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5:13:58

최창호(야구선수)

최창호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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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 로고(세로형, 2013~2021).svg KBO 포스트시즌
1996 플레이오프 MVP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31번
김주현
(1986)
최창호
(1987~1998.7.31.)
박종호
(1998.8.1.~2003)
LG 트윈스 등번호 67번
박종호
(1992~1998.7.31.)
<colbgcolor=#000><colcolor=#fff> 최창호
(1998.8.1.~1999)
김동호
(2000~2003)
LG 트윈스 등번호 13번
김동호
(1998~1999)
최창호
(2000~2002)
박경수
(2003~2004)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7번
장채근
(2008)
최창호
(2011)
박승민
(2014~2018)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71번
조규제
(2009~2010)
최창호
(2012~2013)
류영수
(2014~2015)
SK 와이번스 / SSG 랜더스 등번호 79번
한혁수
(2012~2013)
최창호
(2014~2021)
채병용
(2022~2023)
}}} ||
파일:최창호2021.jpg
최창호
崔敞皓 | Choi Changho
출생 1966년 11월 8일 ([age(1966-11-08)]세)
경상남도 밀양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구옥산초 - 대구중 - 경북고
신체 174cm, 71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6년 연습생 ( 청보)
1987년 2차 3라운드 ( 청보)[1]
소속팀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1987~1998)
LG 트윈스 (1998~2002)
지도자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3~2006)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8~2009)
대전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9~2010)
넥센 히어로즈 2군 재활코치 (2011)
넥센 히어로즈 2군 투수코치 (2012~2013)
SK 와이번스 루키군 투수코치 (2014)
SK 와이번스 루키군 재활코치 (2015~2016)
SK 와이번스 루키군 책임·투수코치 (2017~2019)
SK 와이번스 PDA 투수코치 (2020)[2]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20)[3]
SSG 랜더스 2군 투수코치 (2021)
제물포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22)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피칭 스타일5. 연도별 주요 성적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LG 트윈스 소속의 투수.

삼청태현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 중 한명으로 정명원, 김경기 등과 함께 태평양 돌핀스를 상징하는 선수이다.[4]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경상남도 밀양시 출신으로 대구옥산초, 대구중을 거쳐 야구 명문인 경북고를 졸업했지만 이 당시는 경북고의 침체기로,[5] 작은체구에 고교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대학 진학은 힘들었고 몇몇 실업 팀 입단을 타진해 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던 최창호는 최약체 청보 핀토스 연습생으로 들어간다. 이 때 대구광역시를 떠나 인천광역시라는 먼 타향으로 가는 아들을 온 가족이 따라나섰고, 아버지는 숭의야구장 앞에 '홈런 슈퍼'라는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가게 옥상에서 벌을 기르고 꿀을 모아 최창호를 돌보았다. 최창호의 부친 최영규 옹

2.2.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punctum_287885_46%5B617926%5D.jpg

1986년 청보 핀토스 연습생으로 입단한 후 가능성을 인정받아 1987년 청보 핀토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으며 정식 선수가 됐다. 참고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종종 연습생으로 입단한 선수들을 신인 지명에서 다시 지명하는 일이 있었다. 김상진 조웅천도 그러한 케이스.

87년 청보 핀토스에서 데뷔했지만, 바로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2년동안 23.1에 8점대라는 평균자책점을 거두며 그다지 두각을 발휘하지 못했다. 88년 시즌종료 후 89년 전역하지만 군복무 중이라 단체 마무리 훈련을 따라가지 못하는 최계훈을 위해 제물포고에서 박상열 코치를 파견해 몇달간 개인레슨을 했는데, 군복무중이였던 최창호도 여기에 따라가게 되고 이것이 득이되어 몸에 밸런스를 찾게 되어 1989년에 1월 군전역 후 단체 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좌완투수라는 이점과, 그의 작은 키로 인한 낮은 릴리즈 포인트와, 거기서 나오는 최고구속 139km/h의 속구라는 넌센스한 조합으로 그리고 역동적인 특이한 투구폼으로 인한 디셉션까지 합쳐지며 상대 타자들에게 위협적인 투구를 했다.

