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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평가 | ||
가족 관계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게르마니아 전쟁 영어: Germanic wa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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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12년~ 서기 16년 | |
장소 | 게르마니아 | |
원인 | 게르만족을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복속시키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야망 | |
교전 세력 | 로마 제국 |
체루스키 수에비 마르코만니 수캄브리 우스페테스 텐크테리 채티족 |
지휘관 |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게르마니쿠스 |
아르미니우스 세기메루스 마로보두스 |
병력 | 11개 군단 | 불명 |
피해 | 3개 군단 궤멸 | 불명 |
결과 | 로마 제국의 게르마니아 정복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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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2년 ~ 서기 16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 제국이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필생의 숙원으로 삼고 강력하게 추진한 전쟁이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2. 배경
기원전 31년 최대의 경쟁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악티움 해전에서 꺾고, 로마 제일의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 비견될 군사적 위업을 달성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고, 로마 제국을 지상 최강의 국가로 우뚝 세우려는 야망에 불탔다. 그는 로마 주변의 여러 지역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게르마니아였다.게르마니아에 거주하는 게르만족은 로마인과 오래도록 충돌했다. 기원전 100년대에 일어난 킴브리 전쟁은 지중해 세계 최강의 전투민족을 자처하던 로마인들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겼고,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할 때는 게르만족과 종종 충돌했으며, 이후에도 로마의 영역을 종종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기원전 38~37년, 갈리아인들의 반 로마 봉기를 진압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반란을 지원한 게르만족을 토벌하기 위해 카이사르에 이어 두 번째로 라인강을 건넜으며, 라인 강 좌안에 오피둠 우비오룸(oppidum Ubiorum)을 건설했다.[1] 기원전 29년 가이우스 카리나는 갈리아 봉기를 지지한 수에비족을 토벌하고자 라인 강을 재차 건넜으며, 기원전 25년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는 로마 상인들을 약탈한 게르만족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기원전 27년,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공식적으로 로마의 모든 평시 및 전시 권력을 움켜쥔 직후 다시 게르마니아에 눈을 돌렸다. 이 시기, 갈리아 일대에서 반 로마 운동이 재차 벌어졌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보냈다. 이 봉기는 손쉽게 진압되었는데, 아그리파는 반란 배후의 세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갈리아 내 반 로마 세력이 사용한 무기가 레누스 강(오늘날의 라인 강) 너머의 게르만족들에게서 밀수한 것을 파악했다. 이에 아그리파는 군대를 이끌고 도하하여, 보복 성격 차원에서 추가적인 군사행동을 벌였다. 허나 이 군사작전은 당시 라인란트 일대에 주둔한 로마군의 숫자가 적고, 로마의 갈리아 편입 절차 역시 완벽하지 않아 대대적인 정복전으로 확전되지는 못했다.
같은 해인 기원전 27년, 로마에 있었던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직접 갈리아의 전초기지를 방문했다.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간 이유는 아그리파 밑에서 두 소년이 군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목적보다 핵심이 된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갈리아 및 게르마니아 일대를 시찰하고 자신이 후계 구도에 염두에 둔 두 소년을 현지의 로마군에게 공개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배경하에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가 아그리파로부터 직접 군사경험과 군무교육을 받은 직후, 로마로 귀환하자마자 마르켈루스를 자신의 딸 대 율리아와 결혼시켰고, 티베리우스와 연애 중인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결혼을 사실상 허락했다.
7년이 지난 기원전 20년, 이탈리아와 갈리아를 오간 아그리파의 주도 아래 갈리아 일대의 속주화 작업이 거의 완료되었다. 로마는 갈리아 일대에 도로를 깔고, 대대적인 인프라 개선 작업을 하면서 각 도시의 병참 물자 수송 작업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로마군은 1년 뒤인 기원전 19년부터 기존 주둔지에서 동진하여 라인 강 서쪽 변경으로 이동했다. 이후 로마군은 2년 동안 해당 주둔지에 군사요새를 건설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 군사작전에 대한 보고를 받은 직후, 로마의 평화와 갈리아의 안전을 위해서 반드시 게르마니아를 손에 넣어야 된다고 판단했다.
