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32

우주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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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yuz_TMA-5_launch.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p4-s67-50531.jpg
우주 경쟁이 낳은 결과물인 R-7[1] 새턴 로켓[2]

1. 개요2. 역사
2.1. 배경 및 시작2.2. 스푸트니크 쇼크2.3. 우주로 간 최초의 생명체 2.4. 유인 우주 비행- 가가린과 셰퍼드2.5. 케네디의 유인 달 탐사 계획 선언2.6. 계속된 소련의 우위2.7. 제미니 계획과 미국의 역전2.8. 미국의 유인 달 착륙 경쟁 승리2.9. 행성 탐사2.10. 우주 정거장 개발과 우주 왕복선2.11. 경쟁에서 협력으로 국제우주정거장2.12. 신냉전과 새로운 우주경쟁의 시작
3. 경쟁의 이유
3.1. 소련의 군사적 고립3.2. 냉전 속 경쟁심리3.3. 선전적 목적
4. 민간 기업의 우주 경쟁
4.1. 재사용 로켓의 등장4.2. 위성 인터넷 사업4.3. 화성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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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Race for the Moon Time Magazine.jpg
‘문 레이스’를 상징하는 타임지 표지.
파일:Our triumph in Space is the hymn to the Soviet country.jpg
우주에서 우리의 승리는 소련 국가를 위한 찬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ASTP_patch.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Apollo-Soyuz_Test_Project_patch.svg.png
우주 경쟁의 끝과 우주 협력의 시작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상징한다.

우주 경쟁(Space Race / Космическая гонка)은 20세기 중후반부터 미국 소련을 중심으로 시작된 우주 진출 및 개발을 두고 이뤄진 양국간 경쟁이다. 탐사에 한정해서 말할 때는 '문 레이스'(Moon Race)라고 하기도 한다.[3]

후대에 돌이켜보면, 이견의 여지는 있겠으나 냉전이 남긴 그나마 긍정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과학적/상업적 목적보다는 순전히 경쟁심에서 실시된, 터무니 없는 액수의 과시 행위이지만 동시에 인류사 최고의 과학 기술 발전을 실현시킨 시기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 주도로 우주 진출을 목표로 하여 여러 과학 기술들을 개발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은 인류 최초의 우주 개발인 만큼 가시적 성과가 컸고, 기본적으로 우주선 발사에 중점을 두었다. 모든 것이 최초였기에 상대보다 앞서야 했던 긴장감이 팽팽했던 시기였다.

우주 경쟁 시기 급속했던 우주 기술 발전은 탈냉전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빠졌다. 2020년대에 들어서야 미국의 민간 기업들이 우주로 나서면서 민간 차원에서 우주 경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4]

2. 역사

2.1. 배경 및 시작

우주 경쟁의 시작은 1953년 소련 정부 미국을 포함한 전 서방국가들을 사정거리로 하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천재 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이 개발한 V2 로켓을 실전에서 투입하여 런던 공습에 사용한 바 있었다. 이후 독일이 패망하면서 폰 브라운은 핵심 연구자 132명과 그 가족 300여명과 함께 미국으로 투항했다. 미국은 이들을 뉴멕시코로 이주시켰지만 나치 독일 출신이라는 이들에게 별다른 기회를 주지 않았다. 미국은 독일에서 열차 300량 분량의 V2 부품을 가져갔고, 이를 육해공 및 민간 항공사, 심지어 대학 연구소에까지 뿌려서 각 연구소에서 조립해서 발사해 보며 연구하도록 했고 그렇게 4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총 70여대의 V2가 발사되었다.

독일 과학자들은 V2 부품을 가져간 10여개 연구소에서 V2를 재조립하여 발사하는 것을 도와 주었으나 이후에는 로켓 개발은 미국인들의 몫이었고 폰 브라운 팀은 로켓 개발에서 한동안 배제되었다. 때문에 미국이 이들을 데려간 것은 이들을 써먹기 위해서라기 보다 소련이 이들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1차적 목표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편 소련은 V2 로켓의 개발 및 생산을 담당하던 페네뮌데를 점령하여 이곳에 남아있던 V2 완제품 및 부품, 생산 설비, 그리고 과학자와 기술자를 모두 소련으로 압송해갔다. 상당수의 독일 핵심 과학자들은 폰 브라운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그 밖에 남아 있던 인원들은 모두 소련이 접수했기 때문에 소련도 상당한 독일인 과학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5천명에 달하는 인원 중 단순 노동자, 기술자들을 제외하고 개발 인력만 170명 가량되었다.

이들 중 가장 핵심 과학자는 헬무트 그뢰트룹이었다. 독일 과학자를 데려온 소련의 로켓 과학 개발 책임자는 소련 과학자들이었고, 독일 과학자들은 철저히 기술을 전수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소련에서도 독일 과학자들의 역할은 컸고, 아무리 소련이 V2의 완제품과 부품, 생산 설비 및 노동자까지 전부 다 획득했다 하더라도 독일 과학자들의 도움 없이 V2를 복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련이 V2의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로켓 테스트로 인해 북유럽 일대에서는 큰 혼란이 있었다. 유령 로켓 참조.

특히 소련이 운이 좋았던 것이 헬무트 그뢰트룹과 그의 부하들이 V2 로켓의 유도제어장치 개발을 책임졌던 사람들인데 이것은 당시 소련의 ICBM 개발의 성패를 좌우한 가장 핵심 기술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로켓이라는 물건을 쏘아 올린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코롤료프나 글루시코도 이미 성공했던 일이다. 하지만 유도장치 없이 쏘아올린 로켓은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무기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로켓을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는 무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밀한 유도제어 기술이 필요했고, 나치 독일에서는 그뢰트룹의 팀이 유도장치를 개발하여 V2를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소련에는 제어유도 기술이라는 개념이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그뢰트룹이 소련 초창기 미사일들을 위한 유도제어장치를 만들어 준 덕분에 ICBM은 물론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릴 수 있었다.

크뢰트룹 팀으로부터 유도제어장치 기술을 습득한 소련은 1950년 독자적인 유도제어기술 연구소를 만들었고, 1950년대 후반부터는 그뢰트룹의 도움 없이 소련 과학자들이 자체적으로 유도제어장치를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우주 경쟁에 목 맬 생각이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라섰고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과학 · 기술에서 미국에 대적할만한 서유럽은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어 우주 개발에 나설 형편이 못 되었으며 소련 역시 2차 대전에서 독일과의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있었다. 냉전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이 라이벌이 되긴 했지만, 미국은 소련을 군사적으로 강할 뿐이지,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자신보다 한 수 아래인 나라로 간주했다.

특히 첨단 산업과 항공 분야에서 소련은 미국에 많이 뒤쳐져 있었다. 미국은 이미 공군력에서 소련을 압도하고 있었다. 냉전 초기의 긴장이 이어지던 1947년 소련의 경제 규모는 미국의 30% 정도였다. 이러한 격차 속에서 소련은 전후 복구와 동유럽 장악에 노력하고 서방 세계를 상대하기 위해 핵 개발과 군사 분야에 엄청난 예산을 소모했다. 그래서 한동안 소련은 우주 개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일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소련은 첩보 활동 및 자체적인 연구를 통해 1949년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에 이어 핵 보유국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핵을 개발해 놓고 나자 이것을 미국에 떨어뜨릴 방법이 없음을 깨닫게 된 소련은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당시 핵을 투발하는 방법은 폭격기에서 직접 떨어뜨리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당시 해군과 공군의 전력이 미군에 비해 부족하던 소련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넘어 미국의 방공망을 뚫고 핵폭탄을 떨어뜨릴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소련이 핵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은 소련을 압박하고 소련의 핵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공군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미국과 소련의 공군력 격차는 해가 지날수록 엄청나게 커졌고, 소련의 핵폭탄이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아서 효용성이 크게 떨어졌다.

1953년에 집권한 흐루쇼프는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는데 도움을 준 군부 실세들은 재래식 무기에 대한 투자를 종용했지만, 인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의 전후 재건과 중공업, 국방 분야에 치중한 투자로 인해 소비재와 주택, 편의 시설이 부족하여 인민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고 국방비도 지나치게 많이 소모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막대한 양의 핵무기, 소련 전역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핵 투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군축을 감행하고, 여러 가지 구상을 검토한 끝에 로켓 연구소가 제안한 '장거리 미사일 + 핵폭탄' 안을 추진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1953년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개발이 시작되었다. 소련 정부가 1호 연구실에 하달한 스펙은 사정거리 8000km에 탄두 무게 5500kg였는데, 8000km는 시베리아 중심부에서 미국 본토 중앙까지의 거리였고, 5500kg은 소련이 1953년 10월 개발에 성공한 수소폭탄의 무게였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 책임자는 세르게이 코롤료프였고, 소련 최고의 로켓 엔진 전문가 발레리 글루쉬코, 독일에서 투항한 로켓 유도 제어 전문가 헬무트 그뢰트룹 등이 핵심 개발자로 참여했다. 당시 소련은 ICBM에 국운을 걸다시피했기 때문에 대대적인 재원을 투입했고, 계획의 빠른 달성을 위해 연구진들에게 계속 압력을 행사했다. 코롤료프, 글루시코 등의 핵심 연구진들은 이미 샤라쉬카에 끌려간 적이 있었기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성과를 내놓아도 만족하지 못하는 연방 정부와 군부의 기대를 계속 충족시켜줘야 했다. 일부 소련 과학자들의 경우, 대숙청 시기에 선고받은 형기가 아직 진행 중이어서 수감자 신분이거나 가석방 상태였다.

