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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4db1><colcolor=#fff> 경력 | 지도자 이전 · 지도자 경력 ( 2014년 · 2015년 · 2016년 · 2017년 · 2018년 이후) | |
평가 | 야구 스타일 · 2015년 · 2016년 · 이미지 | ||
관련 인물 | 아들 김정준 · 김응용 vs 김성근 · 인맥 | ||
구설 | 구설 · 이적 및 경질 · 경기 운용 · 코치진 및 선수, 팬덤 갈등 · 타팀 도발 · 선수 기용 · 2015년 · 2016년 · 김성근의 저주 | ||
논란 및 사건 사고 | 문학구장 소요 사태 ·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 운동 · 노리타 · 살려조 · 2016년 송창식 벌투 사건 | ||
관련 밈 | 절이 싫어서 중이 떠났는데 절이 쫓아와요 · 위기의 XX를 구할 마지막 희망 ·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 세이콘 드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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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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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 |||||||||||||||||||||||||||||||||||
<colbgcolor=#EF8B01><colcolor=#F8D1A6> 연도 | <colbgcolor=#F8D1A6><colcolor=#EF8B01> 1975년 | |||||||||||||||||||||||||||||||||||
이름 | 김성근 | |||||||||||||||||||||||||||||||||||
분야 | 스포츠 | |||||||||||||||||||||||||||||||||||
사유 | 체육발전유공 | |||||||||||||||||||||||||||||||||||
체육훈장기린장(5등급) |
김성근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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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
1982 |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
|
||
2007 | 2008 | 2010 |
한대 클럽 챔피언십 우승감독 |
2010 |
KBO 포스트 시즌 1986, 2007, 2008, 2010 최우수 감독상 |
2007, 2008 제일화재 프로야구대상 프로감독상 |
2008 프로야구 스포츠토토 올해의 상 올해의 감독상 |
2010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스포츠부문) |
2010 일구상 일구대상 |
2012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공로상 |
2012 카스포인트 레전드상 |
보유 기록 | |
한국시리즈 최초 퇴장 감독[1] | 2009 한국시리즈 5차전 |
단일 구단 최다 연승 감독 | 22연승(2009.08.25/문학 두산전 ~ 2010.03.03/잠실 LG전)[A] |
단일 시즌 최다 연승 감독 | 19연승(2009.08.25/문학 두산전 ~ 2009.09.26/문학 두산전)[A] |
김성근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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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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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등번호 38번 | ||||
팀 창단 | → |
<colbgcolor=#c0281f><colcolor=#fff> 김성근 (1982) |
→ |
박해종 (1984~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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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등번호 52번 | |||||
결번 | → |
김성근 (1983) |
→ |
허준 (1984~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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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등번호 81번 | |||||
결번 | → |
김성근 (1984~1988) |
→ |
김인식 (1995~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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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81번}}} | |||||
결번 | → |
김성근 (1989~1990) |
→ |
성기영 (1991~1993)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1번 | |||||
결번 | → |
김성근 (1991~1992) |
→ |
조창수 (1993~1995) |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90번 | |||||
결번 | → |
김성근 (1995) |
→ |
김성한 (2001~2004) |
|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91번 | |||||
김인식 (1990~1992) |
→ |
김성근 (1996~1999) |
→ | 팀 해체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2번 | |||||
서정환 (1996~1999) |
→ |
김성근 (2000) |
→ |
양일환 (2001~2008) |
|
LG 트윈스 등번호 76번 | |||||
천보성 (1993~1999) |
→ |
김성근 (2001~2002) |
→ |
유지현 (2007) |
|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90번 | |||||
에지리 료 (1995~1996) |
→ |
김성근 (2005~2006) |
→ |
타치바나 류지 (2007~2008) |
|
SK 와이번스 등번호 38번 | |||||
윤희상 (2004~2006) |
→ |
김성근 (2007~2011) |
→ |
오수호 (2014) |
|
한화 이글스 등번호 38번 | |||||
안영명 (2014) |
→ |
김성근 (2015~2017) |
→ |
안영명 (2018~2020) |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71번 | |||||
다니엘 알바레스 (2021) |
→ |
김성근 (2022) |
→ |
사이토 가즈미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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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1171><colcolor=#fff> 최강 몬스터즈 No.38 ★
|
||
김성근 金星根 | Kim Sung-keun[4] |
||
출생 | 1941년 10월 30일[5] ([age(1941-10-30)]세) | |
일본 제국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 ||
거주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 |
본적 |
경상남도
진양군
미천면 (現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6]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7] |
|
신체 | 180cm[8], 82kg, A형[9] | |
종교 | 무종교[10] | |
가족 |
아버지 김찬숙[11], 어머니 이계수[12] 3남 4녀 중 여섯째 |
|
배우자 오효순 아들 김정준, 딸 김미화, 김희성 |
||
학력 |
교토시립 시조중학교[13] (졸업) 교토부립 가쓰라고등학교[14] (졸업) 동아대학교 법정학부 (상학 / 명예학사)[15] |
|
포지션 | 투수, 1루수 | |
투타 | 좌투좌타[16] | |
소속팀 |
교통부 야구단 (1961) 조선미곡창고 야구단 (1962) 기업은행 야구단 (1962~1968) |
|
국가대표 |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회 (1962) | |
지도자 |
|
|
프런트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카운슬러 (2018~2021) | |
경력 | KBO 규칙위원 (2004) | |
응원가 | 라나에로스포 - 사랑해 #[가사][21] | |
상훈 | 체육훈장 기린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인.
前 KBO 리그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감독이자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프런트 및 코치를 역임했다.
2022년 10월 16일, 50년의 다사다난 했던 코치, 감독 등 지도자 커리어를 접고 은퇴를 선언했다.[22] 지도자 은퇴를 선언했던 2022 시즌을 기준으로 80세(실제 만 나이로는 81세를 보름 앞둔 세는나이 82세), 일본프로야구 전체 구단 중 최고령 지도자였다.
2. 학창 시절 및 선수 경력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학창 시절 및 선수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3. 지도자 경력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4. 해설위원 및 방송 출연
4.1. 해설위원 경력
김성근 감독은 해설위원 경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충암고 감독을 그만둔 후인 1979년에 신일고 감독을 하던 도중, 동양방송에서 야구해설을 맡기도 했는데, 해설 중에 일본어가 튀어나온다는 이유로 바로 해직. 승승장구에 출연해 당시 일화를 말했는데, 투수가 던진 공이 몸쪽으로 꽉차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걸 보고는 이빠이(가득 차서) 들어왔어요!라고 말하고 다음 날 잘렸다고 한다. 결국 그 빈자리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하일성이었다.[23]이와 관련하여 2010년 11월 9일 KBS 승승장구에 출연, 그의 야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초대손님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하일성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중간중간 '이 사람 왜 불렀어?'라고 농조로 툴툴거렸다. 한편 이날 김성근 감독은 자신이 한국 신문에 최초로 연속사진을 도입하게끔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으며, 선수시절로 돌아가면 이대호와 가장 붙어보고 싶다고도 밝혔다. 그 외 탐나는 선수로는 류현진과 봉중근을 꼽았다. 또한 자기가 이대호와 류현진을 맡게 되면 그들의 살을 뺄 것이라고 했다.[24]
이후 야신으로 추앙받던 SK 시절에 이르러서야 다시 해설위원으로 나서게 된다. 대표적으로 2008년 SBS에서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중계방송의 해설위원을 담당했다. 이 당시에 칼같이 정확한 예상으로 또 화제가 되었다. 정확한 해설덕분인지 야구를 좀 좋아하는 사람들은 SBS로 놓고 보기도. 탁월한 야구 식견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특유의 웅얼거리는 말투 때문에 일반 시청자들은 그의 해설을 듣기 난감했다는 말도 있다. 지금도 간혹 여러 야구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는 말투인 '마, ~~~하면 되지 시프요...'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2013년 5월 17일 SBS ESPN에서 아들인 김정준 해설위원과 함께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KIA:LG 경기에 대한 부자(父子) 해설을 진행하였다. 1년 뒤 6월 7일에도 똑같은 구장에서 동일한 팀의 경기의 객원 해설을 하기도 했다.[25]
4.2. 방송 출연(인터뷰 외)
2010년 10월 30일, 뇌경색으로 쓰러진 김동재 KIA 수비코치를 돕기 위한 일구회 올스타와 천하무적 야구단과의 자선경기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무려 41년만의 등판. 포수석에서는 김경문 두산 감독이 그의 공을 받아 줬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26] 한 타자만 잡고 안타 3개를 맞은 뒤[27] 2점을 주고 자진해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야인이었던 2011년 11월, 동서식품의 핫초코 미떼 CF에 출연했다. 광고 내용은 야구시즌이 끝나 을씨년스러운 야구장[28] 관중석에서 김성근 감독이 보온병에 가져온 핫초코를 꼬마와 나누어 마시면서 '야구하고 싶다'는 꼬마의 말에 '나도요'라고 답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어째 서글프게 들린다는 평도 있었다. 이 때 꼬마가 "할아버지 야구 잘하세요?" 라고 묻자 김성근은 "쪼끔" 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광고 크리에이터가 SK 와이번스의 팬이어서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자마자 가서 매달렸는데 계속 고사하는 것을 3달 동안 삼고초려해서 섭외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29]
여담으로 이 꼬마는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고, 신일고등학교 야구부를 거쳐 202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NC 다이노스의 지명을 받은 목지훈 선수다. 이 꼬마가 신인드래프트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김성근 감독은 이때의 인연을 상기시키면서,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2023년 2월, 유퀴즈에 출연한 김성근 감독과 목지훈 선수가 무려 12년만에 재회했고, 김성근은 목지훈에게 선물을 준비하고 손수 피칭지도를 했다. 녹화 이후 김 감독은 목지훈 선수와 목선수의 어머님과 함께 식사자리를 가졌다. # 여담으로 은퇴 후 출연중인 JTBC 최강야구 2023 시즌 시작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 버전의 티저영상이 공개되었는데, 해당 광고의 오마주로 보인다.
2015년 4월 2일, 김성근 감독과 고양 원더스 선수들을 그린 파울볼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었다. 마지막에 하송 원더스 단장이 눈물의 해체 선언 때 등장하지만, 정작 구단주인 허민은 한 번도 안 나온다. 그리고 고양 원더스가 후에 외국인 선수들만을 엄청나게 기용해 왔다는 게 알려졌는데, 외국인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데럴 마데이의 혹사와 같은 어두운 면을 다루지 않는 등 논란이 많은 영화이다. 이로 인해 안티 김성근 성향이 강한 자들은 이 영화를 김성근을 치켜세우려고 만든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비꼰다. 설재훈과 안형권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며, 원더스 해체 후 각각 SK와 롯데에 육성선수로 입단했지만 설재훈은 2015시즌 도중, 안형권은 시즌 종료 후 정리되었다.
2015년 5월 4일에는 김성근 감독의 SK 시절 용병술을 주제로 손자병법과 삼국지를 비교한 야구병법 택재의 기술이 SBS 스포츠+에서 방영되었다. 영상
4.3. 인터뷰
-
2012년 11월 22일,
MBC 새 프로그램인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에 첫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시작부터
예미넴 스타일로 등장. 초대 손님으로
장미란,
김재현,
마해영이 나왔으며 야구 시작할때부터 지금까지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
2013년 7월 18일
SBS ESPN
베이스볼 S의
돌직구라는 코너에 출연해서 9개 구단을 평가하였다.
- 2014년 9월 25일에는 JTBC 뉴스룸 목요 인터뷰,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각각 출연하여 고양 원더스 해체하면서 소감 인터뷰를 했다. JTBC 인터뷰, SBS 인터뷰 이후 10월 27일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한 번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와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JTBC 2차 인터뷰
- 2014년 GQ와의 인터뷰에서 2004년 이치로를 예로 들며 이승엽 및 메이저 리그 진출자들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다.
