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역임 직책 및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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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주요 수상과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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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공로 훈장 대공로십자성현장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2등급 그랜드 우피시아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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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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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헤르베르트 카라얀[4] Herbert Karaj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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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4월 5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잘츠부르크 공국 잘츠부르크 | |||
사망 | 1989년 7월 16일 (향년 81세) | ||
오스트리아 아니프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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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지휘자 | ||
활동 | 1929년 ~ 1989년 | ||
링크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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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묘소 | 아니프 묘지 | |
신체 | 173cm | ||
학력 |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 (피아노 / 지휘, 1916~26) | ||
수상 /영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1960)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오페라 녹음상 (1964, 69) 잘츠부르크 명예시민 (1968) 베를린 명예시민 (1973) 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1977)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박사 (1978) 빈 명예시민 (1978)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클래식 오케스트라 연주상 (1978) 그라모폰상 (1981) Médaille de Vermeil (1982)[5] 유네스코 국제음악상 (1983) RPS 금메달 (1984)[6] 에두아르드 라인 명예의 반지 (1984) 올림피아상 (19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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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엘미 호르가레프[8] (1938년 ~ 1942년, 이혼) 아니타 귀터만 (1942년 ~ 1958년, 이혼) 엘리에트 무레 (1958년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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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이사벨 카라얀 (1960년생) 아라벨 폰 카라얀 (1964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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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 주로 도이치 그라모폰 | ||
종교 | 가톨릭[9]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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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
3. 평가4. 카라얀과 일본5. 나치이력 논란6. 디스코그래피7. 카라얀의 키8. 여담9. 관련 문서2.1.1. 집안2.1.2. 유년 시절2.1.3. 대학 시절 (1926~1929)2.1.4. 울름 오페라극장 (1929~1934)2.1.5. 아헨 오페라극장 (1934~1942)2.1.6. 베를린 국립 가극장과 제2차 세계대전 (1938~1945)
2.2. 전후 재기 (1945년 ~ 1954년)2.3.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와의 관계2.4. 베를린 필과 빈 국립 가극장의 대권을 잡다 (50년대 중후반)2.5. 60년대2.6. 70년대2.7. 80년대 - 베를린 필과의 불화, 그리고 죽음[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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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파르지팔 1막 전주곡 1980년 4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브루크너 교향곡 7번 1989년 4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2] |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20세기 음악사를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들 가운데 한 명이며 세계 최고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클래식 음악의 전설이다. 그의 압도적인 위상과 유명세를 잘 요약하는 별명이 바로 20세기 클래식의 황제다.[13]
비단 그의 음악성 자체뿐만 아니라 음악적 행보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를 받는다. 카라얀은 음악과 디지털 기술의 접목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 카라얀을 기점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영상물과 음반이 폭증했다. 또한 후술할 자비네 마이어 사건을 통해, 클래식 음악계에서의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카라얀은 클래식의 대중화에도 힘써서, 이전까지 일부 상류층이나 고급 취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던 클래식은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대중의 음악으로 성큼 다가섰다.
‘ 뉴욕 타임스’는 20세기 가장 강력한 음악인으로 카라얀을 꼽았다.[14] 클래식 음반 판매량은 작곡가 별로 집계가 되지 않지만 지휘자, 연주자 별로 집계한 것을 보면 카라얀이 2억장 정도로 공식적으로 집계된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을 판매한 인물이기도 하다.[15][16]
2. 생애
2.1. 젊은 시절
2.1.1. 집안
1908년 4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카라얀의 가문은 본디 그리스 출신으로 1767년 카라얀의 고조부인 요르요스 카라얀니스(Γεώργιος Ιωάννης Καραγιάννης)가 고향인 그리스 코자니(Κοζάνη)를 떠나[17]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빈으로 이주해 최종적으로 작센 선제후국의 켐니츠에 정착했다. 작센에 정착한 카라얀니스와 그의 형제들은 이후 상업, 의료 계통에 종사하면서 1792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로부터 귀족 작위까지 받으면서 성 앞에 귀족을 상징하는 von(폰)을 붙였다. 카라얀의 아버지 에른스트 폰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의 의사였다. 카라얀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수준급의 아마추어 클라리넷 연주가였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카라얀의 본명은 헤리베르트 리터 폰 카라얀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하면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귀족의 특권도 폐지되며 귀족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카라얀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는 호적(?)에서 사라졌으며, 작위인 Ritter (기사) 역시 사라져 퍼스트 네임도 Herbert로 바뀌었다. 1984년 10월 내한했던 카라얀의 여권에는 Herbert Karajan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카라얀이 성 앞에 von을 계속 사용한 것은 예술가로서 일종의 예명으로 사용된 것이다.[18]2.1.2. 유년 시절
그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형 볼프강 폰 카라얀과의 경쟁심 때문이라고 한다. 카라얀은 몸집이 작아 덩치가 큰 형에게 항상 열등감을 가졌으며, 피아노를 시작한 것도 그런 경쟁심에 의해서라고.(또한 카라얀의 내성적인 성격도 한몫하였다.) 카라얀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했지만 건초염으로 추정되는 손가락 기능 이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2.1.3. 대학 시절 (1926~1929)
결국 카라얀은 1926년 빈 공대(Technical University of Vienna)에 진학하였다.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카라얀은 공대에 다니면서 효율을 높인 엔진을 개발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고, 후에도 새로운 형태의 관개 시설 개발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공대를 그만두고 빈 음대(University of Music and Performing Arts, Vienna)에 들어가게 된다. 건초염 등으로 인해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울러 잘츠부르크에서의 은사인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조언 등을 받아들여 지휘자의 길을 택한다.1929년 빈 음대를 졸업한 직후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이때 지휘한 작품은 무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후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 등이었다. 이때 청중 가운데 있었던 울름 오페라극장의 극장장의 초빙을 받아 독일 울름 가극장의 지휘자가 된다.
2.1.4. 울름 오페라극장 (1929~1934)
당시 울름 오페라극장의 상황은 매우 열악해 단원이 약 20명 정도, 합창단은 16명에 불과했다. 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기 직전에 극장장의 초대로 울름 오페라극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로엔그린 공연을 본 카라얀은 신세계를 경험하면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고 한다. 악보상으로 아홉 대의 트럼펫이 찬란한 팡파레를 터트리는 장면[19]에서 단지 한 대의 트럼펫만 용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 빈 국립 오페라를 견학하면서 공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20대 전반을 울름에서 보내면서 나름 성실하게 임했다. 없는 악기는 카라얀 자신이 피아노를 치며 메워 나가야 했고, 때로 큰 악기들을 수레에 실어 나를 때 직접 도와야 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직접 연주를 맡는 지휘자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으나, 연주자 뿐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시점에서 음악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며, 음악을 막상 연주해보려고 할 때 느끼는 그 압박감을 느끼고 이겨내 흡수한 후에야 음악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 또한 이 조그마한 오케스트라로 살로메같은 큰 곡들을 연주했는데, 때문에 초기에는 보다 귀 깊숙이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I learned to hear in my inner ear a sound that was acceptable."), 자그마한 디테일들을 살리려는 노력은 리허설로 끝내고, 본 무대에서는 마음 속으로 들었다("I hear inside myself")고 말했다.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배상금을 갚느라 경제학원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최악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던 상황[20]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취업을 했다는 것 자체가 다행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카라얀이 울름 오페라극장에 취임했던 1929년은 세계 대공황이 발생한 해로, 간신히 회복세로 접어들던 독일 경제가 미국발 세계 경제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다시 나락으로 추락하던 상황이었다. 세계 경제 대공황 당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같은 메이저 악단조차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21]
20대 초반의 젊은 지휘자였던 카라얀은 처음에 울름 가극장의 부지휘자(assistant Kapellmeister)였다. 그러다가 1933년 1월 나치가 집권한 직후에 울름 극장의 카펠마이스터였던 오토 슐만(Otto Schulmann)이 쫓겨나게 되었고, 카라얀이 그 자리로 승진하게 되었다. 슐만이 추방되는 것을 지켜본 카라얀은 나치의 권력을 실감하게 되었고, 얼마 후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카라얀은 1933년 4월 8일에 처음으로 나치에 입당을 신청하였다.
2.1.5. 아헨 오페라극장 (1934~1942)
1934년 아헨 독일가극장과 아헨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된다.[22] 독일 최연소 음악감독이라고 한다. 당시 상당수의 지휘자들이 나치 집권을 피해서 또는 경제난을 겪고 있던 독일을 떠난 덕을 좀 봤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을 떠난 많은 지휘자들 중에 발터나 클렘페러처럼 유태인의 혈통을 갖고 있어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난 이들도 있었고,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나치에 반대해 독일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배경과 관계없이 20~30년대 최악의 경제 상황에 있던 독일을 떠나 경제적으로 훨씬 나은 처우를 받았던 미국 등지로 떠난 이 역시 적지 않았다.소도시 울름과 달리 큰 도시였던 아헨은 오페라 극장 또한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카라얀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카라얀은 훗날 아헨에서의 시절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나중에 부인이 되는 엘미 호르가레프와 친한 친구들과 이웃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았고, 70명이 넘는 규모의 오케스트라와 대편성 합창단도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카라얀의 이름도 빠르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헨 오페라 극장에 부임한 직후인 1934년 여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빈 필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1937년에는 최고의 오페라 극장인 빈 국립 가극장에서 지휘하였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에 초빙되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성공을 거두었다.
아헨 시절부터는 독일에 꽤 이름을 날리는 지휘자가 되었다. 사실 아헨의 음악 감독이 될 때도 울름에서의 오케스트라 조련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고 이 덕분에 다른 도시에서도 카라얀을 데려가려고 하기도 했었다. 이런 유명세는 훌륭한 기량을 가진 성악가들을 발탁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는데 30~40년대 최고의 리릭 소프라노로 손꼽히는 엘리자베스 그뤼머, 이름가르트 제프리트 같은 성악가들이 카라얀이 발탁한 대표적인 예시이다.
2.1.6. 베를린 국립 가극장과 제2차 세계대전 (1938~1945)
1938년 드디어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국립가극장과 베를린 필에 각각 데뷔했다. 특히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데뷔하면서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신문에서 지칭한 '분더 카라얀' 즉 '기적의 카라얀'은 이후 카라얀을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되었다. 이 기사는 노장 지휘자들도 카라얀에게 배워야 한다라고 오버했는데, 이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을 분노케 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정식 음악감독이 되었다. 1938년 4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도 데뷔하였다. 메이저 무대에서는 신인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이미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된 만큼, 베를린 필의 첫 초청에 대해서도 충분한 리허설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기까지 했다.[23] 결국 그래도 몇 달 후 베를린 필에 데뷔하게 되었는데,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한 순간 베를린 필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악단임을 느꼈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 해 7월에 그는 아헨에서 알게된 11살 연상의 오페레타 가수 엘미 호르가레프[24]와 첫 번째로 결혼한다.그러나 1939년에는 그의 커리어에서 상당히 독특한 사건이 일어난다. 1939년, 카라얀은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25]에서 유고슬라비아 국왕 초청 갈라 콘서트를 지휘하고 있었다. 당연히 카라얀은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공연 중 바리톤 루돌프 보켈만이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부르던 도중 실수를 해 결국 연주를 중단해야 했다. 그런데 극장에 관객으로 와있던 히틀러가 분노해서 옆에 앉아있던 위니프레트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의 며느리)에게 카라얀이 앞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할 수 없게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나중에 카라얀의 탈나치화 재판에서 증거자료로 제출되기도 했다. 괴벨스 등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푸르트벵글러를 항상 높이 평가한 반면에 카라얀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히틀러나 괴벨스는 카라얀에 대해 '아무래도 푸르트벵글러보단 급이 아래'라는 평을 내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스승이었던 파움가르트너가 나치의 박해를 받아서 제자인 카라얀도 나치에 좋은 인상은 아니게 되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카라얀을 신진 지휘자의 대표격으로 선전했다. 이미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베를린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괴벨스의 지지를 받은 반면, 카라얀은 상대적으로 괴링의 지지를 받았다.[26]
1942년 재력자 집안 출신의 이혼녀 아니타 귀터만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당 내부에서 활동에 일부 제약을 받기도 했다. 아내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카라얀을 격찬하는 선전을 하기도 했던 괴벨스는 카라얀이 결혼할 당시 혈통조사를 방해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 아내의 혈통이 묘하게도 그에 대한 나쁜 여론을 어느 정도 환기시켜주는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다.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서 그동안 전쟁에 징집되지 않았던 카라얀이었지만, 전쟁 말기에 징집 대상이 확대되자, 그동안 징집 면제를 받아왔던 카라얀도 군입대에 대한 여론의 압박을 받았다. 카라얀은 기왕 입대할 거라면 공군으로 가서 파일럿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괴링과의 연줄을 이용하여 공군에 들어갈 생각도 했다.[27]
그러나 결국 전쟁 말기에 푸르트벵글러 등과 마찬가지로 제3제국을 탈출하고 말았는데, 밀라노에서의 콘서트를 핑계로 아내와 베를린을 떠난 후 종전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고 밀라노와 인근 북부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밀라노에서는 전재산을 잃어버리면서 알거지가 되었는데, 카라얀 부부가 투숙했던 호텔에 독일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민병대가 호텔을 털어버렸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했지만, 길거리를 배회하던 중 다행히 한 이탈리아 음악 애호가의 호의로 그의 집에 머물게 되어 숙소를 해결할 수 있었다. 카라얀의 아내는 영어 통역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카라얀 자신은 악보 공부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 지휘 자리를 알아봤는데 여의치 않아서 밤무대 같은 곳에서라도 지휘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이 시절 카라얀은 매우 열심히 공부했는데, 매일 자신이 목표로 한 양의 공부를 다 하지 못하면 스스로 끼니를 거름으로써 스스로를 벌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꽤나 능숙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종전 후 간신히 지인들과 연락이 닿은 카라얀은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향했는데,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이 여정 역시 쉬운 일이 아니어서, 기차 안에서 통역 알바를 하면서 여비를 벌기도 했고, 중간 경유지의 삼류 극장에서 지휘를 해서 여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2.2. 전후 재기 (1945년 ~ 1954년)
2.2.1. 활동금지
종전 후 독일 내에 머물렀던 다른 거물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약 2년간 연주활동이 제한되었다. 활동 금지 기간 동안 푸르트벵글러 등 다른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카라얀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카라얀은 2차 세계대전말 밀라노에 피신해 있다가 전재산을 털리고 잘츠부르크에 있는 부모님에게 얹혀 살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 카라얀에게 구세주로 나타난 이가 바로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카라얀의 재능에 주목해 왔던 레그는 미래에 녹음할 연주들에 대해 미리 선지불하는 형식으로 카라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1946년 1월부터 카라얀과 레그는 이미 빈 필과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비록 카라얀이 연주활동을 금지당한 상황이었지만 레그는 녹음은 공식적인 음악회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제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연합국의 제재를 피해갈 수 있었다.1948년 카라얀은 연합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무혐의를 인정받아 지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컴백한 후 여러 곳에서 활동했지만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극장,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다.
1949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사망하자 그가 묵던 숙소에 찾아가고 단원들과 그가 생전 거닐던 산책길을 걸으면서 추모했다.
2.2.2. 푸르트벵글러의 견제
카라얀이 활동을 재개하자 푸르트벵글러의 견제도 다시 시작되었다.[28] 베를린 필에서는 물론이고 빈 필과 국립 오페라극장에서도 푸르트벵글러는 자신과 카라얀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엄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나치로부터 빈 필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던 바 있었기 때문에 빈 필은 푸르트벵글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지인들에게 불평하지 않고 언젠가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자리라고 말하며 크게 연연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을 모두 보유하고 있던 EMI의 월터 레그는 두 지휘자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과 절친했던 레그마저 점차 꺼렸다.[29] 결국 푸르트벵글러의 녹음 프로듀서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30] 푸르트벵글러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자신은 빈 필과 오페라를 녹음할 때 실황으로 하는데 카라얀은 전부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던 것.
2.2.3.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0년대 카라얀의 음반 녹음은 주로 EMI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음반 산업의 미래를 내다본 월터 레그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이 직접 영국 내의 우수한 연주자들을 접촉, 모집하여 1946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카라얀은 1948년 이 악단과 첫 녹음을 시작했는데, 푸르트벵글러의 견제로 빈 필을 지휘하기 힘들게 되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밀접한 관계[31]를 맺게 되었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까지 카라얀의 사실상 모든 녹음이 이 악단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카라얀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사실상 이끈 지휘자였지만 상임지휘자 등의 정식 직책은 갖지 않았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이기도 해서 1959년까지 상임지휘자가 없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로 창단되어 처음에는 스튜디오에서 녹음만 했고, 대중들 앞에서 연주하는 일은 없었지만, 카라얀과 레그는 악단의 성장을 위해서는 공개 콘서트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아 공개 음악회도 열기 시작했다. 이어 1952년에는 유럽 순회 공연까지 가졌다. 이 때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직접 관람했던 토스카니니는 큰 감명을 받아 나중에 직접 런던을 방문하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을 남겼다. 토스카니니가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외의 악단과 남긴 유일한 정규 녹음이다. 이 유럽 순회 공연의 마지막 공연은 베를린에서 열렸는데, 이는 언젠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것이라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카라얀의 포석이었다. 이 순회 공연에 사비를 털어 지원했던 월터 레그도 카라얀의 이러한 바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연주회를 "카라얀을 베를린으로"라고 불렀다.[32] 실제로 이 공연은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종전 후 푸르트벵글러 때문에 베를린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 공연을 통해 카라얀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또 카라얀은 연주회 뒷풀이에 베를린 필 단원들을 초청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친목을 도모할 기회를 마련했는데, 이자리에서 베를린 필의 핵심 단원들과 친분을 쌓아두기도 했다. 이 공연 이후에 카라얀을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에 초청할 것을 요구하는 여론이 더욱 높아졌고 결국 베를린 필은 푸르트벵글러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1953년 11월 카라얀을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초빙했다.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지만 어느 선 이상 깊이 진전되지는 못했다. 카라얀의 목표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는 것임을 월터 레그도 잘 알고 있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1955년부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악대 복무 요원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나치 치하의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였던 카라얀과 단원들 간에는 심리적인 거리감이 있었던 듯하다. 1955년 말 미국 순회공연에서 카라얀과 단원들 간에 사고가 터졌다. 순회공연 중 어느날 카라얀은 모종의 이유로 기분이 상하여 연주회가 끝난 후 청중들의 커튼 콜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날 리허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 출신의 한 바이올린 단원이 일어서서 카라얀이 커튼 콜에 응하지 않은 것은 영국의 동맹국으로 2차 세계대전을 도와준 우방인 미국 시민들에 대한 결례라고 비난하면서 카라얀이 미국 청중들에게 공개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었다. 카라얀에게 항의한 단원은 이 순회공연을 위해 충원된 임시단원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갈등은 확대되지는 않았고 카라얀도 이 사건을 문제삼지는 않았다. 이 일과는 별개로 순회공연 당시 플룻 수석이었던 단원은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원'에서 카라얀의 지시를 무시하고 템포보다 약간 늘어지게 연주했는데 카라얀이 의외로 아무 말 않더라며 호기롭게 말하기도 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1955년부터는 오토 클렘페러가 이 악단을 지휘하는 빈도가 크게 늘었다.
어차피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카라얀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를 청산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견한 일이었다. 1960년 카라얀과 EMI와의 계약 연장이 불발되면서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관계는 완전히 끝을 맺는다. 카라얀은 훗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베를린 필과 달리 직업으로서 음악을 대했고 악보에 나타난 것 이상을 들려주지 못하는 악단이었기 때문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헤어지는 것이 슬픈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2.2.4.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용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실제 콘서트를 위한 카라얀의 악기는 주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담당했다. 카라얀은 1948년말부터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하였는데, 곧 푸르트벵글러에 의해 빈 필을 지휘할 수 없게 되자 빈에서의 활동은 빈 심포니로 집중되었다. 당시 푸르트벵글러의 빈 필과 카라얀의 빈 심포니의 경쟁은 빈 시민들을 즐겁게 했다. 1950년 카라얀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독일 투어를 떠나기도 했다. 이웃 독일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의 지원도 받은 투어였다. 그러나 음반 녹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1950년대 당시 빈 심포니의 기량은 썩 좋지 않았다. 당시 빈 심포니의 해외 공연 리뷰를 보아도 연주력에 대한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다. 어떤 비평가는 적잖은 청중들이 빈 필의 공연으로 잘못 알고 왔다가 실망하여 돌아갔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다수의 기사들도 카라얀의 지휘 솜씨가 매우 훌륭하며, 조건이 맞는다면 청중들도 빈 필과 빈 심포니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라고 평하기도 했다. 당시 빈 언론들도 매일 빈 최고의 두 오케스트라가 선보이는 대결로 빈 청중들이 즐거워하고 있다고 평했다. 카라얀은 1950년대 초중반 동안 빈 심포니의 사실상의 수장이었지만 정식 직책에 취임하지는 않았다.[33] 카라얀은 당시 빈 심포니 단원 선발에서도 결정권을 행사하는 등 상임지휘자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장차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되길 원했던 카라얀은 빈 청중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해 빈 심포니가 필요했다. 하지만 빈 심포니는 유럽에서 일류 오케스트라는 아니었기 때문에 카라얀이 정식으로 상임지휘자에 취임해 자신의 이력에 새기는 것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2.2.5.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1951년 전후 처음으로 재개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지휘자로 선임되었다. 크나퍼츠부쉬와 함께 페스티벌 공연을 절반씩 나누어 지휘했다. 바이로이트 측에서는 처음에 푸르트벵글러에게 접촉했다가 거절당했는데, 나중에 대신 카라얀이 선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푸르트벵글러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페스티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미 카라얀과 크나퍼츠부쉬를 섭외하여 스케줄을 정한 후였기 때문에 페스티벌 측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이자, 푸르트벵글러는 개막 콘서트라도 지휘하겠다고 해서 성사된 것이 그 유명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 공연이었다. 51년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이 동시에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자, 리허설 연습 시간 등을 두고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기싸움도 있었다. 카라얀은 바이로이트에서 51년에는 니벨룽겐의 반지[34]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52년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그러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는 52년을 끝으로 2시즌 만에 결별했다. 바이로이트 경영진과 의견 차이와 신바이로이트 연출에 대한 이견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카라얀은 빌란트 바그너가 연출한 텅 빈 무대를 보고는 도저히 악상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빌란트 바그너는 카라얀이 청중들에게 자신이 보일 수 있게 지휘 포디엄을 높여 달라고 하는 등 바이로이트에서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했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카라얀과 바이로이트의 이른 결별은 음악애호가 입장에선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담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유명한 합창 지휘자 빌헬름 피츠는 카라얀이 바이로이트에 추천한 사람이었다. 피츠와 카라얀은 아헨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2.2.6.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의 독일부문 음악감독이 되어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도 재개했다. 여기에는 사바타와의 친분이 작용하였다. 밀라노에서 첫 시즌에는 직함대로 독일 오페라로 레파토리가 제한되었지만 이듬해부터는 직함이 무색하게 독일, 이탈리아 오페라를 가리지 않고 지휘하게 되었다. 이 시절 카라얀은 마리아 칼라스를 비롯하여 여러 정상급 이탈리아 성악가들과 알게 되었고, 나중에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되었을 때, 밀라노의 이탈리아 가수들을 빈으로 초빙하여 빈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35]
2.3.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와의 관계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를 존경하고 그 둘의 음악을 융합하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라고 말해왔다. 카라얀은 그들의 음악을 매우 열심히 연구했던 것 같다. 카라얀의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카라얀은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된 이후에도 푸르트벵글러의 음악회에 항상 변장하고 찾아와서 들었다고 한다.카라얀이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트벌의 탄호이저 공연(토스카니니는 1931, 32년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지휘했다.)을 보기 위해 자전거로 수백킬로를 달려 바이로이트까지 갔다고 한다. 카라얀이 만년의 인터뷰에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젊은 시절 고향 잘츠부르크의 공연장에서 피아노를 치려고 들어갔는데 그 방에 우연히 토스카니니가 들어왔다고 한다. 리허설이 뜻대로 안 돼서 화가 나있던 토스카니니는 그 방에 카라얀이 있는지 모른 채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했다고 한다.[36] 토스카니니가 공연하러 왔다는 소문을 접한 젊은 카라얀이 그의 연습 장면을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공연장에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월터 레그에 따르면 1952년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에로이카를 녹음했을 때 카라얀은 대기실에서도 계속 토스카니니의 녹음을 듣다가 지휘대에 올랐다고 한다. 이 녹음 직후에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유럽 투어를 떠났는데, 밀라노 공연에서 카라얀의 에로이카를 들은 토스카니니는 크게 감명을 받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 계약까지 맺었다. 토스카니니가 만년에 NBC 오케스트라 이외의 악단과 남긴 유일한 녹음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에 대한 음악적인 흠모에도 불구하고 토스카니니와 인간적인 접촉을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토스카니니 뿐만 아니라 다른 선배 거장들과 굳이 일부러 인연을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단 한번 토스카니니가 신예 카라얀에게 조언을 해준적이 있는데 "크레센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피아노부터 포르테까지 단 한 번에 밀어붙어야한다"는 조언으로 카라얀은 이 원 포인트 레슨이 지휘실력을 쌓는 데 매우 주요했다고 회고했다.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과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편이다. 푸르트벵글러가 극도로 카라얀을 혐오했기 때문에(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K라고 불렀다고 한다.[37] 카라얀은 종전 이후부터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필과 빈 필을 거의 지휘하지 못했다. 빈 필 단원의 증언에 의하면 푸르트벵글러는 빈 필 단원들에게 자신과 카라얀 중에 택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에게 일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푸르트벵글러가 모르게 변장을 하고 자주 푸르트벵글러의 공연에 참석해 음악을 듣고 갔던 그 일화. 놀랍게도 푸르트뱅글러가 카라얀을 인정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암보이다. 총보를 모두 외워서 눈을 감고 지휘하는것 하나는 인정을 했다고....