이들을 지원하는 독일 과학자들은 높은 급여와 좋은 대우를 받는 동시에 거의 포로처럼 감금된 상태에서 소련 당국의 협박을 받으며 연구에 참여했다. 그러다 핵심 기술을 이전해 준 뒤부터는 좋았던 대우가 점점 나빠졌고, 총책임자라 할만한 그뢰트룹이 외딴 섬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핵심 과학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수천 명의 독일인 일반 기술자들은 R-7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1955 ~ 1956년 동안 동독으로 이주되었다. 이 때는 R-7 로켓 개발이 완성 단계에 이르기도 했고, 스탈린 사후 정권을 잡은 흐루쇼프 등이 스탈린 격하 운동 및 석유 및 천연 자원 수출을 위해 서방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상당수의 굴라그를 폐쇄하고 수용자들을 대거 석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 기술자들의 다수는 동독이 아닌 서독이나 동프로이센 실향민들[5]이었지만 그들에게 서독으로 돌아갈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들의 일부는 동독으로 보내진 후 서독으로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R-7 로켓 개발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기술력과 경험이 쌓이고 55년에 사거리가 1200km인 R-5가 성공하는 등, 개발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연방 정부의 막대한 재원 조달과 인력 제공도 영향을 미쳤다. R-7 연구진들은 시험기를 발사하여 문제점과 보완점을 찾고 경험을 축적하는 식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계획을 빨리 달성해야 하는 데다, 당국에 연구진들의 노력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루쇼프는 연구진들의 예산 요청을 성의껏 들어주었고, 군부와 당국은 실패에 대해 질책을 할지언정, 예산을 삭감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코롤료프와 글루시코가 시작부터 끝까지 사사건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뢰트룹 등의 독일 과학자들은 외딴 곳에 갇혀서 설계도만 보내왔기 때문에 핵심 개발진들 사이에 의사소통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일단 각자의 계획대로 이리저리 만들어 보고 안되면 다시 예산을 타와 진행하는 식의 반복이엇다. 그래도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마침내 1957년 하반기에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R-7 로켓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미국은 한동안 소련의 핵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공군력을 강화하는데 집중했고, 미사일 개발 부문에서 대공 단거리 미사일 개발 정도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국도 여러 루트를 통해 소련이 ICBM을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미국도 1955년부터 ICBM 개발에 착수했다.

미국의 미사일 개발은 군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분산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이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고 국가적 역량의 집중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해안경비대도 로켓 개발에 나섰다. 1955년을 기준으로 미국 내에서 로켓을 개발하고 있는 기관, 기업은 20여 곳에 달했다. 육군/해군/공군/해안 경비대가 모두 독자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외에 해양 대기청(=기상청)도 별도 개발 계획이 있었으며, 각종 대기업과 주요 대학도 자체적인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2.2. 스푸트니크 쇼크

1955년 세계 70여개국의 지구 물리학자들이 국제 학술 연합 회의(ICSU)에 모여 다가오는 1957년 7월 1일 ~ 1958년 12월 31일을 국제지구물리관측년(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 IGY)으로 지정하여, 지구의 중력, 경도. 위도, 지진, 자기, 해양, 기상, 빙하, 대기, 태양 활동, 극광 등 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연구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때(1955년) 미국 정부는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을 기념하기 위해 지구 대기권과 그 밖을 조사할 수 있는 인공위성을 만들어 IGY가 시작되는 1957년 7월 세계 최초로 발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세계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계획에는 미 육군 해군이 각각 '오비터(이후 익스플로러로 개칭) 계획'과 '뱅가드 계획' 제안서를 제출했다. 육군 로켓 개발팀, 즉 폰 브라운[6] 팀은 1953년에 이미 개발이 완료되어 실전 배치된 레드스톤 로켓의 파생형인 주피터-C라는 로켓에 인공위성을 실어 날리겠다는 제안을 했고, 해군은 뱅가드라는 새로운 로켓을 개발하겠다고 제안했다.

폰 브라운 팀이 개발한 육군의 로켓은 이미 2년 전인 1953년에 실물이 완성되어 실전 배치가 된 상태였고, 해군은 제안서를 만들면서 이제 막 설계를 시작한 상태였다. 당연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5년 7월 15일 육군의 오비터 계획을 선정했다. 하지만 해군은 탈락한 이후에도 온갖 연줄과 로비를 다 동원해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회유했고, 결국 두 달 후인 9월 9일 결과가 번복되어 육군의 오비터가 탈락하고 해군의 뱅가드가 선정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육군이 로켓을 발사하면 소련이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해군에서 개발하기로 했다는 것이지만, 실제 이유는 나치 독일 출신의 과학자들이 아닌 순수 미국인들이 인공위성을 개발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의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미국 과학계 역사상 가장 큰 치욕을 불러왔다.[7]

미국은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를 기념하기 위한 과학 인공위성 뱅가드 발사 계획을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1957년 7월이 발사 예정이었지만 사실 해군 로켓 연구소의 진행 상황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다. 뱅가드의 1단 로켓은 너무나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어 아예 폐기하고 재설계에 들어갔고, 3단 로켓도 추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예정했던 1957년 7월 발사는 물 건너 갔고, 계획은 계속 연기되었다.

한편 극비리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던 소련은 미국이 1957년 7월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자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즉 미국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소련은 R-7 로켓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폭발을 거듭하던 R-7 로켓은 1957년 에 드디어 날아오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R-7은 간신히 날아 오르는 것만 성공했을 뿐 비행 거리, 추력, 비행 안정성, 표적 정확도 등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았고 미국 아이젠하워가 공언한 1957년 7월 이전에 선수 쳐서 인공위성을 띄우겠다는 소련의 계획은 틀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미 해군의 뱅가드 계획 또한 많이 지연되고 있었기에 소련은 R-7을 개선하는데 주력했다. 여름까지도 계속 중요한 문제점이 나타나긴 했지만 이를 보완하는데 성공했고, 1957년 하반기에는 목표에 근접하는 성능이 나오기 시작했다. 1957년 가을 소련은 마침내 R-7 로켓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했고, 1957년 10월 4일 마침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로 소련은 우주 시대를 열었고,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 국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파일:sputnik1.jpg
스푸트니크의 모습

소련 로켓은 애당초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로 개발된 것이었고, R-7 로켓의 개발로 소련은 핵무기 미국 본토에 투발할 수단을 획득하게 되었다.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여, 자신들이 인공위성 대신에 핵무기를 실어 미국으로 배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증한 셈이다. 실제로 흐루쇼프는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전에도 "우리는 수소폭탄을 실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갖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기 전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파일:external/static01.nyt.com/1004_big.gif
소비에트, 인공위성을 우주로 발사
지구를 시속 18,000마일[8]로 공전중
미국 상공을 4회 가로지른 것이 포착됨

- 뉴욕 타임스, 1957년 10월 5일 헤드라인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 후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이 전세계에 야기한 광범위한 분야, 특히 과학 기술과 교육 분야에 미친 충격을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부르게 되었을 정도였다. 기존에는 소련이 미국과 그 동맹국에 본토를 둘러싸인데다 미국에 비해 항공전력이 한참 뒤쳐져서 미국의 정찰기가 돌아다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소련도 직접 미국의 본토에 선빵을, 그것도 핵 선빵을 때릴 부위를 골라서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본적 핵전력이나 동맹 전력까지 합치면 미국이 우세했지만, 소련이 원한다면 지리적 거리나 방공망, 제해권 따위는 상관없이 언제라도 때리고 싶은 도시를 맘대로 골라 핵폭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런 우세를 가볍게 상쇄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어떻게든 소련의 핵미사일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는데, 알다시피 대기권 밖에서 떨어져내리는 미사일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막기 어렵다. 소련의 핵미사일을 막을 수 없다면, 미국 역시 소련과 같은 수준의, 더 나아가 소련을 능가하는 핵무기 투발수단을 가져야 했다.
컬러로 복원된 당시 미국의 뱅가드 위성 발사 생중계 장면

스푸트니크의 발사 성공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미국은 1957년 12월 6일 마침내 완성된 해군의 뱅가드를 발사했으나, 뱅가드 로켓은 발사대도 못떠나고 폭발해 버렸고, 이 장면은 TV를 통해 생중계되어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스푸트니크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미국은 뱅가드로 인해 상처가 벌어지다 못해 갈기갈기 찢긴 꼴이 된다.