기원전 18년 또는 17년, 수캄브리족, 우스페테스족, 텐크테리족의 연합군이 갈리아로 쳐들어와 국경 지역을 약탈했다. 이를 막으러 출정한 갈리아 총독 마르쿠스 롤리우스는 게르만 연합군에게 격파당했고 5군단 알라우다에의 독수리 깃발을 빼앗겼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외교를 통해 수캄브리족을 회유하여 로마의 편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이때부터 게르마니아를 정복하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게 되었고, 대대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총 3년이 걸렸다. 아우구스투스는 먼저 오늘날 프랑스의 리옹인 루그두눔에 전쟁 자금을 위한 조폐국을 신설했다. 루그두눔은 이탈리아와 알페스(오늘날의 알프스 산맥)를 지나면 나오는 갈리아 남동부의 전진 군사 기지이자 새로운 도시로서 기능해야 되었기에 조폐국 신설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으로 직접 진행되었다. 이 조폐국을 통해 로마는 병사들의 월급과 전쟁비용에 들어갈 자금을 마련했다. 이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 일대에 대대적인 인구조사를 단행하여, 인구에 따른 세금 체계를 마련하고 갈리아를 장기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최전선 기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15년, 양아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시에 따라 로마를 떠나 갈리아로 향했다. 대 드루수스는 갈리아 총독 대행 겸 갈리아 전역 권한 대행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 역할은 아그리파가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그리파는 동방 전체를 재정비하고, 동방 속주들의 행정체계 정비를 담당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갈리아로 파견될 수 없었다. 따라서 23살의 드루수스가 갈리아로 떠났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철저히 계획해 내린 결정이 앞당겨지면서 수행된 조치였다.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최측근들과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누나 소 옥타비아 등의 고견 아래에서 아내의 두 아들 중 차남이며, 누나의 막내사위인 드루수스에게 갈리아 전역의 일을 떠맡게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드루수스는 형 티베리우스와 달리, 요절한 마르켈루스처럼 재무관을 지낼 때 총독 감독 권한을 행사했고, 파견 전부터 법무관을 맡지 않고도 전직 법무관 자격을 재무관 임기 종료 직후부터 똑같이 부여받은 상태였다. 그는 형 티베리우스와 다르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행사에 가문 일원으로 참석 중이었고,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티베리우스가 법무관을 맡고 있을 때 부재 중이라는 명분으로 법무관 업무 중 법안 제안을 입안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처음으로 군대를 지휘했다. 즉, 대 드루수스는 아그리파 생전부터 이미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중 한명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5년 벌어진 갈리아 세금담당 황제 대리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리키누스[2] 비리 문제가 터지자마자, 자신에게 항의를 위해 찾아온 갈리아인 대표단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내 아들 드루수스를 보내겠다"는 말을 밝힘과 동시에, 명분 좋게 드루수스를 갈리아 3개 속주 전체 책임자 및 임페리움 행사 대리권자로 파견했다. 그래서 드루수스의 파견은 단순한 파견이 절대 아니었다.
실제 드루수스의 파견 이후 행보는 철저히 아우구스투스 후계 구도 및 게르마니아 전쟁 준비에 초점이 맞춰졌다. 드루수스는 가을에 아내 소 안토니아,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데리고 루그두눔 도착 직후, 갈리아 유력자들을 만났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측근들이 드루수스를 호위했고, 아우구스투스 직속 호위병이 그를 수행했다. 여기에서 드루수스는 공개적으로 그들에게 장차 있을 게르마니아 문제에 대해 황제 대리인 자격 이상의 실제 책임자로 의견을 청취했다. 드루수스는 동시에 세금 징수 체계 점검, 물자 관리, 조폐국 운용 현황 등을 파악하면서 자신의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으로 갈리아 일대의 부족장 및 지역 유지들을 불러 모아 화합을 다지고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제단을 만들었다. 그는 로마군 전진 배치를 놓고, 아우구스투스를 따른 원로원 의원, 장군들과 회의를 하고, 게르마니아 전쟁터가 될 지역 수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가 지난 기원전 14년, 드루수스는 아내 안토니아, 장남 게르마니쿠스와 로마로 귀환하지 않고, 갈리아 지역 시찰을 시작으로 각 군대 상황 보고를 받았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이를 보고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원로원에 보낸 다음, 공개적으로 자신의 아들 드루수스가 성실히 업무를 수행함을 칭찬했다.
그리고 기원전 14년, 드루수스는 기원전 16년 세워진 루그두눔 조폐국과 본인이 정비한 게르마니아 전쟁에 필요한 군대 및 각 속주 인적 자원 보고를 기반으로, 갈리아 전역의 로마시민권자를 재차 파악하고, 재산 조사 후 이를 아우구스투스에게 서둘러 이를 알렸다. 그는 늦가을 로마로 귀환하기 전 갈리아 관료, 로마군 장교들과 함께 라인강 일대를 직접 둘러본 다음, 가족들과 함께 로마로 떠났다.
