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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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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기
2.1.1. 집안 배경2.1.2. 유학
2.2. 청년기
2.2.1. 귀국2.2.2. 갑신정변 실패와 유학2.2.3. 귀국과 민권 계몽운동, 좌절2.2.4. 관직 생활 및 경술국치 이전까지의 활동
2.3. 일제강점기
2.3.1. 수감과 출옥2.3.2. 종교 및 교육 활동2.3.3. 감시와 미행, 도청에 대한 충격2.3.4. 중일 전쟁 전후2.3.5. 전향과 친일 협력2.3.6. 백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
2.4. 최후2.5. 논란
2.5.1. 피습2.5.2.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군 지지2.5.3. 친일 협력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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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모리 대학교 유학 시
27세 ~ 29세 사이
40대 초반 1910년대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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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1945년

1. 개요

구한말의 교육자이자 정치가, 계몽 운동가, 친일파인 윤치호(尹致昊, Tchi Ho Yun, 1865년 1월 23일 - 1945년 12월 9일)의 생애를 다룬 문서.

2. 생애

자(字)는 성흠(聖欽), 호는 좌옹(佐翁), 본관은 해평.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었다. 초기 시민 단체라고 볼 수 있는 독립협회와 만민 공동회, 신민회, 청년 학우회의 창립 주역이자 중요한 일원이었다.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멤버의 1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 운동, 민권 운동, 의회 설립 운동을 벌였으나 황제에게 불충하는 역적 취급을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게 되자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본의 미행과 내사 등을 계기로 결국은 친일로 전향하였고 이것이 죽음에도 영향을 줬다.

2.1. 생애 초기

2.1.1. 집안 배경

해평 윤씨 출신으로, 조선 후기 무관이던 윤웅렬과 첩이었던 전주 이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해평 윤씨 집안은 한양 양반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고조부 때에 수원에서 천안으로 이사했고, 고조부의 넷째 아들인 증조 할아버지 윤득실은 천안에서 분가해서 아산 둔포면으로 내려왔다.[1] 이후 그의 집안은 충남 아산과 서울을 오가며 생활한다.

윤웅렬이 훗날 대신 직위를 역임하며 잘 나간건 구한말의 혼란기였고 윤웅렬도 서자에 무관, 윤치호도 서자였기 때문에 원래 조선의 신분 사회에선 서얼 계층이며 문과 과거 시험을 칠수 없는 신분이었다. 즉 양반 사대부가 아니다. 그러나 윤웅렬은 대원군에게 전격 발탁이 된데다가 중국어 실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출세를 하게 되었으나 역시 그도 서얼에 무관 출신의 설움을 느껴 장남 윤치호를 서얼 딱지를 떼주려고 노력했다.

그에겐 14세 아래인 서모[2]가 있었는데 그에게서 30살 이상 나이 차이 나는 이복 동생 윤치왕과 윤치창이 태어났다.

사촌 동생으로 윤치성, 윤치영 등이 있으며, 대한민국의 4대 대통령인 윤보선은 5촌 조카이다.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자 해부학자이며 서울대학교 5대 부총장, 6대 총장을 지낸 윤일선 역시 그의 5촌 조카가 된다. 이외에도 그의 일가 친척들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어마어마한 세력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해평 윤씨 문서 참고.

명문 집안으로 오음 윤두수와 월정 윤근수라는 형제 정승을 9대조 조상으로 두었지만 그의 집안은 방계에서도 한참 방계였고, 윤치호의 고조부 윤발의 대에는 관직을 얻지도 못했다.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3] 벼슬에 올랐지만 술을 좋아해서 일찍 병사했다. 고아가 된 할아버지 윤취동이 자수성가 하여 아산군 둔포면에 대규모의 땅을 마련, 둔포면의 대지주가 되면서 겨우 집안을 일으켜세웠다.

아버지 윤웅렬은 본부인 전의 이씨에게서 딸 한 명만 두고, 첩인 전주 이씨에게서 친누나 윤경희와 윤치호를 두었다. 아버지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데다가, 윤웅렬 자신이 서출로 차별받은 점 등의 이유로 윤치호를 적자로 올려주려 노력했다. 아버지 윤웅렬은 윤치호를 개화파 정치인 어윤중의 서당에 보내 문하생으로 만들어 주었다. 또한 윤치호가 일본에 유학하게 될 때, 서자, 중인들은 기술 학교에 보내고 양반들은 인문학 과정을 배우게 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간청하는 한편 유학 담당자들에게도 부탁을 하여 아들을 도진샤로 들어가도록 주선한다.

장남 윤치호가 자신처럼 서자였던 것과 서자 꼬리표가 달리는 게 마음에 걸렸던 윤웅렬은 1907년 본부인 전의 이씨가 죽자 마자, 재혼하지 않고[4] 첩인 이정무를 본부인으로 올려주어 윤치호를 적장자로 만들었다.

2.1.2. 유학

아버지 윤웅렬의 출세에 이어 삼촌 윤영렬이 동학 농민 운동을 토벌하는 데 기여하고 안성군에 동학을 사칭하는 도적마저 토벌하여 명성을 날리면서 그의 집안은 다시 일어났다.[5] 아버지와 삼촌이 승승장구 출세할 무렵에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 윤웅렬은 그의 기억력이 좋은 것을 보고, 아들 교육에 무던히 신경 썼다.

윤웅렬은 승진 내내 서자라는 이유로 갖은 핍박을 받았고 이는 똑똑한 아들 치호에게도 분명해 보였다. 결국 고민한 끝에 윤웅렬은 친구이자 당시 개화파였던 어윤중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이후 윤치호는 어윤중의 제자가 되어 그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881년 한국 나이로 17살 때 신사 유람단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윤웅렬은 자기 아들이 기술 학교로 보내질까봐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여러 번 간청하고, 신사 유람단 파견 담당자들에게도 부탁하여 아들이 동인 학당으로 가도록 주선해주었다. 아버지 윤웅렬도 서출인 데다가 윤치호도 아직 서자였으므로, 그대로라면 기술학교 연수 확정이었다.

그는 양반집 자제인 유길준이나 김옥균등과 함께 동인학당[6]에 들어가 서구의 과학, 의학, 종교 사상을 접하게 된다. 이후로 그는 중국과 조선의 유교 사상을 혐오하였으며 비인간적인 속박 체제로 보고 개혁을 결심하게 된다.[7] 당시 동문수학하던 김옥균의 조언에 따라 일본어 영어를 공부한다. 그는 처음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 영어교사 어니스트 페넬로사의 부인한테서 알파벳 등 기초만 배우고 그만두었다가, 나중에 동남제도개척사로 일본에 온 김옥균의 권유에 따라 1883년 1월~4월간에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주일본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에게 영어를 배웠다. 이후 미국에 견학을 가기도 하였다.

