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3:42:21

조아킴 뮈라

파일:프랑스 제1제국 국장.svg
프랑스 제1제국의 제국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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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국왕 조아키노
Le Roi de Naples Joachim
파일:Joachim Murat.jpg
이름 조아섕 뮈라(Joachim Murat)[1]
생몰년도 1767년 3월 25일 ~ 1815년 10월 13일
신체 183cm[2]
출생지 프랑스 왕국 로트주 라바스티드뮈라[3]
사망지 양시칠리아 왕국 칼라브리아주 피초
매장지 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
재위 베르크와 클레브 대공[A]
1805년 ~ 1808년
나폴리의 왕
1808년 ~ 1815년
군복무 기간 1787년 ~ 1815년
계급 프랑스 제1제국 대육군 원수
지휘군단위 연대 군단(기병)
참전 프랑스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이탈리아 전쟁
이집트-시리아 원정
마렝고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 전투
아일라우 전투
보로디노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
┗톨렌티노 전투
서훈 프랑스 육군원수
레지옹 도뇌르 훈장
에투알 개선문 남쪽 24열
가족 피에르 뮈라조르디(부)
잔 루비에르
10명의 형제자매
카롤린 보나파르트(부인)
아실 뮈라(장남)
라에티지아 뮈라(장녀)
뤼시앵 뮈라(차남)
루이즈 뮈라(차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손위 처남)
서명 파일:조아킴 뮈라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2.2. 나폴리 왕이 되다2.3. 배신과 말년
3.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군인.

장바티스트 베시에르와 함께 나폴레옹 프랑스 제국 대육군 최고의 기병대장으로서 기병대 지휘로는 실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군인이었다.

그는 기병을 이끌 때는 승승장구했으나 전체적인 군사적 식견은 부족했으며 특히 포병의 지휘는 힘겨워했다.[5] 그래서 뮈라는 기병을 이끌고 출진한 예나 전투 등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포병을 이끌고 출진했던 톨렌티노 전투에서는 괴멸적인 패배를 겪었다. 당대 최고의 기병대장이었지만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원수가 되었고, 그 이후에는 다시 나폴레옹에게 가담하여 재기를 꿈꿨지만 총살 인생을 끝마쳤다.

장 란과 함께 황제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6][7] 지위는 나폴리 조아키노(Gioacchino), 초대 베르크와 클레페 대공[8]이다.

183cm(당시 프랑스 평균 신장이 164cm 정도)에 곱슬머리 미남이었으며 게다가 자신의 주변 사방으로 총알이 날아드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곳을 마치 허허벌판 달리듯 달렸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용맹한 군인이었다. 주로 기병대를 이끌었는데 전술적 은폐고 뭐고 다 무시했으며 작전 자체를 아예 짜지 않고 자신의 감각만으로 판단 후에 돌격하여 이겼다. 뮈라는 다른 원수들에 비해 군사 및 정치적 식견이 부족했다. 때문에 군사적인 부분은 장 란 미셸 네가 보좌했으며 뮈라는 저돌적인 전투 부분만 보좌했다. 하지만 기병이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를 판단하는 전술적 직감은 천재적인 수준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이하 프랑스군의 모든 지휘관 중 유일하게 작전지도를 갖고 다니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이를 부끄러워하긴커녕
"내 전략은 적을 눈앞에 두고서야 완성된다!"
라고 하며 용맹함에 대한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신의 무력과 기병대 지휘 능력만으로 나폴레옹 1세의 26인 원수 중 한 명이 된 인물이었다.

장군으로서의 자질면에서 봤을 때, 나폴레옹이 직접 데리고 다니며 적을 때리는 망치로 쓰면 최고의 성능을 보여주었지만, 독립된 한 개의 군단을 이끌며 나폴레옹의 명령없이 스스로 작전을 짜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냥 돌덩이로 전락하는 유형이었다.

2. 생애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로트 주 라바스티드포르튀니에르(Labastide-Fortunière)[9]에서 여관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아버지의 여관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1787년 21세의 나이로 기병대에 입대, 진가를 발휘하여 승진을 거듭해 5년만에 장교로 진급했다.