기원전 14년 겨울, 아우구스투스는 도착한 드루수스와 매일 같이 생활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측근들과 딸 율리아, 양자 티베리우스 등이 편지로 물음에도 게르마니아 전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자신이 아들과 함께 모처럼 휴식을 취하면서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가 곧 게르마니아 정복을 시작할 만반의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한 대부분을 끝냈음을 뜻했다. 이를 증명하듯이,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3년 새해를 앞두고 소집한 원로원 앞에서 다음해 갈리아 전역의 3개 총독에 드루수스가 부임하게 됐음을 통보했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와 인접한 판노니아 및 일리맄쿰 일대에서 군대와 함께 다뉴브 강 일대 수원 탐사를 시작할 것 등을 밝혔으며, 동방 업무를 총책임진 아그리파에게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를 도와달라고 요청하며 그에게 판노니아 병참 업무를 수행해달라고 했다.[3] 즉, 게르마니아 전쟁을 위한 대부분 준비가 이때 마무리된 것이다.
기원전 13년, 대 드루수스가 정식으로 갈리아 전역을 총책임지는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도착 직후 정찰 수행을 강화함과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자 임페리움 대리권자 자격의 사령관으로 로마군의 통신망 및 공급망을 목표로 갈리아를 병참기지 삼아 게르마니아로 뻗어가는 레누스 강(오늘날의 라인 강) 유역으로의 가도 정비를 지시했다. 이어 그는 3개 전역 총독의 자격으로 갈리아의 행정, 방어체계, 세금 징수 체계 등을 정비했다. 이 직후, 드루수스는 라인 강과 갈리아 변경을 시찰한 후, 라인 강변에 병영기지 3곳(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독일의 마인츠와 크산텐)을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내 친 로마파 세력 포섭을 진행했다. 따라서 라인 강 건너의 게르만족들은 곧 로마가 움직일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시캄프리 족, 우스페스 족은 선제적으로 강을 건너 로마 국경을 기습공격했다. 이에 호응코자 갈리아 안의 독립운동가들이 로마군을 상대로 양동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이를 철저히 준비해 알고 있어, 게르만족의 공격과 갈리아 내부 반란을 재빨리 진압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드루수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로마군에게 일제히 레누스(라인 강) 하류를 넘어가라고 지시내린 다음, 아그리파의 게르마니아 도강 작전 이후 28년여 만에 게르마니아 땅을 밞았다.
드루수스는 이때 아그리파의 공격 형태와 달리 로마군에게 진격과 동시에 전진 배치를 명령하고, 50개 기지를 건설하게 했다. 그러면서 친로마파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바타비족과 함께 시캄프리족의 근거지를 그대로 들이쳐 이를 장악한 다음, 이곳을 사실상 다음 해 전진 기지화하고 난 뒤, 회군을 명했다. 그리고 이 보고는 드루수스의 전령이 아우구스투스에게 곧바로 전달했다. 이렇게 되자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가 소 안토니아, 게르마니쿠스를 데리고 로마에 도착한 직후 원로원을 소집했다. 황제는 양자 드루수스와 함께 입장했고, 자신의 아들 드루수스가 이 사건을 보고함을 알렸다. 보고가 끝나자 아우구스투스는 다음 해인 기원전 12년부터 로마군 최고 사령관 대리자로 드루수스가 임명되었음을 밝히고, 본인의 명령 아래에서 티베리우스가 판노니아와 일리리쿰 일대 수원 탐사 및 군사 작전을 할 것을 알렸다. 또 여러 제장들에게 이 작전 합류를 명령하며 게르마니아 전쟁 개전을 선포했다.
따라서 이 발표 후 드루수스는 아내 소 안토니아,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데리고 루그두눔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최전선에 주둔한 로마군 7개 군단에게 도강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그는 게르마니아 출진과 동시에 전년도에 전진기지화한 곳에 도착했다. 이때 대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의 처형 대 안토니아의 남편이었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참전했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3.1. 대 드루수스의 원정
기원전 12년, 대 드루수스는 7개 군단과 함께 지금의 네덜란드 일대인 로마 제국 속주를 떠나 도강 후 라인 강 하류 일대를 재차 장악했다. 바타비 족이 주축이 된 게르만족 보조부대가 합류하기로 한 곳이었다. 그러자 이 상황을 예의주시 중인 프리기아족이 로마군을 기습 공격했다. 그들의 공격은 맹렬했는데, 드루수스는 로마인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쉽게 제압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드루수스는 프리기아족 청년들을 포로로 잡자마자 노예로 팔지 않고, 그들 부족장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의 친구가 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과거 카이사르가 갈리아 부족장들을 동맹으로 포섭하던 때와 똑같았다. 드루수스는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받은 전권을 활용해, 로마의 친구가 되어준다면 부족장들에게 귀족으로 인정해줄 것이며, 보조군으로 합류할 경우 로마의 지원과 선물이 있게 될 것을 밝혔다. 