2.4. 베를린 필과 빈 국립 가극장의 대권을 잡다 (50년대 중후반)
1954년 11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사망 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대권을 잡았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카라얀이 상임지휘자가 된 것은 당시 카라얀이 대세였다 뭐 이런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사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고 복잡한 역학 관계가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언론과 음악계에서는 카라얀 뿐만 아니라 첼리비다케, 요훔, 뵘, 카일베르트 등 다양한 인물들이 비중있게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필 단원들도 여러 지휘자들에 대해 열띤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요훔은 자신이 차기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여 베를린에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고 한다.[38] 첼리비다케는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직전 즈음에 베를린 단원들과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 끝에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차기 후보에서 완전히 제외된 상태였다. 뵘은 당시 빈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를 겸직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 보였다. 카라얀의 경우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시절부터 푸르트벵글러 때문에 베를린 필을 거의 지휘하지 못했고, 푸르트벵글러가 죽기 몇 개월 전에서야 겨우 다시 베를린 필의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 만년에는 건강 문제로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하지 못했으며 베를린 필 단원들은 이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상임지휘자의 의무로서 좀 더 많은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지는 거의 강요 수준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953년에는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푸르트벵글러도 베를린 필에 한발 양보해서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지휘해도 자신이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카라얀과 베를린 필과의 유대관계는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서는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베를린 필 단원들은 많은 음반을 녹음하던 카라얀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이 멀어지게 된 배경에는 레코딩을 혐오하는 첼리비다케의 성향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데는 특히 1955년 베를린 필의 미국 순회 공연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0주년인 1955년 독일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것은 독일이나 미국 양측에 큰 이슈였다. 당시 아데나워 서독 수상도 이 순회공연에 각별하게 신경을 쓰고 있을 정도였다. 2차 대전에서의 적대관계 직후 찾아온 냉전 체제 하에 냉전의 최전선에 서며 전후 재건 과정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았던 서독은 이 순회공연이 미국 국민들의 대독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 순회 공연은 당연히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면서 순회 공연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공연이 추진되던 당시에도 푸르트벵글러의 건강에 대한 깊은 우려가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푸르트벵글러에게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대한 대비도 미리 논의되고 있었다.[39] 이 공연을 추진하던 기획사와의 계약에는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지 못한다면 기획사가 승인하는 다른 지휘자가 지휘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기획사가 대신 요구했던 유일한 지휘자는 카라얀이었다. 베를린 필 측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전에 유사시에 카라얀에게 미국순회 공연을 맡아달라고 언질을 하기도 했다. 미국 공연을 3개월 앞둔 상황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였고, 미국순회공연의 지휘자 자리는 그렇게 카라얀에게 돌아갔다. 카라얀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푸르트벵글러 사후 약 2주간의 논의 끝에 카라얀을 차기 상임지휘자로 내정했다.
그러나 카라얀과 베를린 필 간의 계약은 세부 조건의 합의에서 난항을 겪어 쉽게 체결되지 못했다. 1955년 2월말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미국 순회 공연을 떠날 당시에도 카라얀은 상임지휘자직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였고 베를린 필과 관련된 아무런 직함도 없었다. 그러나 카라얀은 일생일대의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카라얀은 베를린 시의회와 베를린 필 운영진을 조르고 구슬리고 협박한 끝에, 마침내 이 중요한 순회공연을 떠나기에 앞서 진행된 공식 인터뷰에서 "카라얀이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을 지휘한다"는 발언을 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카라얀은 대중에게 자신이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에 확정된 것과 같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여론은 카라얀의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취임을 기정사실처럼 여기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미국 순회공연 이후에도 카라얀과 베를린 필 측은 세부적인 사항에서 이견이 있어 계약에 싸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카라얀은 다른 권리를 약간 포기하고서라도 자신의 계약기간을 종신으로 확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종계약은 1956년 4월 25일에서야 이루어졌다.
평생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염원해왔던 카라얀은 자신에게 돌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했다. 카라얀은 훗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저질렀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베를린 필과 미국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카라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카라얀은 그토록 염원했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촌각을 다투면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중한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못했다.[40][41] 카라얀은 훗날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 종종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베를린 필과 계약서에 싸인을 하기도 전인 1956년 3월 카라얀은 고향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측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또 1956년에는 홧김에 사표를 낸 칼 뵘[42]의 뒤를 이어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였다. 그러자 베를린에서는 카라얀이 빈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 베를린 필을 이용했다고 분개하는 기사가 났다. 그러자 카라얀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정말 빈의 지휘자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면 베를린 필과 종신으로 계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베를린의 여론을 진화했다. 카라얀은 1964년 극장 경영진과 마찰을 빚고 사임할 때까지 빈 국립 가극장에서 매우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비판적인 세간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연출까지 했다. 빈 국립 오페라 소속 성악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카라얀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유연하고 효율적이며 타협적인 지휘자였다고 한다. 또 공연시 성악가의 컨디션에 사소한 문제라도 있으면 이를 즉각 감지하고 현장에서 즉석으로 템포를 변화시켜 성악가들을 수월하게 해줬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즉흥적인 템포 변화는 반주하는 오케스트라가 빈 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43]
1958년 10월 모델 출신의 금발여성 엘리에트 무레와 세 번째로 결혼하였다. 이 결혼은 카라얀의 남은 여생 동안 지속되었다. 아니타와의 두 번째 결혼 생활도 비교적 무탈하고 원만했지만, 아니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크게 작용했고, 언젠가는 카라얀과 이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수년간 기다려왔던 엘리에트의 노력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엘리에트와의 세 번째 결혼은 적어도 겉으로는 화목하게 유지되었고, 엘리에트는 비록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었지만 카라얀을 열심히 내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혼한 아니타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엘리에트 폰 카라얀은 지금도 잘츠부르크에 거주하고 있다.
2.5. 60년대
전후 EMI에 전속되어 활동해왔던 카라얀은 DG , DECCA와도 계약을 체결하여, 1959년 3월에 두 음반사와 각각 첫 녹음을 시작했다.
베를린 필과 전속계약을 맺고 있었던 DG는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카라얀에게 접촉해왔다. 마침내 카라얀이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자 그를 영입하기 위해 엄청난 거액을 제시했고, 마침내 카라얀과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한편 카라얀은 DG와 계약은 맺은 것과 비슷한 시기에 DECCA와도 계약을 맺었다. DG가 베를린 필과의 녹음을 위한 방편이 있었다면 DECCA와의 계약은 당시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던 빈 필(빈 국립 가극장)과 녹음을 위해서였다.
반면 종전 이후 지속되던 EMI와의 계약은 1960년에 종료되었다. EMI와의 계약이 종료된 것은 월터 레그와의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처음에 카라얀에게 은인으로서 다가온 레그는 한동안 레코딩 계획을 주도했으며, 카라얀은 레그의 계획에 따라 녹음을 진행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과 빈 필의 지휘자가 된 이후 카라얀의 위상이 급변함에 따라 레그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차이가 있는 듯하다. 일단 카라얀은 시대에 뒤떨어진 EMI의 녹음 기술에 실망하고 있었다. 경쟁사인 DECCA가 1955년 발빠르게 스테레오를 도입하였고, DG 또한 녹음기술 혁신을 이어갔으나 EMI는 1950년대 말까지 MONO 녹음을 고수했다. 1957년 1월 카라얀이 베를린 필에 취임한 후 첫 음반 녹음이 이루어졌는데, 이 역시 모노 녹음이었다. EMI는 다소 뒤쳐지기는 했으나 50년대 말 스테레오를 완전 도입했고, 카라얀과 EMI측 모두 재계약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카라얀은 DG, 데카와도 계약을 맺고 있었던 만큼 이제 레그의 영향력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당시 EMI 경영진은 계약 갱신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한 끝에 결국 재계약을 포기했다. 주요한 이유는 카라얀이 높은 개런티를 요구했고 EMI 경영진들도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지휘자임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있었다는 점[44], 당시 사내에서 월터 레그를 껄끄럽게 여기던 경쟁자들이 레그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EMI와의 계약이 끝나면서 10여년간 지속되어 왔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도 자연스레 청산되었다.
1960년 7월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직을 사임했다. 사임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일부 언론과의 불화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주로 오스트리아의 과중한 세금 때문에 직을 내려 놓았다는 해석이 많다. 예술감독을 사임한 이후에도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전과 다름없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63년 새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개관하였다. 개관공연으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공연했다. 새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한스 샤룬이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며, 건축설계학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한다. 한스 샤룬의 설계는 카라얀 자신이 직접 뽑은 것이다. 그러나 완공된 필하모니 홀은 음향에서 다소 문제점을 노출했으며, 지속적인 보완을 거쳤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역시 음향 문제 때문에 전용 홀이 완공되고도 70년대 중반까지 10년 이상을 달렘[45]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녹음을 진행했다.[46] 70년대 중반 베를린 필이 필하모니 홀에서 녹음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음향상의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 인근에 있기 때문에 녹음에 어려움이 있었던 현실적인 측면도 있다.
1964년 행정 당국과의 마찰로 빈 국립 가극장 음악 감독직을 사임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 측과 감정의 골이 상한 카라얀은 자신이 눈감을 때까지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지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1964년 카라얀이 빈 국립 가극장을 사임한 직후 고향이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측은 카라얀이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떠나겠다는 말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카라얀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마침내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에 다시 재취임하였다.[47] 카라얀은 오스트리아에서 지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한 발언을 '빈에서 지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축소하였다. 카라얀은 실제로 1977년까지 빈에서 지휘하지 않았다. 1977년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주연으로 베르디 ' 일 트로바토레' 공연으로 빈 국립 가극장에 복귀할 때까지 빈 필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만 지휘했다.
1965년 시벨리우스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음악제에 초청받아 베를필 필과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 교향곡 4번을 공연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운영의 전권을 가지게 된 카라얀은 1967년 3월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을 창설하였다. 이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이외의 극장에서 카라얀 자신의 이상대로 최고 수준의 바그너를 지휘하고자 했던 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름에 개최되는 잘츠부르크 페스트벌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겹치기 때문에 최고 수준의 바그너 가수들을 섭외함에 있어서 바이로이트와 경쟁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것이 부활절 기간에 열리는 별도의 페스티벌을 창설하게 된 큰 원인으로 보여진다. 개관 연주로 카라얀은 자신의 장기인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과 페스티벌의 메인 오페라 공연으로서 바그너의 발퀴레를 공연했다. 카라얀은 1967년부터 4년간 매해 차례로 발퀴레, 라인의 황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을 공연함으로써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공연과 음반녹음을 완결했다. 카라얀은 오스트리아 정부 또는 잘츠부르크 주 정부에 보조금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은 음반 녹음을 병행함으로써 제작비를 충당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실제 공연보다 반년 정도 앞서 음반 녹음 세션을 가졌다. 녹음을 마친 후에 배우들과 연출을 준비하는 단계로 넘어갔는데 이때 카라얀은 피아노 반주 대신 먼저 녹음된 음원을 틀어놓고 연출을 연습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당시에는 전례없던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페라 연출계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리 녹음된 음반은 시중에 발매되기에 앞서 부활절 페스티벌 청중들에게 카라얀 친필 사인이 있는 한정판으로 먼저 발매되었다.
또 카라얀은 오페라 제작비를 절감하면서 세계 유명 극장에서 최고수준의 오페라 공연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명 극장 간의 공동제작을 구상해왔는데,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하면서 실제로 이를 구현했다. 즉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제작한 프로덕션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로 그대로 옮겨서 상연한 것이다. 이로 인해 카라얀이 직접 뉴욕 메트 오페라 데뷔가 이루어졌다.[48] 하지만 각 오페라 극장간 스케줄을 조율하는 문제 이외에도 극장간 무대 규격이 다른 문제 등 현실적인 제약이 많아 카라얀의 이러한 구상은 곧 폐기되었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이 끝나고 70년대에 들어선 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트벌에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텔로, 파르지팔 등을 공연했으며, 음반 녹음과 병행하려는 방식을 이어나갔으나 음반사의 이해관계와 항상 맞아떨어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카라얀은 57년 베를린 필과 일본 순회 공연에서 자신의 공연이 생중계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후 영상 매체에 크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60년대 중반에 방송용 음악회 녹음을 한 후 흑백으로 슈만 교향곡 4번, 베토벤 교향곡 5번, 드보르작 교향곡 9번 등을 촬영을 하였고, 이어 컬러로 베토벤 교향곡 6번을 녹화하였는데 휴고 니벨린의 지나치게 난잡한 카메라 워크에 실망하여 이후 카라얀 자신이 직접 촬영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카라얀 스스로가 카메라 기술을 배웠다. 이듬해에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녹화를 거쳐 70년대초에 유니텔을 통해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후기 교향곡 등 영상물의 촬영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이후 발매되는 영상물들은 음향과 영상미를 출중히 보여주는 공연 동영상의 모범 사례들로 남게 된다.
[49]
[50]
냉전이 한창이던 1969년에는 베를린 필이 소련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공연함으로 국제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연주회에는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소련의 많은 음악가들이 참석하였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빗발치는 요구 때문에 수백장의 입석표를 추가로 발행했다.[51] 소련 당국은 연주회 프로그램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아닌 '서베를린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표기했고[52] 첫날 공연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라얀은 다음날 공연 때 무대 위에 등장한 후 쳄발로에 앉은 채[53] 연주를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한참 뒤에 관계자가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이라는 것을 공지한 후에야 카라얀은 지휘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소련 당국에서는 카라얀과 소련 음악가들의 접촉을 방지하기 위해 다음 공연 장소인 레닌그라드에 안개가 심해 일찍 떠나야 한다는 둥 핑계를 댔지만 서독 대사관과 카라얀의 기지로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54]
여담으로 카라얀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10번 연주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동한 카라얀이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이자 러시아의 지휘자였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다시는 10번외의 교향곡 외의 교향곡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55]
카라얀의 지휘 마스터클래스. 1966년 영상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2.6. 70년대
1969년 샤를 뮌슈의 후임으로 1년여 동안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임했다.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과 빈 필 이외에는 거의 지휘를 하지 않았던 카라얀이 신생 관현악단인 파리 오케스트라를 맡은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카라얀이 맡기 불과 1년전에 창설된 뉴비 악단이었는데, 자칭 문화대국 프랑스가 자국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문화대국이라는 자존심에 걸맞은 명문 교향악단을 만들겠다는 목표하에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1968년 창설되었다. 프랑스정부의 지원과 더불어 프랑스 출신인 카라얀의 와이프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근래에 발간된 한 서적은 카라얀이 파리 오케스트라를 잠시 맡은 이유가 레코드사와 재계약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카라얀의 포석이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59년 첫녹음을 시작했던 카라얀과 DG는 60년대말 계약이 만료되어 가고 있었고 카라얀과 DG는 재계약을 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60년대 동안 카라얀과 베를린 필, 그리고 DG는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을 위시하여 다양한 레퍼토리를 녹음하여 이미 주요한 레퍼토리는 다 녹음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DG와 카라얀의 파트너쉽에는 약간의 이견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카라얀은 브루크너 교향곡과 오페라 녹음을 원했고 또 기존에 녹음한 레퍼토리의 재녹음을 원했다. 하지만 당시 DG의 정책은 다른 음반사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레퍼토리의 중복 녹음을 가급적 제한하는 것이었다. 지휘자 왕국이라는 별명 답게 DG는 카라얀 이외에도 많은 지휘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DG는 이미 요훔과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상태였다. 또한 DG는 고비용이 투자되는 오페라 녹음을 꺼리고 교향곡과 관현악곡 녹음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라얀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민 곳이 EMI였다. EMI는 1960년 카라얀과 계약을 종료되었지만 그이전에 녹음된 카라얀의 음반들이 여전히 높은 판매고를 올리자 카라얀과 재계약하지 않은 것을 내심 후회하고 있었다. 그동안 EMI의 경영진도 교체되어서 60년대말 EMI는 카라얀과의 계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마침내 69년 EMI와 새로 계약을 맺은 카라얀은 파리 오케스트라와 프랑스 레퍼토리를 EMI에서 내 놓은데 이어 베를린 필과 차이코프스키의 후기 교향곡 및 브루크너 교향곡 4번, 7번의 음반을 내놓았고 이 음반들은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얼마 후 DG도 카라얀과 재계약을 맺었다. 70년대 전반기에 DG와 카라얀은 기존에 녹음되지 않았던 슈만과 멘델스존 교향곡 전집, 말러 교향곡 5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곡 등으로 레퍼토리를 확대했다. 한편 DG는 오페라 녹음에 상당히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70년대 전반기에 카라얀은 DECCA에서 푸치니의 라보엠과 나비부인을, EMI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녹음했다. 게다가 카라얀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등 소련 음악가들과도 협연하고 싶어했는데 영국 음반회사인 EMI는 이에 더 유리했다. EMI와 계약하고 처음 만든 음반이 위의 3명과 협연한 베토벤의 삼중협주곡 음반이었고, 이 음반은 45만장 이상이 팔려 EMI에게 큰 이익을 남겨주었다.
카라얀은 여전히 기존에 녹음했던 유명작품들을 다시 재녹음하고 싶어했는데, 카라얀이 EMI를 통해 재녹음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등이 높은 판매고를 올리는 것을 목도한 DG는 마침내 1975년 4월 20일 카라얀과 다시 포괄적인 재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재계약은 DG가 그동안 자제해왔던 재녹음을 전면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사실상 카라얀이 하고 싶은대로 녹음할 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한 것이었다. 재녹음을 하든 뭘 하든 간에 카라얀이 경쟁사가 아닌 자사에서 음반을 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레코딩 프로듀서 역시 카라얀이 원하는 사람으로 구성하였는데, 카라얀은 EMI에서 알게 된 프랑스 출신의 미셸 글로츠를 중용했다. DG와 재계약을 한 후 카라얀이 가장 먼저 녹음한 곡은 그토록 재녹음하고 싶어했던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이었다(1975년 4월 22일).
재계약 후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DG와 카라얀은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스키 교향곡 등 기존의 녹음된 주요 레퍼토리를 재녹음해 나갔으며, 또한 카라얀의 오랜 염원이었던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녹음도 추진되었다. DG에서 원하는 관현악 곡을 마음대로 녹음할 수 있게 된 카라얀은 EMI에서 녹음 비중을 크게 줄였다. 다만 DG가 아직 오페라 녹음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 녹음은 계속 EMI에서 진행했다. 1979년부터 DG가 오페라도 녹음하기로 정책을 바꾸면서 카라얀과 EMI의 녹음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975년말 척추 연골이 돌출되어 5시간에 걸친 큰 수술을 받았다. 이로인해 1976년 전반기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었다. 회복 이후 걸음걸이가 불편해졌다. 1978년 9월에 리허설 때 지휘봉을 줍다가 지휘대에서 넘어지면서 허리가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에는 단지 균형을 일어서 넘어진 것으로 발표가 났지만 카라얀 사후 출판된 전기들에 따르면 뇌졸중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1980년 1월에는 정기연주회 때 위해 청중들 앞에서 지휘대에 오르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977년에는 십여년만에 마침내 빈 국립 가극장에 복귀하여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를 지휘했고 빈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56]
1979년 디지털 녹음 방식이 도래하였다. 카라얀은 70년대 후반 기껏 재녹음했던 레퍼토리를 80년대에 다시 디지털로 재녹음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만약 디지털 녹음 방식 5년 정도 더 일찍 도래했다면 카라얀이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교향곡들을 70년대말과 80년대에 반복해서 재녹음했던 것이 한 번으로 줄고 대신 다른 신규 레퍼토리의 녹음이 더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1979년 가을 베를린 필과 중국에서 공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69년의 소련 공연과 함께 베를린 필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중요한 연주 중 하나다. 그러나 베이징에 전문 공연장이 없어 배구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공연장 바깥에서 울리는 자전거들의 요란한 찌르릉 소리가 배구장 안까지 들렸으며, 일부 청중들은 음식물까지 먹으며 매우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2.7. 80년대 - 베를린 필과의 불화, 그리고 죽음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불화가 터진 계기는 80년대 초 자비네 마이어 입단 사건이다. 1982년 23세의 나이에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과한 자비네 마이어는 카라얀이 직접 수석 클라리넷 연주자로 발탁했다. 자비네 마이어는 이로써 베를린 필 100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관악기 단원이 되었다.[57]
자비네 마이어 이전에도 카라얀과 베를린 필 간에 불화는 있었다. 대부분 사건들이 자비네 마이어와 마찬가지로 관악기 수석단원을 뽑는 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갈등들은 특히 비독일계 수석단원을 선발하거나 여성단원을 선발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58] 이미 1958년 카라얀이 폴란드 출신의 미셸 슈발베를 악장으로 영입할 때 일부 단원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한 적이 있었다. 본격적인 갈등은 1964년 호른 수석의 선발 건이었다.[59] 베를린 필의 오디션에 응하여 통과한 첫번째 후보는 스웨덴 출신의 벤그트 벨프라게였다. 그는 몇 개월간의 수습 기간 동안 베를린 필의 수석자리에서 연주했다. 카라얀은 벤프라게의 연주에 만족했으나 베를린 필의 호른 단원들은 그가 베를린 필에 걸맞은 독일적인 소리를 갖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입단을 부결했다. 이것은 베를린 필이 카라얀에게 처음으로 No라고 말한 사건이었다. 이에 분노한 카라얀은 파리 순회공연을 취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태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그 유명한 게르트 자이페르트(Gerd Seiferd)가 나타나 호른수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독일 최고의 호른 연주자인 자이페르트가 들어오자 카라얀도 매우 만족했고 인터뷰에서 베를린 필은 자이페르트 같은 세계 최고의 연주자를 가진 악단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갈등이 봉합되고 한동안 조용했다가 1969년 쵤러의 후임으로 플룻 수석을 뽑을 때도 약간의 잡음이 있었다. 카라얀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인 제임스 골웨이를 오디션에 초빙한 것이었다. 베를린 필 목관단원들이 타지 출신의 골웨이를 껄끄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명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어쨌든 골웨이는 이견이 없는 최고의 연주자였으므로 오디션을 무난하게 통과하여 5년간 수석으로 활동했다. 골웨이는 74년 퇴단한 이후 솔로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골웨이의 후임을 뽑을 때도 잡음이 있었다. 유력한 후보는 여성이었는데 카라얀은 이 여성 주자의 실력에 만족했지만 목관단원들, 특히 오보에 수석인 로타 코흐가 앞장서서 그녀가 베를린 필의 중압감을 이겨내기에는 멘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대해 결국 입단을 무산시켰다. 이 일은 결국 제임스 골웨이의 전임자였던 칼하인츠 쵤러(Karlheinz Zöller)가 베를린 필에 재입단하면서 다시 해결되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누적되었던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 자비네 마이어 사건이다. 클라리넷 수석 주자로 카라얀이 지지했던 자비네 마이어를 베를린 필의 목관 단원들이 소리가 너무 밝고 오케스트라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마침내 사단이 난 것이다. 한스요르크 셸렌베르거, 칼 라이스터 등 목관단원들을 중심으로 베를린 필은 카라얀의 독단적인 성향을 비난했고, 만년에 완고해진 카라얀도 자신의 예술적 견해가 단원들에게 무시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 카라얀과 단원들의 갈등 사이에 끼어 곤란한 위치에 놓였던 자비네 마이어는 버티지 못하고 9개월 만에 베를린 필을 퇴단한다. 카라얀도 꼭 같이 연주해보고 싶었던 마이어가 쫓겨나듯 퇴단한데 대해 분노하여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후 마이어는 20여장의 클라리넷 연주곡 앨범을 내면서 세계 최고의 클라리넷 연주자로 명성을 떨치지만[60] 이때는 고작 24세에 불과한 어린 연주자였다.
