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20:09:19

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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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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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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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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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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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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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박이천
(1972)
김호
(1972)
이세연
(1973)

대전 시티즌 역대 대표이사
윤정섭
(2016~2017)
김 호
(2017~2019)
최용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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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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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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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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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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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1970 · 1971 · 1972
}}} ||
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3667541674_cE951sZu_B1E8C8A3-1229820s_99_20160129111405.jpg
이름 김호
金浩 | Kim Ho
출생 1944년 11월 24일 ([age(1944-11-24)]세)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 도천리
(現 경상남도 통영시 도천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1]
신체 177cm
직업 축구 선수 ( 수비수[2]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제일모직 축구단 (1964~1968)
해병대 축구단
양지 축구단
상업은행 축구단[3]
감독 한일은행 축구단 (1982~1987)
대한민국 대표팀 B팀(1987)
현대 호랑이 (1988~1990)
대한민국 대표팀 (1992~1994)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5~2003)
대전 시티즌 (2007~2009)
통영축구클럽[4] (2010~2015 / 총감독)
용인시축구센터[5] (2016~2017 / 총감독)
기타 숭실대학교 (2003~2007 / 총감독)
예원예술대학교 (2013~2015 / 기술 고문)
대전 시티즌 (2018~2019 / 대표이사)
국가대표 71경기 ( 대한민국 / 1965~1973)
{{{#!wiki style="margin: 0 -10px -5px"
정보 더 보기
{{{#000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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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colcolor=#000> 학력 두룡초 - 통영중 - 동래고
서명 파일:김호서명.png
본관 김해 김씨 (金海 金氏)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
3.1. 초기3.2. 현대 호랑이 감독3.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3.4.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3.5. 숭실대학교 총감독3.6. 대전 시티즌 감독
3.6.1. 2007년3.6.2. 2008년 ~ 2009년
3.7. 통영축구클럽 총감독3.8. 예원예술대학교 기술 고문3.9. 용인시축구센터 총감독
4. 경영인
4.1. 대전 시티즌 대표이사
5. 제자들과의 관계6. 비판 및 논란7. 어록
7.1. 명언7.2. 실언
8. 총평9. 여담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5b38427de99ad73b53f287b9.jpg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경영인.

현역 시절에는 센터백으로, 이회택과 함께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국가대표팀 수원 삼성 감독 시절까지만 해도 감독으로서 개인 통산 207승을 거뒀고[6][7] 원로 축구인으로서 축구협회를 비롯한 한국 축구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등 한국 축구계의 대표적인 만년 야당, 비주류 인사로서 인정 받았지만, 대전 시티즌에서 감독과 대표이사로서 휘말린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사고와 논란에 대한 큰 책임이 있는 인물임에도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아 나쁜 측면으로 급격한 재평가를 받게 되면서 명성이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물이다.[8]

특히 2018 시즌 개막 후 김호와 고종수 감독의 유명세로 인해 여러 기자들과 언론들에 의해 이런 점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팬들의 시위 및 단체행동 등이 언론에까지 나오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2019년에도 직원 월급 문제, 이사진 사퇴 등으로 논란과 구설수가 끊이질 않다가 신인 선수 선발 테스트 불법 행위가 끝내 터지면서 거의 '김호 게이트'급 수준으로 문제가 커졌다. 결국 대표이사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게 되면서 축구인으로서 이미지가 다시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실추되었다.

2. 선수 경력

파일:2017-11-2-17;44;54.jpg

1944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난 김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 선수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김호는 달리기 선수로도 활약했지만 축구를 제일 좋아했다고 하며;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선수로 활약하며 지역대회에서 우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통영중학교에서 뛰던 시절 집이 어느 정도 살았기에 라디오가 있던 김호는, 54년과 58년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한국이 연속으로 대만에게 패배하는 중계를 듣고 축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집안 사정도 안 좋아지고 통영초등학교나 통영중학교나 통영고등학교나 전문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축구를 접었으나 주변에서 김호의 재능을 아까워해 자꾸 채근한 끝에 진주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요인으로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일단 통영에서 한참 떨어진 진주까지 왔다갔다 하는 것과 더불어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던 축구를 1년 쉬었으며, 이 시기 키가 확 컸는데 이를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등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부산의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해 당시 감독이던 안종수의[9] 지도를 받으며 고교 시절부터 기량이 일취월장하여, 수비수임에도 빠른 발을 지녔기에 전도 유망한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동래고등학교는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전까지는 지방 팀이 서울을 꺾어본 적이 없었으나 최초로 김호의 동래고가 동북고를 2:0으로 꺾었다고 한다.[10]

안종수 감독이 제일모직 감독으로 옮기면서, 김호도 고민하지 않고 제일모직에 입단하였으며, 대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있었으나[11], 이 시기 조윤옥은 신인인 김호를 보고 크게 될 재목이라고 평가했으며, 선배의 부상을 기회로 데뷔를 하게 된 김호는 제일모직에서 중앙공격수와 수비수를 넘나들며 활약하였으며, 여기서의 활약으로 청소년 대표를 건너뛰고 바로 국가대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부터 제의가 왔는데, 주전이 아니라면 가지 말라는 안종수의 권유로 인해 김호는 아쉬우면서도 세 번이나 대표팀 선발에 불응하다가 1965년 김종필배 일본전에서 데뷔하였다.

대표팀에서는 처음 브라질을 본따 4-2-4를 활용하고 있었는데 이 시스템에서는 김호는 주로 라이트백으로 뛰었다. 그런데 김용식이 감독으로 들어오면서 이탈리아식으로 전술을 바꾸게 되고, 여기서 김정남과 듀오를 이루게 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둘 다 기술이 준수한 수비수였는데, 이걸 통해 아시아 무대에서 재미를 봤다고 한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1970년 아시안 게임 우승멤버로 활약한다.