드루수스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프리지아족은 포로로 붙잡힌 부족민들을 보조군으로 차출하게 허락하면서, 동맹 세력이 됐다. 이에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받은 전권을 근거로 바타비 족과 프리지아 족의 부족장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보조군 참전 병사들에게는 이 작전 이후 로마 시민권을 주고 그 가족의 이주를 허락했다.이렇게 드루수스는 친로마파 동맹 세력을 손에 넣은 직후, 7개 군단과 로마의 친구들로 명명된 게르만족 보조군을 데리고 독일 북서부 일대인 오늘날 니더 작센 지방으로 진군했다. 차우치 족은 이를 막고자 군대를 보냈는데, 드루수스는 그들에게 로마군 주특기인 회전과 함께 지원받은 게르만족 보조부대의 이점을 활용해 차우치족 군대에게 대승을 거뒀다. 이어 갈리아 코마타의 국경 지대에서 갈리아를 재차 침략하려던 수캄브리족, 텐크테리족, 우스페테스족을 격파했다. 뒤이어 바타비 섬을 통과하고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마니아로 쳐들어가 우스페테스족과 수캄브리족의 영역을 황폐화시켰고, 로마의 영역으로 편입했다. 이후 라인 강을 건너 군대를 겨울 숙영지에서 쉬게 하고 로마로 돌아가 전황 보고를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의 활약과 그가 취한 로마 동맹 세력 전략에 큰 만족감을 표했고, 원로원 앞에서 자신의 아들 드루수스가 바티비족, 프리지아족 부족장에게 내준 로마 시민권 부여 및 이들 가족의 로마 이민 허용 등을 승인해달라고 한 다음 이를 통과시켜, 게르마니아 서안을 로마 영내로 만드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렇지만 기원전 12년 겨울, 드루수스를 도와 판노니아에서 병참 지원 업무를 수행한 아그리파가 중부 유럽 겨울 날씨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캄파니아에서 요양 중 급사했다. 따라서 이듬해(기원전 11년) 봄, 드루수스가 출격한 가운데에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딸 율리아의 결혼을 단행하는 가운데에서, 드루수스를 위해 원로원에게 공개적으로 그에 대한 군공과 실력의 찬사를 강조했다. 동시에 그는 드루수스의 군공에 극찬을 하며 장차 자신이 사망하면 드루수스가 이를 잇게 될 것을 측근들과 원로원 실력자들에게 밝혔다.
기원전 11년, 드루수스는 갈리아에 도착한 직후 다시 군대를 이끌고 두번째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우선적으로 다시 항거하기 시작한 우스페테스족을 제압하고, 그들을 압박한 다음, 형 티베리우스에게 일리리쿰 일대의 게르만족 근거지들을 복속시켜야 함을 밝혔다. 그러면서 드루수스는 베저 강을 건너 독일 북부 일대의 게르만족을 복속시킨 뒤, 라인 강과 플레본 호수를 연결시키는 드루수스 운하를 건설하고, 이 일대에 숙영기지와 퇴역병 정착촌 등을 건설했다.
그 후 함대를 타고 라인 강 하류로 이동하다가 북해로 나왔다. 해안에 살던 프리지아족은 그에게 복종하고 조공을 바쳤으며, 로마 선박들을 육로로 끌고 가는 데 동참해야 했다. 대 드루수스는 뒤이어 호크족의 땅을 공격했지만 북해의 조수에 익숙하지 않은 로마인 선원들이 배를 좌초시키자 이들을 구하느라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대 드루수스는 겨울이 다가오자 함대를 거둬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연구자들은 대 드루수스가 항해를 계속하여 유틀란트 반도를 우회한 후 발트해에 도달했다고 본다. 아우구스투스는 안시라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 함대는 라인 강 입구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킴브리 지역까지 항해했다. 이 지역은 이때까지 어떤 로마인도 육지나 바다로 도달하지 못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대 드루수스는 바다의 동쪽에 있다고 추정되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찾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한편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유틀란트 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로마인들이 킴브리 전쟁의 복수를 할까 두려워하여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며 간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발트해까지의 항해를 마치고 복귀한 대 드루수스는 기원전 12/11년 겨울을 로마에서 보낸 뒤 기원전 11년 봄에 다시 라인 강을 건너 우스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완전히 정복한 뒤 루피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한 후 수캄브리족의 땅을 침략했다. 당시 수캄브리족은 자신들과 동맹을 맺기를 거부한 하티안족을 전력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대 드루수스는 이들을 격파하고 베저 강에 이르렀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철수했다. 그런데 도중에 게르만인들이 매복 공격을 가해 피해를 입히고, 로마군을 좁고 깊은 협곡으로 유인한 뒤 입구를 틀어막으면서 거의 섬멸할 뻔했다. 그러나 대 드루수스가 침착하게 지휘하고, 로마군의 탁월한 조직력과 전투력이 빛을 발하면서, 무질서하게 공격한 게르만족은 모조리 격파되어 패주했다. 대 드루수스는 오베라덴(Oberaden) 인근과 채티족 땅의 라인 강 유역에 요새를 하나씩 건설했고, 처음으로 라인 강 너머에서 겨울을 보냈다.
