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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Reino de Castil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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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175-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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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214-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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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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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년 카스티야 왕국의 강역.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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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 1065년~1230년 | |
위치 | 이베리아 반도 | |
주요 도시 | 부르고스, 톨레도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알폰소 8세(1158~1214) | |
언어 | 카스티야어 | |
종족 | 카스티야인 | |
종교 | 가톨릭 | |
성립 이전 | 레온 왕국 | |
주요 사건 |
1065년 건국 1085년 마드리드 점령 1230년 레온 왕국과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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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 국가 | 카스티야 연합 왕국 |
언어별 명칭 | |
스페인어 | Reino de Castilla[3] |
라틴어 | Regnum Castellae |
아스투리아스어 | Reinu de Castiella |
아라곤어 | Reino de Castiella |
포르투갈어 | Reino de Castela |
프랑스어 | Royaume de Castille |
영어 | Kingdom of Castile |
1. 개요
1065년부터 1230년까지 중세 시대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카스티야(Castilla)라는 이름은 성채(Castillo)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9세기에 레온 왕국 동쪽의 카스티야 백작령으로 탄생했지만 서기 1065년에 카스티야 왕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2. 역사
2.1. 건국 배경
"카스티야(Castile)"라는 명칭은 '성채(Castra)'에서 유래된 용어로, 이 명칭은 《 알폰소 3세 연대기》에서 출처 중 하나로 밝힌 서기 800년경에 작성된 문서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우리는 카스티야 영토의 파트리니아노 지역에 산 마르틴을 기리기 위해 교회를 세웠다.
또한 알폰소 3세 연대기는 바르둘라(Bardulia) 지역이 카스티야로 불리기 이전의 명칭이었으며, 칸타브리아인, 아스투리아인, 바스크인들이 집단 이주하여 토착민들과 함께 거주했다고 서술했다. 한편, 알안달루스의 무슬림 측 기록은 이 지역을 "성곽이 있는 고원지대"라고 서술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역대 국왕들은 무슬림 세력과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 지역에 많은 성채를 짓고 군대를 집중 배치했다. 그러다가 850년 로드리고라는 인물이 카스티야 최초의 백작으로 등장하면서 카스티야 백작령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로드리고는 에브로강의 서쪽과 남쪽에 있는 고대 칸타브리아의 언덕 마을인 아마야를 거점으로 삼고 요새화했다. 이후 이 지역은 세분화되어 알라바, 부르고스, 세레소, 란타론, 축소된 카스티야로 명명되었으며, 각각 별도의 백작들이 신설되었다.
930년경,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가 카스티야 전역을 통합했다. 그는 주군으로 섬기는 레온 왕국의 국왕에 대해 한편으로는 무슬림과의 전쟁에 협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기를 드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레온 국왕 라미루 2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944년 페르난도 곤살레스가 무슬림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한 뒤 레오내의 지하 감옥에 투옥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산초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봉했다. 3년 동안 구금되었던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결국 레온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화해의 표시로 자신의 딸을 라미로 2세의 아들인 오르도뉴 3세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석방 후에도 라미로 2세에게 대한 반감을 간직한 그는 카스티야 동부로 피신한 뒤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무슬림들은 그런 그를 지원했고, 947년 사모라를 공격했다가 패퇴했으며 948년 갈리시아의 큰 도시인 오르티게이라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라미루 2세는 무슬림들이 갈리시아 등 레온 왕국의 서부 지역을 잇따라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느라 카스티야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고,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이때를 틈타 잃어버린 카스티야 영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결국 라미루 2세는 페르난도 곤살레스와 화해하기로 했다.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카스티야 백작으로 복위했고, 산초 1세는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팜플로나 왕국과 레온 왕국을 상대로 충성 대상을 바꿔가면서 자치권을 확고히 다지고자 노력하면서,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영토를 차츰 늘렸다.
1010년경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는 딸 무니아도나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3세에게 시집 보내고 팜플로나 왕국의 봉신을 자처했다. 1017년 산초 가르시아가 사망한 후 미성년자였던 가르시아 산체스가 백작에 오르자, 안초 3세는 그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카스티야 백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029년, 가르시아 산체스는 레온 국왕 알폰수 5세의 딸인 산차와 약혼한 뒤 결혼식을 치르러 레온으로 향했다가 카스티야에서 추방됐던 귀족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초 3세는 즉시 카스티야 백작령을 점거한 뒤 자신의 아들이자 죽은 백작의 조카인 페르난도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세워서 카스티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했다.
페르난도 1세는 1032년 가르시아 산체스의 약혼자였던 레온의 산차와 결혼했다. 이때 레온 왕국은 지참금으로 케아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땅을 카스티야 백국에 넘겼다. 035년 아버지 안초 3세가 사망한 뒤 비로소 카스티야 백작으로서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1037년 레온 왕국의 국왕이었다가 안초 3세에게 패배해 갈리시아로 망명했던 베르무두 3세가 왕국을 되찾기 위해 쳐들어오자, 그는 형이자 팜플로냐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와 연합해 대항했다.
1037년 9월 4일, 페르난도는 타마론 전투에서 베르무두 3세를 전사시키고 레온 국왕이 되려 했다. 레온 왕국의 대표적인 귀족인 페르난도 플라네스 백작은 찬탈자에게 도시를 양도할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더라도 그의 지위와 직책을 유지해주고 상당한 보상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자 이내 페르난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페르난도는 아내 산차와 함께 레온에 입성한 뒤 성 마리아 성당에서 레온 주교 세르반데스에 의해 레온 국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는 고인이 된 장인 알폰수 5세가 부여한 레온 헌장을 재확인하고 서고트 왕국의 법전을 레온 왕국의 기본법으로서 계속 준수하도록 했으며, 왕국의 관습법과 귀족들의 권리 역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이리하여 레온 왕위에 오른 페르난도 1세는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카스티야의 왕으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후대에 카스티야 군주제의 창시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형제 및 조카들과 정쟁을 벌여가며 이득을 최대한 보고자 노력하는 한편,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국가들을 상대로 레콩키스타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1057년 포르투갈 북부의 라메고(Lamego)를 공략했으며, 뒤이어 두에로 강을 따라 진군해 몬데고 계곡을 확보했다. 1058년 7월 포르투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비제우(Viseu)를 접수하면서 대서양으로 진출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1060년, 페르난도는 무슬림의 치하에 있던 사라고사를 침공해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스, 베를랑가, 바도르레이 등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톨레도와 사라고사 사이의 로마 가도까지 진격했다. 당시 사라고사의 에미르 아흐마드 알 무콰디르는 사라고사와 이웃한 토르토사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던 터라 이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알 무콰디르는 지금까지 팜플로나 왕국에 보내던 조공을 레온 왕국에 보내고 충성을 서약하며, 페르난도가 빼앗아간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사라고사를 복속시킨 뒤, 페르난도는 톨레도 에미르 야히아 이븐 이스마일 알 마문에게 관심을 돌렸다. 1062년, 페르난도는 톨레도 토후국으로 쳐들어가서 탈라마아를 공략하고 알칼라 데 헤나레스를 포위했다. 알 마문은 도저히 대항할 방도가 없다고 여기고 알 무콰디르처럼 레온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했고, 페르난도는 이에 만족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1063년, 세비야와 바다호스의 아랍 토후국들에 대한 대규모 약탈을 감행했고, 세비야와 바다호스 토후국들은 그가 철수하는 조건으로 내걸은 몸값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했다. 1064년 1월 몬데고 강 어귀에 있던 코임브라(Coimbra)를 포위하고 6개월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064년 7월 25일에 함락시켰다. 페르난도는 모사라비아 백작 시스난도 다비디스(Sisnando Davídiz)에게 코임브라를 비롯하여 대서양에서 두에로 강을 따라 이어지는 레온 왕국의 남쪽 국경 지대를 관장하게 했다.