1965년 해병대에 입대한 김호는 전국체전을 우승하면서 국가대표 선수들을 해병대로 많이 모여들었고, 이 시기 양지 축구단이 창설되면서 김호는 해병대에서 양지로 파견을 가는 형식으로 양지에서 뛰게 된다. 그런데, 양지에서 유명한 유럽 순방, 남미 순방을 하면서 김호는 군대를 제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입대하여 양지에서 뛰게 된다.[12] 이 때 세계무대의 느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1970년에 상업은행으로 이적한 김호는 여기서도 몇 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등 활약하다가 젊었을 적 입었던 부상의 여파로 73년 은퇴한다.

2.1. 플레이 스타일

60~70년대에 한국 축구 최고의 수비수였다. 터프한 수비가 일품이였으며 이회택과 한국 축구를 이끌었다. 김정남과 함께 센터백 듀오를 구축했다.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달리기 선수라 그런지 발이 빨라서 풀백으로 서기도 했다.

3. 지도자 경력

파일:downloadfile김호-12.jpg 파일:B1033450417.jpg 파일:PYH2007090205650006300_P2.jpg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 시절 최전성기였던 수원 삼성 감독 시절 논란의 중심이었던 대전 시티즌 감독 시절

파일:1(195).jpg

3.1. 초기

1972년부터 실업팀 상업은행 트레이너로 활동하며, 선수 겸 지도자 생활을 걷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하였다. 모교인 동래고등학교 감독을 시작으로 1983년에는 한일은행 축구단 감독으로 부임하여 1987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에 윤성효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3.2. 현대 호랑이 감독

조중연 감독의 후임으로 현대 호랑이의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프로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당시 현대 호랑이는 김종부 스카우트 파동 사건으로 팀 해체를 선언하였다가 실행에는 옮기지 않으며 비난만을 받는 상태였고, 실추된 이미지를 쇄신해야하는 상황이였으며, 부임 첫해에 리그 준우승을 거두었다. 울산으로 연고지를 정착한 첫해인 1990년, 6개 팀 중 5위를 기록하며 성적부진의 책임을 물고 사임하였다.

3.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호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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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파일:2(38).jpg
수원의 영원한 아버지[13][14][15]

월드컵이 끝난 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감독을 맡으며 1999년 K리그 전관왕, 아시안클럽컵(현 AFC 챔피언스리그) 2연패를 기록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K리그, 대한화재컵, 아디다스컵, 슈퍼컵 등 K리그 대회를 모두 우승한 1999년의 수원은 K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당시 자신이 직접 키운 김호의 아이들은 스쿼드가 후덜덜했었다.

당시 리그 대다수 팀이 3백 시스템을 채택했으나 수원에서 4백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이 조련한 부천 SK[16]와 벌인 시합들은 지금도 K리그 팬들이 꼽는 명승부다.

조광래 감독이 수석 코치로서 김호 감독을 보좌했으나 불화를 겪고 1998년 안양 LG[17]의 감독으로 옮겼다. 오늘날 전설로 전해지는 지지대 더비에는 이런 두 감독의 감정 다툼도 깔려 있었다.[18] 김호 감독이 물러난 뒤 차기 수원 감독은 조광래 수석코치가 물려받기로 했는데 김호 감독이 이를 반대해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조광래가 국가대표 감독이 될때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등 사이가 좋다.

하지만 김호 감독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수원 삼성 시절 김호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1977년 ~ 1982년 사이에 태어난 고졸 신인들을 전략적으로 육성해서 한국 축구의 세대교체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은 후임자인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 병역문제, 부상 등으로 지금은 국가대표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성공하고 실패하고의 여부를 떠나서 일등지향노선 대신 신인들을 전략적으로 키우려고 했던 그 폭넓은 시야만큼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3.5. 숭실대학교 총감독

수원 삼성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김호 감독 밑에서 코치로 일한 윤성효가 숭실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은사인 그에게 도움을 요청함에 따라 총감독으로 숭실대학교 축구부에 합류하였고, 교수직도 병행했다. #

3.6. 대전 시티즌 감독

파일:2017112401769_0.jpg

3.6.1. 2007년

2003년 시즌 종료 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에서 물러나며 현장에서 은퇴했다가, 2007년 7월 13일,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하며 4년만에 현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여론은 국가대표 감독과 수원 삼성 감독 등을 맡으며 큰 족적을 남긴 덕에 역대 감독 중 가장 네임벨류 있는 김호의 부임을 환영하는 분위기와, 대전 구단과 사이가 썩 좋지 못했던 수원 삼성 감독 출신인 김호의 부임을 달갑지 않게 보는 분위기 두 분류로 갈라져 있었다.

당시 대전은 전임 최윤겸 감독이 이영익 수석코치와의 불화 끝에 같이 잘렸으며, 수비도 잡지 못하여 10위에 쳐져 있었다. 결국 5경기가 남았을 당시 무조건 전승을 해야만 PO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비 안정감을 찾고 최윤겸이 구상했던 데닐손 - 슈바 - 브라질리아 공격 라인이 드디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또한 대전은 기존의 최윤겸이 감독이 쓰리백에서 무리하게 포백으로 바꿔서 수비가 빵꾸난 상태였는데, 김호 부임 후 포백이 상당히 안정화되었으며, 이러한 김호의 능력을 앞세워 전승을 기록하며 막판 뒤집기로 서울을 제치고 6강 PO에 진출하였다.

이 결과로 김호 감독은 엄청난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1월에 최윤겸이 데려와 몸 상태를 끌어올리길 기다리던 고종수도 김호가 온 후에야 몸 상태를 회복해 사제간의 조우에만 초점이 맞춰지기도 했다.[19]

하지만 이러한 성적도 최윤겸이 해 논 밥상에 김호는 단지 숟가락만 얹어 놓은 것이라는 저평가 역시 적지 않게 있다. 물론 김호의 공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2007년 플레이오프 진출은 김호의 공이라기보다는 데닐손 - 슈바 - 브라질리아로 이어지는 외국인 선수 및 대전에서 오래 뛰어오면서 다져온 국내 선수들의 조직력을 다져온 최윤겸 감독의 공이 더 크다는 게 일부 팬들의 평이다.