2.2. 청년기

2.2.1. 귀국

이후 한국으로 되돌아와 고작 4개월을 배운 영어로 조선 공사관 총영사로 파견된 푸트 장군의 통역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조선인들 중에서는 유일무이한 영어 능력자였던 윤치호는 한동안 고종과 왕후의 총애를 받으면서 자주 궁에 입궐했고, 궁중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일기에 기록했다. 특히 왕후는 1884년 정월에 손수 윤치호를 위해 점을 쳐주기도 하고[8], 현상된 동궁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살갑게 대했다.[9] 관직에 나가 통역관과 외무 아문의 주사로 활동하게 되면서도 틈틈이 미국인들을 찾아가 서투른 영어를 고쳐배웠고, 그러면서 김옥균을 통해 감화받고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당과 친분을 유지했다. 공사관 통역관으로 일할 당시의 젊은 윤치호 사진(오른쪽에서 세 번째) 더욱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찍은 사진(오른쪽)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실패를 예언할 정도로 비관적으로 보았고 또 그 예언이 적중했다는데, 이건 예언이고 뭐고 아니었다.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이끌었던 군대가 당시 개화당의 주력 병력이었는데 정변 직전 낌새를 눈치 챈 온건개화파 측에서 윤웅렬의 군대를 북방으로 보내버린다. 윤웅렬은 이를 알고 정변이 실패로 끝날 것이라 예측하여 개화당의 병력 동원 요구를 거절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개화당의 정변이 성공할 가능성에 대비해 온건개화파가 장악한 조정에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는다. 즉 줄타기를 한 셈. 이 집안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는 부분.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만주로 도피했다가 귀국한 이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2.2.2. 갑신정변 실패와 유학

책을 보고 소일하다. 저녁 7시반 알렌 선생 댁에 가서 저녁먹고 놀다가 10시에 돌아오다. 타국 사람이 청하여 대접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내 나라 지체가 너무 더러우니 타국 사람에게 부끄럽기 한량없다. 이런 청을 받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우환이 되니 불쌍하도다. 조선 사람이여, 언제 타국인과 어울려 마음편히 놀 때가 올런지
1888년 음력 6월 2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상단에 언급된 것처럼, 윤웅렬과 윤치호는 원래 급진개화에 발을 걸치고 있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해서 발을 빼고 만주로 도망갔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자신들이 절대로 급진개화파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 용서를 받았고, 이 상황에서도 불안했던 윤치호는 다시 도피성 유학을 하게 된다.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공부 목적으로 유학을 한 그는 배편으로 일본을 경유해서[10]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중서 서원[11]에서 공부한다. 이 당시 윤치호는 성적이 좋았지만[12] 한동안 한량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일도 하지 않으면서 조선에서 가져온 금을 팔아 먹고 살았고, 일본인 학우들과 음주하는 횟수도 잦아졌으며, 청나라 유곽인 '양깅방'에서 일하는 일본인 유녀[13]인 '오꼬마(樂娘) 상'과 자주 동침하며 팁을 주거나 향수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다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유곽 출입과 술을 줄이고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기독교 윤리에 따라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유학생이 된다. 밴더빌트 칼리지에서 수학한 뒤, 그는 4년제 대학인 미국 남부의 조지아 주에 위치한 에모리 대학교로 진학하여 신학을 전공한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는 여행을 다니며 견문도 익히고 미국의 인종차별 및 실력 양성, 국제 사회의 냉엄한 현실 등을 절절히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개혁 시도가 좌절되고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조선의 집권층에 대한 반감은 절정에 달해 조선의 체제와 역사, 유교 문화 전반에 걸친 혐오의 차원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그는 귀국 후 민권 사상과 기독교식 합리주의로 민중을 깨우치겠다고 결심한다. 그 뒤 모교인 중서 서원에서 교사로 생활하다가 귀국한다.

한때 미국 각지를 여행하기도 했고, 미국 체류 중 미국인이 된 필립 제이슨(서재필)과 만나기도 했다. 원래 호기심과 서양 문물의 통로로서 접했던 기독교는 이 시기에 윤치호의 완전한 사상적 지주가 되었고 남감리 교회의 목사로부터 감리회 교인으로 세례를 받기도 한다. 이때부터 윤치호는 한국어로는 자신의 생각을 또렷이 드러낼 수 없다고 여기고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적지 않은 인종 차별을 겪었는데 열차에서 3등 칸으로 밀려나거나 백인 승객에게 폭행, 구타를 당하는 가 하면,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호텔 투숙을 거부당하고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였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아프리카에 선교를 하자는 사람이 흑인을 박멸하거나 아프리카로 추방해야 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윤치호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개인적으로 경험한 부당한 차별에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각 민족과 인종의 능력과 처지는 절대 평등하지 않으며 강자가 불쌍한 약자를 지배하고 보살피는 것이 차라리 약자를 위해 이롭다는 운명론적 사고를 드러내는 모순된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윤치호의 복잡한 사상적 기원을 이 시기까지 거슬러 잡는 것이 이 때문이다.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1890년 5월 18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영국 역사에서 가장 나쁜 시대의 가장 나쁜 군주들과 재판관들의 가장 나쁜 행위들이 인간성과 정의에 대해 내가 보고 읽은 조선 관리들의 불법적이고 사악하며 비인간적인 행위보다 더 나았다.
내 나라에 퍼붓는 경멸에 대해 내가 얼마나 분노하는지, 그런 한편 내 나라가 갱생할 가능성에 대해 내가 얼마나 절망하는지, 어느 누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까? 분노와 절망이 일으키는 감정의 불쾌함과 쓰라림을 솔직히 말해서 견딜 수가 없다.
어떤 젊은이가 교회 회중에게 유색인종을 받아들이기보다 차라리 교회를 허무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편견은 이 사람들이 자랑하는 문명, 박애, 종교와 일치되는 것인가?
흑인 노예제도는, 상황을 고려할 때, 유색인을 위해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인디언이 처했던 상황과 흑인들의 상황을 비교해보라. 한 민족이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을 때는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자기 민족보다 더 개화되고 더 강한 인민에게 통치와 보호를 받으며 가르침도 받는 것이 좋다.
인종 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정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1893년 11월 1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유학 후 귀국한 윤치호는 부친 윤웅렬과 함께 춘생문 사건에 가담하게 되고, 이는 윤웅렬의 존재와 함께 윤치호에게 이후 관직생활의 길을 터주게 된다.

2.2.3. 귀국과 민권 계몽운동, 좌절

1895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민영환을 따라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갔으나 민영환이 러시아 측과의 비밀 외교교섭에서 자기를 배제시켰다고 불만에 가득 차,[14] 민영환과 함께 귀국하지 않고 프랑스어를 배운다는 핑계로[15] 파리로 건너갔다가 뒤늦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윤치호는 이후 자신의 재능을 살려 교육, 및 실력 양성 부분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만민공동회 강연활동을 통해 민권 사상, 민주주의 사상, 만인의 평등론을 설파한다.

이때 그가 관여한 것이 독립협회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에 대해 황제 고종은 그들의 뒤에 일본이 있다고 판단했고, 반역 의도로 인식했다. 독립협회가 해체 당하고 민중이 독립협회를 버리자, 윤치호는 더이상 조선에 대한 발전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독립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를 주장했고, 민권사상과 민중의 참정권을 설파하며 순회계몽강연을 다녔으며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필립 제이슨이 추방되면서부터는 윤치호가 독립신문사를 맡아 사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필립 제이슨은 미국으로 추방되면서 독립신문을 일본이나 러시아 등에 팔아버리려고 했으나, 이걸 만류한 윤치호가 독립신문을 이어받는다. 필립이 추방될 때, 윤치호는 이상재, 유길준 등과 함께 필립을 인천항까지 배웅하였다.

민권사상과 참정권 외치고 민중에 의한 정치를 부르짖었음에도 민중에게 외면당하고, 되려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것에 대한 반발감, 거부감, 황제에게 불충하는 자 정도로 낙인찍히자 그는 민중에 대한 애정을 가졌던 것만큼 민중에 대한 경멸과 증오감을 품게 된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실패 보다 민중들의 맹목적인 보수성과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은 윤치호에게 민중에 대한 쓰라린 배신감과 경멸감, 증오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사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는 초기의 성세에 비해서 결속력이 없었다. 거품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윤치호를 포함한 독립협회 임원들 만큼이나 당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지지한 인물들도 혹시나 잘하면 수준으로 활동하였고, 고종이 무장개입을 발표한 그 순간 참여임원이 급감한다. 다시 말하지만 진짜 무장해산명령은 떨어지기도 전이고, 황국협회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보다 먼저 해산된 상황이었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때에도 민중들이 '갑신정변 이후로 개화라고 하면 외국인들 끌어들여서 반역질한 것으로 인식한다'라고 윤치호 일기에 기록하였는데, 이게 이제는 자신들을 향하게 된 것에 분개했다.