84년 카라얀은 그해 연말까지 상임지휘자로써의 최소한의 의무인 정기연주회를 제외한 모든 녹음 일정과 순회공연, 외부 페스티벌 출연등의 부가적인 스케줄을 취소하였다. 당시 음반 녹음을 비롯한 외부활동으로 연봉의 다섯배의 수입을 올렸던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재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빈 필은 84년과 85년 동안 카라얀과 차이코프스키와 드보르작 교향곡 등을 녹음할 수 있었다. 한편 베를린 필의 수뇌부였던 셸렌베르거(오보에 수석)와 겔러만 등은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카라얀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지 논의하였는데, 꽤 효과적인 아이디어들이 튀어나와 대담하게 이를 실행에 옮겼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텔레몬디알과의 계약을 취소하고 출연을 거부하는 것으로 응수한 것이다. 텔레몬디알은 카라얀이 본인의 영상물 녹화를 위해 사적으로 설립한 회사였다[61] 텔레몬디알과의 계약 파기는 카라얀이 자신의 영상물을 남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베를린 필 단원들이 카라얀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선택한 카드였다. 카라얀은 텔레몬디알의 영상물 촬영에 참여한 대가로 베를린 필에 높은 출연료를 지급하고 있었는데 베를린 필 단원들이 고수입을 포기하면서까지 텔레몬디알과의 계약을 취소하자 그들의 의도대로 카라얀은 큰 심적 타격을 받은 듯 하다. 카라얀은 사건 초반에는 베를린 필에서 자신의 권위의 우위를 재확인하는 선에서 일이 수습되고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길 원했던 듯한데, 텔레몬디알 계약 취소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고 베를린 필에서 마음이 떠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베를린 필은 카라얀 이외의 다른 지휘자들과 녹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베를린 필 단원들은 DG와의 전속계약마저 파기했다. DG는 전속계약의 대가로 베를린 필에게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40% 높은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었는데 베를린 필은 이마저도 포기했다. 그러나 카라얀 없이도 잘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베를린 필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베를린 필 단원들 중 일부는 DG가 높은 로열티를 지급하는 것이 카라얀이 아닌 베를린 필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서 DG와 재협상할 때 DG가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도 많이 했다. 게다가 베를린 필의 음반 녹음 제의를 받은 무티 등의 지휘자들은 대부분 카라얀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를 거절했다. 가까스로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 겸 피아노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녹음이 성사되었지만 어떤 음반사도 카라얀의 심기를 거스르며 이 음반을 출시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녹음은 몇 년 동안 발매되지도 못했다. 한편 이때 베를린 필과의 녹음에 응해준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크게 환심을 사게 되어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 1순위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더해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3일 후에 했던 특별연주에서 바렌보임이 출연료도 받지 않고 제안에 응한 것은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비록 상임지휘자는 아바도가 되었지만.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등을 조장 확장한 것에는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베를린 필의 내부 규정이 한 몫을 했다. 이는 베를린 필의 총감독 슈트레제만도 지적한 것으로, 단원을 가채용할 때 상임지휘자가 참석해야 하지만 투표권을 비롯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식적인 수단이 전혀 없다는 점, 그러나 단원이 가채용을 거친 이후의 임명과 해고에 대해서는 상임지휘자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 오케스트라가 불합격으로 결정한 연주자를 총감독이 직권으로 임명할 수 있다는 점 등 이율배반적이고 상호모순적인 규정들이 난무하는 베를린 필의 내부 규정들이 사태를 확산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양측은 서로를 상처내기 위한 결정을 하면서도 이것이 규정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항상 강조하였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등 당시, 이 갈등은 다분히 일부 단원들(목관 단원들) 중심으로 주도된 측면이 있다. 셸렌베르거, 라이스터, 코흐 등 목관수석들은 카라얀과 마찰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단원들이었다. 베를린 필의 관악기 수석들은 해당 악기의 최고의 명인으로 꼽히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단원들 가운데서도 이들의 예술적 위치는 남다를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베를린 필의 관악기 수석들은 베를린 필을 비롯한 여러 오케스트라들과 비일비재하게 협연하는 비르투오소 솔로이스트들이다.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과정에서도 십여명 단위로 거의 일방적으로 지휘자의 지시를 받는 현악기 단원들과 달리 관악기 단원들은 개인이 한 파트를 담당하기 때문에 리허설 때 지휘자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단원들의 개별 인터뷰를 보면 카라얀에 대해 우호적인 단원들도 대단히 많았던 것 같다. 28년 동안 콘서트마스터로 재직했던 다니엘 스타브라바는 카라얀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독재자'는 아니었으며 단지 음악에 대한 주관과 고집이 확실한, 강력한 지도자였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카라얀을 싫어하는 단원도 있었지만 다수는 카라얀을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이탈리아의 가벼운 스타일을 추구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갈등이 훨씬 컸다고 말하고 있다. 25년간 트럼펫 수석을 지냈던 콘라딘 그로트 역시 카라얀을 싫어했던 사람도 있지만 좋아하는 단원들도 많았으며, 자신은 카라얀의 의견은 거의 법과 같이 신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호른 부수석 스테판 예치어스키도 카라얀과 일부 단원들 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카라얀과 호른 파트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였고 자신도 카라얀과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베를린 필과의 갈등의 와중에 있던 1983년 허리 통증이 극도로 악화되어 다시 수술을 받았다. 실패할 위험성도 높았던 수술이라 계속 미루다가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지자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수술에 임했다고 한다. 허리 통증 때문에 자가용 비행기나 포르셰를 몰기 힘들어서 대신 헬기를 조종하여 수술 병원이 있는 하노버로 갔다고 한다...
84년 11월 일본을 거쳐 최초의 내한 공연을 가졌다. 당시 자비네 마이어 사건이 터지고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의 부가활동을 보이콧한지 근 반년만에 다시 복귀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아시아 투어는 해외음악계에서도 제법을 관심을 모았었다. 일본으로 공연가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카라얀이었기에 아시아 투어에 임박해서 베를린 필에 복귀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당시 오사카 공연에서는 돈 후안의 시작 부분에서 앙상블이 엉켜서 중지하고 다시 처음부터 연주하는 망신을 겪기도 했는데,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데까지 간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나머지 연주는 좋았으며 DVD로까지 발매되기도 하였다. 며칠 후에 있던 내한 공연도 큰 찬사를 받았다. 내한 당시에 카라얀 부인이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예상치 않게도 지갑을 되찾게 되어 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내한 당시 카라얀은 외부인이 리허설을 몰래 참관하다가 걸리는 일이 발생하면 모든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해를 넘겨 85년이 되어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수습단계에 들어갔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빈 필과의 활동을 점차 늘려갔다.
1985년 빈 필, 빈 징베라인과 함께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미사에서 모차르트의 대관미사를 지휘하였다. 이는 비오 10세에 의해 전례 중 오르간 외의 악기 연주가 금지된 이후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미사 때 오케스트라가 연주된 것이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했으며, 이를 이유로 1986년 베를린 필의 송년음악회를 지휘하지 않아 베를린에서의 여론이 악화되었다.
1988년에는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총 6회로 예정된 돈 지오반니 공연을 3회밖에 지휘하지 못했다. 그해 하반기에는 건강 악화 때문에 베를린 필과의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날 일본 투어를 위해 출국하자 베를린의 여론은 또 안좋아졌다. 한편 그해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일본 투어는 카라얀의 마지막 방일이 될 것이라는 예측 때문에 표를 구하기가 엄청 어려웠다고 한다.
1988년에 이르러 카라얀은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들(빈 필)과 더 많이 작업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1988년 11월, 카라얀이 만년에 남긴 최고의 녹음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을 녹음했다.
1989년 2월 빈 필과 뉴욕 투어에 나서 카네기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과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등을 공연하였다. 이 때 브루크너 8번은 대단한 일체감과 열기 속에서 연주되어 뉴욕 평단으로부터 격찬을 받았고, 빈 필 단원들도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공연이었다고 한다. 사실 원래 이 공연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순회공연으로 기획되었으나 취소되고 빈 필이 대타로 들어오게 된 공연이었다. 어쨌든 빈 필은 이때 뉴욕에서 열렬한 반응을 얻은 후 매년 3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Vienna Philharmonic Week이라 불리는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1989년 4월 24일 마침내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직에 사의를 표명했다. 카라얀은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허리와 관련하여 몇 차례 큰 수술을 받았고,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뇌졸중으로 베를린 필 지휘대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다. 80년대 후반에는 건강 때문에 공연이 취소되는 경우도 많았다. 베를린 필 뿐만 아니라 카라얀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일본 공연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스케줄까지 취소했을 정도니 건강이 크게 나빠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건강 문제에 더해 베를린 필 및 베를린 주 정부와의 기싸움도 사임에 한 몫했다. 당시 베를린시는 새로 사민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사민당 정권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 모두에게 비판적이었다.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활발한 순회 공연 활동에 대해 이전 기민당 정권은 자유 베를린(서베를린)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이라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시의 재정적 지원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 정권을 잡은 사민당 정권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외부 활동을 하며 높은 수익을 올리며 시의 재정적인 지원까지 받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사민당 정권은 전체 공연 스케줄의 3/4 이상을 베를린 밖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베를린' 필하모닉이냐면서 비판했다. 사민당 정부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해외 공연을 줄이고 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무료 공연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사민당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상황에서, 카라얀은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과 정기연주회 횟수를 축소하는 것으로 계약을 변경할 것을 베를린 주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사민당 정부는 카라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4월 24일 카라얀은 베를린 주 정부 문화담당관과 만난 자리에서 결국 건강 문제로 더이상 계약상 명시된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어렵다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는 카라얀 특유의 승부수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사민당 베를린 주 정부는 뜻밖에 사표를 수리(!)해 버렸다. 카라얀이 사표를 던진 바로 다음날 베를린 주정부는 언론을 통해 카라얀의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카라얀이 사표를 던진 직후 카라얀을 지지하는 일부 베를린 필 단원들이 잘츠부르크에 있는 카라얀 자택까지 찾아왔지만 카라얀은 끝내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사임하기 직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베를린 필과 정부에서 오래전부터 추진해오던 이스라엘 순회공연 계획이 구체화되었는데, 그 일정이 1990년 4월로 잡혔다. 이를 두고 카라얀이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 때문에 4월에는 해외로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베를린 필이 일부러 카라얀 없이 가려고 4월로 일정을 잡았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 카라얀 역시 이에 대응하여 1990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에서 베를린 필을 대신할 호스트 오케스트라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섭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62] 카라얀이 1년만 더 오래 살았으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귀한 장면이 연출될 뻔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에 사표를 던지기 전날인 4월 23일 카라얀의 마지막 녹음이 되어버린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 실황이 녹음되었다. 상당히 예외적으로 실황으로 녹음된 음반이었다. 빈 필 단원들의 회상에 따르면 원래는 실황이 아니라 평소와 같이 연주회 전 리허설 때 녹음이 진행될 계획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카라얀이 리허설 때 녹음을 진행하지 않더니 그냥 연주회를 라이브로 녹음해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고 한다. 이날 연주회는 정기연주회가 아닌 악우협회 주최 음악회라 재연없이 단 한번의 공연만 진행되었다. 다음날 카라얀은 베를린 주정부에 사의를 표했고, 다음날인 4월 25일, 카라얀의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직 사임이 언론에 공식 발표되었다.
7월 16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음악감독의 자격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 공연을 위한 리허설 기간 중[63]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이 때 그의 자택에는 부인 엘리에트는 산책을 나갔다가 들어와 씻던 중이고 그는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와 소니뮤직에서의 음반 발매와 아니프에 세워진 CD 공장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부터 좋지 않던 심장을 걱정한 주치의 발터 지몬이 심전도계를 가지고 왔음에도 중국 황제가 와도 방해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고, 이게 화근이 되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절친한 친구가 자기 보는 앞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 충격으로 얼마 후 오가도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며칠 후 자택이 있는 아니프 인근 성당에 매장되었다.
-고클래식 웹진 인용-
카라얀의 영결식은 일주일을 거쳐 7월 23일에 거행되었는데 쓰인 레퀴엠의 지휘는 리카르도 무티가 맡았다. 다만 베를린 필과의 관계는 틀어질대로 틀어진 지 오래라 무티의 지휘이긴 했지만 빈 필 하모닉과 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이 참여 했다. 사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도 추모 공연을 열었다. 오자와 세이지가 바흐 관현악 모음곡 3번 중 아리아를, 조지 숄티경이 베토벤 교향곡 3번 2악장을, 제임스 레바인이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일부를 지휘했고 당연히 빈 필하모닉과 빈 국립오페라 합창단이 연주에 참여했다.
DG와 오랫동안 몸담다보니 DG와 얽힌 이야기가 제법 많다. 데뷔 때와 70년대에 잠깐 EMI에 있다보니 역시 EMI와 얽힌 얘기조차 많으며 당시 소니 사장과 친해서 자신의 땅에 CD공장을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야망이 아주 컸는지 자신의 모든 녹음과 영상을 많이 남기려고 애썼으며, 그 결과 엄청난 레코딩이 남았고 이를 상술로 많이 써먹었다는 것은 전설. 고소 크리 먹이는 것을 좋아해서(?) 고소를 먹이는 일화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카라얀의 개관은 이 글을 읽어보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3. 평가
3.1. 그의 지휘/세간의 평가
그의 지휘를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무작정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까는 사람들은 그의 상업주의나 나치전과 등을 이유로 많이 까고[64]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다이나믹한 음향 또는 기름진 음향. 그리고 청중을 사로잡는, 현악의 마술사[65] 등과 같은 이유로 많이 추앙한다. 국내에는 극도의 카라얀까들이 만든 와전된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다. 대표적인 예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협력한 사람인 피해자였고 푸르트벵글러가 카라얀의 앞길을 막고 디스한 것은 상업주의와 야욕에 물든 카라얀에게서 베를린필을 지키려는 목적이었다는 이중잣대식의 해석[66]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생전 내내 이유 없이 카라얀을 싫어한 인물로서 카라얀이 피해를 많이 봤다. 이상한 점은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를 존경했다는 점. 심지어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싫어해서 미스터K, 혹은 카씨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러한 행동에 "베를린 필을 지키려는 숭고한 행위"등을 들먹이는 것은 이지매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카라얀의 나치당적을 언급하며 정당화하는 것 역시 물타기나 내로남불에 불과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사후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으로 선정되지 않은 이유가 카라얀의 정치질과 이간질이라는 설,[67] 베를린필 단원들이 카라얀보다 귀도 칸텔리를 원했다는 설[68] 등이 대표적이다.그렇게 카라얀-크랑크[69]로 불리는 극도의 팬들과 극도의 안티가 공존한 거장이었지만, 클래식계에서 내로라 할 만한 거장이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음의 세공사 정도로 비유해야 맞을 것이다. 즉 카라얀은 비발디,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차이코프스키, 브루크너, 말러 등 대부분의 오페라와 교향곡들을 그 시대의 가장 표준적 규범에 맞춰서 연주한 지휘자였다. 그 규범을 세운 게 사실상 카라얀 자신이었으니 당연한 얘기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휘에서 토스카니니풍의 과감한 시도나 푸르트벵글러의 장점이었던 "극적이고 감동적인 울림"은 없었지만, 대신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에서 최상급의 아름답고 정제된 소리를 뽑아낼 줄 아는 지휘자였다. 다만 주선율 위주의 진행으로 곡의 짜임새를 왜곡하거나 금관 및 타악기의 과용으로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물론 카라얀이 항상 이런 식의 해석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며, 또 카라얀의 주된 활동 시기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해석이 큰 문제가 되지 않던 시대였다는 것, 그리고 카랴얀이 한 시대를 주름잡은 지휘자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비판받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도 감안하는 것이 공정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카라얀이 이런저런 녹음을 많이 남기다보니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녹음도 있고 안티역시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잘된 녹음도 있다. 웬만한 녹음은 1순위는 아니라도 해당 레퍼토리에서 명반 3~5장을 고르라하면 카라얀의 녹음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대중이 얼마나 카라얀을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투표.
그의 명반은
1. 베토벤에서 브루크너, 브람스로 이어지는 게르만 교향곡
2.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
3. 베르디, 푸치니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
4.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70][71]의 교향곡
5. 베토벤과 바그너, 슈트라우스로 이어지는 독일 오페라
이상을 우선적으로 언급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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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 교향곡 9번(1) | 안톤 브루크너 : 교향곡 8번(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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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 : 교향곡 1번(1)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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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베르디 : 레퀴엠(3) | 자코모 푸치니 : 나비부인(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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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 교향곡 6번(4) | 장 시벨리우스 : 교향곡 2번(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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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바그너 : 탄호이저(5)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살로메(5) |
카라얀은 의외로 게르만 낭만 교향곡들 중에서 슈베르트 - 멘델스존 - 슈만으로 이어지는 비오페라라인의 교향곡들과는 거리가 있는 편인데, 멘델스존 교향곡과 슈만 교향곡 전곡은 70년대에 게르만 주요 교향곡 녹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1차례 녹음했을 뿐이다.[72] 본인이 좋아하는 곡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녹음하는 카라얀의 습관을 생각할 때,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슈베르트의 8,9번 교향곡[73], 슈만의 4번 교향곡은 그런 와중에도 아꼈고, 말러에도 그렇게 관심은 크지는 않았지만,[74] 말러 9번 교향곡을 언급할 때 카라얀의 이름이 언급되는 빈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교향곡 9번의 경우에는 카라얀이 선호하는 곡이라 자주 연주하기도 했다. 반대로 유명한 푸치니의 라 보엠의 경우에는 파바로티, 프레니, 갸우로프를 캐스팅해서 진행한 데카 녹음이 워낙에 흡족해서 다시 녹음하지 않았다고도 하나, 출처는 명확하지 않다.
사실 카라얀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 명반이라고 손꼽히는 음반들을 보면, 카라얀이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단 한번 녹음한 음반들도 꽤 있는가 하면 바로 위에 있는 순서에 없는 곡들도 많다. 예를 들어 홀스트의 행성의 1961년 DECCA반은 이모겐 홀스트가 수많은 음반 중 최고라고 평을 남기기도 했고,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의 경우는 카라얀이 '녹음 전에 이곡을 몰랐으나 알고 보니 좋은 곡'이라고 했을 정도로 곡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았고, 슈바르츠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시간에 쫒겨 리허설도 다 못 마치곡 녹음한 연주이기도 하다.[75] 그럼에도 이곡은 동곡의 명반으로 손꼽히고 있다.[76]
특히 말년인 80년대에 빈필과 녹음한 곡들은 대개가 카라얀이 특히 아낀 곡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80년에 베르디 팔스타프, 81년에 푸치니 투란도트, 82년에 하이든 천지창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83년에 브람스 독일 레퀴엠, 84년에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5,6번, 베르디 레퀴엠,85년에 드보르작 8,9번 교향곡, 슈만 4번 교향곡, 모차르트 대관식 미사, 86년에 모차르트 레퀴엠, 87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 바그너 서곡집,88년에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브루크너 8번 교향곡, 89년에 베르디 가면무도회, 브루크너 7번 교향곡를 녹음했다.
바로크 녹음의 경우 특유의 기름진 해석과 구조보단 멜로디를 중시하는 스타일 상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전체적으로 현악기의 사운드는 최상급으로 평가받지만 정격적으로 해석하면서도 고전적인 녹음인지라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을 때가 있다.
그의 특성은 녹음시기마다 조금씩 다른데 50년대 녹음은 가장 기름기가 덜하지만 토스카니니의 영향을 많이받은지라 흔히 토스카라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77]. 그리고 말년인 80년대로 갈수록 좋게 말하면 디테일이 다듬어져 있고 나쁘게 말하면 기름기가 묻어 나온다.[78] 80년대에는 상기했던 대로 빈필과 녹음한 음반이 많은데, 카라얀의 말년 미학과 빈필의 궁합은 어떤 측면에서는 베를린필과의 궁합을 상회하는 면도 있어서, 좋은 시너지 효과를 보인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오히려 이 시기에 베토벤, 브람스 교향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곡을 빈필과 녹음하지 않아서 아쉬워 하는 애호가도 있다.
그가 연주한 레퍼토리는 상당히 방대해서 그가 녹음한 음반수를 기네스북에 올려도 될 정도.[79] 최근 들어 전집 박스 세트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카라얀도 예외는 아니다. 2014년에 EMI의 카라얀 전집이 나왔고 2015년까지 해서 카라얀 60, 카라얀 70, 카라얀 80과 함께 오페라 전집[80]과 데카 전집까지 해서 카라얀 전집 음반이 나와있다.[81] 이제 2017년에는 유니텔에서 녹화한 영상, 30년대~80년대 DG녹음, 데카 녹음을 모두 모은 초거대 전집까지 나왔다.
