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20:17:19

고구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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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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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미술3. 음악4. 언어5. 문학6. 건축7. 과학8. 종교9. 장례10. 분묘
10.1. 왕릉
11. 생활12. 기타

[clearfix]

1. 개요

고구려 문화 전반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2. 미술

파일:일랑 이종상 쌍영총 벽화 제작도 장지에 채색 200x300cm 1983년 (한국학 중앙연구소 소장).jpg

파일:984156152.jpg

파일:2018071213083756529_1531368517.jpg

파일:984562.jpg

파일:2360034557B94FD132.jpg

파일:진파리 1호분 소나무 벽화.jpg

당시 시대상과 종교관을 알기 쉽게 시각적으로 재현해 놓은 벽화들을 다수 남긴 덕분에 역사 연구를 하는 후손들에게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다. 세세하게 살펴 보면 이것저것 깨알같이 그려놓았다는 걸 알 수 있으며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고증 자료들로 가득하다.

제작 기법 면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고구려 미술이 기존의 프레스코 기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벽화 제작 기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산, 나무, 꽃, 구름, 바람 등 동식물과 함께 자연 풍경을 그리는 산수화 발전에도 아주 크게 기여했다.[1] 불상 공예품은 일부 북조의 영향이 있으나 후기에는 한반도 내부에서 유행하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양식도 나타난다.

색감은 일명 어스컬러(Earth Color)라고 하는 지구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톤을 즐겨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 지금까지 발견한 고구려 문화재들로 추정컨데 단청으로도 이러한 색들을 사용했을 확률이 높다. 전체적으로는 불그스름한 색채를 많이 띈다.

일각에서는 고구려 승려인 담징이 그렸다고 전하는 금당 벽화가 일본 호류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1948년 보수 공사를 하던 중 누전 화재사고로 불타버렸다. 그러나 이 벽화의 시기가 담징의 생몰연대와 일치하지 않고 고구려 불교 미술과는 거의 판이하게 다른 스타일을 지니고 있어 고구려 작품이라 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게다가 담징이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건 나라 지방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파일:고구려적석총절풍장식.jpg 파일:고구려 관식.png
고구려식 절풍 장식 중 하나 고구려의 금동관

파일:해모양 뚫음무늬 금동장식.png

주몽(드라마) 이후로 해모양 뚫음무늬 금동장식 삼족오 문양을 고구려의 상징처럼 활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실제 역사 속에서 고구려가 삼족오를 국가 상징으로 여겼다는 근거가 있는건 아니지만, '하늘의 후손이 다스리는 천자의 나라'라는 뚜렷한 독자 천하관을 갖고 있던 고구려인 만큼 '천자(국)=태양=삼족오'라는 공통 분모[3]를 연결지어 해석한다면 나름 어울리는 후손들의 2차 창작이라고 볼 여지는 있다. 게다가 실제로 고구려에서 섬기는 신들 중 하나가 조상신이자 태양신인 해모수다.

파일:658151232.jpg

파일:3aUrbeFFQ1OIOVPpzaDbn11Jnw5EraACfPPabddW.jpg

일본으로 간 고구려 유민 후손들이 세운 고마 신사(高麗神社)에서도 고구려의 삼족오 문양을 활용하고 있다.

파일:고구려, 신라, 백제 귀걸이.jpg

파일:565ESyQUGcQCIY0Omi8seK.jpg

파일:삼국시대 귀고리.jpg

파일:무휼 - 대무신왕.png

남녀 성별, 신분 높낮이와 상관없이 귀고리를 착용했다. 백제, 신라, 가야에서도 공통으로 있던 풍습이며 이는 선사 시대부터 내려온 문화이다.[4] 다양한 양식의 삼국시대 귀고리들

파일:평안남도 대동군 귀고리.jpg 파일:20200622200434.jpg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문화상품점에서 고구려 양식 귀고리와 상당히 흡사하게 재현한 귀고리, 반지, 목걸이를 팔고 있다. 함량 93.5%이며 보기보다 일반 액세서리 만큼 가볍다.

파일:a0053134_58504609d8f6e.png

고구려 무덤을 받치는 기둥에서 종종 귀신 얼굴 그림을 볼 수 있다. 귀신기둥

3. 음악

파일:거문고 그림1.jpg

파일:거문고 그림2.jpg 파일:거문고.jpg

대표적인 고구려산 악기로는 거문고가 있다. 벽화에서도 거문고 특유의 일렬로 늘어선 괘(프렛)를 지닌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여럿 나오는 걸 보아 당시 고구려에서도 비중이 큰 악기었던 듯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문고)
한국민속대백과사전(거문고)

삼국사기》에서는 거문고의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4~5세기 서진 사람이 고구려로 칠현금(七絃琴)을 보내줬는데 아무도 다루는 방법을 몰라서 이 악기를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하니 왕산악(王山岳)이라는 사람이 로컬라이징을 거쳐 새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악기를 연주하자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어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 지었고 이후 현금(玄琴)이라 불렀다는 점으로 보아 '거문고'는 '현금'이 순우리말로 전해 내려오는 이름인 듯 하다.

이 때 고구려에서 발명한 거문고는 이후 남북국시대 신라에서 정작 자국산 악기인 신라금을 밀어내고 신라삼현 중 하나로서 자리잡고, 고려시대 공민왕이 사용했다는 거문고를 수덕사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지식인들도 "역시 교양있는 선비라면 거문고지" 할 정도로 먼 훗날까지 높으신 분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으며 대히트를 치는데,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비중있는 국악기 중 하나라는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어찌나 독보적인 인기였으면 15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고구려금, 고려금이란 이름도 아닌 '고구려에서 직접 붙인 고유 이름'이, 그것도 순우리말 그대로 전해질 정도일까?
여담으로 흔히들 ' 가야금 여자라면 거문고 남자'라고 많이 비유하는데, 굵고 묵직한 음색을 내며 술대라는 나무 막대를 사용하여 드르륵드르륵 긁어대는 것도 모자라 반쯤 타악기처럼 팍팍 내려치는 듯한 주법을 보면 참 고구려다운 악기다. 그래서인지 현대에는 위 영상들 처럼 강렬하고 파워풀한 퓨전 국악곡을 만들 때 애용하기도 한다.[5]

파일:527212_175109_171.jpg

장구의 초기 모습으로 보이는 요고(腰鼓)

파일:98456156.jpg

횡적(橫笛) 또는 횡취(橫吹)라는 이름[6]으로 추정되는 악기다. 대금과 길이와 연주 자세가 비슷한데 아직 둘의 연관성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건 아니다.