5. 은퇴 이후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은퇴 이후 문서 참고하십시오.6. 미디어 활동
6.1. TV
<rowcolor=#fff> 날짜 | 방송사 | 방송명 | 비고 |
1998년 | |||
9월 9일 | 사람과 사람들 - 고독한 승부사 김성근 | # | |
1999년 | |||
4월 22일 | 현장르포 제3지대 - 9회말 투 아웃 김감독의 선택 | # | |
2008년 | |||
3월 20일 ~ 10월 13일 | 불타는 그라운드 | 고정출연 | |
3월 25일 | 단박 인터뷰 | 204회 | |
2009년 | |||
4월 6일 ~ 11월 2일 | 불타는 그라운드 시즌2 | 고정출연 | |
2010년 | |||
1월 14일 | 세대공감 토요일 | ||
3월 25일 | 명불허전 | 10회 | |
11월 9일 | 김승우의 승승장구 | ||
2011년 | |||
2월 6일 | 白球 - 選手たちは海を渡った[30] | # | |
3월 3일, 3월 10일 | 이금희의 특별한 만남 | 13회, 14회 | |
9월 13일 | 히스토리 후 | 52회 | |
2012년 | |||
1월 3일 | 최박의 시사토크 판 | 19회 | |
1월 22일 | 지식 기부 콘서트 N | 29회 | |
5월 19일, 5월 20일 | 아이 러브 베이스볼 시즌4 | 37회, 38회 | |
5월 27일 | SBS 스페셜 - 나는 산다, 김성근 "9회말까지 인생이다" | 293회 | |
5월 28일 | 야구 읽어주는 남자 | 32회 | |
5월 29일 | 희망특강 파랑새 | 66회 | |
6월 3일, 6월 10일 | 한국 현대사 증언 TV 자서전 | 69회, 70회 | |
7월 25일 | 백지연의 피플INSIDE | 215회 | |
6월 17일 | MBC 스폐셜 - 김성근과 고양원더스 | 569회 | |
11월 22일 |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 | ||
2013년 | |||
3월 30일 |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 소년은 늙지 않는다 | 23회 | |
6월 17일 | 야구본색 - 그라운드의 지배자! 김성근 감독 | 5회 | |
6월 26일 | 지식채널e | 1025회 | |
7월 19일 | 베이스볼 S | ||
2014년 | |||
9월 14일 | 다큐 3일 - 9회 말 2아웃, 한화 이글스 72시간 | # | |
2015년 | |||
3월 7일 | 특집다큐 꼴찌의 반격 | # | |
2016년 | |||
3월 28일 | 특집다큐 AGAIN 1999, 야신의 기적 | ||
2022년 | |||
11월 7일 ~ 2023년 2월 20일 | 최강야구 시즌1 | 고정출연 | |
2023년 | |||
4월 10일 ~ 2024년 1월 22일 | 최강야구 시즌2 | 고정출연 | |
2월 8일 | 유 퀴즈 온 더 블럭 | 180회 | |
6월 25일 | 곽수종의 경제프리즘 | # | |
11월 26일 | 곽수종의 경제프리즘 | # | |
12월 10일 | JTBC news 뉴스룸 인터뷰 | # | |
2024년 | |||
4월 15일 ~ | 최강야구 시즌3 | 고정출연 |
6.2. 광고
<rowcolor=#fff> 연도 | 기업명 | 브랜드명 | 비고 |
1990년 | 태평양화학 | 고려왕 | # |
2007년 | 아레나 코리아 | 2월호 표지모델 | # |
2011년 | 동서식품 | 핫초코 미떼 | # |
2012년 | 한국인삼공사 | 정관장 | # |
넷마블 | 마구:감독이되자 | # | |
2013년 | 카카오 | 나는 김성근이다 for KAKAO | # |
2014년 | 컴투스 | 컴투스프로야구 for 매니저 | # |
2015년 | 한화 | 한화 이글스 | # |
2024년 | 현대백화점 | 설날 현대특선[31] | # |
6.3. 홍보 대사
<rowcolor=#fff> 위촉 | 기업/기관 | 직함 | 비고 |
2010년 | |||
12월 1일 | 고치현 | 관광 홍보 대사 | |
2012년 | |||
8월 17일 |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 홍보 대사 | # |
6.4. 저서
* 《꼴찌를 일등으로》, 자음과모음, 2009년 7월 15일
* 《김성근이다》, 다산라이프, 2011년 12월 23일
* 《감독이란 무엇인가》[32], 새잎, 2012년 10월 6일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이와우, 2013년 3월 18일
*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33], 페이퍼로드, 2014년 1월 15일
* 《인생은 순간이다》, 다산북스, 2023년 11월 15일
7. 평가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총 7개 팀의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각 팀 별로 받은 평가가 천차만별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점이다. 태평양, 쌍방울, LG, SK, 고양 원더스 시절에는 신구 조화가 일어날 정도로 선수 풀도 어느 정도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아서 한때 김응용이 지어준 '야신'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나, 삼성 시절에는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과 선수 풀도 충분한 상황에서 선수단과의 불화, 이중 오더로 나락을 갔고 리빌딩의 대가로 추앙받아 부임한 한화 시절에는 리빌딩을 하랬더니 노장 선호와 투수 혹사로 리빌딩 따위는 내팽개치고[36] 선수단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나쁜 점이 부각되며 팀 팬들에게 매우 나쁜 평가를 받고 세이콘, 살완마라는 부정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것에서 김성근의 평가가 얼마나 갈리는지 알 수 있다.
7.1. 야구 스타일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야구 스타일 문서 참고하십시오.7.2. 이미지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이미지 문서 참고하십시오.7.3. 구설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구설 문서 참고하십시오.7.4. 김성근의 저주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의 저주 문서 참고하십시오.7.5. 야구인이 말하는 김성근
김성근 전 감독님과 함께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래도 야구하면서 가장 즐거웠다. 그때 내가 아주 좋은 피칭을 한 것은 아니었어도 선수들이 다같이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때 야구장 나갔던 게 가장 재미있었다.
'김성근 감독이 원망스럽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던지자 송창식은 "많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다"며 "아직 연락을 못 드렸는데, 조금 뒤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주변에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말 힘들 때는 조금 쉬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린 뒤 며칠 쉬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 송창식
'김성근 감독이 원망스럽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던지자 송창식은 "많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다"며 "아직 연락을 못 드렸는데, 조금 뒤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주변에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말 힘들 때는 조금 쉬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린 뒤 며칠 쉬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 송창식
한국으로 돌아와서 엘지에서 1차지명을 받고 두 번째 시즌(2001년)을 준비하려고 할 때 김성근 감독님이 오셨다. 김성근 감독님은 일본식 야구를 추구하시고, 나는 미국식 야구를 추구했다. 감독님은 다운스윙(단타 위주의 실리타격)을 강조하셨고, 나는 슬라이트 업스윙(장타 위주의 화려한 타격)을 하는 스타일이었기에 그런 시절이었고, 둘이 정 반대였다. 나랑 같은 포지션이었던
심성보가 주전으로 뛰었다. 내가 뛸 수 있는 기회가 2군에서 3할 6푼을 쳤지만, 1군에선 2001년도에 12타석뿐이 없었다.
2001 시즌이 끝나고, 감독님이 다음 해에 오키나와 캠프로 가라고 콜을 하셨는데, 하필 캠프 하루 전에 발목 인대가 돌아가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감독님이 결국 자유 계약으로 풀어주셨다.
- 최경환
2001 시즌이 끝나고, 감독님이 다음 해에 오키나와 캠프로 가라고 콜을 하셨는데, 하필 캠프 하루 전에 발목 인대가 돌아가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감독님이 결국 자유 계약으로 풀어주셨다.
- 최경환
저는 투수로서 미완성으로 끝났죠. 한번 아팠던 팔은 원상복귀가 안 되더라고요. 1년이면 1년, 완전히 쉬었어야 하는데 그때는 조바심이 나더라고요. 한번이라도 꽃을 피우고 유니폼을 벗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한국 최고의 명장이라고 평가받는 김인식 감독님과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야구를 배웠잖아요. 쌍방울은 희생정신이 가장 강했던 팀이었죠. 잡초근성 있잖아요. 쌍방울 출신들은 어디서나 잘 살 거예요. 포기를 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니까."
- 박진석
- 박진석
태평양 팬들한테 참 미안했어요. 89년 3위, 94년 준우승할때 빼고는 상대팀한테 스파링 파트너였어요. 그래도 야구인기는 대단했고,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특히 SK가 2007~2008년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을 때 눈물이 날 만큼 기뻤어요. 저는 인천팬들한테 그런 선물을 해주지 못했는데, 후배들이 다 풀어줬잖아요. 김성근 감독님도 존경스럽고, 후배들도 자랑스럽고, 아직도 전 야구를 무지 좋아합니다."
- 여태구[37]
- 여태구[37]
나는 애들 (임창용, 이호준, 노후룡)을 잡으러 다녔다. 창용이보고 "야! 임창용! 야구 그만하고 가!" 이랬던 감독님이었다.
김응용 감독님의 지시에 투구폼을 오버스로로 바꾸다가 2군으로 갔는데, 방수원 코치님이 계셨고, 가르쳐 주는 곳이 없었다. 1년 뒤에 김성근 감독님이 오셨는데, 정말 말도 안되게 연습을 시켰다. 그랬더니 2군에서 다승왕을 하고 구속도 140이 넘어갔다.
- 박진철
김응용 감독님의 지시에 투구폼을 오버스로로 바꾸다가 2군으로 갔는데, 방수원 코치님이 계셨고, 가르쳐 주는 곳이 없었다. 1년 뒤에 김성근 감독님이 오셨는데, 정말 말도 안되게 연습을 시켰다. 그랬더니 2군에서 다승왕을 하고 구속도 140이 넘어갔다.
- 박진철
해태 2군 시절, 항상
이호준, 노후룡[38]과 함께 놀러다녔다. 운동을 해도 이틀 하고 3일 안나오고 그랬었다. 동계 훈련 기간인데도 놀러다녔으니 쫓겨날 뻔 했다.
"본래 내가 정말 아침잠이 많다. 늦잠 때문에 홈게임에 지각한 일도 여러 번이다. 그런 내가 김성근 감독님 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 훈련을 시작했다"
"6시에 일어나서 일단 다같이 산책을 한다. 그후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웨이트트레이닝이 이어진다. 그냥 계속 하는거다. 러닝도 하고, 점심식사 후에는 몇시간씩 계속 공을 던졌다. 마냥 던졌다. 그리고 저녁 먹고 또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2군에서 6~8개월인가 정말 열심히 훈련을 했다. 그리고 95년 삼성전에 1군 데뷔를 하니 그때부터 야구가 정말 재밌어졌다.
- 임창용
"본래 내가 정말 아침잠이 많다. 늦잠 때문에 홈게임에 지각한 일도 여러 번이다. 그런 내가 김성근 감독님 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 훈련을 시작했다"
"6시에 일어나서 일단 다같이 산책을 한다. 그후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웨이트트레이닝이 이어진다. 그냥 계속 하는거다. 러닝도 하고, 점심식사 후에는 몇시간씩 계속 공을 던졌다. 마냥 던졌다. 그리고 저녁 먹고 또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2군에서 6~8개월인가 정말 열심히 훈련을 했다. 그리고 95년 삼성전에 1군 데뷔를 하니 그때부터 야구가 정말 재밌어졌다.
- 임창용
그런것 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승자는 패자를 보다듬어 줘야하잖아요. 그게 예의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겼다, 그러면 죽은 사람 한 번 더 죽이는 거잖아. 뭐 요즘 잘 하잖아. 꼴찌팀을 그 정도 올려놨으면. 투자한다고 해도 당장 성적 나는 것도 아니고. (김응용 감독에 이어 한화 지휘봉을 잡은 김성근이 취임 직후 팀도 아니라는 얘기를 했다고 하자) 사실대로, 느낀대로 얘기한건데 뭐. 다만, 나라면 그렇게 얘기 못했을 것 같아요. 자기 팀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외부에 노출하면 안 되지. 선수 사기 문제도 있으니 배려를 해야지. 선수들이 '그러면 우린 뭐냐'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현역시절에 나는 팀이 약할수록 강하다고 했고, 우승 자신이 있으면 엄살을 피웠지. 우승 어렵다고.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 뜻이 뭐야? 뭐냐구? 서로 이기고 지는 사이 아냐? 나는 김성근 감독한테 한 번도 지지 않았어. 내가 현역으로 있을 때 김성근 감독이 우승한 적 있어? 그런데 무슨 라이벌이야. 내가 그놈한테 진 적이 없는데"
- 김응용
- 김응용
하루는 김성근 감독한테 "선발 시켜주세요" 라고 말하면 10만원을 주고 돌려보냈다. 하루 가서 놀으라고. 어린 마음에 좋은 자리를 하고 싶었는데, 그 때는 6이닝을 던지면 집에서 놀 수 있었다. 계룡에서 놀다 왔더니 딱히 할 것도 없고 다시 돌아온 적도 있었다.
- 윤석환
- 윤석환
원래부터 부상이 좀 있었고, 선수까지 10여년 간 약을 먹으며 던졌다. OB에서는 아산병원에서 재활을 했다. 1998년 쌍방울로 트레이드 되면서부터는 재활이라는걸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뼛조각 하나를 제거했는데, 나중에 힘이 쳐진 상태에서 던지니까 뼈들이 깨져나갔다. 쌍방울 시절에 김성근 감독이 일본으로 보내줬다. 그때가 29살이었는데, 일본에서 의사가 수술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웬만하면 수술 하지 말고 대충 끝내라고 말씀하시더라. 김성근 감독은 매정한 분 같지만, 선수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신 분이다.
- 박상근[39]
- 박상근[39]
해태에서 트레이드 되어 태평양에 왔는데, 그 수모 다 삭히면서 운동하고 했었다. 그때 독하게 하던 김성근 감독한테 걸렸다. 그 분은 고참이고 스타플레이어고 다 인정을 안해준다. 징그러운 오대산 입수 때도 군대 유격 훈련 하는거 같았다. 몇 초 있다가 욕이 절로 나왔고, 펑고를 하는데 바구니에 고봉으로 담으면 600개가 들어가는데, 다 받아내고 똥물까지 게워냈다. 서른 다섯살에 그걸 받으니 "야
새끼야 쳐라" 라고 했더니 김성근 감독이 "알았다 이
새끼야!" 하고 받아쳤고, 구토를 하면서 훈련했다. 하드 트레이닝 덕택에 도루를 62개를 하고 골든글러브도 받았다.
