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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즐기는 거란인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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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란( 契 丹)은 요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했던 준몽골어족[2] 동호계 유목민 또는 반유목민 집단이다.2. 명칭
2.1. 어원과 파생
언어별 명칭 | |
거란어 | /*kʰitai(n)/ 또는 /*kʰitan/[3] |
영어 | Khitan |
중세 중국어 | 契丹 (/kʰeitɑn/, /kʰɨt̚tɑn/) |
중국어 | 契丹 (ㄑㄧˋ ㄉㄢ, Qìdān) |
중세 몽골어 | ᠬᠢᠲᠠᠳ (Qitad) |
몽골어 |
ᠺᠢᠳᠠᠨ, Кидан (Kidan) / ᠬᠢᠲᠠᠳ, Хятад (Hyatad)[4] |
페르시아어 | ختاى (Khatāy) |
위구르어 | خىتاي (Xitay) |
키르기스어 | Кытай, كىتاي (Kytai) |
이 가운데 '키타이(Khitai)'라는 호칭은 요나라가 북중국의 일부를 지배하던 중세 이후 서방 세계에도 전해져, '중국', '중국 대륙', '중국인'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일부 국가나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언어에서는 지금도 중국 혹은 한족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위구르어의 '히타이(خىتاي)'나 몽골어의 '햐타드(ᠬᠢᠲᠠᠳ, Хятад)', 카자흐어의 '크타이(Қытай, قىتاي)' 등이 키타이의 파생이다.
이 밖에 서유럽의 언어에서도 포르투갈어의 '카타이(Catai)'가 키타이에서 유래한 것이며, 영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바로 ' 캐세이(Cathay)'가 중국을 가리키는 고어의 하나이다. 이 이름을 사용한 예로 과거 홍콩의 국적 항공사였던 캐세이퍼시픽 항공(國泰航空有限公司, Cathay Pacific Airways Ltd.)을 들 수 있다. 나중에 '키타이'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나 로버트 E 하워드의 《 코난 사가》에서 동방의 부족과 군주를 가리키는 말로 차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의 고대 국가에서 유래한 명칭으로는 '키타이'(캐세이)말고도 진나라에서 유래한 '차이나'(China)와 '시나'(Sina), 북위(선비 탁발부)에서 유래한 '타브가치'(Tabgach), 원나라의 상도(上都, 새너두)에서 유래한 ' 제나두'(Xanadu) 등이 있는데, 이들은 진나라를 제외하면 모두 순수 한족과는 거리가 멀거나 혼혈이었던 왕조에서 파생한 이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본어에서는 한자어 '契丹'를 '킷탄(きったん)'이라 읽는다. 한자어의 훈음이 다양한 일본에서도 '킷탄'이라는 용례는 이것 하나밖에 없다 보니, 상용한자표에도 독음이 들어있지 않다.
2.2. 한국어 표기와 발음
한국어인 거란 역시 한자어 글단(契丹) 표기가 유입되어 만들어졌다. 본래 이 한자의 훈음은 각각 맺을 계( 契)와 붉을 단( 丹)인데, '글'은 독음이 거의 일정한 한국어 한자 가운데서도 읽는 법이 특이한 몇 가지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맺을 계'자를 부족 이름 글이라는 독특한 훈음으로 읽는 것은 고유명사의 특징에 따른 것으로, 비슷한 예로 '홑 단'( 單)이 흉노의 군주호인 선우를 가리킬 때는 '오랑캐 이름 선'이라 읽히는 것을 들 수 있다. '붉을 단'(丹) 역시 활음조 현상에 의해 '단'에서 '란'으로 음이 변했다. 이는 꽃 '목단'(牧丹)이 한국어에서 ' 모란'으로 읽히는 예와 같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어 내부에서의 변화에 한하며, 중국어에서는 계약 등을 뜻하는 '맺을 계'의 병음 '/qì/'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이는 꽤 오래된 발음일 수도 있는데,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난 뒤에 설치된 안동도호부의 속주 중 하나로 거단주(去旦州)가 있었으며 이는 고구려의 원래 행정구역명을 그대로 복붙한 것에 해당한다. 물론 고구려 말기쯤 가면 이미 위치가 고구려와 멀었던 거란족은 주로 당시 대세였던 당나라에 복속된 상태였는데, 그래도 순순히 복속되진 않았을 정도로 굉장히 반항적이었기 때문에 이탈해서 고구려측에 붙었던 일부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고,[7] 따라서 거단주가 거란족 거주지역에 설치된 속주라는 게 맞다면 고구려 때도 이미 비슷한 발음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글안이라는 표기도 보이는데, 이는 원래 한자에 대응시키기 위해 한자 독음을 재해석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신채호가 남긴 글에도 '글안'이 보이고, 네이버 한자사전 해당 항목에서도 독음을 '글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끝의 역삼각형 기호(▽)는 비상용 독음을 나타내며, '이 글자(붉을 단)는 원래 이렇게 읽는 글자가 아니나 이 단어에서만 이렇게 읽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제8세기 초엽에 국호를 발해(渤海)라 하고 말갈족(靺鞨族)과 계단족(契丹族) 등을 복속시키고, 당의 개원(開元) 연간에서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에 이르는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서 제공하는 "제1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 '통일신라와 발해의 문화' 단원"의 한글 표기 오기. 본래 국한문혼용체로 쓰인 서적을 한글로 전사하는 과정에 벌어진 오기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서 제공하는 "제1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 '통일신라와 발해의 문화' 단원"의 한글 표기 오기. 본래 국한문혼용체로 쓰인 서적을 한글로 전사하는 과정에 벌어진 오기로 추정된다.