1795년 10월, 파리에서 방데미에르 13일의 반란이 일어났다. 왕당파 반란을 나폴레옹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과 인연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가능한 빨리 파리 교외에 비치되어 있던 대포들을 확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뮈라가 휘하의 기병을 끌고 미칠듯한 스피드로 무기고를 장악하고 나폴레옹에게 대포를 끌어다 준 것.[10] 나폴레옹은 이 대포로 시내에서 산탄을 영거리에서 갈겨대며 왕당파 반란군을 때려 잡았다. 그 공으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이것을 인연으로 뮈라는 나폴레옹의 측근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쟁, 이집트 원정에 모두 참가하며 공을 세웠다.

1799년 7월 경, 영국은 아부키르 항구에서 프랑스 함대를 박살냈다. 이후 영국군은 나폴레옹군 마저 섬멸시키기 위해 아부키르만에 세이드 무스타파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군 2만명을 상륙시켜 교두보를 구축했다. 뛰어난 전략가였던 세이드 무스타파는 나폴레옹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루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판단하여 2중으로 구성된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장기전을 꾀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Antoine-Jean_Gros_-_Bataille_d%27Aboukir%2C_25_juillet_1799_-_Google_Art_Project.jpg
아부키르만 전투 당시 뮈라

나폴레옹은 이 군대를 격멸시키기 위해 공세를 감행했지만 견고한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단 1차 방어선만 간신히 돌파했다. 프랑스군이 군대를 물리자, 오스만 병사들은 방어선에서 나와 전장터에 방치된 프랑스군 부상병들을 학살했다. 이때, 뮈라가 기병대를 이끌고 방어선을 습격했다. 어찌나 빨리 들이닥쳤던지, 오스만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성문조차 닫지 못했다. 뮈라는 열린 성문 안쪽으로 침투하여 무스타파의 천막까지 들이닥쳤다. 이때 뮈라는 기병도, 무스타파는 권총으로 서로에게 크로스 카운터를 날렸는데, 뮈라는 턱에 총상을 입었지만 멀쩡했고 오히려 무스타파는 뮈라의 칼에 손가락이 두개 잘리곤 항복해버렸다.[11]
파리의 여인들이여, 안심하라. 다행히 내 입술은 무사하다.
전투가 끝나고 그의 상처를 걱정스러워하는 부하들에게 농담을 던지며.

한편,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고립될 것을 우려하고 군대를 이집트에 남겨둔 채 심복 몇명만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프랑스에 입국했다. 이때 뮈라 역시 나폴레옹과 함께 프랑스에 귀국했다.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의원들을 건물 밖으로 내쫓을 것을 명령했다. 이에 뮈라는 척탄병들을 인솔하여 의원들을 모조리 밖으로 쫓아냈다. 이러한 공로로, 나폴레옹은 뮈라를 매우 총애했고, 1800년에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 보나파르트와 결혼, 나폴레옹과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덕분에 뮈라는 나폴레옹의 모든 심복과 장군 중 유일하게 원수를 넘어 '나폴리 <왕>'위를 제수받았다.

1800년, 나폴레옹은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중간에서 요격하여 나폴레옹을 패배 직전까지 내몰았다. 하지만 나폴레옹군의 결사적인 반격으로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주춤해진데다, 마침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가 지휘하는 선발 예비대가 돌아와 반격을 가함으로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뮈라는 기병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여 크나큰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12] 이 전투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영향권을 박탈당했고, 프랑스는 이탈리아 내의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1801년, 뮈라는 나폴리 왕국에 폴리뇨 조약을 강요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제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함과 동시에 원수로 진급했다.