커리어 하이 시즌이라고 볼 수 있는 1989년 시즌 최종 성적은 223⅓이닝 10승 14패 평균자책점 2.22. WAR은 무려 7.28이었으며 그 해 선동열과 같은 팀의 박정현에 이어 평균자책점 3위. 탈삼진은 선동열에 이어 7개차로 191개로 2위를 차지하여 " 닥터 K"의 위명을 얻게 된다. 그 해 리그 3위인 평균자책점 2.22를 기록했음에도 무려 14패나 먹은 것은 당시 태평양 돌핀스의 빈약한 개노답 타선 때문에 승운이 유독 없던 투수기도 했다.[6] 그 후 1990년 196이닝, 1991년에는 233⅓이닝을 던져 리그 최다이닝 1위에 올랐고, 승수 역시 15승을 거두면서 개인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올렸다. 이후로도 별 일이 없다면 이닝 잘 먹어 주고 10승과 ERA 2점대 후반 정도의 성적을 올려주는 투수로 태평양 돌핀스 마운드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89년~91년 연평균 218이닝씩 던지는 혹사를 당했고 단신에다가 그것을 커버하기 위한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인해 92년도에는 부상으로 재활에 몰두하게 되면서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태평양 돌핀스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팀명이 변경된 첫 해인 1996년에는 컷 패스트볼을 장착하며 선발로 부활해 규정이닝을 채웠으나 8승 9패에 그쳤고, 이것의 그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1997년과 1998년에는 잘 따라가던 후배 안병원과 다시 무너지면서 이후 다시 하향세를 보였다. 팔꿈치 부상도 있었지만, 앞에서 말한 작은 체구와 그 특이한 투구 폼 때문에 생긴 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가는 투구 폼이다 보니... 최창호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투구 폼을 무턱대고 따라하지 마라고 말했다.

2.3. LG 트윈스

1998년, 현대 유니콘스는 정규 리그 1위를 질주하면서도 확실하게 우승을 노릴 겸 드림팀을 만들기 위해, 당시 팀 내 유일의 약점이던 2루수 자리를 보강하고자 했다.[7] 결국 투수진 보강을 노리던 LG 트윈스와 내야수를 찾던 현대 유니콘스의 이해관계에 따라 트레이드 마감 시한이던 1998년 7월 31일 박종호를 상대로 LG 트윈스에 트레이드됐다. 다들 알다시피 박종호는 이후 현대의 주전 2루수로 박진만과의 환상적인 키스톤 콤비를 이루면서 현대 왕조의 주역이 되었고, 반면 LG로 넘어간 최창호는 부진하다가 은퇴했다 보니 이 트레이드는 현대의 승리가 되었다.

그런데 1998년 한국시리즈는 하필이면 현대 유니콘스와 LG 트윈스가 맞붙었고, 그는 결국 염원해오던 인천 연고 야구팀의 첫 우승을 반대편 덕아웃에서 쓸쓸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당시 현대 주장이자 투수진의 맏형이던 정명원은 우승한 후 우승 인터뷰 소감에서 울컥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같이 동고동락해왔던 창호, 정현이가[8] 이 자리에 없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는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삼총사의 이 서로 간의 우애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이 '태평양 짠물 트리오'는 인천 야구팬들에게 상당히 큰 그리움과 추억이어서, 아무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9]

최창호는 훗날 은퇴한 후 2006년에 이뤄진 한 인터뷰에서 "당황스러웠다. 나는 저쪽 팀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게 된 걸까 싶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진 상황이 너무나도 화가 나더라"라고 당시 현대 유니콘스에 섭섭했음을 회고하기도 했다.[10]

LG 트윈스 입단 후에는 아래의 통산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트레이드 첫 해에만 후반기와 포스트시즌에서 쏠쏠한 모습을 보인 것을 제외하고는 에이징 커브의 여파를 제대로 맞으며 만 신나게 질렀다. 거기에 반대급부 카드로 현대에 넘어간 박종호가 1999년도에 데뷔 첫 3할 타율을 친 것도 모자라 2000년도에는 타격왕+골든글러브+올림픽 국가대표 발탁이라는 커리어하이를 달성했고, 동시에 현대에서 3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LG는 말 그대로 이듬해 트레이드 시킨 임선동 사건까지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상황.[11][12]

결국 부진 끝에, 통산 500경기를 찍은 2002 시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스승인 김성근이 말렸으나, 본인의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은퇴 수순을 밟는다.