국한문혼용 및 병용 표기가 사라진 후 번역된 중국 서적이나 사극 자막 등에서 간혹 '계단족'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상술했듯 본래 '거란'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일반적인 한자의 훈음으로 오기한 것이다.
3. 생활사
거란족을 그린 그림들 |
훗날 이들이 반유목에 가까워지면서 농경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반농반목 및 수렵채집, 어로 정주민이었던 여진- 만주족과는 달리 이들은 더 유목민의 성격이 짙었다.[8] 겨울에는 얼은 호수에서 얼음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하여 잡은 물고기와 짐승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두어연(頭魚宴)이라는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오랜 대전쟁을 치렀기에 공격적인 야만족이나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독자적인 거란 문자를 만들고, 상당한 불교 문명을 이룩했으며 거란의 장신구가 북송에서 유행하는 등 고도의 문명을 향유하는 이면도 지니고 있었다. 요나라 시대의 불교 유물 및 유적은 중국의 불교 문화재 가운데에서도 평가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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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를 몽땅 밀어버리고 주변 머리카락만 남겨놓는 파격적인 머리카락 모양을 가진 민족이었다. 이 역시 만주 지역의 유목민들이 향유하던 변발 전통의 일종이다. 그나마 뒷머리만 조금 남겨서 앞모습만 본다면 스킨헤드로 보이는 만주족의 변발과는 달리 정수리-뒷머리를 민 다음 옆머리와 앞머리만 남겨놓은 거란족의 이 헤어스타일은 곤발이라 불린다. 잘 씻지못하는 초원의 특성상 곤발은 위생적이며 투구를 썼을 때 정수리의 열을 빠르게 식히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의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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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진국공주의 묘 |
장례 풍습의 경우 제포라고 불리며 귀족과 황족 등 높은 신분층들 한정으로 시신을 건조하게 하여 미라를 만들고 시신 얼굴에 금으로 만들었거나 금으로 도금한 은제 가면들을 덮었는데, 일종의 데스마스크였다.
춘화도 남아 있어 성풍속을 볼 수가 있다.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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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철갑기병 |
흉노 또는 동호- 선비 계열의 유목민에서 갈라져 나와 4세기경의 사서에서부터 독자적인 민족으로서 식별되었다. 고대에는 몽골 고원의 유연-돌궐과 만주의 고구려, 화북의 북위 및 수, 당의 신민으로서 내몽골 일대를 영유했으며, 668년의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위구르와 당나라에게 차례로 정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흥하여 당과 위구르를 약탈했다. 이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는 대립했다. 10세기에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후 실위와 해를 통일하고 분열되어 있었던 몽골의 부족들을 흡수하면서 요나라를 세웠다. 이후 요나라는 랴오둥 반도와 중국 허베이성 일대, 막북(漠北)[9] 지역까지 정복하고, 동아시아 북부의 패자로 군림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 등 전쟁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으면서 성장 동력을 상실했으며,[10] 지배력이 약화되자 여진족 완안부의 수장인 온얀아쿠타의 휘하에서 일거에 일어난 금나라와 북송의 연합 공격에 멸망하고 말았다. 거란족의 일부는 서역으로 도망가 서요를 건국했으며, 남은 거란족들은 금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부흥운동을 수차례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몽골 제국이 발흥하자 거란족은 몽골에 흡수되어 몽골 사회 각계에서 활동했다. 몽골 제국 초기까지의 거란족은 몽골족과 어느 정도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세에 이르러 언어, 문화적으로 비교적 가깝던 몽골족에 동화, 흡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서요와 이를 흡수한 셀주크 제국 역시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오늘날에는 다우르족을 거란족의 직계 후예로 추정하는 학설이 있다.
4.1. 기원과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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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성립 이전 거란족의 영역을 대강 나타낸 것(Khitans)[11][12] |
거란의 족원은 대체로 흉노와 동호설로 대비된다. 거란사와 요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대체로 거란족이 동호계 선비족 중 우문선비의 분파로서 우문선비, 고막해와 함께 원 선비족에서 분리되었다고 인식한다. 4세기경 거란은 모용선비의 전연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전연이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고막해의 영향력 하에 놓인다. 388년 고막해가 탁발선비의 북위에 토벌당해 부족들이 흩어지면서 독립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서에 기록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하나의 집단으로서는 이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등국 중에 북위의 군대가 크게 깨뜨리자, 마침내 달아나 흩어져 고막해와 나뉘었다. 수십 년이 지나 점차 커져서, 부락이 화룡의 북쪽 수백 리에 있게 되었다.
─ 《위서》 <거란전>[13]
─ 《위서》 <거란전>[13]
그 뒤 거란은 요서 지방에서 8부족을 이루고(古八部) 나름 세력을 키웠으나 주변의 한국( 고구려)[14], 중원, 막북의 강호들 사이에 끼어서 내내 샌드위치 신세였다. 거란 8부가 처음으로 연맹을 맺을 당시에는 대하(大賀)씨가 연맹 전체의 추장을 맡았다. 당나라 태종 때는 추장 대하굴가(大賀窟哥)가 당나라에 귀의해 막북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된 송막도독부의 장인 송막도독에 제수되고 황성인 이씨(李氏)를 사성받는다.[15] 654년 10월 고구려 보장왕은 장군 안고(安固)로 하여금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이끌고 당나라를 지원하던 거란의 신성(新城, 거란신성)[16]을 치게 했는데, 마침 역풍이 불어 고구려군의 화살이 닿지 않았고 대하굴가는 화공으로 역공을 가해 고구려군을 대패시킨다. 그러나 당나라의 거란에 대한 지배는 확고하지 않았고 대하굴가의 아들로 송막도독을 이어받은 대하아복고(大賀阿卜固)는 오히려 해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나 660년에 설인귀(薛仁貴)와 신문릉(辛文陵)에게 패배해 낙양에 압송된다.