그런데 뮈라는 개인적으로 장 란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집트 원정 당시 넬슨 제독에 의해 프랑스 원정군이 고립의 위기에 처하자 뮈라는 나폴레옹의 실수를 통렬히 비난했다. 이런 불평이 나폴레옹에게 전해지자 다급해진 뮈라는 란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이 때문에 란은 평생 뮈라를 싫어했고, 자기가 통수를 친 것도 잊어버린 뮈라 또한 란을 경멸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1805년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출정할 때 이 두 사람에게 공동작전을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작전이 제대로 먹힐 리 없을 듯 했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연합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805년에 두 사람은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 항복을 받아내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적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뮈라는 그답지 않게 러시아군을 함부로 추격하려 들지 않았고,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거짓 시한부 휴전 계략에 놀아나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독자적으로 지휘할 때는 매우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나와 함께 하면, 그는 내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저쪽 방향에 있는 적군 4~5천명을 무찌르라고 명령하면 그는 번개처럼 달려가 적군을 짓밟았다. 하지만 그를 혼자 내버려두면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둔하게 행동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개인적으로 정말 용감했지만, 사실 군사적 재능은 별로 없었다. 그는 적군 앞에서 기병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보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13]
제16 엽기병(Chasseur)의 어느 장교
힘이 장사였고,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용감했고, 전투의 위험 한가운데서도 존경심이 들 정도로 침착했다. 우아한 군복을[14] 입은 그의 모습은 적군인 카자크 기병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폰 로스(von Roos)
결국 그에 대해 종합을 해보면, 용감하기 짝이 없지만, 원수감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기병대의 지휘관은 치밀한 전략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오로지 스피드가 생명인 기병대에서, 지휘관이 갖춰야 할 제1의 덕목은 용기와 과감성이지만 이는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필요한 것이고, 전체적인 전황을 읽고 적절한 판단을 내려 판을 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는 모자라는 것.[15] 그래서인지, 뮈라는 주로 나폴레옹의 기병대만을 지휘했고, 기병대 지휘관으로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패주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여 완전히 섬멸시켰다. 결국 프로이센은 폴란드 주둔군과 동부 쪽 병력을 제외한 전군이 포로로 잡히는 비극을 맛보고 나폴레옹에게 굴복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Chartier-Murat_at_Jena.jpg
예나 전투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뮈라

1807년, 나폴레옹은 이번엔 폴란드로 원정을 떠났다. 러시아 제국은 이를 막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아일라우에서 나폴레옹군과 격돌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패전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 나폴레옹은 적을 찾기 위해 병력을 사방에 분산시켰기 때문에 당시 그에게는 41,000명의 병력만 남아있었다. 그런 때에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 63,000명이 대포 460문을 앞세운 채 당도한 것이다! 전투가 개시되었고, 나폴레옹은 갈수록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꼈다. 러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밀려들었고, 방어선마저 붕괴되어 나폴레옹이 포로로 잡힐 위기에 놓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명령했다.
"더 두고볼 것 없게 되었다. 이반[16] 녀석들의 종심을 뚫고 들어가 박살내버려라!"

뮈라는 11,000명에 달하는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는 기병대를 80개 제대로 재편성한 뒤, 이들을 둘로 나누었다. 그러한 작업이 끝나자,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러시아 보병대를 관통한 뒤, 거센 안개와 바람을 이용해 적의 집중 사격을 피했다.[17] 그는 다시 기병대를 정비한 뒤, 제2차 돌격을 감행해 러시아 보병대는 물론이고 460문에 달했던 러시아 포병대마저 박살내버렸다.

이 기병 돌격으로 약 1,500기의 기병들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이는 약 14%의 사상률로서, 한 번 돌격에 이런 피해를 입은 것은 꽤 큰 피해였다. 프로이센군이 궤멸되었다는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입은 사상률이 바로 14%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이 기병 돌격은 별 전과도 못 올렸다고 말할 수도 있다. 11,000기나 되는 기병들을 몰고 나가서 정작 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멀리서 누가 봤다면 그냥 말탄 사내들이 긴 종대를 이루어 우르르 몰려갔다가 별로 한 일도 없이 우르르 돌아온 것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돌격에서 몇 명의 러시아군이 프랑스 기병들의 군도에 맞아 쓰러졌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따로 없다. 상식적으로도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워낙 급하게 달려갔다가 급하게 돌아왔으므로, 대포 포가 밑에 숨은 러시아 포병들을 몇 명이나 베어넘겼는지도 불분명하고, 구리못과 망치로 러시아군 대포의 점화구를 막아 무용지물로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기병의 목적이 진영의 붕괴에 있는 만큼 정말 한 일이 없는 건 아니며, 워낙 대규모의 기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전열을 관통하여 지나갔다가 다시 뒤에서 우르르 몰려와 관통해 간 것은 러시아 장군들에게나 사병들에게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 장엄한 광경은 그날까지 아무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자신의 전열이 적의 기병대에 의해 자유자재로, 그것도 앞뒤로 2번이나 유린당하는데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면, 그 과정에서 칼을 맞고 쓰러진 병사들의 수가 많지 않다고 해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패닉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또한 러시아 장군이건 병사건 적들이 우리 진형에서 날뛰고 갔다'를 알지 '피해는 별로 없다' 는 알기 어렵다. 그리고 때맞추어 프랑스의 증원군이 당도하자[18] 나폴레옹은 반격을 명령하여 러시아군을 몰아내버렸다.