선수 시절 우승 경력은 없고 준우승 경력은 1994년(태평양), 1996년(현대), 1998년(LG)로 콩라인 가입되었다.[13] 지못미.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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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2003년부터 모교인 경북고등학교의 투수코치를 시작으로 이후 성균관대학교, 대전고등학교에서 투수코치를 맡으면서 아마야구계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동시에 가끔씩 사회인 야구에서 뛰면서 나이 풀린 선수출신(40세 제한)으로 130km/h에 가까운 직구와 120km/h에 가까운 스플리터를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초이볼'이라는 야구 관련 사업을 하면서 간간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야구 교실을 여는 등 야구계 업종에서 활동했다고 한다.사업은 그리 잘 되지만은 못했는 듯. 그래도 변화구를 많이 던질 수 없는 아마추어 투수들을 위한 손목 강화용 운동기구를 개발하여 특허를 출원했다고 한다. 출처

2010년 11월 2일 친정팀의 후신격이라고 할 수 있는 넥센 히어로즈가 최창호를 코치로 영입하며 지도자로 프로야구계에 돌아오게 되었다. 보직은 2군 투수코치. 머나먼 강진군에서 투수코치 생활을 하던 정명원이 말동무나 할려고 친구 최창호를 불렀다는 소리가 있다. 2011 시즌이 끝나고 정명원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로 떠나면서 2012년부터는 최창호 혼자 2군 투수진의 육성을 떠맏게 되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평가는 미묘한 상황.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층이 말 그대로 처참하게 무너지면서[14] 지도자로써의 평가가 급락했다. 이는 2013 시즌까지도 마찬가지, 2군에서 성장해서 1군에 올라오는 투수가 전무한 현실이다.[15]

2013 시즌이 종료하고 SK 와이번스의 러브콜을 받아 인천으로 간만에 환송을 하여, 3군 투수코치로 옮겼다. SK, 신규 코치 영입 포함 코칭스태프 보직 확정

2017 시즌 루키 책임 및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9년 본인이 키워보겠다고 했던 이케빈이 고질적인 문제였던 제구를 어느 정도 잡고 SK 입단 1년도 안되어 1군에 선발로 데뷔에 성공하자 평가가 올라갔다.

드디어 1군 코치 승격을 2020년 8월 3일, 5연패에 빠진 SK의 코칭스태프 교체 방침에 따라 기존 1군 투수코치였던 최상덕과 보직을 맞바꿔 1군 투수코치로 올라왔다. 2021년 2군 투수코치로 다시 보직을 이동했다. 2021 시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으면서 팀을 떠났다.

SSG를 떠난 이후 2022년에는 제물포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부임하여 1년간 선수들을 지도 하였다.

4. 피칭 스타일

파일:최창호_투구폼.gif
현역시절 투구폼

전성기 시절 최고 139km/h 직구와 주로 커브를 던지는 파워피쳐였다.
키는 174cm으로 야구 선수로선 상당히 작았다.[16] 투구폼이 역동적이 였는데, 투구동작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중간에 한번 끊어져 디셉션이 좋아 커리어 하이때는 엄청난 탈삼진율을 보여줬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ab93d>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1986 청보- 태평양- 현대 1군 기록 없음
1987 8 16⅔ 0 1 0 0 0.000 7.56 6 4 3
1988 3 6⅔ 0 1 0 0 0.000 8.10 25 10 8
1989 38
(5위)
223⅓
(4위)
10 14 2 0 0.417 2.22
(3위)
169 117 191
(2위)
1990 40 196⅔
(2위)
9 9 5 0 0.500 3.20 162 94 158
(3위)
1991 45
(4위)
233⅓
(1위)
15
(5위)
11 3 0 0.577 2.93 196 92 163
(3위)
1992 19 97⅔ 3 9 2 0 0.250 3.87 92 57 70
1993 24 162⅓ 7 12 0 0 0.368 2.99 134 55 104
1994 27 147⅓ 12 11 1 0 0.522 4.09 141 64 84
1995 8 27⅓ 0 4 0 0 0.000 7.24 30 20 11
1996 36 140⅓ 8 9 0 0 0.471 3.85 117 66 97
1997 48 110 7 10 1 0 0.412 5.24 102 39 67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1998 현대 / LG 63
(4위)
46 3 0 1 0 1.000 3.13 45 21 26
1999 LG 50 26⅓ 1 2 0 0 0.333 5.81 29 20 24
2000 28 9⅓ 0 0 0 5 0.000 10.61 14 10 7
2001 54 35⅓ 2 1 0 6 0.667 5.86 43 12 25
2002 19 12 0 0 0 2 0.000 6.75 13 10 11
KBO 통산
(15시즌)
510 1490⅔ 77 94 15 13 0.450 3.66 1314 692 1048