668년 고구려 멸망 뒤에는 거란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권이 마침내 공고해지는 듯했으나, 고구려 유민, 말갈족, 거란족 등의 여러 이민족의 통치를 위해 요서지역에 설치한 기미주인 영주의 도독 조문홰(趙文翽)가 지나친 폭정을 일삼자 대하굴가의 손자인 이진충이 695년 무상가한'(無上可汗)을 칭하며 처남인 손만영(孫萬榮)[17]과 함께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은 반란을 틈타 동만주로 도주하는 데 성공하고, 후에 대중상의 아들인 대조영의 지휘 하에 발해의 모태가 된다. 696년에 이진충이 죽은 뒤에는 후계자인 손만영이 그를 이어받았으나 거란족의 반란은 돌궐 제2제국의 정복군주인 묵철가한(카프간 카안)의 도움을 받은 측천무후에 의해 실패하고 손만영은 가노에게 암살당한다(697년). 다만 이때 이진충과 손만영이 이끈 거란군은 당나라의 17만 대군을 무려 두 번이나 격파하는 용맹함을 보여, 당나라 조정을 공포에 떨게 하기도 했다. 이후 당과 돌궐의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란은 돌궐의 영향력에 강하게 종속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 발해와 기존의 강대국인 당나라, 돌궐의 사이에서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만다.
손만영이 죽은 뒤인 697년부터는 이진충의 사촌인 이실활(李失活)이 추장이 되는데, 당현종대인 716년에 돌궐의 세력이 잠시 쇠퇴한 틈을 타 당나라에 항복하여 입조하고 송막군왕(松漠郡王) 겸 재설치된 송막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되는 한편, 당현종은 황실의 친척인 영락공주 양씨(永樂公主 楊氏)[18]를 그와 혼인하게 한다. 당현종은 또한 장수 설태(薛泰)를 압번락사(押蕃落使)로 삼아 송막도독부로 보내 그를 감시하게 했다. 717년, 이실활이 사망하고 직위를 계승한 건 그의 사촌인 이사고(李娑固)였는데 그의 집권기에 대형사고가 터지게 된다. 당시 이사고의 부하로 가돌우(可突于)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능력이 뛰어나 당나라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이사고를 넘어 점점 인망을 얻다가 마침내 거란족의 실권을 쥐게 되었고, 이에 위기를 느낀 이사고가 720년에 가돌우를 제거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가돌우가 이사고에게 역공을 가해 이사고는 당나라의 영주로 달아난다. 영주도독 허흠첨(許欽澹)은 설태에게 정예병 500명을 거느리고 해족의 추장인 요락군왕(饒樂郡王) 겸 요락주도독 이대포(李大酺)[19] 및 이사고를 따르는 거란족과 함께 가돌우를 토벌하게 한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에서 영주군은 대패하여 오히려 전투 중에 이사고와 이대포가 사망하고 설태는 생포되며, 크게 놀란 지휘관 허흠첨은 군대를 서쪽으로 후퇴시킨다. 가돌우는 이사고의 사촌인 이욱우(李郁于)를 추장으로 세운 뒤, 당나라와의 관계를 손상시킬 생각이 없었기에 생포한 설태를 사죄와 함께 당나라에 보낸다. 722년, 이욱우가 입조해 혼인을 청하였고 당현종은 모용가빈(慕容嘉賓)의 딸을 연군공주(燕郡公主)로 봉해 시집 보낸다.[20] 가돌우는 723년 이욱우가 병으로 죽자 그의 동생인 이토우(李吐于)를 추장으로 세운다. 이토우는 형사취수제에 따라 남편을 잃은 연군공주 모용씨와 결혼한다. 이후 이토우와 가돌우 사이에 알력이 생기게 되는데, 이로 인해 725년, 이토우가 당나라로 망명하자 당현종은 그를 요양군왕(遼陽郡王)으로 봉하고 궁중숙위로 삼는다. 그리고 가돌우는 이진충의 동생인 이소고(李邵固)를 추장으로 세운다. 그 해 겨울에 이소고가 당나라에 입조하며 다음해인 726년, 당시 해족의 추장은 요락군왕(饒樂郡王) 겸 요락주도독 이노소(李魯蘇)였는데,[21] 당현종은 황실의 친척인 진씨(陳氏)를 동화공주(東華公主)로 삼아 이소고와 혼인하게 하고, 사촌인 성안공주(成安公主)의 딸 위씨(韋氏)를 동광공주(東光公主)로 삼아 새로이 봉성군왕(奉誠郡王)으로 봉한 이노소와 혼인하게 하여 동맹을 더욱 탄탄히 한다.[22]
그렇게 당나라에 마냥 순종적이지 않았던 가돌우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어물쩡 당나라에 복속된 상태를 이어갔는데, 중서시랑 이원굉(李元紘)이 가돌우가 입조했을 때 제대로 예우를 하지 않자 가돌우가 몹시 화가 나서 그냥 돌아가버리는 일이 터진다. 그리고 좌승상 장설(張說)은 이에 대해 가돌우는 인면수심이라 그저 이익을 노리고 입조하는 것뿐이니 그를 후하게 대접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가 이끄는 거란, 해족의 반란이 터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다 거란족이 대규모 국제전에 휘말리는 사건이 터지는데, 730년, 가돌우는 이소고를 죽이고 대하씨족도 아닌 요련(遙輦)씨족의 요련굴렬(遙輦屈列)을 와가한(洼可汗)으로 세운 뒤 휘하의 해족을 협박하여 함께 돌궐에 귀부한다.[23]
그리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반란이 계속되던 733년, 사건은 무왕(발해)의 계승 인정을 놓고 당나라와 신경전을 벌이던 발해에도 확대되어 발해가 가돌우 연합군을 지원하여 당나라에 대적한 전투가 터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도산 전투이다. 마도산 전투에서는 당나라가 거하게 깨지나, 다음해인 734년에는 유주자사 겸 어사중승 장수규가 마침내 가돌우군을 격파하고, 735년에는 장수규가 가돌우와 사이가 나빴던 이과절(李過折)에게 왕회(王悔)를 밀사로 보내 회유하여 가돌우를 암살하고 요련굴렬을 항복시키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과절은 이 공로로 북평군왕(北平郡王) 겸 검교송막도독에 제수되나, 가돌우의 잔당인 이례(泥禮)의 일파가 이과절을 습격하여 일가와 함께 참살하고 오직 아들 이날건(李剌乾) 하나만이 안동도호부로 도망쳐 살아난다. 이후 이례는 요련조리(遙輦俎里)를 조오가한(阻午可汗)으로 옹립한다.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대하씨족은 부족연맹의 패권을 잃게 되고 이후는 요련씨가 쭉 집권하여 호랄가한(胡剌可汗) 요련해락(遙輦楷落), 소가한(蘇可汗), 선질가한(鮮質可汗), 소고가한(昭古可汗), 야란가한(耶瀾可汗) 요련굴술(遙輦屈戌), 파랄가한(巴剌可汗) 요련습이지(遙輦習爾之), 흔덕근가한(痕德堇可汗) 요련흠덕(遙輦欽德)의 순으로 이어지게 된다.[24]