김성근 감독은 경기 막판까지 계속 상대 팀에 끌려가면서 지고 있어도 이유 있는 지는 게임을 하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오기만 하면 동점이나 역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반드시 가지고 있는 야구를 한다고 밝혔다.
- 김일권
김성근 감독은 경기 막판까지 계속 상대 팀에 끌려가면서 지고 있어도 이유 있는 지는 게임을 하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오기만 하면 동점이나 역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반드시 가지고 있는 야구를 한다고 밝혔다.
- 김일권
지금도 기억나는 게 제가 대학교(원광대) 졸업하고 막 태평양 입단했을 땐데요. 다른 선수들이 춘천 가서 훈련할 때, 저랑 박정현 최창호 이 3명만 인천 제물포고교에 남겨두더라고. 가니까 박상열 코치가 와 있는데 비닐하우스에 우리를 집어넣는 거야. 그 시절에 변변한 실내 연습장이 있었겠어요? 학생 선수들 체력훈련 하던 시설인데 실내에서 볼 던졌죠. 그 다음에 마산, 제주도를 돌며 동계훈련을 했어요. 외국에 나갈 형편도 아니니까. 거기서요, 하루에 200-300개는 던졌을 거야. 눈, 비 내려도 다 맞고 했어. 하여튼 세상 천지에 쉬는 날이 없었다니까. 저녁엔 정신교육 받았고. 지금 SK 훈련 많이 시킨다고 하던데 나이 드셔서 그나마 덜 하는 거라니까. 그 이듬해 태평양의 65승 중 45승을 우리 셋이 다 했어요. 또 오대산에 보내 새벽이고, 밤이고 행군 시켰는데 안 죽을라고 따라다녔다니까. 눈이 무릎까지 쌓여 길도 없는 데 정말로요, 낙오되면 죽는다는 생각이 버티게 한 것 같아. 냉수마찰이요? 그거야 피로회복 정도였지. 왜 그런 훈련을 시켰느냐고요? 정신력 강화죠. 이렇게까지 우리가 했는데 질 수 없다. 무서울 게 뭐 있느냐 이런 근성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 우리가 그때 감독님을 돔보(잠자리)라 불렀어요. 왜냐면 훈련을 안보는 거 같은데 이놈이 뭐하고 있는지 귀신같이 다 알아. 감독님은 선수를 보이지 않는 데서 칭찬해요. 절대 앞에선 안 해. 그렇게 선수 위하는 마음을 우리도 다 알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 믿고 따라가면 된다는 믿음을 줘요. 그것이 카리스마지. 정말로 결과가 나오니까. 내가 야구 좀 잘 한다고 뻐겼다간 감독님 앞에서 큰 코 다치지. 혹사요? 나를 봐요. 그분 떠나도 괜찮았잖아. 그런데 감독님 계실 때만 잘했던 선수 1-2명이 나오니까 그런 말도 나오는 것 같아요.
감독님이 삼성만 실패했잖아요? 좋은 선수가 많아서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 같아. 중간 선수들 땀 흘리게 하고 기회 주고 경쟁 붙여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거죠. 그러다보니 어지간히 아프지 않는 한 아픈 내색 안 하고 뛰게 되요. 시즌 끝나면 고생했다고 일본 온천도 보내주시는 면모도 있었답니다. 돌이켜보면 최창호나 박정현, 저 전부 가공이 안 된 선수였잖아요? 감독님이 잠재능력 하나만 보고 매달린 것 같아요. 그 사람이요, 무턱대고 아무나 그렇게 훈련시키는 거 아니에요.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못 할 게 없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인데. 극한훈련엔 키울 만한 선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 정명원
- 정명원
김성근 감독님이 태평양에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다. 난 프로입단 뒤 바로 방위병으로 근무했는데 전역 5개월을 남겨 놓고 사령탑으로 오셨다. 첫 인상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 취임 직후 선수들을 데리고 마무리 훈련을 떠났다. 나는 방위병 근무로 마무리 훈련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훈련은 계속됐다. 나를 위해 박상열 코치와 불펜 포수를 인천에 남겨뒀다. 제물포고에서 3개월 동안 과외 교육을 받았다. 투구 밸런스부터 변화구 구사까지 많은 걸 배웠다. 주말이 되면 마무리 훈련장인 춘천으로 가 상태를 점검 받았다. 사실 강원도로 간 건 근무지 이탈이었다(웃음). 1989년 1월 소집 해제된 뒤 바로 1군 선수들과 훈련했다. 과외 덕에 몸이 가벼웠다. 감독님은 성장할 때까지 꾸준히 기다린다. 프로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지만 여러 기회를 통해 선수가 자신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구단의 사정으로 볼 때 가능성만 믿고 선수를 키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김감독은 과감하게 이를 실천했다.
훈련에 대해서는 선배들이 많이 괴로워했다. 나이에 관계없이 똑같이 훈련하다 보니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감독이 엄격해서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어느덧 선참이 된 LG에서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움과 걱정이 엇갈렸다. 어린 시절 훈련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연습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바로 뻗어 버리기 일쑤였다. LG의 모든 선수들이 그랬다. 45일 가까이 진행된 훈련을 모두 소화한 건 나와 박만채뿐이었다. 아무래도 어린 선수들과 궁합이 더 잘 맞으시는 것 같다. 감독님께선 원정경기를 하러 갈 때 선수단 버스에 타지 않고 밥도 혼자 먹는다. 선수들끼리 편하게 지내라는 의미다. 훈련할 때는 집중하란 말씀만 하신다. 선수들에 대한 배려가 뭔지 아시는 분이다. 내가 프로 시절 감독을 9명 만났다. 그 가운데 경기상황에 관계없이 일관된 표정을 보인 분은 김감독뿐이다.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LG 시절 선발 등판해 1회에 볼만 14개를 던진 적이 있다. 제구가 안됐다. 불펜에서 투수 2명이 몸을 푸는데 감독님은 여전히 무표정이셨다. 정신을 차리고 3타자를 내리 삼진으로 잡았다. 감독의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치면 나도 모를 집중력이 생겼다. 태평양 시절 정신력 강화를 위해 극기훈련도 했다. 오대산에서 4일 동안 얼음물에 24번 들락날락했다. 팬티 차림으로 등산도 했다. 가장 힘든 건 10시간 이상 이어진 행군이었다. 정신적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다. 불성실하면 무조건 2군행이었다. 워낙 엄격하셔서 모두 이를 악물고 해냈다. 연습이 끝나고 방에서 쉬고 있을 때, 따로 방으로 부르셨다. 글러브를 끼고 신발을 신은 채 가 투구폼을 잡으면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교정해 주셨다. 공짜로 과외를 받는 기분이었다.
- 최창호(야구선수)
훈련에 대해서는 선배들이 많이 괴로워했다. 나이에 관계없이 똑같이 훈련하다 보니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감독이 엄격해서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어느덧 선참이 된 LG에서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움과 걱정이 엇갈렸다. 어린 시절 훈련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연습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바로 뻗어 버리기 일쑤였다. LG의 모든 선수들이 그랬다. 45일 가까이 진행된 훈련을 모두 소화한 건 나와 박만채뿐이었다. 아무래도 어린 선수들과 궁합이 더 잘 맞으시는 것 같다. 감독님께선 원정경기를 하러 갈 때 선수단 버스에 타지 않고 밥도 혼자 먹는다. 선수들끼리 편하게 지내라는 의미다. 훈련할 때는 집중하란 말씀만 하신다. 선수들에 대한 배려가 뭔지 아시는 분이다. 내가 프로 시절 감독을 9명 만났다. 그 가운데 경기상황에 관계없이 일관된 표정을 보인 분은 김감독뿐이다.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LG 시절 선발 등판해 1회에 볼만 14개를 던진 적이 있다. 제구가 안됐다. 불펜에서 투수 2명이 몸을 푸는데 감독님은 여전히 무표정이셨다. 정신을 차리고 3타자를 내리 삼진으로 잡았다. 감독의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치면 나도 모를 집중력이 생겼다. 태평양 시절 정신력 강화를 위해 극기훈련도 했다. 오대산에서 4일 동안 얼음물에 24번 들락날락했다. 팬티 차림으로 등산도 했다. 가장 힘든 건 10시간 이상 이어진 행군이었다. 정신적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다. 불성실하면 무조건 2군행이었다. 워낙 엄격하셔서 모두 이를 악물고 해냈다. 연습이 끝나고 방에서 쉬고 있을 때, 따로 방으로 부르셨다. 글러브를 끼고 신발을 신은 채 가 투구폼을 잡으면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교정해 주셨다. 공짜로 과외를 받는 기분이었다.
- 최창호(야구선수)
선수때는 잘 몰랐지만, 서운한 점도 있었는데, 지금은 감독이 되면서 김 감독님을 많이 느꼈다. 연습의 중요성을 가지고, 선수들 다 공평하게 훈련시키고, 성장시키고, 그런 열정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 김원형
- 김원형
오대산 극기훈련 때는 새벽 4시 기상을 해서 주먹만한 눈이 떨어지고, 1km 정도 뛰어갔던 적도 있었다. 오대산에서 대청봉까지 막 뛰어간다. 지금 와서 보면 아무 상관없는 훈련이었는데, 팀워크 강화하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 팀이 돌풍에 어느정도 작용을 한 건 사실이다.
김성근 감독님이 부임해서 죽을 맛이었고, 우리가 한 만큼 대우를 해 주니까, 자신감도 생겼고, 이길 수 있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기니까 도원야구장이 거의 꽉차다시피 했다. 1989년 한 해는 매일 축제 분위기였다. 너무나 좋았었다.
- 김동기
김성근 감독님이 부임해서 죽을 맛이었고, 우리가 한 만큼 대우를 해 주니까, 자신감도 생겼고, 이길 수 있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기니까 도원야구장이 거의 꽉차다시피 했다. 1989년 한 해는 매일 축제 분위기였다. 너무나 좋았었다.
- 김동기
노장이다 싶은 선수도 "넌 더 해야 된다." 라고 하면서 젊은 선수보다 훈련을 더 많이 시켰다. 이기는 게임을 하기 위해 그 훈련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들었다.
- 김우열
- 김우열
뛰는 걸 그렇게 많이도 시켰다. 완전 실미도지, 야구단이 아니었다. 승부에서는 이겨야 되고, 전쟁터에선 이겨야 되었다.
- 유지훤
- 유지훤
쌍방울 때인 96시즌에 원래 은퇴하려고 했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시고 운동을 그만두다시피 했는데, 포스트 시즌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공교롭게 대타를 나가게 되어 동점 상황이었는데,
정명원 을 상대로 굿바이 홈런을 쳤다. 김성근 감독이 한 얘기가 "맞아라"였는데, 살아 나가라고 했다. 그런데 홈런을 쳐서 운이 좋았다. 그리고 2년 동안이나 선수 생활을 더 했고 그 이후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언급했다.
- 박철우
- 박철우
펑고 만큼은 역대 감독님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이나 잘 치셨다. 얄미울 정도로 잘 쳤고, 오대산 극기훈련 때 1월 날씨에는 미터 두께로 얼음이 얼어 있었다. 끝나고 내려오는데 오른쪽 무릎에 물이 차 있었다. 동기 부여를 해 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좋은 성적을 내야 되었다.
- 임호균
- 임호균
오대산 물 들어간 덕분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거다. 비로봉 올라가는데 눈이 와서 이만큼이 빠져있는데 올라갔다. 음료수를 넣어놨는데 추운 날씨에 그게 다 꽝꽝 얼어있었다. 통제가 안되어 선수들이 다 화가 나있었다. 성토는 하지 못했는데, 감독의 말은 법이었기 때문이다.
- 정진호
- 정진호
강병철, 김성근 이 두 명이 훈련 제일 많이하는 감독.
- 정수근
- 정수근
감독님이랑 한번도 안 쳐봤는데, 야구 인생에서 사랑할 정도로 좋아하지만 선수 때 감독님을 만나지 않은게 하늘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 이대호
- 이대호
쌍방울에서 10년 동안 타격코치를 했었다. 거기서 정말 많이 배웠다. 경제 위기가 와서 (모기업이 부도가 났으니까) 김성근 감독이 계실 때도 선수들을 많이 팔았었다.
- 김준환
- 김준환
해태에서 선수 은퇴 후 2군에서 김성근 감독님을 모시고 있었다. 한번은 게임을 하는데 그라운드에 특출나신 분이 한번은 야구장에서 경기 중 비가 와서 중단시켜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승부욕이 엄청나셔서 끝까지 경기를 했다. 외야수 실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게 2:1로 진 게임이 되어 버렸는데, 그 비가 쏟아졌는데도 펑고를 계속 시켰다.
