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및 왕실의 구성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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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녀( 王 女)는 왕의 딸을 의미하는 말이며, 주나라 때 왕희(王姬)라고 불렀다. 황제의 딸인 경우는 황녀(皇女)다. 출생 순서에 따라 1왕녀, 2왕녀, 3왕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왕녀가 왕위나 황위 계승권자일 경우 황제국인지, 자주국인지, 제후국인지에 따라 황태녀/왕태녀/왕세녀가 된다.
2. 표준어 여부
근래에 들어서는 공주의 잘못된 표현으로 오해받아 '순화되어야 할 일본식 표현'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지만[1] 고문서 등을 찾아보면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빈번히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중전의 딸이든 후궁의 딸이든 공주나 옹주로 봉작되기 전에는 그냥 왕녀라고 부른다. 왕녀라는 말은 '왕의 딸'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로서, 엄밀히 말해 작위명에서 의미가 퍼져나간 공주와 다르다. 즉, 왕녀에게 작위를 내린 것이 공주/ 옹주이다. 이 때문에 왕녀가 아니라 공주라 해야 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왕의 딸을 한데 묶어 왕녀, 왕의 아들을 한데 묶어 왕자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 이 중에서 왕녀에게 작위를 내린 것이 공주나 옹주, 궁주(宮主) 등이고, 왕자에게 작위를 내린 것이 태자, 세자, 정윤, 대군, 군 공작등이다. 왕의 자식 자체를 이르는 표현과 작위명은 엄연히 다르다.본래 왕실 예법에서 관례 등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는 왕의 자녀들은 정식 이름이나 봉작명이 없다. 왕은 자식을 아명으로 부르고, 궁인들은 아기씨 등으로 돌려 부르므로 이름 쓸 일이 없었다.
3. 동양
3.1. 한국
3.1.1. 신라
호칭은 공주. 왕의 적녀뿐 아니라 왕의 서녀도 공주라고 하였으며, 종친의 딸을 공주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프린세스, 일본의 내친왕과 비슷한 개념. 왕의 딸이나 종친의 딸은 성인식을 치르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공주였다.[2] 따로 봉호를 내리지 않았으며, 이름+공주로 불렸다.(ex. 덕만공주, 승만공주)왕실의 족내혼 전통에 따라 남매[3]나 가까운 종친에게 시집갔다. 드물지만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있었다.(ex. 덕만공주, 승만공주, 만공주)
3.1.2. 고려
3.1.2.1. 전기
주로 궁주(宮主)라고 불렸다. 이외에도 궁주, 전주, 택주 등으로 불렸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왕실 여인의 호칭을 이해해야 한다. 먼저 고려의 왕실 여인들의 호칭은 지역이나 건물 이름에서 땄고, 왕비• 태후•공주• 종친의 아내 등 칭호의 급은 달라도 칭호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왕녀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서 호칭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전주, 궁주>원주>옹주>택주 순이었다.적통 왕녀는 고려 족내혼의 전통을 따라[4] 종친에게 시집가거나 심지어 이복남매인 왕의 왕후가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초기에는 왕의 부인들이 대다수가 출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건물 이름+(원)부인'이라고 불렸다. 고려는 족내혼을 해서 공주가 왕의 부인이거나 종친의 부인이었다. 그리고 건물 이름을 따 ㅇㅇ궁부인 혹은 ㅇㅇ전부인이라고 불렸다.
성종 이후 문물정비가 이뤄지고 고려 중기[5]에는 임금이 왕비와 후궁에게 보통 건물을 하사하고, 그 건물의 이름을 따라 ㅇㅇ궁주(宮主)(혹은 전주나 궁비宮妃), ㅇㅇ원주(혹은 원비院妃) 등으로 불렀는데, 고려 초기의 ㅇㅇ궁부인, ㅇㅇ원부인 등 호칭이 변형된 듯하다.
