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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9월 28일 |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現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룡정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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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3월 7일 (향년 27세) |
일본 제국 후쿠오카현 후쿠오카 형무소 | |
묘소 |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룡정시 즈신진 |
국적 | 조선[2] |
본관 | 은진 송씨 (恩津 宋氏) |
본적 |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 422번지 |
등록기준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3] |
가족관계 |
친할아버지 송시억,
친할머니 장씨 외할아버지 윤하현, 외할머니 강씨 아버지 송창희, 어머니 윤신영 여동생 송한복[4] 남동생 송우규[5] 외삼촌 윤영석[6] 외숙모 김룡[7] 사촌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 윤범환, 윤혜원[8] |
직업 | 독립운동가, 수필가 |
학력 |
명동소학교 (졸업) 화룡현립제1소학교 (졸업)[9] 은진중학교 (중퇴)[10] 중화민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중퇴)[11] 대성중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문과 / 졸업)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선과생 / 제적[12])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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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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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귀향한 송몽규와 윤동주[13] |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
- 《윤동주 평전》
한국의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제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한국어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 왕위지(王偉志)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았다.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소무라 무게이(宋村夢奎)인데 보면 알겠지만 자신의 이름에 그냥 마을 촌(村)이라는 글자 하나만 더 집어넣은 것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상당수가 이런 식의 창씨개명을 많이 했다.- 《윤동주 평전》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십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이다.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윤동주 평전>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윤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쳐진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했다. 윤동주가 약관의 나이에 쓴 시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을 보면 그 윤동주가 열등 의식을 가졌던 당시 송몽규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출생
1917년 9월 28일 만주 간도성(間島省) 연길현(延吉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현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룡정시 지신진(智新鎭) 명동촌(明東村))의 외가에서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던 아버지 송창희(宋昌羲, 1891~1971)와 어머니 파평 윤씨 윤신영(尹信永, 1897~?)[14]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윤신영이 쏟아져 내리는 별을 자신의 품에 받는 태몽을 꾸어 태명은 '꿈별', 아명은 한범(韓範), 이름은 꿈 몽(夢)과 별 규(奎)로 짓게 되었다. 아래로 여동생 송한복(1923년생), 남동생 송우규(1931년생)이 있었다.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도 경흥도호부 노면 웅상동(현 함경북도 라선시 웅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한성부에 유학을 다녀왔다. 은진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學校)라는 교육기관을 세웠으며 송몽규의 첫째 숙부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하였고 둘째 숙부 송창근은 일본· 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송창희는 25세 때 경기도 경성부에서 유학을 마치고 명동둔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 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의 출생 이후 12월 30일 파평 윤씨 문중의 외아들 윤영석의 슬하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윤동주이다. 이 둘은 3달을 차이 두고 함께 태어나 5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영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송창희가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2.2. 학업
1925년에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고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하였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십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 것을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김신묵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김신묵 장로는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이다.
1929년 봄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종사촌 윤동주와 함께 대랍자에 위치해 있던 중국인(한족) 학교인 화룡현립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20여 리의 등교길을 매일 윤동주와 함께 다녔다고 한다. 1932년 3월 화룡현립제1소학교을 졸업한 뒤 캐나다 장로회가 설립한 미션스쿨인 은진(恩眞)중학에 입학하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투고는 아명인 송한범으로 했으며 지금도 문인으로서는 가장 선망받는 등단 루트인 신춘문예가 당시 기준으로는 중앙일간지 숫자 자체를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었고 다른 등단 경로가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높은 권위를 가진 데서 빼어난 성과를 거둔 것으로서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썼는데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그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그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 게 몇 권 있다고 한다.
2.3. 독립군 투신
4학년이 시작된 1935년 4월경 그는 돌연 은진중학을 중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재해 있던 남경으로 떠났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은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학전공 출신의 민족주의자로서 송몽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에게 감화된 송몽규는 본격적으로 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학업을 중단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상해 임정을 찾아간 그는 중화민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설치된 한인반(韓人班) 제2기에 입교했다.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반이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 총통에게 지원을 받게 되면서 항일무력투쟁에 종사할 한국광복군의 기간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1934년 2월부터 편성된 것으로서 100여 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35년 제2기생으로 입교한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한인반의 존재는 일제의 정보망에 걸리고 말았고 일본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해오자 중일전쟁 개전 이전이었던 당시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1년 8개월여 만인 1935년 10월 중앙군관학교의 한인반을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채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관학교를 마치지 못했고, 이후 김구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임정 내부의 격렬한 파벌 투쟁에 염증을 느끼게 되면서 1935년 11월 제남지구(濟南地區)로 넘어가 독립운동가 이웅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36년 4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15]
6월 27일 조선으로 압송된 그는 본적지인 함경북도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어 수사를 받다가 8월 치안유지법 위반과 살인 등의 혐의로 청진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취조를 받았다. 다행히 검사국에서는 고작 만 17세에 불과했던 그의 나이 등을 고려해 담당검사가 불기소 처분하였으며 웅기경찰서로 돌려보내진 뒤 9월 14일에 석방되었다. 제남시에서 체포된 후 5개월 동안 일제 공안당국에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재판에 넘겨지진 않았지만 이 때부터 그는 일본 제국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등재되어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들의 밀착 감시 대상이 되었다.