동시에 민권사상을 외쳤음에도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민중들을 경멸하여, 윤치호의 가치관은 개인주의 합리주의로 기운다.

여기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가 공화정을 선포하고, 박영효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 영선군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등의 음모론이 퍼지고, 그 음모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윤치호의 실망감은 극대화된다.[16]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실패를 고위층 기득권 양반, 그리고 민중 무지함에 있다고 보았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여전히 동요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일반 대중의 가공할 만한 무관심이다. 대중은 이 투쟁을 독립협회 회원들과 정부의 사적 분쟁으로 간주한다. 몇 백 년 동안 노예 상태에서 억압받아온 이 아이들은 헌의육조가 국가와 국민 모두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국민한테 희망을 갖다니, 우리가 더 바보였다. 왕이나 국민이나 모두 똑같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노예상태 뿐이다!
윤치호 일기, 1899년 6일 (음력 23일) 일요일

여담으로, 이 무렵 윤치호는 조선인 최초로 자전거를 타 본 사람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미국인이었던 서재필이 조선에 미국제 자전거를 들여와서 타기 시작하자, 윤치호도 그를 따라 자전거를 배워서 타게 되었다고 한다[17][18].

2.2.4. 관직 생활 및 경술국치 이전까지의 활동

함경도 원산에 가서는 씻지 않고 게으르고 지저분한 서민들의 생활을 보고 충격을 받아, 조선 민중을 계몽운동을 통해서 자립할 수 있는 대상에서 아예 훈련을 통해 민족성을 개조해야하는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천안 군수로 있을 때는 천주교 신부가 백성들의 사소한 실수를 엄하게 처벌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영어 실력으로 훈계해서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윤치호가 미국 유학을 가 있는 동안 아버지 윤웅렬은 어떤 점쟁이로부터 자신이 전생에 원산의 석왕사라는 절의 승려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 아들인 윤치호가 원산으로 가게 되자 석왕사에 윤치호를 함께 데리고 가 점쟁이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한 뒤, 사실임을 알게 되자 감격하여 자기 아들까지 함께 불상 앞에서 절을 시켰다는 야사가 있다.[19] 사실이라면 감리교 신자인 윤치호로서는 그저 황당할 따름. 실제로 윤웅렬이 이를 진지하게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그 아들인 윤치호는 감리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휴양지 삼아 석왕사에 상당히 자주 들렀다. 윤치호는 아버지 윤웅렬을 어쩔 수 없이 구시대적인 사람으로 보긴 했지만 나름대로 식견을 존중하며 존경하는 편이었다.[20]

처음 조선 조정은 윤웅렬이 고관이었다는 것 외에도 윤치호의 급진적 활동을 감시하고자 그에게 계속 관직을 내렸다. 그뒤 그는 관직 생활에 꾸준히 투신, 덕원 부윤 겸 감리사, 군수 등의 변방의 지방 수령직과 한성부 판윤, 외무부 협판(차관), 학무부 협판 등의 관직을 지내기도 한다.

외무부 협판 재직 당시인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에 조인함으로써 역사에 첫 오명을 남긴다. 단, 원래는 외무부 대신 이하영이 서명했어야 하나 때맞춰 일부러 병가를 냈기 때문에 윤치호가 독박을 쓴 면은 있다. 이미 이 당시 윤치호는 내각과의 상의를 거치지 않는 고종의 독단적인 외교 활동과, 내탕금을 벌기 위해 황실이 마구잡이로 맺던 경제 밀약[21] 등에 질려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거부 없이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다가 1905년에는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22], 1906년에는 대한 자강회라는 계몽 구국 단체의 회장이 되기도 했다.

1907년 아버지 윤웅렬의 본부인 전의 이씨 부인이 사망했다. 윤치호는 1898년 6월 9일자 일기에 자신의 적모, Greatmother에 대해 기록해 두었다. 윤웅렬은 바로 첩이었던 전의 이씨 이정무를 본부인으로 올려주었다. 아버지 윤웅렬에게는 당시 다옥이라는 기생 출신 첩과 김정순이라는 첩도 있었다. 벼슬살이동안 대한제국에 실망감을 느꼈는지, 1907년에는 안창호가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하여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모습도 보였으며,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실력양성운동에 힘쓰기도 하였다.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가로 보는 설에 의하면 이 시기에 찬송가의 가사를 개조하여 애국가 가사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벼슬을 모두 버리고 경기도 개성으로 내려간다.

2.3. 일제강점기

2.3.1. 수감과 출옥

저열하고 무능한 조선의 민족성으로는 자치를 손에 쥐어준다고 해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 일으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이 일본에게 덮어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 된다.
3.1 운동 이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중에서

1911년 9월에 부친 윤웅렬[23]이 사망하자 12월에 남작 작위를 습작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1912년 2월,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 기소됨으로써 조선 귀족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24] 같은해 10월, 1심 재판에서 징역 10년 선고받고 항고하여 1913년 3월 2심(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6년형 선고, 다시 항고하여 1913년 10월에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6년형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옥고를 치르면서 고문과 회유를 받은 끝에 2년만에 독립 운동에 가담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조건[25]으로 1915년 '일본 천황의 특사'로 경성 형무소에 출소해 석방됐다. 이후 YMCA 총무 겸 연희전문학교 이사를 지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최남선이 찾아가 민족 대표의 한사람으로 공동 서명을 부탁하였지만, 그는 민족 대표자 33명의 부탁을 거절해 버린다. 신익희가 찾아와서 참여할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송진우도 찾아와서 참여할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송진우에게는 열강이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가지겠느냐며 반론을 제기한다.

한편으로 독립 운동 과정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파와 이승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기호파 간 서로 비난이 끊이지 않자 이런 것만 봐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며 일갈했는데, 실제로 기존 한국의 지역 감정이 서북파 vs 기호파가 심했다는 사실은 맞지만, 위의 내용은 신빙성에 의문이 많다.[26]

2.3.2. 종교 및 교육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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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6월, YMCA 하령회가 열렸던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 맨 아래 가운데 중앙에 앉아있는 어린이 뒤에 검은 양복을 입고있는 사람이 이승만, 그 바로 뒤가 윤치호.

일제하에서 윤치호는 평소와 다름없이 교육, 계몽 사업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YMCA의 설립 및 지원이라든지 연희전문학교( 연세대학교의 전신)의 교장을 맡는 등의 행동은 꾸준히 전개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참여 요청은 모두 거절한다.

대표적으로 1919년 3월에 3.1 만세 운동에 민족 대표자로 서명하는 것도 거절했고, 송진우 등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인 대표로 가줄 것을 요청하자 헛된 일이라며 거부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YMCA회관에 일장기를 게양할 것을 자체 회의에서 제기 하기도 하며, YMCA 본관을 태극기가 숨겨져 있을수 있다며 자체 수색한다. 신익희 최남선 등의 거듭된 참여 요구도 거절하였다. 그는 최남선을 촉망받는 학자라며 존경했지만 1936년 이후 최남선이 노골적으로 친일 성향을 보이자, 그와 교류를 끊게 된다.