궁주가 원주보다 높았고, 전주가 궁주와 비슷하나 격이 조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가 궁주로 승진하였으며[6], 궁주는 선왕의 후궁[7], 왕비, 높은 후궁 등을 가르켰고 공주 역시 궁주(전주)로 봉작했다. 공주에게도 건물을 내려 그 건물의 이름을 따서 칭호를 정했다.[8] 전주는 후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칭호였는데 좀 더 높은 신분이었다. 왕태후는 전주였다. 태후가 거주하는 곳의 건물 이름이 주로 ㅇㅇ전이었기 때문이다. 왕후나 왕비, 가끔 공주의 칭호에서 보인다.
왕족 출신은 특별하여 왕녀일 경우 무조건 생전 왕후, 왕비였다. 왕족 출신일 경우 최소한 궁주부터 시작하여 사후에 왕비로 추증되었다. 반면 왕비는 칭호가 기록에서 다수 발견되고, 왕족 출신이나 후궁 중 한 명이 되었다.
궁주는 보통 왕족이나 귀족 출신 여인이었고, 양인 이상 궁녀가 아들을 낳고 총애를 받은 경우 봉작을 받고 승격할 수 있었다. 또한 봉작을 받지 못한 궁인의 칭호 중 목종 때 요석택궁인(邀石宅宮人)이라는 칭호가 보여 궁인의 칭호가 택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보인다. 또한 강종의 서녀가 정화택주(靜和宅主)의 칭호를 받았으므로 딸이 어머니의 작위를 따라갔던 궁주 등 고려의 칭호로 미루어 볼 때 택주가 궁인과 딸에게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로 보아 봉작을 받지 못한 궁인의 딸은 왕족에게 시집가지 못한 듯하다. 궁주(전주)는 고려 족내혼의 전통을 따라[9] 왕후가 되거나 종친에게 시집갔는데 궁인의 딸은 신하에게 시집갔다. 충혜왕 때, 내명부 관제가 무너져 천민 출신 궁인에게 택주나 옹주의 봉작이 남발되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오므로 천민 출신 궁인은 이를 받지 못했다.
원간섭기 이전 고려시대 왕녀의 칭호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왕후: 보통 왕족 출신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또한 사후에 왕족 출신 후궁이나 생전 왕비를 추증.
- 왕비: 왕후의 아래. 자리가 비면 후궁들 중 한 명을 봉했다. 왕후와 칭호가 공존이 가능하다.
- 왕녀일 경우 생전 왕후, 왕비. 왕족 출신이라면 최소 궁주에서 시작, 사후에 왕후로 추증.
- 전주: 전(殿)을 소유한 자. 태후는 전주였다. 가끔 왕후, 왕비, 왕녀가 썼다.
- 궁주: 후비와 왕녀의 칭호. 간택을 받은 왕족, 귀족 출신. 혹은 왕자를 낳은 양인 이상 궁인이나 원주에서 승격한 자. 왕녀에 한해서는 공주와 같고, 실생활에서 많이 불린 칭호이다. 비(妃)일 경우 별칭은 궁비(宮妃).
- 원주: 간택받은 귀족이나 왕자를 낳고 봉작을 받은 양인 이상 궁인. 궁주보다 낮다. 원부인의 변형이며 실생활에서 많이 불린 칭호이다. 비(妃)일 경우 별칭은 원비(院妃).
- 택주: 택호를 받은 양인 궁인 혹은 궁인의 딸. 장애가 있는 왕녀.[10]
3.1.2.2. 중후기
원간섭기 때 호칭적인 면에서 궁주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원나라 공주가 공주의 칭호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공주=궁주'라고 여기던 고려의 왕실 칭호에서 외왕내제적 호칭이 철폐되어 원나라 출신이 아닌 이상 공주나 궁주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공주 칭호는 원나라의 공주, 원나라 출신 후궁들과 그들의 딸들이 쓰게 되어 칭호가 격하된 것이다. 후비와 왕녀가 칭호를 공유하는 고려 왕실의 전통에 비추어 어머니를 따라 왕녀는 궁주 칭호를 쓸 수 없게 되었다.궁주=공주가 격하되어 고려인 출신 후비와 그들의 딸이 쓸 수 없게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정화궁주, 정화궁주의 딸인 정녕원비(靖寧院妃), 충혜왕의 딸 장녕옹주이다. 정화궁주는 제국대장공주의 눈밖에 나서 부고에 가둬진 뒤에 정신부주라고 칭호가 바뀌었고, 정녕원비는 아버지 충렬왕이 즉위할 당시 궁주로 책봉되었지만 시호는 한 단계 낮은 원비가 되었다. 반면 장녕옹주는 덕녕공주의 딸이었다. 궁주의 칭호는 원간섭기를 벗어난 공양왕과 조선 초기 때 복구된다.
