타는 없지는 않았다. 폴란드가 예인데 친위 쿠데타의 성격이었다. [28] 1991년 기준으로 러시아 은행에 예금되었던 금액이 3500억 루블에 달했는데 공식환율 기준으로 치면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 사라져 버렸고, 이는 러시아 국민들의 생활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러시아 국민들이 높은 금리에도 불구하고 은행에 저축하는 것을 꺼리거나 경제위기가 닥쳤다는 소식이 나올 때마다 외화를 사는 이유를 제공했을 정도로 여파가 어마무시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서방 경제학자들 중에도 이 조치를 1930년대에 벌어졌던 농업 집산화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을 지경이다. [29] 물론 1992년을 기점으로 서방 상품들이 러시아에 넘쳐나기 시작했지만 자체 산업기반 붕괴로 인해 일자리가 증발되어 버렸고, 그나마 있는 직장에서도 물건을 월급 대신 주는 막장 상황도 심심치 않게 있어서 물물교환으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소련 시절에는 돈은 있는데 물건은 없는 상황이었다면 이번에는 물건이 있지만 돈은 없는 상황이 되었다. [30] 물론 소련 시절에도 부패 문제가 상당해서 당대에도 소련을 갉아먹는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을 정도였지만, 소련 시절이 훨씬 나아 보일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각해졌다. 소련 때는 눈치(?)를 봐서 은밀히 착복하는 수준이라면 옐친 때 들어서는 아예 대놓고 거대 기업들을 푼돈에 집어삼킬 정도로 진화(?)하게 된 수준... [31] 이 정도는 정말 심각해서 부유층이 전체 국부의 75%를 장악하고 있다. 이는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미국, 중국, 인도보다도 심한 수치다. [32] 러시아에서는 1980년대 소련 때부터 쿠데타나 서기장이나 대통령이 서거하거나 실각하는 등 나라에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을 때 라디오나 TV 채널에서 백조의 호수의 곡이나 발레 영상을 재생하는 게 전통이다. 링크 [33] 1993년 러시아 헌정 위기 현직 대통령이 주도한 친위 쿠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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