뭐가 어찌됐든 이때까지만 해도 대전 구단과 본인의 상황은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3.6.2. 2008년 ~ 2009년

2008년부터 김호가 이끌던 대전은 본격적으로 쇠락길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김호는 2008년부터 정말로 옛 제자들을 불러모으는 등 명성에 맞게 번외 지명으로 어린 선수들을 잔뜩 뽑기도 하였으나, 시민구단의 재정에 안 어울리게 끌어모은 선수들은 거의 어리기만 했고, 팀에 적응하지도 못했으며, 또한 지나치게 많이 선수단이 변해버린 탓에 대전 시티즌이라는 팀은 기존의 대전 시티즌과는 180도 다른 이미지의 팀이 되어버리며 팀 정체성 역시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이때 영입한 선수들 대부분이 훗날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 특히 이렇게 선수를 끌어모으려 시즌 중 방출자 명단을 숙소 벽에 공지하는 만행을 범하기도 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은 바로 일본 전지훈련 공금 횡령한 사건인 에이전트 비리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전 서포터즈와 구단 측이 직원 한 명을 일본으로 파견하는 등의 법적 공방 끝에 가까스로 무혐의 판결로 종결되긴 했지만,[20] 김호가 감독 재임 시절 에이전트 K씨와 손잡고 구단을 장악해 구단을 운영하고 싶어하려 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면서 팬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는 되찾지 못하였다.

사실 이러한 사건들을 비롯해 김호와 구단의 갈등은 2008년 초부터 시작된 상태였는데, 김호가 2007년 7월 대전 지휘봉을 잡았을 때 구단 사장은 언론인 출신에 스포츠단 운영 경험이 없던 인물이었으며, 김호의 뜻을 대부분 수용하는 쪽으로 구단 운영을 펼쳤기에 아무런 트러블 없이 구단 운영에 자신의 뜻을 반영하였었다. 하지만 한화 이글스에서 근무한 경력을 비롯해 프로스포츠 전문 경영인 출신 송규수 사장이 취임하면서부터 김호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인해 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제 속에 김호는 감독 통산 200승을 달성했을 뿐 역대급으로 가장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아놓고선 2008 시즌 리그에서 단 3승만을 거두면서 13위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2009년에도 시즌 초반 부진을 거듭하다가 결국 2009년 6월 구단과의 갈등에 못이겨 불명예스럽게 퇴진했으며, 이로 인해 김호는 대전 팬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금지어로 전락했다.

김호와 관련된 이러한 사건들에 있어서는 주로 디씨인사이드 국내축구 갤러리와 파투 커뮤니티 같은 하드코어 팬층이 모인 곳에서는 비리가 있다는 쪽이고, 그 외에는 검증이 되지 않은 소리라는 주장이다. 대전 시티즌이 워낙 하위권에 비인기 팀이다보니까 대전 시티즌 팬이 아니라거나 이 사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 모르거나 무관심한 채 그저 김호를 아직도 과거 국가대표 감독을 했던 명장으로 잘못 알고만 있다.

이 부분에다 모두 적기에는 내용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새롭게 문서가 분리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호/비판 및 논란 문서 참고.

3.7. 통영축구클럽 총감독

이후 야인으로 지내다가 진의장 통영시장이 통영시가 운영하는 유소년축구클럽 총감독직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하자 코치진 4명과 함께 고향 통영시로 내려가 통영축구클럽의 총감독으로 활동하였다.

2012년까지 150여 명의 꿈나무들을 가르쳤으며 이 기간 동안 지역 중고생 80여 명도 틈틈이 지도했다.

3.8. 예원예술대학교 기술 고문

파일:2342_3239_2234.jpg

2013년부터는 예원예술대학교의 기술 고문직을 겸임하기 시작했는데, 과거 김호의 제자였던 예원예대 조현 감독이 처음에 김호에게 기술 고문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을 때는 기술 고문이라는 자리는 쉽지 않을 뿐더러 우리나라에서는 정착이 안된 문화라며 거절했지만, 조 감독은 물러서지 않고 삼고초려의 자세로 다가갔으며, 운전기사를 자처해 김호를 동계 훈련장까지 모시고, 술자리에서 아들 한 번만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등의 노력 끝게 가까스로 기술 고문으로 합류했다고 한다.

이후 통영과 서울을 오가며 조현 감독에게 비법을 전수해주는 등 여러므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2015년 성균관대와의 U리그에서는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다가 하프타임 때 잠시 예원예대 벤치에 들러 선수들에게 조언을 건네기도 했었다. #

3.9. 용인시축구센터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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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부터 용인시 축구센터의 유소년 축구부 총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전부터 용인시의 적극적인 대시가 있었다고 하며, 1년의 시간동안 고민을 거듭한 끝에 부임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김호는 지도자로서 십수년간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장기적으로 유소년 선수들의 기량 발전에 초점을 두고 꿈나무 육성에 매진 함과 동시에 용인시 축구센터가 국가대표의 산실이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유소년 축구 교육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한편 통영축구센터 시절 함께했던 이기범 감독을 용인시축구센터의 신갈고등학교 감독으로 영입하기도 하였다.

4. 경영인

4.1. 대전 시티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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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하랬지 고소하랬냐?
도망치듯 떠나 영웅인척 하지마
간담회를 개최하라
이런 팀을 응원할 수 없다.
서포터 버릇을 고치겠다는 당신은 대체...
김호시티즌 X 대전시티즌 O
시티즌은 누구겁니까?
김호 사퇴![21]
우리 집 개 이름은 김호라지요!
김호가 누구야
김호가 누구야
김호가 누구야
우리집 개이름!
[22][23][24]

2017년 11월 1일 대전 시티즌의 대표이사로 부임하였으며, 이에 대전팬들은 최근 용인시축구센터에서 무능함과 더불어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으며, 과거 불미스럽게 대전을 떠난 김호의 대표이사 선임 소식에 반발이 상당했다. 또한 당장 2017시즌 중반 지방자치제 선거도 예정되있기에 구단주가 기존의 시장과 다른 당 소속의 사람으로 바뀔 시 과거 김세환 사장 처럼 대표이사의 입지가 정치적 입김에 크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 역시 상당했다.