옹주와 택주는 고려 후기에 자주 쓰였다. 고려 후기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심해져 택주는 왕실 여인이 아닌 지체 높은 여성에게도 쓰였다. 옹주는 고려시대에 임금의 후궁에게 주는 봉작이기도 했다. 본래 궁주(宮主)라는 봉작을 썼고 고려 후기 충선왕 때 궁주를 옹주로 고치며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충선왕 때부터 옹주 칭호는 궁주보다 낮은 원비(원주)보다 낮게 쓰여 본래의 목적을 상실했다. 충선왕에게 의붓딸이 되는 순비 허씨의 딸들과 충선왕의 친딸 수춘옹주(壽春翁主)는 모두 옹주로 책봉되었다. 이들은 궁주가 족내혼을 하던 왕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충선왕 때 이르러 왕녀와 종실 간의 혼인을 금지했으므로, 옹주가 궁주를 대체한 듯이 보이지만, 수춘옹주의 출신에 주목해야 한다.
수춘옹주는 고려사 열전의 공주에 누락되었다. 천인 궁인이나 왕자를 낳지 못해서 봉작을 못 받은 양인 궁인 소생은 아예 고려사의 왕자나 공주 항목에서 기록이 누락된 사례가 빈번하다. 그리고 수춘옹주의 어머니는 이복형제 덕흥군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기록에 없다. 천인 출신 궁인이 낳은 왕자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소군이라 불리며 출가한 고려 왕실 전통을 따라서 덕흥군은 출가했다. 수춘옹주의 어머니도 덕흥군의 어머니와 같은 궁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수춘이 궁주를 대신해 옹주의 칭호를 받은 것은 희박해보인다.[11]
충혜왕 이후로도 옹주는 기생, 노비 출신 후궁 봉작으로 칭호의 급이 낮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은천옹주나 우왕의 후궁들 중 일부는 기생 출신이었다. 그리고 왕족 여인과 왕자의 처, 후궁의 어머니 등 왕실과 관련된 외명부를 봉작하느라 칭호가 남발되었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3년 세자를 제외한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 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혹은 원주가 후궁과 서녀의 칭호로 정착되고 옹주가 이를 대신했다는 시각도 있다. 출처 그러나 고려 말기로 갈수록 옹주 칭호가 서왕녀와 후궁에 그치지 않고 남발되었음은 사실이다.
원갑섭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공주: 원나라 황족/귀족 출신 후비나 그들의 딸.
- ㅇ비(妃), 원주, 원비(院妃): 고려인 출신 후궁과 그들의 딸. 혹은 공주가 되지 못한 몽골 출신 후궁. 예외적으로 우왕 때 노비출신이 되기도 하였다.
- 옹주: 천민 출신 후궁과 궁인의 딸, 왕실 관련 외명부 봉작(왕족 여인, 왕자의 처, 후궁의 어머니 등)
3.1.3. 조선
조선 전기엔 왕의 적녀에겐 궁주(宮主), 왕의 서녀에게는 옹주(翁主)로 쓰이다가 세종 때에 들어서야 확실하게 제정되어, 정실인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녀를 공주, 첩인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녀를 옹주로 정했다.공주와 옹주는 모두 품계를 초월한 무품이었다. 보통 어릴 때에는 왕녀 아기씨라 불리다가 보통 7~8세에 공주나 옹주로 봉해진다. 왕실 법도에 따라 좋은 뜻을 가진 봉호(미칭)를 붙였다.[12] 호칭은 사극에서 보통 마마로 불리지만 고증 오류로, 자가라고 불려야 한다.