현대음악에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카라얀의 레퍼토리가 매우 넓기 때문에 카라얀도 적지 않은 수의 현대음악을 다루었다. 리처드 오스본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카라얀이 꽤나 많은 현대음악을 다루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쇤베르크나 카를 오르프, 거슈윈의 음악도 다루었다. 사실 카라얀이 초연한 현대음악들도 꽤 많은 편이고 녹음된 것도 생각보다는 많다. 그러나 카라얀이 현대음악보다는 낭만주의 이전 음악에 주력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대부분의 지휘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불레즈 같은 일부 지휘자들이 예외적으로 현대음악을 많이 지휘하는 것일 뿐. 현대음악을 많이 지휘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아바도, 래틀 등도 전체 레퍼토리에서 볼 때 현대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이러한 양상은 동시대 음악이 잘 연주되지 않는 현대 클래식 음악계의 사정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카라얀이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소수지만 있는데, 특히 10살 후배인 레너드 번스타인과 비교할 때 이 특징이 많이 거론된다. 하지만 실제 작곡을 하는 지휘자, 정확히는 작곡으로도 성공한 지휘자는 많지 않으며, 지휘와 작곡은 별개의 직업으로써 두 가지를 모두 잘 하는 사람이 대단한 것이지,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지휘자로써의 자질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 카라얀은 번스타인과 비교하면 피아노를 치는 번스타인에 비해 하프시코드를 치면서 지휘하는 영상이 있는데 꽤 많이 남아있다. 카라얀의 이런 점을 볼때 번스타인에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82]
오페라 지휘에서는 극도의 먼치킨이다. 사실 카라얀 세대의 독일/오스트리아 지휘자들 대부분이 오페라 지휘자로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카라얀이 다른 이들과 넘사벽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독일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에 모두 능한 지휘자가 드물 뿐만 아니라 양쪽에서 모두 거장급의 성과를 일궈낸 지휘자는 거의 없다. 독일 오페라에서도 카라얀의 해석은 출중하지만,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보였다. 특유의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대다수의 지휘자들이 상대적으로 연출에는 등한시하는 반면, 카라얀은 직접 연출에까지 관여했으며 섬세하고 꼼꼼한 지휘로 호평을 받았다[83]. 장대한 대편성의 오페라도 카라얀의 지휘 아래에선 실내악적인 꼼꼼함을 보여주며 집중력을 더욱 극대화했다.[84] 그리고 성악가 발굴에 일가견이 있어 지속적으로 참신한 성악가들을 발굴해냈는데, 군둘라 야노비츠, 미렐라 프레니, 캐슬린 배틀, 안나 토모와 신토우, 조수미 등등등 수많은 성악가들이 카라얀의 발탁과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났다.
음악에서 상업주의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간지나게 보이도록 자기연출을 하며[85] 또한 이를 사진으로 찍어 뿌리는 등 음악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자신의 이미지메이킹에 신경을 많이 썼다. 덕분에 그의 명성과 독특한 캐릭터가 결합하여 현대인들이 자주 떠올리는 지휘자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2008년에 방영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지휘자 캐릭터 강마에 역시 성격이 깐깐하고 입이 거친 점은 사실 카라얀의 캐릭터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86]
심리학자 김정운은 저서 '에디톨로지'에서 카라얀은 음악에 시각적 편집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아티스트라 평가했다.[87] 이 점은 훗날 베를린 필의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디지털 콘서트홀)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되었다.
3.2. 클래식 대중화의 선각자
“아무리 음향효과가 좋은 홀이라 할지라도, 자리마다 그 조건은 달라진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2,000~3,000명 정도 들어가는 홀이라면, 좋은 음향효과를 만끽할 수 있는 자리의 수는 대략 200~300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계를 넘어가면 음질은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음반은 음악을 최고의 조건에서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음반은 한 명 한 명 모든 청중에게 지휘자가 머릿속에 그린 바로 그 음악을 들려준다.”
―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455쪽
―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455쪽
카라얀이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60년대부터 영상물 제작을 직접 기획할 만큼 예술과 마케팅을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시킨 선각자였다. 카라얀은 음반과 영상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널리 알렸고, 사람들로 하여금 연주회장을 찾지 않더라도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품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통해 보고 들을 수 있게 만든 대표 주자였다.
1940년대 후반, 막 LP 시대가 열릴 때 카라얀은 어떤 지휘자보다 먼저 레코드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때까지 적지 않은 지휘자가 음반 녹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레코딩은 죽은 음악’이라며 음반 녹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라얀은 앞으로는 굳이 공연장에 오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음악을 즐기는 시대가 올 것임을 내다보았다.
1980년대 들어 CD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본 사람도 카라얀이었다. 당시 클래식음악 관계자들은 차갑고 기계적인 음색의 CD가 LP를 대체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CD가 등장한 이상, LP의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CD 녹음에 앞장섰다.[88]
3.3. 유명인들의 평가
기자: 클렘페러는 어떻습니까?
크리스타 루트비히: 아주 냉정해요
기자: 뵘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지능이 뛰어나죠.
기자: 솔티는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잠시 있다가)..... 매우 헝가리인답고요.
기자: 번스타인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환희, 활기가 있어요.
기자: 카라얀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그는 신이에요.
― 프랑스 음악, 1995년 8월
크리스타 루트비히: 아주 냉정해요
기자: 뵘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지능이 뛰어나죠.
기자: 솔티는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잠시 있다가)..... 매우 헝가리인답고요.
기자: 번스타인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환희, 활기가 있어요.
기자: 카라얀은요?
크리스타 루트비히: 그는 신이에요.
― 프랑스 음악, 1995년 8월
"카라얀은 한 사람의 음악가이기도 하지만 한 시대 그 자체였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그는 이미 한 시대였다."
― 오토 쉥크
― 오토 쉥크
"어린아이와 나이 지긋한 중국의 현자, 이 두 가지 기이한 조합이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 미셸 글로츠
― 미셸 글로츠
"카라얀은 독특한 지휘자였다. 나는 카라얀만큼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진 사람을 상상할 수 없다.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지휘했고 항상 매우 높은 수준에서 지휘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음악가들의 멋진 합주를 가졌다. 누군가가 그렇게 환상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특별하다. 여러분은 그에게서 브람스, 리차드 스트라우스, 바그너, 베르디로부터 대단한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스트라빈스키도 아름답게 만들어냈다: 그의 봄의 제전은 믿을 수 없이 훌륭했다! 그는 오페라또한 정말 잘 했고 이것이 그가 프로듀서로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이다. 나는 항상 그가 하늘을 나는 새 같다고 말한다. 그가 날 때 그는 지구상의 우리보다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카라얀의 방식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아이디어와 가능성,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정말 국제적이고 수준 높은 것이었다."
"그는 지휘를 하는 것을 인기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유명한 직업으로 만들었다. 카라얀은 지휘자가 되는 것의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 한 명이자 가장 훌륭한 지휘자였다."
― 마리스 얀손스[90]
"그는 지휘를 하는 것을 인기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유명한 직업으로 만들었다. 카라얀은 지휘자가 되는 것의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 한 명이자 가장 훌륭한 지휘자였다."
― 마리스 얀손스[90]
3.4. 유명인들을 평가
테너
존 비커스에 대하여
카니오( 레온카발로에 나오는 남자주인공)를 비커스가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내가 롤스로이스를 몰고 다닌다는 사실이 메르세데스 벤츠를 싫어한다는 건 아니야."
카니오( 레온카발로에 나오는 남자주인공)를 비커스가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내가 롤스로이스를 몰고 다닌다는 사실이 메르세데스 벤츠를 싫어한다는 건 아니야."
4. 카라얀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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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소니와 필립스가 CD 공동개발을 결정할 당시의 모습[94] 기념사진을 찍었다[95] |
카라얀은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열정적인 청중, 유럽보다 훨씬 앞선 일본의 실황방송 중계시스템, 소니의 뛰어난 기술력 등... 일본에 방문할 때마다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의 안내로 각종 첨단 기기들을 관람했다[96]. 카라얀은 CD 등을 비롯하여 소니의 음향 관련 기기의 개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CD를 이용한 최초 녹음도 카라얀이 했는데, 잘츠부르크 부활절음악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녹음한 것이 그것이다. 카라얀은 심지어 일본에서 대학생 오케스트라를 리허설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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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도쿄뿐만 아니라 교토, 나고야, 다카라즈카 등 지방에서도 공연했다. 이 때 NHK 심포니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은 나중에 일본 DG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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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1월 3일부터 22일까지 베를린 필과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16회 콘서트를 가졌다. 도쿄(7회), 오사카(2회), 나고야(2회), 후쿠오카, 고베, 히로시마, 야하타, 센다이에서 공연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7번, 브람스 교향곡 1번, 2번,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모차르트 교향곡 35번, 38번, 스트라빈스키 불새 조곡, 힌데미트 화가 마티스, 슈트라우스 돈 후안,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스메타나 몰다우,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탄호이저 서곡,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베버 오베론 서곡, 앵콜은 바흐의 관현악 조곡 제3번의 Air(G선상의 아리아),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이 공연 영상의 일부는 DVD로 발매되었으며 유튜브에서 공연의 일부를 볼 수 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등은 음반으로도 나와있다. 카라얀은 연주회가 일본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나중에 영상물 제작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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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빈 필과 일본을 방문했다. 이것은 빈 필과 카라얀의 세계 투어의 일환이었다. 17개국에서 26회의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그중 일본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서 총 9회의 콘서트가 열렸다. 일본 공연의 일부는 나중에 CD, DVD로 발매되었다. 브람스 교향곡 제1번, 제4번,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등이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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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베를린 필과 일본을 방문하여 4월 12일부터 5월 3일까지 3주간에 걸쳐 도쿄(7회), 오사카(2회), 나고야, 히로시마, 후쿠오카, 카나자와시, 오카야마현, 마츠야마시, 타카아츠, 센다이시, 삿포로시에서 18회의 공연을 가졌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 레오노레 서곡 3번 콜리올란 서곡, 브람스 교향곡 1번, 2번,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브루크너 교향곡 8번, 드보르작 교향곡 8번, 9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돈 후안, 드뷔시 바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5번, 베베른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5개의 소품,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6번. 공연의 일부는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고 추후 킹 레코드에서 라디오 녹음된 분량을 음반으로 발매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의 경우 일본의 5개의 합창단을 연합하여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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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8일부터 22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6회), 오사카(6회)에서 공연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오사카), 브람스 교향곡 2번, 3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드보르작 교향곡 8번,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슈만 교향곡 4번, 오네거 교향곡 3번,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 디베르트멘토 17번,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Fortner Marginalien(일본 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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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7회), 오사카(3회)에서 공연을 가졌다. 레퍼토리는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6번, 브루크너 교향곡 7번, 브람스 교향곡 3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드보르작 교향곡 8번,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탄호이저 서곡,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 드뷔시 바다, 쇤베르크 정화된 밤. 유튜브에서 공연 전 드레스 리허설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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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6일부터 18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6회), 오사카(5회)에서 연주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 피아노 협주곡 3번, 4번, 5번, 브람스 교향곡 전곡,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2번, 더블 콘체르토, 영웅의 생애. 당시 DG(베토벤 교향곡 전곡, 브람스 교향곡 전곡)와 EMI(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녹음한 것과 연관한 선곡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이 실황 베토벤 교향곡 전곡이 발매[97]되어 화제를 모았다. 합창은 동경예술대 합창단이 맡았다. 피아노 협주곡 선곡이 많은 것이 눈에 띄는데, 연주는 모두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가 맡았다. 당시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전 공연을 다 본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 베토벤 교향곡 녹화 영상이 존재하나 미공개 상태이고 스위스 은행에 보관 중이다. 카라얀은 당시 방송국 측에 중계권만을 허용하고 녹화권은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공연 영상의 극히 일부가 바이센베르크의 방송 출연에 등장한 적이 있으며,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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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6일부터 26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에서 9회의 공연을 가졌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말러 교향곡 6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드보르작 교향곡 8번,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모차르트 교향곡 39번,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하이든 천지창조, 베르디 레퀴엠, 모차르트 레퀴엠, 브루크너 테데움. 2년 전 공연에서 일본의 합창단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빈 징베라인까지 데리고 왔다. 여전히 카라얀 본인은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도쿄로 갔다.
이 때 공연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은 DG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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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28일부터 11월 8일까지 도쿄에서 베를린 필과 10회 공연을 가졌다. 베토벤 교향곡 1번, 3번[98], 5번, 6번,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전곡,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라벨 볼레로, 스페인 랩소디, 드뷔시 바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등을 공연하였다. 역시 유튜브에 공연 동영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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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방일 및 내한공연
10월 18일부터 10월 24일가지 베를린 필과 도쿄(4회), 오사카(2회)에서 총 6회의 공연을 가졌다. 오사카 공연은 DVD로 발매되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5번, 6번, 브람스 교향곡 1번, 3번,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슈트라우스 돈 후안, 라벨 다프니스와 클로에 조곡 2번, 드뷔시 바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모차르트 디베르트멘토 15번.
일본 공연 직후 한국에서 최초로 이틀간 내한공연을 가졌다. 첫날에는 베토벤 교향곡 제5번과 제6번, 다음날에는 브람스 교향곡 제1번과 모차르트 디베르트멘트 15번[99]등을 연주했다. 당시 국내에서 엄청나게 화제가 된 공연이었다.
당시 공연을 관람한 사람의 수기에 의하면 당시 세종문화회관의 빈약한 음향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공연들과 달리 5관 편성으로 공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편성으로 연주한 것은 세종문화회관의 음향 상황과는 무관하며, 원래 카라얀은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할 때 4관 편성 이상으로 증원하여 연주해왔다. 심지어 베토벤 교향곡 5번에서 호른을 네 배 늘여 8명으로 공연하기도 했다. 내한 당시 카라얀은 베토벤 교향곡 등을 4관 편성 규모로 연주했는데, 이는 세종문화회관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연주해왔기 때문이며, 내한 공연 직전 일본 공연에서도 똑같은 4관 편성으로 연주했었다.
당시 일본 및 한국 공연은 자비네 마이어 사건으로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관계가 파탄 직전까지 간 상황 직후였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오사카 공연에서는 돈 후안 시작 부분에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싸인이 맞지 않아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번스타인과 아바도가 한국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카라얀은 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엄청 욕먹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에 대해서도 카라얀은 매우 큰 홀이라면서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콘서트 후에는 한국 청중들이 매우 정숙하고 음악에 대한 집중이 뛰어났고 평했다. 나중에 반드시 한국에서 다시 공연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한공연 당시 카라얀의 부인인 엘리에트가 핸드백을 잃어버렸다가 한국의 음악팬에 의해 되찾았기도 했다. 훗날 엘리에트는 "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아쉽게도 (한국이 아니라) 그 몇 해 전에 인도 뭄바이에서 빈 필하모닉과 공연했을 당시 일어났던 일"이라고 부인했다.[100] 그러나 핸드백 사건은 당시 음악동아 등에 수록된 사실이다. 카라얀은 잃어버린 핸드백에 여권 등이 포함되어 있어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핸드백을 되찾게 되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카라얀은 감사의 표시로 핸드백을 찾아준 여성팬과 기념 사진을 찍었으며, 세미 정장 차림의 카라얀과 함께 찍은 이 기념사진은 당시 음악동아에 실렸다.[101] 카라얀은 나중에 지인들에게도 종종 한국에서 핸드백을 되찾은 얘기를 하면서 이는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조수미에게도 카라얀이 이 일화를 얘기했다고 조수미의 자서전 등에 나와 있다. 출처[102]
카라얀이 이처럼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내한공연 당시 그의 부인인 엘리에트 여사가 서울에서 잃어버린 핸드백을 되찾았던 사건도 작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카라얀이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서 매우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점, 반면 1979년 중국 북경에서 상식 이하의 소란스러운 분위기[103]에서 공연하면서 실망했던 점, 번스타인이나 아바도와 달리 한국이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기로 결정된 이후에 내한한 점, 금난새, 조수미 등 한국인 음악가들과 인연도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카라얀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방문 요청을 받기도 했는데, 카라얀은 "날 보려거든 직접 찾아와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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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방일 취소 및 1988년
1986년 베를린 필과 일본 도쿄에서 세 차례의 공연이 기획되었다. 이 중 두 차례 공연은 카라얀의 조언으로 설계, 완공된 산토리 홀의 개관 공연으로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카라얀의 건강이 악화되어 방일이 취소되고, 오자와 세이지가 대타로 베를린 필과 예정된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메타모르포젠,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7번이 연주되었다.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와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등은 녹화되어 베를린 필 디지털 콘서트홀 등에서 볼 수 있다.
1988년 4월 29일부터 5월 5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3회)와 오사카(2회)에서 공연했다. 당시 사민당이 새로 집권한 베를린시 당국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카라얀은 베를린시에서 주최한 베를린 필의 공연을 건강상의 이유로 취소했는데, 그 다음날 일본 공연을 떠났다. 때문에 베를린에서 카라얀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다. 카라얀의 최만년 공연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카라얀의 마지막 방일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표를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베토벤 교향곡 4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브람스 교향곡 제1번, 모차르트 교향곡 제39번,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등의 공연 실황이 DG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5. 나치이력 논란
5.1. 비판
한 때 모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나치 전과가지고 논쟁을 많이 벌이기도 했는데 사실 당시 독일출신의 거장급 지휘자들은 나치 전과가 다 있었으며 대부분 사면됐다.[104] 그러나 카라얀의 전과는 여러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것이 사실로, 전술한 것과 달리 '한 때'라고 언급한것과는 달리 국내 클래식 커뮤니티에서는 산발적으로 논란이 계속되고있다.대부분의 독일 거장 지휘자들은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치당에 가입해야만 했고, 이러한 현실은 지휘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예술가, 그리고 전 독일 국민들이 모두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단순히 나치당원 경력만으로 종신형 받고 그런 게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와 활동한 소프라노 크리스타 루트비히 여사는 '그는 단지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지휘하고 싶었을 뿐'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카라얀의 경우 히틀러 치세때만 해도 비교적 젊은 무명의 지휘자였을 뿐 만 아니라, 무엇보다 전범재판에서 "지휘자로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입했다"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안슐루스(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보다 한참 이전인 1933년에 이미 제 발로 직접 나치당에 입당한 기록이 밝혀졌다. 정확히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 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카라얀은 독일에서 나치당에 가입했고 이후 35년에 다시 한 번 가입했다. 나치에 두 번 가입한 사람이 나치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나치란 말인가?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역사학자 올리버 리스콜브는 카라얀의 친나치적인 언행을 추가로 공개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반 유대주의에 공감하는 편지나 학창시절 오스트리아 국수주의 단체인 '범 독일 청년 그룹' 소속 이력 등. 해당 기사 출세를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을 뿐 나치의 이념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에는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는 친나치적, 반유대주의적 발언이 너무 많다.
그리고 1935년 히틀러 생일 축하공연(바그너의 탄호이저)이나( 해당기사(독일어))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등을 지휘한 것 등 나치 부역 이력은 그 자신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잘못이고 과오이다.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부역했다기엔 지휘자들 이상으로 나치 부역을 거부하고 독일을 탈출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런 이력 때문에 1955년 미국 뉴욕에서 유대인 단체들이 비판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하기도 했고 이스라엘 공연 역시 불가능했다. 애초에 나치 부역 경력에 대한 비판은 애초에 경중, 자의 타의를 가리지 않고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악단 단위에서 까였고 이들 또한 한참동안 이스라엘 공연도 불가능할 정도였으니.
토마스 만[105]의 아들 클라우스 만[106]은 "이 추밀원 고문들과 나치당원들은 …자꾸만 재촉하면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활동하고 지휘하고 연출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 클레멘스 크라우스, 카라얀을 보라. 이런 자들에 의해 문화가 재건되느니 차라리 파편 속에 묻혀 있는 편이 낫다."라고 나치 부역 이력자들을 전부 비판하기도 했다. #
1981년 프랑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 등장하는 예술가들 중에서, 나치당원들 앞에 월광소나타를 연주하여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2차대전이 끝난 뒤 관객석이 텅 빈 무대에서 음악을 지휘하는 수모를 당하는 피아니스트 칼의 모티브가 되었다.
최근에는 1942년 독일 국방군과의 직접적 연관의 가능성과 친위대 보안국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다는 증거들이 추가적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증거들을 발견한 카라얀 연구자인 Riehle는 카라얀이 적극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추종자였지만 확신에 찬 나치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이로 인해 2023년 11월 아헨 극장에 설치된 흉상이 철거되어 인근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음악적 업적을 떠나서 그 시절 행적을 옹호하기엔 적극적 행적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어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나 나치를 절대악으로 치부하는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사회에서 카라얀이 앞으로 어떻게 재평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5.2. 옹호
그러나 그를 1930년대 초반에서 1940년대 중반 사이에 만났던 사람들은 카라얀이 나치가 아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많다. 크리스타 루트비히 같이 어릴 때부터 그를 보고 살았던 사람들이나 아헨 오페라 극장 합창 지휘자이면서 나중에 필하모니아 합창단 단장이 된 피츠 같은 경우나, 바이로이트의 많은 성악가들이 그는 정치적인(즉 음악계에서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한) 목적에서 나치에 가입했던 것이지, 나치의 사상에 동조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증언한다. 이러한 증언들은 실제로 나치의 사상에 적극 찬동한 음악가들의 증언들도 포함되어있다. 베를린 필의 악장을 역임했던 토마스 브란디스 같은 경우에는 친척 중 일부가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홀로코스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서 카라얀은 전혀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107].실제로 탈나치화 재판의 기록을 보면 당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카라얀이 외부에서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공연에서 나치와 관련된 곡을 연주한 적도 거의 없었다고 증언한다. 단 한번 연주했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는 시 행사에 포함되어있어 지휘해야 했지만, 재판관들 역시 카라얀이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그의 경력은 나치의 사상과 충돌하는 면도 많았다. 일례로, 그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아니타 귀터만은 유대인의 피가 섞인 혈통이었고, 위에서 나왔듯 히틀러는 카라얀에게 일종의 반감도 많았다. 심지어 스승과 아버지가 나치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낸 기록도 있다. 에른스트 폰 지멘스와 함께 몰래 멘델스존 음악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6. 디스코그래피
6.1. 정규녹음
카라얀은 생전에 약900여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도이치 그라모폰(데카)의 온라인 카탈로그에만 495개의 음반이 등록되어 있다. DG 이외에도 EMI, DECCA 등에서도 많은 녹음을 남겼다. 고클래식 디스코그래피에는 1353종의 녹음이 올라와있다.극초기, 즉 1930년대 ~ 1940년대에는 주로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DGG, 나중에 도이치 그라모폰으로 개칭)에서 녹음했다. 전속 계약한 오케스트라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악감독을 맡고 있던 베를린 국립 오페라(슈타츠카펠레 베를린)과 객원지휘를 했던 베를린 필,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 토리노 RAI 오케스트라 등과 녹음했다. 이 당시 녹음들은 음질이 좋지는 않지만 카라얀의 젊은 시절 파워를 엿볼 수 있는 음반들이기도 하다.
이후 1945년 활동 금지 조치로 인해 공개 콘서트를 할 수 없었던 카라얀에게 다가온 사람은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레그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본인이 창설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카라얀에게 주선했고, 4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긴 시기에 EMI에서 많은 녹음을 남기게 된다. 카라얀은 EMI에서 전권을 휘두를 수는 없었고 때문에 회사와 레그가 원하는 레퍼토리도 연주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훔퍼딩크의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이나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교향곡 등이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카라얀은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나중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50년대 중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DECCA와 전속 계약을 맺게 되었고, 이는 빈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명지휘자들[108]이 그랬듯이 카라얀도 데카에서 녹음을 남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데카에서는 카라얀의 주력 레퍼토리들, 모차르트와 베토벤, 브람스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이르는 독일권 음악과, 차이코프스키나 그리그, 드보르작 등의 음악, 베르디 오페라 등을 녹음하였다.