2.4. 학업 재개
용정으로 돌아온 그는 1937년 4월 용정의 대성중학교에 편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 대성중학교는 만주국 체제에서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로 이름이 바뀐 중국인 중학교(4년제)로서 일본제국의 구제중학교(5년제) 대비 수학연한이 1년 짧았기 때문에 일본의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에 진학하기 어려웠고 구제전문학교에 들어가려고 해도 전문학교입학검정시험(전검시험)에 먼저 합격해야 했다. 이러한 연유로 윤동주와 문익환 등이 은진중학교 4학년 중퇴 후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유학했으며 북간도로 돌아와서도 조선총독부 교육과정을 따르고 일본 제국 내무성과 외무성의 해외지정(인가) 학교인 광명중학교(광명학원 중학부)에 들어갔던 것이다. 송몽규는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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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연희전문학교 합격자 명단 붉은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는 사람이 윤동주와 송몽규[16] |
대성중학교 졸업 후 4년제 출신이란 핸디캡을 안고 있었음에도 두뇌가 매우 뛰어났던 그는 1938년 봄 윤동주와 함께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나란히 합격하였다. 송몽규와 윤동주 둘 다 경성의전이나 세브란스의전 같은 의대 또는 경성법전 같은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과에 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갔다. 군관학교 한인반 사건을 통해 조선인이 무력투쟁으로 일본에 승리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함을 절실하게 깨달은 송몽규는 문화에서 대일항쟁의 수단과 방법을 찾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연희전문학교 입학 후 그는 1938년 8월 조선일보에 시 《밤》을 발표하였으며 1932년에 창간된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회의 문예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17]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 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18]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18]
그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그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조선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 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차석으로 졸업(우등상 수상)하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내지로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의 선과생[19] 선발시험에 합격한 송몽규는 교토제대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고 이 시험에 낙방한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생으로 들어갔다가 여름방학 때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선과생 입시에 응시했으나 탈락하자 1942년 10월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생으로 옮겨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1942년 10월부터 1943년 7월까지 그는 윤동주, 그리고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2.5. 체포와 사망
1943년 7월 10일 그는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된 후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제의 조선어문 소멸 유도 등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무력으로 종결시키기 어려우므로 조만간 강화조약이 체결될 가능성이 크며 이때 버마와 필리핀 등이 독립국으로 참가하려 할 것이므로 조선 독립의 여론을 환기시켜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2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옥사에 대해서는 윤동주 항목 참조.[20] 사후 송몽규의 시신은 후쿠오카의 한 화장장에서 화장되었는데 화장된 후 남은 뼈를 절구에 빻을 때 뼛가루가 자꾸 절구 밖으로 튀자 송몽규의 아버지가 "내가 어찌 몽규의 뼈 한 점이라도 이 왜놈들의 땅에 남길 수 있겠느냐!"라고 분노하여 그의 뼈가 튄 흙까지 쓸어 함께 수습했다고 한다.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썼다.
3. 사후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020년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그의 시 하늘과 더불어의 구절을 이용한 응원가를 제작하였다.
4. 송몽규 전집
그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학교에 <문우>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21]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술가락 -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21]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술가락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 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사념)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욕)의 殘滓(잔재)만
쓰디쓴 追憶(추억)의 反(반)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연인)이 없어 孤獨(고독)스럽지 않아도
故鄕(고향)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기원)하련다.
- 하늘과 더불어 -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 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사념)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욕)의 殘滓(잔재)만
쓰디쓴 追憶(추억)의 反(반)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연인)이 없어 孤獨(고독)스럽지 않아도
故鄕(고향)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기원)하련다.
