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5:38:43

백인천

백인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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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 타격상 수상자 (창설~2000년)
2001년 이후 수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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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1959 1960
이영민 타격상 제정 김동주
경남고
백인천
경동고
최관수
동산고
1961 1962 1963 1964 1965
조정일
성동고
정인성
살레시오고
이철화
부산고
김영생
대구상고
이광환
중앙고
1966 1967 1968 1969 1970
박용해
대구상고
오영복
대전고
김영신
대구상고
전장헌
선린상고
신중국
부산고
1971 1972 1973 1974 1975
정현발
경북고
정순명
충암고
김일권
군산상고
박명선
인천고
이효헌
마산상고
1976 1977 1978 1979 1980
임정면
마산상고
이만수
대구상고
김남수
신일고
김이수
부산상고
김건우
선린상고
1981 1982 1983 1984 1985
구윤
경북고
김성범
포철공고
한경수
군산상고
주은현
광주일고
김경기
인천고
1986 1987 1988 1989 1990
김현철
경북고
김훈
경남상고
곽상선
군산상고
정진식
경남고
강준기
공주고
1991 1992 1993 1994 1995
강혁
신일고
노상진
배명고
조현
신일고
김건덕
경남상고
박현철
광주일고
1996 1997 1998 1999 2000
박진형
경동고
신민기
경남고
백정훈
광주상고
수상자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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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eiwjnFKre1sqk8veo7_r1_540_2.jpg 1959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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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NPB 퍼시픽리그 수위타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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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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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KBO 리그 베스트 10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82 KBO 리그 타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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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KBO 리그 출루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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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올스타 4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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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2위 3위 4위
선동열 최동원 이종범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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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24위 25위
박철순 이만수 백인천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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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위 32위 33위 35위
이상훈 박정태 니퍼트 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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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20위 28위 31위
장효조 김시진 한대화 김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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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위 13위 18위 26위
이강철 정민철 정민태 조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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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위 17위 23위 36위
김태균 박재홍 박경완 홍성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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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위 37위 38위 39위
전준호 이순철 정근우 박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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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15위 19위 22위
양준혁 박용택 이병규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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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29위 30위 40위
장종훈 김동주 심정수 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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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8위 16위 21위
송진우 구대성 김용수 임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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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순위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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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기록
단일 시즌 최고 타율 0.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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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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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0> 초대 2대 3대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감독 대행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감독 대행
한동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김동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어우홍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1985)
<rowcolor=#ff0> 4대 5대 6대 7대
김동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1987)
감독 대행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1988)
배성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1991)
<rowcolor=#fff> 8대 9대 10대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6)
감독 대행
천보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
천보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1999)
이광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0~2001)
감독 대행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rowcolor=#fff> 11대 12대 13대 14대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이순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06)
감독 대행
양승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
김재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2009)
<rowcolor=#fff>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박종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2011)
김기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2~2014)
양상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2017)
류중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8~2020)
류지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2022)
<rowcolor=#fff> 20대 파일:LG 트윈스 워드마크.svg
염경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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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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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ecd00> 1대 2대 3대 4대 5대
서영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박영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1988)
정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1990)
<rowcolor=#fff> 6대
7대
8대 9대 10대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1992)
우용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3~1995)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1997)
서정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8~1999)
<rowcolor=#fff>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김한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7~2019)
허삼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0~2022)
<rowcolor=#fff> 15대 16대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svg
감독대행
박진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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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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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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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ed1c24> 초대 2대 3대 4대
박영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감독 대행
강병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강병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1986)
성기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
어우홍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1989)
<rowcolor=#ed1c24> 5대
6대
7대
김진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
감독 대행
도위창 파일:일본 국기.svg
(1990)
강병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1993)
김용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1998)
감독 대행
김명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8)
<rowcolor=#000> 8대 9대
10대
김명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2001)
감독 대행
우용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우용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
감독 대행
김용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2003)
<rowcolor=#fff> 10대 11대 12대 13대 14대
감독 대행
김용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양상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05)
강병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2007)
로이스터 파일:미국 국기.svg
(2008~2010)
양승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1~2012)
<rowcolor=#fff> 15대 16대
17대
18대
김시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3~2014)
이종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5)
조원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6~2018)
양상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감독 대행
공필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rowcolor=#fff> 19대
20대
21대 파일:롯데 자이언츠 워드마크.svg
허문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0~2021)
서튼 파일:미국 국기.svg
(2021~2023)
감독 대행
이종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김태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4~ )
}}}}}}}}} ||