기원전 10년, 로마의 게르마니아 침투에 위협을 느낀 체루스키족, 수에비족, 수캄브리족은 힘을 합쳐 갈리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아우구스투스는 친히 루그두눔에 도착한 뒤 장병들을 격려하는 한편, 판노니아에서 티베리우스를 소환하여 적을 격파하고 갈리아인들의 봉기를 방지하도록 했다. 공격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대 드루수스가 먼저 공세에 나섰다. 그는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마니아 한복판으로 진군하여 카티족과 1년 내내 격전을 치른 끝에 끝내 굴복시키고, 지정된 곳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대 드루수스의 보고를 접한 아우구스투스는 뛸듯이 기뻐했고, 원로원은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아 게르마니아 전쟁의 종결을 선언하며 그 전공을 기렸으며, 대 드루수스의 개선식을 허가했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과거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전례와 달리, 개선식을 그 자리에서 허락했으며, 폰티펙스 막시무스 자격으로 양자 드루수스가 봉헌할 자리를 마련할 준비를 함을 지시했다. 또 드루수스가 이후 있을 발표 아래에서 추가적으로 있게 될 것 등을 준비하라고 했다.
기원전 9년, 대 드루수스는 그 해 집정관이 되어 전쟁을 위해 로마에서 다시 전장으로 떠났다. 그는 로마군과 함께 체루스키족과 수에비족을 상대로 진격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이 상당한 손실을 봤지만 끝내 승리를 거뒀고, 체루스키족은 로마에 복종하고 싶지 않아 동쪽으로 도망쳤다. 대 드루수스는 이들을 추격해 베저 강을 건너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약탈했으며, 뒤이어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엘베 강을 건넜다. 디오 카시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이민족 여자 유령이 나타나 그를 향해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디 가느냐, 만족할 줄 모르는 드루수스여! 당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물러가라. 네 수고의 끝이 다가왔고 네 생명의 끝이 가까웠느니라."
대 드루수스는 엘베 강 유역에서 전리품을 챙기고, 그해 가을에서 겨울이 될 즈음 귀국길에 올랐으나 라인 강에 도착하기 전에 낙마했다. 일설에 따르면 도하 작전 중 사고가 벌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낙마 사고로 다리 혹은 허벅지를 심하게 다쳤고, 9월 14일 낙마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대 드루수스가 죽은 기지는 이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까지도 '저주받은 숙영지'로 불렸는데 로마군은 자신들의 젊은 총사령관이 아직 정복되지 않은 게르마니아 땅에 잠들길 바랬다. 그렇지만 동생이 자기 품 안에서 유언을 남기며 죽는 것을 직접 본 티베리우스는 부하들의 간곡한 청을 완강히 거절했다. 이는 보고를 받은 아우구스투스도 비슷했다. 노황제는 전령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의 아들은 로마 땅에 잠들어야 한다면서 유해 운구를 명령했다.아우구스투스는 그동안 양아들 대 드루수스가 세운 거대한 공적에 무척 기뻐하며, 이 공적에 따른 개선식 후 정식 양자로 삼음과 동시에 진심으로 후계자로 등극시킬 계획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보낸 전령을 접견하고 비통해했다. 그는 대 드루수스가 낙마 사고를 당했고, 부상으로 요절했다는 보고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대 드루수스가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뱃속에 있었던 시절부터 그를 자기의 친아들로 여겼고, 아그리파 사후 조카사위인 양자를 후계자로 삼고자 일련의 조치를 취한 상태였다. 더욱이 대 드루수스는 매년 로마에서 양부인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붙어 다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친부자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고, 현직 집정관인데다가 대미를 장식할 개선식을 거행할 예정인 몸이었다. 드루수스는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드루수스의 딸 리빌라와 약혼함과 동시에 아그리파 사후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보호자 위치에도 올라 있었으며, 그가 측근과 원로원에게 밝혔듯이 형 티베리우스와 달리 양자 입적 등도 예정되어 있어, 후계 구도의 불안함이 뚜렷한 아우구스투스의 충격을 배가시켰다. 이런 이유로 보고를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했는데, 결국 정신을 차려 하늘을 향해 원망을 퍼붓고, 아버지로서 아들을 잃은 분노를 신에게 내뱉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주변의 시종과 부하들도 알 수 없는 괴성을 계속 지르다가
"어찌해서 내 아들 드루수스를 빼앗아 가는 겁니까!"