2군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 1군으로 올라갈 선수도 오늘까지 쓴다. "야! 오늘 던지고 올라가!" 이런 스타일이다. 보이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야구를 하시는 분이다.
- 김태완(1966)
2군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 1군으로 올라갈 선수도 오늘까지 쓴다. "야! 오늘 던지고 올라가!" 이런 스타일이다. 보이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야구를 하시는 분이다.
- 김태완(1966)
한때 삼성에 있었다. 22살이었는데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 방출 통보를 받고 은퇴했다. 사실 감독님이 날 기억을 못했는데, 감독님 계실 때 피칭을 2천개씩 하고, 걸리면 죽었다. "이건 인간이 할 수 없는 거다! 이 운동을 어떻게 하냐!" 하면서 말이다. 눈뜨면 심리가 불안해진다. 규율을 지키시고 강조하시는 감독님이 유난히 벌금을 많이 때리신 적도 있었다. 그 경험을 살려서 아이들을 가르쳤더니 진짜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 박건수[40]
- 박건수[40]
정말 무뚝뚝한 분이었어. 면접 때 '열심히 하겠다' 한마디가 끝이야. 사람은 진국이고, 야구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감정표현을 안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 양반이 모양내는 야구는 안 돼도 이기는 야구는 최고였던 분이거든. 야구 배우고 싶어서 김 감독을) 자주 불러서 물어보고 그랬지. 그런데 안 좋아 하시는 것 같아. 얘기는 해주는데 귀찮아 죽겠단 눈치야. 그래도 코치-감독 포함해서 7년간(1982-1983년 코치, 1984-1988년 감독) 같이 있었어도 의견충돌은 없었어. 들어보니까 구단에 불만 생기면 밑에 사람들하곤 많이 싸운 모양이던데 나하곤 싸운 기억이 없네. 적장으로 만나니 감회가 어떠냐고? 솔직히 두산이랑 SK랑 한국시리즈에서 붙었을 때 '저 양반은 못 당할 거야’란 생각이 들었어.
- 박용민[41]
- 박용민[41]
쌍방울로 딱 트레이드가 되니까 18연패를 하고 있었다. 감독님을 안 만났으면 지금의 김현욱은 없지 않았을까 싶었다. 삼성에서는 직원으로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는데, 1년만 더 하고 싶었다. 내가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서 손목을 붙잡고 '폼을 봐달라' 고 얘기했다. 감독님이 뒤에서 서 있던게 내 야구 인생이 바뀌었고, 96년도에 성적을 내면서 굉장히 감사한 시즌을 보냈다.
97시즌에도 오키나와 캠프를 가는데 커브를 던진 후 각이 딱 잡혔다. 1,2점차 지고 있을 때 꼭 나를 썼고, 악착같이 막았다. 무릎 부상이 왔어도, 바닥부터 올라왔으니까 97시즌은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시즌이었다. 일본에서 코나미컵을 만난 적이 있는데, 언론과 기자들은 냉정히 판단을 했겠지만 나는 이기기 위해서 던졌다. 감독님한테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 김현욱(야구)
97시즌에도 오키나와 캠프를 가는데 커브를 던진 후 각이 딱 잡혔다. 1,2점차 지고 있을 때 꼭 나를 썼고, 악착같이 막았다. 무릎 부상이 왔어도, 바닥부터 올라왔으니까 97시즌은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시즌이었다. 일본에서 코나미컵을 만난 적이 있는데, 언론과 기자들은 냉정히 판단을 했겠지만 나는 이기기 위해서 던졌다. 감독님한테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 김현욱(야구)
주전자리에서 밀리고 이제 김성근 감독님이 해태 인스트럭터를 한 시절이었다. 2군 내려와서 밤 12시까지 훈련을 하며 "너
홍현우 이길수 있다!" 하면서 격려를 해 주셨다. 나를 눈여겨 봐주셨는지 나중에 현금 트레이드로 쌍방울에서 사갔다. 쌍방울에서 보답 못해드린게 지금도 마음에 걸렸다.
- 구한성
- 구한성
나도 야구를 보면 김성근 감독님한테 제일 많이 배웠던 것 같다. 몸이 아프신데도 불구하고 저녁 늦게까지 1:1로 코칭을 해 주시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받아본 적이 없었다.
- 박재벌
- 박재벌
김성근 감독이 프로 구단을 처음 했을 때였다. 그 당시에는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에이스로 던지고 있으니까, 일본에서도 관심을 보였는데, 홍신차[42] 때문에 강제로 한국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김성근 감독은 비슷한 게임에서 에이스를 집어넣고 이기는 운용을 잘 하시는데, 중간계투 나를 쓰기가 편했다고 하며, 1986년도에 한 게임은 190개를 던졌다. 연장 12회까지 혼자서 던졌던 것이다. 또 하나는 정말 중요한 게임이었는데[43] 이틀 쉬고 던졌는데 엄청 힘들었다. 내 몸이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는게 느껴진 경기였다.
- 최일언
- 최일언
겨울에 대만
가오슝시를 갔다. 그 더운 날씨에 하루에 공 200개를 던졌다. 감독님은 펑고를 천 개 이상 치시며, 훈련을 정말 많이 시키는 분이다.타자의 훈련 방식은 맞는데, 투수는 그렇게 하면 안 됐었다. 그때는 김성근 감독님도 몰랐으니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은퇴 후에 미국에서 한국 야구 중계해주는 걸 봤다. 김성근 감독님이 투수를 쓰는 걸 보고 실망을 했다. 감독님의 욕심인지는 모르겠는데, 누가 잘하면 계속 던지게 해서 제일 마지막에는
권혁이라는 투수를 투입했다. 저렇게 망가져서 가는 선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냥 없어지는게 아니냐고, 내가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총 4번 등판을 했다. 우승을 했으니까 다른 선수들보다도 많이 던졌고, 그 뒤에는 애틀랜타 트리플A 팀과 시합을 해서 그 때도 던졌다. 내가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 던지고 하다보니 83년 시즌 중에 어깨가 찢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매우 울었다.
- 선우대영
- 선우대영
공은 빠른 투수였는데, 차츰차츰 위기가 오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님을 뵙고 나서 야구를 더 알게 되었다. 감독님이 기다려 주셨고, 아주 많은 배려를 해 주셨다.
- 신윤호
- 신윤호
쌍방울에 감독으로 오면서부터다. 처음엔 누군지 잘 몰랐다. 선배들에게 운동을 많이 시키는 감독이란 이야기만 들었다. 섬뜩했다. 체력훈련을 좋아하지 않아서 어떻게 꾀병을 부릴까 고민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90% 이상이 불안에 떨었다. 입단식에서 인사 드리는데 한국말이 서투르셔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한숨만 나왔다.
감독님이 오시면서 쌍방울 고등학교로 변신했다.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하셨다. 산만하거나, 훈련을 게을리 하면 감독님이 주시하다가 "너 가라!" 했을 정도였다. 왜 했던 걸 또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선수들 모두 훈련이 끝나면 녹초가 돼 눕기 바빴다.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딴짓 할 여유를 안 주셨다. 술을 먹거나 몰래 나돌아 다니기가 불가능했다. 쉴 새 없이 시키셨다. 가끔 무리해서 볼이 두 개로 보일 정도였다.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훈련이 언제 끝날까를 생각했다. 경기내용이 좋지 않으면 경기가 끝나고 관중이 나간 뒤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힘든 내색을 해도 감독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나중에 요령이 생겨 눈치껏 쉬었다. LG와의 원정경기 때 방에서 성영재 형이랑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 맥주를 한 캔만 먹었는데 영재 형이 한 개만 더 먹자고 해 후배 배국진[44]이를 불러 3만 원을 쥐어주고 몇 개만 사오라고 했다. 그런데 국진이가 맥주 30캔을 사 들고 오다 감독에게 걸렸다. 당시 맥주 한 캔이 천 원이었는데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 뺨을 20대 정도 맞았는데 워낙 손이 크시다 보니 정말 아팠다. 억울하기도 했고. 다음날 일어났는데 귀가 안 들렸다. 다음날 경기가 더블헤더여서 더 화가 나셨던 것 같다. 그때 외엔 엄하셨던 적은 없었다.
- 심성보
감독님이 오시면서 쌍방울 고등학교로 변신했다.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하셨다. 산만하거나, 훈련을 게을리 하면 감독님이 주시하다가 "너 가라!" 했을 정도였다. 왜 했던 걸 또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선수들 모두 훈련이 끝나면 녹초가 돼 눕기 바빴다.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딴짓 할 여유를 안 주셨다. 술을 먹거나 몰래 나돌아 다니기가 불가능했다. 쉴 새 없이 시키셨다. 가끔 무리해서 볼이 두 개로 보일 정도였다.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훈련이 언제 끝날까를 생각했다. 경기내용이 좋지 않으면 경기가 끝나고 관중이 나간 뒤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힘든 내색을 해도 감독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나중에 요령이 생겨 눈치껏 쉬었다. LG와의 원정경기 때 방에서 성영재 형이랑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 맥주를 한 캔만 먹었는데 영재 형이 한 개만 더 먹자고 해 후배 배국진[44]이를 불러 3만 원을 쥐어주고 몇 개만 사오라고 했다. 그런데 국진이가 맥주 30캔을 사 들고 오다 감독에게 걸렸다. 당시 맥주 한 캔이 천 원이었는데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 뺨을 20대 정도 맞았는데 워낙 손이 크시다 보니 정말 아팠다. 억울하기도 했고. 다음날 일어났는데 귀가 안 들렸다. 다음날 경기가 더블헤더여서 더 화가 나셨던 것 같다. 그때 외엔 엄하셨던 적은 없었다.
- 심성보
말 그대로 지옥훈련이었다. 끝나고 나면 파김치가 되었고, 밥도 서서 먹어야 했다.
- 박노준
- 박노준
아주 좋으시고 열정이 넘친 분이셨는데, 1군 감독이 김응용 감독이었기에 프런트였던 나는 중간에서 고생했었다. 무등경기장을 못 쓰게 되면,
중외공원, 하천,
광주진흥고등학교 등에서 훈련했다. 24시간을 김성근 감독님과 붙어다녔다.
- 조찬관[45]
- 조찬관[45]
그때의 그 훈련랑은 잊지를 못한다. 매년 꼴지만 하다 가을야구 진출하니까 야구 할 맛도 났다.
- 김광림
- 김광림
구단이 태평양으로 바뀌고 1년이 지난 후 김 감독님이 오셨다. 89년도 시즌 후 방출되고 나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선수로 뛸 때 근육쪽에 부상이 잦았다. 선수생활이 너무 힘들었고, 95년도 겨울에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로 왔다. 부임하시자 마자 선수단 정리 작업에 들어가더니 두 번째 방출을 당했다. "그 때 원망 많이 했었고, 결혼식 날짜까지 잡았는데, 이건 생각해도 악연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죠.", 감독님한테 사정을 얘기하더니 감독님은 구단 직원으로 추천해줬고, "그 때 감독님한테 정말 감사했습니다. 결혼하는데 배려를 해 주신 거였고, 경기 후에는 감독님이랑 경길ㄹ 복기해야 했습니다. 감독님 성격 아시잖아요. 꼼꼼하셔서 홈 게임인데도 집에 잘 못들어갔어요. 그 때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매니저로 일한 경험이 지도자 생활하는데 많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쌍방울 전력이 좋진 않았잖아요. 그 때 훈련을 세상에서 제일 많이 한다고 느꼈습니다. 1999년 즈음에 매니저가 일이 정말 많았어요. 감독님이 물어보시더라고요. 너 월급 얼마냐고. 그 때 월급이 62만이었어요. 생활이 힘들었죠. 그걸 어떻게 아셔가지고 선수 연봉이라도 받게 해주시려고 1999년도에 선수 등록을 한거에요."감독 초창기에는 김성근 감독의 영향이 컸고,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김성근 감독님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에요. 야구 철학, 지도력을 많이 습득했습니다. 지금은 현 사안에 좀 더 치중하는 편입니다. 데이터가 아무리 좋아도, 최근 컨디션 같은 걸 따져서 데이터와 상반되는 선택도 과감하게 치르는 편이에요. 현 상황을 더 중시하는 거죠.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게 거의 비슷할 거라고 예측했지만 막상 경기를 펼치고 보니 달랐죠. 아무래도 팀의 특성도 다르고 감독님과 저의 스타일도 차이가 생겼으니까요. 너무 재밌었고, 승패를 떠나서 매우 훌륭한 경기를 해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 이연수[46]
- 이연수[46]
95년 시즌이 끝나고 '김성근' 이라는 이름을 소문으로 들었더니 '죽었다' 라고 생각했다. 야구장이 전혀 관리가 되어있질 않아 낫을 가지고 선수와 직원들이 제초작업을 했다. 나중에 감독님이 타격하시는걸 보시더니 타격훈련 하지 말고 수비훈련 해라. 캠프 끝날때까지 계속 수비 훈련만 했던 기억이 있다. 상상할 수 없는 훈련을 했었고, 특히 감독과의 미팅 시간은 죽을 맛이었다. 잠을 안 자려고 허벅지를 꼬집다 보니 멍이 생겼고, 그게 더 고통이었다. 훈련에 점차 적응하다 보니 내 것을 찾았고, 부상을 달고 살았지만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 최태원
- 최태원
2001년도 엘지 시절에 게임하다가 4타수 무안타를 쳤다. 그랬더니 숙소까지 뛰어오라고 했다. "프로 선수가 아마추어도 아니고 다 큰 선수를 뛰어오라고 하나?" 수치심이 많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내가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더 길게 프로야구 선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님 스타일은 하나같이 다 관리해주시고 하는 유형이다.