{{{#ffff00 [[MBC 청룡|MBC 청룡]] 등번호 2번}}}
팀 창단 백인천
(1982~1983.6.29.)
최정기
(1984~1986)
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2번
결번 백인천
(1983.6.30.~1984)
김호근
(1985)
LG 트윈스 등번호 2번
양현기
(1987~1989)
백인천
(1990~1991)
김동수
(1992~199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0번
양일환
(1990~1995)
백인천
(1996)
오오시오
(2006~200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
정순명
(1996)
백인천
(1997)
장호연
(1998~200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90번
김용희
(1994~1998)
백인천
(2002)
이명진
(2013)
{{{#ffffff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1번}}}
손민한
(1997)
백인천
(2002~2003)
이철성
(2007~2009)
}}} ||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1062200292_0.jpg
백인천
白仁天 | Baek In-Cheon
출생 1942년 9월 27일[4] ([age(1942-09-27)]세)
중화민국 난징시[5]
거주지 충청남도 천안시
학력 경동고등학교
포지션 포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62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토에이)
1982년 MBC 청룡 창단멤버 겸 감독
소속팀 농협 야구단 (1961)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6] (1962~1974)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1975~1976)
롯데 오리온즈 (1977~1980)
킨테츠 버팔로즈 (1981)
MBC 청룡 (1982)
삼미 슈퍼스타즈 (1983~1984)
지도자 MBC 청룡 감독 (1982~1983)
삼미 슈퍼스타즈 플레잉 코치 (1983~1984)
LG 트윈스 감독 (1990~1991)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6~1997)
연세대학교 야구부 타격 인스트럭터 (1998)
한화 이글스 타격 인스트럭터 (1999)
삼성 라이온즈 타격 인스트럭터 (2000)
한화 이글스 타격 인스트럭터 (2001)
SK 와이번스 타격 인스트럭터 (2002)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02~2003)[7]
해설위원 SBS / SBS Sports 야구 해설위원 (1999~2001 / 2006~2010[8])
tvN 코나미컵 해설위원
경력 KBO 원로자문위원 (2007)
병역 중앙정보부 대체복무(첩보원)
종교 불교 개신교( 예장통합)[9]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NPB 해설자 경력5. 그 이후6. 평가7. 기타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선수이자 야구 감독.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선수 겸 감독을 맡은 인물.[10] 오랜 기간 SBS Sports 일본프로야구 담당 해설자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 외야수.

2. 선수 경력

백인천의 선수 경력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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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선수 경력: 백인천/선수 경력
파일:NPB 로고.svg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아마추어 시절
}}}}}}}}} ||

3.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백인천/지도자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백인천/지도자 경력/롯데 자이언츠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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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NPB 해설자 경력


NPB 해설위원 시절에는 야구판 예송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2006년, SBS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영입되었는데, NPB(일본 프로야구) 전담 해설위원이 되어 2010년까지 활동했다. 자신의 수제자 이승엽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르며, 캐스터와 함께 대놓고 승빠 기질을 보였다.

다만 해설위원으로서의 역량은 NPB에서 20년 가까이 현역으로 뛰었으니만큼 한국에서 가장 NPB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장점만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단점. 처참한 한국어 발음(+웅얼웅얼한 말투)과 흥분하면 튀어나오는 일본어 때문에 제대로 된 중계가 힘들 지경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요시!"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 "스고이!" 특히 그란도 시즌 반말 때문에 해설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당시 같이 중계를 맡았던 임용수 캐스터조차 ' 요시 그란도 시즌'에 대한 질문을 받자 "백인천 위원님이 오랫동안 일본 생활을 하셔서 일본식 어투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아요."라고 답변하였다. 바로 옆에 있는 캐스터조차도 대관절 뭔 소린지 도통 모르겠는 마당에 하물며 시청자는... 게다가 이승엽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해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거의 없어졌다.