10대 초중반에 혼인하여 출궁했다.[13] 사대부 가문의 서녀는 적녀보다 훨씬 떨어지는 혼처에 시집가거나 첩으로 들어가는데 반해 왕실의 권위가 올라간 조선왕조에서 왕가의 여식은 서녀인 옹주라도, 하다못해 어머니가 공노비 출신의 궁녀라고 할지라도 조선 왕가의 혈통을 타고난 이상 적통인 공주와 다를 바 없는 명문가에 시집갔다.[14] 공주와 옹주의 시가는 며느리로 들어온 왕녀들을 말 그대로 받들어 모셔야 했고 시아버지/시어머니조차 그녀들에게 존대를 해야 했으며 부마는 공주/옹주가 먼저 죽으면 재혼도 하지 못하고 수절해야만 했다(...). 그러나 출궁 후에는 출가외인으로 취급받았으며,[15] 왕녀와 부마 사이의 자식은 조선 왕가의 자손이 아닌 외척으로 부마 가문의 자손으로 보았다.[16]
왕의 딸이라는 높은 신분이고 왕위계승권도 없어서 왕자(대군, 왕자군)와는 달리 역모로 인해 신분이 박탈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은 없지만 아버지인 왕이 폐위되거나 생모가 죄에 휘말리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폐서인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17]
3.2. 중국
중국은 군주가 스스로 황제를 칭했기 때문에, 군주의 딸도 왕녀가 아닌 황녀이며 왕의 딸이 왕녀이다.한나라 때 황녀는 모두 현공주(縣公主)로 봉하였는데 의복은 열후와 같았다. 관료로 치면 삼공이나 구경으로 대우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존숭(尊崇)하는 경우는 장공주(長公主)라 부르고 의복은 번왕(蕃王)과 같았다. 보통 황제의 누이, 고모의 항렬인 경우를 존숭할 때 장공주라 했다. 그냥 황녀임에도 불구하고 장공주로 책봉된 사례도 있지만 특별한 경우일 것이다.
제왕(諸王)의 딸은 향공주(鄉公主)나 정공주(亭公主)로 봉하였는데 의복이 향후(鄉侯)나 정후(亭侯)와 같았다. 관료로 치면 중2천 석 대우였다.[18] 후한의 장제는 동평헌왕 유창의 딸 5명과 낭야효왕 유경의 딸을 특별히 현공주로 봉하여 황녀와 동일하게 대우한 사례가 있다.
봉작을 받은 공주가 사망되면 소생의 아들이 어머니의 봉작을 이어 해당 지역의 열후로 봉해져서 봉국을 후세로 전하였다. 다만 제왕의 딸인 향공주나 정공주의 경우에는 작위를 전하고 계승하는 법도가 없었다.
명나라 때는 황제의 딸들을 적서에 관계없이 모두 공주로 책봉했고, 청나라 때는 황후의 딸들은 고륜공주, 후궁의 딸들은 화석공주로 구분하기는 했으나 후궁의 딸임에도 황제가 총애하면 고륜공주가 되기도 하는 등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보통 10대 초중반에 혼인하여 출궁했는데, 화번공주라 하여 황녀를 이민족 국가의 왕비로 보내기도 했다. 다만 황녀는 물론 부모들 역시 외국에 딸을 보내긴 영 꺼렸기 때문에 초반에만 진짜 황녀를 보냈고, 나중에는 종실녀를 양녀로
중화제국에서 황실의 직계 딸이 아닌 경우, 즉 현 황제의 형제 친왕이 낳은 딸일 경우는 군주, 군왕의 딸은 현주로 봉했다.