그리고 아직 당나라의 장수로 복무하던 안녹산한테 몇 번 얻어맞기도 하고, 돌궐이 무너지고 안사의 난이 터지면서 힘의 공백이 생기며 출현한 몽골 고원의 신흥강자인 위구르에게 얻어맞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요련씨를 대신해 거란족 전체의 추장이 될 질랄부 야율씨의 야율아보기가 등장하기까지 계속된다.
4.2. 요나라의 건국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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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 세력권까지 포함한 요나라의 최대 강역(연두색) |
907년, 질랄부의 추장이었던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대통합한다. 그리고 해족과 습족, 실위를 정복하고 서하, 하서회골, 조복을 복속시킨 다음 발해까지 멸망시킨 후 요나라를 건국했다(태조). 요 건국 뒤에도 거란(키타이)이라는 명칭은 요와 함께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되었다.
최종적으로 요태조의 거란 제국은 그 영토가 몽골,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 만주에 이르렀다.[25] 그러나 몽골 고원은 직할 지배가 아닌 간접 지배의 형태였고 만주 역시 요동, 연해주와 발해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여진족과 발해유민의 반동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그래서 실효적인 지배력이 미친 영토만 따지면 영토가 매우 축소된다. 요나라 항목 참조. 다만 실효적인 지배장소들은 모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적합한 곳이었고 거란의 중심지와도 가까웠다. 외몽골 남부도 그나마 발해유민들이 있었던 옛 부여(만주 평원/동북 평원) 지역에 비하면 나름 직접통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한편 건국 이후에는 북송을 뜯어먹은 뒤 고려와 서하를 치나 실패해 형식적인 종속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그친다. 이후엔 요나라의 여자, 매 등의 착취로 인해 분개한 여진족이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대에 완안부의 추장 완안아골타 아래에 규합하여 요나라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금나라를 건국하게 되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결국 1125년 금나라와 북송의 협공을 받게 되는데 천조제가 금나라군에 사로잡히면서 결국 멸망하고 만다. 이때 금나라의 영향권 하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던 요나라의 잔존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 이주하여 서요/ 카라 키타이를 건국한다.
그런데 요나라와 관련된 설명에서 의아한 것은 요하 유역과 하북성 일대에서 웅거하던 요나라가 1125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황족인 야율대석이 거란족 유민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 서요를 건국하여 요나라를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천조제 이후 그대로 공중분해된 것처럼 설명되곤 한다는 것. 서요가 쿠츨루크의 폭정과 뒤를 이은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무너진 뒤에도 일부 거란족 유민들은 현재의 이란 동부까지 이주해 다시 요나라를 이어갔다. 얼마 안 가서 또 다시 몽골 제국의 일부인 일 칸국에 의해 복속되었지만 이란 남동부 케르만주에 세웠던 거란족의 국가는 쿠틀루그 칸국[26]이다.
4.3. 요-서요 멸망 이후
몽골의 발흥과 함께 몽골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멸망해 사라졌다기보다는 페르시아와 파르티아와의 관계와 비슷하게 둘 다 동호에서 갈라져나온 종족들인지라 문화적인 차이도 적고, 금나라와 싸울 때부터 뜻을 함께한 몽골에 이들이 딱히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동화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한 요나라 시절 몽골에 대한 정책도, 몽골에게 가혹한 강경책으로 일관한 금나라와는 달리 요나라는 대부분 간접적인 통치를 행해서 몽골을 직접 탄압한 일도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 때문에 몽골의 거란-요에 대한 적대심 역시 적었다.특히 금나라가 요나라의 원수이기 때문에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에 많은 거란인들이 협력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야율초재. 그 외에도 칭기즈 칸의 참모로 활약한 야율아해(耶律阿海)와 장군으로 활약한 야율독화(耶律禿花) 형제가 있다.[27] 야율유가(耶律留哥)라는 거란인도 동요(東遼)라는 국가를 세웠으나 나중에 몽골에 들어가서 몽골의 신하로 활약하기도 했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일부 거란인들은 만주에 대요수국을 세우고 할거했다가 칭기즈 칸에게 복속되었다.