뱅가드 1호 폭발 직후 해군은 곧바로 수 개월 내로 뱅가드 2호를 발사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해군에서 돌아가는 꼬라지를 본 미국 정부는 지체없이 폰 브라운이 이끄는 미 육군 로켓개발팀에 인공위성 발사 오더를 내렸고, 이에 폰 브라운 팀은 오더가 떨어진지 한달여만인 1958년 1월 주피터-C(=주노 1호)[9] 로켓 익스플로러 1호라고 명명한 인공 위성을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 1호는 소련 스푸트니크 1호에 비하면 크기도 작았고,[10] 게다가 소련은 이미 스푸트니크 1호 발사 한달여 만에 최초로 생명체인 라이카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올려보냈기 때문에 체면치레라고 할 것도 못 되었다. 어쨌거나 익스플로러 1호의 성공으로 미국도 뒤늦게 간신히 우주 경쟁에 합류하게 되었다.

사실 미 육군의 폰 브라운 팀은 이미 진작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1957년 12월 해군의 뱅가드가 실패하자 폰 브라운팀은 지시가 떨어진지 한달여만에 인공위성을 만들어서 1958년 1월에 쏘아올렸다. 발사체인 주피터-C 로켓은 이미 육군에 실전 배치 중이었기 때문에 육군 병기창에 보관되어 있던 여분의 주피터-C 로켓을 그대로 꺼내와 사용했다. 다만 탄두에 올릴 익스플로러라는 14kg짜리 인공위성 자체를 설계,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여기에 한달 남짓 시간이 소요되었다.

애초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해군이 아니라 육군의 폰 브라운 팀에게 인공위성 발사를 지시했다면 폰 브라운팀은 예정된 1957년 7월보다도 훨씬 빨리 인공위성을 날릴 수 있었고 미국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나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사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5년에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이 시작되는 1957년 7월에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겠다고 진작부터 D-데이를 선포한 것은 소련의 ICBM의 개발을 더욱 앞당겼다. 미국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는 것은 미국 역시 중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에 소련은 미국이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기 전에 먼저 R-7 로켓 개발을 완료하여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기로 마음 먹었고, 로켓 개발에 사력을 다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스스로 약속했던 날짜인 1957년 7월에 실제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면 미국은 소련에 앞서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국이 될 수 있었다. 1957년 7월에도 소련의 R-7 로켓은 불안정한 성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소련 역시 미국에 선수를 쳐서 1957년 7월 이전에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는 내부 계획이 지연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미 해군 로켓 연구소는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고 있었고 뱅가드 계획은 계속해서 지연되었다. 그 사이 소련은 R-7 로켓을 안정화시켜 10월에 먼저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던 것이다.

미국이 중요한 우주선을 발사시킬 때 소련이 직전에 기습적으로 선수치는 수법은 이미 스푸트니크 때부터 시작되었고 나중에도 계속된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우주 개발 계획에 필요한 막대한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 여론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모든 과정과 계획을 상세히 언론에 공개해왔다. 반면 인민의 지지 따위는 필요없었던 소련의 우주 개발 계획은 철저히 비밀주의였고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미국이 발사하기 수개월 전부터 호들갑을 떠는 것과 달리 소련은 쥐도새도 모르게 조용히 발사시킨 뒤 실패하면 이를 알리지 않았고, 성공하고 나면 사후에 성공했다고 짧게 발표하여 미국의 혈압을 급상승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미국은 패배를 만회하고 반격을 하기 위해서 우주 개발 및 발사체에 관련된 업무를 모아서 NASA를 설립하고 교육정책을 진보주의적 교육에서 본질주의적 교육으로 바꾸는 등의 재정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국가적 역량을 기울인 대결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NASA 설립을 위해 정부와 각 군에 산개되어 있던 수십개의 항공우주 연구소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주도권을 잡거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알력이 계속되었고, 이에 NASA 설립 특별법이 제정된 후에 실제로 NASA로의 통합이 완료되는데는 수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치 독일 출신의 폰 브라운 팀은 여전히 여러 사람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 폰 브라운은 자신이 NASA의 총책임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대신 자신이 꿈꿔오던 우주여행만은 꼭 이루고자 마음 먹었다. 당시 폰 브라운은 직접 로 가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소련을 이기기 위해서는 대형 로켓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정부가 이를 승인해 주지 않으면 NASA에 합류하지 않고 차라리 육군에 남거나 대학이나 민간 연구소로 가겠다고 버텼다. 하지만 미국 정부 펜타곤이 보기에 폰 브라운이 주장하는 F-1이라는 무지막지한 엔진을 가진 로켓은 군사적으로 필요로 하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고, 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쉽게 승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년에 걸친 설득과 협의 끝에 폰 브라운은 개발을 승인받으며 NASA에 합류 했다.

이렇게 스푸트니크 쇼크 후 미국은 여야가 합심하여 NASA 설립 특별법을 서둘러 제정했지만 정작 정부 및 각 군의 연구소들간의 복잡한 갈등으로 NASA 통합이 완료되고 정상적으로 굴러가기까지는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와중에 소련은 미국보다 더욱 훨씬 앞서 나가고 있었다.

2.3. 우주로 간 최초의 생명체

경쟁적인 인공위성 쏘아올리기는 당연했다. 과학위성, 통신위성, 군사위성 등등. 이후에는 우주에서 공격하기 위한 무기를 장착한 위성을 발사할 계획도 세워졌었다.

하지만 인공위성 발사는 실용적인 목적이었기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미친짓(물론 좋은 방향으로)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 준비단계라고 할 수는 있어도.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두 나라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갖춘 뒤, 그 미친짓으로 직접 이어지는 단계는 동물 우주비행이었다.

흔히들 소련 스푸트니크 2호로 올려보낸 라이카가 최초의 우주비행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947년에 미국이 V2 로켓을 이용해 초파리를 대기권 밖으로 날려보낸 게 최초의 사례이다. 심지어 이 초파리는 무사히 살아서 지구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우주경계선을 정의한 뒤에 바뀐 것이고 이미 최초의 우주비행 동물로서의 인지도는 라이카가 쓸어갔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우주로 보내진 최초의 포유류는 당연히 1957년 11월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지구궤도를 돌았던 개인 라이카였다. 소련은 특이하게 동물 중에서 개를 집중적으로 우주로 올려보냈는데, 처음에 개를 보내자고 주장한 사람은 코롤료프였다. 물론 주인 있는 개를 날려 보낼 수는 없었고, 모스크바 길거리를 배회하던 유기견들을 잡아와 훈련시켜 올려 보냈다. 최초의 우주견인 라이카도 유기견이었다. 개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영문도 모르고 온갖 고통스러운 훈련을 받으며 개들은 며칠 동안 대소변을 보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이상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파일:Laika.jpg
우주선 발사 전 라이카의 모습[11]

라이카는 함께 훈련 받던 수십 마리의 유기견 중 가장 훈련을 잘 받았기에 최초의 우주견으로 선발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소련은 당시 우주를 비행한 개를 회수할 기술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캡슐이 대기권에 재진입하기 전에 라이카를 약물 안락사시켰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45년 동안 진실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002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라이카는 캡슐의 과열로 궤도에 도달한 직후에 죽었다고 한다. 애초에 소련은 라이카의 안전을 위해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지구 궤도에서 생존할 수 있는지만 확인해 보려고 했다. 안락사 시키기 위한 약물 장치도 거짓이며 애초에 그런 장치는 없었으며, 그냥 우주에서 알아서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스푸트니크 2호는 발사 7일 후 전력과 모든 장치가 셧다운 하도록 되어 있었고, 생명유지 장치도 함께 자동으로 꺼지도록 되어 있었다. 라이카의 시체를 실은 스푸트니크 2호는 그 뒤로도 지구 궤도를 5개월간 2570번 더 돌다가 1958년 4월 14일 지구로 떨어지며 소멸되었다. 스푸트니크 2호 성공(?) 후 소련은 라이카를 고결한 사회주의 영웅으로 기렸으며, 라이카가 훈련받았던 유기견 훈련소에는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한 개 ‘라이카’가 여기 살았다”는 청동 기념패가 붙었다. 또 소련 및 위성국가인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알바니아, 북한 등 공산권 위성 국가들에서는 라이카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유인 우주 비행을 준비하기 위해 소련은 이후에도 많은 개를 쏘아올렸는데, 라이카 이후 60년대말까지 알려진 것만도 약 50여 마리의 개를 우주로 쏘아올렸다. 일부는 생환했고, 일부는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라이카를 올려보낸 후 소련의 다음 계획은 궤도로 올려보낸 개를 다시 지구로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몇 마리의 개가 우주에서 더 죽은 후에 최초로 지구로 다시 살아 돌아온 개는 1960년 9월 18일에 스푸트니크 5호에 탑승한 벨카 스트렐카라는 두 마리의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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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자고 있는 개가 벨카, 오른쪽에 있는 개가 스트렐카이다.

