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18:46:11

주권국가연맹

파일:주권국가연합.png

1. 개요2. 역사3. 의의4. 대중매체5. 같이 보기

1. 개요

Союз Суверенных Государств
소비에트 주권 공화국 연맹[1] 또는 주권국가연맹 1990년 11월 23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으로부터 제안된 소련 개편 방안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로 인해 논의 과정이 결렬되었으며 이후 1991년 12월 26일 소련 붕괴로 인해 최종 무산되었다.

당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신연방조약을 통하여 1922년 건국 당시의 연방조약을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1991년 3월 17일 9개 공화국에서  소련 존속에 관한 전연방 국민투표가 가결되어 1991년 7월에 최종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같은 해  8월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사실상 폐기되었다. 이후 주권국가연맹은 구소련 국가들이 모인 정치공동체인 독립국가연합의 사상적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2. 역사

주권국가연맹은 소련 말기 개혁을 원하던 시대적 요구가 불러온 산물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소련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언론 및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수많은 정치적 요구가 쏟아져 나왔고, 이에 소련 정부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중심으로 헌법 개정을 통한 공산당 일당독재 폐지, 선거제도 개편을 통한 여러 세력으로부터 정치의견 수용 등 다양한 요구사항을 반영해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정치적 요구 중 연방제 개혁은 연방정부와 공화국정부 사이 가장 중요한 의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소련은 법적으로 연방제 국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 모스크바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사실상 중앙집권제 단일국가에 가까웠다. 정치, 경제적으로 수도에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공화국들은 중앙정부의 뜻이 전체 국가의 이름으로 자국 인민의 뜻보다 우선시되는 사례를 여러 번 경험했다.

대표적으로 1986년 12월 카자흐 SSR에서 장기재임 중이었던 딘무하메드 코나예프가 물러나고 신임 카자흐 SSR 공산당 제1서기로써 러시아인이었던 겐나디 콜빈을 임명하자, 카자흐인들은 모스크바의 일방적인 결정에 반발하며 대규모 항의시위를 열었다. 또한 1987년 2월 소련 정부가 에스토니아 SSR 북부에서 인광석 광산 개발을 확대하기로 결정하자, 당시 에스토니아인들은 광산 개발로 인해 대규모 환경파괴가 발생할 거라며 반발, 훗날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연방 공화국들에서 자국 내 민족의식이 강해지면서, 공화국들은 점차 중앙정부에 기존보다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 공산당 내 보수파들은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여 고르바초프에게 강경하게 대처하길 주문하면서 각 지역 내 정치적 요구 및 민중시위를 소련군을 동원하여 짓밟으려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에서 유혈진압 사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서 정부기관 및 방송사 무력점령 시도로 이어졌다.

하지만 1989년 동유럽 혁명 등으로 해외 정세가 급격히 변하고, 국내 상황이 빠르게 악화되는 상황에서 고르바초프 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처럼 군사력을 사용하여 정치적 요구를 짓밟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2] 더욱이 소련 내 개혁에 대한 기대를 정치적 원동력으로 삼던 고르바초프 입장에서 보수파의 입장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자칫 실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또한 1988년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소련 구성국들에서는 자국 법률이 연방 법률보다 우선한다는 요지의 주권선언이 이어졌다. 이는 더이상 공화국들이 연방정부가 자국에 내린 결정을 일방적으로만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따라서 연방정부는 빠른 속도로 연방 내 공화국들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을 잃고 있는 상황이었다.

1990년 소련 인민대표대회는 소련 공산당의 주도적인 역할을 규정한 헌법 6조를 폐지했다. 이로써 60년 가까이 소련을 통치하던 공산당 일당독재는 막을 내렸다. 당시 실질적으로 소련 입법부 역할을 수행하던 인민대표대회는 공산당 출신 인사들 뿐만 아니라 안드레이 사하로프같은 반체제 인권 운동가나 공화국 내 자치 및 독립운동을 지지하던 지역의원들 등 소련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포진한 상태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대표대회는 카틴 학살 인정, 독소 불가침조약 공개 및 사과 등 소련이 과거 저질렀던 역사적 악행을 규탄할 정도로 소련 사회는 본격적으로 민주화에 한발짝 다가섰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타고,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기존 연방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공화국들의 자치권을 확대하여 추가 독립을 막고 국가를 유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로 개혁하고자 했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11월 23일 기존 연방을 대체하는 신연방조약을 통하여 1922년 건국 당시의 연방 결성 조약을 대체하는 새로운 연방체제를 출범하자고 제안했다. 이어서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새로운 연방체제에 대한 지지를 확인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국민들에게 신연방에 대한 지지를 묻고자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1991년 3월 17일 9개 공화국에서 소련 존속에 관한 전연방 국민투표가 높은 지지율로 가결되었다. 소련 존속 국민투표와 신연방에 대한 지지를 확인한 고르바초프는 공화국 지도자들과 함께 1991년 5월 24일 처음으로 모여 모스크바 근교 노보-오가료보에 위치한 관저에 모여 새로운 연방체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회의 처음에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공화국이라는 호칭보다는 국가라는 호칭을 쓰면 어떨지 제안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이를 거절하면서 국면을 기존과 유사하게 소비에트 주권 공화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Cуверенных Республик, 영문명 Union of Soviet Sovereign Republics)[3]으로 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회의는 최고회의 개편과 예산 편성을 두고 이견을 빚으며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어서 6월 3일 두번째로 열린 회의에서도 공화국들은 정치구조 개편이나 예산 등 주요 안건에 대해 대부분 합의하지 못했고, 당시 회의 참석자들은 일단 기초적인 사항만 먼저 합의한 상태에서 이후 소련 최고회의나 공화국 최고회의를 통해 1991년 가을부터 차차 합의해 나갈 예정이었다.

