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라틴어: Marcus Claudius Marcel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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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4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지중해 해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버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손자)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손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66년 |
전임 |
퀸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펜누스 |
동기 |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
후임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
임기 | 기원전 155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
후임 |
퀸투스 오피미우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임기 | 기원전 152년 |
전임 |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 |
동기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후임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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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집정관을 3차례 역임하면서 갈리아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2차례 개선식을 거행했고, 켈티베리아인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평민 지파인 마르켈루스 가문 출신이다. 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라쿠사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고 한니발 바르카와의 대결에서 선전하며 5차례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196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189년에 감찰관을 맡았다.기원전 177년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제단의 일원으로 들어갔으며, 기원전 171년 호민관에 선출되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치르기 위해 새로운 군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한 백부장이 자신이 이전에 세운 공로가 많은 데 또다시 징집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호민관들에게 호소하자, 그와 동료 호민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집정관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호민관들이 호응하지 않으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기원전 170년 보이오티아의 티스비 시를 직할령으로 삼는다는 원로원의 포고령에 서명했다.
기원전 169년 법무관에 선임된 그는 동료 법무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와 함께 당해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군대를 부정직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자신들에게 군대 소집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두 사람이 병력을 모집하게 했다. 그 후 원로원은 제비뽑기를 통해 그에게 먼 히스파니아 속주와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를 합친 단일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그는 히스파니아 부족민들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하고 기원전 168년 말에 로마로 귀환하면서 100만 세스테르티우스에 10파운드의 금과 은을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기원전 166년 집정관에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와 함께 당선되었다. 이후 알프스 산맥에 거주하는 켈트족을 상대로 승리했고, 동료 집정관 갈루스는 리구리아인을 상대로 승리했다. 두 사람은 로마로 귀환한 뒤 동시에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55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리구리아로 출진해 아푸아니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의 식민 도시인 루니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는 로마로 귀환한 뒤 두번째 개선식을 거행했고, 그의 동상은 포로 로마노에 세워졌다.
기원전 153년,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우스가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켈티베리아인들에게 패배했다. 로마인들은 이 패배에 대한 복수를 원했고, 앞서 2차례 집정관을 맡으면서 군사적 능력을 입증한 그를 기원전 152년 집정관에 선출했다. 이는 한 번 집정관에 오른 사람은 10년 동안 집정관에 다시 오를 수 없다는 빌리아 아날리스 법(Lex Villia annalis)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의 집권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불확실하나, 학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켈티베리아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경험 많은 사령관을 선출하려는 로마인들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라 추정한다.
그는 원로원 또는 민회의 특별 법령에 따라 가까운 히스파니아를 배정받은 뒤 노빌리오르 군대의 손실을 매꾸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보병 8,000명과 기병 500명을 모집했다. 이어 기원전 152년 4월 히스파니아로 가서 군대를 소집해 총 23,000명 가량의 병력을 확보했다. 이후 오킬리스 시의 항복을 받아내고 약탈을 금지했다. 이에 그가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네토브리가 시는 그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고, 양자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네토브리가 주민들은 협정 체결 후 방심하고 있던 로마군 후방 경비대를 공격해 몇 명을 사살했다. 이에 마르켈루스는 네토브리가 시를 포위 공격했다. 그들이 평화 협상을 재차 간청하자, 아레바키, 벨리스, 티티스 족이 자신과 평화 협약을 맺지 않는다면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들 부족 대표자들은 기원전 178년에 맺었던 협약을 갱신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지만, 로마와 동맹을 유지하면서 이들에게 시달렸던 다른 부족들은 반대했다. 마르켈루스는 휴전만 맺기로 하고 전쟁을 벌이는 두 파벌의 대표를 자신의 사절단에 끼워넣고 로마로 파견했다. 그러나 원로원 내 마르켈루스의 정적들은 그가 추가적인 영광을 쉽게 얻기 위해 전쟁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적에게 유리한 평화를 맺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이에 따라 메르켈루스에게 전쟁을 이어가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듬해에 그의 지휘권을 갱신하지 않고 집정관 중 한 명을 히스파니아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마르켈루스는 코르도바에서 겨울을 보내다가 원로원의 결의를 전해듣고 더 늦기 전에 공적을 세워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먼 히스파니아의 루시타니아인들을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뒤이어 네토브리가 시를 급습해 함락시키고 로마 경비대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한편 원로원에 의해 히스파니아 속주로 파견될 예정이던 집정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모집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마르켈루스는 새 집정관이 오지 못하는 틈을 타 자기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그는 아레바키족을 누만티아 시로 몰아붙였고, 뒤이어 아레바키, 벨리스, 티티스 족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들 부족은 600달란트의 배상금을 로마에 지불해야 했으며, 벨리스톼 티티스 족은 로마군에 공물을 바치고 군인들을 공급해야 했다.
기원전 151년 로마에 귀환한 마르켈루스는 개선식을 치를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아피아 가도 북쪽에 자리잡은 명예와 미덕의 사원(Aedes Honoris et Virtutis)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고 "9번 집정관을 역임한 3명의 마르켈루스(tres Marcelli novies consules)"라고 적힌 비문을 건립했다. 비슷한 시기에, 대 카토는 원로원에서 한 사람이 집정관을 여러 번 역임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해 관철시켰다. 기원전 148년, 마르켈루스는 당시 진행 중이던 제3차 포에니 전쟁과 관련해 누미디아 국왕 마시니사 왕과 논의하고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지중해 해상에서 배가 폭풍에 휩쓸려 가라앉는 바람에 익사했다.
그의 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으며, 손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91년 조영관을 역임했고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80년 법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