이때 뮈라가 지휘한 기병 편대 약80여 개의 돌격은 단일 규모로는 당시까지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마무리된 뒤에도, 이 돌격의 규모는 1위인 라이프치히 전투와 2위인 보로디노 전투에 이어 3위를 기록한다. 이는 라이프치히, 보로디노 전투에 이어 기병 돌격 규모 3위이고, 1, 2위 또한 뮈라가 지휘했으며, 심지어 역대 4위 규모였던 드레스덴 전투에서의 기병 돌격조차도 뮈라가 지휘하는 등, 나폴레옹 전쟁 중 기병을 이야기할 때, 뮈라를 빼고는 이야기가 안될 정도의 맹활약을 보여주었다.[19]

2.2. 나폴리 왕이 되다

아일라우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뮈라는 이 공로로 대공의 작위에 올랐다. 하지만 뮈라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의 영향 하에 들어온 폴란드에서 밑밥을 깔아보는 등 일을 벌리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20] 그러던 중 마침, 스페인에서 국왕 카를로스 4세 왕태자 페르난도 사이의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뮈라는 스페인 왕실에 개입, 둘 다 퇴위시키고 자신이 스페인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음모는 거의 성공하여 두 사람 모두 망명했으나, 스페인 사람들은 뮈라가 왕위에 오르기를 원하지 않았고 마드리드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1808년 5월 2일에 진압[21]되었지만, 뮈라의 스페인 왕위 찬탈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안 나폴레옹은[22] 왕이 되고 싶어하는 뮈라를 위해 원래 나폴리의 왕이던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전봉 조치한 뒤 뮈라를 나폴리의 국왕에 앉혀주었다.

나폴리 왕국의 왕에 임명된 뮈라는 1812년에 자유주의적 헌법을 채택했다. 이탈리아의 통일을 꿈꾼 뮈라는 나폴리를 발판으로 통일 이탈리아의 왕이 되고 싶어했다. 뮈라는 리소르지멘토를 뒤에서 지원하여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도록 획책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음모는 오히려 역풍을 맞아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자신만의 나폴리 왕국 국기로 국기를 변경하였으며(=파일:나폴리 왕국 국기(1811-1816).svg.png ) 나폴리를 프랑스의 속국이 아닌 독립적인 왕국으로서 지배해 나갔다. 특히 국왕으로서 정치 자체를 프랑스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아닌 나폴리 현지인들 위주로 했으며 자신의 휘하의 주요 관리들을 모두 나폴리 사람들로 임명했다. 이 때문에 뮈라는 프랑스와 사실상 결별 상태가 된 반면 나폴리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행동은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이념을 퍼트려 이탈리아에 반프랑스 정서를 불러들인다.[23]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다시 기병대장으로 참전, 보로디노 전투에서 또다시 기병돌격을 통해 러시아 제국군의 방위선을 박살내는 등의 대활약을 펼쳤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그의 활약을 발판으로 삼아 마침내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모스크바의 화재,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 그리고 동장군과 카자크의 기습, 러시아 제국군의 반격으로 나폴레옹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파리에서 쿠데타 모의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국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 나폴레옹은 원정군의 지휘를 뮈라에게 맡겼다. 나폴레옹이 뮈라에게 맡겼던 것은, 첫째로 그는 나폴레옹의 인척이었으니 믿을 만 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그는 나폴리의 왕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뮈라는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못했다. 그는 사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군사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그저 나폴레옹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용맹한 기병대장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그에게 총사령관의 직함은 도무지 맞지 않았다. 뮈라는 철수하는 원정군을 맡아서 일을 그르쳤다. 나폴리 왕국의 왕위가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수많은 병력을 고스란히 러시아에 내버려둔 채 서둘러 나폴리로 귀국해 버렸던 것이다. 프랑스군 붕괴에 큰 영향을 주어 결국 원정군은 추위와 러시아군의 추격 등으로 무너졌다.[24][25]