그밖에 미국 군축 회의의 한국인 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했고, 이승만 등이 주장하는 국제 사회의 협조 하에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외교 독립론 역시 부질없는 짓으로 치부하고 외면하였다. 그는 이승만에게 사람을 보내 임시 정부가 허황된 주장을 한다고 디스했다. 한편 3.1 운동 직후 체포당하는 학생들에 대해 민족 대표자들이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을 두고 어린 학생들을 제물로 삼았다며 극도로 분개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극심한 한국 내부의 파벌 싸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움직이는 한국인의 습성, 유교적 도덕 강박증에 걸린 것을 예로 들며 그는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독립하는건 거의 어려울 것이라 내다봤다.

그 기간 중 그는 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하며, 연희전문학교 교장[27], 한영서원 원장, 이화여자전문학교, 캐롤라이나 학당, 근화여학교의 재단이사 겸 후원인 등을 지냈다. 캐롤라이나 학당은 윤치호가 지은 새 이름인 배화학당으로 교명을 바꾸었는데[28], '배화(培花)'란 '꽃(花)을 기른다(培)'는 뜻이다.

윤치호는 당대에도 약간 별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다만 그의 집안이 아버지와 삼촌 대에 출세하여 고위직이었던 점, 할아버지 때에 아산군 둔포면 일대에 많은 땅을 마련하여 그것을 발판으로 경성부와 온양, 강원도 철원, 전라북도 일대에도 많은 땅과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점 때문에 그의 집안의 영향력, 그리고 집안과는 별개로 윤치호 본인이 초기 미국 유학생이라는 점과 지적인 면모, 사회적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당대의 명사들은 그를 내심 경원시하였다.

2.3.3. 감시와 미행, 도청에 대한 충격

1938년까지 윤치호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어떠한 행사나 천황, 황후, 황태자의 생일, 사망일, 기념 행사에 대부분 불참했다. 대정친목회 등의 관변 단체도 일부에만 참여했고, 명의만 집어넣었지 행사들에 소극적으로 참가한다.

1938년 4월 28일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야마가타 데이사부로(山縣悌三郞)가 조선 총독부가 사람을 시켜서 윤치호의 주변을 미행, 도청한다, 내사한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리고 "좋든 싫든 억지로라도 참여하라"라고 권고하였다. 1940년 5월 초 윤치호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그의 뒤를 밟았다. 총독부에서 조직적으로 자신의 뒤를 캐고 내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윤치호는 충격받게 된다.

2.3.4. 중일 전쟁 전후

일본인들은 25년 만에 조선 반도를 철도와 도로망으로 뒤덮었고, 조선 반도에 항만 시설과 농업과 공업을 향상시켰으며, 조선 반도에 교육과 일본 문화를 보급해 확산시켰다. 이것만 해도 장한 일인데, 그들은 조선의 7배 ~ 8배나 되는 만주를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꿀꺽 집어삼키고는 5년 만에 예전에 누릴 수 없었던 질서와 평화를 정착시켰다. 활력이 넘치는 일본 민족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만리장성을 뛰어넘어 10개월 만에 칭기즈칸이나 누루하치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을 정복했다
1938년 4월 20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마하트마 간디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러한 간디를 위대하게끔 만들었다는데서 영국은 위대하다. 만일 스페인, 독일, 심지어 프랑스가 지배자였다면 그를 30년 전에 죽였을 것이다. 왜 일본 영국처럼 넓은 마음으로 조선을 그렇게 다스리지 못하는가?
- 1939년 4월 1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29]

1934년, 조선 총독부가 그에게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회유책이라 생각한 그는 거절한다. 그 이후 1938년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안재홍 등 국내 독립 운동가, 학자들이 줄줄이 구속 수감되거나 취조받자 그는 신원 보증을 서주고 이들을 석방시킨다.[30]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 일제가 국내외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적극적 압박을 시작했으나 아직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까지는 사회가 미쳐돌아가고 있다면서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내용을 글로 적는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같은 여러 친일 협력 관변 단체에서 연락이 왔으나 거절하였고 일본 황실의 주요한 행사나 일정에서도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안창호의 석방을 주도했으나 거절당했고 안창호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직접 돈을 지불하여 보석시키고 병원에 입원시켜 막대한 비용의 지불하여 치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간의 고된 옥중 생활과 고문, 간질환 등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않아 사망하였다.[31]

오랜 기간 함께했던 동지가 죽었다는 상실감에 1주일에 거쳐 대성통곡하여 가족들이 겨우 진정시켰으며, 그는 자신의 일기에 안창호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목을 적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지속적으로 계몽 활동, 농촌 발전 운동 등에 참여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 인원들을 보호하려고 애썼으며 여러번 조선 총독부로 불려가기도 하였다. 일제는 참의원 자리 제안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윤치호를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윤치호는 그때마다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며 1930년대까지는 적극적인 협력이 드물었다.

2.3.5. 전향과 친일 협력

파일:윤치호 학병.png
학병 권유를 하는 윤치호.
오늘 오후 경성부청 인구조사과에 가서 우리 식구들의 성을 ‘이토’(伊東)로 바꾼 변경서를 제출했다. 오늘부터 내 이름은 일본식으로 이동치호(伊東致昊), 곧 이토 지코다.
1940년 6월 17일 윤치호 일기 중에서

1940년 6월, 윤치호는 창씨개명을 했다. 처음에는 창씨개명이 부질없고 어리석은 정책이라고 했으나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을 때의 불이익과 함께 총독부의 압박이 강해지기도 했고 4월 29일 열린 해평 윤씨 문중 회의를 통해 거의 대다수가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정해서[32] 자신도 개명한 것이고, 자녀들이 총독부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촌 동생 윤치영이나 조카 윤보선[33] 등 가문의 몇몇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을 생각해보면 변명조에 가까워 보인다.[34]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이전과는 다르게 적극적인 친일 행위(학도병 강연, 징병 권유 글 작성 등)을 하게 된다. YMCA와 감리회의 '일본화' 작업을 주도했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지원병후원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핵심 인물로도 참여했다. 문제는 일제의 전쟁 선전, 프로파간다 언론 통제되고 외부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패권이 오래 유지될 것이라는 오판을 하였고 거기에 기초해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시기의 윤치호 일기는 윤치호가 일본에게 기대는 감정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잘 드러난다. 윤치호는 '조선 왕조가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악랄하고 끔찍한 최악의 왕조'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차선내지는 차악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확고하였다. 그는 일본이 잘 되면 조선도 탄압을 덜 받게 될 것이고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도 상승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일본의 지배를 지지했다.

게다가 그의 생각에는 같은 인종인 황인종의 지배가 다른 인종인 백인종의 지배보다는 자비로울 것이라는 인종주의적인 사고가 머리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35] 미국 유학시절 당한 극심한 인종차별이 이런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동시에 윤치호의 일기에서는 태평양 전쟁이 조선인들에게 상무 정신을 길러줄 것이라는 윤치호의 기대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평소에 '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싸워서 얻는 것이다'라는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부커 T. 워싱턴의 어록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진취적인 기풍을 잃어버린 조선 민족이 군사교육을 받고 전쟁에 뛰어들어 싸움으로써 상무 정신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항일 무장 투쟁을 무의미한 짓으로 생각했던 그의 평소 사상과는 얼핏 모순된 듯한 태도인데, 윤치호가 보기에는 아직 근대화 역량이 양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투쟁하느니, 일본의 그늘 아래에서 배울 것은 충분히 배움과 동시에 일본을 도와 싸우면서 실전 경험도 쌓는 쪽이 더 바람직하리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다만 저 발언과 별개로 부커도 일반적인 흑인 민권운동가라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그는 백인 사회에 맞서기보다는 백인 주류 지배를 인정하면서 흑인 사회에 공장을 짓고 자립할 능력을 갖추는 쪽의 입장이였기 때문에 흑인 보수주의의 원류로 불리며, 오늘날 흑인 민권운동가들에게 엉클 톰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미국과의 다가오는 전쟁 분위기와 그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는 일기 중간중간에 일본과 조선의 뉴스를 인용한 글들을 통해 나오며 본인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미 사상적으로 '자신의 머릿속의 이상적인 일본 제국'에 취한 윤치호는 눈 앞에 잔인한 현실이 다가오자 (윤치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리석은 조선인'처럼 현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가 생각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3.6. 백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

당시대 대부분의 한중일 영미권 유학 출신자들의 공통점이지만, 윤치호도 영국 유학파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입지와는 달리 대영제국 미국으로 대표되는 앵글로색슨족을 증오했다. 당연히 미국 유학 과정에 윤치호가 받은 황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 차별이 근원이었다.