또한 대표이사직 취임과 동시에 용인시축구센터 감독이였던 이기범 감독을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데려왔는데, 이기범 역시 김호와 마찬가지로 용인시축구센터에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렸으며 동시에 프로팀 감독 경력이 전무한 신인 지도자라는 사람이라는 점과 더불어 팬들과 구단 프런트, 그 누구의 동의와 소통도 없이 혼자서 독단적으로 한 선임이라는 이유로 팬들이 크게 반발했으며, 시즌 시작도 하기 전부터 벌써부터 팬들의 사퇴 압박을 받아야만 했다. 한편 김종천 대전광역시의원은 제2차 정례회 행정자치위원회의 시 문화체육관광국에 대한 행정사무감사에서 이러한 김호의 팬들의 그 어떤 동의도 없이 이루어진 독단적인 감독 선임을 크게 비판하기도 하였다.[25]

하지만 이후 김호는 이기범 감독 선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했는지 이기범은 대전의 2군팀이나 유소년팀 감독이 될 것으로 보인다며 이기범 감독 부임설을 일축했으며, 사실상 과거 수원 삼성 감독 시절 지도한 제자들 중 한명이 새 감독이 될 것으로 점쳤고, 11월 24일 자신의 애제자인 고종수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였으며, 이기범은 2군팀 감독으로 선임하며 최종적으로 이기범을 대전 구단에 데리고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기범이건 고종수건 둘 다 김호의 사람이라는 점과 프로팀 감독 경력이 전무한 신인 지도자라는 공통점이 있고, 이기범 보다는 선수 시절 활약이나 이름값이 훨씬 높은 고종수를 선임하면서 이기범 감독 선임으로 좋지 못했던 여론을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냐며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이기범이나 고종수같은 경험이 없는 신인 지도자를 바지감독으로 내세워 사실상 자신이 감독으로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었으며, 실제로 김호가 선수단 운영이나 전술에 있어 개입을 했다는 내부고발이 터져나오면서 김호가 실질적인 대전의 감독 역할까지 수행할 것이라는 예상이 사실로 드러났다. #[26]

김호의 막장 행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본인은 물론 감독, 코치, 사무국장, 심지어는 유소년 지도자까지 지나치게 수원 삼성 출신 인물들로만 구성하면서 대전 팬들이 크게 반발하였다.[27] 대전시에서 유소년팀 지원을 위한 예산을 추가로 지원했으나 명확한 이유도 없이 유소년 지도자와 계약을 미뤄 축구계의 집단 반발을 샀으며, 끝내는 유소년 지도자의 숫자를 줄이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막장 행정을 선보이며 내년 시즌 성적에 따라 대전시티즌은 존폐의 위기에 몰릴 것으로 전망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김호의 막장 행정에 인내심이 바닥 난 팬들이 대전시티즌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는 사태로까지 번지면서, 김호는 시즌 개막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팬들과의 관계가 꼬여버리고 말았다.

또한 브루누 칸타녜지를 비롯한 일부 선수들에게 2017년 12월 중순부터 계약 해지를 강요하고 숙소 입소와 훈련 등에 배재하면서 7,8명의 대전 선수들이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에 제소를 하면서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으며, 김호의 이런 아마추어식 행정은 큰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 #

이와 비슷한 관계로 대구 FC 조광래 단장 겸 대표이사와 고양 자이크로 FC 이영무 이사장 체제가 있다. 하지만 조광래의 경우는 과거 자기와 인연이 있던 인물로 구성된 감독 이나 상왕질 의혹이 있긴 해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고, 프런트 일을 하면서 자신의 후원회를 중심으로 한 대구 FC 후원회 결성, 유소년 육성강화 등 밑에서 발전을 시키고 K리그 클래식 승격과 그해 잔류를 확정지으며 대구를 다시 1부리그로 승격시켰고 새로운 전용구장 건립에 공을 세운 데다 그 동안 구단 정상화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18년 FA컵 우승, 2019년 ACL 초반 2연승 등 대구 FC의 위상을 크게 올리고 있다. 그리고 조광래는 행정 쪽에만 전념하고 있을 뿐이고 감독의 전술을 간섭하는 바지사장을 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김호 대표이사 체제도 이렇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 전과가 크기 때문에 조광래와는 다르게 팬들의 신뢰를 전혀 얻지를 못하고 있다.

이영무의 경우는 팀의 감독 시절부터 구단을 사유화하고 장악하려고 했으며, 이사장으로 승진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낙영 감독을 바지감독으로 내정하면서 구단이 돌아가는데 있어서 모든 면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완전히 팀의 실세로 거듭났으며, 이 외에도 막장 행정을 선보이다가 완전히 고양 구단을 해체 시켰다. 사실상 현재의 김호와 가장 흡사한게 이영무 체제의 고양이라고 볼 수 있으며, 대전 구단 역시 김호로 인해 고양처럼 자칫 없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에 까지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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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전팬들이 과거 사건들을 비롯해서 해명할 간담회 개최를 요구하자 오히려 법적 책임을 운운하면서 팬들을 고소할 것인 것 마냥 협박하였고, 이에 대전팬들은 부천과의 리그 개막전에서 응원을 하지 않는 보이콧과 동시에 "수원 레전드", "간담회를 개최하라", '해명하랬지 고소하랬냐?', "이런 팀을 응원할 수 없다." 등의 김호를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도 내걸었으며, 김호를 개로 비유하는 내용으로 노래를 개사해 부르는 등 강도 높은 단체 행동에 나섰다.