2.3. 배신과 말년

러시아 원정의 재앙 이후 1813년부터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군이 프랑스를 압박하자 나폴레옹은 뮈라에게 원군을 요청하지만, 뮈라는 나폴리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어느 쪽에 붙어야 할 지 열심히 저울질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나폴레옹을 배반하는 쪽을 택했다. 이러한 의견에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그의 아내인 카롤린마저 거들었다.[26] 결국 뮈라는 대프랑스 동맹과 협상하며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기에만 급급했고,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라이프치히 전투 참전을 막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성의없이 전투에 임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원래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였던 스웨덴 국왕 칼 14세 요한[27]이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나폴레옹의 약점을 이용하여 나폴레옹을 궤멸시키는 작전을 짜서 실행에 옮기게 하여 이 작전이 성공했다.[28] 결국 이렇게 대패한 나폴레옹은 사실상 몰락했다. 특히 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폴란드의 왕족[29]으로서 대우받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엘스터 강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치명타를 입은 나폴레옹이 황제에서 퇴위, 엘바 섬으로 유배되자, 뮈라는 빈 회의에 사절을 파견하고, 밀실외교를 펼치며 자기 왕위 유지에 몰두했다.

그러나 유럽 연합국들은 나폴레옹보다 배신자인 뮈라를 더 싫어하였고 단순무식하고 기병대 지휘밖에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뮈라는 냉대를 당했다. 게다가 나폴리 왕국의 원주인으로 시칠리아 왕국으로 밀려나있던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전 국왕 페르디난도 4세는 뮈라를 축출했다. 그제서야 뮈라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고 자신을 알아주는 건 옛 전우이자 주군이었던 나폴레옹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의 황제에 오르자 태도가 돌변, 이번에는 절대로 다시는 나폴레옹 황제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각오하며 진심으로 나폴레옹 편으로 완전히 돌아섰으며, 나폴리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며 나폴레옹에게 직접 달려가서 합류하기를 청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신을 배신한 뮈라를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었기에 그의 작위를 모두 박탈하고 합류를 거부했다.[30] 뮈라는 할 수 없이 코르시카에 피신하여 거기서 숨어지냈다. 이후 나폴레옹에게 속죄하기 위해 톨렌티노 전투에 출진했는데 잘 다루지도 못하는 포병을 지휘하다 전투에서 참패하고 코르시카로 달아난 뮈라는 다시 나폴리의 왕이 되기 위해 칼라브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결국 오스트리아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총살형이 집행되던 날, 장교가 뮈라에게 눈가리개와 의자를 권했다. 하지만 뮈라는 이를 거절했다.
"나는 죽을 위험은 지겹게 겪어서 죽음은 전혀 겁나지 않는다네."

그는 당당히 서서 아내의 모습이 새겨진 보석 장식에 키스한 뒤에 병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병사들이여! 네 의무를 다해라. (내 잘생긴) 얼굴을 쏘지 말고 심장을 쏴라. 발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eath_of_Murat.jpg
이 기세에 눌려 집행을 제병 지휘할 장교는 끝까지 말 한마디 못했고, 사수들은 사형 집행 대상자의 지휘하에 사격했다. 그야말로 끝까지 폼나게 죽었다.

미셸 네 원수가 워털루 전투 때 기병대를 보병 방진에 어택땅찍고 처박았다가 다 날려먹고 최후의 도박이 망해버린 걸 생각하면 뮈라는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사실상 필수적인 존재였다. 전쟁에서 머스킷이 일반화된 이후로 기병만 가지고 이런 활약을 보여준 지휘관 자체가 극히 드물고, 그 중에서도 뮈라는 제대로 된 기병을 지휘한 전투에서 무패를 기록했을 정도로 전설적인 활약을 보여준 적국의 공포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기회주의적인 배신으로 나폴레옹의 멸망에 일조했던 것이었다. 뮈라는 결국 개심하나 그 당시엔 이미 너무 늦어도 늦은 상황이었으며 결국 마지막엔 나폴레옹의 불신 속에서도 나폴레옹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인물.[31]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 전에 뮈라를 다시 받아들였다면 판도가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있다.

