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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0275d><colcolor=#fff> 王質 왕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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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안자(安子) |
성 | 왕(王) |
이름 | 질(質) |
자 | 자정(子貞) |
생몰 | 511년 ~ 570년 |
출신 |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
부친 | 왕림(王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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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소량, 남진의 관료로 자는 자정(子貞).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을 본관으로 하는 낭야 왕씨 출신으로 왕통의 아우이다.2. 생애
왕질은 어린 시절에 성품이 강개했고 사서와 경전을 섭렵하였다. 왕질은 양무제 소연의 동생 의흥공주(義興公主)와 왕림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소량에서 소연의 외조카 자격으로 갑구정후(甲口亭侯)에 봉해졌고 국자주역생(國子周易生)이 되었다. 왕질은 비서랑(秘書郞)·태자사인(太子舍人)·상서전중랑(尙書殿中郞)으로 기용되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효성으로 알려졌으며, 상을 마친 뒤 태자세마(太子洗馬)·동궁영직(東宮領直)에 기용되었고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를 역임했다.547년, 가절(假節)·영원장군(寧遠將軍)으로 제수되고 동궁의 군대를 거느려 정양후(貞陽侯) 소연명의 북벌에 종군하였으나 소연명이 패배하자 단신으로 달아났다.
548년, 후경이 수양(壽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질은 수군을 거느려 후경의 진군을 막으려고 했으나 후경이 장강을 건너면서 실패하였다. 뒤에 왕질은 기병을 거느리고 선양문(宣陽門) 바깥에 주둔했으나 후경의 군대가 건강으로 당도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민간에 숨어 지냈다. 유중례(柳仲禮) 등이 건강에 원군으로 도착하고 남안(南岸)에 진을 치자 왕질은 다시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유중례에게 합류하였다.
건강이 함락된 뒤 왕질은 형주(荊州)로 달아나 상동왕(湘東王) 소역의 밑에서 우장사(右長史)가 되었고 하동(河東) 태수를 겸임하였다. 뒤에 시중(侍中)으로 전임되었으며, 지절(持節)·도독오주제군사(都督吳州諸軍事)·영원장군(寧遠將軍)·오주 자사로 전출되고 파양(鄱陽) 내사를 겸임하였다.
554년, 서위의 침공으로 형주가 함락된 뒤 후진이 분성에 진수했는데, 후진은 왕질과 사이가 좋지 못해서 양량(羊亮)을 파견하여 왕질을 쫓아냈다. 왕질은 군사들을 이끌고 신안령(信安嶺)을 건너 유이를 의탁하였다. 진천이 회계(會稽)에 진수할 때 군대를 이끌고 왕질을 도왔으며, 왕질에게 신안현(信安縣)에 진수하게 하였다.
558년, 왕질은 무제 진패선의 명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예장(豫章)으로 출병하여 주문육의 휘하가 되어 왕림을 토벌하고자 종군하였다. 왕질은 본래 왕림과 친해서 누군가가 왕질이 몰래 왕림과 내통한다며 왕질을 참소하였다. 진패선은 주문육에게 왕질을 제거하라고 명했으나, 주문육이 왕질을 비호한 덕분에 왕질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왕질은 뒤에 산기상시(散騎常侍)·진릉(晉陵) 태수로 제수되었다.
559년, 임천왕 진천이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문제였다. 문제가 즉위한 뒤 왕질은 오병상서(五兵尙書)를 대행했다.
561년, 진안(晉安) 태수로 제수되었다.
562년, 안성왕 진욱이 양주(揚州) 자사로 부임한 뒤 왕질은 인위장군(仁威將軍)·표기부(驃騎府) 장사가 되었다.
진욱이 정사를 보좌한 뒤 왕질은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가 되었고 인위장군은 그대로 받았다가 공사로 인해 면직되었다. 이윽고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로 기용되었으며, 태부경(太府卿)·도관상서(都官尙書)로 전임되었다.
왕질은 570년에 죽어서 원래의 관직으로 추증되고 안자(安子)로 추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