1991년 7월 29일 밤 고르바초프는 보리스 옐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를 불러 8월 20일 신연방조약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먼저 조약에 동의하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지도자와 함께 8월 20일 모스크바에 모여 주권국가연맹을 창설하는 신연방조약을 먼저 체결한 후, 다른 공화국들과 차차 신연방조약을 체결해 나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조약체결 정보를 입수한 보수파들은 8월 19일 선제적으로 수도 인근 군부대를 동원한 군사 쿠데타를 감행, 8월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사실상 폐기되고 말았다.

8월 쿠데타 이후 복귀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우선적으로 연방정부의 통제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쿠데타 실패 후 소련 공산당과 중앙정부기관이 힘을 잃은 상황에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사실상 와해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 상황에서 기존에 참여하기로 했던 연방 소속국들마저 대거 독립해나갔다. 따라서 당시 추세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소련을 유지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12월 초 소련에 소속된 국가들이 러시아 카자흐스탄만 남은 상황이 되자, 공화국 지도자들은 더 이상 기존 형태로는 소련이 해체되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기존 주권국가연맹 제도를 국가연합 체제에 가깝게 개편한 독립국가연합을 창설하는 벨로베즈스카야 조약과 이를 인정하는 알마아타 조약을 체결했다.

결국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2월 25일 사임을 발표했다. 다음날인 1991년 12월 26일에는 소련 최고회의가 소련이 사실상 해체되었음을 인정하며, 독립국가연합의 창설을 승인하는 문서를 발행함으로써 소련은 공식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의의

주권국가연맹은 소련 붕괴 과정에서 어쩌면 소련이 존속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비록 공화국 간 여러 이견차로 협상 과정은 순탄치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공화국 지도자들은 국민투표 결과를 존중하여 신연방체제를 논의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8월 쿠데타가 발생 직전에는 최종 합의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만약 협상이 실패해 역사대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실제 역사보다는 영연방과 같이 점진적인 형태로 독립했을 것이다.[4]

대체역사 애호가 중에서는 신연방조약이 순조롭게 통과되었을 경우, 기존 소련 체제가 존재하면서도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거나 보다 연방제에 가깝게 개편되었을 것이라 전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약 협상 과정에서 연방 내 공화국 간 의견차가 상당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순조롭게 통과되었을 가능성은 미지수였다.

우선 당시 소련 내 정치, 경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주권국가연맹이 설사 신연방조약을 통과했더라고 해도, 연방정부와 공화국정부 사이 의견 차이로 인해 실제 비준 과정은 험난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소련 내에서도 주권국가연맹 계획이 기존 연방체제를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며 반대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으며, 실제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킨 연방정부 내 보수파가 내건 명분도 신연방조약 체결 무효화였다.