파일:고구려 무용도.jpg

파일:고구려 벽화 월금 연주자.png

지금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월금을 연주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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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YH2009062207870000500_P4.jpg

파일:063.jpg

북 치는 사람 위쪽을 보면 소(簫) 또는 배소라는 팬플룻과 비슷한 종류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파일:066684.jpg

파일:065.jpg

파일:541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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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나팔과 북을 연주하는 모습도 있어서 전투에서 사기를 북돋거나 특정한 신호를 보내는 군악대 비슷한 역할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인들은 노래을 즐겼다.[7] 전하는 노래로는 유리명왕 황조가 등이 있고 내원성, 연양, 명주는 고려사 악지에서 근원 설화만 전하고 있는 고구려 시대의 노래들이다. 또한 거문고를 연주하기 위해 왕산악이 지은 100여 곡이 있었다는데 역사 속에서 이런저런 난리통을 겪으며 지금까지 전해지는 곡은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나라에서 중국인들이 음악가들을 고구려로 보내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또한 '고취'라는 악기도 함께 가져가 고구려로 전했다고 한다. 수서에서는 고구려의 노래로 지서(芝栖)가 있고 춤곡으로는 가지서(歌芝栖)가 있었다고 한다. 또 《 신당서》에서는 고구려의 악기가 총 21악기라고 전하며 기타 다른 것들도 합치면 30악기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파일:1-41.jpg

당나라에서 고구려의 음악을 궁중음악으로 편입한 적이 있다. 측천무후는 고구려의 25곡을 때때로 즐겨 들었지만 중세 송나라 시기에는 1곡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흔적을 잃었고 살아남은 1곡도 의복을 포함한 원래의 기풍을 잃었다고 전해진다.[8]

파일:Komabue.jpg
과거 일본으로 전해진 고려적(高麗笛, 코마부에)이라는 악기가 있는데 위 영상은 대한민국 애국가를 고려적으로 연주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해진 악기인건 확실하지만 원산지가 고구려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어느 나라, 어느 시기에 전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국악기 소금과 음색이 많이 비슷하다.[9] 고대 한반도에서 전해진 음악들인 고려악(高麗樂, 코마가쿠)[10]에서 사용한다.

위에서 언급한 고구려 타악기 요고가 장구가 되고, 이 장구가 고려 시대 일본으로 전해져 산노츠즈미(三ノ鼓)가 되었는데 이 역시 고려악으로 편성하여 사용한다.
《고려소난성(高麗小乱声, 코마코란조)》. 나소리를 시작할 때 연주하는 전주곡 격인 곡이다.
중국, 일본 전통 음악은 4박자, 2박자 계열 등 '2분박'이 많은 것과 달리 한국 전통 음악은 6/8박자, 3박자 계열 등 '3분박'이 많은데, 아직까지 정확한 유래가 밝혀진 건 아니지만 국내외 학자들은 종종 "기마민족이 자주 접하던 말발굽 소리에서 유래한 게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다그닥다그닥/다그닥다그닥' 이런 식으로. # 고이즈미 후미오의 한국음악조사와 그 음원자료에 대하여(PDF)
국악 작곡가 홍동기(1967~)가 고구려를 주제로 만든 국악관현악 곡 《고구려의 혼》. 우리 전통 리듬 중 하나인 '동살풀이 장단' 등을 포함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중후반부 퍼커션 리듬이 말발굽 소리와 비슷한 패턴을 연상시킨다.
고대 일본에서 고려악 형식으로 만들었다는 곡인 《나비(胡蝶, 코쵸우)》의 고악보를 복원하여 연주하는 영상에서도 3박자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례가 있다.

4. 언어

현대 한국어 고구려어가 생각보다 더 많은 영향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심지어 신라어보다도 더 직계 조상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해당 문서 참고.

뚱보, 울보, 먹보, 일름보, 심술보, 어부, 흥부, 놀부 처럼 ~보(輔), ~부(夫)[11]가 붙는 말들이 대표적인 고구려어식 접미사 중 하나라고 한다. 명림답부(明臨答夫) 같이 고구려 관직을 일컫던 접미사가 뜻이 변한 것.

또 다른 유명한 고구려어로는 골(고을)이 있다. 지금도 '마을', '동네'와 비슷한 뜻으로 쓰는 순우리말이다. 한자로는 (홀)[12]이라고 음차해서 적고 요동성=오렬홀=오라골(오라고을) 사례처럼 성(城)과 비슷한 뜻으로 쓰기도 했다. 당시 고구려어로는 구루라는 발음이 아니었을까 추정 중이라 한다.

전한(前漢) 또는 신나라 시기에 양웅(揚雄)(BC 53- AD 18)이 27년간 조사한 저서 『 방언(方言)』에서는 동명성왕 유리명왕 시기 고구려와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

5. 문학

습속은 서적(書籍)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말먹이 따위의 (가장 미천한) 집에 이르기까지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른다.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출처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이나 미천한 집안까지도 서로 힘써 배우므로, 길거리마다 큼지막한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른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글을 외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출처

고구려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은 태학(太學)과 경당(扃堂)이 있는데, 지금으로 치면 태학이 상류층 수도권 국립학교라면 경당은 신분과 관계없이 청소년들이 다니는 지방 사립학교이다. 두 곳 다 문무를 겸비하도록 가르쳤다.

여담으로 태학은 지금까지 확인된 한국사 최초의 학교이며 소수림왕 2년(372)부터 설치했다고 한다.

[ruby(翩翩黃鳥, ruby=편 편 황 조)] 펄펄 나는 저 꾀꼬리
[ruby(雌雄相依, ruby=자 웅 상 의)] 암수 서로 정답구나
[ruby(念我之獨, ruby=염 아 지 독)] 외로울사 이 내 몸은
[ruby(誰其與歸, ruby=수 기 여 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황조가(黃鳥歌) - 고구려 제2대 임금 유리명왕(琉璃明王)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지은 시로 유명하다. 바람의 나라(드라마)에서 이를 이용한 OST를 선보였다.

[ruby(三椏五葉, ruby=삼 아 오 엽)] 세 가장귀에 다섯 모난 잎이
[ruby(背陽向陰, ruby=배 양 향 음)] 햇빛을 등지고 그늘을 향했네
[ruby(欲來求我, ruby=욕 래 구 아)] 와서 나를 찾고자 하거든
[ruby(椴樹梢尋, ruby=가 수 상 심)] 자작나무 숲으로 오시오
인삼찬(人蔘讚) - 작자 미상 고구려인
인격화 한 인삼이 스스로 말하는 내용이다. 송나라 기록인 속박물지(續博物志)에서 지은이가 고구려 사람이라고 한 것 말고는 정확한 정보가 전하지 않는다.

[ruby(神策究天文, ruby=신 책 구 천 문)] 그대의 귀신같은 전략은 [ruby(하늘의 이치, ruby=천문)]를 다하였고
[ruby(妙算窮地理, ruby=묘 산 궁 지 리)] 신묘한 계산은 [ruby(땅의 이치, ruby=지리)]를 통달했구나
[ruby(戰勝功旣高, ruby=전 승 공 기 고)]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ruby(知足願云止, ruby=지 족 원 운 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오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13] -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
고구려-수 전쟁 살수대첩과 함께 유명한 시. 을지문덕 우중문에게 반어법으로 비꼬면서 최후통첩을 날리는 내용이다.