3.3. 일본
황녀와 천황으로부터 3대 이하의 종실녀를 내친왕으로 책봉한다. 보통 족내혼으로 황후나 태자비, 친왕비, 종친의 부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가끔 천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현대에는 족내혼을 하지는 않고 평민[19] 남성과 결혼한다. 결혼 후에는 황적이탈하여 법적으로 평민이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개정된 황실전범에 따르면 천황은 남계의 남성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천황이 될 수는 없다.
4. 서양
전근대 유럽 왕실에서는 왕실간에 통혼을 했기 때문에 왕녀들은 보통 외국으로 시집가 왕비나 왕자비/ 태자비가 되었다.[20] 루이 15세의 세 딸들이나 루이 16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같이 자국의 왕녀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해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일부 있었지만...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는 국가에서는 왕자가 없는 경우 왕녀가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다.같은 왕녀라도 왕비의 딸과 정부의 딸은 대접이 천지차이였다. 정부 소생의 왕녀는 왕의 조카딸보다 지위가 낮았다. 이는 호칭에서부터 알 수 있다. 영국 기준으로 왕비 소생의 왕녀는 물론 왕의 조카딸[21] 또한 princess 칭호를 받았지만, 정부 소생의 왕녀는 lady였다.[22] 전술한 서양의 태자비나 왕자비, 자국의 여왕이 될 수 있는 건 오직 왕비의 딸 뿐이다. 동양과는 달리 왕비가 낳지 않은 왕의 딸들은 서녀도 아니라 왕족의 성원권을 가지지 못하며 당연히 왕위 계승권도 없는 사생아일뿐이다. 물론 어머니인 정부가 귀족인 경우에는 왕족은 못 되어도 고위 귀족으로 대우받으며 귀족 남성과 결혼하여 공작부인, 백작부인 등이 되거나 정부 소생의 왕녀, 본인이 작위를 받게 될수도 있다.[23]
5. 매체
현대 한국에서는 왕의 딸 = 공주란 도식이 성립했다. 그래서 옹주가 뭔지 모르는 경우도 많고, 공주/옹주가 작위명임을 모르는 사람도 흔하다. 하지만 왕의 딸 = 공주라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별 탈 없이 돌아간다. 현대에 그런 엄격한 왕실 호칭이 쓰일 일도 없고 해서. 이 때문인지 왕의 딸만이 공주고 황제의 딸은 공주가 아니라 황녀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중국왕조에서는 천자의 딸인 황녀만을 공주로 봉했다.정작 이 표현이 골치거리가 되는 것은 오히려 공주(姬, 히메)라는 말이 쓰이는 일본어를 번역할 경우. 상당한 난제가 되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즉 일본의 봉건적인 체제 때문에 생긴 일로, 이 당시 일본 내부는 사실상 일국의 군주나 다름없는 수많은 다이묘들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정확한 경위는 불명이지만 왕희에서 왕을 빼서 희(姬 히메) 부분만 사용하는 것이 한 나라의 공주라는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왕을 뺀 이유는 여러가지가 추측되나, 그 당시에도 천황에 대한 예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래 히메(姬)란 한자 자체가 '지체 높은 여성'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현재도 공경 귀족이나 황족 등 왕의 딸이 아니지만 그만큼 지체 높은 가문의 딸을 '히메'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와 구별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왕녀라는 표현이 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탓에 번역가들은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물론 요근래에서의 창작물은 왕녀란 단어를 그대로 쓰고있다.
왕녀(王女)의 어순을 거꾸로 뒤집으면 女王(여왕)이 된다. 당연히 뜻은 전혀 다르다. 왕녀(王女)는 왕(王)의 딸(女)이라는 뜻이고 여왕(女王)은 여성 왕이라는 뜻이다.
양판소, 로맨스 판타지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히로인이다. 보통은 먼치킨 주인공의 하렘물의 몇 번째 부인 정도의 역할만 수행하는 트로피 히로인, 트로피 와이프. 선역일 경우 정숙하고 품위넘치는 자애로운 미녀, 미소녀 귀부인, 영애, 악역일 경우 악역 영애물, 악녀물의 여주인공 악녀로 흔히 등장하는 여캐 유형이다.
