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 라틴어: Gaius Fundanius Fundu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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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퀸투스 푼다니우스(조부) 가이우스 푼다니우스(아버지)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43년 |
전임 |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 |
동기 |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
후임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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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기원전 6세기의 정치 사건을 논할 때 호민관을 맡아 평민을 위해 투쟁했다고 언급되는 오래돈 평민 집안인 푼다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퀸투스,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기원전 248년 호민관을 맡은 그는 지난해 드레파나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에게 참패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고발했다. 첫 재판은 장대비가 내리는 바람에 취소되었고, 두번째 재판에서는 다른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해서 무산되었다. 그러나 결국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었다. 풀케르는 그 해에 사망했는데, 많은 학자들은 그가 명예가 손상된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246년 평민 조영관을 맡았다. 그 해에 풀케르의 여동생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 그는 동료 조영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함께 클라우디아를 로마인을 모욕한 혐의로 고발했고, 클라우디아 역시 막대한 벌금을 내야 했다. 두 조영관은 이 벌금을 아벤티노 언덕에서 건설될 예정인 리베르타스(Libertas: 자유의 여신) 신전 건설 자금으로 돌렸다.
기원전 243년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하밀카르 바르카에 대적했다. 그러나 소규모 접전이 계속 벌어졌을 뿐 승패를 결정지을 대규모 회전은 하밀카르가 회피하는 바람에 벌이지 못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한 번은 보도스토르라는 부하가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는 하밀카르의 지시를 거부하고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약탈하다가 로마군의 역습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하밀카르는 로마군 진영에 사절을 보내 아군 전사자들을 매장하고 싶으니 일시적인 휴전을 맺자고 요청했다. 이에 푼둘루스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너희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죽은 자가 아니라 너희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휴전을 요청해야 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막심한 손실을 입었다. 이번에는 푼둘루스가 카르타고 진영에 사절을 보내 하밀카르와 같은 요청을 했고, 하밀카르는 이렇게 답하며 받아들였다.
"나는 오직 살아있는 자와 싸운다. 죽은 자들은 이미 합당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