1065년 12월 27일, 발렌시아 원정에서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귀환하던 페르난도 1세는 도중에 중병에 걸려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상속인 사이에 왕실 소유물을 분배하는 것을 금지한 서고트 및 레온 법 대신 왕국을 분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나바라 법 원칙을 따르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장남 산초 2세는 카스티야를 물려받았고, 차남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3남 가르시아 2세는 갈리시아를 물려받았다. 여기에 딸 우라카와 엘비라는 평생 결혼하지 않는 대가로 각각 사모라와 토로를 영지로 수여받고 왕실에 속한 모든 수도원의 수입 일부를 받을 권한이 부여되었다. 산초 2세가 카스티야 국왕을 칭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2. 형제간의 골육상쟁
아버지 페르난도 1세에 의해 카스티야 왕국 최초의 국왕이 된 산초 2세는 자신에게만 유산이 상속되어야 했는데 다른 형제들에게도 영토가 분배되어 버려서 카스티야에서만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불만을 품었다. 1067년 11월 7일 세 형제들을 중재하던 모후 산차 왕비가 사망하자, 산초 2세는 본격적으로 골육상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068년 5월 1일 알폰소 6세가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공격하느라 레온 왕국을 비워두자, 그는 이때를 틈타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바다호스 타이파 알 무자파르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왔다.1068년 7월 19일 피수에르가 강 인근의 린타다 전투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이 전투의 승자가 상대방의 왕국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전투 결과 산초 2세가 승리했지만 알폰소 6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알폰소 6세가 1069년 5월 26일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을 때 산초 2세가 결혼식에 참석한 것을 볼 때 곧 화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71년,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막내 동생 가르시아 2세가 다스리던 갈리시아를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고 힘을 합쳐 갈리시아로 쳐들어갔다. 갈리시아 2세는 두 형의 공세에 패배하고 포르투갈 중심부로 도주했다가 산타렝에서 산초 2세에게 체포되어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 그 후 갈리시아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 의해 양분되었다. 포르투갈 백작령은 알폰소 6세의 레온 왕국으로 편입되었고, 갈리시아는 산초 2세의 카스티야 왕국에 편입되었다. 또한 양자는 3년간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산초 2세는 약속을 어기고 엘 시드와 함께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미처 대항하지 못하고 사로잡혔고, 산초 2세는 레온에 입성한 뒤 1072년 1월 12일 레온 국왕에 즉위했다. 그 후 여동생인 사모라의 우라카의 중재에 따라 알폰소 6세를 사하군 수도원에 유폐시켰지만, 알폰소 6세는 페드로 안수레스 등 몇몇 귀족들과 함께 탈출한 뒤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의 궁정에 망명한 뒤 그곳에 수 개월간 지냈다.
산초 2세는 자신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레온 귀족들을 진압하는 한편, 누나 우라카 역시 자신에게 반기를 들 거라고 의심했다. 그는 우라카에게 사모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명령했으나 거절당하자 반역자와 밀통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사모라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던 1072년 8월 7일, 산초 2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벨리도 돌포스(Vellido Dolfos)라는 귀족이 사모라에서 카스티야군 진영에 들어간 뒤 산초 2세에게 도시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산초 2세는 이를 믿고 그를 따라가다가 돌연 손에 쥐고 있던 황금 창을 빼앗기고 창에 복부를 찔러 사망했다. 돌포스는 엘 시드의 추격을 피해 곧바로 사모라로 돌아와서 우라카를 향해 "도냐 우라카, 약속을 이행할 때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히스파니아 역사의 주요 사료로 취급되는 《로데리크의 역사(Historia Roderici)》에는 산초 2세의 사인이 암살이었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많은 학자들은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그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거나 병에 걸려 죽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후대의 많은 전승과 연대기에는 알폰소 6세를 산초 2세 암살 사건의 배후라고 지목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설령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고 해도 당시 톨레도에 멀리 망명한 그가 산초 2세를 처단하는 데 관여하기 어렵다며, 사모라의 우라카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더욱 그럴듯하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우라카가 알폰소 6세와 비밀 협의를 하고 산초 2세를 암살한 뒤 알폰소 6세를 왕으로 옹립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산초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기존에 맡고 있던 레온 왕국에 더해 형이 군림했던 갈리시아-포르투갈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을 겸임했다. 13세기 후반에 카르데냐 수도사들이 작성한 연대기인 《카르데냐의 전설(Cardeña Legend)》에 따르면, 엘 시드는 모두가 보는 광장으로 알폰소를 부른 뒤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만인에게 발표하라고 했다. 알폰소는 엘 시드의 지시에 따른 뒤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데리크의 역사》 등 신뢰성이 높은 사료들에서는 이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일화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한편,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가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하고 풀려난 후 세비야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의 궁정으로 망명했던 가르시아 2세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가 서로 전쟁을 벌이느라 자신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세비야 타이파의 후원을 받으며 갈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073년 2월 13일 자신과 만나서 협상하자는 알폰소 6세의 제의를 따랐다가 알폰소 6세가 파견한 군대에 체포된 뒤 루고 성에 투옥되어 1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090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6세는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포르투갈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2.3. 알폰소 6세
알폰소 6세는 아버지의 왕국을 재통합한 뒤 망명 기간 동안 자신을 보호했던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과 굳건한 동맹을 맺고, 그와 함께 그라나다 토후국을 공격해 타격을 입힌 뒤 주변의 타이파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상당량의 공물을 받았다. 또한 클뤼니 대수도원과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산 이시드로 데 두냐, 산티아고 데 아스투딜로, 산 후안 데 에르메데스 데 세라토 등 여러 수도원 건립을 허가했으며, 연간 2,000 디나르를 클뤼니 대수도원에 기부했다. 여기에 더해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친척인 콩스탕스와 결혼했으며, 이후에도 새 아내를 정할 때마다 클뤼니 대수도원의 조언을 받았다.그러던 1076년 6월 4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4세가 나바라 마을 인근의 페날렌에서 사냥하던 중 형제 라몬 가르세이츠가 고용한 암살자가 내지른 단검에 찔려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라몬 가르세이츠는 팜플로나 왕국의 새 국왕이 되려 했지만, 귀족들이 형제를 살해한 그를 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하자 사라고사 궁정으로 도주했다. 알폰소 6세는 이때를 틈타 팜플로나 왕국으로 쳐들어가 비스카이아, 기푸스코아 등 여러 영토를 빼앗아갔고,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는 팜플로나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팜플로나 국왕을 겸임했다. 1077년, 알폰소 6세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칭했다.
이 무렵, 알폰소 6세의 동맹자였던 알 마문은 코르도바에서 독살당했고, 뒤이어 톨레도 타이파가 된 알 카디르는 톨레도 시에 대한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1079년 바다호스의 타이파인 알 무타와길 이븐 알 아프타스가 톨레도 타이파국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톨레토 타이파국이 점유하고 있던 코르도바 등 남쪽 영토를 빼앗았다. 알 카디르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일단 엘 시드를 세비야로 보내 그들과 동맹을 맺고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협공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엘 시드는 그라나다 타이파국이 세비야를 침공하자 다른 카스티야 기사들과 함께 세비야와 손잡고 카브라 전투에서 그라나다군을 격파했다. 이때 그라나다군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과 다른 카스티야 귀족들은 포로로 잡혀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후 엘 시드는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엘 시드가 허락 없이 타이파들 간의 전쟁에 뛰어들고 카스티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격분해 1080년 5월 8일 엘 시드를 추방했다.
1080년, 알 카디르가 톨레도 시민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고 알 무타와킬이 톨레도에 입성하여 자기 영지로 삼았다. 이에 알폰소 6세는 알 카디르를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바다호스 타이파국과의 전쟁을 감행했다. 1081년, 알폰소 6세는 마드리드와 탈라베라를 공략하고 에스칼로나에 요새를 건설했다. 1082년에는 코루체를 공략하고 알 카디르를 그곳에 안착시킨 뒤 톨레도를 압박했다.