4.4. 후예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사는 몽골 계통 소수민족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직계 후예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2005년 기준으로 인구수 약 12만명으로 중국의 공식적인 56개의 소수 민족 중에서 34위이다. 샤머니즘과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분포 범위도 거란족의 강역과 대강 일치하고 스스로 거란을 계승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이들이 정체성으로서는 거란족의 후예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여기고 있다. 실제 DNA 분석 결과 고대 거란족과 현대 다우르족은 유전적으로도 거의 똑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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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르족의 모습 |
만주국 황제이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선통제의 부인인 고불로 완룽(郭布羅 婉容)이 바로 이 다우르족 출신이다. 베이징 등 화북 한족들 역시 거란족과 몽골족의 피가 일부 섞여 있다.[28]
또한 윈난성 린창시, 다리시, 바오산시에는 "번런(本人)"이라고 불리는 거란족 황실 후예들이 산다고 한다. 서요의 거란 황족 출신 중 야율아소루(耶律阿蘇魯)라는 사람이 몽골 제국의 부하가 되어 윈난성까지 파병되었고, 야율아소루 휘하의 거란인들이 여기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리국 사람들이 거란인을 학살하자 야율씨와 소씨 일족은 성씨를 장씨, 뤼씨, 화씨, 양씨 등으로 바꾸어서 살아남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그곳 마을에는 야율아소루의 무덤을 포함하여, 요나라 황족들을 기리는 사당과 족보도 있다고 한다. 사당에는 야율(耶律)이라고 쓰인 간판들이 있다고 한다.
1473년까지 서역의 하미를 지배하였다고 한다.
5. 한국사와의 관계
한국사 속 국가들과는 여러모로 깊은 악연을 자랑하는데, 거란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8년 (서기 378년) 가을 9월의 기록으로, 이때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8개의 부락을 함락시켰다고 나온다. 일부는 광개토대왕의 거란 토벌 후 고구려에 복속되어 그 번병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세력을 키워 그 후손인 발해와 함께 초반에는 같이 힘을 합쳐 당과 일전을 벌이는 등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했으나 본격적으로 세를 키운 이후에는 대립하기 시작한다.급기야 거란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전성을 연 요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만주의 패권을 장악한다. 그 뒤 진행된 발해부흥운동을 계속 진압하며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나갔다.[29] 그리고 발해 정복을 끝낸 후에는 고려까지 노려 여요전쟁을 대대적으로 일으켰고 고려의 선전으로 결국 막아내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30]
2017년에는 거란어에는 다른 몽골계 언어와 상이하게 한국어와 어원이 같은 단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면서 거란어가 어떤 식으로든 실제 고구려어와 관련되었을 것을 가정하는 연구도 나오기도 했다. 해당연구 고구려어 항목에서 고구려어와 고대 한국어 관련해 소개된 바 있는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연구이다. 거란인들이 고구려인들의 후손이라는 식의 주장이 아니라, 거란어에서 몽골어, 중국어, 기타 퉁구스어나 만주어 등에서 유래하지 않은 기원이 불분명한 단어와 고대 한국어를 함께 분석해서 고구려어 단어를 많이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거란어 해석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에서 한자 어휘를 수용하는 것처럼 인접국끼리 문화 교류를 통해 어휘를 주고받는 언어동조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고구려에게 일부 복속되기도 했던 역사적 연원과도 관련지어 생각해 볼 만하다.
고려 시대 남경, 즉 현재의 서울은 여요전쟁 때 항복한 거란족 포로를 수용하던 곳이 있었다. 왕이 남경을 방문했을 때 왕을 맞이하는 거란인들이 거란 가무를 추고 거란 악기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거란 포로들 10명 중 1명은 기술자들이었는데 고려 조정은 이들을 옷과 그릇을 만드는 일에 종사케 하여 고려의 제조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고 적혀 있다.
요나라가 멸망할 때 보주[31]가 고려의 영토가 되면서 그곳에 살던 요나라 주민들 다수가 고려로 귀순했다. 그 외에도 일부 거란인들이 고려로 망명해오기도 했다. 당시 기록에 거란인들뿐만 아니라 요나라에 살던 발해인, 해족, 한족, 일부 여진인들의 귀순이 이어졌다고 적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로 동화되었는데 일부는 무관 등으로 등용되기도 했다. 병든 아버지에게 자신의 살을 잘라 먹여 명종에게 상을 받은 거란인 무관(산원동정[32]) 위초(尉貂)의 효행이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나온다. 또한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 기병 중에는 항복한 거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에 귀부한 거란인들 중에는 고려군에 투신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때 토벌된 뒤 고려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었다. 대요수국의 거란 유민들 중 8만 명이 몽골에 쫓겨 대거 고려로 침공해오기도 했는데 고려로 내려와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웅거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다( 대요수국의 난, 강동성 전투). 어찌 보면 고려와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계기를 제공한 원흉인셈.
강동성에서 포로로 잡힌 8만의 거란 유민들은 고려에서 도살업을 하거나 갖바치, 고리, 광대 등의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불교에 대한 신앙이 강한 국가에서 안 그래도 이런 일들은 천대받은 일들이었고, 거란은 역사적으로도 고려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유민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리 만무했다. 이는 조선 시대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아서 백정 집단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로 이어진다.