그의 명대사(?)인 요시 그란도 시즌 야갤을 시작으로 많은 곳에서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실제 발언은 '요시! 그란도 시즌!'이 아니라 '역시! 하나둘셋이야!'라는 주장이 나왔고, 모든 야구 사이트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해설자 백인천은 한국어 발음도 부정확했고 바로 옆에 있는 캐스터도 이해하기 힘든 자신만의 일본식 표현을 쓰곤 했는데, 그로 인해 나타난 해프닝이다. 무엇이 정답인가는 본인이 직접 진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5. 그 이후

2010년 8월 20일, 일간스포츠 이대호는 날 미워할지도 모르겠다라는 기사가 떴다. 내용인 즉, 이대호는 사직구장에서 쪼그려뛰기 같은 걸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는 것. 때문에 가뜩이나 폭염주의보가 내려 더워 죽겠는 와중에 백주 대낮부터 롯데빠들의 혈압을 제대로 올리고 있다. 그래도 당사자 이대호는 "전혀 미워하지 않는다. 분명 나를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시킨 훈련이었다."라는 내용의 마음 넓은 인터뷰를 했다.[11][12]

2010년 6월부터 일구회 산하의 은퇴선수 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2012년에는 한일유소년야구육성기금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뇌출혈 후유증 예방운동을 전개 중. 동시에 동아일보에서 회고 인터뷰도 했고 김영덕, 박영길 감독과 삼자 인터뷰로 프로야구 30년을 회고했다.

2013년 7월 29일, 정재승 KAIST 교수와 58명의 공동 저자가 함께 집필한 과학 논문인 <백인천 프로젝트>가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되었는데, 백인천 본인이 직접 책 추천사를 썼다. # 논문의 내용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로 모여 한국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분석했으며, 스티븐 제이 굴드의 가설이 한국프로야구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검토했다고 한다. 본인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4할 타자인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상징성을 갖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공동저자로 참여했던 천관율 시사IN 기자는 본인이 롯데 팬이라 프로젝트 이름을 처음 듣고 기겁했다고 한다.

2014년 12월 5일,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의 날' 시상식에 참여한 뒤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과 관련해 프런트는 성적을 이유로 감독을 경질하기보다는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 발언을 접한 팬들은 ' 말이야 확실히 맞는 말이지만 백골퍼 입에서 나올 말은 절대로 아닌 듯', '그래서 믿고 맡겼더니 8888 찍냐' 등의 실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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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했다. 자신이 초대 감독을 역임했던 원년 청룡의 모자를 쓴 채 마운드를 밟고서 투구하였다. 물론 악감정이 단단히 쌓인 롯데빠들은 매우 못마땅해 하는 반응이었고, 나머지 구단 팬들의 현장 호응도 미미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13] 또한 올스타전 시구 당시에도 병의 후유증 때문인지 시구를 마치고 나갈 때 다리를 몹시 쩔뚝거렸다.

2019 WBSC 프리미어 12 한국 vs 호주 개막전에서도 시구를 하였다. 여전히 몸이 불편한지 스탭의 부축을 받았다.

2021년 9월 30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홀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평택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며, 자신을 보살필 만한 가족이 국내에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볼 때 정황상 현재의 후처와도 별거 중이거나 이미 또 이혼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 중 24위로 선정되었다. 다만 상술한 뇌경색 투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관계인지라 시상식은 따로 개최되진 않았다.

2023년 1월 5일, MBN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현장르포 특종세상 564회에 출연했다.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홀로 거주 중이며, 뇌경색 후유증으로 인해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었다. 은퇴 후 현재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다. #