59년이 되면 DG와 카라얀이 다시 계약을 맺게 되는데 데카와의 계약이 빈 필하모닉과의 녹음을 위해서였다면 이 계약은 그가 상임지휘자로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녹음을 위해서였다. 따라서 카라얀은 그의 장기인 레퍼토리들을 스테레오로 다시 녹음하였고 카라얀의 명녹음 역시 60년대에 녹음된 것이 많다. 그러나 DG에서는 많은 명지휘자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라얀은 원하는 레퍼토리를 모두 녹음할 수 없었다. 가령 베토벤은 이미 60년대 초반에 그 자신이 녹음한 유명한 전집이 있었고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뵘이, 브루크너는 요훔이, 드보르작은 쿠벨릭, 차이코프스키는 므라빈스키가 이미 녹음한 상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카라얀은 다시 EMI와의 접촉을 재개하고, 새롭게 음악감독을 맡은 파리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녹음을 EMI에서도 시작하게 된다.[109]
이렇게 EMI에서는 카라얀과의 재계약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소련에서 연주허가를 받은 최고의 독주자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타르와 베를린필이 연주하는 베토벤의 삼중협주곡 녹음을 주선했고, 이 녹음과 후에 녹음한 브루크너, 모차르트 음반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DG에도 자극이 되게 된다. 결국 70년대의 녹음은 EMI와 DG가 나눠서 맡았는데 가령 동일 시기에 카라얀이 소규모 음악을 녹음한다고 하면 DG는 비발디의 '사계'를 녹음하고 EMI는 모차르트의 관악 협주곡을 녹음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으로 가면 오페라는 EMI, 관현악은 DG에서 녹음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DG에서 카라얀에게 거의 전권을 내주자 다시 DG에서만 녹음을 하는 것이 되었다.
80년대에 접어들어서 디지털 녹음 시대가 왔고, 카라얀은 이미 자기 마음대로 녹음할 수 있었으므로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브람스 등을 재녹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를린필과의 불화로 이 시기에는 다시 빈필과도 녹음을 진행하였고, 특히 베를린필의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난 후에는 더 그렇게 되었다.
카라얀은 많은 음반을 남겼고, 레퍼토리도 넓었던 만큼 무산된 녹음 계획도 많다.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는 40년대 지휘할 때 레그가 녹음을 권유하자 거절했고, 80년대의 재녹음 계획은 타계로 무산되었다. 벨리니의 오페라 ' 노르마'는 조수미를 위시한 수많은 소프라노들을 접할 때 이야기가 오갔지만 계약 해지, 포기[110] 등의 원인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베르디의 ' 라 트라비아타'는 칼라스와 크라우스 등과 녹음하려 했다가 EMI에서 재정 문제로 거절했다고 한다.
6.1.1. 1930년대
앨범명 | 오케스트라 | 녹음일 | 레이블 |
<colbgcolor=#fff,#1f2023> 모차르트, 베르디, 바그너, 케루비니: 서곡 | <colbgcolor=#fff,#1f2023>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 <colbgcolor=#fff,#1f2023> 1939 | <colbgcolor=#fff,#1f2023>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39 | DG |
6.1.2. 1940년대
앨범명 | 오케스트라 | 녹음일 | 레이블 |
<colbgcolor=#fff,#1f2023>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 스메타나: 블타바 | <colbgcolor=#fff,#1f2023>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colbgcolor=#fff,#1f2023> 1940 | <colbgcolor=#fff,#1f2023> DG |
베토벤: 교향곡 제7번 |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 1941 | DG |
모차르트: 교향곡 제35번 | 토리노 RAI 오케스트라 | 1942 | DG |
모차르트: 교향곡 제40번 | 토리노 RAI 오케스트라 | 1942 | DG |
모차르트: 교향곡제41번 '주피터' | 토리노 RAI 오케스트라 | 1942 | DG |
로시니, 베르디, 요한 슈트라우스: 서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토리노 RAI 오케스트라 | 1942 | DG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 1943 | DG |
베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베토벤: 서곡, 관현악곡 |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 1943 | DG |
베토벤: 교향곡 제8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6 | EMI |
모차르트: 3개의 독일 무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6 | EMI |
모차르트: 6개의 독일 무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6 | EMI |
모차르트: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6 | EMI |
모차르트: 오페라 아리아 모음집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6-1949 | EMI |
모차르트: 아다지오와 푸가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7 | EMI |
브람스: 독일 레퀴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7 | EMI |
모차르트: 프리메이슨 장송곡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7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7 | EMI |
모차르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7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7 | EMI |
스트라우스 왈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8 | EMI |
브람스: 교향곡 제2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9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5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9 | EMI |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9 | EMI |
차이코프스키: 로미오와 줄리엣, 교향곡 제6번 '비창'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9 | EMI |
발라키레프: 교향곡 제1번 & 러셀: 교향곡 제4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49 | EMI |
바그너: 오페라 아리아, 관현악곡 모음집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9 | EMI |
모차르트: 교향곡 제33번 & 클라리넷 협주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9 | EMI |
6.1.3. 1950년대
앨범명 | 오케스트라 | 녹음일 | 레이블 |
<colbgcolor=#fff,#1f2023> 바흐: B단조 미사 | <colbgcolor=#fff,#1f2023>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 <colbgcolor=#fff,#1f2023> 1950 | <colbgcolor=#fff,#1f2023> EMI |
피가로의 결혼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0 | EMI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21번[111] |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 1950 | EMI |
모차르트: 마술피리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0 | EMI |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 프랑크: 교향적 변주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1 | EMI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 & 제5번 '황제'[112]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1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 돈 후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1 | EMI |
헨델: 수상음악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2 | EMI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2 | EMI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2 | EMI |
스트라빈스키: 카드 놀이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2 | EMI |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교향곡 제5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2 | EMI |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2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2 | EMI |
베토벤: 서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훔퍼딩크: 헨젤과 그레텔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죽음과 변용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4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드뷔시: 바다 & 라벨: 스페인 랩소디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24번[113]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브리튼: 프랭크 브리지 테마에 의한 변주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본 윌리엄스: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4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1번 & 제2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모차르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114]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 | EMI |
월턴: 교향곡 제1번 | RAI 로마 신포니카 오케스트라 | 1953 | EMI |
코다이: 하리 야노스 간주곡 & 바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4 | EMI |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4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4 | EMI |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4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 5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4 | EMI |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집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3-1954 | EMI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6번 & 교향곡 제7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슈트라우스: 박쥐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 브람스: 교향곡 제2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8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모차르트: 교향곡 제35번 '하프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브람스: 교향곡 제4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모차르트: 교향곡 제35번 & 클라리넷 협주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모차르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베토벤: 교향곡 전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푸치니: 나비부인 |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무소로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4개의 마지막 노래[115]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6 | EMI |
베르디: 팔스타프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6 | EMI |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56 | EMI |
프로코피예프: 피터와 늑대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6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6 | EMI |
바그너: 오페라 서곡집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7 | EMI |
슈만: 교향곡 제4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7 | EMI |
레오폴트 모차르트: 장난감 교향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7 | EMI |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7 | EMI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5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7 | EMI |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7 | EMI |
힌데미트: 화가 마티스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7 | EMI |
오펜바흐: 유쾌한 파리인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 & 로마의 사육제 서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비제: 카르멘 모음곡 & 아를의 여인 모음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이탈리아 오페라 간주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1959 | EMI |
시벨리우스: 관현악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슈베르트: 교향곡 제5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스메타나: 나의 조국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모차르트: 교향곡 제38번 '프라하'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베토벤: 장엄미사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116]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8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G |
브람스: 헝가리 무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G |
베를리오즈: 서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9 | EMI |
베토벤: 교향곡 제7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ECCA |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G |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 스메타나: 몰다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7-1959 | EMI |
헨델: 수상음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EMI |
차이코프스키: 잠자는 숲속의 미녀 & 백조의 호수 모음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9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ECCA |
바르토크: 현과 타악기, 첼레스트를 위한 음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EMI |
하이든: 교향곡 제104번 '런던'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ECCA |
슈트라우스: 왈츠와 폴카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ECCA |
베토벤: 교향곡 제7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ECCA |
베르디: 아이다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5 | DECCA |
비제: 카르멘 모음곡 & 아를의 여인 모음곡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59 | EMI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ECCA |
모차르트: 독일 무곡 &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EMI |
6.1.4. 1960년대
앨범명 | 오케스트라 | 녹음일 | 레이블 |
<colbgcolor=#fff,#1f2023> 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5번 & 헝가리 민요에 기초한 환상곡 | <colbgcolor=#fff,#1f2023>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colbgcolor=#fff,#1f2023> 1960 | <colbgcolor=#fff,#1f2023> DG |
브람스: 교향곡 제3번 & 비극적 서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0 | DECCA |
모차르트: 교향곡 제40번 & 차이코프스키: 로미오와 줄리엣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0 | DECCA |
로시니: 서곡집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60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 & 죽음과 변용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0 | DECCA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2번 & 제5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1960 | EMI |
요한 슈트라우스: 박쥐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0 | DECCA |
리스트: 마제파 & 들리브: 코펠리아 & 쇼팽: 실피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 | DG |
모차르트: 교향곡 제41번 '주피터'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 | DECCA |
모차르트: 레퀴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 | DG |
베르디: 오텔로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 | DECCA |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 | DECCA |
홀스트: 행성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 | DECCA |
그리그: 페르귄트 모음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 | DECCA |
베토벤: 교향곡 전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1962 | DG |
드보르작: 교향곡 제8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 | DECCA |
아당: 지젤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1 | DECCA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117] |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62 | DG |
푸치니: 라 보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2 | DECCA |
푸치니: 토스카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2 | DECCA |
브람스: 교향곡 제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3 | DG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3 | DG |
브람스: 교향곡 제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3 | DG |
비제: 카르멘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3 | DECCA |
하이든: 교향곡 제103번 '큰북연타'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3 | DECCA |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3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브람스: 요제프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드뷔시: 바다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라벨: 다프니스와 클로에 &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118]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브람스: 독일 레퀴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바흐: 오케스트라 모음곡 제2번, 제3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브람스: 교향곡 제3번,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 바이올린 협주곡 & 타피올라 & 투오넬라의 백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DG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4번,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모차르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 디베르티멘토 15번 & 교향곡 제2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모차르트: 교향곡 제33번 & 디베르티멘토 17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모음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ECCA |
차이코프스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모음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ECCA |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5 | DG |
레온카발로: 팔리아치 |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5 | DG |
바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무소로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베토벤: 서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119]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키호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베토벤: 장엄미사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하이든: 천지창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1969 | DG |
라벨: 볼레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집[120]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0번, 11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바그너: 발퀴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차이코프스키: 현을 위한 세레나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 & 노예 행진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차이코프스키: 이탈리아 기상곡 & 로미오와 줄리엣 & 1812년 서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 인형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0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요한 슈트라우스: 관현악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121]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DG |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122]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 | DG |
시벨리우스: 슬픈 왈츠 & 리스트: 전주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 | DG |
림스키-코르사코프: 셰에라자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 | DG |
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 스메타나: 블타바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 | DG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6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 | DG |
헨델: 합주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1968 | DG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123]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 | DG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7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 | DG |
오페라 서곡, 간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 | DG |
바그너: 라인의 황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 | DG |
모차르트: 세레나데, 디베르티멘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 | DG |
로시니: 현을 위한 소나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 | DG |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124]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 | DG |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 | DG |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125] & 차이코프스키: 로코코 테마에 의한 변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 | DG |
슈베르트: 교향곡 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 | DG |
바그너: 지크프리트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 | DG |
베토벤: 에그몬트[126] & 웰링턴의 승리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베토벤: 서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현악 작품집: 레스피기, 보케리니, 알비노니, 파헬벨, 오네게르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베토벤: 대푸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 스트라빈스키: 바젤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보에 협주곡[127]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오네게르: 교향곡 제3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주페: 서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바르토크: 현악기, 타악기, 첼레스트를 위한 음악 & 스트라빈스키: 다장조 교향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바그너: 신들의 황혼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DG |
베토벤: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삼중협주곡[128]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EMI |
프랑크: 교향곡 | 파리 오케스트라 | 1969 | EMI |
6.1.5. 1970년대
앨범명 | 오케스트라 | 녹음일 | 레이블 |
<colbgcolor=#fff,#1f2023> 코렐리/만프레디니/토렐리/로카텔리: 크리스마스 협주곡 (1970) |
<colbgcolor=#fff,#1f2023>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colbgcolor=#fff,#1f2023> 1970 | <colbgcolor=#fff,#1f2023> DG |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 1970 | EMI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129] | 파리 오케스트라 | 1970 | EMI |
브루크너: 교향곡 제4번 '낭만적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EMI |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EMI |
비발디: 6개의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DG |
베토벤: 피델리오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EMI |
멘델스존: 핑갈의 동굴 서곡 & 교향곡 제 3번 '스코티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비제: 카르멘 모음곡 & 아를의 여인 모음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DG |
무소로그스키: 보리스 고두노프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DECCA |
로시니: 서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하이든: 교향곡 83번 & 101번 '시계' & 104번 '런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EMI |
모차르트: 교향곡 제35번 '하프너' & 교향곡 제36번 '린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EMI |
모차르트: 교향곡 제38번 '프라하' & 교향곡 제3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EMI |
모차르트: 교향곡 제40번 & 교향곡 제41번 '주피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EMI |
모차르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EMI |
라벨: 관현악곡 | 파리 오케스트라 | 1971 | EMI |
슈만: 교향곡 제 1번 '봄' & 교향곡 제 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슈만: 교향곡 제 2번 &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 E장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EMI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EMI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EMI |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모음곡 &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모음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오펜바흐: 명랑한 파리 여인 & 구노: <파우스트> - 발레 모음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보로딘/차이코프스키/베르디/폰치넬리: 오페라의 발레 음악들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그리그: 페르 귄트 모음곡 & 십자군 시구르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베버: 무도회의 권유 외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EMI |
유럽 국가 모음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DG |
모차르트: 관악 협주곡[130]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1972 | EMI |
베르디: 메사 다 레퀴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DG |
하이든: 사계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EMI |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131]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DG |
프랑크: 교향적 변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EMI |
베버: 서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 살로메 & 돈 후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DG |
바흐: 마태 수난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1972 | DG |
레하르: 유쾌한 미망인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DG |
유럽 국가 모음집, 유럽 찬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DG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EMI |
비발디: 조화의 영감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DG |
스트라빈스키: 아폴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DG |
멘델스존: 교향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1973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죽음과 변용 & 네 개의 마지막 노래[132]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1973 | DG |
베르크: 세개의 오케스트라 작품 & 서정모음곡 중 세개의 소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1973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 | DG |
말러: 교향곡 제 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 | DG |
말러: 대지의 노래[133]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 | DG |
오르프: 시간의 종말에 관한 극 | 쾰른 방송 교향악단 | 1973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정 교향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EMI |
슈만: 교향곡 제 3번 '라인'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 | DG |
쇤베르크: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DG |
베베른: 파사칼리아 & 다섯개의 악장 & 오케스트라를 위한 여섯 작품 & 교향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 | DG |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행진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 | DG |
베르디: 오텔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 | EMI |
바흐: B단조 미사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1974 | DG |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DG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134]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EMI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135]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EMI |
바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EMI |
트럼펫 협주곡집[136]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EMI |
말러: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 뤼케르트 가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DG |
푸치니: 나비부인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DECCA |
브루크너: 교향곡 제 8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베르디: 서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키호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EMI |
말러: 교향곡 제 6번 '비극적'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1977 | DG |
쇤베르크: 정화된 밤 &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1974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4번 '낭만적'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137]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4번, 5번 & 교향시 2번 '타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와 폴카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EMI |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미완성'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EMI |
모차르트: 대관식 미사 & 브루크너: 테 데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모차르트: 레퀴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DG |
브람스: 하이든 '성 안토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EMI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EMI |
브람스: 독일 레퀴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EMI |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EMI |
바그너: 지크프리트 목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DG |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EMI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DG |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바흐: 마니피카트 & 스트라빈스키: 시편 교향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1979 | DG |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 제5번[138]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 | DG |
드뷔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 | EMI |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 로마의 분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1978 | DG |
베토벤: 교향곡 전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1977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DG |
스메타나: 몰다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EMI |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EMI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 피아노 협주곡 2번[139]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EMI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140]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EMI |
브람스: 교향곡 전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1978 | DG |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 | DECCA |
베르디: 돈 카를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 | EMI |
모차르트: 교향곡 제35번, 제32번, 제36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1977 | DG |
모차르트: 교향곡 제36번 '프라하', 제 3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1977 | DG |
모차르트: 교향곡 제40번, 제41번 '주피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DG |
드뷔시: 바다 & 목신의 오후 전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EMI |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EMI |
슈베르트: 교향곡 제1번 & 교향곡 제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1978 | EMI |
슈베르트: 로자문데 서곡 & 교향곡 제5번 & 교향곡 제6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1978 | EMI |
슈베르트: 교향곡 제3번 & 교향곡 제4번 & 로자문데 발레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1978 | EMI |
말러: 교향곡 제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 | DG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도쿄 보문관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 | DG |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 | DG |
베토벤: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삼중협주곡[141]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 & 교향곡 제2번 ' 소러시아 / 우크라이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1979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3번 '폴란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1979 | DG |
비제: 아를의 여인 모음곡 제2번 & 구노: 파우스트 발레 음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1979 | EMI |
브루크너: 교향곡 제6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 | DG |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1979 | DG |
말러: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 | DG |
드보르작: 교향곡 제8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 | EMI |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 | EMI |
6.1.6. 1980년대
앨범명 | 오케스트라 | 녹음일 | 레이블 |
<colbgcolor=#fff,#1f2023> 모차르트: 마술피리 | <colbgcolor=#fff,#1f2023>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colbgcolor=#fff,#1f2023> 1980 | <colbgcolor=#fff,#1f2023> DG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EMI |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1번 & 교향곡 제6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EMI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팔스타프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오펜바흐: 오페라 서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와 폴카, 서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하이든: 교향곡 82번 '곰' & 교향곡 87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하이든: 교향곡 81번 & 교향곡 85번 '여왕'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하이든: 교향곡 83번 '암탉' & 교향곡 86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3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현을 위한 세레나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142]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 | DG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0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오페라 서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EMI |
푸치니: 투란도트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닐센: 교향곡 제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모차르트: 대미사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1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홀스트: 행성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모차르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제1번 '고전적' & 그리그: 홀베르크의 시간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생상스: 교향곡 제3번 '오르간'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슈만: 피아노 협주곡 &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143]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하이든: 교향곡 93번 & 교향곡 94번 '놀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1982 | DG |
하이든: 교향곡 95번 & 교향곡 96번 '기적'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 | DG |
하이든: 교향곡 97번 & 교향곡 98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 | DG |
하이든: 교향곡 99번 & 교향곡 100번 '군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 | DG |
하이든: 교향곡 101번 '시계' & 교향곡 10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DG |
하이든: 교향곡 103번 '큰북 연타' & 교향곡 104번 '런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1982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죽음과 변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 | DG |
하이든: 천지창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 | DG |
그리그: 페르 귄트 & 시벨리우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 | DG |
베토벤: 교향곡 제5번 & 교향곡 제6번 '전원'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 | DG |
말러: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 | DG |
차이코프스키: 로미오와 줄리엣 &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 | DG |
베토벤: 교향곡 제4번 & 제7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 | DG |
스메타나, 리스트, 베버: 관현악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s | DG |
브람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협주곡 & 비극적 서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 | DG |
브람스: 교향곡 제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 | DG |
비제: 카르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돈 후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 | DG |
브람스: 독일 레퀴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 | DG |
브루크너: 테 데움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 | DG |
현악합주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 | DG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비제: 아를의 여인 모음곡 & 카르멘 모음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바그너: 관현악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 투오넬라의 백조 & 슬픈 왈츠 & 타피올라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베토벤: 교향곡 제1번 & 교향곡 제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비발디: 사계[144]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EMI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베르디: 메사 다 레퀴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DG |
드뷔시: 바다 & 목신의 오후 전주곡
& 라벨: 다프니스와 클로에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DG |
베토벤: 서곡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DG |
돈 조반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DG |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 스메타나: 몰다우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DG |
슈만: 교향곡 제4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DG |
모차르트: 대관식 미사 - 바티칸 실황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4개의 마지막 노래[145] & 카프리치오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DG |
베토벤: 장엄미사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DG |
라벨: 볼레로 & 스페인 랩소디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6 | DG |
무소로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6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키호테 &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6 | DG |
모차르트: 레퀴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6[146] | DG |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7번 & 세레나타 노투르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6 | DG |
브람스: 요제프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6 | DG |
바그너: 지크프리트 목가, 오페라 발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 | DG |
1987년 빈 신년음악회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 | DG |
모차르트: 교향곡 제29번 & 제 3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 | DG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 | DG |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 | DG |
드보르작: 교향곡 제8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 | DG |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147]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8 | DG |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148]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8 | DG |
브람스: 교향곡 제3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8 | DG |
브람스: 교향곡 제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8 | DG |
베르디: 가면무도회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9 | DG |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9[149] | DG |
6.2. 해적판, 라디오 녹음
카라얀은 많은 공연 수에 비례하는 많은 실황 녹음들이 존재하는데[150] 상당수는 라디오에서 방송된 자료를 리마스터링한 것이고 일부는 관객이 몰래 녹음한 것도 섞여있다. 빈과 잘츠부르크, 도쿄에서 했던 실황 공연들은 라디오를 통해 녹음되었다.앨범명 | 오케스트라 | 녹음일 | 레이블 |
<colbgcolor=#fff,#1f2023> 베르디: 메사 다 레퀴엠 | <colbgcolor=#fff,#1f2023>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colbgcolor=#fff,#1f2023> 1949 | <colbgcolor=#fff,#1f2023> AUDITE |
요제프 스트라우스: 천체의 음악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49 | DG |
바흐: 마태 수난곡 |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50 | ARCHIPEL |
바그너: 지크프리트 |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 1951 | WALHALL |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 1951 | DG |
바그너: 라인의 황금 |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 1951 | WALHALL |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 1952 | ORFEO |
브람스: 교향곡 제2번 | 로마 RAI 오케스트라 | 1953 | TAHRA |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3[151] | AUDITE |
모차르트: 교향곡 제41번 '주피터' | 토리노 RAI 오케스트라 | 1954 | TAHRA |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제2번 | 토리노 RAI 오케스트라 | 1954 | TAHRA |
바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제3번 | 토리노 RAI 오케스트라 | 1954 | TAHRA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토리노 RAI 오케스트라 | 1954 | TAHRA |
도니제티: 람메르모르의 루치아 | 베를린 RIAS 오케스트라 | 1955 | EMI |
모차르트: 교향곡 제41번 '주피터' & 피아노 협주곡 20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6 | AUDITE |
베토벤: 교향곡 제7번 & 힌데미트: 화가 마티스 |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57 | ORFEO |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7 | ANDANTE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7[152] | AUDITE |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7 | ORFEO |
모차르트: 교향곡 제35번 '하프너' & 교향곡 제41번 '주피터 & 피아노 협주곡 21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7 | DG |
베르거: 포물선형의 교향곡 & 폰 아이넴: 피아노 협주곡 & 오네게르: 교향곡 제3번 '전례풍'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7 | DG |
베르디: 메사 다 레퀴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8 | EMI |
베르디: 돈 카를로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8 | DG |
글루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0 | DG |
피체티: 성당에서의 살인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0 | DG |
슈트라우스: 박쥐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0 | RCA |
브루크너: 테 데움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0 | DG |
바그너: 파르지팔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1 | RCA |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2 | DG |
베토벤: 피델리오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2 | DG |
베르디: 메사 다 레퀴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2 | TESTAMENT |
바그너: 탄호이저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3 | DG |
몬테베르디: 포페아의 대관식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3 | DG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53] | 1963 | BERLINER PHILHARMONIKER |
푸치니: 라 보엠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3 | RCA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그림자 없는 여인 |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4 | DG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엘렉트라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ORFEO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4 | ANDANTE |
하이든: 천지창조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5 | DG |
베토벤: 교향곡 제1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ANDANTE |
베토벤: 교향곡 전집 도쿄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KING RECORD |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미완성’ & 브람스: 교향곡 제2번 도쿄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KING RECORD |
슈트라우스: 돈 후안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도쿄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 | KING RECORD |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미완성' & 슈트라우스: 왈츠, 폴카, 서곡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 | DG |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미완성'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 | ANDANTE |
모스크바의 카라얀: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 &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MELODIYA |
브루크너: 교향곡 제5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9 | ANDANTE |
모차르트: 돈 조반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ORFEO |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 교향곡 제6번 ‘전원’[154]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라디오 녹음 |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ORF & INA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비엔나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라디오 녹음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155]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0 | ORF & INA |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 | 라디오 녹음 |
브루크너: 테 데움 & 모차르트: 대관식 미사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 | ANDANTE |
슈만: 교향곡 제4번 & 바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 1972 | DG |
베토벤: 교향곡 제5번’운명’ & 6번’전원’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156] | NHK-FM |
드보르작: 교향곡 제8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157] | 라디오 녹음 |
말러: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158] | FKM |
드보르작: 교향곡 제8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ANDANTE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159]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World Music |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서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라디오 녹음 |
브람스: 교향곡 제2번 파리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 | 라디오 녹음 |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DG |
베토벤: 교향곡 제9번’합창’ 잘츠부르크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라디오 녹음 |
베토벤: 교향곡 제9번’합창’ 뉴욕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6 | 라디오 녹음 |
베토벤: 교향곡 전곡 도쿄 보문관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도쿄 FM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 | 라디오 녹음 |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 | ANDANTE |
말러: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160] | 라디오 녹음 |
하이든: 교향곡 제104번 '런던'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 | ANDANTE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0[161] | World Music |
베버: 마탄의 사수 서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라디오 녹음 |
바흐: 브란덴부르크 콘서토 제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162] | World Music |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163] | 라디오 녹음 |
차에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164] | 라디오 녹음 |
베토벤:교향곡 제9번’합창’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165] | 라디오 녹음 |
브람스:교향곡 전곡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 | 라디오 녹음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World Music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라디오 녹음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잘츠부르크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ORF & INA |
브람스: 교향곡 제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 | 라디오 녹음 |
모차르트: 교향곡 제41번 ‘주피터’ & 슈만: 교향곡 제4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 | KURIER |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 | 라디오 녹음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8[166] | DG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 쇤베르크: 정화된 밤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8[167] | Testament[168] |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8[169] | 라디오 녹음 |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9[170] | 테이프 녹음[171] |
6.3. 영상
카라얀은 비디오 레코딩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 계기는 위에서도 나오듯이 1957년에 베를린필을 이끌고 일본 투어에 갔을 때 전 공연이 실황중계되는 것을 본 이후였다. 이 1957년 공연과 빈필과의 1959년 일본 콘서트는 일부가 녹화되어 DVD로 발매되었다. 그 이후로 카라얀은 프랑스의 영화감독 앙리 조르주 클루조와 협업하여 다양한 영상을 촬영하였는데, 이는 클래식 영상화에 관심이 높았던 클루조와 카라얀의 뜻이 일치했던 것으로, 그들은 스튜디오에서 흑백으로 영상을 촬영했다.이후 베르디의 레퀴엠과 비제의 카르멘을 영화로 촬영한 후, 카라얀은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시작으로 관현악곡을 영상화하기 시작한다. 베토벤 교향곡 6번을 촬영할 때는 휴고 니벨링과 작업했는데, 니벨링은 전원 교향곡의 악보를 보면서 카메라를 잡았고, 당대에 보면 엄청난 특수효과, 좌석 밑에 수많은 조명 장치를 설치해 악상에 따라 다른 조명이 나오고, 악상에 따라 카메라가 움직이고, 때로는 지휘자의 시각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어떤 때는 전 화면을 음영처리하는 등의 촬영을 하였다. 그러나 카라얀은 니벨링의 음악을 영상화하려는 시도를 별로 좋은 것으로 보지 않았고, 카메라워크가 난잡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니벨링은 3번을 촬영한 후 강판당했고, 3번은 다른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카라얀이 따로 편집했다[172]. 이후의 다른 작품들은 카라얀 본인이 감독하거나 한스 요아힘 숄츠, 아르네 아른봄 등이 번갈아가며 촬영하였다.