김호는 과거 감독 시절과 마찬가지로 신인 선수들만 주야장천 영입하면서 선수단의 규모를 늘리는 무리수를 또 다시 선보였고, 박인혁 쇼흐루흐 가도예프 영입을 통해 대전 시티즌의 선수를 총 57명으로 두는 이해할 수 없는 행정을 펼쳤다. 또한 이기범 2군 감독의 아들인 이지호 영입을 감행하며 큰 비난을 받았고, 이에 "대통령 아들이면 무조건 안 뽑냐?" 이런 식으로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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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김호의 이해할 수 없는 막장 행정과 그로 인한 세금 낭비가 청와대 청원에 올라오기도 하였으며, # 4월 14일 아산 무궁화와의 경기 종료 후에는 심판에게 욕설을 퍼붙고 심판실에 난입해 고성을 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 다시 논란이 일었다. 그래서, 징계와 처벌이 불가피해졌으며, # 이번 사태로 인해 제재금 2000만원이라는 무거운 징계를 받게 되었다. 과거 감독 시절에도 이미 4차례나 경기 지연과 심판 대상 난폭 행위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전과가 그 요인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클럽의 운영책임자 등 임원 및 직원이 심판 판정에 대한 과도한 항의나 난폭한 불만 표시 행위를 할 경우, 해당 클럽에 대하여 제재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상벌위 규정에 의해 김호 개인이 아니라 대전 구단이 제재금을 물게 되면서 또다시 혈세 낭비를 자초하게 되었다. 이후 대전 시티즌이 리그에서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김호에 대한 비난 여론이 많이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김호의 대전 시티즌 대표이사직 부임 후 행적이나 논란은 단순히 리그에서의 성적만 좋다고 넘어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시즌이 끝나갈 무렵부터 김호와 유착 관계인 특정 에이전트를 통해 외국인 선수 전원이 입단했다는 사실[28]과 더불어 구단 직원 월급 줄 돈이 없다고 대전광역시가 시의회에 6억을 요구했다는 사실 등이 대거 밝혀지면서 준수한 성적 때문에 한동안 잠잠했던 김호의 방만한 구단 운영은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으며, 시즌 종료 후 대전 시티즌의 이사회 상당수가 대거 퇴진하고 김호의 사퇴를 촉구하며 논란이 또다시 불거졌다. #

이에 행자위원들은 '김 호 사장 책임론'을 꺼내며 1억 7천만 원을 삭감, 예결위에 올렸으며; 개혁방안을 대전시에 보고하기로 예정됐지만 이를 지키지 않은차 갑자기 태도를 바꿔 오는 13일 이사진을 상대로 '경영개선계획'을 설명을 계획하고 또 선수 모집에 나서면서 사실상 시의회하고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결국 대전 시의회는 예결특위[29]를 개최해 대전시티즌이 요청한 추가경정예산 6억 원을 전액 삭감했으며, 시의회 차원에서도 김호의 사퇴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

한편 부산 아이파크 사장을 역임하면서 K리그의 발전과 리그 흥행에 큰 공헌을 한 구단에게 주는 상인 '팬 프렌들리 클럽상'을 수상할 정도로 팬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고,[30] 리그에서 대전 시티즌보다 더 나은 성적을 거둔 같은 축구 감독 출신 최만희가 2018시즌 종료 후 사장직에서 사퇴하면서 김호랑 상당히 대조되기도 하였다.[31] 이후 김호는 대전시의회에 경영쇄신방안을 제출하면서 사퇴 없이 2019 시즌에도 구단을 이끌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경영쇄신방안에는 58명인 선수단 규모를 35명 내외로 축소하는 한편, 사무국 운영비 절감 및 자생력 강화 방침 등을 담았지만 예산심사를 진행 중인 대전시의회를 비롯한 팬들로부터 전혀 신뢰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

한편 1월 15일 대전 시티즌 구단주인 허태정과 단 둘이 만남의 자리를 갖게 되었다. #

이후 대전 시티즌 신인 선수 공개테스트 불법 행위 논란이 드러나면서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으며,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3월 11일 대표이사직에서 공식 사퇴하였다. #

사퇴 이후에도 선수 선발 비리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었다. #

비록 증인 신분으로서 피고인은 아니지만 이본 사건에 있어서 분명 자유로울수 없으며, 선수 선발 불법 행위를 계기로 과거 감독 시절부터 대표이사시절까지 있었던 각종 사건 사고나 논란, 의혹을 비롯해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은폐된 사실 등에 대한 수사로 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자칫 이번 사태가 김호 게이트 수준으로까지 번질 가능성 역시 적지 않다.

김호의 대표이사로서의 만행 역시 이 부분에다 모두 적기에는 내용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새롭게 문서가 분리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호/비판 및 논란 문서 참고.

5. 제자들과의 관계

해당 문서로.

6. 비판 및 논란

해당 문서로.

7. 어록

명언과 실언을 같이 놔두고 비교해보자. 이게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것이다.[32]

7.1. 명언

나는 그저 축구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는 '축구인'이다.
준비가 99%, 운이 1%다.
정몽규 회장 주위에 '예스맨' 너무 많다.
국민이 국가대표만 생각하고 있으니, 그 국가대표를 키우는 팀들을 생각해야지
월드컵에 당장 나가는 것보다는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의 질을 높여야 한다. 세계 10위 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질 향상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프로축구가 활성화되지 않는 원인을 대한축구협회에서 파악해야 한다. 대표 선수들은 K리그에서 나온다. 국내 축구의 활성화를 위한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
요새는 젊음을 강조한다. 잘못됐다. 경험을 인정하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경험 없는 사람들만 모여서 하다 보면 발전이 없다. 협회에서도 협회 입장에서 필요한 사람, 말 잘 듣는 사람만 앉히면 좋은 지도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
협회는 지원만 해야 된다. 축구인들이 축구를 만들어갈 수 있게끔 내버려둬야 한다. 협회에서 모든 걸 장악하고 있으면 발전이 없다. 50년 전과 지금이 똑같다. 옳지 않다.
그렇지 않다. 모든 일이 제 하기 나름이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전문인이 돼야 한다. 나는 훌륭한 대표선수가 되기를 바랐고, 그래서 실업 팀에서 축구를 열심히 했다. 연대, 고대라는 거대한 산맥에 있다지만 거기(대학교)에 가서 뭘 얻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ㅡ 대학을 나오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는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스위스전에서 이겨야 한다면 이길 수 있는 전술을 써야하는데 아드보카트호의 전술은 지나치게 수비 지향적이다.[33]