3번의 뇌졸중을 겪어서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으며[14], 아내와는 모두 이혼했고, 자식들도 모두 일본 등 해외에 있고, 연락도 끊긴 상태라고 한다. 지인의 소개로 수양딸로 삼았던 여성은 백인천의 재산을 자신 명의로 돌려놓고 잠적했다. 지금은 지인의 배려로 지인의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6. 평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야구 원로이자 레전드 중 하나로, 한국 야구사를 통틀어서 공과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야구인으로 평가받는다.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선수, 감독 등을 맡아 여러 팀을 거치며 굵직굵직한 족적들을 남겼다. KBO 유일 4할 타자에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유일무이한 2차대전 이후 4할 타자라는 한국 야구계의 유일무이한 업적을 세웠으며, 지도자 경력 초기에는 갓 매각된 약팀을 순식간에 우승시키고 김성근의 시대를 지나 뎁스가 초토화된 삼성의 타선을 리빌딩시키는 등 온갖 영광을 누린 야구인이었지만 동시에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태업으로 팀을 망치며 롯데는 물론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단기적인 혹평을 받은 종사자로 지도자 커리어가 완전히 끝장나기도 했다.[15] 이후 해설가로 활동하며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발언을 남겨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현역 시절에는 장훈 다음 가는 당대 최고의 한국인 타자로 평가받았으며, 박용택처럼 임팩트는 부족하면서도 꾸준한 타자로 평가 받았지만 당시 일본리그는 투고타저 성향이었음을 생각하면 절대로 약한 타자는 아니었다. 20대 시절 한창 잘 치던 2004 시즌 ~ 2007 시즌의 박용택이 투고타저 때문에 혹자에게 그저 그런 성적으로 취급받지만 스탯을 따져보면 전혀 아니었던 것처럼, 백인천도 20-20에 가까웠던 전성기 커리어에[16] 타격왕도 마크했다. 대한민국에서 뛰던 선수 말년 시절에는 40대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KBO의 유일무이한 4할을 기록하며 선수 커리어를 영광스럽게 마감했다.[17]

삼청태 팬들의 평가가 없는 건 활동 기간도 길지 않았고 간통죄로 중도에 은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삼미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팬들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현대 유니콘스 인천을 아예 떠나버린데다 어려워진 살림살이 탓에 팀이 해체되면서 팬덤 자체가 와해되는 바람에 그냥 잊혀졌고 말이다.

지도자 시절의 평가는 LG와 삼성에서는 논란도 많지만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 반면[18], 롯데에서는 팀 역대 최악의 인물[19]로 평가받는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백인천/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 롯데 감독 시절의 행적은 백인천/지도자 경력/롯데 자이언츠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

삼청태 팬덤인 인천 야구팬들에게 있어서도 삼미 시절에 터진 간통 사건 때문에 감정이 그리 좋을 리 없을 듯.[20]

상술한 것처럼 그는 수많은 실책들을 저질렀지만 선수로써, 그리고 감독으로써 오랜 기간동안 한국 국적의 야구인으로 상당한 업적을 세웠으며 그만큼의 업적을 세운 인물이 많이 없기에 그는 대한민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한국 야구계의 대표적인 레전드이자 야구 원로로 평가받고 있다.

7. 기타

  • '인천'이라는 이름과 달리 인천광역시와는 관련이 거의 없다. 일단 이름의 한자 구성부터 다른데 똑같이 어질 인을 쓰기는 하지만 인천시의 '천'은 내 천이고 백인천의 '천'은 하늘 천이다. 물론 인천과 인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인천 연고팀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뛴 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잠시 뿐이었고, 그마저도 선수 말년이 불명예스러웠기에 인천과의 인연은 그야말로 미미하고 좋지 않은 수준이다.
  •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고교/대학야구 타자상 이름은 백인천의 타율이었던 0.412를 딴 ' BIC 0.412상'이다.
  • 야구용품에 관심이 상당히 많다. 감독시절 프로야구 선수는 최고의 장비를 써야한다며 구단에게 요구해 마찰을 빚은적도 있다. 삼성감독 시절에는 선수단에게 본인이 직접 공수한 미즈노 프로 배트를 쓰게 했는데 이걸로 인해 부정배트 사건이 터진다. 롯데 감독 퇴임직후에는 야구용품 사업을 했으며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 타격폼등도 봐주고 몸에 맞는 배트를 추천 해줬다. 그리고 요청시 본인의 싸인도 해주었고, 싸인만 원하면 착불로도 보내 주었다. 2013년에는 건강이 안 좋았음에도 직접 야구용품 박람회에 참석하였다. 기사
  • 이승엽 최익성이 가장 존경하는 야구인이다. 실제로 이승엽은 자신의 스승으로 박흥식, 박승호 코치와 함께 또 하나의 은사인 백인천 감독을 꼽았으며,[21] 최익성은 백인천 감독이 본인의 야구인생에서 인생을 꽃을 피운 은인이라고 언급했다. 사실 최익성이 코치와의 트러블 속에서도 지금까지 버텨왔던 인물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백인천 감독이 최익성 본인의 재능을 극찬받은데다가 늘 항상 버팀목이 되어줬기에 백인천 감독을 자신의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최익성은 은사인 백인천이 있는 한은회에 가입할 정도로 백인천 감독을 잘 따른다고 한다.
  • '백골퍼'라는 별명에 걸맞게, 실제로 골프를 좋아하는 골프 애호가라고 한다. 롯데 감독을 맡기 전에도 골프 사업을 한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다만, 롯데 감독 시절 인터뷰에서 그러잖아도 성적도 엉망진창인 마당에 뜬금없이 골프 얘기나 하는 등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비판받으면서 백골퍼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여진 것일 뿐.
  • 일본프로야구 선수 시절 20-20 클럽을 1번도 달성한 적이 없지만, 일본 통산 200홈런 200도루를 기록하였다.[22] 그만큼 꾸준하게 홈런과 도루를 기록했다는 증거다.
  • 프로야구 원년 최고령 선수였으며, 역대 프로야구 선수들 중 유일한 일제강점기 출생이다.