6. 여담

  • 파일:태평양_삼총사.jpg
    박정현, 정명원과 같이 '태평양 삼총사'라고 불리웠으며 그 셋의 친분도 굉장히 강했다 한다. 참고로 정명원과는 동갑, 박정현은 그들보다 3살이 어리다. 더불어 정명원은 189cm의 거한이었고, 박정현도 192cm의 깡마른 장신이어서, 머리 하나가 차이 나는 174cm인 최창호가 그 둘과 같이 다니면 리얼 '키다리와 땅딸보'를 보는 듯 하였다 한다. 그 세 명은 1989년과 1991년에 같이 동반 활약하며, 태평양 투수 삼총사의 명성을 드높였다.
  • 문제의 태평양 데이 때 SK 와이번스의 시구자로도 나섰다. 1년 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족보 문제에 대해 “원조를 굳이 꼽자면, 아니 팀 모태를 보면 히어로즈로 볼 수 있죠. 하지만 워낙 복잡미묘한 문제라서 단언할 수는 없어요. 단, 분명한 것은 현재의 상황입니다. SK가 지금 인천 야구를 대표하잖아요. 히어로즈를 인정하되, SK를 믿고 사랑하는 것도 팬들의 몫이 아닌가 싶어요.” 라는 말을 하였다. 이 부분은 삼청태현 문서 참조.
  • 부친이 대구에서 부터 양봉업을 하셨는데, 최창호가 태평양에 입단하자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인천으로 이사했지만 양봉업을 접지않고 숭의야구장 앞에 '홈런슈퍼'라는 구멍가게를 차리고 옥상에서 양봉을 했다. 특히나 대구에서 부터 벌침으로 유명해서 현역시절 내내 아버님이 선수단에 찾아와 직접 벌침을 놔줬다. 처음에는 구단 트레이너들이 기겁을 하고 말렸지만 나중엔 효과가 너무 좋아 김성근 감독이 직접 요청할 정도였다. 박정현,정명원등이 허리 통증으로 신음할때 최창호 아버지의 벌침을 맞으면 빠르게 풀렸다고 회고할 정도이다. 최창호 본인도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근육통이 자주왔는데 빠르게 회복할 수 있던 이유가 아버지의 벌침이라고 했다. 오죽하면 89년도 태평양 돌풍의 주역중 하나가 최창호 선수의 부친이라고 할정도였다.
  • 김은식 작가는 SK의 원조 에이스였던 이승호를 보면 최창호가 떠오른다고 SNS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김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적자면 신인 때부터 강속구와 커브로 리그를 뒤흔든 선한 눈매를 지닌 단신의 좌완 투수라는에서 최창호가 떠오른다고. 그러나 닮았지만 조금 더 가파른 이승호의 내리막길이 안타깝다는 말도 했다.
  • 친동생인 최승호도 경북고등학교를 나와 태평양에 입단한 야구선수였으나,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은퇴. 현재는 평범한 회사원이라 한다.
  • 심수창과 함께 한 이닝 최다 투구수 2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90년 4월 21일 삼성전의 7회에서 기록한 59개. 심수창은 LG 시절이던 2006년 8월 23일 두산전 1회에 기록하였다.[17] 이후 앤더슨 프랑코가 2021년 4월 17일 삼성전 1회에 61개를 던지며 이 부문 1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제자인 SK 투수들의 평가에 의하면 견자단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한다.
  • 1990년 9월 3일, 인천 도원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 KBO 최초이자 역사상 단 두 번뿐인 세 타자 연속 볼넷 후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였다.[19]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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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년 2차 3라운드 정식 지명을 받고 정식선수로 전환되었다. [2] ~8월 2일 [3] 8월 3일~ [4] 통산 성적은 77승 94패 15세이브 1,540⅔이닝 1,048탈삼진 평균자책점 3.54. 