- 양준혁
김성근 감독님 스타일은 하나같이 다 관리해주시고 하는 유형이다.
- 양준혁
내 이름을 킨칸수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는 코칭스태프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투수코치가 펑고를 쳐 줬다. '펑고 천개'.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먹자고 했다. 알고보니 그 메뉴가 '펑고 치는 메뉴' 였다. 수프, 야채, 고기, 디저트 모두 펑고 치는 메뉴였다. 기진맥진 하는 순간 메인 메뉴가 나온다길래 '아 죽었다' 싶었다. 나도 펑고를 잘 치지만 김성근 감독님과는 게임도 안 된다.
그 당시에는 김성근 감독의 성향을 잘 모를 때였는데, 현재 와서 보니 남에게 표시를 절대 하지 않는 분이었다. 2루수를 할 수 있게 믿음을 준 감독님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잊지 못한다.
- 김광수
그 당시에는 김성근 감독의 성향을 잘 모를 때였는데, 현재 와서 보니 남에게 표시를 절대 하지 않는 분이었다. 2루수를 할 수 있게 믿음을 준 감독님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잊지 못한다.
- 김광수
감독님과 제주도에서 훈련을 엄청 많이 했었다. 저녁 식사 끝나고 한시간 뒤에 미팅을 항상 했다. 많은 얘기를 해 주셨고, 그 당시 감독 말이면 다 법이었다. 가는 길에 뛰어가면서 워밍업을 시켰고, 꼼수를 부리려다가 걸린 기억도 있었다. 활용도를 높여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폭발시켜 주셨다.
- 이동현
- 이동현
2016년 2천안타 대기록 달성 이후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 김성근 감독이었다. 감독님을 만나면서 야구하는 계기가 되었고, 프로가 얼마나 어려운 곳인지 느꼈다.
- 박용택
- 박용택
하루에는 스윙을 7천개까지 한 적도 있고, 배팅만 9시간을 한 적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님 훈련은 시키는거 전부 다 과한 훈련이었다. 타자는 공이 오면 반응하는데, 처음 느꼈던게 내가 스윙을 하니까 공이 와서 맞는 느낌이었다.
김성근 감독님은 인생에 은인 같은 분이었고, 인생에서 터닝포인트였으며,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만들어주신 분이었다.
- 최동수
김성근 감독님은 인생에 은인 같은 분이었고, 인생에서 터닝포인트였으며,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만들어주신 분이었다.
- 최동수
멋있는 분이었다. 내 롤모델인 분이고, 운동을 엄청나게 많이 시킨다. 내가 지도자가 되고 나서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 신용운
- 신용운
한화에 새둥지 튼 배영수
우선협상 끝난 다음날 김성근 감독의 전화
“날 인정해주셔서 눈물 참느라 힘들었어요”
배영수는 “감독님 때문에 한화를 선택했다. 변하고 싶었다.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봤을 때 내 실력은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감독님과 함께 한다면 충분히 지금보다 2~3단계는 상승 효과를 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 배영수
우선협상 끝난 다음날 김성근 감독의 전화
“날 인정해주셔서 눈물 참느라 힘들었어요”
배영수는 “감독님 때문에 한화를 선택했다. 변하고 싶었다.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봤을 때 내 실력은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감독님과 함께 한다면 충분히 지금보다 2~3단계는 상승 효과를 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 배영수
김성근 감독님과 한 팀에 있으면, 신체적으론 힘이 들지만 정신적으론 행복하다. 많은 사람들은 야구 선수들이 육체적인 고통으로 힘들어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걸 알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님과 다시 하고 싶었다. 행복하다
- 송은범
- 송은범
김성근 감독님은 제가 야구를 하면서 기술적인 측면보다도 ‘어떤 야구 선수가 돼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왜 야구를 해야 되는지’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해주신 분이에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게 해주신 것과 제가 거기에 보답하고, 부합하는 것은 별개잖아요. 결국에는 말씀을 듣고 내 자신이 바뀌어야 하는 거니까요. 항상 생각하고 감독님 말씀을 새겨들으면서 어린 시절에 열심히 하고자 했던 게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정우람
- 정우람
은퇴 기자회견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로 이정훈, 김인식, 김성근 전 감독을 꼽았다. 그중 김성근 전 감독을 떠올린 이유가 흥미로웠다. 김성근 전 감독에 대해 ‘내 자신을 안주하지 않게끔 이끌어주신 분’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감독이 한화 감독으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김태균 선수를 지목해 “앞으로 김태균은 당분간 3루에서 반 죽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타깃을 정하고 팀을 이끌었는데 그런 부분이 부담스럽지 않았나.
“취임식 때 감독님이 나를 지목해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3년 여 동안 감독님과 함께 지내며 감독님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감독님은 앞에선 강하게 채찍질 하시지만 뒤에서는 선수들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챙겨주신다. 그러니까 선수들이 (감독님을) 따르는 것이다.”
- 김태균
“취임식 때 감독님이 나를 지목해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3년 여 동안 감독님과 함께 지내며 감독님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감독님은 앞에선 강하게 채찍질 하시지만 뒤에서는 선수들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챙겨주신다. 그러니까 선수들이 (감독님을) 따르는 것이다.”
- 김태균
“김성근 감독님은 하늘의 선물”
- 강경학
- 강경학
김성근 감독님 시절에 훈련이 엄청 힘들었지만 경기에 많이 나갔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행복했다. 그때 당시는 너무 힘들었지만 김성근 감독님 덕분에 야구하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요즘 살이 쪘는데 감독님 만나서 다시 펑고를 받아야 할 것 같다(웃음). 모든 감독님, 코치님들께 감사하지만 김성근 감독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감독님께 새해 인사를 전화로 드렸는데 전력 분석 잘해보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 김회성
- 김회성
한화에서 김성근 감독을 다시 만났어요. 기분이 묘했을 텐데요.
“계속 이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SK 때는 잘 몰랐는데 감독님이 SK를 나가신 후 제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지더라고요. 그냥 슬럼프의 시기인가보다 생각하고 넘겼는데 한화 와서 감독님 만난 후 타율이 3할대로 올라가는 거예요. 감독님이 한화를 떠나신 후 그제야 깨달았어요. 감독님은 선수들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빨리 붙잡아주는 분이구나 하는 사실을요. 그 덕분에 제가 그동안 결과를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싫기도 했어요. 감독님이 나가신 후 또 슬럼프를 겪었거든요. 슬럼프가 길어지면서 벗어나려고 해도 잘 극복이 안 되더라고요. 누가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팀에서는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며 지켜보는 상황이라 저 혼자 발버둥 치면서 절망을 반복했습니다. 감독님이 계시는 동안 제 걸 제대로 만들어 놓지 못한 부분이 저를 힘들게 했던 셈이었죠.”
술 마시면 김성근 전 감독한테 전화를 자주 했다고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감독님이 그리웠습니다. 전화를 못 받으시면 다음날 꼭 전화를 해주세요. 전화해서 감독님이 “또 술 먹었냐”면서 “누구랑 먹었냐”고 물어보세요. 제가 “(박)재상이랑 먹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XXX들끼리 먹었구나”하시면서 껄껄 웃으세요. 그 한 마디 듣고 싶어서 전화드렸어요. 감독님이랑 통화하면서 힘내고 싶어서요. 선수들이랑 만나면 감독님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러다 전화 버튼을 누르게 되고요. 전화를 받으실까, 안 받으실까 하면서 전화하다 안 받으면 애들한테 “야, 할배 전화 안 받는다”하면서 웃고.”
은사' 김성근 감독님과 어떤 얘기를 나눴나.
"시즌 종료 후 은퇴 결정에 대해 말씀드렸다. '왜 벌써 그만두느냐'고 하시더라. '이제 은퇴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감독님 덕분에 잘 성장했고,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아 감사드린다'라고 인사했다."
- 정근우
“계속 이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SK 때는 잘 몰랐는데 감독님이 SK를 나가신 후 제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지더라고요. 그냥 슬럼프의 시기인가보다 생각하고 넘겼는데 한화 와서 감독님 만난 후 타율이 3할대로 올라가는 거예요. 감독님이 한화를 떠나신 후 그제야 깨달았어요. 감독님은 선수들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빨리 붙잡아주는 분이구나 하는 사실을요. 그 덕분에 제가 그동안 결과를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싫기도 했어요. 감독님이 나가신 후 또 슬럼프를 겪었거든요. 슬럼프가 길어지면서 벗어나려고 해도 잘 극복이 안 되더라고요. 누가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팀에서는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며 지켜보는 상황이라 저 혼자 발버둥 치면서 절망을 반복했습니다. 감독님이 계시는 동안 제 걸 제대로 만들어 놓지 못한 부분이 저를 힘들게 했던 셈이었죠.”
술 마시면 김성근 전 감독한테 전화를 자주 했다고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감독님이 그리웠습니다. 전화를 못 받으시면 다음날 꼭 전화를 해주세요. 전화해서 감독님이 “또 술 먹었냐”면서 “누구랑 먹었냐”고 물어보세요. 제가 “(박)재상이랑 먹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XXX들끼리 먹었구나”하시면서 껄껄 웃으세요. 그 한 마디 듣고 싶어서 전화드렸어요. 감독님이랑 통화하면서 힘내고 싶어서요. 선수들이랑 만나면 감독님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러다 전화 버튼을 누르게 되고요. 전화를 받으실까, 안 받으실까 하면서 전화하다 안 받으면 애들한테 “야, 할배 전화 안 받는다”하면서 웃고.”
은사' 김성근 감독님과 어떤 얘기를 나눴나.
"시즌 종료 후 은퇴 결정에 대해 말씀드렸다. '왜 벌써 그만두느냐'고 하시더라. '이제 은퇴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감독님 덕분에 잘 성장했고,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아 감사드린다'라고 인사했다."
- 정근우
"김성근 감독님, 예쁘게 봐주세요"
김 감독은 "트레이드된 신성현이 감독실로 인사를 왔다. 잘됐다고 했더니 '가기 싫어요'라고 하더라"며 "이 세계가 그런 세계 아닌가. 우리가 알게 된 것이 몇 년이냐. 5년이다. 처음으로 나한테 편하게 얘길 하더라. 예전 같으면 긴장해서 말 못했을텐데"라고 제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순간을 떠올렸다.
신성현에게 김 감독은 은인과도 같다. 신성현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고양 원더스에서 김 감독의 지도 아래 기량을 발전시켰다. 원더스 해체 후에는 무릎 부상으로 드래프트 참가가 무산됐지만 한화 사령탑으로 부임한 김 감독이 신성현을 육성선수로 영입했다.
- 신성현
김 감독은 "트레이드된 신성현이 감독실로 인사를 왔다. 잘됐다고 했더니 '가기 싫어요'라고 하더라"며 "이 세계가 그런 세계 아닌가. 우리가 알게 된 것이 몇 년이냐. 5년이다. 처음으로 나한테 편하게 얘길 하더라. 예전 같으면 긴장해서 말 못했을텐데"라고 제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순간을 떠올렸다.
신성현에게 김 감독은 은인과도 같다. 신성현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고양 원더스에서 김 감독의 지도 아래 기량을 발전시켰다. 원더스 해체 후에는 무릎 부상으로 드래프트 참가가 무산됐지만 한화 사령탑으로 부임한 김 감독이 신성현을 육성선수로 영입했다.
- 신성현
올해로 프로 12년 차인 한화 이용규가 반성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나는 편하게 야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용규는 "이제는 김성근 감독님이 추구하는 야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런 이용규도 김성근 감독을 만나 '부족함'을 느꼈다. 이용규는 "훈련을 해도 해도 끝이 없더라. 근데, 해도 해도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야구를 하면서 어느 순간 쉽게 생각했던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김 감독님을 만나 사라졌다"고 말했다.
깨달음도 얻었다. 이용규는 "김성근 감독님에게 야구라는 것은 그냥 흐르는 것이 없더라.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이 감독님이다. 경기에서 한 구 한 구를 승부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신다"면서 "감독님의 그런 모습 때문에 팀 더그아웃 분위기도 달라졌다. 선수들의 집중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1회부터 9회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다. 선수들 모두 소홀했던 것에 대해 반성한다. 감독님이 원하는 야구를 선수들도 알고 있다"고 전했다.
- 이용규
그런 이용규도 김성근 감독을 만나 '부족함'을 느꼈다. 이용규는 "훈련을 해도 해도 끝이 없더라. 근데, 해도 해도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야구를 하면서 어느 순간 쉽게 생각했던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김 감독님을 만나 사라졌다"고 말했다.