8. 관련 문서


[1] NPB 최초로 규정타석 수치를 정확히 맞추고 수상한 기록이다. [2] 1982년 기록 [3] 지금까지 유일무이한 KBO 4할 타자이다. [4] 호적상에서는 1943년 11월 27일 생이라고 한다. [5] 현재의 대만이 아니라 중국 대륙에 있는 난징이다. 난징은 백인천이 태어났을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이자 직할시였던 난징(남경)시였다. 단 당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충칭시가 임시 수도였다. 중화민국이 현재 존치시켜 놓고 있는 명목상의 행정구역에서는 난징이 여전히 직할시로 남아 있지만, 현지를 실제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으로는 직할시에서 장쑤성 산하의 시로 격하되어 장쑤성의 성회(省會: 성의 수도)가 되어 있다. [6] 같은 팀인데 팀 매각에 따라서 이름만 바뀌었다. 1972년까지는 도에이 플라이어즈, 도에이가 부동산 회사인 닛타쿠홈에게 매각해 1973년에는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닛타쿠 홈이 1년만에 다시 팀을 닛폰햄에게 매각해서 닛폰햄 파이터즈가 됐다. 그리고 1974년 시즌 후 닛폰햄 사장으로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가 전임 감독이자 라이벌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취임 1년만에 대규모 트레이드를 감행하며 소위 '미즈하라 인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섰다. 장훈과 백인천도 이 과정에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 [7] 2002년 6월 21일 ~ 2003년 8월 6일 [8] 2기 시절에는 요미우리 홈 경기 중계 전담 해설. [9]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거룩한빛광성교회에 출석한다. [10] 타 리그까지 포함하면 구대성 ABL에서 질롱코리아의 선수 겸 감독을 했다 [11] 사실 한국 스포츠계 특성상 웬만큼 원한이 깊고+선수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이상 대선배+전 감독에게 대놓고 나쁜 말을 하기 힘들다. 특히 현역은... 게다가 그 대선배가 전리그적인 독고다이가 아닌 이상 야구계에 이런저런 연줄로 엮여 있기 때문에 어떻게 꼬일지 모르고(예를 들어 씹은 사람의 후배가 감독으로 온다던지...) 또한 우리나라는 감독을 "지도자, 스승"으로 보는 경향이 커서 그런 비판 자체를 안 좋게 보기 때문이다. [12] 물론 현재 기준으로 보자면 이미 이대호는 레전드급 성적을 찍고 명예롭게 은퇴했기에 더 이상 악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이대호는 은퇴사에서 자신의 롯데 재적 기간 중 감독들에게 모두 고맙다고 언급했지만, 백인천과 양승호는 뺐다. 양승호의 경우 롯데 감독 퇴임 후 뇌물수수 건이 까발려진 것 때문이었다. [13] 사실 백인천이 워낙 옛날에 활동했던 야구인인지라 올드팬이 아닌 이상 신규 야빠들 중에서는 제법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롯데 감독 시절의 각종 기행 때문에 LG, 삼성 감독 시절의 긍정적 이미지도 거진 희석되었던지라... [14] 심지어 발가락이 괴사했을 정도이다. 괴사한 발가락을 잘라내야 하지만, 혈전약을 먹고 있는 탓에 절단 수술을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 [15] 사실 개인적인 성격 문제나 사생활 문제는 그렇다쳐도 야구인으로써는 업적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인물이었는데, 저 롯데 감독시절 이후 백인천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바뀌었다 봐도 무방하다. 