이 무렵, 사라고사 타이파국에 속한 레우데 데 하이온 성채의 총독인 알부파크(Albufac)는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만( Al-Mutaman)에 대항하는 알 무자파르(Al -Muzáffar)를 지지했다. 그는 알폰소 6세의 지원을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기고, 알폰소 6세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이 요새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루에다 데 하이온 성채는 하이온 강 계곡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알폰소 6세는 이를 받아들여 요새로 출진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알 무자파르가 사망하자, 알부카프는 알 무타만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요새를 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083년 1월 6일, 알폰소 6세가 이끄는 군대가 루에다 성채에 입성했다. 이때 알부파크가 돌연 성문을 닫고 성안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로 인해 산초 가르시아, 라미로 데 팜플로나, 곤살로 살바도레스 등 유력 귀족들이 살해되었다. 당시 후방에 있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알폰소 6세는 격분해 사라고사와 전면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알 무타만의 부하로 지내던 엘 시드가 "이 일은 알부파크가 타이파의 지시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벌인 짓이니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의 중재 아래 알부파크를 처형하고 배상금을 받고 루에다 요새를 넘겨받는 대가로 사라고사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1084년 가을, 알폰소 6세는 톨레도 남쪽에 진영을 세워 톨레도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게 한 뒤 본국에 귀환했다가 1085년 3월 주력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진군했다. 이후 2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주변 타이파들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톨레도 시민들은 그해 5월 6일에 생명, 재산, 자유 및 종교적 표현에 대한 보장을 약속받고 항복했다. 그는 "톨레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하는 한편, 알바르 파네스에게 알 카디르가 발렌시아의 타이파가 되도록 발렌시아를 압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사라고사가 공물 지불을 중단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라고사로 쳐들어가 1086년 봄 도시를 포위했다. 그해 3월 초 발렌시아는 알바르 파네스의 압박에 굴복하여 알 카디르를 타이파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톨레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발렌시아에 속국 군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알폰소 6세는 자신을 "두 종교의 황제"라고 칭했다. 그는 정복지의 무슬림들이 기꺼이 복종하게 하게 위해 그들의 재산을 존중하는 것 외에도 모스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톨레도 대주교로 부임한 베르나르드 데 세디락은 왕의 뜻을 거부하고 모스크를 대성당으로 개조했다. 또한 알폰소 6세는 현지 기독교인들의 언어와 관습을 존중해야만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겼기에, 새로 정복한 영토에 사는 주민들에게 라틴어와 로마 교회식 예배를 강요하라는 교황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우르바노 2세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자, 그들의 지원을 얻어낼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들의 뜻대로 이베리아 교회의 예배 방식을 로마 교회식으로 통합하고 오직 라틴어만 사용하게 했다.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공략하고 발렌시아를 복속시키는 등 이베리아 반도 내 타이파국들을 상대로 강력한 압박을 행사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군주들은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급기야 카스티야군에게 포위된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는 모로코, 세네갈 등지를 장악한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유수프 이븐 타슈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유수프는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이후 세비야로 진군해 세비야, 말라가 등 각지의 타이파들이 이끌고 온 군대와 합세한 뒤 바다호스로 행진했다.
알폰소 6세는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라고사 포위를 풀고 발렌시아에서 군대를 소집하는 한편,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후 바다호스로 진군한 그는 1086년 10월 23일 사그라하스 또는 잘라카에서 유수프의 군대와 마주쳤다. 기독교측 기록에 따르면, 알폰소 6세는 레온과 카스티야 기병 1,500명을 포함해 약 2,500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며, 이 중 750명은 기사였다고 한다. 반면 무슬림측 사료에 따르면 6만에서 8만에 달했다고 한다. 유수프의 군대 규모는 3배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규모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유수프는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조공을 바치거나 전투를 벌이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알폰소 6세는 전투를 벌이겠다고 답한 뒤, 아라곤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미루자는 부하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 초반엔 기독교군이 강력한 돌격을 감행해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유수프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적절히 활용해 기독교군을 포위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알폰소는 정강이뼈에 큰 상처를 입고 패주했고, 500명의 전사만이 목숨을 건진 채 왕의 뒤를 따라갔다.
유수프와의 전투에서 완패한 알폰소 6세는 톨레도에 돌아가 수성전을 준비했지만, 유수프는 본국에 있던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후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기병대만 남기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일단 한시름을 놓게 된 그는 1086년 말 또는 1087년 초에 엘 시드와 화해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복귀시켰다. 이후 엘 시드에게 왕국의 동쪽 국경 지대를 지키게 했고, 알바르 파네스에게 발렌시아와 톨레도 사이의 방위를 맡겼으며, 페드로 안수레스에게 서쪽 국경 방위를 맡겼다.
알폰소 6세는 유럽 각국과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해달라고 호소했다. 십자군 선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앙리( 엔히크 드 보르고냐) 등 부르고뉴 공국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했다. 그들은 1086년 또는 1087년에 투델라 공방전을 치렀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한편 1087년 또는 1088년에 갈리시아에서 루고 성에 갇힌 가르시아 2세의 복위를 노린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폰소 6세는 이를 순조롭게 진압하고 갈리시아 지역의 주교 7명 중 2명을 해임하는 등 갈리시아 통치 체계를 개편했다.
1088년 유수프가 두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서 알레도를 포위했다. 그러나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미드가 유수프가 이베리아 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고 포위된 수비대에 보급품을 은밀히 공급했고, 이로 인해 알레도는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알레도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한 유수프는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와 마드리드를 일시적으로 공략했지만 과달라하라에서 격퇴당하자 코르도바로 물러났다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 후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자 노력했고, 유수프를 경계하던 그라나다와 사라고사 등 여러 타이파들은 알폰소 6세에게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그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세비야 에미르는 공물 납부를 거부했고, 카스티야군이 압박을 가하기 위해 공세를 가해오자 유수프에게 재차 구원을 요청했다.
1090년 6월, 유수프는 세 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그는 타이파들이 기독교 군주에게 복종하는 등 종교적으로 해이해지고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고 주장하며, 교조적인 종교학자들의 지지를 명분삼아 타이파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그라나다 (1090년), 세비야 & 알메리야 (1091년), 알리칸테 (1092년), 바다호스 (1094년) 등의 타이파들이 모조리 축출되고 무라비트 왕조가 이 도시들을 직할 통치했다.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복위시키기 위해 유수프와 전쟁을 벌였지만 모든 전선에서 실패했다. 동쪽 방면에서는 제노바 함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토르토사 공략에 실패했고, 남쪽에서는 발렌시아의 타이파 알 카디르가 반란으로 축출되었으며, 서쪽에서는 바다호스-카스티야 연합군이 유수프의 군대에게 연전연패해 리스본, 신트라, 산타렘 일대를 빼앗겼다. 오직 엘 시드만이 1094년 6월 발렌시아를 탈환하고 10월에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096년 11월, 아라곤 국왕 페드로 1세가 우에스카를 포위 공격하던 중 우에스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 빌라흐를 알코라스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에 알폰소 6세는 봉신인 사라고사를 돕기 위해 친히 그곳으로 향했다. 유수프는 이때를 틈타 알폰소 6세가 자리를 비운 톨레도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황급히 군대를 돌려 1097년 8월 15일 콘수에그라에서 유수프를 저지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기독교 전사들이 적 보병 대열을 돌파했지만, 기병으로 구성된 무라비트 양익이 기독교인들을 포위 섬멸했다.
알폰소 6세는 콘수에그라 성으로 도피한 뒤 수백 명 밖에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압도적인 수로 몰아붙이는 적에 맞서 항전했다. 당시 성채에는 물과 식량이 거의 없었지만, 왕이 성벽 위에 몸소 나아가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전의를 끌어올리며 침략자에 맞서 싸웠다. 유수프는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8일 동안 성채를 공략하지 못하자 적 지원군이 도착할 것을 우려해 철수했다.