[ruby(逈石直生空, ruby=형 석 직 생 공)] 멀리 보이는 바위 곧게 하늘로 치솟았고
[ruby(平湖四望通, ruby=평 호 사 망 통)] 넓은 호수 사방으로 툭 트였네
[ruby(巖根恒灑浪, ruby=암 근 항 쇄 량)] 바위 아래는 항상 물결에 씻기우고
[ruby(樹杪鎭搖風, ruby=수 초 진 요 풍)] 나뭇가지 끝은 바람에 나부끼네
[ruby(偃流還漬影, ruby=언 류 환 지 영)] 물결 위에 누워 그림자를 담그고
[ruby(侵霞更上紅, ruby=침 하 갱 상 홍)] 노을에 젖어들어 더욱 붉은 빛을 띠네
[ruby(獨拔群峰外, ruby=독 발 근 봉 외)] 여러 봉우리 밖에 우뚝 솟아
[ruby(孤秀白雲中, ruby=고 수 백 운 중)] 홀로 흰 구름 속에 빼어나다네
영고석(詠孤石) - 고구려 스님 정법사(定法師)
6세기 후반~7세기 즈음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ruby(昨過永明寺, ruby=작 과 영 명 사)]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ruby(暫登浮碧樓, ruby=잠 등 부 벽 루)] 잠시 부벽루에 올랐는데
[ruby(城空月一片, ruby=성 공 월 일 편)] 성벽 하늘엔 달 한 조각 떠 있고
[ruby(石老雲千秋, ruby=석 로 운 천 추)] 오래된 조천석 위엔 천년 세월의 구름이 흐르네
[ruby(麟馬去不返, ruby=인 마 거 불 반)] 기린마는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ruby(天孫何處遊, ruby=천 손 하 처 유)]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시는가
[ruby(長嘯倚風磴, ruby=장 소 의 풍 등)] 바람부는 돌다리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ruby(山靑江自流, ruby=산 청 강 자 류)]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더라
부벽루(浮碧樓) - 고려 학자 이색(李穡)
여말선초 고려의 상황과 옛 고구려의 영광을 떠올리며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시이다.

[ruby(金花折風帽, ruby=금 화 절 풍 모)] 금화 절풍모 쓰고
[ruby(白馬小遲回, ruby=백 마 소 지 회)] 백마로 더디 도네
[ruby(翩翩舞廣袖, ruby=편 편 무 광 수)] 번득이는 넓은 소매
[ruby(似鳥海東來, ruby=사 조 해 동 래)] 해동에 새가 온 듯하네
제목 미상 - 작자 미상
조선에서는 이 시를 소재로 만든 춤인 고구려무가 있었다고 한다.

순조 시기 진작의궤(進爵儀軌) 기록에서는 수나라 양제(煬帝)가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당나라 이백(李白)이 고구려 사람들의 춤을 보고 지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고구려와 관련한 시임은 틀림없다.

僻地城門啓 외딴 곳의 성문은 열리어 있고
雲林稚堞長 구름숲 성가퀴는 길기만 한데
水明留晩照 맑은 물에 잔 노을 남아 있더니
沙暗燭星光 모래 어둠 저 위로 별빛 켜누나
壘鼓連雲起 진루의 북소리에 구름이 일고
新花拂地粧 새 꽃들이 피어나 땅을 가리니
居然朝市變 어느 덧 나라 모습 바뀌었구나
無復管絃鏘 다시는 풍악소리 들리지 않고
荊棘黃塵裏 가시밭의 누우런 흙먼지 속에
蒿蓬古道傍 쑥 잎만 옛 길가에 무성하구나
輕塵埋翡翠 날리는 흙먼지는 비취를 묻고
荒壟上牛羊 언덕 위에 소와 양 노닐 뿐이니
無奈當年事 그때 일 돌아보면 무엇 하리오
秋聲肅雁行 한가을 기러기는 날아가는데
고려성회고시(高麗城懷古詩) - 번한(樊漢)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사람 번한이 지은 시이다.

고구려의 전설과 설화로는 동명성왕, 호동왕자, 산상왕, 미천왕, 온달 관련 이야기가 전한다.

6. 건축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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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도읍기
동명성왕 ~ 유리명왕
국내도읍기
유리명왕 ~ 장수왕
졸본성 [1] 국내성 환도성
하고성자토성 / 나합성 [2] 오녀산성
||<-3><tablebgcolor=#000><tablewidth=100%> 평양도읍기 ||
장수왕 ~ 평원왕 평원왕 ~ 보장왕
안학궁 / 청암리 토성 [3] 대성산성 장안성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000> 별궁 || 전설 ||
두곡 이궁 구제궁 수정성

||<tablewidth=100%> [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 ||
주거는 산골짜기에 있으며, 모초(茅草)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고, 왕궁(王宮)·관아(官府)·절(佛寺)만이 기와를 쓴다. 가난한 백성들은 한겨울에 긴 구덩이를 파고 불을 지피어 방을 덮힌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출처
온돌寒반도 고구려 건축 특징으로서 빼놓을 수 없다.
파일:삼국시대 건축 과정 재현 모형.jpg
삼국시대 건축 과정 재현 모형

고구려의 건축은 축성술, 분묘조영 위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며 목재 건축 특성 상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일부 성곽과 무덤 밖에 없다. 그런데 고구려의 무덤 양식은 입구만 찾으면 도굴하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도굴 상태가 매우 심각해서 출토품이 거의 없다. 심지어 요즘은 벽화도 뜯어서 판다고 한다. 하지만 비록 남은 게 별로 없다고는 해도 일단 남은 것들로나마 최대한 파악하건대 고구려의 성곽과 무덤 건축은 높은 수준에 속한다. 두 쪽 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파일:2294831_1077689_4136.jpg

연천 호로고루성. 뒤쪽 검은 현무암 성벽이 고구려가 쌓은 것이고 앞쪽 밝은 편마암 성벽은 신라가 쌓은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 성곽은 주로 산 위에 건축한 산성이 많지만 평지성도 있었다. 평지성같은 경우는 굉장히 높게 쌓아 자체적인 약점을 보완했다. 외형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삼각형 모양으로 돌을 깎아 교차시키면서 쌓은 것으로 돌끼리 서로 맞물려 붕괴가 어렵도록 되어 있다. 고구려 성곽의 치나 옹성은 고구려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보다 먼저 출현하여 일반화 되었다.

파일:g-6.jpg

파일:고구려 고분 벽화 강서대묘 2-4.jpg

CG 재현한 강서대묘 출처

파일:쌍영총 입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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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영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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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은 돌무지무덤(적석총)에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발전했다. 분묘로 가장 유명한 것은 장군총이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 중 원형 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어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태왕릉처럼 장군총보다 5배 이상 큰 돌무지무덤도 존재한다. 보존상태는 장군총에 비해 영 좋지 않지만.