깨달음도 얻었다. 이용규는 "김성근 감독님에게 야구라는 것은 그냥 흐르는 것이 없더라.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이 감독님이다. 경기에서 한 구 한 구를 승부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신다"면서 "감독님의 그런 모습 때문에 팀 더그아웃 분위기도 달라졌다. 선수들의 집중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1회부터 9회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다. 선수들 모두 소홀했던 것에 대해 반성한다. 감독님이 원하는 야구를 선수들도 알고 있다"고 전했다.
- 이용규
한화 이글스에서 만난 김성근 감독
송신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은퇴를 준비했다고 말한다. 2015년 시즌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김성근 전 감독의 낙점을 받고 다시 한화로 방향을 틀었고, 이곳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내게 된다. 송신영은 김성근 전 감독을 중앙고에서 처음 만났다고 회상한다.
당시 인스트럭터 신분으로 감독님이 중앙고를 방문하셨다. 그때 내가 공 던지는 모습을 보고 감독님은 ‘야구 선수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자격 없는 선수에게 커브 던지는 걸 알려주셨다. 직구와 슬라이더밖에 던질 줄 모르던 내가 감독님 덕분에 커브를 배운 것이다. 그리고 한화에서 감독님으로 다시 만났을 때 내게 나이를 물어 보셨다. 한국 나이로 마흔 한 살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감독님은 ‘대단하구나. 앞으로 네가 해오던 대로 훈련하고 몸 안 다치게 잘 만들어라’며 감동을 주셨다. 그때 야구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님의 말씀이 고마운 나머지 잘 보이려고 오버 페이스하다 결국 부상을 입었고 한화에선 줄곧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사실 지난 시즌 마치고 감독님이 내게 코치를 권유하셨다. 미련 때문에 ‘1년만 더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감독님은 그대로 받아주시더라. 그때 느꼈다. 밖에서 감독님을 평가하는 것과 선수들이 감독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왜 차이가 나는지를. 혹사, 퀵후크 등 논란이 끊이질 않았지만 투수들 대부분은 감독님의 상황과 결정을 이해했다. 물론 옛날 야구 방식을 고집하신 부분도 있다. 그래도 야구에 대한 열정과 선수를 챙기고 존중해주는 배려만큼은 김성근 감독님을 따라갈 지도자는 없다.”
송신영은 한화를 떠나면서 김성근 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는 “감독님 덕분에 2년 더 야구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고, 김 전 감독은 “이럴 줄 알았으면 넥센에서 은퇴하게 놔둘 걸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다. 미안하다”며 송신영을 위로했다.
- 송신영
송신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은퇴를 준비했다고 말한다. 2015년 시즌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김성근 전 감독의 낙점을 받고 다시 한화로 방향을 틀었고, 이곳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내게 된다. 송신영은 김성근 전 감독을 중앙고에서 처음 만났다고 회상한다.
당시 인스트럭터 신분으로 감독님이 중앙고를 방문하셨다. 그때 내가 공 던지는 모습을 보고 감독님은 ‘야구 선수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자격 없는 선수에게 커브 던지는 걸 알려주셨다. 직구와 슬라이더밖에 던질 줄 모르던 내가 감독님 덕분에 커브를 배운 것이다. 그리고 한화에서 감독님으로 다시 만났을 때 내게 나이를 물어 보셨다. 한국 나이로 마흔 한 살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감독님은 ‘대단하구나. 앞으로 네가 해오던 대로 훈련하고 몸 안 다치게 잘 만들어라’며 감동을 주셨다. 그때 야구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님의 말씀이 고마운 나머지 잘 보이려고 오버 페이스하다 결국 부상을 입었고 한화에선 줄곧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사실 지난 시즌 마치고 감독님이 내게 코치를 권유하셨다. 미련 때문에 ‘1년만 더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감독님은 그대로 받아주시더라. 그때 느꼈다. 밖에서 감독님을 평가하는 것과 선수들이 감독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왜 차이가 나는지를. 혹사, 퀵후크 등 논란이 끊이질 않았지만 투수들 대부분은 감독님의 상황과 결정을 이해했다. 물론 옛날 야구 방식을 고집하신 부분도 있다. 그래도 야구에 대한 열정과 선수를 챙기고 존중해주는 배려만큼은 김성근 감독님을 따라갈 지도자는 없다.”
송신영은 한화를 떠나면서 김성근 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는 “감독님 덕분에 2년 더 야구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고, 김 전 감독은 “이럴 줄 알았으면 넥센에서 은퇴하게 놔둘 걸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다. 미안하다”며 송신영을 위로했다.
- 송신영
7.6. 관련 비판
김성근의 예고된 몰락, 적폐가 되어버린 '야신' 신화
단순히 성적 부진만 아니라 김성근 부임 이후 끊임없이 거론된 선수 혹사 논란,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팀 운영, 구단과의 마찰 등으로 수많은 구설수를 초래했고 한때 든든한 우군이었던 팬들과 구단조차도 질린 나머지 잇달아 등을 돌리게 했다.
김성근에게 야구를 바라보는 기준이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경험에만 의지하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선과 불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야구는 냉정하게 말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김성근만의 야구에 가깝다. 투수 운용 패턴이나 훈련과 휴식의 구분, 혹사의 개념 등 어떤 측면에서 봐도 원칙이나 일관성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야구다.
김성근 야구에 대한 모든 판단의 옳고 그름, 타당성과 개연성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은 오로지 '김성근 그 자체'밖에 없었다. 불펜투수를 매일 연투시키고, 돌아가면서 부상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미래마저 암울해지는 부작용이 아무리 심각해도 김성근이 그렇게 해야 했다고 믿는다면 그런 것이다.
철저하게 눈앞의 효율성만 강조하여 선수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야구는 뒤로 갈수록 혹사와 부상 논란, 팀의 노쇠화 같은 많은 부작용을 양산하기 일쑤였다.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구단의 지원·시스템 같이 조직을 지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오직 김성근 덕분에 성공했다는 잘못된 환상이 퍼진 것도 갈등을 유발하며 '김성근 리더십'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을 흐리게 만들었다.
김성근은 자신을 둘러싼 비판 여론이 나올 때마다 '핍박받는 아웃사이더'나 '소신 있는 리더'라는 이미지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돌려 내부를 결속시키는 방식을 고수했다. 수많은 인터뷰나 자서전 등을 통하여 자신의 업적을 미화하는 데도 열을 올렸다. 말 그대로 1970~80년대에나 통하던 낡은 성공 방식이나 언론플레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답습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몰락했다는 점에서 마치 몇몇 정치인들 혹은 우리 현대사의 데자뷔를 보는 듯 묘한 느낌까지 든다.
한화도 김성근과의 불편한 동거에 우여곡절 끝에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결별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만큼 김성근 전 감독이나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당분간 외부에서 구단을 비난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다. 2011년 SK 시절에도 당시 이만수 후임 감독과 구단 프런트는 김성근 측의 악의적인 여론몰이에 꽤 오랫동안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당시 폭도로 돌변한 일부 극성팬들이 홈구장에 방화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불상사도 있었다. 이번에도 김성근의 사퇴가 알려지면서 박종훈 단장을 비롯한 한화 구단 관계자들이 일부 극성팬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어서 주의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김성근 전 감독이 망가뜨린 유망주 육성 시스템과 1군 라인업의 고령화, 고비용 저효율의 선수단 구조를 개편하고 팀을 재건하려면 후임 감독이 누가 되든지 당분간 고생이 불가피하다. 지난해까지 9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한화로서는 당분간 암흑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김성근은 드디어 떠났지만, 한화가 구시대의 적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도 험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김성근을 무너뜨린 것은 그 자신이다
단순히 성적 부진만 아니라 김성근 부임 이후 끊임없이 거론된 선수 혹사 논란,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팀 운영, 구단과의 마찰 등으로 수많은 구설수를 초래했고 한때 든든한 우군이었던 팬들과 구단조차도 질린 나머지 잇달아 등을 돌리게 했다.
김성근에게 야구를 바라보는 기준이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경험에만 의지하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선과 불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야구는 냉정하게 말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김성근만의 야구에 가깝다. 투수 운용 패턴이나 훈련과 휴식의 구분, 혹사의 개념 등 어떤 측면에서 봐도 원칙이나 일관성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야구다.
김성근 야구에 대한 모든 판단의 옳고 그름, 타당성과 개연성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은 오로지 '김성근 그 자체'밖에 없었다. 불펜투수를 매일 연투시키고, 돌아가면서 부상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미래마저 암울해지는 부작용이 아무리 심각해도 김성근이 그렇게 해야 했다고 믿는다면 그런 것이다.
철저하게 눈앞의 효율성만 강조하여 선수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야구는 뒤로 갈수록 혹사와 부상 논란, 팀의 노쇠화 같은 많은 부작용을 양산하기 일쑤였다.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구단의 지원·시스템 같이 조직을 지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오직 김성근 덕분에 성공했다는 잘못된 환상이 퍼진 것도 갈등을 유발하며 '김성근 리더십'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을 흐리게 만들었다.
김성근은 자신을 둘러싼 비판 여론이 나올 때마다 '핍박받는 아웃사이더'나 '소신 있는 리더'라는 이미지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돌려 내부를 결속시키는 방식을 고수했다. 수많은 인터뷰나 자서전 등을 통하여 자신의 업적을 미화하는 데도 열을 올렸다. 말 그대로 1970~80년대에나 통하던 낡은 성공 방식이나 언론플레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답습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몰락했다는 점에서 마치 몇몇 정치인들 혹은 우리 현대사의 데자뷔를 보는 듯 묘한 느낌까지 든다.
한화도 김성근과의 불편한 동거에 우여곡절 끝에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결별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만큼 김성근 전 감독이나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당분간 외부에서 구단을 비난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다. 2011년 SK 시절에도 당시 이만수 후임 감독과 구단 프런트는 김성근 측의 악의적인 여론몰이에 꽤 오랫동안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당시 폭도로 돌변한 일부 극성팬들이 홈구장에 방화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불상사도 있었다. 이번에도 김성근의 사퇴가 알려지면서 박종훈 단장을 비롯한 한화 구단 관계자들이 일부 극성팬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어서 주의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김성근 전 감독이 망가뜨린 유망주 육성 시스템과 1군 라인업의 고령화, 고비용 저효율의 선수단 구조를 개편하고 팀을 재건하려면 후임 감독이 누가 되든지 당분간 고생이 불가피하다. 지난해까지 9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한화로서는 당분간 암흑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김성근은 드디어 떠났지만, 한화가 구시대의 적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도 험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김성근을 무너뜨린 것은 그 자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최근 몇 개월간 얻어 먹은 술의 일정 부분을 한화팬에게 얻어먹었기에 오히려 한화를 저주하면 안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내년 시즌 한화가 부진했으면 좋겠다.
이런 방식으로 한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김성근식 성공법' '이글스식 성공법' 등이 판치면서 이미 야근, 주말근무가 당연한 나라에 정신나간 일들이 당연스럽게 받아지는 날이 오게 될 거란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직장에서 머리까지 빡빡 밀고 다니라고 한다면…
"꼴찌가 어디서 놀아" 지옥훈련 부추기는 폭력적 한국인, 2014년 12월 4일, ㅍㅍㅅㅅ
이런 방식으로 한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김성근식 성공법' '이글스식 성공법' 등이 판치면서 이미 야근, 주말근무가 당연한 나라에 정신나간 일들이 당연스럽게 받아지는 날이 오게 될 거란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직장에서 머리까지 빡빡 밀고 다니라고 한다면…
"꼴찌가 어디서 놀아" 지옥훈련 부추기는 폭력적 한국인, 2014년 12월 4일, ㅍㅍㅅㅅ
8. 여담
8.1. 야구계 인맥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야구계 인맥 문서 참고하십시오.8.2. 개인사
- 데이터 야구의 선도자로 알려져 있는 부분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오히려 LG 시절 김성근 경질의 사유로 데이터 야구는 재미없다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김성근의 데이터 야구는 야구계에서는 옹호자이든 반대자이든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사항이다. 다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미신과 징크스에도 굉장히 민감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2009년 SK 연승 중 수염을 안 자른 일화도 유명하며, 양말 신는 순서까지 모두 징크스로 잡아놓는 것은 2000년대 기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 하단의 등번호 38번도 김동엽 전 감독 이야기도 있지만 38 광땡이라는 얘기도 나오는 부분. 옹호자들은 이 부분을 데이터 야구는 물론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까지 신경쓴다고 이야기하고, 반대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전혀 맞지 않는 행보를 하는 이중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다.
- 선호하는 등번호 38번은 절친한 사이였던 김동엽 해태, MBC 감독의 등번호로 김동엽 전 감독이 작고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달게 된 등번호이다.[47][48] 김동엽은 지금 김성근의 아내인 오효순씨를 소개시켜 줬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다. 여담으로 프로야구 출범 초기 코치와 감독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쌍방울 감독 시절 91번을 달았던 것처럼 일반적으로 코칭스태프들이 즐겨 다는 70번대 이상 등번호를 달아왔으나 SK 감독 시절부터 최강 몬스터즈 감독을 맡고 있는 현재까지는 줄곧 38번을 달고 있다.