그 후 알폰소는 군대를 재건하고 국경 지대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지만, 1099년 6월 유수프가 재차 대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쳐들어왔을 때는 군대 재건이 덜 된 상태였기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무슬림군은 톨레도를 지키던 성채 대부분을 공략했고, 1100년에 톨레도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주변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돌아갔다. 이제 카스티야 왕국은 톨레도 남쪽 지역을 모조리 상실했고, 톨레도는 국경 도시가 되어버렸다. 알폰소 6세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101년 살라망카와 아빌라에 요새를 새로 세워서 톨레도를 지키게 했고,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에게 톨레도 수비를 맡겼다.
1102년 무라비트 왕조군이 발렌시아로 쳐들어왔다. 당시 발렌시아를 지키던 엘 시드는 1099년에 무슬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히메나 디아스가 발렌시아를 다스렸다. 히메나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즉시 군대를 보냈다. 양측은 쿨레라 전투에서 막심한 손실을 입고 돌아갔다. 하지만 알폰소 6세는 적의 영역 주변에 튀어나온 형국인 발렌시아를 지키는 건 무리라고 여기고 히메나를 설득해 발렌시아에서 철수하게 했다. 기독교인들은 3~4월에 발렌시아를 파괴한 뒤 철수했고, 무라비트 왕조군은 5월에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이 갈수록 수세에 몰리자, 사라고사 타이파국은 알폰소 6세에게 더 이상 공물을 납부하지 않고 유수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발렌시아를 상실하면서 동쪽 국경 지대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알폰소 6세는 1104년 7월 메디나 셀리를 공략한 뒤 이곳을 요충지로 삼아 동쪽 국경을 지키게 했다. 이후 1104~1106년에 안달루시아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해 무슬림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1108년 코르도바 총독이자 유수프의 아들인 타밈의 군대가 우클레스에 쳐들어왔다. 고령의 나이에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알폰소 6세는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아들 산초 알폰세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기독교군이 또다시 참패했고 산초 알폰세스는 전사했다. 알폰소 6세는 급히 군대를 수습한 뒤 무슬림군의 추가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남쪽 국경으로 향했지만, 무슬림군이 의외로 공세를 더 이어가지 않자 톨레도로 돌아갔다.
알폰소 6세는 생전에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우라카 외에는 자식을 보지 못했고, 정부로 삼은 여인들로부터 두 딸 엘비라, 테레사 데 레온를 두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설득에 따라 정실 아내로부터 얻은 우라카를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결혼시키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또한 포르투갈 백작이 될 엔히크 드 보르고냐와 정부로부터 얻은 테레사의 결혼을 주선해, 그가 차기 후계자를 보좌하게 했다.
그러던 1093년, 알폰소 6세의 정부 중 한 명인 자이다가 아들 산초 알폰세스를 낳았다. 그는 친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해주기로 마음먹고, 산초 알폰세스를 합법적인 아들로 삼았다. 그러나 1105년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우라카 부부가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낳으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자이다와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산초 알폰세스가 성년에 가까우니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라카와 부르고뉴 측 인사들은 알폰소 6세의 합법적인 자식은 오로지 우라카 뿐이며 그녀의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야말로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한 끝에 1107년 5월 레온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15살이 된 산초 알폰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해 9월 레이몽이 사망한 후, 알폰소 6세는 딸 우라카를 갈리시아의 단독 영주로 삼고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갈리시아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후계 구도가 정해지는 듯했지만,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산초 알폰세스가 전사해버리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알폰소 6세는 남쪽 국경으로 가서 무슬림의 추가 공세에 대한 방비를 수행한 뒤 톨레도로 귀환한 후 귀족들을 소집한 뒤 우라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우라카를 재혼시킬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여러 후보가 우라카와 결혼하러 나섰는데,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라라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알폰소 6세의 측근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폰소 6세는 신하였던 자가 자기 딸을 밀어내고 왕권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고, 레온 귀족들과 카스티야 귀족 중 한 명을 택하면 다른 쪽이 반발할까 걱정했다.
알폰소 6세는 고심 끝에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를 딸의 결혼 상대로 낙점했다. 알폰소 1세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우라카와 같은 신분이고, 군사적 역량이 출중하고 용맹해서 무슬림들의 침략으로부터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을 거뜬히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국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레온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곘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레사 데 레온과 엔히크는 자신들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2.4. 내전에 휘말린 왕국
우라카와 알폰소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직후인 1109년 7월 1일, 알폰소 6세가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딸 우라카가 레온과 갈리시아, 그리고 카스티야의 여왕에 등극했고, 알폰소 1세와 공동으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와 알폰소 라이문데스의 가정교사를 맡던 트라바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해 알폰소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군대를 이끌고 레온으로 진군해 몬테로소 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더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기사들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러 요새와 성채를 접수하게 했으며, 1110년 내내 우라카의 영지인 레온과 카스티야를 돌며 공물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알폰소 1세가 발바네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하다, 산살바도르 데 오냐 등 여러 수도원에 기부한 것에 대해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어 우라카를 따르는 귀족들을 견제하게 하려는 수단이라고 추정한다.우라카는 남편의 이같은 행보에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기고 분노했다. 그녀는 비스카야와 하로의 영주이자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의 후계자인 디에고 로페스 데 하로에게 특권을 부여해 알폰소 1세에 적대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귀족들은 알폰소 1세가 자기들 영지 내에 있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자기들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우라카의 지원에 반색하며 알폰소 1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몄다.
사라고사 토후국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은 알폰소 1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이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문제에 전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타우스테를 탈환하고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즉각 대응에 나섰고, 1110년 1월 24일 발티에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알 무스타인을 처단했다. 이후 사라고사 토후국은 쇠락했고, 그동안 사라고사 토후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들 상당수가 알폰소 1세의 봉신을 자처했다.
발티에라 전투의 승리로 알폰소 1세의 위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지만, 그와 우라카와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에서 집필된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가 우라카를 손과 발로 허구헌날 구타했다고 서술했다. 이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저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우라카와 알폰소 1세 부부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1110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니 인정하기 어렵다는 교황청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을 비롯한 반 알폰소 세력은 우라카의 친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으로 받들고 우라카와 알폰소의 결혼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대응해 우라카를 긴급 체포한 뒤 그녀의 정신 상태가 통치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며 아라곤의 엘 카스텔리아 성채에 투옥시킨 뒤 레온과 카스티야의 반란자 토벌에 나섰다. 그는 몇 주 만에 팔렌시아, 부르고스, 오스마, 사하군, 아스토르가, 오렌세 등 레온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민중들이 분노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진군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엘 카스텔리아 성채를 습격해 우라카를 석방시킨 뒤 사하군 수도원에 이송시켰다가 다시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는 군대를 돌려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의 영지가 있는 카스티야 남부로 진격했다. 1111년 4월 13일 교황에게 두 사람의 혼인 무효를 요청했던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를 축출한 뒤 아라곤 수비대를 톨레도에 배치했다. 이 무렵 포르투갈 백작이며 알폰소 6세의 또다른 딸인 테레사 데 레온의 남편인 엔히크 드 보르고냐가 우라카를 돕기 위해 진군하자, 알폰소는 엔히크에게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9월 17일,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우라카로부터 갈리시아 왕위만 먼저 물려받았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라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한편, 우라카의 지지자인 페드로 프루엘라스 데 트라바 백작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조직한 군대가 우라카의 어린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와 함께 레온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가 1110년 원정 당시 공략했던 루고를 탈환한 뒤 수비대를 배치한 후 레온으로 계속 진군했다. 알폰소는 이 소식을 듣자 군대를 돌려 비아당고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페드로 프루엘라스는 체포되었고, 디에고 헬미레스는 어린 알폰소를 데리고 포르티 카스텔로 오르질리오네(forti Castello Orzilione)로 도주해 그곳에 숨어 있던 우라카와 합류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1112년 여름 동안 휴전을 맺고 양자가 동의할 수 있는 평화 협약을 맺으려 애썼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커서 협의에 실패했다. 알폰소 1세는 어떻게든 레온과 카스티야를 장악하고자 아라곤 수비대들을 곳곳에 배치했지만,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좀처럼 통제하지 못한 데다 아라곤 귀족들마저 본국 귀환을 종용했다.