돌과 흙을 무시무시하게 쌓아올린 신라, 가야의 무덤과는 달리 고구려, 백제의 무덤은 들어가는 입구가 친절하게 완성되어 있어서 여기만 찾으면 도굴하기가 쉬운 편이다.[14] 나라가 건재했을 때는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 묘지기) 등을 두면 되었지만 망하고 나면 그런 거 없기 때문에 차례차례 도굴꾼들에게 당한 듯하다. 백제 무령왕릉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입구가 잘 숨겨지고 무덤이 아예 묻혀버리는 바람에 무사한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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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재현한 청암리 사지 출처

백제 신라가 사각형 목탑과 석탑이 많았다면 고구려는 팔각형 목탑이 많았다. 석탑은 아직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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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15][16]을 합쳐놓은 듯한 디자인[17]인 고구려식 망새(치미)의 크기를 보면 고구려 건축 규모가 얼마나 웅장했는지를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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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삼국시대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인 人자형 동자주가 두드러지고, 삼국시대 건축을 연구할 때 언제나 목마른 단청자료가 고분 벽화에 대놓고 남아 있어 아주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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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아이보리색, 베이지색, 주황색, 적갈색 등 붉은색 계통 기와가 많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인 백제, 신라의 것보다 양각이 굵고 힘찬 느낌인 점도 특징.

웬 개구리, 두꺼비 모양이 나오나 싶을 수도 있지만 고분 벽화에서도 종종 달토끼처럼 달두꺼비가 나오는 걸 보아 해당 기와 모양이 반달 모양이므로 달두꺼비를 조각해 넣은 것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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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고분 벽화 등을 참고하여 만든 고구려 건축물로 동명왕릉 정릉사가 있는데 남북국시대, 조선시대 양식이 다소 섞여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높은 고증을 보여주어 남한에서도 반응이 좋다.

서울 아차산 고구려 유적이 있는 점을 들어 고구려정이라는 정자를 만들었는데, 붉은 기와를 사용한 건 그럴 듯 하지만 역시나 또 조선시대 단청을 칠해놓아서 삼국시대 컨셉으로 만든 건축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 외 역덕들이 분석한 고구려 건축 예시들이 있는데 100% 완벽한 고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 이런 식이었겠구나 정도로 참고하기 좋다.

꼭 살펴야 할 현전 고구려 건축 그림들
50m 고구려 건축물 팔작지붕 CG복원 - 안학궁 외전 2궁전 크기 체감해보기
여러 특징을 모은 고구려 건축 CG복원

7. 과학

독자적으로 천문학이 상당히 발전했다. 중국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별자리를 발견한 바 있으며 이 중 일부는 중국으로도 수출되었다. 또한 일본 기토라 고분에서는 고구려 시기 평양의 하늘을 그린 것으로 파악되는 벽화가 있다.

고구려의 단위로서 주로 건축에서 사용한 고려자(고구려척)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통용하였다. 의술 역시 뛰어나서 머리카락 하나를 열 개로 가를 수 있었다고 할 만큼 침술 등이 뛰어났다. 전쟁을 많이 했던 만큼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침술 말고도 외과술 또한 높은 수준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중공업 또한 고구려의 막대한 생산·가공·운영 능력이 증명하듯이 우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남북조시대 남량의 도홍경의 연단술 관련 기록에 의하면, 타지역 금은 먹었을 때 독 때문에 위험하지만 고구려 금은 먹어도 안전하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에서 불순물이 적은 순도 높은 금을 제련해낼 능력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고구려의 높은 제련기술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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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중국에서는 고구려의 활을 '맥궁(貊弓)'이라고 불렀다. 마치 대한민국의 활을 '한궁(韓弓)'이라고 부른다는 식으로 보면 된다. 1천 몇 백년이 넘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외형 면에서는 지금의 각궁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8. 종교

풍속은 음사(淫祀)[18]가 많고, 영성신(靈星神)· 해신(日神)· 가한신(可汗神)·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 국성(國城)[19] 동쪽에 큰 굴이 있어 신수(神隧)[20]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에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낸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출처
음사(淫祀)라는건 이걸 기록한 중국 측에서는 일명 사이비 취급하듯이 본건데, 그러나 이는 당시 화이관을 바탕으로 한 중국인의 시각일 뿐이다. 중국 제사 문화와는 다른 고구려 토착 제사 문화였을 것이다.
귀신(鬼神)·사직(社稷)[21]·영성(零星)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하며,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큰 모임이 있으니 그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신(禭神)이라 부르며, 또한 10월에 (그 신을) 맞이하여 제사지낸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驪) 출처
수도 동쪽에 있는 큰 굴이라는 건 국동대혈(國東大穴)을 말하는 것이다.[22] 여기서 지내는 동맹은 일종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데, 매년 10월마다 나라에서 진행하는 대대적인 행사이며 온 백성이 모여 신을 맞이하는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교 방식 처럼 엄근진한 제사 분위기가 아니라 한가위 마츠리[23][24] 처럼 떠들썩한 명절 분위기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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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 특별히 정해놓은 국교가 있는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다신교스러운 성향을 띈다.[25] 우선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나오듯이 '천제지자(天帝之子)'라 하여 ' 하늘신의 자손[26]'이라는 자부심이 높았으며, 유화부인으로 인해 ' 물(水)신의 자손'이라는 자부심도 상당하였다. 당연히 조상 숭배 사상도 있었기에 건국신인 주몽은 물론이고 영웅들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동명성왕 유화부인은 고등신(高登神)과 부여신(扶餘神)이라는 이름으로 숭배했다.[27]

횡도 개마무사 군사적인 것과도 관련 있는 을 다루는 중공업, 고대 정주민들이 먹고 사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농업 등과 함께 여러 자연들을 신격화 한 신앙이 나타난다. 신으로 받들어 모실 정도로 고구려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더불어 무덤 벽화로 일상 풍경들을 그려놓은 걸 보면 고구려인들은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와 같은 생활이 계속 이어진다는 내세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파일:고구려 벽화 별자리.jpg 파일:고구려 벽화 북두칠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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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곳곳에서는 별자리도 많이 그려놓았다. 특히 북두칠성 고조선 고인돌에서도 발견되며 이를 신격화 한 칠성신 무속신앙 무당들이 지금도 비중있게 모시고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한민족의 오랜 신앙이다. 이러한 별자리 신앙이 위 기록에서 나오는 영성신(靈星神)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마 고구려 천문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위와 같은 토속신앙 종교 말고도 소수림왕 때 부터 불교가 들어온 뒤 나중에는 도교도 들어온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가 밀접하게 관련있는 옛 사회 특성 상 도교가 들어올 때는 불교로부터 정치적인 탄압을 받아 위축되는 상황으로 처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모신 신들 중 특이한 신은 '기자신(箕子神)'이다. 아마 기자조선을 세웠다던 기자일 것으로 추정한다. 고고학 연구 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는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있지만 일단 중국측 기록에서는 화이관스러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음사(淫祠)라고 써 놓은걸 보아 중국식 제사와는 다르다는 뜻일 테니 만약 기자조선 부정설대로라면 고조선의 토착 지배자인 누군가와 관련해서 숭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기자조선이 사실이든 아니든 고구려에서 공식적으로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기록은 따로 발견된 게 없기 때문에 고구려가 고조선으로부터 받은 영향과는 별개로 고조선을 직접 계승했다고 확신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고조선의 중요성을 본격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한 시기가 중세인 고려부터였음을 감안하면 그나마 고대에서는 고구려가 고조선을 챙긴 셈이다. 심지어 고구려는 고조선과 동시대에 있던 부여에서 유래한 나라인데도 말이다.[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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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東川王) 출처
어쩌면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길 때, 또는 옛 고조선 영토를 점령했을 때 해당 지역 주민들을 융화하기 위해 고조선과의 연결점을 내세워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재평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위와 같은 기록이 있기도 하고. 그러다 점점 고구려인들의 정체성도 고조선계로 동화한 듯 한데, 나중에는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이 자신을 ' 부여인'보다 ' 삼한인', ' 조선인'이라고 기록해 놓은 사례가 더 많다. 고구려 유민들이 자기 무덤에 밝힌 출신 다만 훗날 발해가 부여의 풍속을 이었음을 주장한 점 등을 보면 고구려 멸망 당시까지도 부여의 정체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공은 이름은 자(慈)이고 자(字)는 지첩(智捷)으로 조선인이다.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
그 처음으로, 조선귀족으로 크게도(아름답게도) 왕을 칭하는 것을 버리고 훈로(獯虜:오랑캐)를 죽여 베어버려 위대한 당나라를 도왔구나.
고진묘지명(高震墓誌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
군(君)의 휘(諱)는 남산(男産)이니 요동(遼東) 조선인이다.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
공(公)은 이름이 융(隆)이고 자(字)도 융(隆)으로 백제 진조인(辰朝人)[30]이다.
부여융묘지명(扶餘隆墓誌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