개 이외에도 스푸트니크 5호에는 여러 마리의 쥐가 타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1947년 우주로 보냈다가 귀환시킨 초파리를 제외하면) 최초로 동물이 우주로 올라가 지구 궤도를 돌고 귀환한 사례였다. 이로서 과학자들과 생리학자, 대중들이 의심하던 우주에서 생리학적 위험에 대한 우려가 불식되었다. 게다가 벨카와 스트렐카가 지구로 돌아온 후 새끼를 낳는데 성공하자 소련은 다시 한번 이를 홍보했고, 흐루쇼프는 호기롭게 새끼 중 한마리를 케네디 대통령의 딸 캐롤라인에게 선물로 보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많은 동물들이 더 희생되었다.

한편 미국은 영장류인 침팬지 원숭이 아프리카에서 수입하여 훈련시킨 뒤 우주로 보냈다. 1961년 1월 31일 침팬지 햄이 약 7분간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지구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미국은 머큐리로 사람을 우주로 보낼 계획을 세웠다. 침팬지가 최초로 우주로 나갔다가 귀환한지 불과 석달만에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우주인이 되면서 동물 날려보기는 대중들의 관심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이 날려보낸 동물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이름이 뭔지, 몇 마리가 날아갔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물론 홍보하는 것을 좋아하는 NASA는 당시의 사진도 공개하고 있으니 생김새와 어떻게 갔는지 궁금하다면 무인 머큐리 계획 사진기록으로 이동하자.

유리 가가린의 귀환 이후 동물 날려보내기는 한동안 중단되었지만, 1960년대 말 미소의 우주 경쟁이 을 목표로 하게 되면서 소련은 동물을 달 궤도로 날리기 시작했다. 개를 포함한 여러가지 종의 생물을 여러 차례 달 궤도로 보냈고 많은 동물이 희생된 끝에 마침내 1968년 9월 존드 5호에 탑승한 호스필드거북이 살아서 최초로 달 궤도를 비행한 생물이 되었다. 하지만 불과 석달 후 미국이 아폴로 8호로 사람을 달 궤도로 보냈다가 귀환시켰기에 존드 5호는 금방 빛이 바래게 되었다.

사실 존드 5호는 중간에 수차례 오작동 및 고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운좋게 지구로 돌아왔지만 대기권 진입 과정에서 무려 20G가 넘는 압력이 가해졌고, 거북이가 아닌 사람이었다면 즉사했다. 직후 소련은 아폴로 8호가 발사되기 전에 다시 한번 존드 6호를 날렸지만 존드 6호에 실린 동물들은 모두 죽어서 돌아왔다. 존드 6호를 끝으로 소련은 동물 미션을 중단하고 유인 미션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존드 5호, 6호 모두 사람이 탔다면 사망했을 것이기에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유인 미션에 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고 결국 미국이 먼저 달에 갔다오면서 소련 우주 비행사들은 목숨을 아낄 수 있었다.

2.4. 유인 우주 비행- 가가린과 셰퍼드

계속해서 동물 우주로 보냈지만 두 나라 다 겨우 동물이나 올려보내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었다.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기계( 인공위성) 다음 차례로 모두가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너무도 당연했지만 함부로 하기 힘든 모험이기도 했다. 인공위성이나 동물 발사 실패는 시행착오 정도로 넘어갈 수 있지만 사람을 보냈다가 실패하면 자존심도 자존심이고 사기도 엄청 떨어지고 국내외의 인기도 타격이 가는 모험이었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을 진행하고, 스푸트니크 쇼크에 빠진 미국도 머큐리 계획에 올인을 했다. 이미 첫 인공위성을 빼앗긴 미국에게는 소련을 앞지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소련도 우주인을 보내는데 조금도 뒤쳐질 생각이 없었다. 위에 나온 것처럼 1960년 8월 소련이 를 살아서 지구로 귀환시키는데 성공하며 다시 앞서는 듯 했지만, 미국도 1961년 1월말 영장류 침팬지를 지구로 생환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이제는 인간을 생환시킬 수 있겠다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차이가 크지 않은 영장류인 침팬지가 지구로 살아돌아는데 성공하면서, 다음 계획은 자연스레 인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국은 속전속결로 추진하여 침팬지 성공 후 불과 석달여 만인 5월초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냈다가 귀환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앨런 셰퍼드로 우주로 나가기 25일 차이로 유리 가가린이 먼저 유인 비행을 함으로써 최초의 유인 비행 타이틀도 소련에게 뺏기고 만다. 스푸트니크, 라이카에 이은 소련의 3연타 승리였다. 라이카는 그렇다 쳐도 유리 가가린의 성공은 스푸트니크 못지 않게 미국과 전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갔다온 지 20여일 후인 5월 초 미국도 예정대로 앨런 셰퍼드를 우주로 보내 생환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유리 가가린은 지구 궤도를 돌고 귀환한 궤도 비행이었고, 앨런 셰퍼드는 탄도 비행이었기에 미국의 우주항행 기술은 소련에 비해 크게 뒤쳐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2년 2월, 미국의 존 글렌이 궤도 비행에 성공하면서 미국이 유리 가가린과 동동한 수준의 비행에 성공했다.

존 글렌의 성공으로 미국은 소련과 격차를 좁히나 싶었으나 얼마 안 가 소련이 보스호드 계획을 통해 다인승 우주선에 성공하며 또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여기서 그치면 모르겠는데, 최초의 우주 유영마저도 소련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체면치레 할 방법조차 없었다.

2.5. 케네디의 유인 달 탐사 계획 선언

1961년 4월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로 갔다온 사실은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해 1월에 취임했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가가린 성공 직후 미 정부 우주 프로젝트의 총담당자인 린든 존슨 부통령과 긴급 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케네디와 존슨은 소련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일단 소련을 가장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뭔지를 알아야 했고, 이를 알기 위해 존슨 부통령이 NASA로 직접 연락했다.

린든 존슨 부통령의 질문을 받은 NASA의 천재 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4월 29일 존슨 부통령에게 상세한 답신을 보냈다. 여기서 폰 브라운은 추후 가능한 다양한 선택지가 있지만, 미국이 반드시 소련에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어려운 방법인간을 달로 보냈다가 귀환시키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현재 소련이 여러가지 발전된 우주 기술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달에 인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현재와는 차원이 다른 초대형 로켓이 필요한데, 여기서 미국이 소련보다 크게 앞서 있다고 단언했다.

폰 브라운이 존슨 부통령에게 답신을 보낸지 며칠 후,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폰 브라운 팀이 있는 헌츠빌의 NASA 마셜 우주비행센터를 방문했다. 현장에서 로켓 개발 현황을 확인하고 폰 브라운에게 직접 상세한 설명을 들은 케네디 대통령은 며칠 후인 1961년 5월 25일 국회에서 그 유명한 "10년 안으로 인간을 달에 보냈다가 귀환시키겠다"는 연설을 통해 처음으로 유인 달 탐험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은 10년 안으로 인간을 달에 보내 무사귀환시켜야 합니다. 다른 어떠한 우주 계획도 인류에게 이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는 또한 장기적인 우주 탐사 계획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며, 이를 위해 온갖 어려움과 막대한 비용을 감수할 것입니다.

first, I believe that this nation should commit itself to achieving the goal, before this decade is out, of landing a man on the Moon and returning him back safely to the earth. No single space project in this period will be more impressive to mankind, or more important for the long-range exploration of space; and none will be so difficult or expensive to accomplish.

그리고 1962년 9월 12일, 라이스 대학교에서의 연설에서 이를 보다 구체화 했다.
1962년 9월 12일, 라이스 대학교 연설
For the eyes of the world now look into space, to the moon and to the planets beyond, and we have vowed that we shall not see it governed by a hostile flag of conquest, but by a banner of freedom and peace. ...(중략)...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세계의 눈이 지금 우주를 향해, 달과 그 너머 행성들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맹세했습니다. 우주가 적의에 차 있는 정복의 깃발(= 소련) 아래 지배되도록 좌시하지 않고, 자유 평화의 깃발 아래 지배되도록 할 것을. ...(중략)...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10년 내에 달에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케네디 대통령은 라이스 대학에서의 이 유명한 연설을 하기 하루 전날인 9월 11일 헌츠빌의 NASA 마셜 우주비행센터를 다시 방문했었고, 이날 폰 브라운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직접 새턴 로켓의 C-1 엔진이 조립되는 생산 현장을 보여주었다. NASA 홈페이지의 관련 사진

케네디의 라이스대 연설의 이 구절은 흔히 문학적 분석으로 높이 평가되지만, 사실 그 이면을 보면 케네디 본인이 직접 처했던 상황과 선택을 말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폰 브라운이 제시한 여러가지 방안 중에서 유인 달 탐험은 가장 어려운 미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폰 브라운은 유인 달 탐험에서는 미국이 반드시 소련을 이길 수 있지만 다른 계획으로는 소련을 이긴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심 끝에 케네디는 가장 어렵긴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는 달 탐사 추진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We choose to go the moon. 즉 본인과 폰 브라운은 여러 계획 중에서 탈 탐험을 하기로 선택한 것이며, 이는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달 탐험이 가장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케네디의 라이스 대학교 연설 후반부에는 F-1 엔진을 탑재한 새턴 로켓이 이미 언급되고 있다. 게다가 중요한 부분은 두 번 말한다.

