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 라틴어: Gnaeus Mallius Maxim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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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03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5년 |
전임 |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
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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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참패한 뒤 추방되었다.2. 생애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는 아버지 이름이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라고 언급되었지만 조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그의 조부는 로마 시민권자가 아니었다고 추정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가문이 한미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기원전 108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0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를 꺾고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막시무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를 위협하고 있던 킴브리족을 막는 임무를 부여받고 그곳으로 출진했다. 당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총독이며 기원전 106년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원로원으로부터 막시무스와 협조하라는 지령을 받았지만,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에 불과한 막시무스의 지휘를 받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라는 막시무스의 지시를 무시했다. 결국 두 군대는 아라우시오 마을 인근을 흐르는 론 강을 사이에 둔 채 별개로 주둔했다.
막시무스가 파견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의 분견대가 킴브리족에게 완패하고 스카우루스가 포로 신세로 전락하자, 막시무스는 카이피오에게 "어서 군대를 통합시켜서 적과 공동으로 맞서 싸우자"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원로원 사절들도 합류를 권했지만, 카이피오는 듣지 않고 병사들에게 "집정관이 적군에게 겁먹어서 어쩔 줄 몰라 하니, 내가 조만간 적을 단독으로 물리쳐서 그를 구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병사들이 카이피오에게 막시무스와 만나도록 강요해 비로소 두 지휘관이 한 자리에 만났지만, 회의 참가자들이 서로 심각한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사이만 더 나빠지기만 했다.
이후 킴브리족이 막시무스와 카이피오의 진영에 사절을 잇따라 보내 자신들이 정착할 수 있는 땅을 달라고 요청했다. 막시무스는 사절을 신중하게 대했지만, 카이피오는 사절이 자기부터 만나지 않은 것을 모욕으로 간주하고 사절을 매우 무례하게 대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4만 군단병을 이끌고 단독으로 킴브리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킴브리족은 압도적인 군세로 로마군을 순식간에 포위해 섬멸했고, 카이피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킴브리족은 여세를 몰아 막시무스의 군영을 습격했고, 아군이 눈앞에서 궤멸되는 것을 목격하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로마군은 궤멸되었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이 날 70,000명의 로마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80,000명의 군인과 40,000명의 호송대 민간인이 죽었다고 한다. 현대 역사학계는 이를 과장된 수치로 간주하지만, 아라우시오 전투가 로마인들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길 만큼 큰 패배인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로마 시민들은 아라우시오 전투 소식을 듣고 킴브리족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파괴할 것을 두려워하는 한편 참패를 초래한 두 지휘관에게 분노했다. 세간의 비난은 대부분 카이피오에게 쏟아졌지만, 막시무스 역시 무능력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기원전 103년,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는 "로마 인민의 위대함을 모욕하는 것에 관한 법률"(lex Appuleia de maestate)을 채택하여 공화국의 이익을 해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 법을 적용해 카이피오와 막시무스를 재판에 소환했고, 두 사람 모두 유죄 판결을 받고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후 막시무스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