뮈라의 시신은 쓰레기를 버리는 구덩이에 각종 쓰레기와 같이 아무렇게나 버려졌는데 평소에 뮈라를 존경하던 나폴리의 한 시민이 죽음을 무릅쓰고 뮈라가 총살당한 날 밤에 아무도 몰래 뮈라의 시신을 쓰레기 더미에서 꺼내 깨끗이 씻은 후 프랑스로 가져가서 프랑스 최고의 묘지라는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한 후 융숭하게 장례식을 치뤄줬다. 페르 라세즈(Père Lachaise) 묘지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살아생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뮈라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카롤린 보나파르트 또한 남편의 총살과 오빠의 몰락으로 나폴리의 왕비 자리에서 폐위되어 망명길에 올랐다가 오스트리아군에 포로로 붙잡혔고, 포로에서 풀려난 뒤에도 권력에 눈이 멀어 주제파악도 못하고 남편인 뮈라를 꼬드겨 오빠인 나폴레옹을 배신했다가 남편을 총살당하게 만든 배은망덕의 견본이 되어 무수한 문전박대를 당하며 고생했다.[32]

3. 이야깃거리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서 가장 화려하게 옷을 입는 군인은 나폴레옹이 아니라[33] 뮈라였다. ??? 보병 포병의 화력에 쉽게 노출되는 그의 화려한 복장은 오히려 그 용맹으로 인하여 적대국의 군대가 바라본 관점에서는 악몽 그 자체였다.[34] 이처럼 오직 화려함과 용맹만으로 저돌적이고 무식하게 밀어붙인 뮈라는 본의 아니게 심리전에서도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매우 화려한 군복을 갖추고 앞장서서 군도를 휘두르며 돌격하는 스타일 덕택에, 그는 뒷시대 화가들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같은 원수였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와는 상남자스런 성격, 뛰어난 싸움실력도 그렇고 코드가 맞는 부분이 꽤 많아서 친했다. 애초에 포니아토프스키를 스카웃한 사람도 바로 뮈라였다.

뮈라의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명목상 귀족의 신분으로 살고 있다. 현재 뮈라 대공은 뮈라의 7대손인 8대 뮈라 대공(1944~)[35]으로, 그 조상과 이름이 같다. 전에 언급된 퐁트 코르보 공작위[36]는 후계자의 작위 이름으로, 현 퐁트 코르보 공작(1973~)은 2021년 48살 나이에 3대 독자인 아들을 낳았다. 한편 조아킴 뮈라의 아들의 외삼촌이 나폴레옹이다. 이 사람은 그 후손으로 나폴레옹과 조아킴 뮈라 양쪽 다 이 사람의 조상이 되므로, 본인과 아들, 손자의 미들네임에도 나폴레옹의 이름을 붙였다.

뮈라의 아내 카롤린이 당시 파리 치안사령관이던 앙도슈 쥐노와 애인관계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뮈라는 쥐노에게 결투 신청까지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중재로 쥐노가 결국 반도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파리에서 밀려났다.

소설가 '엑토르 말로'의 대표작《 집 없는 소년》에서 뮈라의 이름이 언급된 적이 있다. 작품 초중반에 공연하며 떠돌아다니던 비탈리스와 레미가 한 마을에서 잠시 쉬어갈 무렵, 비탈리스가 "여기가 나폴리의 왕이 된 뮈라 장군의 고향이다."란 말을 시작으로, 레미에게 뮈라의 생애를 간단히 얘기해 준다. 이에 레미가 "그럼 할아버지는 여기서 그를 만나셨던 거예요?"하고 묻자, 비탈리스는 "아니, 나폴리의 왕궁에서였단다."라고 답한다.[37]


