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12:57

노래 혁명


1. 개요2. 배경3. 전개4. 독립

1. 개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1986년부터 1991년에 걸쳐 소련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시민저항 및 독립운동. 노래 혁명이라는 명칭은 독립의 주요 계기가 된 1988년 에스토니아 노래 축제(laulupidu)에서 유래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1940년 독소 불가침조약 이후 소련에 의해 강제로 병탄되었다. 다른 소련의 구성국들에 비해 독립 열기가 강했고 그 결과 다른 구성국이 소련 붕괴와 함께 독립한 반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소련이 존속했던 1990년에 독립을 선언했고 소련 붕괴 직전에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2. 배경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근대까지 튜튼 기사단, 스웨덴, 러시아 제국 등 다양한 유럽 열강의 지배를 받았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그리고 러시아 내전의 혼란을 거치면서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 라트비아 제1공화국으로 독립국가를 처음 수립했다.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멸망 이후 러시아 제국에게 지배당하다가 러시아 내전 중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으로 재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1940년 나치 독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소련은 발트 3국에 소련군 NKVD 병력을 진주시킨 후 괴뢰정부를 수립하여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발트 3국을 합병했다. 특히 발트 3국에 거주하던 많은 시민들은 스탈린의 철권 통치 하에서 시베리아로 끌려갔으며 스탈린 사후 정치범의 사면이 실시된 1950년대 중반에야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소전쟁으로 인해 소련에게 점령당한 발트 3국은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다. 발트 3국은 독일과 협력하거나 자체적인 무력을 결성한 후 소련과 싸워 독립을 얻으려고 했지만 독소전쟁이 나치 독일의 패배로 끝나면서 소련은 1944년 발트 3국을 다시 점령했다. 발트 3국 독립운동가들은 게릴라 활동을 벌여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으나 소련 당국이 비밀경찰과 군경을 동원하면서 계속된 탄압에 1950년대 중후반에 진압당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후기 지도자들은 스탈린 시절보다 보다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고 그렇게 소련은 안정적으로 발트 3국을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들은 물밑에서 반체제 활동을 이어가면서 소련 당국에 저항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언론 검열과 정보 통제가 완화되자 발트 3국에서도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했다.

3. 전개

발트 3국에서 처음 시민저항운동이 시작된 것은 1987년이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에스토니아 동부 래네비루 주 지역에 매장된 인광석을 채굴하고자 하였지만 에스토니아인들은 인광석 채굴이 주변 환경에 큰 위해를 끼칠 것이라면서 강하게 반대했다. 현지 에스토니아인 학자들은 채굴이 환경에 미칠 악영향을 들어 채굴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소련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채굴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채굴 계획이 에스토니아의 한 방송국을 통해 2월에 폭로되자 에스토니아인들은 환경 파괴를 이유로 강하게 소련에 저항했다. 에스토니아 현지의 많은 언론인들도 반대 의사를 명백히 밝혔고 결국 9월 소련 정부는 인광석 채굴 계획을 철회했는데 이를 인광석 전쟁(Fosforiidisõda)이라고 한다. 당시 인광석 전쟁은 그저 환경운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에스토니아인들은 인광석 전쟁과 같은 방식으로 한때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독립'[1]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라트비아에서는 1986년 소련 정부가 라트비아에서 가장 큰 강인 다우가바강에 수력발전용 댐을 세우고 리가에 지하철을 놓을 계획을 세우자 라트비아인들은 라트비아의 인문 유산과 자연 유산을 파괴하는 계획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라트비아 현지 언론은 이 소식을 널리 보도하면서 라트비아인들의 시위를 유도했고 1987년 2월 28일 환경보호회(Vides aizsardzības klubs)가 전후 라트비아 최초의 시민단체로 결성되어 이를 주도해나갔다. 결국 소련은 자금 부족까지 겹쳐 리가 지하철 계획과 댐 건설을 취소했다. 라트비아에서는 이를 계기로 라트비아 인민 전선(Latvijas Tautas fronte), 라트비아 독립운동(Latvijas Nacionālās Neatkarības Kustība) 등 라트비아인의 권익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독소 불가침조약의 공개를 요구하면서 소련의 불법점령 인정 및 독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리투아니아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의 영향을 받아 환경운동으로부터 독립 열기가 타올랐다. 리투아니아 각지의 소련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환경운동을 계기로 1988년에 사유디스(Sąjūdis)라는 환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다. 본래 이들이 다루던 것은 환경 운동이었지만 리투아니아인 사이에서 독립 열기가 고조되어 가자 점차 독립에 관련된 요구를 담기 시작했고 리투아니아 공산당(소련 공산당의 리투아니아 지부)에도 압력을 가하는 수준이 되었다.

1988년 5월 14일 에스토니아의 타르투에서 음악 축제가 열렸는데 당시 축제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덕택에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민족주의적인 에스토니아 노래가 다수 연주되었다. 축제에 참가한 에스토니아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6월에 탈린에서 열린 축제에서는 축제에 모인 사람들이 탈린 시내에서 자발적으로 이러한 노래들을 불렀다. 1991년 8월 20일에는 에스토니아인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거리에 집결했는데 수도 탈린에 전체 에스토니아 인구의 20% 이상인 30만 명 가까운 수가 모였다. 에스토니아에는 수많은 뮤직 페스티벌이 있는데 9월에는 이러한 뮤직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에스토니아 독립 요구가 이루어졌다.