한편 카라얀은 명영화감독인 클루조에게 촬영 기술을 이미 배웠고, 이후로 그는 대부분의 영상을 스스로 감독했다. 이는 연주는 악보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악보에 카메라를 미리 지정해놓는 것으로 가능했다. 또한 카라얀은 청소년 오케스트라나 리허설로 촬영 연습을 하였다. 그러나 1977년 베를린 송년음악회는 생중계되었고, 따라서 이 분야의 대가인 험프리 버튼이 촬영하였다.
카라얀은 영상을 통해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공연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영상에 대한 소감을 전해들었을 때 구체화되었다. 카라얀은 이후 최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는 소니에 영상물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니 창립자인 아키오 모리타와 소니 사장인 오가 노리오와의 관계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소니에서는 카라얀의 영상을 'His legacy for home video'라는 타이틀로 내놓고 있다. 카라얀의 생각은 오늘날 그가 내놓은 수십 종의 영상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디지털 콘서트홀로 실현되었다.
앨범명 | 오케스트라 | 녹음일 | 레이블 | 감독 |
<colbgcolor=#fff,#1f2023> 1957년 일본 실황 | <colbgcolor=#fff,#1f2023>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colbgcolor=#fff,#1f2023> 1957.11.03 | <colbgcolor=#fff,#1f2023> NHK | <colbgcolor=#fff,#1f2023> 츠지모토 키요우시 |
1959년 일본 실황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59.11.06 | NHK | 츠지모토 키요우시 |
푸치니: 라 보엠 |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5 | DG | 프랑코 제피렐리 |
슈만: 교향곡 제4번 |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65.11 | EUROARTS | 앙리 조르주 클루조 |
베토벤: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01 | EUROARTS | 앙리 조르주 클루조 |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 |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66.01 | EUROARTS | 앙리 조르주 클루조 |
드보르자크: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6.02 | EUROARTS | 앙리 조르주 클루조 |
베르디: 메사 다 레퀴엠 |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7.01 | DG | 앙리 조르주 클루조 |
비제: 카르멘[173]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06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토벤: 교향곡 제6번[174]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7.10 | DG | 휴고 니벨링 |
베토벤: 교향곡 제9번[175]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68.02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레온카발로: 팔리아치 /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 1968.05.25. - 06.02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 파리 오케스트라 | 1970.06.25 | EMI | 로저 베나모 |
베토벤: 교향곡 제3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10 | DG | 휴고 니벨링[176],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토벤: 교향곡 제7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10[177]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토벤: 교향곡 제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11 | DG | 한스 요아힘 숄츠 |
베토벤: 교향곡 제8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11 | DG | 한스 요아힘 숄츠 |
베토벤: 교향곡 제1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12 | DG | 아르네 아른봄 |
베토벤: 교향곡 제4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1.12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토벤: 교향곡 제5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02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바그너: 라인의 황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브람스: 교향곡 전집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 | DG | 에른스트 와일드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178]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09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 5번, 6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3.12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푸치니: 나비부인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4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콘서트에서의 카라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5.01.21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브람스: 교향곡 제1번 오사카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11.09 | 실황중계화면 | 불명 |
1977 베를린 송년음악회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7.12.31 | EUROARTS | 험프리 버튼 |
브람스: 독일 레퀴엠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03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드뷔시 : 바다,목신 오후에 전주곡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02 | DG | 에른스트 와일드 |
라벨 :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2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02 | DG | 에른스트 와일드 |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 테 데움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05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1978 베를린 송년음악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8.12.31 | DG | 에른스트 와일드 |
베토벤: 장엄미사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04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9.06 | DG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르디: 팔스타프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10.28 | 방송중계 | 미상 |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1.10.29 | 방송중계 | 미상 |
베를린 필하모닉 100주년 기념 공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04.30 | SONY | 험프리 버튼 |
베토벤: 교향곡 제1~8번[179]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2~1984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1983 베를린 송년음악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3.12.31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R.스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180]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02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1984 위령의 날 실황[181]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11.25 | SONY | 험프리 버튼 |
1984 일본투어 오사카 실황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10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1984 베를린 송년 음악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4.12.31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브람스: 독일 레퀴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05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축일 미사[182]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06.29 | SONY[183] | 험프리 버튼 |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11.24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1985 베를린 송년음악회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5.12.31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르디: 돈 카를로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6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모차르트: 레퀴엠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6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토벤: 교향곡 제9번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6.09[184]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1987 빈 신년음악회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01.01 | SONY[185]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베를린시 창립 750주년 기념 공연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7.05.01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에른스트 와일드 |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8 | SONY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7. 카라얀의 키
항상 논란이 되었던 카라얀의 키. 대부분의 국내언론들은 카라얀이 키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졌다고 말했다.그런데 누가 카라얀의 키를 정리 했다. 카라얀의 키 논란이 정리된 글
여기서 작성자는 카라얀의 키를 번스타인, 카를 뵘, 마리아 칼라스 등의 사람들과 찍힌 사진을 제시하며 말했다.
- 칼라스의 키는 173으로 알려졌다. 카라얀과 칼라스 둘 다 구두를 신었다 가정하면 둘의 키는 비슷하다.
- 레너드 번스타인의 키는 170 정도인데 카라얀이 조금 더 커 보인다.
- 카를 뵘은 키가 177정도로 알려졌는데 카라얀과 키가 비슷하다.
- 존 바비롤리는 160 정도로 알려졌는데 카라얀과 키 차이가 상당하다.
라는 근거 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한예종 교수인 카라얀 전문가 홍승찬 교수가 키 컴플렉스 부분을 강조 했다. 홍승찬 교수는 한 매체에서 카라얀이 키에 대한 컴플렉스로 허리 위로는 찍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카라얀의 영상물들을 모두 잘 찾아보면 전신 영상물이 간간히 보이는 편이다. 1971년에 촬영된 베토벤 교향곡 3,7번이나 1973년의 오사카 리허설 장면, 1977년 송년음악회 등이 그들이다. 1981년 오사카 실황 영상에서도 전신 영상물이 있다. 애초에 키가 작은 것을 문제 삼고 컴플렉스로 생각한다면 카라얀과 키가 비슷하거나 조금 작다고 알려진 레너드 번스타인 또한 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카라얀이 자신의 전임인 푸르트뱅글러나 후임인 아바도에 비해 키가 작고 또 친하게 지냈던 지휘자들인 카를로스 클라이버나 쿠르트 마주어 등에 비해 키가 상대적으로 작은 건 사실이다.
외국의 언론이나 카라얀과 관련된 사람, 또 카라얀의 다큐멘터리나 그의 전기에서는 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특히나 카라얀의 전기를 쓰며 그를 여러번 만난 리처드 오스본 역시 카라얀의 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일단 국내에 대한 소문은 카라얀의 내한공연을 들 수 있다. 카라얀이 1984년 내한당시 그는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는데 당시 공연을 보고 온 여러 사람들이 카라얀이 지휘대에 몸을 기울여 기대고 지휘했다는 증언했다. 이로 인해 당시 카라얀의 내한당시 키가 160정도로 보이더라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인도 어디에 기대어 똑바로 서지 않으면 자신의 실제 키 보다 작아보이는게 사실이다. 다만 만년에 나이도 든데다 척추질환으로 수술을 몇 차례 받을 정도로 크게 고생했기 때문에 키가 꽤 줄었을 가능성은 있다.
한 구두 장인은 카라얀이 13cm의 키높이 구두를 항상 주문해 신었다고 주장했는데 근거가 부족해 묻혀버렸다.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권에 카라얀의 키가 173cm 라고 기재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카라얀의 키 논란은 사실상 종결된 상태.
8. 여담
- 카라얀은 자신 주변의 동료 지휘자, 성악가, 연주자를 포함한 모든 음악가들을 립서비스인지 진심이지는 알 수 없지만 칭찬을 많이 했다. 특히나 조수미와의 일화 때문에 일부 카라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조수미를 띄우기 위해 카라얀이 칭찬에 인색한 독설가라고 와전을 퍼트렸다. 정말 예외가 있다면 에리히 클라이버나 비르기트 닐손 정도. 그 이외에 수많은 음악가들에 대해 개인적 관계가 좋건 나쁘건 간에 상당히 우호적인 발언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186]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카라얀 자신은 푸르트벵글러를 음악적으로 대단히 존경했지만, 정작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매우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카라얀이 지휘자로 성공하지 못하도록 오케스트라에 압력을 넣어 방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카라얀 본인도 푸르트벵글러와 사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굳이 그와 친해지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평생 푸르트벵글러의 대한 존경과 찬사의 발언은 수도 없이 했지만 단 한번도 푸르트벵글러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다. 개인사 측면에서 앙금이 상당히 많지만 이에 대해서 한번도 언급하거나 불평한 적도 없으며, 심지어 사적인 자리에서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가 자신을 박해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 보다 의외로 어차피 푸르트벵글러 이후 언젠가는 자신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담담하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 푸르트벵글러와 더불어 카라얀이 존경한다고 마르고 닳도록 말했던 지휘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다. 월터 레그의 증언에 따르면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의 음반을 시도때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도 나와 있듯이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은 카라얀이 20대 시절에 토스카니니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지휘하러 카라얀의 마을에 찾아오자 카라얀은 그의 리허설을 몰래 보기 위해서 리허설을 하는 오케스트라 홀의 오르간 뒤에 숨어서 그를 봤는데, 토스카니니가 오케스트라가 말을 듣지 않아 문을 박차고 나가려고 하니 모든 문이 잠겨 있어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가리던 그 장면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창단 된 이후 토스카니니가 관심을 보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러 유럽으로 건너온 일이 있는데 카라얀은 그 때 토스카니니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알기에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단원들에게 조심해 달라고 당부까지 했을 정도였다.
- 토스카니니의 라이벌이라고 종종 회자되는 빌렘 멩겔베르크의 경우 1930년대에 울름 극장을 찾아와 지휘한 적이 있는데 카라얀은 그의 엄격한 지휘를 보고 놀랐다고 회고하며 뜻 깊은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 동시대의 지휘자들 중 카라얀과 경쟁 관계에 있던 조지 셀,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카를 뵘, 오이겐 요훔등을 자주 칭찬했고, 실제로도 특히 조지 셀과 므라빈스키의 음악적 스타일을 상당히 좋아하고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므라빈스키에게는 "구시대의 대변인"[187]이라고 했을 정도. 카라얀이 1969년에 모스크바 공연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동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리허설을 몰래 볼 기회가 생겼다고 한다. 당시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쇼스타코비치의 6번 교향곡을 리허설 중이었다. 카라얀은 리허설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나름 웅장한 사운드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자신과 베를린 필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오케스트라의 음향과 사운드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카라얀은 리허설이 끝나자 므라빈스키를 개인적으로 만나려고 했지만 소련 당국 관계자들이 시간이 없다며 만남을 방해해 만나지 못했고, 그를 매우 아쉬워했다. 사망 몇년 전 카라얀은 리처드 오스본과의 인터뷰에서 므라빈스키가 쇼스타코비치 해석에 있어서는 월등하기 때문에 10번 교향곡 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밝혔다.
- 카라얀은 조지 셀을 음악적 스타일을 매우 좋아했고 개인적으로도 그와 가깝게 지내려 노력했다. 조지 셀은 아마도 동시대 지휘자들 중에서 카라얀과 사적으로 가장 교류가 활발했던 지휘자라 할 수 있다. 카라얀은 조지 셀에 대해서 매력이 있고 지적인 남자라고 코멘트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조지 셀을 자신이 음악 감독으로 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초청했고 또 미국에 눌러 앉은 조지 셀이 유럽에서 베를린 필이나 체코 필 등과 객원 공연하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 또 60년대 이후 카라얀은 베를린 필과 빈 필, 그리고 65년까지 밀라노 스칼라좌를 제외한 다른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대부분 모두 거절했지만, 1967년 예외적으로 조지 셀이 이끌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해 당시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과 셀이 길거리에 격의없이 긴 대화를 나누는 사진들이 여럿 남아있기도 하다. 다만 카라얀이 셀을 높이 평가하고 좋아한 데 반해 조지 셀은 카라얀의 스타일을 전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칼 뵘과는 매우 친해 서로 덕담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최소한 1950년대 부터 관계를 맺었던 것 같다. 이후 카라얀이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를 만들 때 카를 뵘이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고 이들의 관계를 반증이라도 하듯 1950년대 후반 ~ 1960년대까지 뵘은 베를린 필과 많은 녹음을 남긴 객원지휘자 중 한 명이었다. 먼저 뵘이 카라얀의 70세 기념을 축하하고 카라얀이 뵘의 85세 생일기념회에서 찬조연설을 한 뒤 선물을 주었다. 뵘은 카라얀에게 아들인 칼 하인츠 뵘(1928~2015)가 베토벤을 연기하더니 집에서도 귀가 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카라얀은 서슴없이 이 이야기를 주변에 퍼트리기도 했다. 이후 카라얀은 1981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하려고 준비한 칼 뵘이 급서하자 그를 위해 추모 곡을 지휘했고 추모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니스트이자 클래식 연구가인 안인모씨는 뵘이 카라얀을 상당히 거슬리게 했다는 잘못 된 주장을 하였는데 아마 정보를 잘 모르는 상태였거나 두 사람 사이를 라이벌화[188] 시키려 했던 일본의 영향을 받은 듯 하다.
- 오이겐 요훔은 비록 푸르트뱅글러 사후에 베를린 필을 놓고 경쟁한 경쟁자였지만[189] 카라얀은 베를린 필에 요훔을 자주 초청하거나 또는 요훔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베를린 필하모니에 자주 초청했다. 한 번은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리허설 중이던 요훔에게 카라얀이 홀의 음향이 어떠냐고 조언을 구했는데 "홀이 넓어서 녹음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라는 조언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고. 실제로 개관 당시의 베를린 필하모니 홀은 녹음에 부적격하다는 의견이 여럿 있었다. 카라얀도 그걸 알고 있었고 동료 선배의 조언에 따라 1960년대 대부분을 베를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녹음했다.
- 쿠르트 마주어에 대해서도 여러 측면에서 칭찬했다. 마주어는 그 자신이 키운 유능한 음악가가 200명이 넘는다며 그를 뛰어난 음악가이자 열성가라고 말했다.
- 독설가 이미지로 잘못 알려지던 때에,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 레너드 번스타인, 세르주 첼리비다케, 카를로스 클라이버 등을 시기해서 이들이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것을 막았다는 루머가 상당히 유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사실이거나, 과장된 부분이 많다.
- 번스타인의 경우 1979년 베를린 필을 단 한 차례 지휘(말러 교향곡 9번)했다. 번스타인이 79년 이전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후에도 베를린 필과 공연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 카라얀의 방해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차이가 있다. 여러 증언으로 볼 때 79년 공연 당시 리허설 때 상당히 복잡한 기류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 리허설하러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강한 존재감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우선 담배를 물고 지휘대에 앉아 리허설을 시작하는 모습에 일부 단원들이 불편한 감정을 느낀 모양이다. 이후 리허설 때 일부 단원들과 번스타인 사이에 의견 대립이 일어난 모양이고, 번스타인은 이에 대해 상당히 무례하다고 느꼈고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번스타인은 연주회 직후 공개적인 인터뷰 자리에서 베를린 필이 말러를 잘 연주하지 못한다고 깠고, 말년까지도 사적인 자리에서 베를린 필 단원들이 버릇이 없다고 말했다는 후문이 있다. 이처럼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과 연주하지 않은 것은 번스타인 본인이 이를 원하지 않은 탓이 큰 것으로 보여진다. 79년 연주 때 일부 단원들이 번스타인과 마찰을 빚었지만 다른 단원들은 번스타인의 카리스마와 음악성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를 재초빙하길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번스타인의 거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번스타인과 카라얀은 표면적으로는 만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번스타인과 카라얀이 실제로 서로를 좋아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졌던 관계였던 것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번스타인은 자기 비서에게 사적인 자리에서 카라얀을 까기도 한 모양이다. 번스타인 쪽에서 카라얀을 불편하게 여겼던 일화는 꽤 유명한데, 위에서 언급된 번스타인과 베를린 필의 1979년 지휘와 관련이 있다. 1979년에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과 말러 9번 연주를 마치고 그의 악보를 몇달간 돌려 받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번스타인은 이 기간 동안 카라얀이 자신의 악보에 적어 둔 해석을 참고했다고 확신했고, 주변인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이 얘기를 꺼내며 카라얀을 비난을 하기도 했다.[190] 그래도 어쨌거나 둘은 만나면 그래도 서로 덕담과 농담을 주고 받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 첼리비다케가 1954년 이후 1992년까지 베를린 필을 지휘하지 않은 것은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 양자의 관계 때문이다.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은 1954년말 리허설 때 첼리비다케가 단원들을 전부 짜르고 물갈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크게 언쟁을 벌인 후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1992년 복귀 연주회는 독일 대통령의 세 차례에 걸친 요청 때문에 거의 마지못해 이루어진 공연이며 이후에도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은 다시 연주하지 않았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지 못한 것은 클라이버가 요구했던 출연료가 카라얀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베를린 필 매너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사적으로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카라얀은 친분이 깊은 사이였다.[191] 카라얀은 클라이버에 대해 "냉장고에 음식이 비어야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반은 농담, 반은 칭찬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192] 라파엘 쿠벨릭이나 오이겐 요훔, 조지 셀, 카를 뵘, 루돌프 켐페, 존 바비롤리,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193] 등은 카라얀의 재직 시에도 베를린 필과 연주를 하거나 음반 녹음도 하였는데 카라얀은 이들과 음악적 교류를 하며 음악적 조언을 서로 주고받기도 했고 사적인 이야기도 주로 했다고 전해진다.
- 이외에도 후배 지휘자들에게도 좋은 말을 많이 남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는데, 카를로스 클라이버,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194], 오자와 세이지, 세묜 비쉬코프 등이 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에 대해서는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의 지배를 벗어나지는 못햇지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클라이버가 카라얀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카라얀과 클라이버는 때때로 직접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하는 사이였다. 도흐나니는 카라얀의 제자이기도 하여 카라얀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오자와 역시 카라얀의 제자에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며 개인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오자와는 처음에는 제자에 가까웠지만 나중에 오자와가 성장할수록 음악적인 동반자로 대했다.
- 성악가, 협연자를 보면 비르기트 닐손을 제외하면 모두다 극찬했는데 미렐라 프레니, 레온틴 프라이스는 물론 쓰리 테너와 기타 자신과 활동한 성악가나 협주곡에서 활동한 독주자나 자신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도 칭찬했다. 베를린 필에서 호른주자로 활동한 게르트 자이페르트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상형적인 음악가로 세계 최고의 호른 연주가 라고도 했다. 전체적으로 모든 음악가들에 대해서 거의 호평 한 셈. 이리 되면 푸르트벵글러와 스토코프스키를 제외한 다른 음악가들을 대부분 혹평한 첼리비다케와는 완전히 반대인 셈.
- 비르기트 닐손(1918~2005)과는 사이가 안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우선은 음악적 스타일 부분에서 앞서 흔히 화통에 비유되는 그녀의 강력하지만 감성이 결여되어 있는 목소리가 카라얀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소프라노상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카라얀은 바그너에서도 섬세한 표현을 중시했고 그래서 헬가 데르네슈와 같은 미성을 가진 소프라노를 음반 녹음에 자주 기용했다.
