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라틴어: Publius Sulpicius Galba Maxim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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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파트리키 |
가족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할아버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아버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형제)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아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1년 |
전임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동기 |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 |
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0년 |
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
동기 |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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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가 이탈리아에 진입하는 걸 저지하고, 로마가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술피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 씨족은 기원전 500년 처음으로 집정관에 오른 이래 여러 집정관과 집정 무관을 배출했다. 조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는 기원전 279년 집정관을 역임하여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부스와 함께 피로스 1세를 상대로 아스쿨룸 전투에서 격돌했으나 패배한 푸불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아버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대부터 '갈바(Galba)'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했다. 형제로 기원전 209년 최고 조영관을 역임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가 있었다.기원전 212년 말, 그는 집정관 선거에 도전했다. 이전까지 어떠한 경력도 쌓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 해의 집정관 중 한 명인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술피키우스 집안의 여식과 결혼한 인연이 있었기에 상당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선거 결과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와 함께 기원전 211년 집정관에 당선될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선거 비용을 지불하느라 막대한 빚을 져야 했다고 한다. 기원전 211년 초, 원로원은 새 집정관들에게 아풀리아에 남아서 한니발 바르카를 견제하게 했다. 하지만 카푸아 함락 후 이탈리아 상황이 크게 호전되자, 집정관 한 명이 발칸 반도로 가서 한니발과 연합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를 막게 하였다. 제비뽑기를 한 결과 갈바가 그 역할을 맡았다.
발칸 반도로 건너간 그는 전직 법무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와 함께 아이톨리아 동맹, 페르가몬 왕국, 스파르타, 엘리스, 메세네 등의 협력 하에 마케도니아군을 견제하였다. 210년 봄 라이비누스가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에는 전직 집정관이자 일리리아 총독 자격으로 필리포스와 맞섰다. 그런데 원로원은 라이비누스의 과장된 보고를 듣고 발칸 반도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오판하여, 갈바에게 1개 군단의 지휘권만 맡기고 나머지는 해산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에게 해로 진군해, 필리포스 5세에게 포위된 에키누스를 구원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에키누스는 곧 항복했다. 이후 아이기나를 공략하고 모든 주민을 노예로 팔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아이톨리아 동맹에 넘겼다.
기원전 209년, 갈바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라미아 공세에 참가하여 1,000명의 해병을 지원했다. 필리포스 5세가 엘리스를 향해 진군하자, 그는 코린토스와 사키온 사이에 상륙하여 주변 일대를 약탈했다. 그러나 필리포스가 갑작스럽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우팍토스에 있는 숙영지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필리포스가 아카이아 동맹과 합세하여 엘리스를 포위하자, 그는 극비리에 엘리스 인근에 4,000명의 병사와 함께 상륙한 뒤 적을 배후에서 습격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은 마케도니아군은 패퇴하였고, 그는 아이기나로 항해하여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가 지휘하는 함대와 합세한 뒤 그곳에서 겨울 동안 머물렀다.
기원전 208년 봄, 갈바와 아탈로스는 60척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아이기나에서 렘노스로 항해했다. 아탈로스는 페파레우스를 공격한 뒤, 갈바와 함께 니케아로 건너갔다. 이후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점거하고 있던 우라에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에우보이아로 이동하여 우라에오스를 곧 공략했다. 그는 뒤이어 칼키스를 공략하려 했지만 적의 방비가 생각보다 강하자 로크리스의 항구 도시인 키노스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비티니아인들이 페르가몬을 공격하는 바람에 아탈로스가 철수하자, 그는 할 수 없이 아이기나로 돌아갔다. 이후 로마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기원전 206년까지 그곳에 머물며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205년,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그를 대신하여 일리리아 총독으로 부임했고,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기원전 203년 독재관으로 선출되어 집정관 선거를 집전하여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였다.
기원전 200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전쟁에 투입되었다. 민회는 마케도니아에 선전포고하는 것에 반대표를 던졌지만, 갈바가 이 조치의 필요성을 설파한 덕분에 통과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그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와 함께 동부 지중해에서 적극적인 외교 정책과 직접적인 영토 점유를 옹호하는 정치 단체를 이끌었다고 추정한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참전용사들을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2개 로마 군단, 이에 상응하는 라틴 동맹군, 1,000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전쟁 코끼리 부대가 조직되었다. 그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일리리아에 도착한 뒤, 아테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에게 20척의 함선과 1,000명의 병력을 줘서 아테네를 구원하게 하였다. 여기에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풀로에게 또다른 병력을 맡겨 마케도니아 서부 해안을 약탈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일리리아에서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그가 이 시기에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대신, 그는 마케도니아를 공격할 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마케도니아와 오랜 세월 갈등을 벌였던 이민족인 일리리아, 다르다니아, 아파마니아인들과 손을 잡았고, 아이톨리아, 페르가몬, 로도스와도 사절을 교환했다. 그는 연말에 아폴로니아 부근의 겨울 숙영지에 군대를 배치했다. 기원전 199년, 새 집정관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가 그를 대신하여 마케도니아 전쟁을 맡기로 했다. 그러나 타풀루스가 이탈리아에서 지연되었기 때문에, 갈바가 전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진군했다. 그는 진군하면서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닷사레티스와 펠라고니아를 휩쓸고, 륀코스와 에오르다이아의 중간 지점까지 진군했다. 그러다 에오르다이아 고개 근처에서 필리포스 5세가 이끄는 적군과 맞주쳤다. 양측은 몇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는데, 한 번은 로마군이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마케도니아군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했다가 갑작스러운 측면 공격을 받아 퇴각하였고, 필리포스 5세는 그 과정에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후 필리포스 5세는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갈바에게 사절을 보냈다. 갈바는 결정을 다음날까지 미루었지만, 필리포스는 그날 밤중에 조용히 전장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적군이 홀연히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갈바는 며칠간 그곳에서 머물다가 플루비나로 진군하여, 필리포스가 진을 치고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오스파고스 강변에 진을 쳤다. 그는 여기서 여러 마을을 공략하면서 필리포스가 전투에 응하도록 유도했으나, 필리포스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급이 부족해지자 가을에 아폴로니아로 돌아갔다. 당시 양측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군이 우세를 점하자 그들과 연합하여 필리포스 5세를 협공하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198년, 아일리아에 도착한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귀환하였고, 기원전 197년 빌리우스와 함께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휘하 장군으로 복무하여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 참여해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필리포스 5세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해, 마케도니아 왕이 그동안 점령한 모든 영토를 헌납하고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자유를 허용하게 했다. 기원전 196년 로마 사절로 임명되어 리시마키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협상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193년 사절단 대표로서 다시 안티오코스 3세에게 가서 그리스 문제에 개입하려는 왕을 비판했다. 안티오코스 3세가 대답을 회피하자, 다시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를 방문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공동으로 막는 방안을 논의했다. 기원전 192년 로마로 돌아왔고,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역사가들은 안티오코스 3세와 접견한 로마 사절 중에서 그가 가장 나이 많았으며, 페르가몬으로 가던 중 질병에 걸려 지체되었다가 에페수스에서 동료들을 따라잡았다는 기록을 볼 때, 외교 임무를 마친 지 몇년 안 되어 노환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들 가이울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기원전 202년 사제로 선출되었지만 기원전 199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또다른 아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기원전 187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그의 후손 갈바는 서기 68~69년 초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