라며 외친 다음 대성통곡했다.이후 티베리우스에게서 전령이 도착해 운구가 이탈리아로 향함을 재차 보고받았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겨우 기운을 차려 게르마니아에서, 갈리아의 루그두눔을 거쳐 이탈리아로 오고 있는 죽은 대 드루수스의 운구 행렬을 보고자 움직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이 머물게 될 국경도시가 어느 곳인지 알렸고, 평소 잘 타지 않는 말을 급히 몰고 전속력으로 달려, 국경 근처에서 며칠을 대기했다. 그 사이, 아우구스투스의 측근과 지지자들은 원로원에서 양자를 잃은 아우구스투스를 위로하면서, 위로 조문 대표단을 꾸림과 동시에 국장을 결의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대표단에게 듣자 감사함을 표했다. 이런 가운데 티베리우스가 이끈 대 드루수스의 관이 이탈리아 국경에 당도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초췌한 몰골로 대 드루수스의 유해를 맞이했다. 이때 그는 한참을 울면서 양자의 관을 쓰다듬다가, 동생의 관 옆에서 걸어서 온 티베리우스의 위로 아래 겨우 기운을 차렸다. 아우구스투스는 대 드루수스의 죽음을 보고, 유언을 들은 대 드루수스의 형이자 자신의 또 다른 양자였던 티베리우스에게 유언을 들었고, 동생을 잃은 티베리우스를 위로했다. 일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에게 장례식 참석 대신에 곧바로 전쟁을 지휘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야 이탈리아를 떠나 전쟁터로 복귀했고, 장례식 후 아우구스투스가 드루수스를 위한 헌정시를 바친 뒤에야 게르마니아 전쟁의 후속책에 관해 독대했다.
드루수스 사후, 장례식이 끝난 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말에 올라 급히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이자 국가의 최고 지도자 자격으로 대 드루수스의 장례 후, 원로원 앞에서 고인의 아버지로서 모든 장례를 총지휘하고, 대 드루수스의 유골함을 손수 자신과 가족들, 즉 황족들이 묻힐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했음을 밝히면서, 앞으로 전쟁은 티베리우스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주도 아래에서 진행됨을 전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요절한 대 드루수스의 빈 자리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멘토이자 상담역을 겸한, 이집트 출신의 스토아 철학자 아리우스 디디무스는 아우구스투스 부부에게 심리치료 차원에서 죽은 대 드루수스의 전신상과 흉상들을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매일 이야기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아내의 집무실, 그리고 부부의 침실 등에 양자의 전신상, 흉상, 부조 등을 만들어 비치하고 매일 이야기하며 그 빈자리를 극복했다.
대 드루수스의 장례식 당일,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이자 황제로서 먼저 간 아들의 유지를 지키고, 그 대업을 반드시 완수하겠다며 로마인과 하늘의 모든 신에게 다짐했다. 그 후 게르마니아 원정의 책임은 공식적으로 티베리우스가 맡게 되었다.
3.2. 티베리우스의 원정과 아우구스투스의 후속 조치
대 드루수스의 대활약으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엘베 강까지 뻗었지만,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에는 로마에 복종하지 않은 부족들이 아직도 많았다. 티베리우스는 이들을 복속시켜서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의 영역을 로마의 영토로 귀속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친 로마파 세력을 포섭하고 유력자들을 후원하는 등의 온건책을 쓰는 동시에 반항적인 부족을 무력으로 징벌하는 강경책을 병행했다. 또한 40,000명의 게르만인을 라인 강 좌안에 재정착시켜 로마군의 관리를 받게 했으며, 함대를 라인 강과 엘베 강 연안에 수시로 띄워서 게르만족의 동태를 감시하도록 했다. 수캄브리족이 이에 저항했으나 곧 진압당했고, 게르만 부족들은 로마 제국의 압도적인 권세를 두려워하며 인질을 앞다퉈서 바쳤다. 티베리우스의 부장 출신 역사가였던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이때 로마 제국이 게르마니아를 사실상 정복했다고 서술했다.이제 게르마니아가 평온해지자, 아우구스투스는 슬슬 정복정책에서 관리정책으로 선회하기로 했다. 기원전 3년, 황제는 티베리우스를 불러들여 후계 구도를 구축하게 한 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휘하에서 무수한 공적을 세워 로마군 병사들의 인망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늪지대와 빽빽한 산림 지대를 돌파하고, 늪지대에 매복한 게르만군을 가차없이 격파했다. 또한 라인 강과 엠스 강 사이의 습지 위에 폰테스 롱기라는 산책로를 건설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엘베 강 건너편에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제단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1년만에 사실상 경질되어 로마에 조기 소환되었다. 이는 아헤노바르부스의 정책이 게르마니아에서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외교관 및 행정관으로서 동방에서 활약했고, 이러한 경험을 게르만 부족들을 대할 때 써먹었다. 그러나 동방에서 통하는 외교정책은 게르마니아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앞서 티베리우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부족들은 이간계를 즐겨 사용하는 아헤노바르부스를 믿지 못하고 곳곳에서 파열음을 일으켰다. 특히 체루스키족은 친로마 성향을 보였다가 추방당한 귀족들을 복귀시키라는 아헤노바르부스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렇듯 평온해진듯 보이던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자, 아우구스투스는 아헤노바르부스를 불러들이고 노장인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를 파견해 게르마니아 속주 작업을 이어가게 했다.