케네디가 1960년대 안으로 인간을 달로 보냈다가 귀환시키겠다고 한 발언은 당시에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시간상 너무나 촉박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케네디가 아무 생각 없이 단지 하면 될 것이라는 담력 내지 무모함으로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니었다. 폰 브라운은 이미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NASA와 펜타곤 수뇌부를 설득해가며 초대형 로켓 개발을 진행해 오고 있었고, 케네디 대통령 앞에서 기술 개발 상황과 향후 플랜을 상세히 설명했고 이에 케네디 본인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까마득하게 머나먼 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에 당시 진 크랜츠를 비롯한 나사 직원들은 이 연설을 듣자마자 어이가 털려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설 직후 우주진출에 대한 열의로 불타는 사람들이 NASA에 취직하겠다고 벌떼처럼 몰려오자, 분위기를 제대로 타버린 직원들은 '그 인간이 믿어주는데 까짓거 한 번 해 보자'는 심정으로 자발적 공밀레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프로젝트 A119라는 미 공군에서 1958년부터 주관하던 별도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건바로 핵폭탄을 달에서 터트려 우주경쟁에서 이기겠단 계획이다. 소련도 비슷한 시기에 E 프로그램이란 달 핵폭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다행이 양쪽 우주국은 밤하늘의 짧은 섬광보다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 게 더 효과적이라 판단했고, 추가로 달의 방사능 오염으로 미래의 추가적인 달 계획이 방해를 받을 것을 우려하여 현실로 이뤄지진 않았다.

2.6. 계속된 소련의 우위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의 유인 달 탐사 구상 선언 이후에 미국과 소련의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1964년 10월에는 소련이 최초로 다인승 우주선인 보스호드 1호를 성공시켰고, 1965년 5월에는 보스호드 2호가 최초로 우주유영( EVA)을 성공시키면서 미국과의 격차를 벌려 나갔다. 스푸트니크와 유리 가가린이 미국보다 단 몇 주 앞서 간발의 차이로 먼저 성공시켰다면, 이제는 미국이 뒤따라 잡는데 수개월 걸릴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1964년~1965년 경이 소련이 미국을 가장 앞섰던 시기였다.

그러자 서방 언론에서도 조바심을 냈다. 어떤 면에서는 미국 언론보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직접 노출되어 있던 영국 등 서유럽 언론들이 더욱 조바심을 내며 미국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1960년대 당시 미소 우주 경쟁과 관련된 레퍼런스 소스의 상당 부분이 BBC 등 영국 언론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을 봐도 당시 서유럽 언론들이 미국의 우주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독 언론 역시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아도 자국 출신의 과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우주 개발에 은근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미국은 소련과 격차가 벌어지며 더욱 뒤쳐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귀환시킨다는 궁극적인 목표하에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단계적으로 계획을 이행하고 있었다. 이 점이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NASA의 실질적 총책임자가 된 직후부터 달 착륙은 물론, 장기적으로 화성 착륙까지 염두에 둔 엄청난 출력을 지닌 거대 로켓 엔진의 개발에 착수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전권을 가진 총책임자로 미국의 계획을 총지휘했는데 자신의 로켓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 케네디에게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확답했고[12]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9월 라이스 대학의 We choose to go to the moon 연설에서 이미 다섯개의 거대한 F-1 엔진을 결합한 새턴 로켓을 개발하여 달에 갈 것이다라고 구체적인 계획을 이야기했다. 폰 브라운이 이미 50년대부터 스스로 화성 착륙을 꿈꾸며 거대 로켓 엔진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NASA는 1963년에 이미 F-1 로켓 엔진의 테스트에 들어가고 있었다. F-1 로켓 엔진의 개발 덕분에 훗날 미국은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있었다. 반면 소련은 이러한 고출력 엔진 개발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문 레이스에 실패하고 말았다. F-1 로켓 엔진 개발은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60년대 중반 당시에 이는 눈에 띄는 성과도 아니었고 또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마냥 미국이 소련에 뒤쳐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이에 반해 소련은 장기적인 플랜이 미국보다 덜 구체적이었고, 최초의 인공위성, 그 다음엔 동물, 사람, 다인승, 여자, 우주여행 하는 식으로 보다 작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각각을 미국보다 앞서 성취하는 방식을 취했다.

2.7. 제미니 계획과 미국의 역전

때문에 1965년경 소련과 미국의 격차는 크게 벌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5년 중반을 분기점으로 미국이 제미니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소련이 여러 가지 세계인들의 이목을 끄는 미션을 성공시키며 계속 미국을 앞서나가는 동안 미국은 지엽적인 목표들을 배격하고 오로지 인간을 달로 보낸다는 목표에 집중했고, 이를 위한 여러가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제미니 계획을 실시했다. 제미니 계획은 매우 정교하게 계획되었는데, 이 때문에 머큐리 계획이 종료되고 나서도 2년 후인 1965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그 2년 동안 사람들은 미국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사이에 소련은 훨씬 더 앞서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1965년 중반, 일단 제미니 계획이 시작되자 그야말로 숨돌릴 틈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며 다인승 우주선, 우주유영, 랑데부, 장기간 우주체류, 도킹 등 여러 목표들을 순차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연이어 성공시켰다. 제미니 계획의 이런 미션들은 소련과의 단기적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달에 인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기술들을 성공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2.8. 미국의 유인 달 착륙 경쟁 승리

소련 역시 이번에도 미국보다 먼저 인간을 달에 보내자는 각오로 임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소련의 달 착륙 계획은 'L3 계획'이라 불렸다. L3 계획은 발사체인 N1 로켓, 우주선인 소유즈, 달 착륙선의 개발로 나눠었다.

이중 가장 진행 속도가 빨랐던 것은 우주선인 소유즈의 개발이었다. 코룔로프가 구상한 소유즈 우주선은 1967년 첫 유인 발사를 가졌으나 조종사가 사망하는 사고를 겪었다. 이후 문제점을 보완하여 1968년 10월에야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미국이 아폴로 7호로 첫 유인 우주 비행을 성공한 것 보다 2주 뒤쳐진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소유즈 이외의 나머지 부분의 개발은 더욱 더딘 상황이었다.

문 레이스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기술은 인간과 달착륙선을 달까지 보낼 수 있는 추진력을 가진 거대한 로켓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미국의 베르너 폰 브라운은 NASA가 설립된 직후인 1959년 거대한 로켓 엔진 개발에 착수하고 있었다. 아직 케네디 대통령이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고 얘기하기도 전이었다. 브라운의 꿈은 화성 탐사였기 때문에 그가 개발한 F-1 로켓 엔진의 추진력은 인간을 달로 보내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폰 브라운은 머큐리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3년에 벌써 F-1 로켓 엔진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했고, F-1 로켓 엔진 5개를 조합하여 새턴 V 로켓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13]

반면 소련은 거대 로켓을 개발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코룔로프와 그의 동료 우주 공학자들은 R-7의 엔진보다 더 큰 출력을 가진 로켓 엔진을 개발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코룔로프는 고만고만한 추진력을 가진 엔진을 무려 30개나 결합한 N1 로켓을 구상했다. 그러나 30개나 되는 엔진들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66년 1월 코룔로프의 죽음 이후 소련의 우주 개발 계획 속도는 크게 둔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미국은 이미 1967년말에 새턴 V 로켓의 무인 발사에 성공했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N1 로켓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었고, 그 사이 미국은 1968년말 아폴로 8호를 성공시킴으로써 달 착륙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알렸다. 소련은 1969년 2월 21일에야 N1의 첫 무인 시범 발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공을 위한 발사가 아니라 실패를 위한 발사였다. 미국과 소련의 로켓 개발 프로세스는 큰 차이가 있었는데, 미국이 단계별 테스트를 철저히 거쳐서 진행한 후 최종 조립된 로켓 발사 테스트를 진행하는 반면, 소련은 설계가 완성되면 단계별 테스트를 스킵하고 일단 전체를 조립해서 날려본 후 어디가 먼저 터지나 보고 나서 그 부분을 보완해서 다시 만들어 날리는 식으로 진행하여 목표로 한 성능이 나올 때까지 반복하는 식이었다.