여담으로 백제가 고구려를 욕할 때 '맥(貊)'과 모양이 비슷한 '박(狛)'을 써서 '박적(狛賊, 짐승같은 도둑놈)'이란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高麗'와 '狛'을 '코마'라고 발음하기도 하는데 위에서 말한 '고려적(코마부에)'도 '高麗笛'과 '狛笛' 두 표기가 있으며 고(구)려에서 전해졌다는 해태 비슷한 동물 석상인 '고려견(코마이누)'도 '狛犬' 표기를 쓴다. 또한 웅진(熊津) 백제어로 '고마나루' 또는 '고마나리'라고 발음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일본어로 곰을 '쿠마(熊)'라고 발음하는 사례로 추측하여 고구려에서도 고조선처럼 을 숭상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31]

'가한신(可汗神)'도 모셨다는 걸 보아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존재한 텡그리 신앙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단군신화도 텡그리 신앙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고구려가 모신 신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자연신들과 함께 역대 왕과 왕후들을 조상신으로 모셨다. 종묘, 신궁 문서도 참고하면 좋다.
  • 유화부인: 조상신, 수신(隧神), 국토신(國土神), 생산신(生産神), 농업신
  • 고주몽: 조상신
  • 해모수: 조상신, 태양신. 천제의 아들, 천제의 태자 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 하백: 조상신, 물(水)신. 중국 신화[32]와는 달리 주몽의 외할아버지이자 유화부인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 불(火)신
  • 야철(揶鐵)신: (鐵)신
  • 마석(磨石)신: 숫돌
  • 농사신: 소의 머리를 한 모습이다.
  • 제륜(提輪)신: 수레바퀴
  • 기록신
  • 해(日)신
  • 달(月)신[33]
  • 사방신
  • 삼족오
  • 가조(賀鳥): 얼굴은 사람이고 몸통은 새의 형상으로 목과 꼬리를 길게 늘이고 날개를 활짝 편 모습으로 등에 단지를 지고 있다. 덕흥리 고분 앞방 북벽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천마: 꼬리와 갈기를 흩날리며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덕흥리 고분 앞방 북쪽 천정 상단에 그려져 있다.
  • 박위(博位): 말이나 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4개의 귀가 머리 위로 높이 솟았고 다리는 기묘하게 굽어 있다. 목에서 몸통으로 내려오면서 붉은 반점이 있다. 덕흥리 고분에서 천마 바로 아래에 그려져 있다.
  • 영양(零陽): 머리에 6~7개의 뿔이 나 있고 말이나 사슴처럼 보이는 짐승이다. 산 속의 영양류 동물을 나타낸 것이라 추정된다 한다. 덕흥리 고분 앞방 북쪽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옥녀(玉女):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든 채 긴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선인을 따라 날고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덕흥리 고분 앞방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신선: 덕흥리 고분벽화 앞방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상서로운 짐승들: 해, 비어, 청양, 양수 등. 덕흥리 고분벽화 앞방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비어(飛魚): 등에 날개가 달린 잉어같은 모습을 한 물고기. 덕흥리 고분 앞방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견우와 직녀: 덕흥리 고분벽화 앞방 남쪽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성성(猩猩): 성성지상(猩猩之象). 사람의 머리에 짐승의 몸을 한 신성한 짐승(신수). 역사저널 그 날 2015년 8월 30일 방송분에서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하늘과 교감하는 동물이라 소개했다. 덕흥리 고분 앞방 남쪽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길리(吉利): 길리지상(吉利之象). 짐승의 머리를 단 새.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 있고 목이 길며 몸통에 붉은 반점이 일렬로 그려져 있다. 짐승의 발을 가졌다. 역사저널 그 날 방송에서는 노루 머리에 봉황의 다리를 한 새로, 이로움을 상징한다고 소개되었다. 덕흥리 고분 앞방 남쪽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부귀(富貴): 길리와 유사한 모습이나, 새의 발을 가졌다. 덕흥리 고분 앞방 남쪽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만세(萬歲): 사람 머리를 한 새. 새의 발을 달고 있다. 덕흥리 고분 앞방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천추(千秋): 사람 머리를 한 새. 녹색의 날개와 세 갈래로 길게 뻗친 꼬리, 짐승의 발을 가지고 있다. 덕흥리 고분 앞방 천장고임에 그려져 있다.
  • 지축지상: 지축, 또는 지상이라고도 한다. 벽화에서는 지축일신양두라고 적혀 있다. 앞뒤 양 쪽에 사람 머리를 달고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짐승 모습을 하고 있다. 가느다란 끈을 단 모자를 머리에 썼으며, 왼쪽 몸통과 머리를 연결하는 부분에 털이 나 있다. 역사저널 그날 방송에 따르면 몸통은 지구의 회전축인 지축을, 두 개의 머리는 남극과 북극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며, 굽어있는 몸은 지구의 자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한다. 덕흥리 고분 앞방 천장고임 북두칠성 바로 아래에 그려져 있다.
  • 이 영원, 불사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옥토끼, 두꺼비, 계수나무 등으로 이를 나타냈다. 덕흥리 고분 벽화에서는 달에 두꺼비, 태양 삼족오가 그려져 있다.