5.1. '고구려 계승' 낭설
유사역사학의 일각에선 거란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곤 하지만, 실제 문헌에서 거란은 단 한 번도 고구려를 계승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 이들은 서희의 외교담판에 나온 거란이 고구려의 계승권을 얻으려 했다는 것을 증거라 하지만, 실제 기록을 자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회담에서 거란 측은 "우리가 옛 고구려의 땅을 점령했으니 모든 고구려 땅은 우리 땅이다, 너희들은 신라에서 나오지 않았느냐"라는 주장을 했고, 고려측은 "우리가 고구려를 계승해서 국호도 고려로 했고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 서경) 같은 논리대로라면 너희 동경( 동경요양부)은 우리 땅 아니냐"고 대응하여 거란을 침묵시켰다. 거란은 어디까지나 옛 고구려 땅을 정복했다고 한 것이지 자국을 고구려의 계승국이라 주장한 것이 아니다.이후에도 얼마동안은 요사에서 고려를 진변( 진한과 변한)이나 "동한"으로 표기하는 등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부정하고자 하는 정도의 표현이 등장하고는 하나, 자국을 고구려의 후계국이라 여기는 표현은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도 일정한 것이 아니라 어쩔 때에는 고구려라는 표기가 등장하기도 하며, 나중에는 아예 고려왕을 ' 주몽의 후손'[33]이나 ' 고구려 오부의 주인'[34]이라고 표현하는 등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완전히 인정하게 된다.
참고로 요사에서 기자의 팔조금법 운운하며 고조선을 계승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 기록을 보면 "요(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기자(箕子) 8조의 가르침이 풍속으로 남아 있다." 라는 단순한 지역의 내력 소개를 과대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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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고 난폭하기로 주위에 유명한 거란족이었지만, 정작 그런 그들은
여진족의 무력을 알고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동북쪽(현재
중국과
러시아 국경을 흐르는
아무르 강의 동북쪽)에 사는 흑수말갈이라 추정되는 말겁자(韈劫子)라는 부족을 만나기만 하면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고 한다(...)
거란족이 만나기만 하면, 무서워서 도망쳤던 부족
후발주자인 몽골족의 명성에 가려져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상당히 강력한 전투민족이었는데 인구가 1억명인 송나라에 반해 인구가 1,000만명도 안 되었던 거란족들은 송나라를 상대로 싸우면 대부분 우세를 보였다. 심지어 여진족의 침략을 받고 다 망해가던 1122년 여진족을 피해 도망쳐 온 거란족 피난민들로 만들어진 군대인 수천명의 수군(瘦軍, 빼빼 마르고 볼품이 없는 군대라는 뜻)이 무려 송나라 10만 대군을 물리친 일도 있었다(...)[35] #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마이너 갤러리에서 시작된 거란족과 싸이버거를 연관짓는 밈이 있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마이너 갤러리에 거란족의 최후에 대해 서술하면서 제국의 멸망과 시간의 허무함에 대해 절절하게 서술한 글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 죽여주는 글빨에 비하여 마지막에 거란족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싸이버거를 사야 한다며 구걸을 위한 계좌번호를 첨부하는 반전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어 거란족은 싸이버거를 사랑한 낭만의 민족이라는 헛소리가 여러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패러디되었고 만화화도 되었다. 윾갤콘 중에는 '그들을 구하려면 싸이버거를 잔뜩 사야합니다.'라는 콘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7. 요나라 이전의 거란족 추장 및 기타 인물
- 남북조시대(5세기 중엽 ~ 6세기 말)
- 대하씨 추장
- 대하돌라(大賀咄羅): 기록상 첫 등장하는 대하씨 연맹의 수장.
- 대하마회(大賀摩會)
- 대하굴가(大賀窟哥): 당으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받아 한식 이름은 이굴가(李窟哥).
- 대하아복고(大賀阿卜固)
- 무상가한(無上可汗) 이진충
- 손만영: 이진충의 처남으로써 추장에 올랐으니 계통상으론 대하씨족을 잇긴 했는데 사실 내계(内稽)씨족 출신이다.
- 이실활
- 이사고(李娑固): 이실활의 사촌동생.
- 이욱우(李郁于, ? - 723년): 가돌우가 옹립한 이사고의 사촌동생, 이토우의 형이다.[37]
- 이토우(李吐于, 생몰년모 미상): 이욱우의 동생. 725년 가돌우에게 축출당했다.
- 이소고(李邵固, ?- 730년): 이진충의 동생. 730년 가돌우에게 살해당했다. 대하씨의 마지막 추장이다.
- 요련씨 추장
- 와가한(窪可汗) 요련굴렬(遙輦屈列): 요련씨 초대 가한, 가돌우에 의해 옹립.
- 이과절(李過折)
- 조오가한(阻午可汗) 요련조리(遙輦俎里): 요련씨 2대 가한. 이례에 의해 옹립. 한식 이름은 이회수(李懷秀).
- 호랄가한(胡剌可汗) 요련해락(遙輦楷落)
- 소가한(蘇可汗)
- 선질가한(鮮質可汗)
- 소고가한(昭古可汗)
- 야란가한(耶瀾可汗) 요련굴술(遙輦屈戌)
- 파랄가한(巴剌可汗) 요련습이지(遙輦習爾之)
- 흔덕근가한(痕德堇可汗) 요련흠덕(遙輦欽德): 요련씨의 마지막 추장. 이후 질랄부 야율씨의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의 수장이 된다.
- 질랄부
- 야율열리(耶律涅里)
- 야율비첩(耶律毗牒): 야율누리사의 아버지.