실질적으로 야구인으로써 실책을 저지른 건 롯데 감독 시절이 결정적이었다 봐도 무방하다. [16] 아쉽게도 홈런 개수가 부족했던 탓에 20-20 클럽은 달성했던 적은 없다. 1972년 NPB에서, 1982년 KBO에서 기록한 19홈런이 백인천이 달성한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다. [17] 다만 사실 백인천의 선수 커리어 마감은 MBC 시절 이후 삼미 이적이었고 간통죄로 중도에 은퇴했기에 은퇴 시점 자체는 영광스럽게 은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18] 사실 여러 논란도 있지만 성과가 커서 팬들에게는 애증의 대상으로 불린다.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 시절에는 삼성을 상대로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개막전 승리를 이끌었고 시즌 중 선수 신분으로는 공포의 4할타자로서 타선을 이끌었으며 LG 감독 시절에는 삼성을 상대로 구단 역사상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안겨주었다. 이후 삼성에서 감독을 맡을 시절에는 1995년부터 2년 연속 팀을 가을야구로 이끌지 못했고 대구 야구의 슈퍼스타였던 이만수 강기웅을 내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으나 삼성 핵타선의 주축 멤버가 된 이승엽, 정경배, 최익성 등의 젊은 스타들을 잇달아 발굴하며 삼성 특유의 공격야구 색깔을 더함과 동시에 리빌딩에도 성공했다. 아마 뇌출혈로 쓰러지지만 않았더라면 1년 정도 감독으로 더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필이면 백인천이 키워낸 그 삼성의 핵타선이 LG를 제대로 떡실신시켜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LG 트윈스 천보성 LG 감독이 삼성 타자들이 사용한 미즈노사의 배트를 규정 위반인 압축 배트라고 주장한 압축 배트 의혹 사건도 있었고(이 과정에서 정경배의 방망이가 두동강났다.) 그 때문에 경기 도중 백인천이 LG 주루 코치이던 조 알바레즈와 멱살잡이까지 가는 난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MBC와 LG 시절 사제관계를 쌓아온 김용달 LG 타격코치와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특히나 LG는 1994년 우승 이후 장기간 우승을 못했고, 삼성은 백인천 말고 팀에 부임한 감독들 중 상당수가 졸장이기에 이 시기의 백인천의 평가는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편이나 문제의 롯데 시절로 인하여 이 시절들은 올드 LG, 삼성팬들을 제외하면 완벽히 묻혔다. [19] 말 그대로 롯데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모든 선수, 코치, 감독, 단장을 전부 통틀어서 가장 평가가 나쁘다. 롯데는 꼴런트라고 해서 프런트들이 대부분 질이 처참한 인물들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보다도 욕을 많이 먹는다. 꼴런트들이 욕을 많이 먹지만 백인천처럼 경질당한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올드 팬덤의 입방아에 올라서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없다. 그리고 실제로 백인천은 롯데 시절 태업을 했다는 의혹을 받는데, 이 때문에 롯데 팬덤이 아닌 다른 팬덤에게서도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종사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20] 물론 인천시민들에게는 백인천에 대한 기억이 사실상 없다. 지금 와서 삼미 선수들이 회자되는 것도 대부분 투수지 타자가 아닌 데다 백인천이 그 때처럼 4할을 쳤다 쳐도 그 해 삼미가 꼴찌를 탈출할 리는 없었기 때문. [21] 실제로 이승엽의 성공 비결 이유 중 하나를 언급했을 때 백인천 감독은 반드시 들어간다. [22] 20-20 없이 200-200클럽에 가입한 선수는 몇 없다. 박용택은 그 몇 없는 선수 중 하나다. [23] 아주 어릴 때 한국으로 왔으며, 초중고도 모두 한국에서 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시절도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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