1112년 9월, 알폰소와의 협상이 무익하다고 여긴 우라카는 전쟁을 재개했다. 그녀는 케아 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해 케리온 강 서쪽의 카스티야 영역을 탈환했다. 부르고스 남쪽의 두에로 상류 영토 역시 우라카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알폰소 1세는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병력을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녀의 공세를 저지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 우라카와의 결혼을 이어가려 했으며, 교황 특사의 중재 제의를 거절했다.
1113년, 우라카는 갈리시아 귀족군과 함께 또다시 공세를 개시해 사하군과 카리온을 공략하고 부르고스를 포위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맞서 라 호야로 진군해 반란 세력을 제압했고, 4월에 로스 아르코스로 진군해 부르고스에 포위된 지지자들을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알바르 파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톨레도를 공략했다. 이렇듯 기독교도들이 내전을 일삼자, 사라고사 토후국은 이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했다. 무슬림군은 오레하 성을 공략하고 톨레도 주변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1113년 6월, 우라카는 부르고스를 손에 넣은 뒤 무슬림군의 위협에 시달리는 톨레도 구원에 착수했다. 이후 양자는 무슬림에 맞서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114년 팔렌시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했고,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으로 군림하되 레온과 카스티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바스크, 라 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툴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라카 역시 사망할 때까지 전히스파니아의 여제를 자처했다.
1116년, 우라카는 갈리시아의 왕으로 세워둔 아들 알폰소에게 두에로 강 남쪽 땅과 톨레도 일대의 통치권도 양도했다. 젊은 알폰소는 이때부터 카스티야를 여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탈취하려 드는 알폰소 1세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라카의 배다른 누이 테레사가 그녀에게 반기를 들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신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워서 일부는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그녀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그녀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테레사에 대한 원정을 취소하고 레온으로 귀환한 우라카는 때마침 아들이 톨레도에 입성해 알폰소 1세의 세력을 축출한 덕분에 카스티야에서의 입지가 강해졌다. 이에 아들 알폰소가 후임 왕이 되는 것을 보장하는 탐브레 협약에 서명했다. 1118년, 우라카는 자치권을 무제한적으로 누리면서 알폰소 1세와 내통하는 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카스티야 동부로 진군했다. 그해 6월에 세고비아에서 그녀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갈리시아를 확고히 장악하고자 그곳으로 향하면서도 알 안달루스와 맞서는 톨레도 대주교에게 일부 병력을 보냈다.
1119년 1~3월, 우라카는 부르고스에 남아서 알폰소 1세의 대 무슬림 전쟁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전 집사 구테 페르난데스가 참여한 위험한 음모에 직면해야 했다. 구테 페르난데스는 우라카의 연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을 만실라 성에 잠시 가두고 레온에서 여왕의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다. 우라카는 이 반란을 가까스로 제압한 뒤 음모에 가담한 카스티야 귀족 여럿을 처벌하고 1119년 9월 알폰소 1세와 화해했다.
1120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란호소 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두오로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성공에 취했기 때문인지, 우라카는 이 시점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디에고 헬미레스의 권세가 갈수록 커져 정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 거슬렸고, 장차 아들 알폰소를 등에 업고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하려 들 거라고 의심했다. 결국 그녀는 1120년 7월 말에 아리아스 페레스를 통해 헬미레스를 카스트렐로에서 체포하여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권신이긴 했지만 그녀를 지금껏 따랐던 주교를 하루아침에 가둬버린 일은 심각한 후폭풍을 야기했다. 헬미레스의 추종자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여왕을 압박했고, 어머니가 자신을 해칠 지도 모른다고 여긴 알폰소는 산티아고 인근에 머물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와 합세했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한 우라카는 얼마 후에 헬미레스를 석방했지만, 그로부터 빼앗은 영지와 성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헬미레스는 테레사와 그녀의 연인이 된 트레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의 편에 섰다. 그해 가을에는 주교를 체포하고 주교의 영지를 몰수했다는 소식에 진노한 교황 갈리스토 2세[4]가 우라카에게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121년 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행진한 뒤 헬미레스 주교와 프루엘라스 백작과 면담한 뒤 그들의 직위를 돌려주며 크리스마스 이전에 주교의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내전은 겨우 수습되었지만, 1121년 8월 사하군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헬미레스의 지지자들과 여왕의 반대자들이 우라카를 몰아내고 알폰소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하는 등, 사건의 여파는 이어졌다. 게다가 그해 여름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123년 3월 다시 갈리시아로 행차한 우라카는 헬미레스 주교와의 동맹을 갱신하는 대신 페드로 프루엘라스 백작과 그의 아들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남쪽으로 이동해 톨레도에 도착한 뒤 시구엔사를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1124년 5월 25일, 헬미레스 주교가 우라카 여왕의 허락을 받고 산티아고에서 알폰소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124년 여름, 테레사가 휴전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우라카는 1125년 늦봄에 아들과 갈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대면한 뒤 카스티야로 떠나 말년을 보내다 1126년 3월 8일 리오 카리온 강변 살다냐에서 병사했다. 이리하여 히메네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아들 알폰소 7세가 레온, 갈리시아, 카스티야 국왕에 선임되면서 보르고냐 왕조가 카스티야 왕국의 지배 가문이 되었다.
2.5. 알폰소 7세
알폰소 7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알폰소 7세가 자신이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사이 카스티야 전역을 석권해버리자 현실을 받아들여 1128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경계를 확정지은 타마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알폰소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알폰소 7세는 우라카 치세 말년에 갈리시아를 침략하여 자기 영역으로 삼은 이모 테레사를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포르투갈 백국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파괴한 뒤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은 뒤 테레사가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게 한 후 레온으로 돌아가 1128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의 딸 베렝겔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1128년 6월 24일 상 마메데 전투에서 테레사의 아들인 아폰수 엔히크스가 알폰소 7세에게 굴복했던 어머니 테레사와 페드로 페르난데스 등 레온-카스티야 왕국군 장성들을 물리치면서, 알폰소 7세가 복속시켰던 포르투갈 백국이 또다시 독립했다. 아폰수 엔히크스는 1129년에 자신을 포르투갈 프린스라 선언하며 알폰소 7세에 대항했고, 1139년에는 아예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
1130년 바르셀로나 백작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우려해 베렝겔라와의 결혼에 반대한 레온, 살라망카, 오비에도 주교들을 체포했다. 이에 귀족들은 대거 반발했고, 라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이었던 페드로 곤살레스는 우라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드로 페레스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그들을 포섭해 반기를 들었다. 반란군은 한때 팔렌시아, 아스투리아스, 코얀사 등지에서 기세를 드높였지만, 오소리오 마르티네스가 이끄는 정부군에게 패배했다. 알폰소 7세는 그해 6월에 팔렌시아를 공략하여 페드로 곤살레스를 축출하고 나머지 반란자들과 화해했다.