- 하늘과 더불어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 밤 -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 밤 -
5. 대중문화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이런 날, 윤동주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이런 날, 윤동주
윤동주를 주제로 한 59편의 시를 엮어 <윤동주의 빛>이라는 시집을 낸 이탄 시인이 해당 시집에 <송몽규>라는 시를 적어놓은 것이 있다.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 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종사촌의 아들 송몽규도
일본에 와 있었다
송몽규의 그림자는 넓고 넓었다
그는 그 안에서
쓰러진 벼농사를 일으켜 세우고
물을 대주는 일도 해야 했다
신작로에 말없이 백힌
돌 하나
그 돌 하나만이라도
뽑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의 힘을 누를 것인가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에게 덤벼들 것인가
벌은 날아다니는 곤충
개미는 애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곤충
이 두 곤충의 삶을 비교하여
벌은 벌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만해의 부릅뜬 언어, 조선독립의 이유서
벌은 일본이고 개미는 조선일지라도
각기 살아가야 한다
벌이 어떻게 개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송몽규의 생각도 이러했으리라
벌은 하루 종일 꿀을 모아야 하지만
저 허리가 잘록한 개미, 기어다니는 개미는 개미대로 즐거워야 한다
송몽규의 온몸은 이런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투로 그의 그림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윤동주의 뒤
윤동주의 앞
항상 그림자 안에서 지냈다
윤동주는 그림자만 보아도 뜻을 알았다
그 뜻에 다치거나
그 뜻에 흠집이 생기거나
그 뜻에 동티가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더 첨가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림자를 잘 보관시키도록 해야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철나무
껌껌해도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항상 빛을 잃지 않은 사철나무의 뜻을 새삼
나무만큼 알았다
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
사철나무나 저 별들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
하나가 동적이면
하나는 정적이다
윤동주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이 같았다
하나는 그림자, 하나는 그림자에 싸인 사람
이탄, 송몽규
송몽규,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 했던 벗 강처중(1916-?) 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둘을 추모하였다.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 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종사촌의 아들 송몽규도
일본에 와 있었다
송몽규의 그림자는 넓고 넓었다
그는 그 안에서
쓰러진 벼농사를 일으켜 세우고
물을 대주는 일도 해야 했다
신작로에 말없이 백힌
돌 하나
그 돌 하나만이라도
뽑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의 힘을 누를 것인가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에게 덤벼들 것인가
벌은 날아다니는 곤충
개미는 애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곤충
이 두 곤충의 삶을 비교하여
벌은 벌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만해의 부릅뜬 언어, 조선독립의 이유서
벌은 일본이고 개미는 조선일지라도
각기 살아가야 한다
벌이 어떻게 개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송몽규의 생각도 이러했으리라
벌은 하루 종일 꿀을 모아야 하지만
저 허리가 잘록한 개미, 기어다니는 개미는 개미대로 즐거워야 한다
송몽규의 온몸은 이런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투로 그의 그림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윤동주의 뒤
윤동주의 앞
항상 그림자 안에서 지냈다
윤동주는 그림자만 보아도 뜻을 알았다
그 뜻에 다치거나
그 뜻에 흠집이 생기거나
그 뜻에 동티가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더 첨가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림자를 잘 보관시키도록 해야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철나무
껌껌해도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항상 빛을 잃지 않은 사철나무의 뜻을 새삼
나무만큼 알았다
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
사철나무나 저 별들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
하나가 동적이면
하나는 정적이다
윤동주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이 같았다
하나는 그림자, 하나는 그림자에 싸인 사람
이탄, 송몽규
(전략)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2016년작 한국 영화 < 동주>에서는 박정민이 송몽규 역으로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과 함께 사실상의 공동 주연으로 열연했는데 이 작품으로 그해 다수의 주요 영화제에서 신인 남우상을 차지했다.
[1]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일본식 이름은 소무라 무케이(宋村夢奎), 가명은 고문해(高文海), 왕위지(王偉志) 이며 필명은 꿈별(자신의 이름 글자인 꿈 몽(夢)과 별 규(奎)를 한글로 풀어쓴 것인데 본래 태명이었다고 한다.), 호는 문해(文海)('문학의 바다'라는 뜻.)이다.
[2]
조선호적을 근거로 일제 조선총독부는 송몽규에게 재판관할권을 행사했다.
[3]
1948년 정부 수립 이전에 사망하고 후손이 없어 대한민국 호적에 등재된 바 없었지만
2022년 8월
국가보훈처에 의해 가족관계등록부가 창설되어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등록기준지를 부여받았다.
출처기사
#
[4]
1923년생
[5]
1931년생
[6]
어머니 윤신영의 오빠이자 윤동주의 부
[7]
윤동주의 모
[8]
윤동주의 친동생들
[9]
1931년 졸업반으로 편입하여 1932년 졸업.
[10]
3학년 수료
[11]
1935년 한인반 2기로 입교했으나 동년 한인반 폐지에 따라 중퇴.
[12]
옥중 사망으로 제적.
[13]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윗줄 오른쪽이 윤동주. 윤동주의 왼쪽은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 송몽규의 왼쪽은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이며 몽규, 동주와 학우인 윤영선, 오른쪽은 윤영선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14]
시인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2)의 첫째 여동생이다. 윤동주에게는
고모가 된다.
[15]
『특고월보』에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의 권유에 따라서 자수해서 압송되었다면 압송 때부터 옥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웅기의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 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16]
조선일보
1938년
4월 3일 석간 2면에 실려 있다. 당시
구제전문학교 같은
고등교육기관은 물론이고
구제중학교/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도 드물었기 때문에 주요 일간지에 합격자/졸업자 명단이 실렸다.
[17]
목차에서는 "하늘과 더브러"로 되어 있다.
[18]
출처
[19]
구제대학 학부에서 특정 학과의 수업을 골라 들을 수 있었던 일종의 특별청강생으로서 그 이수 성적이 우수하면 별도 시험을 거쳐 학부 본과(학사과정)에 편입해 졸업할 수 있었다.
[20]
영화
동주에서도 송몽규(
박정민 분)가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 앞에서 '형무소에서
이상한 주사를 맞고 있는 바람에 동주는 먼저 죽었고 나도 얼마 안 남았으니 고향에 묻어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21]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