라트비아에서는 1988년 여름에 라트비아 인민 전선(Latvijas Tautas fronte)가 주도하여 라트비아 의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에 2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라트비아 독립 회복을 요구했다.

리투아니아는 사유디스를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점차 최고회의에도 영향을 미쳐 1988년 11월에는 독립 이전 리투아니아 국기와 국가를 합법화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들은 더 나아가 리투아니아어를 리투아니아의 국어로 선포하고 소련 점령 이전의 국기 및 국가를 복원했다.

1989년 8월 23일에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몰려든 2백여만 명이 넘는 군중이 빌뉴스-리가- 탈린 사이의 가도를 점거한 채 손을 맞잡고 노래했는데 그 행렬은 600km 이상 이어졌다.[2] 이는 1939년 8월 23일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발트 3국이 소련에 편입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을 맞아 열린 시위였다. 그 외에도 각지에서 수많은 독립 요구 시위가 일어났다.

발트 3국 국민들은 독립을 부르짖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행동에 들어갔으며 1990년 소련 지방선거가 자유경선제로 전환된 상태에서 치러진 발트 3국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는 민족주의, 개혁 성향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성공하면서 그동안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거수기에 불과했던 지방의회를 실질적인 의회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에스토니아 최고회의는 1988년 11월에 주권선언(suveräänsusdeklaratsioon)을 발표하면서 자국법의 우위를 선언했고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1990년 각각 주권선언 및 독립 복원을 선언하면서 점차 독립을 향해 나아갔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는 발트 3국 중 최초로 국기와 국장, 국명을 바꾸면서 공산주의 폐지 및 자본주의 도입 후 공식적으로 자주적 국가로써의 독립을 선포했다. 같은 해 5월 4일에는 라트비아도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독립했고 5월 8일에는 에스토니아도 국기 및 국명을 변경하고 자본주의로 다시 돌아가 주권 국가로의 부활을 선언하긴 했으나 에스토니아는 이듬해 8월 쿠데타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독립(탈퇴) 선언은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소련은 리투아니아에게 독립 철회와 사죄를 요구했으나 리투아니아는 이를 거부했다. 소련은 무역 봉쇄 조치를 통해 리투아니아 경제를 붕괴시켜 리투아니아 내 소요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근거로 무력을 동원해 발트 3국의 독립 운동을 탄압하고자 했다. 소련군은 각지의 독립운동 시위에 파견되어 주요 시설을 점거하려는 시위대와 대치했고 그때마다 시위대는 인간띠를 이뤄 소련군의 전진을 막았다.

여기에 소련 점령 치하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러시아인 및 공산주의 성향 인사들은 발트 3국의 독립을 막기 위해 자체적으로 독립운동 세력과 다투기도 했고 리투아니아에서도 친소 성향의 폴란드 정치인을 설득해 폴란드인들이 독립에 반대하면서 소련에 잔류하려고 했다. 다만 당시의 여론조사를 보면 발트 3국 거주 러시아인들이 발트 3국 독립에 마냥 반대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이들도 장기간 경기침체에는 질려 있었던지라 독립 찬성에 어느 정도 찬성하는 사람들도 상당한 비율로 있었기 때문에 찬반이 엇갈렸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의 독립운동 탄압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는데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의 내부 혼란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개혁의 실패로 인해 소련 경제에는 엄청난 혼란이 초래되었으니 소련 정부는 혼란을 수습하느라 현지 독립운동에 신경쓰지 못했으며 독립운동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은 역설적으로 고르바초프가 내세웠던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와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또한 발트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들도 독립을 요구하는 마당에 발트보다는 주권국가연맹을 만드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였다.

여기에 소련군 내부에서 무력진압에 반대한 사례도 있었다. 당시 에스토니아 주둔 소련군의 주요 지휘관이었던 조하르 두다예프 공군 소장은 에스토니아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면서 소련군 병력이 공수될 경우 저지하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에스토니아 시민들의 평화시위를 군사력을 이용해 유혈진압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서는 각각 1월 사건(Sausio įvykiai)과 바리케이드(Barikāžu laiks)라고 불리는 소련군과 현지인들 간 충돌이 있었다. 특히 소련군 병력이 빌뉴스 TV탑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시위대에 발포하면서 13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는 곧 전세계 언론에 의해 보도되었고 결국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발트 3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는 선에서 물러서야 했다.

4. 독립

1991년 8월 소련 보수파에 의한 8월 쿠데타가 일어나 고르바초프가 일시적으로 실각하면서 소련군과 독립운동 세력 간 긴장감도 일시적으로 높아졌으나 쿠데타가 소련 내 각지의 거대한 반발에 직면하면서 보수파들은 결국 발트 3국의 독립을 막기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결국 쿠데타는 3일만에 쿠데타 측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8월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고르바초프의 권력도 크게 약해졌는데 고르바초프를 지탱하던 소련 정부 주요 인사들이 8월 쿠데타에 대거 참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휘둘리는 처지가 되었다. 정부조직조차 통제를 못 하는 고르바초프가 발트 3국을 통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소련 정부는 쿠데타 직후 1991년 9월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옐친 역시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발트 3국은 1940년에 나라를 잃은 지 약 반세기 만에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다.
[1] 1989년 에스토니아 주민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에스토니아인 사이에서도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은 56%로 그리 압도적이지 않았지만 1990년 5월에는 에스토니아인 중 96%가 독립을 지지했다. [2] 이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큰 영감을 줬는데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에서도 서울역에서 판문점까지 통일을 염원하는 인간띠 행사를 펼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