1134년 아라곤과 팜플로나 국왕 알폰소 1세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팜플로나 대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며 아라곤 왕국에도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모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왕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국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1135년 5월 26일 레온 대성당에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 행사에서 처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고,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톨로사 백작 알폰소 호르다네스, 가스코뉴 및 프랑스 남부의 여러 영주들,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6세, 루에다 데 하온의 영주이자 사라고사의 마지막 타이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아들 아흐메드 알 무스탄시르 사이프 알 다울라(자파둘라)도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라곤 국왕 라미로 2세와 포르투갈 프린스 아폰수 1세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듯 아라곤 왕국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그의 처남인 라몬 베렝게르 4세가 라미로 2세의 딸 페트로닐라와 결혼한 뒤 장인이 수도원에 은퇴한 뒤 아라곤 왕국의 통치를 주관하게 되면서 양국의 사이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반면 포르투갈 왕국과의 전쟁은 이어졌다. 아폰수는 집권 이래로 포르투갈의 '프린스'를 칭하면서 알폰소 7세의 인정을 받고자 사절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자 않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13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시아로 진격해 어머니의 옛 연인이었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갈리시아 귀족들을 상대로 체르네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뒤 투이 등 일부 요새를 공략했다.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알폰소 7세는 어쩔 수 없이 투이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아폰수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알폰소 7세의 충실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했으며, 이번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고, 무슬림 및 기독교 통치자와의 전쟁을 치르는 황제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7세는 그를 포르투갈 백작으로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39년,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로 쳐들어왔다. 아폰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에 맞섰고, 그해 7월 25일 오우리케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군대와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초대 국왕에 선임되었다. 레온 왕국의 알폰소 7세가 이 소식에 격분해 아폰수를 참칭자라고 비난하자, 아폰수는 투이 협약을 깨고 갈리시아를 침공해 미뉴강을 건너 발데베스 계곡의 여러 성채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7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에게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방어하게 한 뒤 1140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출진해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아폰수는 즉시 역습을 가하여 적군 선봉장 라미루 프로일라스 백작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 뒤 발데베스 계곡에서 알폰소 7세와 본대와 대치했다. 《황제 알폰소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자는 펜하 다 레이하 성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진영이 좀 더 높고 거친 지형에 자리잡았다. 이후 전투가 쉽게 결판나지 않고 양측의 여러 기사들이 생포되자, 포르투갈의 늙은 귀족들이 "기독교인끼리 무익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를 페허로 만들 것이니 이쯤에서 황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자"라고 제안했다. 아폰수는 그들의 진언에 따라 알폰소 7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알폰소 7세 역시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143년, 알폰소 7세와 아폰수는 사모라 대성당에서 교황 대표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이 치켜보는 가운데 조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7세는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양자는 그동안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이후 레콩키스타에 전념하기로 한 그는 1138년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1139년 오레자 요새를 공략했고 1142년에는 코리아를 공략했으며, 1144년에는 하옌과 코르도바를 점령했다. 여기에 알 안달루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 근처에서 발흥한 무와히드 왕조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면서, 무라비트 왕조는 급격히 몰락했다.
1145년 3월, 사라고사의 왕자 자파둘라는 알 안달루스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알폰소 7세의 지원을 받아 그라나다를 공략했다. 그러다가 무라비트 왕조의 알 안달루스 총독 이븐 가니야의 반격으로 그라나다를 빼앗기자 알폰소 7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알폰소 7세는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자파둘라는 카스티야군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과 전쟁을 벌이다 1146년 2월 5일 친칠라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알폰소 7세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다가 이븐 가니야로부터 우베다와 바에사를 할양받고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철수했다.
카스티야 왕국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메르톨라의 이븐 알 카시는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하며 원군을 요청했다. 무와히드 왕조의 지도자 아브드 알 무민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146년 5월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무와히드군이 접근해오자, 이븐 가니야는 곧바로 무와히드 왕조에 항복했다. 이후 무와히드 왕조와 대치한 알폰소 7세는 1147년 알메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는 이를 위해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의 실권자 라몬 베렝게르 4세, 제노바 공화국 함대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에 응한 프랑스 십자군의 지원을 받았다. 그 결과 그해 10월 알메리아 공략에 성공하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처음으로 지중해 해상에 진출할 수 있었다.
1150년 11월 나바라 왕국의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가 사망하자, 알폰소 7세는 1151년 1월 27일 투딜렌에서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만나 나바라 왕국의 영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안초 6세는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투딜렌 협약을 따르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여동생 블랑카를 알폰소 7세의 장남인 산초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소 7세의 호의를 얻어내려 애썼다. 1153년 중반에는 소리아에서 알폰소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봉신 협약을 갱신했으며, 1157년 6월 2일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현재 팔렌시아)에서 알폰소 7세의 딸 산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7세는 1157년 중순에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맺었다. 1157년, 무와히드 왕조가 알메리아를 습격해 순식간에 탈환했다. 알폰소 7세는 알메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 원정에 착수했으나 실패하고 귀환하던 중 8월 21일에 사망했다.
2.6. 산초 3세와 알폰소 8세
알폰소 7세는 생전에 큰 아들 산초 3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주고, 작은 아들 페르난두 2세에게 레온 왕국과 갈리시아 왕국을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다만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에 속해 있던 티에라 데 캄포스, 사하군, 아스투리아스 데 산티아나는 산초 3세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1157년 알폰소 7세가 사망한 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생전 지시에 따라 영토를 분할했다. 1158년 5월 23일, 페르난두 2세와 산초 3세는 사하군 시에서 상호 원조 협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서로 힘을 합쳐 무슬림과의 전쟁을 이어가며, 알 안달루스를 정복한 후에는 니에블라에서 리스본까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이 차지하고 나머지 영토는 카스티야 왕국이 차지하기로 했다. 또한 둘 중 한 명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 다른 한 명이 형제의 영토를 관할하기로 했다.1158년 8월 31일, 산초 3세는 톨레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3살이었던 아들 알폰소 8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고, 구티에레스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와 만리케 페레스 데 라라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카스티야 왕국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이었던 카스트로 가문과 라라 가문이 최고 권력을 놓고 내전을 벌이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레온 왕국의 국왕이자 산초 3세의 동생이었던 페르난두 2세는 이를 이용해 카스티야 왕국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었다. 수세에 몰린 카스트로 가문의 가주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레온에 망명하자, 페르난두 2세는 그를 지원해 라라 가문과의 전쟁을 이어가게 했다. 여기에 1159년 카스티야 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해 부르고스 시를 점거했다.
1160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이끄는 카스트로 가문 추종자들은 바야돌리드 지방의 빌라브라마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로브레갈 전투에서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누뇨 페레스 데 라라가 이끄는 라라 가문 추종자들을 격파하고 누뇨 페레스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장인 오소리오 마르티네스가 목숨을 잃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라라 가문은 여전히 알폰소 8세의 섭정직을 유지했다. 1162년,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로부터 톨레도를 무력으로 빼앗은 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를 톨레도 총독으로 선임했다. 페르난두 2세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라라 가문은 페르난두 2세가 톨레도와 세고비아를 자국의 영역을 삼는 것을 용인했다. 또한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도 로그로뇨와 라리오하 일대를 카스티야로부터 빼앗았다.
1164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카스티야 왕국 깊숙이 진격해 그해 6월 또는 7월에 벌어진 우에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적장인 만리케 페레스 데 라라 백작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라라 가문은 알폰소 8세를 호리타 데 로스 카네스로 피신시켰다가 다시 아빌라 시로 피신하면서 저항을 이어갔고,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알폰소 8세 확보에 실패하자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알폰소 8세를 보호한 아빌라 시는 훗날 알폰소 8세에 의해 "아빌라 데 로스 라알레스(Ávila de los Leales: 충성스러운 아빌라)" 칭호를 수여받았다. 1166년, 페르난두 2세는 라라 가문의 구성원들과 소리아에서 만나 톨레도를 카스티야 왕국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내전은 종결되었지만, 알폰소 8세는 자신과 왕국을 심하게 괴롭힌 이웃 국가들에 대한 뼈저린 적대 의식을 마음 속 깊이 간직했다.