서기 1년, 게르만 부족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는 이들을 상대로 3년 동안 격전을 벌여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 반란을 결정적으로 진압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4년에 은퇴를 선언하고 로도스 섬에 갔다가 복귀할 뜻을 내비친 티베리우스를 불러들여 게르마니아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티베리우스와 그의 부관인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의 군대는 라인 강과 베저 강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킨 부족들을 모조리 제압한 후 베저 강을 건너 체루스키 족을 제압했으며, 엘베 강 중부 지방에 살고 있었던 랑고바르드족도 물리쳤다. 2년여 간의 작전 수행 끝에 반란은 종식되었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선포되었으며, 사투르니누스는 영예를 얻었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 반란을 수습한 뒤, 티베리우스는 라인 강 하류에 사는 마르코만니족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들은 주변 부족들을 제압하거나 동맹으로 삼아 보병 70,000명과 기병 4,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로마군의 수준으로 훈련시켰다. 마르코만니의 족장 마로보두스는 자신이 친 로마파 인사라며 로마에 대항할 의사가 없음을 여러 번 밝혔지만, 로마는 그가 지나치게 강력해졌다고 여기고 제압하고자 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을 받들어 마로보두스를 공격하기 위한 대규모의 원정군을 조성했다.
이때 일리리쿰과 판노니아의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보내기 위해 속주민들을 징발하여 대규모의 보조병 부대를 창설한 후 라인 강 전선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데시타이트족인 바토와 브레우키족인 바토를 지도자로 내세워 일리리아 대반란을 일으켰다. 아우구스투스는 급히 티베리우스에게 일리리아를 평정하라고 지시했으며, 티베리우스는 마르보두스와 평화협약을 맺은 뒤 8개 군단을 이끌고 일리리아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에는 제17군단, 제18군단, 그리고 제19군단의 3개 군단만 남았다.
이는 자칫 게르만족이 반란을 도모할 빌미를 줄 수 있는 위험한 조치였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오히려 게르마니아가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후, 유능한 행정가를 보내 게르만족을 다스리도록 했다. 그리하여 동방에서 난폭한 속주민들에 대한 진압을 잘 해내고,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여준 문제적 인물인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세웠다.
3.3.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로마령 게르마니아의 붕괴
바루스는 게르마니아 방면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게르만족의 로마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각 부족들에게 관료를 파견하여 로마법을 준수하라고 명령한 후 부족장들의 정책에 여러 번 간섭했다. 게다가 게르마니아에서 찾기 힘든 귀금속으로 세금을 낼 것을 강요해 게르만족의 불만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당시 로마군에 오랫동안 복무했고 바루스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로마군을 몰아내고 통합된 게르만인의 국가를 세운 후 왕이 되고 싶었던 아르미니우스는 이러한 분위기를 읽고 반란을 꾀했다.
그의 장인이었던 세게스테스가 사위인 아르미니우스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며 고변했지만, 바루스는 이를 무시했다. 그는 아르미니우스가 배신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으며,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세게스테스의 증오를 알고 있었다. 또한 동방의 시리아와 유대에서 총독으로 일할 때 모함을 통해서 경쟁자를 제거하는 행태를 잘 알고 있었다. 아르미니우스와 공모자들은 일리리아 대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주의깊게 연구하고, 이로부터 로마군을 무찌를 방안을 모색했다. 그들은 곧 로마군을 함정으로 유인하여 최대한 섬멸하기로 결의했다.
서기 9년 9월 어느 날, 로마에 복속된 한 마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로마군의 위용을 보여줘야 다시는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할 거라고 조언했다. 바루스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휘하 3개 군단과 6개의 보조군 대대, 3개의 기병대 중대를 총동원하여 반란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아르미니우스가 매복시킨 게르만 군대에게 습격당해 전멸했고, 일부 기병만이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 후 게르만족은 숙영지와 정착촌에 남아있는 로마 군인과 민간인들을 습격해 모조리 학살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12년에 원정을 시작한 이래 20년 동안 밀어붙였던 게르마니아 원정의 성과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3.4. 이후의 게르마니아 전쟁
아우구스투스는 바루스의 3개 군단이 전멸하고, 20년 동안 일궈온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심각한 충격에 빠졌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밤에 혼자 집에 틀어박혀서
"바루스! 내 3개 군단을 돌려줘!"