- 야율누리사(耶律耨里思): 야율아보기의 고조부. 야율열리의 손자. 송막도독 이회수 휘하에서 종군했으며 안사의 난 당시 진압군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슬하에 아들 4명을 두었고, 요나라가 건국 이후 숙조(肅祖) 소열황제(昭烈皇帝)로 추숭되었다.
- 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 야율누리사의 2남. 야율아보기의 증조부다. 실위와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의조(懿祖) 장경황제(莊敬皇帝)로 추숭되었다.
-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 야율누리사의 3남. 야율아보기의 조부. 현조(玄祖) 간헌황제(簡獻皇帝)로 추숭되었다.
- 야율살랄적(耶律撒剌的): 야율균덕식의 4남. 야율아보기의 아버지다. 덕조(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로 추숭되었다.
- 기타
- 손오조(孫敖曹): 손만영의 증조부. 당고조 시기(618~626) 속말말갈 추장 돌지계와 함께 당에 사신을 보냈다.
- 곡거(曲據): 욕흘주(辱紇主)의 추장(大酋). 648년 당나라에 귀부했다. 당나라는 그 부락의 땅을 현주(玄州)로 삼고 영주도독부에 예속시켰다.
- 대하고막리(大賀枯莫離): 대하굴가의 손자. 당으로부터 좌위장군(左衛將軍) 탄한주자사(彈汗州刺史)의 직위를 받고 귀순군왕(歸順郡王)에 봉해졌다.
- 이해고[38]: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에 가담하여 무주군을 패배시키며 활약을 했으나 이후에는 무주에 투항하여 무주의 장수로 활동하면서 천문령 전투 당시 무주군의 지휘관을 맡기도 하였으며 반란을 일으켰던 거란의 잔당들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측천무후의 무씨 성을 하사받았으나 무후의 힘이 약해지자 다시 본래의 성씨인 이씨로 성을 복구시켜서 당 중종의 편에 섰다.
- 이광필
8. 거란족의 국가 목록
9. 관련 문서
[1]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쉬안화구에서 출토된 요나라 사람 장광정(張匡正)의 무덤에 그려진 벽화로, 1093년에 조성되었다.
#
[2]
영어권에서는 para mongolic이라고도 부르며, 몽골어와 가까운 그룹으로서 관련이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을 뜻한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학자로는 유하 얀후넨이 있다.
[3]
거란 문자 대자 표기,
거란 문자 소자 표기
[4]
오늘날에는 '중국'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쓰인다. 그런데 햐타드가 아닌 키탄이란 말은 몽골에서는 매우 심한 욕설로 쓰이는 말이기에 주의해야한다. 아예 몽골 인터넷에 이 단어 자체가 검열이 될 정도.
[5]
契가 '치'로 경구개음화된 것은 훗날의 일이며, 당대 발음으로는 역시 '키'였을 것으로 보인다.
[6]
박원길 《유라시아 대륙에 피어났던 야망의 바람》 민속원, 2003. 발췌.
[7]
보통 유목민족 세력은 중앙집권이 확고하지 않았고, 그 여파로 민족 단위를 떠나 아예 같은 부족이라 하더라도 파벌끼리의 분투가 심해지면 밀려난 쪽이 원수였던 외국 세력에 붙는 경우 또한 흔했다.
[8]
여진족 역시 과거에는 유목과 수렵을 병행하다가 점차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정주민으로 변화했는데 특히 원명교체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건주여진 같은 경우에는 이웃한 명나라나 조선의 농민들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주로 거주하던 요동반도 일대는 요하강 삼각주의 존재로 인해 농사가 상당히 잘 되는 지역이기 때문.
[9]
사'막'의 '북'쪽이라는 뜻으로,
고비 사막 북쪽
외몽골 지방이다.
[10]
세 차례의
여요전쟁을 치른 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오히려 일변하여 요가 멸망할 때까지 평화-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이는 요나라가 고려 침략전쟁에 군자금을 쏟아부으면서 그 기회를 틈 타 여진족이 강성해지고 나중에는 아예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기습 침공해서 더이상 고려 침략을 재개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11]
구글에 거란이라고 치면 십중팔구가 요나라 때 영역만 나와서 그 이전의 영역을 나타낸 지도는 찾기 힘든 편이다.
[12]
Shiwei: 실위, Tatabi: 해(고막해), Mohe: 말갈, Yilou: 읍루
[13]
登國中、國軍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背。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於和龍之北數百里。
[14]
378년에
광개토대왕이 납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비려(碑麗)를 정벌했다는 기사가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는데, 비려는 거란의 부족들 중 필혈부(匹絜部)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사건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광개토대왕의 거란 정벌 기사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이때는 아직 상위집단인 고막해가 북위에 토벌당해 거란족이 본격적으로 발흥하는 계기가 된 388년보다 이전인데 거란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거란족이 본격적인 하나의 집단으로서 역사에 등판하기 이전의 초기 단계의 사건으로 보이며, 그래서 부족명인 비려로 기록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5]
대하굴가 이전의 추장으로는 대하돌라(大賀咄羅), 대하마회(大賀摩會)의 순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16]
고구려의
신성(성)하고는 다른 곳이다.
[17]
대하씨족이 아닌 내계(内稽)씨족이었다.
[18]
동평왕(東平王) 이계(李繼)의 증손녀이다.
[19]
이렇게 쓰니 그냥 이사고처럼 당나라에 복속된 괴뢰추장에 불과해 보이지만 사실 이대포는 712년에 유주대도독
손전(孫佺)의 2만8천 병력을 궤멸시킨 적이 있을 정도로 당나라에 반항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715년에 당나라와 화해하였고, 당현종은 조카인 고안공주 신씨(固安公主 辛氏)를 이대포와 혼인시킨다.