-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김정준에 대한 평가는 '아버지가 잘생겼다' 였으며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본인의 젊은 시절 외모가 상당했다는 내용이 꽤 자주 언급된다. 물론 젊은 시절 사진이 꽤 남자다운 매력이 있는데다 당시에는 180cm가 넘는 장신은 드문 편이었으니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자서전에선 자신의 아내와 딸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예쁘다고 언급하는데(과거 결혼사진을 보면 김성근 감독의 아내는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미인이다) 가족들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모양. 거기에 10년전까지만 해도 주로 입었던 사복 스타일이 청바지나 후드티를 비롯한 힙합패션이었을 정도고(...), 그게 아니더라도 언론에 비춰지는 김성근 감독의 사복 사진들을 보면, 수트든 캐쥬얼이든 그냥 옷을 잘 입는다. 여든이 넘은 현 시점에서도 후드티나 바람막이,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의 운동화를 매칭하는 트렌디한 고프코어룩을 코디[49]하는 등 도저히 80대라 볼 수 없는 수준급 패션센스를 자랑한다. 특히 야구계는 운동선수들이 많음을 감안하더라도 유독 패션 테러리스트들이 많기에 더더욱. 이것이 김성근 감독의 신혼때 사진이라고 한다.
- 선수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는 많이 하라며 권장하는 편이라고 한다. 감독 생활 초기에는 선수들이 연애를 하는 것을 엄청나게 막았고 몰래 나가는 걸 막으려고 숙소 문까지 걸어잠궜으나, 선수들이 10층 높이에서 난간에 매달려 나가는 걸 보고 연애라는 건 재치이기에 막거나 할 수 없는 것이라 느꼈다고 한다.
-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한 덕에[50], 후배 지도자들에게 이런저런 지적질을 하고 한국 야구 전반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인터뷰가 많다. 또한, 기본적으로 기행과 더불어 인터뷰 자체를 빼는 것 없이 매우 화끈하게 발언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표제를 좋아하는 기자들에게는 최고의 소스 제공자. 모래알 드립 개미 드립 실패한 투수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은어로 '앵물'이다.
- 고양 원더스의 구단주 허민이 김 감독의 생일선물로 S클래스를 선물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원더스를 이끌어준 전문가의 고마움과 함께 차 안에서 편안히 야구에 대해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근데 김성근 감독은 운전면허가 없다. 야구 외에 다른 일로는 시간을 좀처럼 쓰질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LG 감독 시절에도 성동구 성수동 자택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야구장을 오가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양 때만 해도 70을 넘긴 고령이었으니 면허를 따기도 무리에,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건 본인 성격에 더 안 맞았을 것이다.
-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내정되면서 사실상 최초로 팬들의 강력 요구에 의해서 임명된 감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한화 이글스 프런트는 김응용 감독과 계약이 끝난 후 차기 감독에 김성근 감독을 임명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프런트의 의중을 알게 된 팬들은 이에 반발. 아고라에 청원하고,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하고, 팬들이 단체로 한화 이글스 홍보팀에 수백통의 전화를 걸고, 심지어 한화 본사에까지 전화를 걸어 그 전화가 회장 비서실까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본사 1인 시위는 덤. 평소 신문을 보는 김승연 한화 구단주가 이를 모를리 없었고, 결국 구단 프런트에 김 감독 임명을 지시했다고 한다.
- 2015년 디시인사이드에 갤러리가 생겼다.
-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강야구 감독 부임 이후 첫 회식에서 박용택이 대신 건배사를 할 당시 '(김성근 감독이) 고양이와 여생을 보내려 하시다가 장시원 PD의 설득에 합류하게 되셨다'고 언급했다.
-
여든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런닝을 비롯한 각종 맨몸운동으로 나이에 맞지 않은 체력을 유지중에 있으며 수비훈련때도 직접 펑고배트를 휘둘러서 훈련을 진행한다. 최강야구 2024 스프링캠프 훈련영상 보면 선수들이 체력훈련을 위해
재래식맨몸운동중에 뒷편에서 스쿼트, 크런치를 비롯한 맨몸운동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어느 야구 감독들이나 다 그렇지만, 서울특별시 이외 지역 연고팀의 감독을 맡을 경우 자신의 거주지를 연고지로 옮긴다. 다만, 김성근 본인 혼자만 살 집을 마련한다. 과거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에도 구단이 마련해 준 전주시 내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고,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에는 송도국제도시에 홀로 사는 자택이 있었다. 마지막 프로 커리어였던 한화 이글스 감독 재임 때도 대전광역시 내에 따로 집을 마련해서 살았다고 한다. 여러 팀을 전전하며 혼자 살아온 이력이 어마어마하기에 웬만한 살림은 본인이 다 할 정도라고 한다. 물론 부인 오효순 씨가 주기적으로 김성근이 사는 집에 와서 살림을 대신 하고 가며, 시즌이 끝나고 동계훈련 출발 전까지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자택으로 돌아가서 생활한다고 한다. 참고로 성수동 자택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 취임 직후(1990년 12월)에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51]
- SK 감독 시절 올스타전에서 쇼맨쉽으로 몸무게 순으로 라인업을 짜곤 했다. 그 결과 통산 도루 9개인 이대호가 1번 타자 출장, 김동주가 2번 타자 출장. 이종욱, 박기혁같은 주력이 되는 타자들은 7, 8번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이대호는 기대에 부응하여 출루한 후 도루를 시도하다 도루사를 당했다. 다른 건 몰라도 팬들의 기대, 특히 재미만큼은 확실하게 부응했다. 이러한 의외의 예능감은 은퇴 이후 최강야구로 이어지고 있다.
- SSG의 전 단장이자 김성근이 SK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프런트 팀장이었던 류선규가 비야인드에 출연해 밝힌 바에 의하면 술자리에서 술을 굉장히 잘 마신다고 하며, 특이하게도 화장실을 한 번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제일 연장자인 김성근이 화장실을 절대 안 가기에 그 밑 사람들은 화장실을 못 가서 쩔쩔맸다는 후일담을 풀었다. 같이 패널로 출연한 박재홍은 'SK 선수단은 회식 자리를 가지는 날엔 미리 기저귀 하나 차고 와야한다'는 드립을 날리기도.
8.3. 인터넷 밈
- 2011 시즌 종료 후 스토브리그 때 한 LG 트윈스 팬이 김성근 감독의 LG 복귀한다고 터트린 거짓 루머 때문에 야구 팬덤 한정 '포도주스'라는 은어가 생겼다. 자세한 것은 포도주스 문서 내의 해당 항목 참조.
- 근성론 강조, 혹독한 훈련, 선수 혹사 등 특유의 지도 스타일이 야구 팬뿐만 아니라 일반인들한테도 컬트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인터넷상에서 자주 소환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주로 야구 선수가 사건사고를 일으키거나 국가대표팀이나 특정 팀이 부진한 성적을 올리면 사람들이 농담식으로든, 진지한 의견이든, 푸념식이든 지금 이 상황에서는 김성근 감독이 필요하다면서 의견을 제시한다.
8.4. 타 분야의 유사한 지도자
- 야구에 김성근이 있다면 축구에는 주제 무리뉴가 있을 정도로 둘의 운영 스타일이라든가[52] 말하는 스타일이 닮은 편이다. 다만 무리뉴가 김성근보다는 좀 더 엘리트 코스였고 더 많은 클럽을 돌았으며 무엇보다 무리뉴는 선수들과 친밀하게 지내려 노력하는 감독이다.
- 전권을 요구하거나 엄청난 훈련량, 정신력을 중시하고 별의별 이상한 규칙을 만드는 건 축구의 펠릭스 마가트와 공통점으로 꼽힌다. 다만 김성근이 베테랑을 선호하는 것과는 반대로 마가트는 유망주를 선호한다.
- 축구 감독 김호와 상당히 흡사한 점이 많은데 둘 다 과거에는 명장으로 추앙받았으나 대전광역시를 연고지로 한 스포츠단 감독을 맡은 뒤 명장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졌던 어두웠던 이면이 드러나면서 추락했다.
8.5. 징크스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징크스 문서 참고하십시오.8.6. 별명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별명 문서 참고하십시오.8.7. 악성 팬덤
자세한 내용은 노리타(김성근) 문서 참고하십시오.8.8. 발음/말투
김성근의 말투에 녹아 있는 일본식 억양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한국에 수십 년 동안 살았는데도 왜 일본식 발음을 고수하느냐는 것이다. 김성근의 발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김응용 감독 등도 그러한 투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특히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거의 완벽한 억양과 발음으로 우리말을 구사하는 것과 대비되면서 더욱 까였다.[53] 1960년대 실업야구의 대표적인 재일교포 선수였던 배수찬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김영덕 전 감독은 김성근과 같은 교토 출신으로 일본에서 8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친 후 28세에야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반면 김성근은 18세에 동아대에 입학하면서 영구귀국했다.김성근 감독팬들은 그의 일본식 발음의 원인이 고교 야구부 감독 시절 제자 뒤에 서 있다가 제자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54]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해졌고 그래서 더욱 일본어투로 들린다는 것이다. 감독팬들은 이 사건 때문에 김성근의 일본어 발음 역시 다소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 SK 와이번스의 동계훈련을 일본의 어느 TV가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일본어로 말하는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 부분도 자막 처리했다고 하니.
하지만 아래 내용들을 참고할 때, 김성근 감독의 발음이 이가 부러지는 사고 때문에 부정확해지고 일본식 발음으로 들린다는 감독팬들의 주장도 원인의 일부분 정도는 차지하지만, 주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우선 앞서 감독팬들이 주장한 일본 방송 자막은 김성근의 발음이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일본 방송사들은 원래 자막처리 엄청 자주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멀쩡한 일본어 발음에도 자막 처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김성근은 나긋나긋한 교코토바를 구사하기 때문에 일반 일본인이 듣기에도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낄 수 있다.
또 김성근이 방망이에 맞아 이빨이 부러진 사건에 대해 살펴보면, 김성근 본인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고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충암고 시절 김성근의 앞니 세개를 부러뜨린 당사자인 성기완 씨가 2007년 뒤늦게 사연을 공개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사실 성기완 씨는 이빨 부러진 사건만 언급했지 그 사건이 김성근의 말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 김성근 본인도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의 발음이 부정확해졌다고 말한 적은 없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실업야구 시절 술을 많이 마셔서 술집에서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어가 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노리타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야구할 때는 괜찮았는데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힘들었지. 혼자 이불 덮어쓰고 울 때도 많았고 몸이 아플 때 어디서도 도움을 받기 어려웠어.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술을 마셨어. 한국에 들어와 술을 배운거야. 한국말도 술집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었는데 그래서 발음이 아직도 잘 안되나봐." -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5. 반쪽발이로 살아간다는 것
1970년대 후반 KBS라디오 야구 해설을 맡은 적이 있으나 이때도 일본식 발음이 문제가 된 데다 중계 도중 일본어 표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야구 팬들의 항의를 받고 달랑 한 경기 만에 하차하고 말았다.[55][56]
그 외에도 한국에 처음 와서 부산 동아대에 다녔고, 마산에서 정착하다 보니 한국말을 쓸 때 동남 방언이 약간 섞인 모습도 보인다.[57]
사실 언어 발음 습득은 감각의 문제라, 다른 나라에서도 김성근만큼 해당 국가에 오래 살았어도 현지 발음을 완벽히 익히지 못하고 한국식 발음의 영어/일본어를 구사하는 교포들도 부지기수고 반면 몇 년만 살아도 현지인과 비슷해지는 경우도 있는 등 개개인이 타고난 언어 감각에 기대는 바가 커서 김성근이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려는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 어휘력/언어 구사력과 발음은 전혀 다른 영역으로 김영덕이 한국어 발음이 유창한 것은 그냥 김영덕이 언어감각을 타고난 것이다.
김성근의 한국어는 충분히 유창하다. 실제로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 중 정말로 한국어를 배울 의지 자체가 없어서 일이십년 살아도 한국어 몇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김성근은 그런 케이스는 아니기 때문에 그가 일본식 발음을 고집한다,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애초에 김성근의 발음에 약간 일본식 발음이 들리거나 해서 그렇지 선수단 내외에서 의사소통으로 문제가 된 적도 없고, 인터뷰에서나 실생활에서나 자기 할 말을 명확하게 잘 해내기 때문에 사실 문제 삼기엔 어렵다 볼 수 있다.
보통 야구팬들은 발음 개선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마, ~~~ 아닌가 시프요" 등 은 김성근만의 고유 말투로 보고 일종의 캐릭터성으로 잡아 패러디하곤 한다.