[1] 발음 기호로 옮기면 [ʒoaʃɛ̃ myʁa\]( 참고). 다만 Joachim이라는 프랑스어 인명은 그 발음이 다양하다( 참고). [2] 당시 시대상 어마어마한 장신이었다. 당시 프랑스 남성 평균 키가 164cm였기 때문에 저 당시에 183cm였으면 현대의 198cm 가량이나 다름없다. 현대 프랑스 남성의 평균 키는 170cm후반. [3] 당시 명칭 라바스티드포르튀니에르. [A] 정식 호칭은 베르크와 클레브의 제1대 대공, 조아킴 뮈라(Joachim Murat, 1st Grand-duc de Berg et de Clèves) [5] 지금도 그렇지만 포병장교에게는 요구되는 능력들이 많기에 장교 자원 중에서도 엘리트들만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병과가 포병이다. 하물며 시골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못했던 뮈라가 포병을 이끌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6] 원래 다른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부를 때 vous, 즉 존칭을 써야 하지만 뮈라는 나폴레옹을 tu라고 부를 수 있었다. 즉 다른 사람들이 나폴레옹을 폐하라고 부를 때 뮈라는 너라고 불렀다는 것. 다만, vous는 본래 황제에게만 쓰이는 존칭이 아니라 프랑스어에서 윗사람을 부를 때 널리 쓰이는 존칭이다. 이 점을 폐하 대신 너라고 불렀다기보다는 존댓말을 쓰지 않고 격의 없이 반말을 썼다는 정도가 더 적절한 비유일 듯. [7] 그러나 후술 하겠지만 란과는 앙숙이었다. [8] 정식 명칭은 1st Grand-duc de Berg et de Clèves. [9] 오크어로는 라바스티다푸르튀니에로(La Bastida Fortunièra). 1852년 나폴레옹 3세의 명으로 라바스티드뮈라(Labastide-Murat)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0] 힘은 엄청 장사였던 그는 나폴레옹이 대포가 필요하다고 하자 혼자 대포를 짊어지고 옥상에 뛰어 올라갔다! 천하장사 만만세 [11] 나폴레옹도 '이 전투는 뮈라가 다 했다'며 그의 전공을 인정했다. [12] 하지만 사실 마렝고 전투의 일등 공신은 드제였다. 불행히도 드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13] 특히 뮈라는 말 관리에 아주 무지했는데, 우수한 군마를 양성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말을 소모품 취급한 뮈라는 비판받을 만 하다. [14] 그냥 우아한 정도가 아니라 프랑스 사람이 아닌 튀르크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다란 모자 장식이 달린 눈에 띄는 모자와 다양한 장식이 달린 군복을 자체 제작해서 입고 다녔다. 뮈라는 돌격 선두에 섰고 이때 기병도가 아닌 담뱃대(...)를 들고 돌격하기도 했다. 정말 총에 맞고 전사하지 않은 게 용할 정도. 비슷한 멋쟁이인 프랑스의 후사르 지휘관 앙투안 드 라살 장군 역시 화려한 옷을 입고 전쟁에 나섰는데 화려한 옷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결국 라살 장군은 총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15] 물론 이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프랑스 기병대의 경우 기마 포병대를 다량 운용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병포도 지휘하여 돌격 전 보병, 포병 공격에 운용했기에 전략과 전술에 대한 부분도 보병, 포병 지휘관 못지 않게 박식해야 했다. 대표적으로 베시에르 원수나 낭수티 장군 등은 기병 출신이지만 지성도 겸비했다고 평가받는다. 즉 모든 기병대장이 일자무식에 돌격대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말. [16]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남성 이름 [17] 말이 쉽지,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 기술이다! 80개 제대의 진로를 겹치는 부분 없이 설정하고, 막힘없이 전진하며, 그러는 와중에도 그 진로를 안개와 바람의 영향 지대에 전부 위치시키는 건 천재적인 직감력과 기병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하다못해 스타크래프트에서 80개 부대를 지정해 움직인다 생각해봐라. 무전기도 없이 실제 병사들로 했다!. [18]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활약한 루이니콜라 다부의 제 3군단 [19] 하지만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은 제2차 빈 공방전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윙드 후사르 돌격이라는 주장도 있다. [20] 폴란드인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는 연설을 하였는데 나폴레옹한테 "그런 말을 왜 하냐"라고 혼나기만 했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이미 임자가 있었다. [21] 여담으로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저 유명한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이 바로 이 사건을 다룬 회화이다. [22] 뮈라는 그 자신이 싸움은 잘했으나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부분은 약했다. 