윤치호 일기에는 그가 상하이의 공원 입구에서 봤던 푯말 '중국인(황인종)과 개는 출입 금지'의 기억이 자주 거론되며, 유학 시절에 겪은 백인 남성의 발차기 등 신체적 폭력의 경험이 암시된다. 그래서 그의 일기 전반에는 백인들에 대한 깊은 분노가 자주 표출된다.

이러한 백인들의 인종차별 및 침략, 착취에 대응하기 위해 같은 황인종인 일본과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연대,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에 동조하였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을때는 일본의 '우리식 아시아주의'인 대동아 공영권에 전폭적 지지를 보낸다. (예: 영미는 앵글로색슨의 저주받은 식민 통치 기구들을 가지고 지옥으로나 떨어져라. 일본에게 신의 축복을!)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증오와 멸시, 또한 일본의 조선인들에 대한 정책적 차별에 대한 분노(예 : 만주 군관 학교의 합격자률이 일본인 70% 조선인 30%였는데, 만주인 입학생이 늘어나자 일본인 입학 상한선은 그대로 놔두고 조선인 합격선을 20%로 줄였다. 치졸한 섬 야만족들이여)를 일기에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의 의식에 모순이 많은 이유는 순전히 그의 백인들에 의한 차별 대우, 멸시에 대한 원한, 약육강식적 사고에서 기인한다. 즉 '일본이 이길 것이기에 일본을 지지한다'가 아닌, '백인이 세니까 이길거는 같은데, 그래도 백인에게 이겼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에 그나마 당시에 가장 국력이 셌던 황인종인 일본을 지지했다'가 맞은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윤치호의 모습은 똑같이 미국 유학파 출신이었지만 아예 결혼도 백인 여성과 하고 백인종들에 대하여 비교적 큰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았던 이승만 필립 제이슨과는 크게 비교되는 모습이라고 평가 할 수 있겠다. 이승만은 미국의 인종차별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도 개신교인답게 모든 인종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적 관념을 견지하였고, 정치력, 학벌, 인맥 등 여러 수단을 통해 미국 내에서 한국인의 입지를 높이는데 주력했다. 제이슨은 본인의 체력과[36] 의지력으로 차별을 어느 정도 이겨냈다. 하지만 윤치호는 제이슨과는 달리 체력적으로 문약(文弱)했던 면이 있어 인종차별로 인한 수치심과 증오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면화한데다가, 이승만과는 달리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염세주의자이자 사회진화론자로서의 모습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나마 같은 황인종의 국가인 일본에 붙기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2.4. 최후

그뒤 중추원 참의직을 수락하고 1945년 1월에는 일본 제국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임명된다. 2월부터 4월에는 조선인 참정권 허용에 대한 감사 사절단을 꾸려서 일본 도쿄를 다녀왔다.

해방 직후 윤치호는 '한 노인의 명상록(An Old Man's Ruminations)'이라는 영문 서한[37]을 작성해 이승만, 존 하지에게 보냈다. 그는 1945년 10월 15일에 작성한 첫번째 서한에서 한국인은 아직 민주주의를 운영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점과 한국 공산주의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한국인을 지도할 유력자[38]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45년 10월 20일에 작성한 두번째 서한에서는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은 좋든 싫든 '일본인'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며 친일파에 대한 사면을 호소했다. 또 조선 독립 독립운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노인의 명상록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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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ld Man's Ruminations

한 노인의 명상록 1 ㅡ 1945년 10월 15일

1. 듣자니 조선인 민주 정부 운영에 관해 거론한다는데, 내게는 마치 여섯 살 난 어린아이가 자동차 운전이나 비행기 조종에 관해 거론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영국 미국만이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로 성공한 나라입니다. 훌륭한 시민으로서의 도덕심을 갖추고 있는 독일인이나 논리적이고 지적인 프랑스인조차도 영국인이 정립한 민주주의의 표준형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남아메리카에 있는 수많은 공화국 중에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지목할 수 있는 나라가 있습니까? '지금' 조선은 중국이나 만주보다도 민주주의가 덜 준비되어 있습니다.

2. 조선인 가운데는 공산주의를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도의 정치력과 실용적인 지혜를 가진 영국이 서서히 사회주의 정책을 도입해간다면 모를까. 사회주의의 A, B, C, D도 모르는 조선이 어찌 감히 공산주의 국가의 경영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지난 두 달 동안 북위 38도선 이북에서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후견인의 도움에 힘입어서, 공산주의가 조선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에는 따끔한 맛을 보게 될 거라고 우리가 예견했던 바 그대로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약탈과 강탈과 학살을 일삼는 공산주의가 표방하는 부드럽고 자비로운 태도와 억압하고 탄압하고 학대하는 일본 제국주의 사이에서, 즉 악마와 심연 사이에서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요?

3. 그러므로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위해 조선에 필요한 것은 자애로운 온정주의 입니다. 굳센 손과 이타적인 헌신으로 일어설 유력자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의 형식과 구호만을 내세우며 국민을 선동하는 무리와 공산주의의 잔학하고 불합리한 이념으로부터, 교육도 받지 못했고 훈련도 안되어 있는 조선인을 지켜줄 유력자 말입니다. 우리 조선인은 전형적인 민주주의나 급진적인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정치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방종 자유로, 강탈을 공산주의로 오해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4. 조선에 수립될 새 정부가 어떤 형태를 띠든 간에 조선인은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지켜야 하며,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나 한 단계씩 새로운 관습을 도입해야 합니다.


한 노인의 명상록 2 ㅡ 1945년 10월 20일

1.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고 추방당한 사람 중에는 유능하고 유용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 과연 누가 독선적인 비방자일까요? 바로 그런 친구의 대부분이 ' 1945년 8월 15일 정오'까지만 해도 학교, 교회, 공장, 정부, 큰 사업체, 백화점, 결혼식, 장례식 등 모든 공식석상에서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되뇌고, 천황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친일파와 똑같은 행동을 했을까요? 그들은 다만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아니면 감옥에 가야만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누가 남들에게 제일 먼저 돌을 던지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불미스러운 자기들의 과거를 감추고자 조선민을 속이기 위해서 입니다.
(2) 정당 개인 주머니를 채우고자 근심과 공포감에 싸여 있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입니다.

누군가에게 친일파라고 오명을 씌우는 것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일본에 병합되었던 34년 동안 조선의 위상은 어땠습니까? 독립적인 왕국이었나요? 아니요 조선은 일본의 일부였고, 미국 등 세계 열강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즉 조선인은 좋든 싫든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만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 어떤 대안이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아들 전쟁터에 보내고 공장에 보내야만 했는데, 무슨 수로 군국주의자들의 명령과 요구를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군가가 일본의 신민으로서 한 일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른바 친일파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또 자유는 곧 무법이며 공산주의는 곧 강탈이라고 믿는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 애국자'의 공갈 협박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 행위이자 보편적 저의로서 일반 사면이 단행되어야 합니다. 추방된 조선인 가운데 다수는 다방면에 걸쳐서 종전의 십장들[39]로부터 효율성 규율을 배워왔습니다. 각 지역의 상황과 조선인 대중의 요구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재능은 조선의 새 정부 지도자들에게 크게 유용할 것입니다.