1170년 성년이 된 알폰소 8세는 부르고스에서 카스티야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고 가스코뉴 백국을 지참금으로 지불했다. 이리하여 서유럽에서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잉글랜드-아키텐 연합 왕국의 후원을 받게 된 그는 이웃 국가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우선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1170년 6월, 알폰소 8세와 아라곤 왕 알폰소 2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중재로 사하군에서 어떠한 적을 만나든지 서로 힘을 합치기로 합의하고,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알폰소 8세의 고모인 산차와 알폰소 2세의 결혼을 주선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 내부사정과 무슬림과의 전쟁으로 인해 나바라 왕국에 큰 압박을 가하지 못했고,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던 안초 6세는 1173년 카스티야를 공격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뒤 알마잔에서 빼앗은 영토를 귀족들에게 분배했다. 1174년 봄,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군대가 나바라 왕국을 합동으로 공격했다. 그해 7월 아라곤 왕 알폰소 2세는 밀라그로 성을 공략하고 파괴했으며,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군을 격파한 뒤 안초 6세가 있던 르귄 성을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다. 안초 6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산골짜기로 도주했고, 양군은 나바라 각지를 파괴한 뒤 철수했다.
1175년 여름 아라곤과 카스티야 연합군이 재차 나바라를 침공해 타격을 입히고 돌아갔고, 1176년 여름엔 카스티야군이 쳐들어와 르귄 성을 재차 공략했다. 이에 안초 6세는 그해 8월 25일 알폰소 8세와 7년간의 휴전 협약을 맺은 뒤 영국 국왕 헨리 2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1177년 3월 16일, 알폰소 8세와 안초 6세는 헨리 2세의 중재에 따라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두 나라는 1158년의 국경으로 돌아가야 했다. 안초 6세는 로그로뇨, 나바레테, 엔트레나, 아우세호를 반환해야 했고, 알폰소 8세는 레귄 등 여러 성을 복구하기로 했다. 또한 알폰소 8세는 안초 6세에게 10년간 매년 3,000 마라베디를 보상금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1177년, 알폰소 8세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와 함께 쿠엔카를 공격해 공략에 성공했다.
1179년 4월 15일, 안초 6세와 알폰소 8세는 나헤라와 로그로뇨 사이의 지점에서 만나 국경을 명확하게 정의해 영토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도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때 나바라 왕국은 더 이상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이 되지 않고 오로지 아라곤 왕국에 복종하겠다는 문구가 협약서에 삽입되었다. 이후 두 나라는 서로에게 빼앗았던 영토를 상호 반환했다. 알폰소 8세는 뒤이어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와 카솔라에서 만나서 아라곤 왕국이 무르시아를 공략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가로 아라곤 왕국이 발렌시아에 대한 주권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또한 양자는 할 수 있는 한 알안달루스를 합동으로 공략하고 빼앗은 영토를 공평하게 나눠가지기로 했다.
한편, 레온 왕국의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이 나바라 왕국을 연이어 침략하는 틈을 타 1178년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해 카스트로헤리스, 두에나스를 공략했다. 알폰소 8세는 이에 맞서 포르투갈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1세는 페르난두 2세가 다수의 병력을 카스티야 방면으로 보낸 틈을 타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공격해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1180년 페르난두 2세와 알폰소 8세가 토르데시아스 마을에서 만나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하면서 양국 간의 전쟁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1186년 알폰소 8세는 톨레도를 수호하기 위해 결성된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무슬림에게서 빼앗은 모든 영토의 1/5를 기사단에게 넘길 것이며, 왕실 수입의 1/10을 기사단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사단은 이에 고무되어 무슬림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공격해 카스티야의 영역을 계속 늘려줬다.
1188년 1월 22일, 레온 왕국의 페르난두 2세가 사망하고 알폰수 9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폰소 8세와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했다. 그해 8월 알폰수 9세가 카리온에 찾아오자, 알폰소 8세는 사촌을 기사로 선임하는 의식을 거행했고,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손에 키스하고 검과 허리띠를 받았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스와비아 공작 콘라드 역시 이 자리에 참석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콘라드는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렝겔라와 결혼하고자 이곳에 찾아왔지만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이후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상호 방위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얼마 안가 협약을 깨고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가 발렌시아 데 돈 후안과 발데라스를 포함한 여러 영토를 공략했다.
1189년, 알폰소 8세는 당초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과 함께 분할하기로 했던 협약을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 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동맹을 맺고 아라곤 왕국을 도모하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사신을 보내 반 카스티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산슈 1세, 그리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1191년 5월 12일 우에스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나바라-레온-아라곤-포르투갈 4개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한 국가가 공격당하면 다른 국가들이 즉시 원조하기로 했다.
우에스카 협정이 체결된 후, 나바라-아라곤 연합군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119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가 다른 연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우에스카 협정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1194년 나바라 국왕 안초 6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협정을 파기했다. 여기에 알폰수 9세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무와히드 왕조의 침공을 우려해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자,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레온 왕국에 파문과 성무 금지령을 내리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은총을 레온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알폰소 8세는 이 기회를 틈타 레온 왕국의 남부 지역을 공격하여 베나벤테를 포위했지만 함락에 실패했고, 뒤이어 북쪽으로 이동해 아스토르가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푸엔테 카스트로를 공격해 며칠 만에 함락시키고 도시민들을 도륙한 뒤 레온 성벽에 도달했다. 알폰수 9세는 레온 시를 겨우 빠져나갔지만, 미처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도륙되었고, 유대인 구역과 회당은 파괴되었다. 알폰수 9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반격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는 카리온까지 진군하면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해 레온 시의 참상을 복수했다.
이후 교황 사절이 양국의 갈등을 중재했고, 알폰수 9세와 알폰소 8세는 1194년 4월 20일 바야돌리드 지방의 토르데후모스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카스티야 국왕은 페르난두 2세 사후 레온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알바, 루나, 포르티야, 발데라스, 볼라뇨스 등지를 돌려주기로 했으며,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장녀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앞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95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마라케시에서 중병을 앓고 있으며, 그의 동생인 알 안달루스 타이파 아부 야히아가 지중해를 건너 왕을 자칭하며 마라케시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때를 틈타 세비야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야쿱은 아부 야히야의 반란을 신속하게 제압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와서 카스티야 왕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알폰소 8세는 대규모 전투가 임박하자 레온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빼앗아갔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해놓고 아직 돌려주지 않은 점을 들며 지원을 보내길 거부했다.
결국 단독으로 무와히드 왕조와 상대하게 된 알폰소 8세는 1195년 7월 19일 알라르코스 전투를 치렀다. 그는 적병이 아군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7세가 파견한 원군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전투를 벌여도 괜찮을 거라 판단하고 전투를 감행했다. 그러나 카스티야군은 이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전승에 따르면, 2만에서 2만 5천 명에 달하는 카스티야인이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기사단 500명 역시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과장된 수치이겠지만, 카스티야군이 이 전투에서 참담한 대패를 당한 건 분명하다. 야쿱은 여세를 몰아 말라곤, 베나벤테, 칼라트라바, 카라쿠엘, 토레 데 과달페르사 등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이제 툴레도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자, 알폰소 8세는 다시 한 번 레온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알폰수 9세는 톨레도로 가서 알폰소 8세와 만나 이제라도 영토를 돌려준다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이번에도 확답을 피했고, 알폰수 9세는 격분한 채 톨레도를 떠났다. 알폰소 8세에게는 그나마 다행히 야쿱이 군대의 손실이 크고 다들 지쳤다고 판단하여 툴레도를 공격하는 대신 세비야로 철수한 덕분에 톨레도를 상실할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야쿱의 군대는 엑스트레마두라, 타구스 계곡, 라 만차, 톨레도 주변을 초토화했고, 몬탄체스, 트루히요, 플라센시아, 탈라베라, 에스칼로나 등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야쿱은 곧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베리아 반도에 흥미를 잃고 1187년 수도 마라케시로 돌아간 뒤 1199년 2월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이프리키야의 바누 가니야의 반란 진압에 몰두하느라 알 안달루스에 신경쓰지 못했고,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왕국은 이때를 틈타 알 안달루스를 갉아먹었다.