미국의 경우 우주 개발을 위한 예산을 획득하려면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때문에 모든 개발 계획을 언론을 통해 상세히 알렸다. 그러나 뱅가드처럼 기술적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로켓을 발사했다가 폭발한다면 여론은 급격하게 악화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로켓을 개발할 때 사전에 각 단계별로 철저히 테스트를 한 후 로켓을 쏘아올렸다. 그래서 폰 브라운 팀의 새턴 V 로켓은 첫 발사 이전에 이미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였고, 첫 발사 테스트인 아폴로 4호 때부터 이미 기대했던 성능이 나왔다.

하지만 소련은 생각하는 방식이 미국과 좀 달랐는데, 부분 테스트를 하는 것도 다 돈이고, 그걸 열심히 해봤자 조립해서 발사하면 또 어디서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될지 몰랐다. 그래서 엔진을 제외하면 부분 테스트를 다 스킵하고 일단 조립해서 날려보았다. 그래서 R-7도 수없이 쏘아올리면서 어디가 터지는지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계속 보완해 가면서 완성했었고, N1 역시 14회나 발사가 예정되어 있었고 그중 12회차까지는 무인이었다. 이말을 뒤집으면 소련은 N1 발사가 13번째까지는 실패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14번째 발사 이전에 끝날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고, 14회를 초과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문제는 N1은 R-7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복잡하고 비싼 로켓이었다는 점이었다. N1 로켓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1단부의 30개나 되는 엔진을 동기제어하는 기술이었는데, 소련은 너무나 무모하게도 엔진 동기화 테스트를 한번도 안하고 N1을 발사했다... 때문에 소련 과학자들도 N1의 1차 발사는 100%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N1은 1차 발사에서 발사후 68초만에 폭발하고 말았다.[14] 이 시점에서 문 레이스는 거의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N1의 무인 발사가 성공했다 하더라도 미국보다 먼저 달에 갔다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폴로 11호를 발사시키기 직전인 7월 3일 N1의 무인 발사를 다시 한번 시도했으나 발사 직후에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발사대에서 가로로 넘어지면서 폭발한 나머지 부근에 있던 다른 발사대까지 모두 박살내 버렸다. 결국 보름 후 발사된 아폴로 11호가 성공하면서 문 레이스는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파일:미국의 달 착륙.jpg

문 레이스는 미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폴로 11호가 성공한 후에도 소련은 유인 달 탐사 계획을 곧바로 접지는 않았다. 우주계획에 있어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수했고, 오직 성공했을 때만 그 결과를 발표해오던 소련은 유인 달 탐사 계획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소련은 N1의 폭발과 함께 박살이 난 발사대를 복구한 후 1971년 6월과 1972년 11월말 N1의 무인 시범 발사를 두 차례 더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1974년 11월 N1 로켓의 5차 발사가 예정되었으나, 소련 당국은 1974년 5월 마침내 달 착륙 계획을 완전히 중단시켰다. 이어 소련은 유인 달탐사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철저히 폐기했다.

사실 소련은 유인 달 탐사 계획 이외에도 60년대 중반부터 무인 달 탐사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이 덕분에 60년대 중후반 소련이 달 탐사에서도 계속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소련은 루나 탐사선을 통해 달의 무인 탐사를 처음으로 수행했다. 루나 2호는 달에 성공적으로 충돌하였으며, 루나 9호는 달에 최초로 착륙했으며 이는 TV로 중계되었다. 또한 달 뒷면의 사진을 찍었고, 후기의 루나 탐사선은 월석을 체취하여 지구로 성공적으로 귀환하는 등 이번에도 소련이 먼저 선점을 할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무인 달 탐사는 그다지 의미 없다고 판단하여 일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유인 달 착륙 계획에만 역량을 집중시켰다.

소련은 결국 달에 인간을 보내는데 실패했지만 소련도 이 달 착륙 경쟁에서 얻은 것도 있었다. 소련은 이후 이 달 착륙 경쟁에서 개발한 마르고 닳도록 쓰는 우주선계의 AK-47 소유즈를 잘 활용하게 되고, 미국도 남은 로켓을 사용하여 스카이랩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에 사용한다. 일단 역사가들의 평가로는 ASTP를 끝으로 우주 경쟁은 종지부를 찍었다고 보는 편. 하지만 이후로도 미국과 소련/러시아는 적대적이지 않다 뿐이지 경쟁심을 유지하며 온갖 돈지랄을 이어간다.

그 절정에 이른 1975년, 미소 양국은 일약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이루어낸다.

2.9. 행성 탐사

비록 달 착륙이 미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소련과 미국은 지구계를 벗어나 태양계에서도 경쟁 중이었다. 미국은 이미 매리너 계획을 통해서 수성, 금성, 화성의 궤도를 스쳐지나가는 방식으로 탐사를 진행 중이었지만, 아폴로 11호가 착륙하고 나서도 그 어떤 국가도 다른 행성에 탐사선을 착륙시키지는 못했다. 심지어는 행성에 궤도 형성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소련은 1970년 최초의 무인 달 탐사 로버인 루나호드를 달에 보낸 경험을 토대로, 마스 계획을 통해 화성에 탐사선을 보냈지만, 대부분은 착륙에 실패하거나 착륙 도중 통신이 끊겼다. 최초로 화성에 착륙한 마스 3호는 화성 표면에서 최초로 인류에게 전파를 송신했지만, 15초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통신이 끊겼다.

1972년, 미국은 파이오니어 10호를 발사해 최초로 목성을 근접 비행했다. 파이오니어 10호는 2003년 통신이 두절되어 지금도 태양계 밖으로 나아가고 있다.

1973년, 미국은 매리너 10호를 발사하여 수성으로 보냈고, 최초로 근접 비행하였다. 2011년 메신저호가 수성에 갈 때까지 무려 38년동안 수성을 방문한 최초이자 마지막 탐사선이었다.

하지만 소련도 이를 가만 볼 수 없어, 금성 탐사를 위한 베네라 계획을 진행하게 된다. 1975년 베네라 9호가 발사되었고, 이 탐사선은 최초로 다른 행성에서 사진을 보내온 탐사선이 되었다.

이렇게 소련이 금성에 집중하는 동안, 미국은 화성에 탐사선을 보냈다. 미국은 바이킹 1호를 발사함으로써 화성에서 최초로 성공적인 미션 수행을 한 탐사선을 만들어냈다.[15]

1977년에는 미국이 보이저 1호를 발사하면서 외행성 탐사 부문에서도 미국이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2.10. 우주 정거장 개발과 우주 왕복선

파일:attachment/f0018015_518675ab3b262.png
왼쪽부터 살류트, 스카이랩, 아폴로 - 소유즈 도킹, 미르, ISS[16]

인공위성이 실현되고 달에도 인간이 다녀오자 인간을 우주공간에서 장시간 머물게 할 아이디어로 이어졌는데, 이 결실이 우주 정거장이라 볼 수 있다. 역시나 이 계획들도 여전히 경쟁중이던 소련과 미국에서 추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은 달착륙과 아폴로 계획에 주력하고 있었기에 70년대 초반에도 몇몇 우주정거장을 계획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달에서의 패배가 확실했기에 빠른 GG 달 유인착륙계획은 정리하고 무인 탐사선들과 살류트 계획을 추진하여 미국보다 빨리 샬류트 1호를 우주로 쏘아올리는데 성공한다.

세계 최초의 우주 정거장인 샬류트 1호는 1971년 발사되었다. 이후 살류트 2호를 제외한 모든 우주 정거장에는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떠난 우주 비행사들이 체류했다. 살류트 6호와 7호에는 여분의 도킹 포트가 있어서 다른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 정거장에 거주하는 승무원들을 방문하거나 프로그레스 우주선이 지구에서 별도의 보급품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살류트 우주 정거장의 크기는 이동주택 정도였고 1982년 발사된 살류트 7호는 4년 동안 가동되었다. 이후 소련은 살류트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모듈식 우주 정거장인 미르를 건설하였다.

한편 미국도 이에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아 프리덤이라는 우주 정거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 우주 정거장을 지을 때 사용할 우주선으로 우주왕복선이 개발되었으나, STS-51-L 이후 이 우주 정거장 계획이 백지화되며 우주 왕복선만 남게 된다.

2.11. 경쟁에서 협력으로 국제우주정거장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SSR이 독립된 지위를 가지게 되면서 명실상부 소련을 계승한 실질적 국가가 된다.

냉전의 긴장이 완화되자 그동안 미소경쟁의 수혜를 받아오던 우주사업은 예산이 대폭 감소하게 된다. 이로인해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우주사업 전체가 정체되는 상황에서 당시로선 절실했던 우주정거장 개발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이를 우려한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1992년에 우주 개발에 관해 협력을 선언하고 1993년 국제우주정거장의 건설을 합의하게 되면서 우주개발이 경쟁의 영역이 아닌 협력을 통한 인류 전체의 목적이라는 보다 발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1994년 셔틀-미르 계획이 이루어져 러시아의 우주인 세르게이 크리칼료프와 미국의 우주인 노먼 태거드가 각각 STS-60 디스커버리, 소유즈 TM-21에 탑승하고, 1995년에는 STS-63 디스커버리가 러시아 우주인 블라디미르 티토프를 태우고 미르와 랑데부한데 이어 STS-71 아틀란티스가 미르에 도킹, 승무원 로테이션을 실시했다. 이 계획은 총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2단계와 3단계가 바로 ISS의 건설과 운용. 2001년 데스티니 모듈이 ISS에 도킹하여 조립되며 2단계가 완료되었고 3단계는 ISS의 계획이 끝나는 2024년까지 지속될 예정이다.