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하지만 냉철했던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남부 일대에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던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투스의 2개 군단을 갈리아로 이동시켜 이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반 로마 봉기를 방지하도록 했다. 여기에 게르마니아 최대의 로마 요새인 앨리스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카이시디우스는 게르만족의 맹공을 겨우 물리친 뒤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에서 아군과 합세했다.
서기 10년, 일리리아 대반란을 평정한 티베리우스가 라인 강으로 이동하여 강 연안의 요새 방어 능력을 강화하고 병력을 재배치했다. 이후 라인 강을 건너 농작물을 파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보복 전쟁을 벌였지만, 깊숙이 들어갔다가 바루스와 같은 꼴이 될 걸 우려하여 매사에 신중을 기했다. 뒤이어 서기 11년 게르마니쿠스가 후속 병력을 이끌고 티베리우스와 합류했으며, 두 사람은 11년과 12년에 두 차례 원정을 일으켜 라인 강을 도하해 친 로마파 게르만족을 로마 점령지에 이주시키고, 저항하는 부족들을 토벌하기보다는 인구를 분산시켜 그들을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편입시키는 데 집중했다.
서기 12년 겨울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가 로마로 귀환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권력 승계를 위해 티베리우스를 남게 하고, 게르마니쿠스를 라인 강 전선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대대적인 복수전을 벌이고자 군대를 집결시켰으나, 원정을 개시하기 전인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가 붕어했다.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직전에 제국 확장을 종식하라는 부탁을 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티베리우스가 선제의 이름을 빌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 후 티베리우스의 황위 승계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단병들을 제압한 게르마니쿠스는 라인 강을 건너 복수전을 개시했다. 그는 해군을 잘 활용하여 원정군의 보급을 책임지게 하고, 적의 매복 공격을 모조리 격파했다. 서기 15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잃어버린 3개의 독수리 군단 깃발 중 하나를 탈환했으며, 서기 16년 휘하의 부장이자 아르미니우스의 친동생이었던 플라부스 등과 함께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앙그리바리 방벽 전투에서 재차 격돌해,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동맹군을 와해시키고 두번째 독수리 깃발을 되찾았다. 그러나 얼마 후 티베리우스 황제로부터 원정을 중단하라는 명령서가 도착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원정을 지속할 의사를 표명했으나 티베리우스가 강력하게 명령하자 어쩔 수 없이 점령한 영토를 친 로마파 게르만 부족들에게 나눠주고 철군했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 전쟁이 막을 내렸다.
4. 이후
로마군이 게르마니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로마를 상대로 동맹을 맺었던 아르미니우스와 마르코만니족의 족장 마르보두스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 마르보두스가 대패하여 로마로 망명했지만, 아르미니우스는 마르코만니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게르만족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서기 21년 자기 부족 내의 반대자들에게 피살되었다. 한편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9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사망했다. 항간에서는 그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던 시리아 총독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독살했거나 강력한 황위 경쟁자를 두려워한 티베리우스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후 로마 제국과 게르만족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경계로 삼고,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한편으로는 전쟁을 벌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교류했다.
[1]
이곳은 나중에 '아그리피나 콜로니아'로 개명되어 주요 도시가 되었고, 훗날
쾰른의 전신이 되었다.
[2]
갈리아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때 포로가 된 뒤 카이사르의 노예가 됐다가 해방된 뒤, 관리가 된 사람이다. 눈치 빠르고 영리하고 셈법과 관리 능력이 탁월해, 카이사르가 해방노예로 만든 직후부터 카이사르와 그 일가 전체의 가신으로 맹활약했다. 카이사르의 외종손으로, 양자로 입적된 아우구스투스는 리키누스가 카이사르 일가에 대해 진심으로 충성을 다함을 높이 사서 그를 일찍이 갈리아 전역을 담당한 세금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런데 재물욕이 지나쳐, 아우구스투스와 로마 정부 이름을 내세워 매년 1달치 세금을 착복한 일로 큰 문제를 일으켰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클리엔테스들인 갈리아 유력자와 주민들의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뒤, 그를 해임했다. 하지만 그가 재물을 착복해 부자가 되었어도, 거의 대부분은 로마 국고 중 갈리아 통치자금과 군자금으로 두둑히 쌓아 놓게 한 공로가 컸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해임만 할 뿐 처벌은 하지 않았다.
[3]
아우구스투스, 아그리파는 상관과 부하 관계가 아닌, 협력자이자 친구 관계였고, 두 사람 모두는 서로를 애인처럼 생각한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