9. 장례

男女已嫁娶, 便稍作送終之衣. 厚葬, 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列種松柏.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니, 금·은의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高句麗) 출처
死者, 殯在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해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 길한 날(吉日)을 가려 장사지낸다. 부모와 남편의 상(喪)에는 모두 3년 옷(服)을 입고, 형제의 [상(喪)에는] 3개월간 입는다. 초상에는 눈물을 흘리며 곡(哭)하지만, 장사지낼 때에는 북치고 춤추며 풍악을 울리면서 장송(葬送)한다. 매장(埋葬)이 끝나면 죽은 사람이 생존시에 썼던 의복·노리개·수레·말 등을 가져다가 무덤옆에 놓아두는데,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투어 [그것을] 가져간다.
북사(北史) 열전(列傳) 고려(高麗) 출처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하늘이 (태왕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어 39세(412년, 영락 22년)로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414년, 장수왕 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광개토대왕릉비
전쟁이 많았던 탓도 있겠지만, 무덤까지 함께 가자는 뜻으로 결혼과 동시에 수의를 지었다. 실제로 고구려 무덤들은 부부합장묘이거나 무덤 벽화로 부부 초상화를 그려둔 사례가 많다. 지금으로 치면 부부의 생전 모습을 무덤에다 사진으로 남겨놓은 것. 로맨틱하다

부모와 남편이 죽으면 삼년상을 치렀다. 광개토대왕이 승하하고 장수왕이 부왕을 기리며 만 24개월 동안 상을 치른 것을 광개토대왕릉비가 증언한다. 백제 또한 무령왕이 승하했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장사를 지냈음이 무령왕릉 지석에서 확인되고 있으므로 이 부문은 비단 고구려만 해당하는 장례 풍습은 아니다. 신라는 6세기 초반 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어서 신라가 그 전이나 이후로 고구려와 백제 처럼 삼년상 풍습을 따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세한 설명은 광개토대왕릉비, 무령왕릉, 삼년상 문서를 찾아보자.

10. 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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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무덤은 크게 돌로 쌓은 적석총(돌무지무덤)과 석실분( 굴식 돌방무덤)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적석총은 피라미드형태의 계단식 적석총이 대표적이며 그중에서도 장군총이 많이 알려져 있다. 석실분은 아름다운 벽화가 칠해진 무용총, 각저총 등이 유명하다. 고구려 적석총은 압록강 유역에서 축조되던 무기단식적석총에서 발전하여 규모가 커지면서 계장식적석총, 계단식적석총으로 발전하였으며, 3세기 후엽에는 초거대 적석총이 축조된다. 일반적으로 초거대 적석총의 축조시기는 고구려의 왕권이 현저하게 부각된 시기로 본다.

고구려의 영역이 넓어지던 4세기 중후엽부터는 국내성일대에 귀족묘부터 낙랑과 요동에서 유행하던 석실봉토분이 들어온다. 과도기 형태로 우산하 3319호분과 같이 계단식적석총에 매장주체부는 낙랑의 전축분인 경우도 있다.
평양 천도와 함께 고구려의 주묘제는 석실분으로 전환된다.

고구려의 무덤은 오늘날의 길림성과 요녕성, 한반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지상에 축조되는 무덤의 특성상 많은 수의 무덤이 이미 멸실되었거나 현재도 파괴되고 있다. 200여 기의 무덤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현재 수십 기만 남아있는 상고성자 고분군이 대표적인 예. 현재 가장 많은 수의 무덤이 밀집분포하고 있는 곳은 길림성 집안시의 통구 고분군으로 약 10000여 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 고분군 문서 참고.

10.1. 왕릉

왕릉같은 경우는 석실 구조를 채용하면서도 토착 묘제인 적석총의 규모와 장엄성이 현저해진다. 그 절정으로 이른 것이 고국양왕 또는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과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이다. 주로 초대형 적석총들이 왕릉으로 비정된다.
  • 국내성 시기
    • 임강총 : 국내성 동쪽의 압록강 북안에 위치. 3세기 말~4세기 초로 비정되는 계장식 초거대 적석총. 동천왕릉으로 주로 비정된다.
    • 서대총 : 국내성 서쪽의 마선구 서쪽 산사면에 입지. 4세기 전반으로 비정되는 계단식 초거대 적석총.
    • 천추총 : 국내성 서쪽의 압록강 북안에 입지. 4세기 후반으로 비정되는 초거대적석총. 석재의 가공도가 고도로 높아지고, 밀림방지가공에 거대한 지탱석을 받쳐놓은 계단식 초거대 적석총.
    • 태왕릉 : 국내성 동북쪽에 입지. 천추총과 거의 같은 구조이나 지탱석이 더 커짐.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으로 비정.
    • 장군총 : 규모는 작아졌으나 매장주체부는 커짐. 비례가 훨씬 안정적이다. 5세기 초, 혹은 5세기 후엽에 비정.
  • 평양성(장안성) 시기
    • (전)동명왕릉 :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분으로의 과도기를 보여주고 있다. 장수왕릉, 혹은 문자명왕릉으로 비정. 드물게 동명왕의 사당역할을 한 가묘로 추정하기도 한다.
    • 한왕묘 : 동명왕릉과 더불어 장수왕릉의 후보
    • 강서삼묘 : 강서대묘, 강서중묘, 강서소묘로 구성된 3개의 석실봉토분. 고구려 최후기 왕릉으로 비정된다.

자세한 것은 고구려 왕릉, 고분문화 문서 참고.

11. 생활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용모가 단정한 것을 숭상하며, 허리를 굽히고 종종걸음을 하면서 공경을 표한다. (俗潔淨自喜,尚容止,以趨走爲敬)