물론 닐손은 60년대의 대체불가한 바그너 소프라노였고, 전시대를 통틀어도 단연 탑클래스에 속하는 바그너 소프라노였기 때문에 카라얀은 닐손과 많은 오페라를 공연했다. 특히 1950년대에 카라얀은 닐손과 많은 오페라를 함께 해 오며 좋은 관계로 지냈고 1960년에는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라타 <박쥐>의 녹음에도 갈라쇼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리허설에서 닐손에게 노래에 감정이 없다, 감정을 넣어 부르라는 주문을 자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닐손의 스타일은 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냉혈한의 목소리 그 자체였고, 결국 60년대 이후 카라얀은 실제 공연에서는 여러 사정에 의해 닐손과 종종 공연을 하더라도 음반 녹음에서는 닐손이 아니라 카라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합한 목소리를 지닌 표현력이 좋은 성악가들을 기용했다. 그리고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은 뒤에 나오는 메트로폴리탄 리허설 일화에도 나오듯 평소 리허설 때도 카라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표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 대해 먼저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한 것은 닐손이었다. 언행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던 닐손은 60년대 공개적인 인터뷰에서도 카라얀에 대한 거리감을 그대로 표출했다. 닐손은 언론 인터뷰에서 카라얀이 자신과 공연은 종종 하는데, 음반 녹음에서는 절대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점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 했다. 물론 인터뷰에서 닐손은 카라얀인 자기에게 감정을 표현하라고 요구했고, 자신이 카라얀의 스타일과 맞지 않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때문에 닐손은 앞으로도 카라얀이 자신을 녹음에 기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이처럼 닐손의 목소리 스타일 자체가 일단 카라얀 본인의 스타일에 맞지 않았던 대다가 닐손 특유의 거침없는 성격이 카라얀에게는 사사건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60년대 후반부터는 카라얀과 닐손은 리허설에서도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인 일화가 다소 나온다.
이후에는 사석에서 카라얀은 닐손이
푸치니의 <
토스카>에 나오는 악역 스카르피아를 분장없이 연기할 수 있다고 했다. 결정적으로 196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했을 때 카라얀과 닐손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카라얀은 무대를 어둡게 하여 오페라 리허설을 했고 닐손이 이에 대항하는 격으로 광부가 쓰는 헤드랜턴을 쓰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로는 조명 대체가 안되었는지 결국 닐손은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되어 공연에서 빠지게 되었고 이를 비방하는 말로 언론을 통해 기고했다. 카라얀 또한 "내 음악세계에서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떠났다고 응수했다. 이후 카라얀과 닐손이 함께 공연하는 일은 없었는데, 이미 이전부터 카라얀은 바그너 녹음에서 닐손을 기용하지 않았고 닐손보다 유명세는 떨어지더라도 카라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성에 가까운 성악가를 기용했다.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했던 니벨룽의 반지 프로덕션은 원래 음반 녹음과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을 위해 기획된 것인데, 음반 녹음에서 카라얀은 닐손이 아닌 헬가 데르네슈를 기용했다. 데르네슈는 닐손에 비해 유명세가 떨어질 뿐만아니라 바그너에는 경험이 많지 않은 소프라노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미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량이 크지 않아 실제 공연에서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 소프라노 뿐만 아니라 테너 주연 역시 훌륭한 미성을 지녔으나 성량이 부족했던 헬게 브릴리오트를 기용했다. 카라얀은 음반녹음에서는 미성의 데르네슈와 브릴리오트를 기용하여 부족한 성량을 마이킹으로 보완할 수 있었으나, 메트로폴리탄과 같은 엄청난 크기의 홀에서는 데르네슈나 브릴리오트의 성량의 한계가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배역에서 유명한 닐손과 제스 토머스을 주연으로 기용했다. 이처럼 카라얀의 고집스운 성격에 대해 닐손이 반항해서 카라얀이 그녀를 더 싫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닐손의 스타일 자체가 카라얀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닐손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닐손은 60년대초 인터뷰에서도 이미 카라얀의 스타일에 자신이 맞지 않기 때문에 카라얀의 음반 녹음에 기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 예언했다. 또 닐손은 카라얀의 사후 인터뷰에서도 "마에스트로는 호불호가 분명해서 그의 눈 밖에 나면 가수들은 목소리를 다듬을 시간도 없어서 녹음테이프만 들어도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일단 닐손 본인이 카라얀의 스타일과도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행 등에서도 카라얀과 안맞아 그의 눈 밖에 난 상황임을 복합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래도 닐손은 카라얀을 싫어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나는 그가 음악에 집중 할 때 그와 함께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 그의 말년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의 굉장한 팬이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 그녀를 대단히 존경한다" 고 말할 정도. 마거릿 대처 총리가 오스트리아 방문 중 정말 카라얀을 보러 잘츠부르크 교외 아니프에 있는 카라얀 자택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대처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와 점심식사를 할 겸 카라얀의 자택을 찾았는데 거기서 대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남들이 다 들어주는 카라얀이 부럽다." 라고 했는데 카라얀은 꼭 그렇지만 않다고 말해야만 했다고 회고했다.
- 대처에 대한 빠심이나 나치 집권 시기의 행적을 보면 정치적으로 우파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막상 그가 죽기 직전 중국에서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 당시에는, 대다수의 서구 엘리트들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중국 당국의 진압을 지지하였고, '젊은이들은 노인의 충고를 따라야 해!'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 그는 만족스러운 독주자나 성악가와는 매우 자주 협연했는데 피아노는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가 있고 바이올리니스트는 크리스티앙 페라스나 안네 소피 무터가 있다. 성악가로는 안나 토모와-신토우, 미렐라 프레니, 아그네스 발챠, 레온틴 프라이스, 라이나 카바이반스카 등이 있으며 남자 성악가로는 호세 반 담, 호세 카레라스 등이 있다. 물론 지휘자마다 선호하는 독주자나 성악가가 있기 마련이지만 자신이 연주할 때 마다 원하는 연주자와 협연하는 지휘자는 극히 드물다.
-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음대에 들어가기 전에 빈 공대에 다니다가 자퇴했다. 특히 CD의 크기를 정하는 데 관여한 것은 유명하다. CD가 발명될 때, 휴대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만큼 너무 클 수도 없고, 너무 작으면 담을 수 있는 용량이 적어 어느정도 크기가 적당한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재생시간이 74분정도 되니 이 한 곡을 다 담을 수 있는 최소한의 크기로 하자고 해서 지금의 CD크기가 나왔다. 이때 카라얀이 자문을 했다고 한다. 만년에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맘같아서는 냉동인간이 되어 수십년 뒤에 깨어나 자신의 모든 레퍼토리를 디지털 비디오로 녹화하고 싶다."라고 할 정도였다. 일본에 자주 간 이유 중 하나가 소니 본사 등을 방문해서 최신 기술을 체험할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기술과 산업 트렌드에 대한 식견은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1952년에 월터 레그에게 당시 잘나가고 있던 영국의 자동차 산업이 20년 후에는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레그는 당시에 정신나간 의견이라고 생각했지만 20년 후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 카라얀이 하도 눈을 감고 지휘하니까 베를린 필의 한 직원이 "마에스트로께서 지휘대에서도 눈을 감고 연주가 끝나고 내려 올때도 눈을 절반 감고 내려오시니 위험해 보인다며 안내견을 한 마리 길러야 할 판국이다."라고 했다. 비꼬는듯 하면서도 걱정하는 말이다.
- 전술한 것처럼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은 잘 연주하지 않았다. 자신은 말러의 음악이 고도의 연습과 노력을 필요로 해서 자신이 어느정도 시기가 되면 연주 한다고도 했다. 카라얀은 2차 세계대전 직후 한 극장에서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자고 제의 했는데 극장 측은 한 교향곡 당 리허설을 2번만 준다고 하자 연주 자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말러의 음악을 미술에 비유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실제로 말러의 대작 중 하나라고 불리는 2번 부활이나 8번 천인교향곡은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다만 교향곡 4번, 5번, 6번 그리고 9번은 몇번 연주 한 적이 있으며 녹음으로도 남겼다. 그중에서 5번, 6번, 9번은 말러 명반 중 하나로 꽤 자주 언급되는 호연으로, 카라얀이 말러에도 상당히 많은 연구와 준비를 했음을 알수 있다.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에 따르면 카라얀과 1980년대에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카라얀이 말러 음악에 상당히 진심으로 대했다며 말러 이야기를 꽤 길게 했다고 회고 하고 있다.
- 엄청난 부자이기도 하다. 음반만 2억 장이 넘게 팔려서 그 로열티로 부인 엘리에트가 잘 살고 있고, 경비행기, 요트, 포르셰, 롤스로이스, 페라리 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경비행기 같은 경우 음반 표지로도 사용했다. (DG 카탈로그 번호 474 260-2) 집도 캠핀스키 호텔 특실 임대, 스위스 생모리츠의 호수와 소연주홀, 경비행기 이착륙장까지 딸린 저택도 받았다. 자택 지하에는 오케스트라 연습실이 있어 여름 휴가 시즌에 베를린 필 단원들을 초청해서 챔버 규모 작품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왜인지는 알수가 없는데 자신의 변호사들과 재산 관리인들에게도 소송을 걸었다. 특히 에밀 유커 같은 재산 관리인들을 죽기 전에 소송을 걸고 심지어 카라얀이 죽은 후에도 엘리에트가 이어서 소송을 걸었다.
- 그가 전성기때는 하루에 3천 달러나[195] 벌었다고 한다. 그의 전성기 당시 미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이 2000~3000달러로 그보다 못한 수준이었으니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 그는 죽으면서 당시 한국돈으로 2500억[196]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이에 유가족은 그가 스위스의 생 모리츠에서 출생했고 사망은 외국에서 하였다고[197] 거짓말을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상속세가 18%이나 한 것에 비해 스위스에서는 4%의 상속세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유가족만 비웃음을 샀다고 하며, 당시 그의 친구는 카라얀이 살아서도 애를 먹이며 구설수에 오르더니 죽어서도 구설수라고 혀를 찼다고한다.
- 속도광이다. 자신의 롤스로이스를 아우토반이든 아니든 간에 고속으로 몰길 좋아했다. 카라얀의 차에 동승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산길에서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고 카라얀에게 사정하기까지 했다.[198] 이 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오전에 아우토반에서 차를 몰다가 나무를 들이박아 전복 사고를 일으킨 후 오후에 리허설을 하러 간 적도 있다.
- 중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오케스트라 연습 영상을 보면 의외로 목소리 톤이 높고 가는 편. 굉장히 깐깐한 성미가 묻어나는 듯 하기도 하다. 이러한 목소리가 단원들에게 긴장감과 집중력을 유발시키는 측면도 있다. 젊은 시절에는 목소리가 걸걸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30대에 성대 폴립 제거 수술을 받은 이후로 걸걸했던 목소리가 가늘게 바뀐 것이라고 한다.
- 그가 지휘하는게 너무 열정적이여서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드는데 실제로 그가 오페라를 공연할 때[199]면 항상 구급차가 대기중이었다고 하고 그의 딸은 아버지가 격정적인 부분에서 지휘하다 쓰러질까봐 걱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외모는 젊은 시절보다 적당히 주름이 생긴 초로기에 꽃 피었다. 잘 생긴 외모, 풍성한 흰머리, 굵은 주름, 눈을 감은 지휘동작은 지휘자에 대한 대중의 환상을 충족시켜주어 그의 인기에 큰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레코드샵이나 이발소, 음악감상실에는 카라얀 포스터가 필수요소로 붙어 있었다.
- 자동차만이 아니라 비행기 조종 면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면허를 가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바쁜 스케줄에 잘 이용했다. 심지어 일본 공연을 지휘하러 갈 때도 자가용 경비행기를 직접 몰고 지구 반대편으로 갔다. 카라얀이 비행 조종을 배운 곳은 칠레였으며, 45세에 면허를 취득했다. 하지만 2차 대전 공군 파일럿 출신이라는 소문은 잘못된 것이다. 전쟁 당시 카라얀은 독일을 대표하는 지휘자였기 때문에 군입대를 계속 연기할 수 있었다.[200] 전쟁말기에 카라얀은 왜 징집 안하냐는 여론이 나왔고, 카라얀 본인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더이상 징집 연기가 안되면 괴링을 졸라서 육군이나 해군이 아닌 공군으로 입대하려고 마음 먹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징집되지는 않았다. 조종술에 관해 카라얀은 수많은 계기판을 보면서 신속히 판단을 내리고 섬세하게 운전하는 것이 오케스트라 지휘와 유사하다며 적성에 맞는다고 말하곤 했다. 카라얀은 분단 중인 베를린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34년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 결코 베를린에 거주한 적이 없었다. 베를린 필과 스케줄이 있을 경우는 호텔[201]에서 체류하거나 오스트리아 찰츠부르크의 자택에서 자가용 비행기를 직접 몰거나, 또는 포르쉐나 롤스로이스를 몰고 아우토반을 이용해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교관의 감독 하에 보잉 747 비행기를 몰아 1회의 이륙과 2회의 착륙에 성공하여 합격점을 받기도 했다.
- 상술한 바와 같이 베를린에서 체류할 때는 베를린 쿠어퓌어스텐담 27번지의 켐핀스키 호텔 꼭대기 층의 스위트룸을 이용했는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스위트"라는 이름이 붙은 이 방에는 각각 화장실이 딸린 4개의 침실이 있었다. 카라얀이 묵지 않을 때에는 일반 투숙객들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숙박료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고 한다. 더 이상 켐핀스키 계열은 아니지만 호텔 자체는 아직도 "호텔 브리스톨 베를린"으로 존재한다.
- 열렬한 스키광으로도 알려졌는데, 만년에 얻은 척추통증으로 인해 스키를 타지 못하는 것에 매우 분노하기도 했다. 57년 번스타인과 처음 만난 것도 스키를 타러 가서였다고 한다. 죽기 직전 마지막까지 한담을 나눈 주제가 비행기와 스키였으니 그가 얼마나 이를 좋아했는지를 알만하다. 일례로 몽블랑 등정을 1965년, 그러니까 자신의 나이 57세에 올랐는데 22시간이 걸려서야 정상에 도착했으나 거기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데는 겨우 27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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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 아니라 요트를 조종하기도 하고 말을 타고 자유자재로 돌아다니고 수영까지 어느정도 수준에 다다랐다. 뭘 못 하는지 세는게 빠를 지경.
- 결혼 중매를 서기도 했다. EMI의 제작자인 월터 레그와 당시 인기 가수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결혼을 맺어 준 것. 후에 레그가 슈바르츠코프의 은퇴 직후 병으로 사망했는데 이 소식을 슈바르츠코프가 누구보다 자신에게 먼저 알려 오자 매우 상심했다고 전해진다.
- 카라얀이 금전적인 계약에 민감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그동안 모은 전재산을 잃고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던 경험으로부터의 불안감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당시 카라얀은 이탈리아에 칩거하면서 극도의 경제난에 시달렸고, 식사를 거르면서 음악공부에만 매진하곤 했다고.
- 카리스마와 완벽주의의 이미지가 강하여 연습때도 토스카니니나 첼리비다케처럼 비타협적이고 완고할 것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리허설에서 융통성있는 모습을 보였다는 일화가 많다. 워낙 연주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리허설에서 완벽함을 강조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지만, 카라얀은 자신이 생각한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굳이 그 이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이때문에 레코딩 프로듀서였던 미셸 글로츠나 귄터 브레스트와도 종종 가벼운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녹음 중간에 약간의 미스가 나서 다시 재녹음할 것을 요청해도 카라얀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 정도 실수면 괜찮다고 생각할 경우 그냥 넘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금난새가 카라얀의 리허설을 숨어서 지켜본 일화에서도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의 녹음 때 오보에 수석주자가 솔로 부분을 재녹음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카라얀이 그정도면 됐다고 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1971년의 삼중협주곡 당시에는 리흐테르가 딱 한마디의 재녹음을 원하고 오이스트라흐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입을 빌려서 한 악장을 재녹음하자고 요구 했으나 카라얀은 당시 앨범 표지에 들어갈 사진을 찍어야 한다면서 그냥 가 버렸다고 한다.
- 하도 권력이나 뭔가 완벽을 추구하는 선 사실이었다. 몽셰라 카바예 에게 돈 엘비라 역을 맡길때도 14kg을 감량하라고 요구해 공연과 녹음이 불발 된 걸 보면 가창력 뿐 아니라 외모도 본다는 걸 알 수 있다.
- 1960년대말 카라얀 자신이 구상하던 계획과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처음 지휘를 하게 되었는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명성은 세계적이지만 그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별로 좋지 못했고 루돌프 빙은 카라얀이 와서 오케스트라의 낮은 수준에 실망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실제로 메트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본 카라얀은 오케스트라 수준이 형편없다며 "베를린에서는 저런 연주자들은 오디션을 보지 못한다. 마치 미적분을 모르는 7살 아이가 미적분을 하려는것 같다."라고 말했다.
-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의 연주로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1979년에 한 번 공연한 적이 있는데, 연주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 연주 이후 이 곡을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 세계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의 일화도 있다. 1954년 당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리허설 도중 칼라스가 넘어졌다.(칼라스는 극심하게 눈이 나빴다. 그래서 카라얀이 일부러 천을 놓고 연주했다.) 카라얀은 당시 '요소를 찾는중' 이라고 둘러댓지만 30분 뒤 창피스럽던 칼라스가 구석에서 울고 있자 그는 자신이 실험을 한 것이라고 웃어넘겼다고 한다. 카라얀은 칼라스를 완벽한 음감의 소유자이며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노래를 완벽히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카라얀과 칼라스는 함께 했는데 이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종신직을 맏게 되자 서로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 이후 1965 ~ 1968년경에 카라얀은 오나시스의 보트에서 칼라스를 만난게 마지막이었다. 당시 카라얀이 < 토스카>영화를 제안했지만 칼라스가 이미 은퇴한 후라 소극적으로 나섰고 오나시스도 자금출연에 부정적인지라 이뤄지지 못했다.[202] 그 이후 다시 계획을 세웠으나 이미 오나시스가 칼라스를 배신하고 떠나 충격받은 칼라스가 잠적해버려서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칼라스와 카라얀은 잠깐 이나마 만나 활동했지만 꽤 잘 맞았던 것 같다. 철두철미하게 악보를 공부하고 모든 성부의 음악을 연구해서 연주하는 카라얀과 칼라스는 잘 맞는 조합이었다. 최소한 음악적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 세계적인 성악가들 중에서 그와 오페라로 협연을 해 세계적 거장으로 성장 한 사람은 많다. 마리아 칼라스, 레나타 테발디,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는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유명해진 상태에서 그와 함께 했지만 레온틴 프라이스, 미렐라 프레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는 카라얀이 발탁해 유명해진 성악가들이라고 볼 수 있다.
9. 관련 문서
[1]
1975년 수훈, 대략 2급과 1급 사이인 1.5급 정도로 분류된다.
[2]
1960년 수훈
[3]
1961년 수훈
[4]
어렸을 때 본명은 헤리베르트 리터 폰 카라얀 (Heribert Ritter von Karajan)이었다.
[5]
"
Herbert von Karajan: A Chronology", deutschegrammophon.com
[6]
#, royalphilharmonicsociety.org
[7]
"
hvk_bio_english", 9번째 슬라이드
[8]
카라얀보다 11세 연상.
[9]
카라얀은 가톨릭 신자이다. 그의 가톨릭 신심을 보여주는 가장 큰 사례는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의 미사 때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연주한 사례로 잘 알려져있다. 이는 바티칸 미사에는 관현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깬 미사 연주회로도 알려져 있는데, 카라얀은 이 미사에서 지휘를 하기 위해 복잡한 스케줄을 다 정리하고 빈필과 합창단 그리고 캐서린 배틀 등의 솔리스트를 포함한 초호화 라인업을 모두 자비로 고용하여 미사를 드렸다. 그가 이 미사에 그토록 지휘하고 싶어한 이유는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서 자신과 가족이 영성체를 받고 축복을 받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카라얀은 불교에도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불교의 주된 교리 중 하나인 환생에 대해 강한 믿음을 보였다. 다시 태어나면 독수리가 되고 싶다고 했을 정도이다.
[10]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눈을 감고 지휘한다. 원래 지휘는 단원과 눈을 마주치면서 교감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는 그것을 거부하는 게 아니냐며 말이 많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오케스트라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완전한 교감을 이루었기에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눈을 감은 채로 지휘를 하다 뇌졸중이 와 바닥에 굴러떨어진 일도 있었는데 그 후 기절해 1975년과 1979년 병원에 실려가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11]
눈을 감은 채로 지휘하는 이유를 물어본 인터뷰 영상이 있다. 독일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따로 영어 자막이 있으니 자막을 켜고 한번 감상해보자.
#
[12]
카라얀이 생전에 남긴 마지막 녹음이기도 하다.
[13]
음반 509종, 영상물 78종을 남긴 음악계의 황제
[14]
출처
[15]
By one estimate he was the top-selling classical music recording artist of all time, having sold an estimated 200 million records,
Karajan (1908-89) is easily the top-selling classical musician of all time, making well over 500 recordings that sold more than 200 million copies – and are still selling.
[16]
2위는 1억장 정도로 집계된
루치아노 파바로티, 3위는 8000만장 정도의
마리아 칼라스. 카라얀이 이들보다 2배 이상이다.
[17]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안네 조피 폰 오터 등도 von을 사용하고 있다.
[19]
물론 성부도 다르다.
[20]
1920년대 당시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독일 사람들은 지폐를 양동이나 수레에 담아 날라야 했으며, 강도가 나타나 양동이에 있는 지폐는 버리고 양동이를 가지고 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1]
빈 필은 미국의 부호에게 지휘를 맡긴 흑역사가 있고, 베를린 필도 스스로 민간 오케스트라로서 자주성과 자부심을 포기하고 정부 보조금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22]
나치입당이 조건이라고 하는데 사실 당시 유태인 박해로 유태인 지휘자들이 대부분 독일을 떠났다. 그 예가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등. 결론적으로 카라얀은 출세를 위해 입당한 셈이다.
[23]
당시 베를린 필 매니저가 리허설 없이 공연할 것을 요구하여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4]
엘미와는 나중에 이혼하기는 하지만 계속 친분을 유지해서, 카라얀이 세 번째 부인 엘리에트 사이에서 얻은 두 딸 이사벨과 아라벨의 숙모를 자처했다.
[25]
일부 자료에서는 바이로이트 축제라고도 하지만, 카라얀이 공식적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처음 지휘한 것은 1951년이다.
[26]
그래도 괴벨스가 카라얀을 싫어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괴벨스가 푸르트벵글러를 더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을 뿐. 카라얀 역시 괴벨스의 문화 선전에 쓰이긴 했다.
[27]
연령 문제로 거절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28]
무엇 때문에 푸르트벵글러가 카라얀을 그토록 싫어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당시 그런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의 이름조차 부르기를 꺼려 K라고 불렀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는 지휘를 제2의 창조작업이라고 하며 지휘자의 주관적인 해석을 중요시했고 이의 대척점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인템포식 신즉물주의 연주를 매우 혐오했다. 카라얀은 당시 독일에서 토스카니니식 식즉물주의 해석의 대표 주자로 여겨져 언론에서 토스카라얀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점이 푸르트벵글러가 카라얀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9]
물론 레그와 푸르트벵글러와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카라얀 때문만은 아니고 음악관의 차이 등 다른 이유도 있었다고도 하는데, 푸르트벵글러에게 있어서 토스카라얀의 음악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음악적인 식견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결국은 카라얀과 레그가 친한 게 주원인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 밖에도 월터 레그가 가끔 단원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보고 푸르트벵글러는 레그가 음악적인 지시를 한다고 생각하여 무척 언짢아했다고 하는데, 레그는 오케스트라의 오너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 이는 미묘한 문제다.