7.2. 실언

일단 감독한테 다 맡기는 것 보다, 서로 상의를 하면서 운영할 것입니다.[34][35]
대전 시티즌 대표이사직 취임 후 인터뷰에서
특정 에이전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발이 넓고 선수 AS 잘하는 에이전트도 있다. 중요한 것은 AS나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 사람이 중요한 데 그런 에이전트가 데려오는 좋은 선수는 언제든지 쓸 수 있다.
ㅡ 에이전트 K씨와의 유착 관계 의혹에 대한 발언.
정상적인 선수들은 장기계약을 할 수도 있지만 어린선수는 1년 계약을 한 뒤 선의의 경쟁을 유도할 생각이다. #[36][37]
ㅡ 대전 시티즌 선수단 규모를 60명 규모로 비대하게 늘린 것에 대한 발언.
반대는 하지 않지만 책임질 사람이 나와야 한다. 아니면 말고식은 안된다.
ㅡ 간담회 같은 대화의 자리를 요구하는 대전 시티즌 정추위를 비롯한 팬들의 요구에 대한 발언.
사장은 광고하러 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광고 영업은 직원들이 하는 것이고 사장은 큰 일이 있을 때 딜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대전시티즌은 좋은 선수를 만들어 파는 게 중요하다. 표를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해 어리고 좋은 선수를 영입해 잘 키워 파는게 중요하다.[38][39]
ㅡ 구단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에 대한 발언
대전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40]
그러면 누구나 다 걸린다, 시의원 아들이라고 대통령 아들이라고 잘 하는 사람은 안 뽑나. 그 선수가 잘하기 때문에 뽑은 거다. 지금 1년 계약했고 연봉이 2,000만원에 불과하다. 팬들도 그 선수를 본 후에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누구 아들이라는 이유로 뭐라고 하면 안 된다. 잘하고 재능 있으면 받을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 선수를 관찰했다. 곧 오해가 풀릴 것이다.[41]
ㅡ 대전 시티즌 이기범 2군 감독 아들 영입에 대한 인터뷰에서
(심판한테) 나쁜놈이라고 그랬어요, 나쁜놈. 자기들이 책임져야 될 것을 안지니까, 성실하지 못하다는 거지.
ㅡ 심판실 난입 및 과도한 판정 항의에 대한 상벌위에 참석한 후 인터뷰에서
구단을 방만하게 운영하고 있다고들 말하는 데 뭐가 방만운영인가. 1군과 2군을 꾸리려면 규정상 각각 18명씩 선수를 등록하게 돼 있는데 선수단을 35명으로 줄이게 되면 선수 등록도 못하는 것이다. 선수 등록을 못할 정도로 선수단을 줄이라는 것은 구단을 운영하지 말라는 것 밖에 더 되느냐
ㅡ 선수단 규모 축구 요구에 대한 발언
사퇴라는 얘기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퇴한다면 내가 다 내려놓고 그만두고 나간다는 거 밖에 안되는 것인데 구단 책임자로서 위기에 있는 팀을 (정상화)해놓는 게 우선[42]
ㅡ 대표이사직 사임설에 대한 발언
(공개테스트 과정에서)부정 얘기가 나오는 데 평가를 한 본인들이 해외 전지훈련 중이어서 아직 구체적인 보고를 받지 못했고 나중에 정리를 해보려고 했었다. (평가점수 조작 등)전혀 몰랐다. 기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평가하고 행정은 지원만 한다.
ㅡ 공개테스트 불법 행위에 대한 발언
승격을 위해선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43]
이런 선수를 좀 뽑았으면 좋겠다고 협회 사람들이 하죠. 선발을 자기들이 해놓을 수 있는 거죠. 그거(선수선발)는 감독의 고유 권한인데 간섭이 너무 많았다는 거죠.
추적 60분 인터뷰에서[44]
제가 쫓겨난 거는 말을 안 들으니까 내쫓는 거죠. 축구를 하자는 이야기고, 저는 (협회가 감독을) 예스맨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죠.
추적 60분 인터뷰에서

8. 총평

김호는 박종환, 이차만 등과 함께 선수, 감독으로서 한국 축구에 큰 족적을 남긴 유능하고 훌륭한 축구인이었으나, 점차 시대의 흐름과 트렌드에 뒤쳐지면서 구시대 축구인의 한계를 적나라게 보여주여주면서 몰락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축구 외적으로도 리더로서 소통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리더이자 지도자로서 소통하기보다는 혼자서 모두 다 해결하고 자신의 역할 이외에도 간섭하는 등 불통,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하였는데, 이게 옛날에는 어떻게 통했을지 몰라도 현대 사회와 축구판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대전의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지도자가 아닌 기업인으로서 한 회사를 경영하고 관리하는 능력과 자질이 아주 형편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전 대표이사 시절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CEO나 기업인이라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스포츠 디렉터나 총감독, 기술 고문 등에 더 가까웠는데, 축구 감독과 대표이사는 엄연히 다른 자리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엄연한 기업의 대표로서 스폰서 유치를 비롯한 구단 경영이나 행정, 재정, 인사, 마케팅 등의 여러 문제 등을 등한시한채 과거 감독으로서 경험한 본인에게 능숙한 선수단 운영이나 경기력적인 측면만 신경 쓰고 집중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애초에 기업인으로서의 경험이나 능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았던 인물이었던 탓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회사 운영이나 행보를 보이면서 역임 기간 내내 방만한 구단 운영이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대전 팬들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등 결국 만족하기 어려운 대표이사 시절을 보냈다.