또한 1990년에서 1991년 사이 소련 국내 정치, 경제 상황은 오랜 시간에 걸쳐 안정적인 정치개혁을 추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단적으로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 1990년에는 배급제가 부활했을 정도로 기존 계획경제 체제가 사실상 마비되었다. 이는 소련 및 러시아 정부가 급격한 시장경제 도입을 서두른 배경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1990년대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이 시장경제를 급격히 도입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겪었고, 특히 러시아에서는 공산당을 위시한 보수파 및 강경파들이 정부의 개혁정책에 반발해 무력을 동원하여 정부를 장악하려 했던 8월 쿠데타,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같은 실제 사례를 상기한다면, 기존 보수파와 개혁파의 요구를 조화시키려 했던 고르바초프같은 온건파 정치인들은 권력을 장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실제 역사에 비추어보면 공산당이 권력을 잃고 민족주의 세력이 선거에서 압승한 유고슬라비아나, 경제난을 겪는 민심을 이용해 집권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의 사례처럼 기존 체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급진 정치세력이 집권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만약 주권국가연맹이 출범한다고 가정해도 흔히 대체역사 애호가들이 그리는 강대한 국력으로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신소련과는 다소 거리가 먼 체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 주권국가연맹은 기존 중앙집권체제를 강조한 소련보다는 구성 공화국들의 자치권 혹은 주권이 상승한 국가연합체제가 될 가능성이 유력했으며, 이 경우 연방 내 공화국들 간 이견을 조율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설령 주권국가연맹이라는 형태로 소련의 국가정체성을 보존하는데 성공했더라도 1980년대 말 소련이 겪고 있던 정치, 경제적 위기는 1990년대에도 그대로 이어받아, 정치와 경제를 안정화하기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이 경우, 주권국가연맹으로 개편된 소련 체제가 어떤 상황을 겪게될 지는 미지수다. 긍정적으로 보면 영국처럼 지방정부의 권력을 점진적으로 강화하거나 영연방처럼 점진적으로 국가연합에 비슷하게 개편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처럼 중앙정부의 정치적 양보에도 구성국이 신연방체제에 불만족하고 독립했을 가능성도 높다. 최악의 경우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같이 중앙정부가 소속국을 무력으로 복속시키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권국가연맹은 적어도 소련 입장에서는 8월 쿠데타 체제 붕괴보다는 훨씬 더 나은 대안이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걸친 정치, 경제난 및 체첸 전쟁부터 시작해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이어져 오는 구소련권 내 무력분쟁 중 상당수는 급격한 연방 해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소련이 주권국가연맹으로 개편되는데 성공하거나 실패했더라도, 실제 역사와 같은 급격한 정치적, 경제적 부담을 조금 더 완화했을 가능성도 있었다.[5]

하지만 주권국가연맹이 소련 보수파들의 격렬한 반발 대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정된 실패였다. 특히 1991년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연방 소속국들은 체제 개편 및 정치적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고자 하는 소련 내 기득권 세력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결국 소련 구성국들은 연방 탈퇴 및 독립선언이라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소련은 급속도로 해체되어 버렸다. 이는 마치 좌익 세력을 타도하려다 오히려 좌익 세력의 정치적 발판을 마련한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쿠데타처럼,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구체제를 고수하려 했던 보수파들의 아집은 결국 그들이 그토록 수호하고자 했던 구체제의 멸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비록 쿠데타로 인하여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벨로베즈스카야 조약이나 알마아타 선언 등을 고려하면 오늘날 독립국가연합은 사실상 주권국가연맹의 정신적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4. 대중매체

보통 대중매체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편이다. 흔히 대중매체에서 소련, 러시아를 묘사할 때 자주 묘사되는 이미지인 "강대한 국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역사적으로는 신소련보다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독립국가연합에 가까운 국가였기에 흥미를 느낄 요소가 적다.[6] 다만 대체역사에서 소련이 무너지지 않았을 경우 존재했을 소련의 모티브로 참고되는 경우는 드물게 있다.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사이버펑크 2077가 있다. 등장 이유는 사이버펑크 2077의 원작이었던 사이버펑크 2020 소련 붕괴 이전이었던 1990년 당시 소련에서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신연방체제가 논의되던 시점이었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7] 사이버펑크 2020에서는 신소련이라는 이름으로 재편된 연방이라고 명확히 나오고, 게임 내에서는 이름을 그냥 소련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원작의 체제를 계승한다. 작중 미국이 내전등의 이유로 처참히 망한 세계관이라 경쟁국 없이 잘 성장해서 일본과 함께 세계 패권국이 되었으며 중국을 꾸준히 괴롭히고 있다. 게임 내 에서도 신소련제 무기가 많이 등장하고 설정상 '신미국'에서 만든 차량은 신소련 국영회사 소브오일이 정제한 석유를 연료로 사용한다.

소녀전선에 나오는 루련이 작중의 신소련을 계승한 국가로 나온다.

5. 같이 보기



[1] 소비에트 주권 공화국 연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2] 당시 소련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이미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고, 군사적 역량을 소모한 후였다. [3] 1991년 당시 한국 기사에서는 "소비에트 주권국가 연방"이라고 표기했다. 당시 기사 [4] 아마도 영연방 왕국과 비슷하게 각 공화국에 총리가 존재하고 서기장이 연맹 전체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5] 그러나 분리주의자들과의 전쟁은 아예 없었지는 않았을 것이다. [6] 비슷한 예로 대중매체에서 과거 대영제국을 참고한 국가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어도, 현존하는 영연방을 모티브로 한 작품은 많다고 하기 어려운 편이다. [7] 당시 소련은 일당제 철폐 및 다당제 도입, 자치권 확대 등 8월 쿠데타 이전까지 광범위한 정치 개혁 진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