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라틴어: Quintus Servilius Caepi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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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50년 ~ 기원전 9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시아 속주 스미르나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조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아버지) 세르빌리아(누이)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아들) 세르빌리아(딸) |
참전 | 킴브리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6년 |
전임 |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
동기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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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극을 초래한 장본인이다.2. 생애
알바 롱가에서 유래한 여섯 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인 세르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기원전 253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집정관을 역임한 이래 카이피오 지파에서 많은 집정관들을 배출했다. 조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기원전 169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기원전 140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루시타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누이 세르빌리아는 기원전 102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아내가 되었다.기원전 129~127년, 그는 집정관 마니우스 아퀼루스의 휘하에서 아시아 속주에서 대대장으로서 복무했다. 기원전 109년에 아버지가 통치했던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해 3년간 통치하다가 기원전 107년에 로마로 귀환한 뒤 총독 재임 기간에 로마에게 반기를 들었던 루시타니아인들을 물리친 공로를 인정받아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06년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법원이 에퀴테스가 아닌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법을 반포했다. 이로 인해 로마 법체계는 원로원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어가 그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잇따라 내려졌고, 졸지에 손해를 보게 된 에퀴테스와 평민들은 그를 증오했다.
기원전 105년, 카이피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이탈리아를 위협하는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는 1년 전에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툴루즈를 공략하고 그 곳의 켈트 사원에 보관되었던 막대한 금은보화를 확보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110,000파운드의 은과 100,000파운드의 금이 로마군의 수중에 넘어갔다고 한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110,000파운드의 은과 500,000파운드의 금이었다고 한다. 스트라본은 15,000달란트의 금과 은이 발견되었다고 기술했다. 그는 이 귀중품을 마실리아로 보냈지만 도중에 운송 책임자들이 살해당하고 금은보화는 사라졌다. 일부 고대 역사가들은 카이피오 본인이 보물을 빼돌렸다고 주장했지만 진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105년 가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론 계곡에 진입했다.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총독 카이피오와 집정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가 지휘하는 두 로마군에 의해 방어되었다. 카이피오는 총독으로서 집정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지만,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에 불과한 막시무스의 지휘를 받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라는 막시무스의 지시를 무시했다. 결국 두 군대는 아라우시오 마을 인근을 흐르는 론 강을 사이에 둔 채 별개로 주둔했다. 막시무스가 파견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의 분견대가 킴브리족에게 완패하고 스카우루스가 포로 신세로 전락하자, 막시무스는 카이피오에게 "어서 군대를 통합시켜서 적과 공동으로 맞서 싸우자"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원로원 사절들도 합류를 권했지만, 카이피오는 듣지 않고 병사들에게 "집정관이 적군에게 겁먹어서 어쩔 줄 몰라 하니, 내가 조만간 적을 단독으로 물리쳐서 그를 구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후 킴브리족이 막시무스와 카이피오의 진영에 사절을 잇따라 보내 자신들이 정착할 수 있는 땅을 달라고 요청했다. 막시무스는 사절을 신중하게 대했지만, 카이피오는 사절이 자기부터 만나지 않은 것을 모욕으로 간주하고 사절을 매우 무례하게 대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4만 군단병을 이끌고 단독으로 킴브리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킴브리족은 압도적인 군세로 로마군을 순식간에 포위해 섬멸했고, 카이피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킴브리족은 여세를 몰아 막시무스의 군영을 습격했고, 아군이 눈앞에서 궤멸되는 것을 목격하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로마군은 궤멸되었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이 날 70,000명의 로마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80,000명의 군인과 40,000명의 호송대 민간인이 죽었다고 한다. 현대 역사학계는 이를 과장된 수치로 간주하지만, 아라우시오 전투가 로마인들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길 만큼 큰 패배인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로마 시민들은 아라우시오 전투 소식을 듣고 킴브리족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파괴할 것을 두려워하는 한편 참패를 초래한 카이피오에게 격노했다. 카이피오는 총독 권한과 원로원 의원 자격을 즉시 박탈당했다. 이후 기원전 103년,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는 "로마 인민의 위대함을 모욕하는 것에 관한 법률"(lex Appuleia de maestate)을 채택하여 공화국의 이익을 해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 법을 적용해 카이피오를 재판에 소환했다. 카이피오는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패 뿐만 아니라 툴루즈에서 확보한 금은보화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카이피오를 이전부터 증오했던 에퀴테스와 평민들은 이참에 그를 끝장내고자 했고, 카이피오를 변호하던 원로원 의원이자 프린켑스 세나투스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머리에 돌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두 호민관 티투스 디디우스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재판이 불법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다가 연설장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결국 카이피오는 유죄 판결을 받고 강제로 추방되었고,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어 경매에 넘어갔다. 서기 1세기의 역사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그가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고 기술했지만,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카이피오는 아시아 속주를 정처없이 떠돌다 기원전 90년경 스미르나에서 사망했다.
카이피오는 아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딸 세르빌리아를 낳았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기원전 91년 법무관을 역임하면서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배하자는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가장 강력한 적수로 활동했다. 딸 세르빌리아는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