즉, 김호는 단지 과거 선수, 감독으로서의 커리어가 화려하다는 이유만으로 한 기업을 운영할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이나 자질이 전혀 없는데도 대표이사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측면들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스케일이 큰 사건사고에도 자주 휘말리며 더 이상 한국 프로 축구계에서 활동하기 힘든 것은 물론 레전드 칭호도 붙여서는 안 될 정도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져도 단단히 떨어졌다.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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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소속 김두관 경남도지사 후보의 선거운동과 유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를 봐서 민주당 지지자인 것으로 보인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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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자인 고종수하고는 각별한 사이로 잘알려져있는데, 고종수의 결혼식을 주례를 맡기도 했다.
  • 예원예술대학교 감독을 역임했던 조현 감독 역시 그의 애제자인데, 둘이 있을때 서로 아들, 아버지라 부를만큼 각별한 사이라고 한다.
  •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국 축구가 월드컵 등 세계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프로축구팀 증설이 절실하다고 건의하여 구단이 대폭 늘어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46] #
  • 선수 시절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형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 2008년 5월, 대전 시티즌 감독을 지내던 그가 통산 200승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을 당시 큰아들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해 아들이 크게 다치고 며느리와 손자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는 200승 달성 소감으로 “며느리와 손자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 2018년 추적 60분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김현회가 김호를 협회 까기 세력이라 말하며 오히려 김호가 추적 60분의 추적을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47]
  • 박종환 감독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는 감독으로 꼽힌다. 하지만 지도 방식이 좀 심하게 강압적인 박종환과는 달리 잘 하는 선수의 특성은 트집잡지 않고 존중해줬다. 김주성의 장발을 문제삼지 않았고, 폐결핵 후유증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이운재를 배려했고, 무엇보다 앙팡테리블 고종수를 내치지 않고 끝까지 품고 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다 구시대 축구인의 한계를 드러내며 축구인으로서의 말년을 불명예스럽게 보내고 있다.
  • 대전 시티즌 대표이사 부임 이후 대전 시티즌 팬들 뿐만 아니라 K리그와 한국 축구 팬들한테도 상당히 이미지가 안좋아졌는데, 자신이 레전드로 추앙받았던 수원 삼성 팬들한테 역시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아졌다.
  • 이름이 비슷한 김호곤과는 이름에 "김호"자가 들어가는 것 말고도 상당히 공통점이 많은데, 고향이 같은 경남 통영시이며, 한국 축구의 베테랑 감독으로 인정받았을 뿐더러 K리그2 구단의 대표를 역임했고, 축구 행정가로서 과오와 오판 등으로 과거 선수와 감독으로 쌓은 화려한 커리어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뒤 농구선수들과 술 시합을 벌였다고 한다. 해병대에 복무하고 있을 때 농구단의 이인표[48]와 친해졌었는데, 마침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농구와 축구가 모두 우승을 차지해 대회 마지막까지 남아있었기에 농구단과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술을 마시게 됐으며, 그때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호텔 주변에 있는 술은 모두 동이 날 정도로 마셨다고 한다.
  • 김성근과 상당히 흡사한 점이 많은데 둘 다 과거에는 명장으로 추앙받았으나 대전광역시를 연고지로 한 스포츠팀 감독을 맡은뒤 명장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졌던 어두웠던 이면이 드러나면서 추락했다.
  • 몇몇 사진을 보면 얼굴 일부가 하얗게 얼룩져 보이는데, 사실 그는 백반증 환자이다. *
  • 고향 통영시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대전 시티즌 감독 시절 축구단을 이끌고 통영에 동계 전지훈련을 떠나 꽉 짜인 훈련 스케줄 속에서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통영중,고 후배들에게 축구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하였으며 지역 축구인들과 고향 지인들을 만나 통영 축구발전 방안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이후 2015년 용인시 유소년축구센터 총감독이 되었을 때도 선수단 150여 명을 이끌고 동계 전지훈련 차 통영을 찾기도 했을 정도이다.
  • 지역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통영 축구회관 건립에 대해서는 “비록 한참 늦었지만 통영에서는 축구뿐만 아니라 배구, 태권도, 복싱, 카누, 사격 등 여러 종목에서 국가대표 등 훌륭한 체육인이 많이 배출된 만큼 체육회관을 건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 2023년 차두리 클린스만호의 기술 고문으로 합류한 것에 대해 "역할이 명확하지도 않다. 대표 선수를 추천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 해야 할 자리에 적임자를 제대로 앉힌 건지 다소 의문스럽다"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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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리그 클래식(2013~2017) 로고(가로형).svg 올해의 감독상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이차만
( 부산 대우 로얄즈)
김 호
( 수원 삼성 블루윙즈)
조광래
( 안양 LG 치타스)