2. 그런데 마치 자기들의 힘과 용맹성을 가지고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딜가나 으스대며 다니는, 자칭 구세주의 꼴이란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들은 아둔하거나 수치심이 없는ㅡ아마도 그 둘 다인ㅡ사람들인지라, 조선의 자유는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유만큼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이른바 그 ' 해방'이란 단지 연합군 승리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온 것 뿐입니다. 만일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허세와 자만에 찬 '애국자'들은 어떤 사람이 큰 지팡이로 일본을 내쫓을 때까지 계속해서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읊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허세와 자만의 찬 '애국자'들이 일본을 몰아낸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일 어떤 이변에 의해서 일본이 다시 조선을 탈환한다면, 이 허세와 자만에 찬 '애국자'가 일본을 몰아낼 수 있을까요? 이 허풍쟁이들은 우화에 나오는 어리석은 파리처럼, 다시 말해서 달리는 마차 위에 내려앉아 있으면서 '이 마차는 내 힘으로 굴러가고 있다'라고 외치는 파리처럼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해방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 행운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잃었던 보석을 되찾은 듯한 은혜를 입은 만큼,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는 그것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소한 개인적 야심과 당파적인 음모와 지역간의 증오심일랑 모두 묻어두고,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 공익을 위해 다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민중의 무지와 당파 간의 불화 속에서는 우리 조선의 미래를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열되지 말고 단결해야 합니다.

1945년 8월 19일 그가 살던 경기도 개성부 고려정 집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40] 어느 날인가는 군정청의 어떤 미국 군인이 한국을 두고 " 미군이 무서워하는 세 가지 병이 있다. 다이-어리아(diarrhea), 고우-너리아(gonorrhea), 코-리아(Korea)"라는 농담을 하자, '무슨 의도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며 영어로 따지기도 했다.[41]

윤치호는 3.1 운동에 대하여 "조선인은 바보같이 만세만 부르면 독립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지만 본인의 일기에서도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라고 발언하였는데, 이는 윤치호 자기 나름대로는 무의미한 행동에 목숨이 희생되는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답답했지만 그러나 강대국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약소국을 그런 시위 하나로 독립시키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단념하였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민족과 일본이 더욱 친해져야 일본에게 대우 받을 수 있고 그게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한국은 광복을 맞았고, 윤치호는 그릇된 판단 때문에 저질렀던 친일 행적 및 독립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 때문에 비판에 직면하였고 운신의 폭이 상당히 좁아진다. 대한제국 시절 그가 지방관으로 다스린 지역에서는 그를 위해 세운 송덕비와 불망비가 파괴되기도 했다.[42] 결국 1945년을 넘기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유언"모든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는 삼가라."
(개성) 윤치호 노인은 기간 중풍으로 신음하다가 지난 6일 오후 4시에 개성 장남의 집에서 뇌일혈로 사망하였다는데 병석에서 최후 운명을 할 때에 모든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는 삼가라고 비장한 유언을 남기었다.
- 《대중일보》 1945년 12월 9일 일요일자 제2면 부고

일각에서 제기된 '윤치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친일 관련) 비판에 부끄러움을 느껴 자살하였다'는 근거 없는 자살설이 상당히 퍼져서, 오늘날에도 윤치호가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꽤 많고 언론이나 서적에서도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다.

사후 1960년대에 독립유공자를 포상할 때 그 역시 독립유공자로 선정[43]되었으나 일제강점기 후기에 친일파로 타협한 것으로 모자라 중추원 의원과 귀족원 칙선 의원이라는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2.5. 논란

2.5.1. 피습

1897년 ~ 1898년에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지도했고 서재필이 추방된 뒤에도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이끌었다.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의 요구 사항은 국회 개설, 백성의 참정권이었지만 시중에는 윤치호가 대통령이 되려 한다, 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삼고 윤치호는 부통령이 되려 한다,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만 돌았다. 결국 1898년 11월 그는 민씨 척신인 민영기의 측근 최인환(崔寅煥)의 피습을 당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9일에는 개성 송도 자택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44] 그러나 윤치호는 극적으로 죽지 않았고 괴한은 도주했다.

2.5.2.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군 지지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김옥균, 서재필의 급진성을 비판하면서도 갑신정변에는 긍정적이었던 윤치호는 상하이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된다. 원래는 갑신정변 세력과 한통속이었던 윤웅렬이 갑신정변의 실패를 예상하고 첫째로 국왕과 관료, 고위층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둘째로 민중들의 호응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정변군에 동원할 6백여 명의 함경남도 병영 소속 병사들을 이끌고 내려오다가 부관을 시켜서 중도에 함흥으로 되돌려보내는 것으로 대응한다. 김옥균, 박영효에 실망하여 갑신정변 이후 실컷 까면서도 정변에 내심 호응했던 윤치호와 윤웅렬은 모두 절대로 갑신정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윤웅렬이 고종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이 점이 받아들여지고, 윤치호는 유학을 청해서 상하이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상하이로 간 윤치호는 홍영식 등의 죽음에 충격받아 술로 세월을 보내거나 기방에 출입하며 방탕하게 생활한다. 그를 죽이려고 조선 정부가 보낸 자객도 그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는데, 윤웅렬의 당시 위치로 봐서 신뢰하기 어렵다.

상하이 망명 중에 동학 농민 운동이 벌어져서 삼남(전라, 충청, 경상) 지방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동학 농민 운동을 지지한다. 윤치호는 조선 정부가 상당히 썩고 부패하였으며, 부패하지 않아도 무사안일만을 꿈꾸는 비양심적 관료들이 가득하다며 헤라클레스의 12과업에 나오는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치우듯이 한번에 청소해버려야 한다고 했다. 윤치호가 동학 농민 운동을 지지하면서 삼촌 윤영렬과 사촌 동생 윤치소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당시 윤영렬은 토포사로, 사촌 동생 윤치소는 당시 현직 사헌부 감찰이자, 아산군에서 일으킨 동학군 토벌 의병대의 대장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2.5.3. 친일 협력의 성격

일제 식민지 시기 초기의 소극적 회피나 거절했던 행보에 비하여 1938년 이후, 늦어도 1940년 이후 윤치호는 총독부 자문으로 일제 통치에 소극적이지만 협력적이었으며 부일 협력 등으로 친일 행적이 있지만, 단순한 형태의 친일 매국노로 보기가 애매한 구석이 많다. 결과적으로는 부일 협력과 식민 통치에 소극적이지만 협조적이었던 것은 맞는다. 종목, 시기별로 윤치호의 친일성격을 나열하여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3.1운동 당시에는 현실성이 없다며 참여를 거부하고 냉철히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며 비판하면서도 일기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45]