2.12. 신냉전과 새로운 우주경쟁의 시작

2010년대 이후 중국을 포함한 새로운 냉전이 대두되자 2000년대 이후의 협력적 분위기에서 돌아선 각자의 우주개발 프로젝트 등이 진행되고 있으며 미국이 아르테미스 계획 으로 국제적인 달탐사 계획을 입안해도 러시아와 중국은 별도의 달개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중이다.

3. 경쟁의 이유

3.1. 소련의 군사적 고립

당시 각 국가를 직접 타격할 수단은 전략폭격기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는 미국에 비해 폭격전력이 부족하던 소련은[17]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사용하던 로켓, 즉 “미사일”이였다.[18]

군사적 목적이 본격적으로 비군사적 경쟁으로 확대된 것에는 군사적 이유 말고도 국민들의 동요에 대한 양국의 자존심 및 단순히 상대방 보다 기술적으로 뒤쳐졌다는 경쟁심리가 크게 작용했다. [19]

3.2. 냉전 속 경쟁심리

the profound shock of realizing that it might be possible for another nation to achieve technological superiority over this great country of ours.
다른 나라가, 위대한 우리 나라보다 기술적 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린든 B. 존슨 당시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스푸트니크 발사 소식을 듣고 난 직후. 출처

세계를 양분하는 두 강대국은 항상 서로에 대해 경쟁심에 불타있었고, 정치, 경제, 기술, 문화, 오락, 스포츠 등의 모든 분야에서 자존심을 걸고 대결했다. 핵무기를 쓰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무력 충돌은 못했지만, 좋은 경쟁거리가 생기기만 하면 서로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그런 와중에 이런 명분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미국 정부나 군부는 소련이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 바로 자국을 타격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미국의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그런 안보상 위협보다 '우리가 졌다'는 패배감이 더 실감나는 문제였다. 최초의 경쟁에서 밀리고 전인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는데 선두를 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국가적 사기가 떨어지기에는 충분했다.[20] 냉전시대라곤 해도 첨단 산업 기술을 가진 미국에 비해 소련은 단순히 군사력과 나라 규모가 큰 국가란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런 소련 따위에 경쟁에서 밀린 미국은 상처입은 자존심을 어떻게든 회복해야 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우주개발에서 소련보다 앞서가야만 했다.

소련 입장에서도 우주 개발의 선두주자이자 우주 시대를 연 국가로서, 다른 곳도 아니고 냉전으로 한창 으르렁거리는 미국에게 밀릴 수는 없었다. 소련의 모체인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변방이었고 다소 후진국으로 비추어졌지만,[21] 최초로 우주에 발을 내디뎠다는 점은 그걸 한번에 만회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우주 개발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알리는 프로파간다로 사용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주개발 분야에서 후발주자에게, 그것도 미국에게 밀리기라도 한다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국가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자체의 자부심에 상처를 큰 상처를 입을 것이었다. 따라서 소련 역시 이 자존심을 건 전장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고, 우주개발에서 미국에 뒤쳐지면 안 되었다.

이 점은 미국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인류의 달착륙을 목표로 하는 아폴로 계획을 발표하자 NASA 지원자가 늘었던 것에서도 나타난다. 국가적 자긍심을 드높이기 위해 자국민을 결집시키는데도 충분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아폴로 계획이 진행되면서 미국에는 우주와 관련된 문화 코드나 들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그냥 흘러간 올드 팝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를 재즈 곡 Fly Me to the Moon이 뒤늦게 인기를 끈 것도 이를 반영한다.

다만 미사일경쟁의 본질 자체는 적진의 본토 타격에 있는 만큼 세계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킬수 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은 우주개발을 하면서 자국민을 포함한 세계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 때문에 양국은 표면적 경쟁은 피하려고 하였다.[22]

3.3. 선전적 목적

우주 경쟁은 선전전의 소재로 적절했다. 똑같은 발사체라도[23] 핵무기를 싣고 날아가는 미사일인공위성을 싣고 날아가는 우주선은 성과적 측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며. 전자는 인류를 파멸로 이끌수 있는 파괴의 목적을 가지고 탄생한 무기지만 후자는 인류의 우주 진출이라는 장밋빛 미래와 우주 개척이라는 인류의 숙제를 남기는 발전적 성격을 가진다. 결정적으로 인류 전체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을 가진 우주 발사체라는 점은 당시 대중들에게 좋은 선전거리가 되었고 경쟁의 지지를 확보하기에 충분했다. 이는 냉전 속 체제의 정당성으로 직결되었다.

실제로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전세계에 순방시키면서 체제선전을 했고,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라는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를 배출했으며 우주 정거장을 건설한 뒤에는 공산권 국가들에서 우주 비행사 배출시켜주는 식으로 우주 개발을 철저하게 홍보용으로 써먹었다.[24] 최초의 흑인 우주비행사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니라 소유즈로 우주에 나간 아프리카계 쿠바인(Arnaldo Tamayo Méndez)이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NASA가 우주와 관련된 자료를 항상 카피레프트로 공개하고 있고,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하는 과학 실험에 일반인들을 참여시키는 이벤트를 하기도 한다. 다만 NASA와 별도로 미합중국 공군 우주사령부에서 군사적 목적의 우주개발을 병행했다.

4. 민간 기업의 우주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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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우주기업이 개발하는 재사용 로켓의 대표 주자인 스페이스X 팰컨 헤비 블루 오리진 뉴 글렌[25]

ISS는 우주 개발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될만한 작품이었으나 ISS 이후로 우주개발 기술 수준은 한동안 그대로 정체되어버렸다. 냉전이 끝나면서 당장 수입으로 연결되지 않은 유인 우주선이나 행성간 우주선 발사에 기를 쓰고 정부 예산을 지출할 필요가 없어져버린 것이 정치적인 이유이고 미국은 우주왕복선의 사실상의 실패,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로 추가적인 연구자원을 제대로 투입하지 못해 소유즈 로켓이나 마르고 닳도록 쏴대는 등의 이유도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우주개발은 정체기에 들어갔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래리 페이지와 같은 실리콘밸리의 스타들이 등장하며 사회적인 기술 투자의 관심사 역시 정보 기술 산업 쪽으로 집중되었고 이 방면의 기술은 SF 소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급격히 발전하는 동안[26] 로켓 개발은 국가와 사회의 외면 속에 방치되다시피 했다. 컨스텔레이션 계획 아르테미스 계획은 여전한 고비용으로 인류에게 지구 밖 행성이나 위성에 발자국 찍고 돌아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주긴 아직 멀었다는 반증 밖에 되지 못해 화성 탐사와 화성 개발에는 여전히 수백년의 갭이 놓여있다는 예상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4.1. 재사용 로켓의 등장

2010년대에 접어들어 민간 우주기업인 스페이스X 블루 오리진은 로켓 재활용을 위한 수직 착륙 기술의 실험 성공을 공개하며 새로운 우주 경쟁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스페이스X의 그래스 호퍼 테스트 로켓(2013)
블루 오리진의 뉴 셰퍼드 테스트 로켓(2015)
2015년 12월 스페이스X의 실 사용 로켓인 팰컨 9이 최초로 착륙에 성공하며 이 기술의 실용화를 알렸고 적어도 저궤도에서는 로켓 발사가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산업이 되었음을 증명하였다.

4.2. 위성 인터넷 사업

위성 발사 비용이 낮아지기 시작하며 기존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민간 사업 영역의 초대규모 우주 프로젝트가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대형 우주 프로젝트라고 하면 허블 망원경, ISS와 같은 커다란 위성체 하나를 궤도에 올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저궤도 위성 인터넷 프로젝트는 수천개~수만개의 위성을 저궤도에 뿌려놓는다는 위성의 숫자로 그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스페이스X 스타링크 프로젝트, 블루 오리진의 프로젝트 카이퍼, 손 마사요시의 투자와 러시아의 로켓으로 진행되는 원웹 프로젝트 등이 유사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으며 이 프로젝트들이 모두 완성된다고 가정하면 지구 저궤도는 아머드 코어 시리즈의 어설트 셀을 방불케하는 밀도로 위성들이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4.3. 화성 탐사

달 궤도 우주 정거장으로 계획중인 루나 게이트웨이 새턴 V로켓 수준의 출력을 가진 대형 로켓이 지금의 ISS 택배를 담당하는 저궤도 로켓들만큼 자주 발사되어 달과 지구를 오갈 수 있어야 한다는 가정 하에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역할을 맡을 NASA SLS 로켓의 가성비는 창렬함의 끝을 달리는 수준이었고 아폴로 계획을 가볍게 능가할 물량이 달로 향해야 할 상황에서 이 프로젝트의 소요 예산은 미국 정부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크고 아름다운 출력을 내면서도 가격은 획기적으로 저렴할 것으로 예상되는 블루 오리진의 뉴 글렌 로켓이나 스페이스X 스타십 로켓이 아니라면 사실상 진행이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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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오리진의 CEO 제프 베이조스는 이런 절박한 분위기를 이용해 아예 달 착륙선 Blue Moon까지 뉴 글렌 로켓과 함께 패키지로 구매할 것을 미국 정부에 제안하고 있다.