시집을 가거나 장가들 일이 있을 때에는 남녀를 취함에 서로 사랑하면 즉시 결혼한다. 남자 집안에서는 돼지고기와 술만을 보낼 뿐이며 재물과 패물을 받는 예절이 없고, 혹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이를 부끄럽게 여겨 계집종을 파는 것으로 여겼다. (有婚嫁,取男女相悅即爲之。男家送豬酒而已,無財聘之禮,或有受財者,人共恥之,以爲賣婢。)
북사(北史) 卷094 列傳 第82 四夷 高麗
귀천(貴賤)의 구분 없이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無貴賤之節, 然潔淨自喜.)
위서(魏書) 卷100 列傳 第88 高句麗
장을 담거나 술을 빚는 걸 잘한다. (善藏釀.)
양서(梁書) 卷54 列傳 第48 諸夷, 남사(南史) 卷79 列傳 第69 夷貊 下
바둑 투호 놀이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축국에 능하다.(好圍棋投壺之戲,人能蹴鞠.)
구당서(舊唐書) 卷199上 列傳 第149上 東夷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나라 안의 읍락에 밤중에 남녀가 무리를 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논다. (其民喜歌舞,國中邑落,暮夜男女群聚,相就歌戲.)
삼국지(三國志)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第30
매년 초에 패수(浿水)가에 모여 노는데 왕은 요여(腰輿)[34]에 타며 조우관을 쓴 이들을 나열시켜 살펴본다. 의례가 끝마치면 왕이 의복을 물에 넣고 좌우를 두 부(部)로 나누는데 (사람들이) 물속에 있는 돌을 서로 던지며 시끄럽게 소리치며 물리치는데 다시 세 번을 한 뒤에 그친다. (每年初,聚戲於浿水之上,王乘腰輿,列羽儀以觀之. 事畢,王以衣服入水,分左右爲二部,以水石相濺擲,諠呼馳逐,再三而止.)
수서(隋書) 卷81 列傳 第86 東夷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혼인에 대한 말이 정해지고 나면),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뒷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壻屋)' 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절(跪拜)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세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작은 집(서옥)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서옥)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長成)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위서
고래가 새끼를 낳은 후 다시마를 먹고 회복하고, 고(구)려인들은 이를 교훈으로 산모에게 다시마를 먹게 한다. (鲸鱼下崽后,食海带,以康复,高丽人以此为鉴,使产妇食海带)
초학기(初学记)
이 Mouxri라는 나라의 국민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일상처럼 행하는 혹독한 군사훈련으로 투지가 매우 높았다.
Historiam[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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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 있을 때 팔짱을 끼거나, 소매에 손을 꽂거나, 쭈그려 앉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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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화 속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초기 한복 구조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호복에서 유래하였거나 또는 호복 그 자체인 옷차림으로, y자 모양을 반대로 한 좌임(左衽)으로 입고 상의(저고리, 두루마기)와 하의(바지, 치마)가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다.
  • 알다시피 고구려에서는 패턴 무늬 한복을 많이 입었는데 이런 패션 양식은 하늘의 들이나 표범같은 동물들에게서 따온 것으로 추측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주 보이고 부여 신라에서도 흰옷을 숭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고구려에서도 백의민족 풍습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는 대목도 흰 옷이 본디 어마어마한 세탁량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흰 옷을 주로 입어 청결하게 여겨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 지금으로 치면 라운드넥 티, 터틀넥 티 같은 옷을 저고리 안에 같이 받쳐 입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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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라건의 옛 형태가 아닐까 추정되는 검은 두건(黑巾, 흑건)을 쓴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주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쓰고 있지만 사냥 등 야외활동을 할 때는 신분과 관계없이 쓴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두건과도 큰 차이가 없다.
  • 첫번째 벽화에서 가운데 사람이 입은 옷을 잘 보면 단령(團領)을 번령(飜領) 형태로 입은 게 아닐까 추정한다. 한국에서 단령을 본격적으로 입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남북국시대부터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만약 이 벽화 속 옷이 정말 단령(번령)이 맞다면 선비족과 인접했던 고구려인 만큼 남북국시대보다 일찍 해당 옷을 수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구체적인 연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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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쌍영총 묘주 부부 모습. 앞에 놓여있는 신발이 조선시대 목화(木靴)신[39]과 상당히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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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백 신부나 각시탈, 부네탈에 바르는 연지곤지 화장을 고구려 벽화 속 여인들에게서도 다수 찾아볼 수 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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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씨름도에서와 함께 고비인(高鼻人), 즉 서역인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또한 2번째 벽화의 왼쪽 남자 모습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들도 상투를 틀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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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옛 기록에서 ' 맥적(貊炙)'이라는 음식이 나오는데 이름을 풀어보면 ' 맥족의 구이'라는 뜻이다. 구체적인 조리 방법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확신할 순 없지만 고구려의 주변 환경을 고려해 보았을 때 대체로 양념 돼지 통구이 형태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국 고기구이 문화의 조상격 음식으로 보는 시각이 많으며 특히 ' 너비아니'와 ' 맥적구이'가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맥적(貊炙)의 요리법과 연원
  • 지금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먹는 상추를 고구려 사람들도 먹은 듯 하다. 수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산 상추를 비싸게 사가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추 문서 참고.
  • 집집마다 두었던 창고로 부경이 있었다.

1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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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도( 환두대도)를 의장용으로 사용하는 듯한 모습인 벽화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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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군 행렬도에서 보이는 모습과 굉장히 닮은 방패가 일본 왕실 보물창고인 정창원( 쇼소인)에 남아있다. 하지만 우연히 닮은 다른 나라 유물일 가능성도 있기에 더 정확한 연구와 고증이 필요하다. 출처
  • 삼한 중에서 가장 호전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생각보다 감성적인 면도 있었던 듯 하다. 일본서기 기록에서는 당나라군을 밀어부치다가 어느 한 당나라 병사가 무릎을 껴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약해져 진터를 빼앗을 수 없었다는 사례가 나온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 때문에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서 핑계를 댄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 고구려 장수와 백제 왕자( 위덕왕)가 전투 직전 통성명(通姓名)을 하고 단기접전(單騎接戰)을 치르는 장면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고대 한국에서도 중세 일본의 나노리, 일기토와 비슷한 문화가 있었던 듯 하다. 백합야 전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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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나라(게임) OST로 유명한 국내성 배경음악을 리마스터한 곡이 2020년 11월 26일 작곡가 유튜브 채널에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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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분에서 발굴한 광개토대왕 제사용 그릇


