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 라틴어: Quintus Valerius Fal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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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조부)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아버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팔토(형제)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9년 |
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동기 | 가이우스 마밀리우스 투리누스 |
후임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팔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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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푸블리우스,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부의 코그노멘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많은 학자들은 포플리콜라였을 것이라 추정하며, 아버지 퀸투스부터 팔토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했다. 형제로 기원전 238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팔토가 있었다.기원전 242년, 이전까지 한 명만 선출되던 법무관이 최초로 2명 선출되었다. 한 명은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Praetor Urbanus: 도시 법무관)'로서 로마 시민들의 법률 문제를 다루었고, 다른 한 명은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Praetor Peregrinus: 외국인들의 법무관)'로서 외국인들을 상대했다. 그는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에 선임된 최초의 인물이었다.
기원전 241년, 시칠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전직 집정관으로서 원로원으로부터 임페리움 1년 연장을 허가받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부관이 되었다. 당시 로마 함대는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세력의 최후의 보루인 릴리바이움을 포위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정부는 릴리바이움을 구원하기 위해 한노의 지휘하에 250척의 전선과 150~350척의 수송선을 파견했다.
한노는 아이가테스 제도의 서쪽에 있는 히에라 섬에 집결한 뒤, 바람이 유리한 쪽으로 불 때 릴리바이움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로마 해군이 저지하기 전에 도착하여 수비대에게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가 기원전 241년 3월 초에 히에라에 도착하자마자 로마 척후선이 이를 확인한 뒤 카툴루스에게 보고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봉쇄를 풀고 20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시칠리아에서 16km 떨어진 에구사 섬에 정박했다.
기원전 241년 3월 10일 아침, 서풍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고 해류도 같은 방향으로 흐르자, 한노는 즉시 릴리바이움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적을 저지하기로 하고, 로마 선박에서 돛대, 돛 및 기타 불필요한 장비를 제거해 거친 풍랑에서 배를 제대로 조율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카툴루스 본인은 이전 교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고, 팔토가 그를 대신해 전투에 임했다.
로마 함대는 적과 마주치자마자 한 줄의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에 맞서 노를 저으며 적 함대에 접근했다. 이에 카르타고 함대는 돛을 내린 뒤 적과 교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카르타고 함대에는 주로 곡물이 담긴 짐이 가득 실려 있었던 반면 로마인들의 선박에는 최소한의 필수품만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카르타고 함선들이 느릿느릿 이동한 데 비해, 로도스의 한니발이 탔던 기함을 본뜬 로마 함대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 해군은 해상 훈련을 착실하게 수행했던 것에 비해, 카르타고 측은 급히 모아서 서둘러 출발한 터라 훈련이 부족했다.
뒤이은 접전에서, 로마 해군은 기동성을 잘 살려서 적 함대의 측면을 충각 전술을 통해 파괴하는 전법으로 압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함 50척이 침몰하고 70척이 나포되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함 117척이 침몰했고 로마 전함은 30척이 침몰하고 50척이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두 역사가는 당시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빠진 많은 카르타고인이 익사했기에 로마군에 사로잡힌 포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살아남은 카르타고 함대는 본국으로 퇴각했고, 지휘관 한노는 패배의 책임을 물은 카르타고 당국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카툴루스와 팔토는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승리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요청했다. 이때 개선식의 주인공이 누가 되느냐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다. 카툴루스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났으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팔토는 카르타고를 최종적으로 굴복시킨 아이가테스 해전을 실제로 지휘한 것은 바로 자신이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고심 끝에 카툴루스는 카르타고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해 개선식을 거행하고, 팔토는 시칠리아에서의 해전를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해 또다른 개선식을 거행하게 했다.
기원전 239년 가이우스 마밀리우스 투리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학자들은 형제 푸블리우스가 이듬해 집정관에 선임된 것은 그가 선거전에서 지원해줬기 때문일 거라고 추정한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