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30 16:46:41

파르완 전투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 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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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1. 개요



1221년 아프가니스탄 파르완 주에서 호라즘 왕조의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와 쿠투쿠(忽都忽)[1]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맞붙은 전투로, 몽골-호라즘 전쟁에서 몽골군의 유일한 패배이자 호라즘 왕조가 승리를 거둔 유일한 전투이다.

2. 상세

1219년 여름, 칭기즈 칸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호라즘 왕조에 쳐들어왔다. 호라즘 왕국은 40만에 달하는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왕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고, 몽골군의 압도적인 기동력과 전투력, 탁월한 전략전술로 인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파죽지세로 삽시간에 무너졌다. 호라즘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수도 사마르칸트가 함락되자 도망을 갔지만 추격대에 쫓겨 멀리 방황하다가 카스피 해의 외딴 섬에서 1220년 씁쓸히 병사했다.

이무렵 본거지가 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신한 잘랄 웃 딘 밍부르누는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호라즘 왕조의 새 술탄이 되었다. 그는 테미르 말레크 및 직속부대와 호라즘 패잔병들, 가즈니 지역을 다스리던 그의 장인 니뮤의 군세, 그리고 아프카니스탄의 산악 부족들을 포섭하여 6만에 달하는 군세를 모았다.

얼마 후 쿠투쿠가 이끄는 몽골군 3만 명이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던 호라즘 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은 이들과 맞서기 위해 카불에서 북쪽으로 50마일 떨어진 파르완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1221년 여름, 파르완의 좁은 골짜기에서 양군이 마주쳤다. 좁은 계곡에 10만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이 대치했기 때문에, 기병이 자유롭게 이동하기에는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잘랄 웃 딘은 우익에 배치된 투르크 기병대에게 몽골군 좌익 부대 쪽으로 가서 화살 세례를 퍼붓게 했다. 몽골군도 이에 맞서 화살을 쐈지만, 미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선제 공격을 가한 투르크 기병대 쪽이 더 많은 피해를 입혔다.

사실 잘릴 웃 딘은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고 보고, 화살비를 퍼부어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힌 뒤 철수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적군의 규모가 생각만큼 크지 않고, 전력 손실이 크다는 것이 확인되자 그는 철수하는 대신 적군에 접근하기로 했다. 호라즘군이 접근해오자, 쿠투쿠는 우익 기병대에게 적 좌익을 향해 화살을 퍼붓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잘 훈련된 아프가니스탄 궁수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상황이 안 풀리자, 쿠투구는 전군을 이끌고 적에게 돌격해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호라즘군이 수적 우위와 유리한 지형을 앞세워 화살비를 퍼붓자, 몽골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다가 칭기즈 칸이 침략 전쟁을 개시한 이래 처음으로 규율이 무너져 후방으로 달아났다. 잘랄 웃딘은 기회를 포착하고 전군에 추격하라고 지시했고,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말을 몰아 달아나는 몽골군을 살육했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의 사상자는 절반이 넘었으며, 많은 병사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칭기즈 칸은 이 소식에 분노하여 친히 5만 명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군했다. 이 와중에 바미얀 지역에서 포위전을 펼치던 도중에 칸이 아끼던 손자 무투겐이 전사하며 칭기즈 칸과 몽골군의 전의를 불태웠고, 무자비하게 호라즘 전역을 유린한다. 이렇게 되자 파르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궁지에 몰리며 연패를 거듭한 잘랄 웃 딘은 잔여 세력을 규합한 뒤 인도로 피신하기 위해 인더스 강으로 향하지만, 강을 건너기 전에 몽골군에게 따라잡혔다.

잘랄 웃 딘과 테미르 말레크는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지만,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이들을 가차없이 쓸어버렸다. 테미르 말레크는 생포되었고, 잘랄 웃 딘은 폭우로 20척 깊이까지 불어난 인더스 강에 말을 탄 채로 뛰어든 뒤 기적적으로 강을 건넜다. 그 장면을 본 칭기즈칸은 " 저런 아들을 둔 아비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로다"고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칭기즈 칸은 그를 잡기 위해 인도로 추격대를 보냈지만, 병사들이 무덥고 습한 인도의 날씨를 견디기 힘들어 하고 병장기마저 쓸모가 없어지자 돌아오도록 했다. 이후 잘랄 웃 딘은 호라즘 왕조를 재건하기 위해 호라산,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힘을 기울였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국가들과 마찰을 빛은 끝에 1231년 살해당했다.


[1] 호엘룬의 양자이자 칭기즈 칸의 의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