이와 같은 훌륭한 통산 평균자책점으로 통산 승이 통산 패를 넘기는가 하면 통산 77승[20]밖에 못한 이유는 그가 전성기를 무지막지한 물타선을 자랑하던 태평양 돌핀스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5] 70년대 부터 중화학 공업위주로 바뀌며 섬유 등 경공업 위주의 산업이 많던 대구는 직격탄을 입고 인구유입이 줄기 시작했고, 대구상고,대구고 등 주변학교의 성장으로 전국대회에서 4강이상의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 [6] 4월한달간 2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는데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7] 원래 1998 시즌 전 OB 베어스에서 방출된 베테랑 내야수 이명수를 영입해와 시즌 내내 주전 2루수로 기용했지만 그도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베테랑이었기 때문에 이명수의 노쇠화를 대비해 미래에 2루수를 봐야 할 자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명수는 1998년 한 해만 2루수를 보다가 박종호가 트레이드로 들어온 뒤 이듬해부터 주전 2루수 자리를 박종호에게 내주고 1루수나 지명타자로 자리를 옮겼다. [8] 박정현은 당시 재기불능 판정을 받고 조규제를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었다. [9] 과거 야구장에 많이 들었던 도원아재들도 회고하기에 인정하는 추억이 있다고 한다. [10] 초창기 1980년대 프로야구 및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프로에 지명되는 팀 선수에게 있어서는 친정이자 보금자리였던 곳이였다. 승승장구 하던 팀들은 항상 앞도 뒤도 가리지 않고 선수들에게 저런식으로 트레이드를 했었으니 선수들이건 코치들이건 섭섭하고 눈물이 나는 건 매한가지다. 특히, 트레이드로 떠나면서 팀의 기둥을 잃었던 2명 최동원 김시진은 옮긴 팀에 사그라지지 못하고 씁쓸하게 떠났다. [11] 조금 재밌는 부분이라면 후배 투수 안병원도 선배 최창호처럼 LG로 가서 거하게 불만 지르다 은퇴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기엔 뭐하고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있으나 당시에는 패전처리로 올라오면서 방어율도 4점대라 좋지 않았다. LG도 꽤 투수 보는 눈이 없는거 같다. [12] 신국환만 바라보고 박종호를 내준 LG는 2013년 손주인이 오기 전까지 2루수 잔혹사에 시달렸다. [13] 2002년 한국시리즈 때는 소속팀 LG가 준우승을 했으나 최창호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14] 이건 또 문제가 있는데 그놈의 김시진 소위의 쓸놈쓸 및 쓸만하다고 판단 된 유망주 및 1군 투수들을 팔아 버리는 팀의 사장 이장석 때문에 제대로 못 한듯. [15] 하지만 여기에 반론을 제시하자면,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팜이 무너지게 된 또다른 이유는 과거 현대 시절 연고지 문제로 인해 2003년부터 해체 전까지 무려 6년동안(거기에 2007년 신인지명에는 1차 지명권이 2장이라 사실상 7명을 날려먹었다) 무연고지 상황에 처해 1차 지명을 할 수가 없었고, 이는 히어로즈 창단 초기 2군팜 황폐화의 주 원인이기도 했다. 거기에 그나마 있던 유망주들도 1군 감독이던 김시진의 특유의 쓸놈쓸로 인해 2군에만 박아두고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죄다 타팀으로 이적해 포텐이 터지는 등( 전유수, 임창민, 이태양이 해당된다) 무조건 최창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상황. [16] 이마저도 프로필상 174cm이며 실제 키는 이보다도 더 작을 거라는 예상이 대부분이다. [17] 참고로 4위는 허프 장원삼의 58개. [18] 풍산개인데, '강화도 비룡'의 약자. [19] 두 번째는 2022년 9월 24일 KIA 타이거즈 이의리가 기록.


[20] 통산 1500이닝 이상을 소화한 투수들 중 가장 적은 승수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