    고 묘사한다거나, 같은 일기 1919년 3월 2일자에서는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 인사들을 음모꾼들이라며 규탄, 3ㆍ1 운동 후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일제 경찰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1919년 5월 31일 7,8명의 젊은이가 종각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 명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은 사건이 있었는데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윤치호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어들 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하였다고 서술하였다.[46]
  • 일제 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내선일체론을 부정했다. 그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별도의 민족으로 인정하면서 다민족 국가로 거듭날 수 없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인의 가능성을 부정했던 박중양 등과도 입장이 일치된다. 또한 1933년 예종석과 동아 민족 문화 협회에서 펼친 내선일체 성격의 대아세아 운동에도 반대 입장을 내비췄고, 최남선이 일선 동조론을 펼쳤을 때도 일본 국수주의를 따르고 있다며 일기를 통해서 비판한 바 있다. [47] 총독부 정책에도 매번 협력적인 것이 아니라 1934년 총독부가 한글 철자 표기법(이른비 언문 철자법)을 개정하자, 최남선ㆍ지석영 등 112인과 함께 '정음(正音)지' 제5호에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링크
  • 윤치호는 총독부로부터 중추원 참의직을 여러 차례 권유받았으나 죄에 거절하였다, 1932년 중개인을 통해 참의직을 권유하였으나 거절, 1935년 10월에 다시 총독부가 직접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치 않는다는 명목으로 의원직을 제안하였으나 '내가 취임하는 동시에 그대들이 원하는 영향력이 사라질 것'이라며 거절, 1939년 2월에 다시 중추원 참의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 비록 1941년 5월 12일에 드디어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서를 제출해버렸다. 다시 1944년 5월 12일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일본 패망 이후인 1945년 9월 중추원이 해체되어 파면되었다. 총독부는 4번에 걸친 중추원 의원직 권유 끝에 윤치호를 고문에 앉혔다가 3개월만에 그만두고, 5번째에 걸친 권유에서야 겨우 중추원 고문직에 윤치호를 앉혀놓을 수 있었다.
  • 그러면서도 되려 윤치호는 총독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 대상이 되었는데 이유는 1910년 이후 '일본 천황과 일본 왕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의 행사를 기념하는 공·사적 파티나 모임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고, 1938년 5월 조선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당해 1938년 4월 29일 총독부에서 주관한 천황 히로히토의 탄신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당하였다. 그러고서 동년 6월에 경성에서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대회에 불참하고 1930년대 후반에는 당시 경무 국장인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日郞)에게 불려가 협박당한 일도 있다. 더불어 윤치호는 신사 참배를 한번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 정확하게는 기독교 감리회 신자라는 것을 이유로 들어 신사 참배 강요를 번번히 회피하였다. 1935년 12월에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해야 한다며 일제로부터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고, 1936년 2월에는 모친상과 신앙을 이유로 총독부로부터의 신사 참배를 또 한 번 거부하였다.
  • 1940년 5월에는 창씨개명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는 총독인 미나미 지로를 상대로 창씨개명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면서 창씨 개명 실시 기일을 연기할 것을 조언하여 1941년 1월에 대대적으로 창씨 개명이 실시된다. 그는 총독의 앞에서는 창씨 개명의 정당성을 인정했으나, 정작 일기에서는 "내선일체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조선인들에게 창씨 개명을 하라고 격려하거나, 심지어 강요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 민족을 일본의 근간이 되는 민족으로 틀어쥐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윤치호의 창씨 개명도 처음에 윤치호 본인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문중 회의로 결정된 사항을 윤치호가 수락한 것이고 그나마도 "창씨 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난 차마 우리 아이들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만들 수는 없다"[48]는 이유였다.

정리하면 이렇다. 일본과 식민통치에 대한 윤치호의 태도는 시기적으로 변화하는데, 식민지 초기에는 식민통치에 비협조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도 보여주나, 창씨개명과 같이 본인이나 가족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질 때는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고, 일제가 가장 극성으로 날뛰었고 패망의 기색이 뚜렷해지던 1940년대 중순으로 갈수록 일제에 대한 반발은 오히려 줄어들고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시기적으로 변화하지 않은 것으로는 내선일체사상을 인정하지 않은 것, 신사참배를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것, 총독부 간부들이 참여하는 친목 모임에 참여하지 않은 것 등이 있다. 이점은 추세적으로 비슷한 행보를 보였으나, 내선일체에 동조했던 최남선 등과는 구분된다. 더불어 독립운동 인사들과 교류가 잦았고 임시 정부의 존재도 알았으나 일제 패망 전까지 이를 누설한 적도 없었으나 반대로 이들의 독립 운동 참여권유에도 수락한 적이 없었다.

어찌됐던 식민지민에 대한 차별에 대해 개탄하기는 했어도 개인적인 자비심에서 그쳤고, 내선일체 등 일제의 지배 사상을 부정하였어도, 종국에는 일본에 협조하여 식민 지배를 인정하였으므로, 제2차 세계 대전 연간 발칸 반도 일대의 체트니크와 같이 세계사적으로 윤치호와 유사한 신념형 협력파들이 자기들만의 신념으로 조국을 점령한 추축국에 협조한 사례가 여럿 있었으나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구분은 어찌됐든 '추축국의 협력자들'이듯이 윤치호의 행적 역시 개인의 영달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일단은 친일 협력이 맞는다. 다만,시기적으로 변화하는 부분 외에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며 반발한 부분도 있다보니 단순하게 바라보기는 어렵고, 그 성격에 대해서 다각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윤치호가 해방 이후에 주요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친일 행적을 정당화했던 부분은, 일제로부터의 신념유지나 반발행적과는 별개로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난받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1] 둔포면 출신이다. [2] 아버지 윤웅렬의 첩으로 14년 연하이다 [3] 실제 관직이 아닌 일종의 작호이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명예로 받는 작위에 해당한다. [4] 영조가 66세에 15세인 정순왕후와 재혼하는 것, 인조가 44세에 15세의 장렬왕후와 재혼하는 것, 선조가 51세에 19세인 인목왕후와 재혼하는 것 외에도, 당시의 족보들을 보면 양반 사대부 가문은 30세 ~ 40세나 어린 재취 부인을 들이는 일이 빈번하였다. [5] 그런데 윤치호 본인은 동학 농민군을 지지해서 삼촌 윤영렬과 사촌 동생 윤치소를 당황하게 만든다. [6] 이때 윤치호는 일본의 신식 학교에서 연수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서자라는 이유로 유길준이나 김옥균 등과 달리 농업 학교 연수가 예정되었다. 윤웅렬은 이 얘기를 듣고 뇌물을 써 자신의 서자 윤치호를 상급 인문 학교로 진학시킨다. 바로 그 학교의 선생이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7] 일본 유학 전에 박규수 문하에 출입하면서도 여성을 인간 이하로 보는 '당시의' 유교적 성관념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8] '구름이 걷히고 대붕이 높이 난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윤치호는 다음해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9] 다만 이때부터 윤치호는 국정에 관해서 고종과 왕후와는 미묘하게 의견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묄렌도르프가 주장한 화폐 주조에 대해 고종은 큰 관심을 보였으나 윤치호는 급진 개화파의 입장에서 반대 의견을 냈다. [10] 이때 그는 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일환으로 상투를 잘랐다. 당시에는 '외유하고 돌아오면 다시 기르면 되는 것'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나, 해외 체류가 길어지면서 그는 계속 단발로 다니게 되었다. [11] Anglo-Chinese School. 감리회 계열 미션스쿨이며, 오늘날까지도 ACS International로 명맥을 잇고 있다. [12] 중서서원에 입학해서 처음 친 시험에서부터 1등을 해서 중국인 학생들의 질투를 받기도 한다. [13] 이렇게 해외로 나가서 성매매를 하던 일본인 유녀들을 가라유키상이라고 한다. [14] 이때의 일기를 보면 정사 민영환부터 자기 외의 모든 사절단 인원들을 다 폄하하고 있다. 정작 민영환은 윤치호가 유럽에 남겠다고 하자 같이 돌아가지 못해 아쉬워했다고 《해천추범》에 적었다. 정사 체면에 누굴 대놓고 싫어할 수도 없어서 그렇게 썼는지도 모르지만, 가는 길에 100루블도 주고 샴페인도 사줬다니 정이 없진 않았던 것 같다. 민영환은 일반적인 양반과는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져버린 데다 영어에 능통한 윤치호를 보면서 부러움과 놀라움을 많이 느꼈던 것으로 보이며, 여정 처음에는 윤치호를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 역시 가치관에 큰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15] 다만 무작정 핑계만은 아니고, 실제로 윤치호는 민영환 일행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게 되자마자 교사를 구해 프랑스어를 배웠다. 당시는 체류한 지 2개월가량이 경과한 시점. [16] 일기에 따르면, 이 당시 윤치호는 젊은 시절의 이승만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는데 당시에는 그냥 치기어린 젊은이 정도로 취급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승만이 투옥 기간 동안 영어를 갈고 닦아 석방될 무렵에는 상당한 영어 실력자가 되어 나타나자 상당히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7] 1897년 12월경부터 자전거를 배워 한동안 종로 거리에서 연습 삼아 타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너무 어려워서 거의 의욕을 잃을 뻔했다(found it very hard―almost discouraged)'고 자신의 일기에 적을 정도로 배우는 데 애를 먹었던 듯하다. [18] 조선 땅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은 1884년 푸트 미국 공사를 호위하기 위해 조선에 와 있던 미군 해군장교 필립 랜스데일(Philip Lansdale) 중위였다. 랜스데일 중위는 제물포 거리에서 앞바퀴가 큰 페니파딩(penny-farthing)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19] 놀랍게도 그 점쟁이는 윤치호가 미국 유학 중이라는 것과 중국인 아내와 결혼했다는 사실까지 맞혔다고 한다. [20] 다만 절에 있는 승려들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는지, 땡중 취급하며 비하하는 내용과 온갖 푸념을 일기에 썼다. 그러면서도 계속 석왕사에 간 걸 보면 생전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21] 광산 개발권이나 산림 채벌권 등을 팔아가면서 돈을 마련했다. 이마저도 자국 자원의 가치 파악이나 협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 터무니없는 헐값으로 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단, 여기에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부수적인 이유도 있었다. [22] 여담으로, 과거 같이 러시아 사절단으로 나섰던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는 그의 영웅적 죽음에 감탄과 경의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민영환이 개인적으로는 전혀 매력이 없으며 지도자감으론 아닌 인물이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긴 했지만. [23] 이 사람은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었으나, 경술국치 때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다. [24] 비록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옥고를 치르나 그가 105인 사건을 주동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실은 105인 사건 자체가 애당초 실체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25] 이 당시 윤치호의 전향서 '우리 조선 민족은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 이후에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해서 양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나 동화에 대한 계획에 참여해 힘이 미치는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 볼 생각이다'. [26] 1933년 10월 4일자 윤치호의 일기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으며 여운형, 신흥우 등은 자신에게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 결사를 자신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윤치호는 "서북파가 오랜 세월의 억압 속에서 기독교와 근대 교육을 받아들여 지도자들로 부상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서북인들은 일본인들보다 기호인들을 더 증오하기에 일본인들에 아첨해 기호파에 대한 비열한 계략을 동원’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기호인들의 결사는 응집력이 없기에 불가능할 것’이니 ‘허심탄회하게 교류하고 신사적으로 대하자는 태도를 보인다."라고 했다고 한다. 안창호에 대한 지역 감정 의혹은 1920년대부터 일기에 기술되어있었고 실제로 독립운동 와중에서의 기호파와 서북파 출신 간 갈등도 상당히 첨예한 양상을 보였다.