6. 왕녀인 인물/ 캐릭터들
공주/목록, 공주/캐릭터 문서에서 일괄 기술한다.7. 왕녀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물
해당 이야기에 대한 문서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수록한다.- Surge Concerto
- 겨울왕국
- 공주와 개구리[24]
- 괴물왕녀
- 구름이 피워낸 꽃
- 꿈의 크레용 왕국
- 디지캐럿
- 두 사람의 왕녀
- 리본의 기사
- 리틀 프린세스 소피아
- 요술공주 밍키
- 마알왕국의 인형공주
- 머메이드 멜로디 피치피치핏치
- 메루루의 아틀리에
-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시리즈
- 바리공주 설화
- 발키리 프로파일2 -실메리아-
- 베이비 폭군[25]
- 빨간망토 차차
- 백설공주
- 별나라 요정 코미
- 새벽녘보다 유리색인
- 새벽의 연화
- 선덕여왕(드라마)
- 성계의 문장
- 성계의 전기
- 스크랩드 프린세스
-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 신비한 별의 쌍둥이 공주(오리지널, GYU!)
- 아라비안즈 로스트
- 아이레
- 악의 딸
- 유그드라 유니온
- 인어공주
- 왕녀자매해체음미
- 잠자는 숲속의 미녀
- 투 러브 트러블
- 티어문 제국 이야기 ~단두대에서 시작하는 황녀님의 전생 역전 스토리~
- 파이어 엠블렘 성마의 광석
- 푸른사막 아아루
8. 관련 문서
[1]
일본에서는 한국, 중국과 달리 공주라는 단어를 잘 안 쓰고 황녀, 왕녀라는 단어를 주로 쓴다.
[2]
왕의 아들은 왕자.
[3]
신라에서는 이복 남매나 이부 남매가 혼인하는 일이 흔했다. 심지어 친남매간에 혼인하는 일도 있었다.
[4]
흔히 고려의 족내혼은 초기의 경우가 널리 알려졌지만 고려는 멸망 때까지 왕실의 전통을 지켰다. 그래도 후기 들어서는 많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5]
여기서는 보통 목종부터 원간섭기 이전인 원종까지 일컫는다.
[6]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
원성태후는
연경원주(延慶院主)라고 불리다가 아들을 낳자 원(院)을 궁(宮)으로 고쳤다.
[7]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흥성궁주 경흥원주는 두 분 다 선왕의 비이니.."
[8]
고려 초기 왕자나 왕족이 이렇게 불린 경우가 있다. 문원 대왕의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이나 정종의 아들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예이다.
오등작제가 시행되고 난 이후에도
낙랑궁, 부여궁, 진한궁 등 나라의 이름이나 지역의 옛 지명 등을 붙인 별궁에 살았다. 이들의 봉호 역시 사는 궁궐에 따라 낙랑후, 부여후, 진한공 등이었다.
[9]
흔히 고려의 족내혼은 초기의 경우가 널리 알려졌지만 고려는 멸망 때까지 왕실의 전통을 지켰다. 특히 공주는 더 엄격해서 족내혼을 하지 않은 경우가 손에 꼽힐 정도이다.
[10]
수안택주(遂安宅主).
#
선종(고려)와
사숙태후의 딸이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다.
[11]
수춘옹주와
덕흥군의 차이점은 덕흥군의 어머니의 출신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춘옹주의 어머니가 궁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양인인지 천민인지 모른다.
[12]
예외적으로
정종의 딸들 대부분의 봉호가 지역이름으로 되어있다. 이는
세종이
정종을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그의 딸들을 옹주(翁主)가 아닌 군주(郡主)로 봉했고 후에
정종이 정식 국왕으로 인정받아 그의 딸들도 옹주로 승격되었을 때 새 봉호로 고치지않고 기존 봉호를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참고로
광해군 때까지는 군주의 봉호를 지역이름으로 정했고
인조 때부터는 군주도 좋은 뜻을 가진 봉호(미칭)를 사용했다.(ex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군주 시절 작호는 강원도 평창에서 따와 평창군주로 불렸고
효종의 딸
숙안공주의 군주 시절 작호는 미칭을 사용해 숙안군주로 불렸다.