[30]
하지만 1952년 트리스탄과 이졸데 녹음에서는 월터 레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하였다. 까다로운 푸르트벵글러와의 녹음 작업 때문에 레그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녹음이 끝난 후 매우 만족했던 푸르트벵글러는 음반표지에 레그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할 정도였다. 물론 푸르트벵글러와 레그의 해빙 무드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31]
카라얀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최고이며 앞으로 영국에서는 필하모니아와만 협업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단원들은 카라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32]
월터 레그는 사비로 유럽 순회 공연을 준비했고, 이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을 입었다.
[33]
당시 빈 심포니에는 정식 상임지휘자 제도가 없었다. 다만 빈 심포니 홈페이지에서는 악단을 거쳐간 위대한 지휘자 중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34]
니벨룽겐의 반지는 총 2회 연주되었는데 카라얀과 크나퍼츠부쉬가 각각 1회씩 지휘했다.
[35]
당시에는 한 극장에 소속된 가수가 다른 극장 무대에 서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시절이었다.
[36]
토스카니니는 1937년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지휘한 바 있는데 이때인 듯하다. 자신의 수족인 NBC 심포니에서는 잘 안 풀리면 엄청난 분노를 폭발했던 토스카니니였지만, 거의 지휘해본 적이 없었던 빈 필에서 대놓고 화내기는 그래서 빈 방에서 혼자 화풀이하고 있었던 듯하다.
[37]
카라얀에게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푸르트벵글러는 너무 세세한 실수에 집착하는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을 망치고 있다고 말하며 그를 멀리하게 되었는데, 첼리비다케 역시 그냥 C라고 불렀다. 이외에도 푸르트벵글러는 별로 내키지 않는 사람들을 이니셜로 부르곤 했다.
[38]
실제로 요훔은 푸르트벵글러와 가장 친한 지휘자이기도 했다.
[39]
푸르트벵글러의 청력이 극도로 악화되어 1954년 9월 중순 베를린 필과의 리허설 도중에 더이상 진행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푸르트벵글러는 '이제 끝이군요'라는 말을 끝으로 지휘대를 떠났고 이후 칩거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40]
이것이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한때 가쉽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41]
하지만 모자 간의 갈등 끝에 어머니가 스스로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
[42]
당시 칼 뵘은 모종의 스캔들에 휘말렸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43]
빈 필은 엄청난 연주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다른 오페라 하우스와 달리 거의 연중 내내 공연이 있는데다가 비독일계 오페라 하우스와 달리 레퍼토리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공연하는 오페라가 바뀌었다. 때문에 빈 국립 오페라의 리허설은 주요 부분만 선별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이외의 부분은 리허설 없이 바로 실제 공연에 들어갔다. 때문에 실제 공연에서 단원들과 지휘자, 성악가들은 서로 극도로 집중해서 호흡을 맞춰야 했다.
[44]
당시 데이비드 빅넬과 월터 레그 등 EMI 클래식 부서에서는 카라얀은 동시대 거장 지휘자들 중 가장 유망한 지휘자 중 한 명으로 클렘페러, 스토코프스키 등의 거장 지휘자들은 곧 없어질 것이지만 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활동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EMI 경영진들은 카랴얀보다는 존 바비롤리가 더 대세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45]
베를린 남부의 교외 지역. 베를린 자유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46]
필하모니 개관직후 녹음을 하는 오이겐 요훔이 카라얀에게 녹음하기 적합하지 않다고 조언한 것이 주요했다.
[47]
빈 국립 가극장을 사임했기 때문에 이전에 세금 문제도 이제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48]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단장 루돌프 빙은 카라얀이 메트 오페라를 지휘하고 오케스트라 실력에 실망할까 염려했고 이는 사실이 되었다.
[49]
1966년 1월 2일,
드보르작
교향곡 9번
[50]
1967년 4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와의 협연이다. 영상의 품질이 상당히 좋다.
[51]
그래도 표를 구할 수가 없어 화장실 등을 통해 몰래 입장한 학생들도 있었는데 현재 세계적인 지휘자로 활동하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세묜 비치코프(...). 드라마틱한 것이 모스크바 음악홀의 배관을 타고 올라가 여자 화장실로 침투한 후 공연을 보다가 걸려서 쫓겨났다고(...)
[52]
애초에 이 공연 자체가 동독의 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동베를린은 동독의 수도였기 때문에 서베를린 소속의 베를린 필이 베를린시 전체의 대표성을 지닌 명칭으로 공연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53]
첫날 공연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1번이어서 카라얀은 쳄발로를 치며 지휘했다. 이날 두번째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54]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카라얀은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를 보고 동행한 소련 공무원에게 안개가 너무 심해 길을 잃을 것 같아 내릴 수 없다는 뼈있는 농담을 했다.
[55]
카라얀은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을 DG를 통해 녹음 했는데 1969년 모스크바 실황. 이후 1976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1981년에 다시 DG를 통해 녹음된 것 이렇게 4번을 제외하고 그 외에 연주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공산진영에서 가장 위대한 지휘자는 므라빈스키로 인식되었고 그가 남긴 명반들도 차이코프스키나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이 주를 이루었다. 카라얀이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만 거의 하던 므라빈스키의 연주를 듣고 강력한 사운드와 표현력에 감동하고 동경했다고 한다. 카라얀은 므라빈스키를 존경하는 선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연주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라이벌로 인식되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주 레퍼토리인 말러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미국에 망명한 작곡가의 음악들을 연주했다고 볼 수도 있다.
[56]
카라얀은 1963년에 빈 국립 가극장을 떠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지휘를 할 일이 없을것이라 했다 얼마 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총괄하면서 빈에서 지휘할 일이 없을것이라 일축했고 결국 이 공연 이후로 그 말을 취소했다.
[57]
몇 달 전 바이올린 연주자 한 명이 베를린 필 최초의 여성 연주자로 입단했지만, 관악기 파트에서는 자비네가 최초의 여성 단원이었다. 스물세 살 여성 연주자를 그것도 '수석' 자리에 앉히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58]
푸르트벵글러 때도 비독일인 단원은 있었다. 플룻 수석 오렐 니콜레 등
[59]
카라얀은 이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주자인 앨런 시빌에게 베를린 필의 호른수석자리를 제의했지만, 앨런 시빌은 고심 끝에 자녀 교육 문제 등으로 카라얀의 제의를 거절한한 바 있었다.
[60]
지금 자비네 마이어가 클라리넷 연주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클라리넷의 여제.
[61]
현재 소니에서 발매되고 있는 모든 영상물이 텔레몬디알에서 제작한 것이다.
[62]
빈 필은 시즌 중 거의 매일 오페라 공연이 있기 때문에 부활절 페스티벌에는 참여할 수가 없다. 때문에 부활절 페스티벌은 오페라 경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이 호스트 오케스트라를 맡게 된 것.
[63]
이 공연에는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1941~), 레오 누치(Leo Nucci·1942~), 조세핀 바스토우(Josephine Barstow·1940~) 등과 함께 한국인 소프라노 조수미가 오스카 역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64]
예를 들어 동료 지휘자였던 첼리비다케는 그를 가리켜 "뛰어난 장사꾼이지만 음악을 듣는 귀가 없다"고 평가했다."
[65]
카라얀이 확실히 현악은 잘 부리는 게 다른 지휘자 음반하고 비교했을 때 카라얀 까들도 인정할 정도라고 한다. 아무리 대편성의 교향곡이라고 할지라도 실내악적인 분위기를 나게 만드는 본좌급 지휘력을 가지고 있다.
[66]
푸르트벵글러의 나치부역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엄청난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참고
[67]
첼리비다케의 고집불통 독불장군 성격으로 베를린필 단원들은 일찌감치 첼리비다케를 제외했다
[68]
당시 칸텔리가 떠오르는 신예로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당시 베를린필의 상임 자리에 명함을 내밀 정도는 아니었다.
[69]
karajan krankheit(카라얀 열병)이라는 독일어. 카라얀 신드롬이 극에 달했던 당시 만들어진 신조어
[70]
작곡가 본인에게 자신의 곡을 자신이 의도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71]
시벨리우스의 작품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인기가 없는 편이다. 보통 영국이나 핀란드의 지휘자가 교향곡 녹음을 많이 남기는데, 시벨리우스의 작품에 애착을 가진 카라얀이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72]
다만 슈만교향곡 4번은 많이 남긴편이다. 50,70,80년대에 녹음을. 60년대는 리허설을 포함한 연주 영상을 남겼다.
[73]
단 슈베르트 9번 '그레이트' 교향곡에 대해서는 도무지 작품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냥 내 방식대로 지휘한다고 언급했고, 실제 60년대 토스카라얀적인 특색대로 정교하고 템포 변화 없는 빠른 연주로 일관한다.
[74]
카라얀이 말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이다. 70년대 중반부터 카라얀은 말러 교향곡 4,5,6,9번을 녹음했다. 이후에는 말러에 대해 이야기하며 본인의 말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미안하나 너무 힘들어서 시도하기 힘들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75]
헨젤과 그레텔은 연주금지 시절 레그와의 계약에 의해 거의 처음 녹음한 곡으로 당시 녹음곡 선정에 있어 카라얀은 발언권이 거의 없었고, 당시의 EMI도 자사가 보유하지 않은 레퍼토리를 카랴얀에게 맡겨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76]
영국 그라모폰지 동곡의 Recommended Recording에 선정.
[77]
푸르트뱅글러리즘의 표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싫어했지만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를 존경해서 몰래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78]
카라얀의 녹음/연주성향은 60, 70, 80년대 딱 세 종류로 나눠지는데 60년대가 패기와 박력(다이나믹), 70년대는 60년대와 80년대의 중간, 80년대는 웅장함 에서 묻어나오는 기름진 연주다. 60년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80년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대다수는 60, 70년대를 좋아하는 듯 하다. 명반시리즈(디 오리지날)에는 주로 60년대가 많다. 사실 60년대(당시 카라얀 연령 50중반~60대초반)가 카라얀의 일생에서는 전성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
칼 뵘은 전성기가 60년대로 알려져 있지만 남아있는 음반은 70년대
빈 필과의 녹음이 많다.
[79]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보면 정말 안한 게 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심지어 그의 음악관 및 장점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비발디의 사계까지 있다. 그런데 사계도 그 많은 음반 중에서 명반이라는 평론가들이 많다. 하지만 물량이 많은 만큼 일부 음반은 음악의 본질을 왜곡했다는 혹평도 있다.
[80]
오페라 전집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DG, 데카, 필립스의 전집으로 구성되어있다.
[81]
물론 이미 일본에서는 130여장(!)으로 1930년대 녹음부터 전집으로 내놓았다.
[82]
물론 선배들인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역시 당대 최고의 지휘자 겸 뛰어난 작곡가였다. 다만 슈트라우스와 달리 말러와 푸르트벵글러는 생전에는 작곡가로서는 무시받았고 지휘자로서만 추앙받았으며, 무엇보다 지휘자 말러는 지휘 음반을 남기지 않았고 작곡가 푸르트벵글러는 오늘날에도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83]
라 스칼라에서 처음으로 원어 공연을 시작하기도 했다.
[84]
이러한 카라얀의 진가를 느끼고 싶은 사람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오페라 간주곡집을 꼭 들어보길 바란다.
[85]
가장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그의 '키'에 대한 연출이다. 그는 자신의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가수를 약간 자신의 뒤에 배치하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참고로 카라얀의 영상 감독 중 휴고 니벨링이 강판당한 이유가 이것인데 니벨링은 카라얀을 영상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
[86]
실제로 강마에 역을 연기한
김명민이 지휘 연기를 위해 카라얀의 DVD를 보며 연습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87]
카라얀이 감독한 영상은 65년도부터고 음악사 최초의 뮤직비디오인
비틀즈의
Paperback Writer는 1966년 나왔다.
[88]
여기서 생겨난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한 장의 CD에는 최대 74분 분량의 음악이 들어간다. 이 분량을 74분으로 결정한 사람이 카라얀이라는 얘기가 있다. 처음으로 CD를 상용화한 필립스와 소니 기술진은 CD 1장 분량으로 LP 음반 앞뒷면을 합한 분량과 같은 60분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카라얀이 “60분으로 하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전곡을 녹음할 수 없다”며 74분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진위에 대해서는 사실 논란이 있다(필립스의 일부 기술진은 ‘74분’과 카라얀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여하튼 이런 일화들이 카라얀의 양면성-뛰어난 지휘자인 동시에 탁월한 비즈니스맨-을 뒷받침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89]
Quotes 부분 참조
[90]
#
[91]
https://www.digitalconcerthall.com/ko/interview/206-2
[92]
근데 이 말, 칭찬이 아니라 험악하게 생겼다고 까는 말이다(…)
[93]
카라얀은 모스크바를 여행을 가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을 연주하는 므라빈스키를 보고 압도적인 음량에 압도 되었다며 이후로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섣불리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94]
(왼쪽부터)
소니 회장
모리타 아키오, 카라얀, 필립스 오디오 부문 대표 조프 반 튈뷔르흐.
[95]
기사참고
[96]
당시 소니 수뇌부와 지휘자들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소니 창립자인 아키오 모리타나 소니 사장 오가 노리오와 카라얀, 번스타인, 아바도는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97]
도쿄 FM에서 발매되었는데 블루레이, LP, SACD, CD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품절되어 구하기 매우 어렵다.
[98]
영웅 교향곡에서 네명의 호른 단원을 기용했는데, 어시스턴트, 3번, 2번, 1번 순으로 자리를 배치했다.
[99]
모차르트의 작품 중 특히 카라얀이 좋아했던 작품 중 하나로 세 번이나 녹음했다. 일본, 영국 순회공연 때도 레퍼토리로 올린 적이 몇번 있다.
[100]
당시 되찾은 핸드백에서 짙은 립스틱과 액체가 묻은 콘돔이 발견되어 카라얀 부인의 외도설이 국내에 돌기도 했다는 루머가 있다.
[101]
카라얀은 콘서트 후 호텔입구 까지 팬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 이를 피하기 위해 호텔 주차장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핸드백을 분실했으며, 이 여성팬은 주차장까지 쫒으면서 핸드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핸드백은 그 여성에 의해 호텔측에 전달되었다.
[102]
음악동아 및 조수미 자서전 등의 기록등으로 교차 검증이 되는 점을 볼때 엘리에트의 기억과는 달리 한국에서 잃어버린 핸드백을 되찾은 내용은 사실로 보인다. 한국 입장에서는 20세기 최대 거장의 단 한번뿐인 방문이라 사소한 내용까지 다 화제가 되었지만, 엘리어트의 기억에는 수많은 연주방문 중 하나였으니 일일이 다 기억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103]
공연이 시작한 후에 관객들이 들어오고, 밖에서는 자전거 소리가 들렸고 중간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104]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칼 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나치전과에 연루돼있다. 뭐 셋 다 사면받았고 칼 뵘 같은 경우 다른 사람보다 빨리 사면받았다는데 전기문 같은 곳에서 보면 자세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뭐라하기가 좀 그렇다.
[105]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독일의 작가. 나치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06]
아버지와 함께 나치에 반대하다가 독일을 떠나야 했다. 2차대전 기간에는 기자로 활동.
[107]
이것과 관련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카라얀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공식적'으로만 대했다는 말이 있다. 오가 노리오 전 소니 사장이나 안네 소피 무터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대해서 굉장히 비정치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
[108]
카를 뵘이나
레너드 번스타인,
프리츠 라이너 등도 덕분에 여기에서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109]
카라얀이 당초
파리 오케스트라에 관심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베를린필이 DG, 빈필이 데카와 계약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카라얀은 EMI에서 음반을 내기 위해 EMI와 계약을 맺은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베를린필과 DG의 전속계약이 종료되자
파리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도 바로 청산한다.
[110]
조수미의 경우 아직 노르마는 무리라고 생각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111]
피아노에 디누 리파티
[112]
피아노에 발터 기제킹
[113]
피아노는 발터 기제킹
[114]
호른에 데니스 브레인
[115]
소프라노는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116]
피아노는 한스 리히터-하세
[117]
피아노에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타르
[118]
바이올린에 크리스티안 페라스
[119]
바이올린에 크리스티안 페라스
[120]
바이올린에 크리스티안 페라스, 미셀 슈발베
[121]
피아노는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122]
바이올린은 크리스티안 페라스
[123]
피아노는 게자 안다
[124]
호른에 게르트 자이페르트
[125]
첼로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126]
소프라노는 군둘라 야노비츠
[127]
오보에는 로타르 코흐
[128]
피아노에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타르, 첼로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바이올린에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129]
피아노는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
[130]
오보에는 로타르 코흐, 클라리넷은 칼 라이스터, 바순은 귄터 피에스크, 플루트는 제임스 골웨이, 프리츠 헬미스, 하프에 안드레아스 블라우
[131]
바이올린에 미셀 슈발베
[132]
소프라노에 군둘라 야노비츠
[133]
테너는 르네 콜로, 메조소프라노는 크리스타 루트비히
[134]
피아노에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
[135]
피아노에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
[136]
트럼펫에 모리스 앙드레
[137]
피아노에 라자르 베르만
[138]
바이올린에 안네 소피 무터
[139]
피아노에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
[140]
피아노에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
[141]
피아노에 마크 젤처, 첼로에 요요마, 바이올린에 안네 소피 무터
[142]
바이올린은 안네 소피 무터
[143]
피아노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144]
바이올린은 안네 소피 무터
[145]
소프라노는 안나 토모바-신토우
[146]
DVD와 다른 테이크
[147]
바이올린은 안네 소피 무터
[148]
피아노는 예브게니 키신
[149]
카라얀의 마지막 공연의 실황녹음
[150]
푸르트벵글러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는 대부분의 공연이 실황 녹음이니까.
[151]
전후 카라얀의 베를린필 지휘 최초 공연
[152]
베를린 필 75주년 기념 공연
[153]
베를린 필하모니 개관공연
[154]
비엔나 실황
[155]
1970.12.31 베를린필 송년음악회
[156]
도쿄 실황
[157]
오사카 실황
[158]
잘츠부르크 음악제 실황
[159]
바이올린에 유코 시오카와
[160]
1978.5.15 잘츠부르크 음악제 실황
[161]
잘츠부르크 실황
[162]
잘츠부르크 실황
[163]
오사카 실황
[164]
오사카 실황
[165]
비엔나 실황
[166]
도쿄 실황공연. DG에서 발매된 브람스 교향곡 제1번과 같이 공연됐다.
[167]
10월5일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 공연. 카라얀 최후의 브람스 연주이다.
[168]
BBC와 협력
[169]
카라얀의 마지막 베토벤 교향곡 공연이다.1988.12.4 공연
[170]
뉴욕 카네기 홀 실황. 1989.2.26
[171]
일반 청중이 몰래 녹음
[172]
따라서 니벨링의 편집본은 폐기되었다.
[173]
이 영상의 리허설 영상에는
카라얀이 직접 수박이 담긴 수레를 뒤엎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실제 녹음 버전에도 해당 장면에서 외모가 매우 유사한 사람이 화면에 잡힌다. 그러면 저때 지휘는 누가했지?
[174]
이 녹음에서 휴고 니벨링 감독의 과한 카메라 워크나 다양하다 못해 난잡해보이는 특수 효과로 인하여 카라얀 본인이 직접 카메라 연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175]
이 녹음은 영상미의 완벽성을 위해 관객의 모습으로 프린트한 종이를 좌석에 일일히 설치하여 기침 등의 소음은 안나면서도 관객이 차있는 듯이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세히 보면 관객들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적인 것을 볼 수 있다.
[176]
중간에 강판당함
[177]
3번 영상과 같은 세트로 추정
[178]
피아노는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
[179]
이 중 교향곡 5,6번은 다른 공연 실황영상도 존재하나 사실상 마공개이다.
[180]
바이올린은 안네 소피 무터
[181]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과 죽음의 변용 공연
[182]
바티칸 실황으로,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와 아베 베룸 코르푸스를 공연하였다.
[183]
CD는 DG
[184]
음반 표지에는 1983년 DG 실황과 같은 영상이라고 하는데 명백한 오류이다. 대조 결과 이 성악진은 1986년 베를린 예술주간 공연에만 출연했다.
[185]
CD는 DG.
[186]
카라얀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가 만년에 걸었던 거리를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걸으며 회상했다.
[187]
고전적이라고 비판한게 아니라 구시대의 음악을 대변할 수 있을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이다.
[188]
두 사람 모두 일본에 자주 공연을 하러 갔던 것을 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189]
요훔은 푸르트뱅글러 사후 베를린 필의 감독으로 자신이 거론되자 김칫국 마시듯 확신하고 베를린에 집까지 미리 알아보고 있었다.
[190]
다만 악보만을 참고해서 지휘자의 해석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로 카라얀이 번스타인의 악보를 보고 베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191]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카라얀을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으며, 카라얀도 클라이버에 대해 덕담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과 교류를 잘 하지 않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친구라 할 만한 동료 지휘자는
리카르도 무티 정도를 제외하면 카라얀이 유일하다.
[192]
클라이버는 돈에 초연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심어준 발언이기도 하다. 사실 클라이버는 자신의 희소성을 이용해 높은 개런티를 요구하던, 돈의 속성에 상당히 밝은 인물이었다. 다만 그는 본인이 만족하지 않으면 연주회를 가차없이 취소하기도 하는 등, 단지 본인 희소 가치를 올리겠다는 이유만으로 지휘 횟수를 줄였던 사람은 아니었다. 카라얀은 클라이버의 그러한 타협없는 완벽주의 성향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193]
로스트로포비치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본격적으로 지휘자 활동을 시작했는데 카라얀의 도움으로 베를린 필과 녹음을 많이 남겼다.
[194]
헝가리계 독일인으로, 히틀러 반대 운동에 참여하다 히틀러 암살 작전에 연루되어 처형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종손이자 똑같이 히틀러에 맞서다 처형당한 음악가 한스 폰 도흐나니의 아들이다.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의 아들 유스투스 폰 도흐나니는 히틀러 정권의 패망을 다룬 영화,
다운폴에서 총통 수석부관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보병대장 역을 분했다.
[195]
오늘날의 3천달러야 330만원 정도의 가치이지만 60년대의 3천달러는 오늘날에는 거의 1억의 가치가 있다. 당시 아무나 못 타는 수준이던
보잉 707 제트기의 뉴욕 - 파리 직항 운임이 편도 200달러 정도였다.
[196]
당시의 2500억은 지금 가치로 2조가 넘는다.
[197]
그가 생 모리츠에 별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국적은 엄연히 오스트리아였다. 집은 잘츠부르크 교외인데 카라얀이 별장에 자주 기거하다보니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198]
이때 로스트로포비치가 한 말이 압권인데, "우리가 죽더라도 한 사람의 유해는 베를린으로, 다른 사람은 모스크바로 가야할 것 아니오?(...)"
[199]
오페라는 대개 2시간을 넘어간다. 카라얀은 실제로 무대에서 간혹 쓰러진 적이 있었다.
[200]
애초에 지휘자까지 되지 않더라도 국립 악단의 단원이라면 괴벨스나 그 외 나치당 수뇌부의 비호 덕에 징집으로부터 비교적 보호받을 수 있었다.
[201]
켐핀스키 호텔 꼭대기 특실을 임대해서 사용했다(...). 물론 이는 카라얀만 그런건 아니고
게오르그 솔티도 시카고에서 집을 구하지 않고 호텔을 이용했다.
[202]
카라얀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칼라스에게 토스카에 필요한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으니 출연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오나시스가 자신을 초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나시스는 "내가 부자이지만 이 모든 일에 돈을 쏟아 부을 만큼 부유하지는 않다"고 거절했고 칼라스는 이미 그때 급격히 분별력이 떨어지고 제정신이 아니여서 두려워 했다고 말했다. 시기는 칼라스가 은퇴한 뒤인 1965년 ~ 1968년 경으로 추정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