[20]
연군공주 모용씨는 여요현주 이씨(餘姚縣主 李氏)의 딸로, 여요현주 이씨는 당태종의 손녀였다.
[21]
이노소는 전 추장인 이대포의 동생이다. 정확히는 이때의 해족은 친당파 추장인 요락군왕에 복속된 쪽과 거란족을 장악한 가돌우에 붙은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22]
형의 부인이었던 고안공주 신씨는 형사취수제에 의해 이노소와 재혼하게 되었는데, 고안공주 신씨와 이노소의 어머니가 사이가 나쁘자 당현종이 둘을 이혼시키고 다시 결혼하게 한 것이다.
[23]
이때 이노소와 동광공주 위씨는 휘하의 해족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냥 당나라로 도망친다. 뒷얘기를 더 적자면 732년에 신안왕(信安王) 이의(李禕)에게 가돌우 연합군이 한번 크게 타격을 입자 가돌우는 돌궐로 달아나고, 해족 추장인 이시쇄고(李詩瑣高)가 휘하의 해족을 데리고 당나라에 귀부한다. 당나라에서는 그를 귀의왕(歸義王) 겸 귀의주도독(귀의주는 이시쇄고의 투항과 함께 새로 설치한 주이다)으로 삼아 우대했고, 그의 뒤를 이어 해족의 추장에 오른 아들 요락도독
이연총(李延寵)은 거란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수규(張守珪)에게 격파당한 뒤 다시 항복한다. 745년, 당현종은 이연총을 용서하여 회신왕(懷信王) 겸 요락도독으로 삼고 손녀이자 장녕공주(長寧公主)의 딸인 의방공주 양씨(宜芳公主 楊氏)와 혼인시켜 회유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후대에도 불구하고 혼인한지 겨우 6개월 만에 이연총은 의방공주 양씨를 죽이고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이연총이 떨어져 나가자 746년, 당현종은 대신
사고(娑固, 거란족 이사고와는 동명이인)를 소신왕(昭信王) 겸 요락도독으로 삼는다.
[24]
몇몇은 이름이 기재되고 나머지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는 건 기록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25]
요태조의 아들이자 두 번째 황제인
요태종 야율요골(덕광) 시기에 중원 내부로 쳐들어가 잠시 하남성 일대를 지배하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요태종을 비롯한 거란족들이 중원의 토착민인 한족들을 상대로 너무나 잔인하고 난폭하게 굴어서, 이를 견디지 못한 한족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켜 맞서는 바람에 결국 요태종과 거란족들은 다시 본국으로 후퇴하였다.
[26]
키르만/케르만 왕조라고 부르며,
후서요(後西遼)라고도 표기된다.
[27]
이 두 형제는 칭기즈칸이 초원 통일 전쟁부터 칭기즈칸을 보좌하며 서방정벌까지 나섰다. 그 유명한 발주나의 맹약에도 참가한 인물들이다.
[28]
정확히는 요나라는 화북 전체를 지배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거란족과 관련있는 곳은 옛
연운 16주가 있던
허베이성 북부와
베이징시에 해당하고, 그에 비해
여진족(+만주족)과 몽골족은 아예 화북 전체를 지배했기 때문에 훨씬 더 깊이 엮여 있었다. 일단 세 이민족 모두 베이징 일대를 지배했던 것 하나는 공통된다. 하지만 이들 유목민들은 한족에 비해 인구가 극단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생각외로 혼혈이 많지는 않았다
[29]
궁예는 거란을 적대하지 않고 오히려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다. 요사에 보면 915년에 고려가 보검을 보낸 기록이 있고 918년에도 두 차례 거란에 사신을 보내는데 모두 궁예의 집권기였다.
[30]
한국 고대사 서적의 상당량이 이때 불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으로
고려실록의 기초인 7대실록이 편찬되었고,
고려사를 읽어봐도 혜종부터 목종까지는 거의 이전
삼국시대 급으로 분량이 없는데 현종부터 분량이 상당히 늘어난다. 이를 통해 여요전쟁 시기 거란의 공습으로 사료가 많이 소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
의주군으로 추정된다.
[32]
정8품에 해당하는 무관.
[33]
요나라가 국서에서 고려
문종을 언급할 때 '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주몽의 후손)라고 지칭.
[34]
다른 국서에서 고려
숙종을
삼한(三韓)과 오부(五部)의 주인으로 지칭.
[35]
심지어 이때 송나라 10만 대군의 지휘관은 방랍의 난을 진압하고 서하와 싸워 승리를 거둔 노련한 장수인 동관(童貫)이었다. 단순히 송나라 군대가 허접이어서 거란족 피난민들한테 패배한 게 아니라는 뜻.
[36]
막하불(莫賀弗/莫何弗), 막하(莫賀/莫何), 막불(莫弗), 막불만돌(莫弗瞞咄) 등의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있는데 당시 몽골계, 퉁구스계를 가리지 않고 유목세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이었다.
토욕혼에서는 막하랑(莫賀郞)이 아버지(父)를 뜻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 장자(長者)를 뜻하는 어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분석
# 막하(莫賀/莫何)의 원음을 bagha로 추정하고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
이란어군의 조어(祖語)에서 신의 아들을 지칭하던 bagapuhr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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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우부터 요련굴렬까지 실세는
가돌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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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조영에서는 고구려 장수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 설정과 대조영 집안과 원수지간이라는 설정이 들어가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공의 설정으로 실제로 이해고는 그냥 거란족이 맞으며 대조영과의 접점도 천문령 전투 외에는 없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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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즘 왕조에 의해 포로가 된 서요의 황족들이 오늘날
이란
케르만 지역에 세운 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