[13]
고려 시대는 왕자와 왕녀가 건물을 하사받고 출궁했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왕, 왕비, 대비, 세자, 세자빈, 혼인하지 않은 왕자와 왕녀만 궁에서 살 수 있었다. 왕이 아끼는 자녀의 경우 혼인한 이후에도 데리고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원칙은 출궁이었다.
[14]
조선시대 궁중 법도상
서자, 서녀라 할지라도 모두
중전의 자식으로 취급했다. 이로 인해 중전만을 어마마마라고 할 수 있었고, 생모인 후궁은 그냥 어머니라고만 불렸으며 자녀에게도 존대를 해야 했다. 애초에 왕의 자녀는 모두 구분없이 무품인데 반해 후궁은 가장 높은 빈이 정1품이므로 신분 사회에서 낮은 계급에게 (설령 생모라 해도) 존칭을 쓸 이유가 없었다.
[15]
다만 왕녀는 일반 사대부의
영애와 달리 신하들이 반대하지 않는 한 궁궐에 드나드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16]
물론 왕실의 외손이다 보니 남들보다 당연히 출세는 훨씬 빨랐다. 단, 실권은 없고 위계가 높은 명예직 위주로 돌아갔다. 조선 중기 이후 종친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지만 왕녀의 아들은 가능했다.
[17]
휘신공주는 아버지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같이 폐서인이 되었고
효명옹주는 어머니 귀인 조씨와 같이 저주에 가담한게 들켜서 폐서인,
화완옹주는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해서 폐서인이 되었다.
공신옹주와
정혜옹주는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를 무고한 죄로 죽인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의 딸이란 이유로 폐서인이 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에 다시 옹주로 복권되었고
혜정옹주와
혜순옹주는 오빠
복성군과 어머니 경빈 박씨가 작서의 변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폐출될 때 같이 폐서인이 되었다가 인종의 간청으로 다시 옹주로 복권되었다.
[18]
한나라의 행정구역은
주 -
군 -
현 -
향 -
정 -
리 로 예속관계가 있다.
[19]
화족 제도의 폐지로 황족이 아닌 모든 일본인은 평민이다. 즉 근친혼이 아닌 이상 모든 황족의 배우자는 평민 출신.
[20]
자국의 고위귀족 영식과 혼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21]
왕의 남자형제의 딸. 즉, 왕자의 딸이다.
[22]
잉글랜드 왕국의
엘리자베스 1세의 공주 시절, 모후
앤 불린의 처형으로 서녀로 격하당한 후
시녀들이 그녀를 부르는 칭호가 'princess Elizabeth(엘리자베스 공주님)'에서 'lady Elizabeth(엘리자베스 아가씨)'로 바뀌자 총명했던 엘리자베스가 시녀들에게 어째서 칭호가 바뀌었냐고 물어봤다는 일화가 있다.
[23]
어머니가 귀족이 아니더라도 아버지인 왕의 총애에 따라 그 딸의 대우가 바뀐다. 본인이 공작이나 후작 등이나 남편없이 공작 부인이나 후작 부인 등이 될 수 있다. 물론 아버지인 왕에게 받은 총애에 따라 작위를 받거나 작위를 받지 않아도
지참금을 많이 받고 좋은 혼처로 시집을 가기도 한다. 반대로 총애를 받지 못한다면 국내에 있는 왕을 귀찮게하는 귀족을 달래기 위하거나 그냥 평민만 간신히 면할 취급 받고 영 안좋은 곳으로
분양 시집을 가기도 한다.
[24]
근데 사실 진짜 왕녀는 안 나온다.
[25]
19화에서 한 살이라는 나이에 황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