다만, 1933년 10월에 일기가 쓰여질 무렵 안창호는 대전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윤치호를 만날 일도 없던 시기였다. 실제로 윤치호와 만나게 되는 건 그가 출옥하고 난 뒤 병약했을 때 모습이었다. 참조 따라서 윤치호의 일기에 나온 1933년 10월 4일 일기에 대채 언제 만나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의문이 따른다. 어찌됐건 당시 서북/기호 출신의 결혼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된 것만 봐도, 오늘날 영호남 갈등처럼 상당히 골이 깊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서북파의 중심에 안창호가 있었던건 두말할 것도 없고.

기호파 박멸이라고 하면 대단한 망언처럼 들리지만, 기호파의 근거인 유생이나 지주 세력에 대한 경멸이라면 안창호 입장에선 할 법도 한 극언이 된다. 굳이 현대의 예를 들면 진보성향 지지자가 TK를 디스하거나, 보수성향 지지자가 호남을 디스하며 저것들 없어야 독립(통일) 할 거라고 오버를 하는 셈.
[27] 이 사람이 교장을 맡고 있을 당시 연희전문을 졸업했던 학생들 중에는 윤동주 송몽규도 포함되어 있었다. [28] 1910년 [29] 이 일기를 쓰고 얼마 안돼서 그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30] 아닌게 아니라 이 사건에 윤치호의 사위인 정광현이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31] 윤치호 일기에선 당시 석방을 위해 움직이던 윤치호를 보고 김활란이 분노하였단 기록이 남아있다. [32] 사촌 동생 윤치영이 거의 유일하게 결사반대 했다고. [33]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는 창씨개명했다. [34] 여담으로 윤치호가 창씨개명하자, 미나미 지로 총독은 윤치호가 이번에야말로 전향했다고 판단했는지 그의 집에 들쭉술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35] 이에 대한 반론으로, 윤치호 일기에서 '일본의 지배에 대해서 매우 강압적이라고 비판하며, 이에 간디를 예시로 들어 인도가 일제 치하에 놓여있다면 일본인들이 그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라 적었다는 것을 내세운다. 그런데 윤치호는 다른 서구 열강의 식민 통치와 일본의 통치를 비교해 비난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그래도 조선에겐 같은 황인종인 일본 제국이 더 낫다.'는 인종론에 입각한 결론으로 끝난다. [36] 일단 키가 177.8cm로(그의 미국 여권에 신장이 5피트 10인치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 당시 미국인 남자 평균 키는 173이었다.) 조선 말기 조선인으로서는 유달리 키가 컸고, 갑신정변 당시 직접 칼 들고 호위를 맡았을 정도로 무예에 조예가 있었던 사람이다. 미국에서 미국인 여성인 뮤리엘과 결혼하게 된 것도 그녀의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을적에 불량배로부터 그녀를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서였다. [37] 총 2통으로 이루어진 이 편지들은 윤치호 유고집에 실려 있다. [38] 여기서 말하는 유력자가 구체적으로 이승만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39] 각계 각층의 일본인 엘리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40] 坪江仙二, 《改正增補朝鮮民族獨立運動史》 (高麗書林, 1986년) 410쪽 [41] 그런데 이 농담은 미군정의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 중장부터가 상당히 자주 써먹어서 당시 주조선 미군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42] 지방관으로서 윤치호는 상당히 청렴하고 합리적으로 공무를 수행했으며, 지방에서 행패를 부리던 외국인들을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법률 지식으로 역관광시키는 등 여러 일화들을 남겼다. 탐관오리가 대놓고 극성을 부리던 대한제국 말기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였기에.. 일단 윤치호 자체가 개인적으로 그런 탐관오리형 인물들을 상당히 혐오했다. 여튼 지역 주민들에게 그는 상당히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43] 민족계몽운동 덕인 듯 하다. [44] 坪江仙二, 《改正增補朝鮮民族獨立運動史》 (高麗書林, 1986년) 410쪽 [45]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3/05/2004030555329.html [46] 윤치호 일기 1919년 5월 31일 [47]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년 ~ 1943년》 (역사 비평사, 2001년), p.39 [48] 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년 ~ 1943년》 (역사 비평사, 2001년), p.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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