[1] 현대에 이걸 응용해서 그린 고구려 일러스트 예시 [2] 원래는 진한 톤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며 빛 바랜 톤으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3] 아주 옛날, 최소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전 세계의 수많은 문화권에서는 '하늘' 또는 '해'를 종교적인 뜻에서 제일 높은 격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4]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귀고리 유물은 신석기 시대 때 만든 흙, 뼈, 옥돌 귀고리 유물들이 출토한다. [5] 위 영상 1번째 곡 《소멸의 시간》은 평창올림픽 폐막식 공연에서도 나온 적 있다. [6] '가로로 부는 악기'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분류 기준이기도 하다. [7] 출처: 조동일, '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2005 p230-231. 옛 기록들에서도 다수 등장하는 내용이다. [8] 출처: 김용만,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2005 p238 [9] 위 영상 연주자도 다른 영상에서 이 점을 언급한다. "한국의 소금이라는 악기와 음색, 음계, 사이즈가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韓国のソグム(小金)という横笛と音色・音階・サイズでとてもよく似ています。sounds very much like today's Korean Sogeum(Sokum) flute.) [10] 일본 궁중 음악인 '아악(雅楽, 가가쿠)' 중에서 한반도 계통 음악들을 가리킨다. 명칭 자체는 고(구)려악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에서 전해진 음악들을 통합한 분류이다. [11] 보(輔)가 변형된 것이다. [12] 위례홀, 미추홀 백제 지명에서도 사용하는 말이다. [13]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 [14] 정확히는 이러한 도굴이 어려운 묘제는 주로 신라의 전기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가야의 전기 양식인 덧널무덤(목곽묘)이나 돌덧널무덤(석곽묘)이었다. 그러나 삼국시대 후기로 갈수록 전체적으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원래의 양식들은 재료와 노동력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갔다는 문제, 각 국가들의 역사가 길어지고 정부의 권위가 안정되며 정치가 발전하자 지나치게 거대한 묘제를 통해 권위를 나타낼 필요성이 줄어든 것 등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났다고 분석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양식이 바뀌며 수묘인 없이는 도굴에 취약해지게 된다. [15] 또는 꼬리깃. 백제와 신라의 것을 보면 더욱 의 깃털을 형상화한 듯이 보인다. 실제로 이런 장식기와의 유래를 가정하는 설 중 하나가 봉황의 깃에서 따왔다는 추측이다. [16]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들 중 '뿔'을 떠올릴 만한 요소는 밖에 없는데... 아마 후술할 '소 머리 농사신'과도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는 어디까지나 단순 추측일 뿐이니 맹신하진 말자. [17] 고구려 갑옷 투구에서도 날개같기도 하고 같기도 한 장식이 있는데, 이렇게 비슷한 요소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걸 보면 어떤 특별한 것을 상징하는 형상일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솟대 조우관 처럼 를 숭배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던지... 이런 날개뿔 투구는 어느 정도 계급이 있는 장수나 지휘관들이 주로 썼을 것으로 보인다. 고분 벽화를 보면 중갑 무장을 하고 단독으로 멋진 포즈를 취하며 비중있게 등장하는 무사들이 날개뿔 투구를 쓰고 있는 반면, 행렬도 처럼 여럿이 모여 등장하는 일반 병사들은 날개뿔 투구를 쓰고 있지 않기 때문. [18] 음란할 음(淫), 제사 사(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네이버 한자사전> [19] 나라의 수도 [20] 수신(隧神, 禭神)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사람들이 국토신(國土神) 또는 생산신(生産神)으로 받들었다. <네이버 한자사전> [21] '토지신(土地神)과 곡식신(穀食神)'이라는 뜻으로서, 옛날에 임금이 국가의 무사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사직단(社稷壇)에서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므로 사직(社稷)은 '국가의 기반' 또는 '국가'라는 뜻으로 변했음. <네이버 한자사전> [22] 국동대혈 응용 일러스트 예시 [23] 일부 학계에서는 일본어 '마츠리(祭り)'가 한국어 '맞으리'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마츠리'는 '(신을) 맞으리'에서 생긴 말이다. 신령을 모신 가마를 메고 가마꾼 수십명이 외치는 '왓쇼이'는 다름아닌 '(신이) 오셨다(お出になった)'라는 의미의 한국어다." - 重金碩之 <風習事典> 1981, "일본을 대표하는 마쓰리가 야사카진자의 기온마쓰리다. 신사의 '마쓰리'라는 말은 하늘에서 강신(降神)하는 신을 맞이하는 한국어 '맞으리'에서 생겼다고 본다." - 교토부립대 사학과 카도와키 테이지(門脇禎二) 교수. 참고로 야사카 신사 고구려계, 신라 도래인과도 관련이 있다. [24] 신궁(백제)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고대 한국과 일본의 토속 신앙은 유사점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들이 있다. [25] 역사가 긴 만큼 초기와 중후기의 양상이 다른데 초기는 토속적인 모습을 보이며 고분벽화도 생활상 묘사가 많다가 왕실의 후원으로 국교급 대우를 받게 된 불교가 들어온 뒤로는 고분벽화도 불교식의 추상화가 대세가 된다. 현대 한국에서도 여전히 그런 것처럼 불교는 토속문화와 그럭저럭 잘 융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이 집권한 극후기에는 왕실과 유착되어 있던 불교계를 억누르기 위해 일부러 도교를 진흥하기도 했다. [26] 일명 천손사상. 단군신화도 이에 해당한다. [27] 유화는 목상을 만들어 숭배했다고 하는데, 고려도경에서는 고려 시대까지도 형태를 이어오고 있었던 듯 하다. 개경의 동신사에서 숭배하였다고 기록했다. 이후부터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몽골 침략과 조선 개창을 거치며 소실된 것으로 추정한다. [28] 고구려는 부여 이주민들에게서 유래하긴 했지만 부여를 계승하겠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당장 고구려와 부여는 동시대에 존재하며 서로 잦은 전쟁을 치렀는데, 그랬기에 프로파간다적으로도 최소한 부여와 동급은 되는 위상을 주장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의 신화대로면 같은 천신인 해모수에게서 유래한 동명성왕과 해부루는 이복형제가 된다. 반면 세계사적으로 볼 때 정복한 나라의 계승성을 주장한 경우는 많은데(ex: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 로마를 계승했다고 선포한 것이나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뒤 중화를 계승했다고 선포한 것 등) 주로 정복지 주민들에게 통치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고구려가 낙랑, 대방군을 정복했을 무렵은 고조선 멸망으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긴 하지만 고려시대까지도 일대에 고조선 신화가 전해져오고 있었던 만큼 고구려 정부도 그에 대해 모르고 있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9] 고려시대에 가면 단군과 해모수는 점점 동격의 신으로 여겨지게 되어 평양의 사당에서도 동명성왕은 단군과 합사되기 시작한다. [30] 부여융묘지에서 백제왕실을 하손(河孫:하백의 후손)이라고 하여 백제가 고구려와 매우 친밀하였음을 전해주고 있으며, 또 부여융이 진조인(辰朝人)이라고 하여 백제인들이 마한의 진국(辰國) 계승의식을 가졌음을 엿보게 해주기도 한다.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 참고로 진(辰)은 동방을 가리키는 뜻도 있었다. [31] 해모수가 유화를 만난 곳이 웅심산(熊心山) 근처였다. [32] 중국 신화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원래는 중국 동북지역 동이족이었다고 한다. 고구려 건국신화 하백의 출자에 대한 인식 재검토 [33] 여신 모습을 하고 있는데, 원래는 성별로 여신, 여왕을 따로 분류하지 않았다. '여왕'이라는 호칭도 조선시대부터 등장한다. [34] 손으로 끄는 수레를 의미한다. [35] 동로마 제국 기록 [36] 원나라는 고려에게 자기네 풍습을 강요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 출처 [사진] 파일:설날 세배.png [38] 왼쪽 무릎을 굽히면 좌슬착지, 오른쪽 무릎을 굽히면 우슬착지라고도 한다. [39] 파일:목화신.jpg [40] 예로부터 붉은색은 악귀를 쫓는데 효과가 있다고 하여 조선시대 때는 결혼식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신부를 보호하는 종교적인 뜻으로 연지곤지를 발랐다. [41] # 무늬 말고도 마지막에 새긴 十자 또한 문맥상 불필요한 글자인데 무얼 상징하는지 정확히 해석이 안 된다고 한다. 여러가지 추측하는 설만 무성할 뿐이다. [42] 고구려 아차산 일대 보루군 백제 풍납토성 삼국시대 유적 곳곳에서 발굴한 토기에서도 # 무늬를 발견한 사례들이 있다. [43] 그러나 평범한 토기 유물에서조차 일부러 그려놓은 듯이 발견되는 무늬기 때문에 아무 이유가 없진 않았을 듯 하다. [44] 입구를 기준으로 봤을 때 우물 난간 부분이 □ 각도인 실제 첨성대보다 더욱 ◇ 각도로 새겨놓았다. [45] ' 하늘 천(天)'자는 종교적인 시각에서의 하늘이라는 뜻을 포함한다. [46] 고구려 건국신화에서도 등장하고 고구려 사람들이 물의 신이자 조상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중국 신화에서도 나오는 인물이지만 원래는 중국 동북지역 동이족이었다고 한다. 고구려 건국신화 하백의 출자에 대한 인식 재검토 [47] 실제로 세계 각지의 고대인들은 우물을 종교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예를 들자면 제사를 지낸 듯한 신라 우물을 발견한 사례가 있다. 이렇게 우물과 관련있는 종교를 천수신앙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