최강야구 출연 이후에는 김성근 감독 특유의 발음을 그대로 자막화하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으며, 선수단 대부분이 감독의 발음을 한 번에 못 알아듣기 때문에 가장 익숙한 정근우가 "동시 통역사" 역할을 해주고 있다. 여담으로, 주장 박용택 역시 김성근 감독을 잘 알기 때문에 대변인 역할을 해주면서 그의 발음 문제를 커버해 주고 있다.[58] 정의윤의 별명이 ' 정의용'이 된 이유도, 김문호의 별명이 김문어가 되다 못해 아예 응원가마저 문어의 꿈이 되어 버린 것도 다 이것 때문이다.
9.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84 전기 | OB | 50 | 30 | 20 | 0 | .600 | 2위 | -[59] |
1984 후기 | 50 | 28 | 21 | 1 | .571 | 2위 | ||
1985 전기 | 55 | 29 | 25 | 1 | .537 | 2위 | -[60] | |
1985 후기 | 55 | 22 | 32 | 1 | .409 | 5위 | ||
1986 전기 | 54 | 23 | 29 | 2 | .442 | 5위 | PO 패배[61] | |
1986 후기 | 54 | 33 | 19 | 2 | .635 | 1위 | ||
1987 전기 | 54 | 31 | 22 | 1 | .583 | 2위 | PO 패배[62] | |
1987 후기 | 54 | 24 | 30 | 0 | .444 | 5위 | ||
1988 전기 | 54 | 31 | 23 | 0 | .574 | 3위 | -[63] | |
1988 후기 | 54 | 23 | 29 | 2 | .444 | 5위 | ||
OB 통산 (5시즌) |
534 | 274 | 250 | 10 | .523 |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89 | 태평양 | 120 | 62 | 54 | 4 | .533 | 3위 | 3위[64] |
1990 | 120 | 58 | 59 | 3 | .496 | 5위 | - | |
태평양 통산 (2시즌) |
240 | 120 | 113 | 7 | .515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91 | 삼성 | 126 | 70 | 55 | 1 | .560 | 3위 | 3위[65] |
1992 | 126 | 67 | 57 | 2 | .540 | 4위 | 4위[66] | |
삼성 통산 (2시즌) |
252 | 137 | 112 | 3 | .550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96 | 쌍방울 | 126 | 70 | 54 | 2 | .563 | 2위 | 3위[67] |
1997 | 126 | 71 | 53 | 2 | .571 | 3위 | 3위[68] | |
1998 | 126 | 58 | 66 | 2 | .468 | 6위 | - | |
1999 | 81 | 17 | 59 | 5 | .224 | 중도 경질[69] | - | |
쌍방울 통산 (4시즌) |
459 | 216 | 232 | 11 | .482 |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01 | LG | 98 | 49 | 42 | 7 | .549 | 6위[70] | - |
2002 | 133 | 66 | 61 | 6 | .520 | 4위 | 준우승[71] | |
LG 통산 (2시즌) |
231 | 115 | 103 | 13 | .528 | 준우승 1회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07 | SK | 126 | 73 | 48 | 5 | .603 | 1위 | 우승 |
2008 | 126 | 83 | 43 | 0 | .659 | 1위 | 우승 | |
2009 | 133 | 80 | 47 | 6 | .602 | 2위 | 준우승 | |
2010 | 133 | 84 | 47 | 2 | .632 | 1위 | 우승 | |
2011 | 93 | 52 | 41 | 0 | .559 | 중도 경질[72] | - | |
SK 통산 (5시즌) |
611 | 372 | 232 | 13 | .622 |
우승 3회 준우승 1회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15 | 한화 | 144 | 68 | 76 | 0 | .472 | 6위 | - |
2016 | 132[73] | 64 | 65 | 3 | .496 | 7위 | - | |
2017 | 43 | 18 | 25 | 0 | .419 | 중도 경질[74] | - | |
한화 통산 (3시즌) |
319 | 150 | 166 | 3 | .475 | | ||
KBO 통산 (23시즌) |
2646 | 1384 | 1202 | 60 | .535 |
우승 3회 준우승 2회 |
10. 관련 문서
[1]
선수로서 한국시리즈 최초의 퇴장은
1996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포수
최해식이다.
[A]
공동 2위는 총 16연승으로 1986년
김영덕 감독의
삼성 라이온즈와 2010년
김성근 감독의
SK 와이번스.
[A]
[4]
일본명은
가네바야시 세이콘(かねばやし せいこん, 金林星根, 김림성근). 다만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만 해당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지바 롯데 마린즈 / 소프트뱅크 코치 등 일본에서 지도자로 재임 중이던 시기에도 일본명 대신 한국명인 金星根을 사용했다.
[5]
호적상 생일은 1942년 12월 13일생이다. 이는 삼김 중 하나인
김응용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김응용은 호적상으로는 1941년생이고 실제는 1939년생이다. 반대로 김성근은 호적상으로는 1942년생이고 실제는 1941년생이다. 김성근은 김응용이 사실상 두 살 위임에도 계속 반말을 했는데 이러한 나이상의 오류 문제도 거기에 한몫한 것이 있다.
[6]
#
[7]
1964년
12월에 영주 귀국했다. 일본 출생이긴 하지만
재일교포일 뿐이며 일본 국적을 가진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태어날 때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는 일본 국적이었겠지만 그 이후부터는 평생 한국 국적이었다.
[8]
나이를 먹은 지금은 키가 꽤 줄은 듯하다.
# 영상에서 180cm인
유희관보다 살짝 작은 듯 보이고, 172cm인
정근우보다 더 큰 걸 보면 현재 신장은 175cm~177cm 사이인 듯. 박정진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얼마 전인 한화 시절에는 진짜로 180cm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노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추간판 탈출증 수술 이후 키가 더 줄은 듯하다.
[9]
zum 프로필 기준.
[10]
#
[11]
김성근이 중학교 1학년 때 사망했다.
[12]
김성근이 OB 감독으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던 1986년 4월 6일에 사망했다.
[13]
京都市立四条中學校.
[14]
京都府立桂高等學校.
[15]
60학번. 1학년 2학기 도중에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2011년 동아대로부터 명예 학위를 취득했다.
[16]
최강야구에서 선발 라인업 작성할 때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도
왼손잡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최강야구뿐만 아니라 프로 구단 감독을 할 때도 종종 포착되었으며 이때도 좌타자와 좌투수 기준 포즈를 취하며 시범을 보이거나 펑고를 칠때도 좌타로 친다.
[17]
~4월 15일
[18]
4월 16일~5월 15일
[19]
5월 16일~
[가사]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예예예 예예예 (X7) 예~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21]
2015 시즌 전반기에만 잠시 사용된 응원가인데, 인터넷 방송인
케인을 시작으로 여러 방송인의 방송에서 영상 도네이션으로 활용되면서 다른 의미로 유명해졌다. 김성근 감독 외에도
선동열 전
KIA 타이거즈 감독,
카를로스 수베로 전
한화 이글스 감독도 전용 응원가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문서 참고.
[22]
은퇴기사
[23]
1970년대와 2000년대의 반일감정 차이를 고려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1970년대는
왜색이 진하다는 이유로 모든 일본 매체의 수입이 금지되던 시절이었고,
백인천의 요시는 2000년대
이승엽이 출전하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중계방송에서 나온다.
[24]
하지만 무턱대고 체중을 감량해 버리는것도 좋지 않은게, 그 선수의 신체 피지컬이나 밸런스 등이 한번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메이져리그의 사바시아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물론 둘 다 비시즌에 감량을 엄청 하는 편이지만, 시즌 중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다시 살이 찌기 때문에 관리 차원에서 비시즌에 빼는 것이다.
[25]
나지완 타석 때, 자신이 감독으로 있어서 통한의 준우승을 당했던 2009년 한국시리즈 끝내기를
SBS Sports에서 틀어 버렸다. 중계를 보던 야구팬들은 단체로 빵 터졌다.
[26]
이때 김성근은 이미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다.
[27]
선두타자
김창열에게 기습번트를 맞고 출루를 허용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본 다른 천무단 선수들은
김창열에게 '왜 그랬냐'고 투정을 부렸다.
[28]
수원야구장 으로 추정된다.
[29]
한때 음치가수 컨셉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재수가 이 광고를 패러디하였는데 패러디에서 나온 꼬마 이름에
이만수 감독의 이름을 갖다붙여서 디스하였다.
[30]
백구, 선수들은 바다를 건넜다.
[31]
정근우와 같이 나오며 설날 선물을 서로 교환하는 내용이다.
[32]
김인식, 손윤, 유효상 공동 저자.
[33]
김운경, 이영만, 김봉석, 권태호 등 공동 저자.
[34]
KBO 리그 감독 누적 승수 2위.
[35]
올드스쿨 스몰볼 스타일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야구, 투수 혹사 등 여러가지 면에서 올드스쿨 KBO 리그의 전형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36]
사실 선임 자체가 잘못된 게, 김성근은 리빌딩에 적합한 인물이 절대 아니고 윈나우형 감독이다. 차라리 리빌딩 면으로만 보자면 똑같이 투수 혹사를 미친 듯이 하는
김경문 쪽이 훨씬 우수하다.
[37]
前 태평양 돌핀스 외야수.
[38]
광주일고 출신으로 1995년 해태 고졸연고지명으로 입단했다. 1군 출전 기록은 없었고, 2001년 은퇴했다.
[39]
前 베어스, 쌍방울 투수. 양주리틀 야구단 감독을 역임했다.
[40]
現 성남시 대원중학교 야구부 감독. 대표적인 제자로는 윤동희, 김하성 등이 있다.
[41]
베어스 초대 단장.
[42]
재일교포 선수로, 학다리
신경식의 방위병 입대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선수였다. 다만 수비에서 약점을 드러내어 박종훈과 교대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43]
1986년 플레이오프 향방이 결정되는 게임이었다.
[44]
前 쌍방울 레이더스 투수, 現 전남여수중학교 감독.
[45]
목포 영흥고 출신,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로 뛴 후 타이거즈에서 오랫동안 프런트를 역임했다. 現 KT 위즈 운영팀장.
[46]
現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감독.
[47]
이북 황해도 출신인 김동엽 감독이 38번을 달게 된 이유는 한국전쟁 시절 38선을 월남해서 남한에 정착했다는 이유로 달게 된 등번호라고 한다. 자세한 건
김동엽 항목 참조.
[48]
우연의 일치로 동명이인인 1990년생 삼성 외야수
김동엽도 등번호 38번을 달고 있다.
[49]
물론, 상의는 최강야구의 트레이닝 유니폼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저 후드티를 입은게 김성근 감독말고 없다.
[50]
KBS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피서를 갔냐는 질문에 1978년이라고 대답하면서 이제는 야구장이 피서지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51]
1999년 10월에 한 번 압류된 적도 있었으나 다시 되찾았다.
[52]
무리뉴는
첼시 FC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게 전권을 요구했고 김성근 역시
한화 이글스 감독을 할 때 전권을 요구했다. 또한 주전 혹사도 심하다.
[53]
단, 말년에는 연로한 탓에 일본어투도 많이 느껴지고 말 자체도 어눌해졌다.
[54]
이때 선수들을 모아놓고 '내가 한눈을 팔아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라'라고 훈계를 한 뒤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55]
이후 김성근의 후임
해설자가 바로
하일성.
[56]
타자가 가라스윙(헛스윙)를 했어요, 바깥쪽 직구가 이빠이(꽉차게) 들어왔어요 등의 표현을 2000년대 이후까지도 썼다고 한다.
[57]
그의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다.
[58]
박용택의 발음 자체가 워낙 또렷하고 좋은 편이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의 말을 대변해 주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특타 1번이 되었다고.
[59]
정규리그 통합 승률로는 1위이나,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쳤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최종 순위 3위.
[60]
이 해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 리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해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아 정규 리그 통합 승률대로 최종 순위가 결정됐다. 최종 순위 4위.
[61]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최종 순위는 정규 리그 통합 승률과 같은 4위이다. 당시
MBC 청룡이 OB보다 통합 승률이 더 높아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음에도 최종 순위는 3위로 더 높다.
[62]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최종 순위는 정규 리그 통합 승률과 같은 4위이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가 OB보다 통합 승률이 더 높아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음에도 최종 순위는 3위로 더 높다.
[63]
최종 순위는 정규 리그 통합 승률과 같은 5위이다.
[64]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
[65]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패배.
[66]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배.
[67]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 패배. 당시
KBO 포스트시즌 사상 처음으로
리버스 스윕을 당했다.
[68]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했으나 삼성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최종 3위.
[69]
경질 당시 8위. 시즌 종료 후 쌍방울은 김성근 경질 당시와 똑같은 0.224의 승률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70]
이광은 감독 경질 후 중도 부임.
[71]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를 통과한 것이 이 해의 일이다.
[72]
경질 당시 3위. 이 시즌 SK는 정규리그를 김성근 경질 당시와 같은 3위로 마무리했으며, 준PO와 PO에서 모두 승리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으나 삼성에 패배해 최종 순위 2위로 시즌을 마쳤다.
[73]
허리 디스크 수술로 인해 12경기는
김광수 대행 체제로 치러졌다.
[74]
경질 당시 9위. 이 시즌 한화는 최종 순위 8위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