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 라틴어: Gaius Papirius Mas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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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3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마소(조부)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아버지) 파피리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1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푸블리키우스 말레올루스 |
동기 |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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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4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만리우스, 술피키우스, 포스투미우스 가문과 함께 고위 행정관 직을 잇따라 역임한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파피리우스 씨족 출신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고, 아버지는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기원전 241년 집정관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가 에트루리아에서 팔레스키인들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가이우스 파피리우스'가 집정관의 지시에 따라 반란군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민회가 팔레스키인들을 철저하게 짓밟기로 결의했을 때, 파피리우스는 케르코와 함께 "그들은 로마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오직 보호를 받을 때에야 복종한다"며 반대해 민회의 결정을 되돌렸다. 이 파피리우스는 기원전 231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31년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해에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서 반란이 발발하자, 동료 집정관 마토가 사르데냐로 진군하는 사이 그는 코르시카로 갔다. 지역 부족들은 해안가에서 한 차례 맞섰지만 패배한 뒤 산으로 후퇴했다. 그는 산악 지대로 진입해 반란군과 교전했지만 큰 손실을 입고, 결국 코르시카인들과 온건한 조건 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원로원이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반 산으로 가서 월계관 대신 미르투스(Myrtus) 화환을 쓰고 시민의 갈채를 받았다. 이후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못한 이들은 그의 행위를 본받아 나름의 의식을 거행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저서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에 따르면, 마소는 전쟁 전리품을 판매하여 챙긴 수익금으로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213년 사망했다. 사망 당시 폰티펙스였다고 하며, 이름이 똑같고 데켐브리(Decemvri: 시빌라 예언서 관리자)를 맡고 있던 사촌도 같은 해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딸 파피리아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와 결혼해 두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장녀 아이밀리아 프리마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