1212년 바누 가니야 진압에 성공한 앗 나시르는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가 톨레도와 코르도바 사이에 위치한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본부인 살바티에라를 공략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이교도와의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알폰소 8세가 죽음을 각오하고 레콩키스타에 뛰어들겠다고 답하자, 교황은 카스티야 국왕을 도울 십자군을 선포하고, 알비파 십자군을 이끌던 아르노 애므리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였다. 알폰소 8세가 "내가 이교도들과 싸우고 있을 때 레온 국왕이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며 빈 틈을 노릴까 걱정된다"라고 호소하자, 아르노는 이베리아 각국에 "카스티야인들이 이교도와 싸우는 동안 카스티야를 공격한다면 파문에 처하겠다"라고 위협했다.
1212년 7월, 알폰소 8세를 중심으로 아라곤의 페드로 2세, 나바라 왕국의 안초 7세가 직접 참전하고 포르투갈 왕국과 레온 왕국의 귀족들이 참여하고 성전 기사단이 가세한 연합군이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함마드 앗 나시르가 이끄는 무와히드 왕조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알폰소 8세는 여세를 몰아 칼라트라바를 수복하고 뒤이어 알라르코스, 베나벤테를 탈환했다.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참패를 당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무와히드 왕조는 급격히 쇠퇴했다.
이 무렵,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는 교황의 경고에 따라 카스티야 왕국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레온 왕국 국경 너머의 카스티야 점령지를 은밀히 탈환했다. 나중에 귀환한 알폰소 8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이 거둔 대성과에 고무되었기에 굳이 따져묻지 않았다. 그 대신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2세를 초대하여 코임브라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페냐피엘과 알만자를 레온 왕국에 돌려주기로 했다.
2.7. 엔리케 1세와 페르난도 3세
1214년 10월 5일, 알폰소 8세는 쿠티에르-무뇨스에서 열병으로 사망했고 당시 10살이었던 아들 엔리케 1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다. 알폰소 8세는 죽기 전에 아내 엘레오노르에게 섭정을 맡겼지만, 엘레오노르마저 남편이 죽은 지 24일 만에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장녀 베렝겔라에게 엔리케 1세의 섭정을 맡겼다. 그러나 베렝겔라의 섭정은 엔리케 1세의 가정교사를 맡은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 백작의 방해를 받았고, 베렝겔라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의 압박에 못 이겨 엔리케 1세의 후견인 자리를 그에게 넘겼다.알바로 누녜스는 1215년 엔리케 1세와 포르투갈 국왕 산슈 1세의 딸 마팔다의 결혼을 주선했다. 두 사람의 약혼식은 부르고스 시에서 거행되었지만,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두 부부가 사촌 지간이니 교회법에 어긋난다며 불허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에 알바로 누녜스는 레온 국왕 알폰수 9세의 딸 산차와 그의 결혼을 주선해,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을 통합시키고 베렝겔라의 아들 페르난도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려 했다.
1217년 6월 6일, 엔리케 1세는 팔렌시아의 에피스코팔 궁전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지붕 위에서 떨어진 타일에 머리를 직격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엔리케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부르고스와 두에냐스 사이에 위치한 타리에고 데 세라토 마을에 그 시신을 숨겼다. 그러나 베렝겔라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두에냐스 시를 점거하고 엔리케 1세의 유해를 확보한 뒤 팔렌시아와 부르고스의 주교들을 보내 유골을 관리하게 했다. 훗날 엔리케 1세의 유해는 데 라스 우엘가스 데 부르고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베렝겔라는 알폰수 9세가 엔리케 1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왕실의 혈통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그녀는 일단 엔리케 1세가 죽었다는 것을 숨기고 알폰수 9세에게 아들 페르난도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올 때까지 임시로 카스티야 여왕을 맡았다. 알폰수 9세가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페르난도를 보내자, 베렝겔라는 곧바로 엔리케 1세의 사망을 대내외에 공개한 뒤 아들 페르난도 3세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옹립했다.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조언에 따라 라구나 데 두에로, 토르케마다, 토르도마르를 거쳐 부르고스로 향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민중들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병력이 계속 소모되자, 그는 부르고스를 공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레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돌아가는 동안 팔렌시아를 통과하면서 기론과 메네세스 가문의 영지를 초토화했다. 한편 페르난도 3세는 아빌라와 세고비아, 라라, 팔렌시아 일대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곳의 병력을 차출해 1217년 8월 중순 부르고스에 입성해 민중의 환호를 받고 8월 31일에 부르고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217년 9월 페르난도 3세가 부르고스를 떠나 팔렌시아로 향했을 때, 알바로 누녜스의 형제 페르난도가 레빌라 발레헤라에서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격퇴되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에레루엘라 데 카스티야레라에서 또다른 매복 공격을 시도했지만, 수에로 텔레스 데 메네세스가 이끄는 적군의 역습을 받고 사로잡혀 바야돌리드로 호송되었다. 그는 알라르콘, 카네테, 타리에고, 아마야 및 빌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등 자신이 통제하는 요새들을 모조리 헌납해야 했다.
1217년 11월, 알폰수 9세는 풀려난 후 레온으로 망명한 알바로 누녜스와 함께 페르난도 3세와 만나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218년 봄 카스티야를 재차 침공해 메디나 데 리오세코 인근의 발데네브로 요새를 공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로베 데이스 데 하로, 알바로 디아스 데 카메로스,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빌라마요르를 파견해 레온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알폰수 9세와 라라 가문에게 격퇴되어 카스트레욘 데 라 페냐 요새로 퇴각했다. 알바로 누녜스는 이 요새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끌던 중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요새에 갇혔던 카스티야군은 적이 지휘관의 사망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강경파였던 알바로 누녜스가 사망한 뒤, 알폰수 9세와 페르난도 3세는 베렝겔라의 중재에 따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양자는 1218년 8월 26일 토로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아버지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알폰수 9세는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고 다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토로 협약이 체결되면서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은 여전히 페르난도 3세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는 이들을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하면서 화해를 도모하는 한편, 부르고스와 팔렌시아 등 자신을 지지하는 지역의 귀족 및 주교들을 중용하여 라라 가문을 견제했다. 또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외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했다. 1219년, 그는 어머니 베렝겔라의 조언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이자 슈바벤 공작 필리프의 딸인 슈바벤의 베아트리스와의 혼사를 추진한 끝에 성사시켰다.
1222년,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 베렝겔라의 권유에 따라 남동생 알폰소를 최근에 사망한 몰리나 백작 곤살로 페레스 데 라라의 상속녀인 마팔다와 결혼시키고 라라 가문과의 갈등을 종식하기 위한 자프라 협정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또한 1224년에는 여동생 베렝겔라를 예루살렘 왕국 국왕 장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수 9세가 포르투갈의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산차를 장 1세와 결혼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2.8. 레온 왕국과의 통합
1230년, 레온 국왕 알폰수 9세는 메리다, 바다호스, 엘바스, 탈라베라 라 레알 공략에 성공한 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방문해 대 야고보에게 경의를 표한 후 레온으로 향하다가 그해 9월 24일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당초 첫 왕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페르난도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베렝겔라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르난도가 왕위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페르난도가 이미 카스티야의 국왕인 점이 걸림돌이었다.카스티야 왕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은 알폰수 9세에게 테레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산차와 둘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유했다. 알폰수 9세 역시 자신의 동의 없이 카스티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베렝겔라와 감히 자신에게 대항한 페르난도 3세 모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의 설득에 따랐다. 그리하여 알폰수 9세 사후 산차와 둘세가 레온과 갈리시아의 공동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3세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토로에 입성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힘을 합쳐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을 제압했고, 페르난도 3세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산차와 둘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협상한 끝에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에서 연간 3만 메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왕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국왕에 이어 레온과 갈리시아 국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2년간 두 왕국의 통합에 반대하는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잇따랐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모든 반란을 평정한 후 1233년에 왕국을 카스티야, 레온, 갈리시아의 3개의 행정 단위로 나누고 각 도시들과 영주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형태로 행정 체계를 개편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3.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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