그런데 왕이 되고 싶어하는 뮈라를 위해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으로 옮기고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봉했는데 뮈라가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폴레옹은 위기의 순간마다 뮈라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뮈라가 누구인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나폴리의 왕으로 봉했다. [23] 그 영향으로 나중에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물론 뮈라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24] 60만의 원정군 중 9만 3천명 만이 겨우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25] 이 시기 뮈라는 다부에게 "우리가 섬기고 있던 건 한낱 괴물일 뿐이었다." 라며 나폴레옹을 비난하는 말을 했다. 이에 다부는 "당신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괴물 덕택이 아니냐." 라고 지적했다. [26] 결국 카롤린은 뮈라가 망한 뒤 오스트리아군의 포로로 잡혀 근처의 어느 성에 이송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왕비까지 되었던 시절을 잊지 못해 아이들에게는 죽을 때 자신이 한때 왕비였다는 말을 남겼다고) 빈에 있는 동안 적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1824년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았고 한동안 트리에스테 지역에 거주했다. 그후 카롤린은 1830년 경 나폴리의 전쟁장관 프란체스코 맥도널드와 재혼해 피렌체에서 여생을 마쳤다. [27] 칼 14세 요한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이면서도 나폴레옹의 약혼녀였던 데지레 클라리와 결혼했다. [28] 이러한 사건으로 칼 14세는 프랑스에서 주어진 모든 작위, 프랑스 육군 원수 계급과 퐁트 코르보 공의 작위를 몰수당하여 프랑스에서의 칼 14세는 아주 별볼일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본인은 어차피 스웨덴의 왕이 된지라 크게 상관 안했겠지만 말이다.[38] 나폴레옹은 그래도 칼 14세에게서 몰수한 퐁트 코르보 공이라는 작위를 뮈라가 아닌 뮈라의 아들에게 준다. 그래서 현재도 프랑스의 퐁트 코르보 공은 뮈라의 후손이 차지하고 있다. [29] 바르샤바 대공은 작센 국왕이 겸임했다. 베틴 가문이 한때나마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을 겸했으니 전 왕족으로서 존중을 받았으나 엄연히 작센 왕국의 중요성보단 떨어졌다. [30] 일설에는, 나폴레옹이 루이 18세에게 "뮈라는 당신이 죽여도 무방하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워털루 전투에서의 미셸 네 에마뉘엘 그루시의 삽질을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뮈라와 같은 인재를 거부한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뮈라가 저지른 삽질이 워낙 커서 나폴레옹으로서도 증오도 증오지만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었을 수 있고 믿을 수 없는 상대는 중요한 자리에 맡기지 않는게 당연할 일이다. [31]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고 "꼴 좋군."이라고 평했다. [32] 그런 주제에 죽을 때까지 아이들에게 자신은 왕비로서 유럽을 호령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프랑스 내에서 귀족 취급도 못 받는 코르시카 출신 하급 귀족 가문의 딸인 자신이 누구 덕분에 나폴리의 왕비 자리에까지 올랐는지 까먹고, 상황 파악도 못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친오빠까지 배신하여 왕비 자리와 남편의 목숨까지 날려먹은 걸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망언. 심지어 저런 말이 무색하게 카롤린은 말년에 재혼했다. [33] 나폴레옹은 애초에 치장에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항상 비슷한 옷을 입었다. [34] 러시아군의 카자크들은 오히려 적이었던 뮈라를 높게 평가했다. 기마민족인 그들이 보기엔 말 잘 타고 용맹하게 잘 싸우고 키 큰 뮈라의 모습이 '롤 모델' 그 자체였다. [35] 아버지 7대 대공이 레지스탕스 활동 중 전사하고 유복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뮈라 대공이었다. [36]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 칼 14세에게 엿먹은 것으로 인해 칼 14세로부터 몰수한 작위. [37] 해당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이 장면은 비탈리스의 정체 및 과거에 대한 복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