[1] 1948년부터. [2] 센터백( 스토퍼) [3] 이 시기에 구단의 트레이너직과 선수를 병행했다고 한다. [4] 통영중학교와 통영고등학교가 소속되어 있다. [5] 신갈고등학교가 소속되어 있었다. [6] 만 64세 9개월 29일에 세운 기록이다. [7] 김정남, 최강희에 이어 한국인 감독 최다승 3위 기록이다. [8] 후술하겠지만 과거 감독 시절의 사건사고들을 제대로 해결하지도 않은 채 다시 대전 시티즌에 대표이사로 돌아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들을 보이면서 이에 반발한 대전 시티즌 팬들이 정상화추진위원회(비상대책위원회에서 명칭 변경)까지 결성하는 등 대전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불구대천지원수급이다. [9] 1948 올림픽 대표팀 멤버였다고 한다. 인성교육도 중시했다고 한다. [10] 아마 이건 옛날 체육인들 특유의 허풍일 것이다. 경평전만 해도 평양이 더 많이 이겼다. 설령 김호가 고등학교 대회를 말한 것이라 해도 지방팀이 서울팀을 단 한 번도 못 이겼을 리가 없다. 단지 오래간만에 경남팀이 혹은 최초로 경남팀이 서울을 이겼다 정도면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다. [11] 일단 급료를 받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도 중요하고 안종수 감독을 따르는 것도 중요했다고. [12] 당시는 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13] 실제로 수원 서포터즈 중 사적으로 김호 감독을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김호 감독과 같이 얘기할 때 아버지라고 부른다. [14]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최근 들어 김호의 추악한 실체가 밝혀지면서 수원 삼성 팬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이러한 칭호를 버려야 할 때라는 여론 역시 조성되고 있다. [15] 김호의 대전 시티즌에서의 오만 만행들은 단순히 대전 시티즌을 넘어 K리그와 한국 축구 전체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에 대전 팬뿐만 아니라 다른 축구 팬들도 김호를 맹비난하고 있다. [16] 연고지를 옮겨 지금은 제주 유나이티드. [17] 연고지를 옮겨 지금은 FC 서울. [18]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바로 1999년 서정원의 수원 삼성으로의 전격복귀였다. [19] 그러나 김호가 부임한 후 몸상태를 회복한 것도 어디까지나 우연이지, 김호의 능력 덕에 회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 이 사실이 팬들에게 제대로 알려진 것은 2017년 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서다. [21] [22] 2018년 4월 14일 아산 무궁화 FC와의 홈경기에서 대전 서포터즈들이 개사해서 부른 노래다. [23] 2018년 4월 21일 성남 FC와의 홈경기에서도 외쳤다. [24] [25] 하지만 정작 해당 시의원도 1년 뒤 대전 시티즌 선수 선발 불법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26] 이후 여러차례 김호가 대전 시티즌 산수단의 훈련 등에 개입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김호는 대표이사라기보다는 스포츠 디렉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27] 파일:IMG_20171204_220408_324.jpg 팬들이 김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합성 사진 [28] 모두 다 잘했다면 문제가 없지만거액의 계약금을 소모했는데도 일부 선수는 그렇지 못했기에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29] 2018년도 제2차 대전시 추가경정예산안을 다룬다. [30]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였던 김문환 효과를 제대로 봤다. [31] 하지만 부산은 2부 플레이오프에서 대전을 이기고 승강 PO에 한 번 더 진출했고 여기에 상대가 FC 서울이다 보니 K리그 정의구현이라는 설레발을 치면서 타 팀 팬들을 끌어모았지만 결과는 1차전 1:3 역전패, 2차전 1:1 무승부로 또 승격하지 못했다. [32] 이를 보아 과거에는 축구인으로서 유능하고 훌륭한 인물이였으나 점차 자신의 과오와 욕심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새로운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시대 축구인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3] 당시 조 최하위의 전력으로 평가되는 토고를 상대로도 아드보카트는 지나치게 수비적인 경기 운영을 펼치면서 결국 16강 진출을 다투던 스위스에 비해 골득실에서 밀리는 불리한 상황을 안고 스위스와의 맞대결을 가져 무조건적인 승리를 위해 무리한 경기 운영을 펼치면서 결국 스위스에 패하며 대한민국은 조 3위 월드컵 17위로 16강은 진출이 좌절되었었다. [34] 애초에 선수단 운영은 감독 고유의 권한인데, 그것을 대표이사인 김호가 같이 상의한다는 것 자체가 감독은 사실상 바지 감독으로 세워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35] 이후 이러한 바지 감독 논란을 의식했는지 감독이 조언을 구하기 전까지는 절대 조언을 하지 않겠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 [36] 애초에 신인 선수들의 경우 장기적인 비전과 플랜을 가지고 장기계약을 맺어 키우는게 상식이다. 즉, 김호는 그러한 과정과 노력 없이 대충 로또 복권 긁는 것 마냥 선수 여러명을 주야장천 영입해서 1년 써보고 그중에 잘하는 선수 몇명 나오면 그들만 데리고 있고 나머지는 다 버리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37] 앞선 우려와 마찬가지로 2019시즌을 앞두고 선수단을 35명대로 줄일 계획을 밝히면서 2018년 영입한 선수들 중 최소 23명을 무의미하게 방출하게 되었다. [38] 대전 시티즌에서 신인 선수를 영입해 육성한 뒤 다른 구단에 넘겨 수익을 얻는 게 스폰서나 입장권 판매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39] 물론 선수를 판매해서 이적료라는 수익을 얻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문제는 김호는 이러한 선수단 운영에만 몰두한 채 스폰서, 광고 유치에는 거의 신경을 안썼으며, 선수 판매를 통한 거액의 이적료 창출 역시 제대로 안되면서 시에서 주는 지원금, 즉 대전 시민들의 혈세에만 의존하고 있다. [40] 이후 김호는 심판실 난입해 폭력 사태를 일으키면서 대전 구단이 벌금 2,000만원을 물게 되면서 대전 구단에 큰 해를 끼쳤다. [41] 애초에 감독 아들이라는 것을 감안해가면서 영입할 정도로 실력 있는 신인 선수를 장기적으로 키울 생각이 아닌 고작 1년 계약을 맺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며, 그런 선수를 리그에서 단 한경기도 안써보고 반년만에 이적료 없이 타팀으로 이적시킨건 더더욱 말이 안되는 일이다. [42] 사실 엄밀히 따지면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구단 책임자로서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고 팀을 위기에 몰아넣은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김호가 할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43] 사실 엄밀히 따지면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김호의 구단 운영은 단순 승격 유무와 성적 문제를 떠나 도덕적인 문제 등으로도 문제점이 너무 많았고, 결국엔 김호 역시 승격을 이루지 못한채 불명예 퇴진하는 등 김호의 구단 운영이 실패라는 결론이 났다. [44] 물론 앞서서 김호가 말인 것은 협회가 잘못한 것이므로 비판받아야 하지만 2018년에 1994년 이야기를 하며 지금 현재의 협회를 비판하는 것은 사실상 팩트보다는 감정이 더 치우쳐서 까는 것에 가깝다고 봐야한다. [45] 하지만 이후 김두관이 경남도지사에 당선되고, 구단주로 있는 경남 FC의 후임 감독 내정설이 보도되면서 정치권의 코드 인사 아니냐는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고, 결국 최진한 감독이 선임되면서 경남 감독직에 부임하지 못했다. # [46] 당시에는 K리그 구단이 대우 로얄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 일화 천마, 전북 버팔로, 포항제철 아톰즈, 현대 호랑이 등 총 7개 밖에 없었다. [47] 김호가 인터뷰를 한 건 2018년 9월 5일 방영된 "정 가(家)네 축구협회"였는데, 김호 인터뷰 이외에도 축사국의 제보를 받아 방송하고 전혀 근거없는 의혹들을 제기하면서 반응이 안좋았고, 방송이 나간 바로 다음날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반박문을 게재하고 법적 조치를 예고했다. [48] 삼성전자 남자농구단 초대 감독, 단장을 역임한 원로 농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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