한편 블루 오리진과 NASA를 상대로 경쟁에서 한참 앞서나가고 있는 스페이스X는 달은 안중에 없이 화성을 목표로 로켓을 개발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스타십 문서로.

스페이스X의 계획은 단순한 화성 유인 탐사가 아닌 유인 착륙과 동시에 화성 개발이 시작되는 비지니스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아르카디아 평원이 착륙 지점으로 준비 중인 이유 역시 해당 지점에서 화성 도시를 건설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화성에 갈 능력이 있다면 까지 도달하는 것은 부록처럼 얻어지는 능력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스타십 로켓을 이용해 2024년 유인 달 탐사(#DearMoon)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블루 오리진처럼 고전적인 달 착륙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성에 착륙하고 SSTO 방식으로 화성 중력권에서 이탈할 스타십 2단 로켓을 그대로 달 착륙에 사용하는 계획이다. 한 마디로 오버스펙. 소 잡는 칼로 준비운동 삼아 닭을 잡겠다는 선언이다.


[1] 소유즈 TMA-5 발사 [2] 아폴로 무인 테스트였던 아폴로 4호 발사 대기 장면인데 사진은 야간이지만 실제 발사는 이른 오전 동틀 무렵 이뤄졌다. 실제로 깜깜한 밤에 발사된 것은 미국 동부시간 12월 7일 0시 33분에 발사한 인류 최후의 유인 달 탐사 미션인 아폴로 17호가 유일하다. [3] 문 레이스가 우주 경쟁 전체 기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만 가장 결정적이다. [4] 달 여행, 화성 여행, 소행성 채굴 등의 계획을 발표하는 회사들이 여럿 존재한다. [5] 이 실향민들의 다수는 서독으로 이주했다. [6] 폰 브라운 박사는 나치 독일 출신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기존의 입장을 철회한 것에서 미국의 급박함을 느낄 수 있다. [7] 물론 이해 못할 선택은 아니다. 겨우겨우 히틀러를 지옥으로 보낸 게 고작 10년 남짓밖에 안 됐고 아이젠하워는 그당시 세운 전공을 발판삼아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 히틀러 밑에서 살상병기 V2 로켓이나 만들던 총책임자 놈( 폰 브라운)이 하필 아이젠하워 정권 아래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그 명예를 가져간다고 생각해보자. 자랑은커녕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다. [8] 약 시속 29,000km, 약 초속 8km [9] 군사 미사일로 사용할 때는 주피터-C, 비군사적으로 사용할 때는 주노 1호라고 명칭을 달리했지만 사실은 같은 로켓/미사일이다. [10] 허나 익스플로러 1호는 그 작은 크기에 걸맞지 않게 소련의 스푸트니크 이전에 개발했던 오브젝트 D의 프로토타입을 능가하는 온갖 과학장비를 콤팩트하게 탑재했고 밴앨런대를 최초로 발견하는 업적을 쌓았다. [11] 사진을 보면 좁은 공간에 단단히 고정되어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상태에서 엄청난 소음과 진동, 당시로서는 아주 완벽하지는 않았던 우주선과 열 차폐 시스템 때문에 고온, 고음, 고진동 등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 [12] 미국에서는 그가 아니었다면 문레이스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설이다. 아폴로 계획 총책임자 새뮤얼 필립스 중장은 그가 아니었다면 자기 생애에 미국인이 달에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3] 새턴 로켓을 개발하는 동안 제미니 계획 및 아폴로 선체를 개발하는 작업 역시 병행되어 진행되었다. [14] 새턴 V 로켓의 1단이 대형 로켓 5개를 묶은 형태인데 반해 N1 로켓은 소련 공업능력의 부족으로 중형 로켓 30개를 묶어서 겨우 원하는 추진력을 얻는 복잡한 구조였기 때문에 로켓 하나의 고장이 곧 폭발로 연결되어 버렸다...고 알려졌지만 엔진이 다수인 구조는 맞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R-7시절부터 소련은 적당한 엔진을 클러스터링해서 추력을 높이는 방안을 써왔기 때문이지, 공업기술이 낮아서는 결코 아니었다. 엔진 하나하나의 크기는 작아도 그걸 클러스터링하는 기술도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련은 엔진 하나가 정지할 경우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칭되는 엔진을 똑같이 정지시키는 기술을 사용하여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했다만... 이 매커니즘도 오류를 일으켜 발사 실패로 이어진 적이 있긴 했지만[27] 진짜 문제는 엔진 사이의 진동이었다. [15] 이것도 사실 소련이 먼저였지만(마르 3호) 수십 초 만에 불타버려서 사실상 실패나 마찬가지였다 [16] 샬류트가 얼마나 작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살류트가 사용되던 당시에는 모듈제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 단일 모듈로 이루어진 우주정거장을 쏘아올렸다. 문제라면 미국은 추력이 넘쳐나는 새턴 V를 스카이랩에 사용했지만, 소련은 그나마 추력이 쎘던 로켓이 프로톤 로켓 밖에 없어서, 작은 모듈을 사용할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저리 작은 우주정거장이 나온거다. 미르부터는 모듈제를 사용했다. [17] 실제로 소련은 본토의 일방적 폭격에 대비해 방공(Anti-air) 기술에 비약적인 투자를 해왔고 지금도 러시아의 방공 시스템은 타 국가들에 비해 뛰어나다. [18] 대기권을 돌파한 발사체는 이론적으로 지구 어디든 갈 수 있었기에 소련의 우주진입은 방공시스템에 소홀하던 당시 미국의 본토가 무방비하게 소련에게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련은 이를 통해 전략폭격에 대한 비교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19] 실제로 소련에서는 “우주여행”을 미래 발전 비전으로 국민들에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군사적 영역에서 민간의 영역까지 확대하여 우주개발의 의미를 두었고, 미국의 유인 달 탐사 또한 군사적 의의보다는 단순 경쟁심리에 의한 과학경쟁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0] 극지와 고봉 그리고 오지들이 누가, 어느 나라 사람이 먼저 개척했냐에 초점이 맞춰지던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수 있다. 그리고 이런 극지와 고봉 최초 등정 같은 건 오직 상징성만 있을 뿐이고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개인적인 성취감 외에는 갔다온다고 해도 쓸모있는게 하나도 안 나오는 무의미한 짓이지만 우주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에는 실용적인 결과물을 충분히 뽑아낼수 있는 새로운 세계이므로 그 중요성과 상징성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아폴로 계획의 결과물인 월석을 분석하여 달에 헬륨 같은 자원이 있는 것이 확인되어 루나 게이트웨이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이미 미래의 일도 아니다. [21] 실제로 맞는 부분도 있고 편견인 부분도 있겠으나, 서유럽에서 러시아에 가지는 '국가 이미지'는 확실히 이런 쪽으로 부정적인 편이었다. [22] 대개는 각국의 성과를 발표하면서 기술적 우위를 간접적으로 전파하였을 뿐 직접적인 경쟁의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였다. [23] 두 기술은 뿌리가 V-2 로켓으로 완전히 동일하며, 초기의 우주 발사체들은 ICBM용도로 개발된 로켓을 개량한 것이 많다. 실제로 스푸트니크를 싣고 우주로 올라간 R-7 로켓은 원래 대륙간 탄도탄이었고, 미국 최초로 사람을 우주에 보낸 아틀라스 로켓 역시 원래 대륙간 탄도탄이었다. 기술이 발전한 이후에는 전문 우주 발사체와 전문 대륙간 탄도탄이 나뉘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냉전 이후 일거리가 없어져 퇴역한 ICBM이 우주로켓으로 쓰인 일도 많았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 항목으로. [24] 그래서 공산권 국가 중에서 의외로 우주비행사 배출이 빠른 곳이 많다. 예를 들어 베트남 한국보다 먼저 우주비행사를 배출했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지금은 우주는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처지지만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시절 소련의 도움을 받아 우주비행사를 배출했다. [25] 뉴 글렌 로켓은 2024년 10월 13일 첫 발사 예정이다. [26] 스마트폰의 등장 하나로 카메라, MP3, PDA, 전자사전, 캠코더, 휴대용 게임기 등이 전부 몰락했다. 심지어 약 200년 간 여론 형성을 지배했던 종이신문과 80년 간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던 TV마저도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