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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 라틴어: Publius Licinius Crassus Muc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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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30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소아시아 스미르나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조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아버지) 리키니아(어머니)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형제) 리키니아 프리마(장녀) 리키나아 세쿤다(차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1년 |
전임 |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 |
동기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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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폰티펙스 막시무스.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무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들은 에트루리아의 클루시움 군주인 포르세나가 로마를 침공했을 때, 포르세나를 암살하려 했다가 실패한 뒤 포르세나 앞에서 오른손을 스스로 불사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덕분에 풀려난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후손을 자처했다. 조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기원전 215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기원전 17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어머니는 리키니아이며, 형제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기원전 133년 집정관을 역임했다.그는 기원전 180년경에 출생했으며, 일찍이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에 입양하여 이름을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무키아누스로 개명했다. 하지만 양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젊은 시기에 폰티펙스가 되었고, 기원전 152년 재무관을 역임했으나, 기원전 147년이 되어서야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기원전 150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라는 원로원 의원이 기원전 150년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한 원로원의 비밀 결의안을 누설하는 바람에 집정관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무키아누스와 만나 그 이야기를 했는데, 크라루스가 3년 전 재무관을 맡았지만 아직 원로원 의원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46년 집정관 파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42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세르빌리아누스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42년 수석 조영관에 선임되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직무에 대하여>에서 멋진 경기를 조직한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 대해 기술했는데, 학계에서는 이 인물이 무키아누스일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134년 이전에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싱라 추정된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농지 개혁을 단행했을 때 형제이며 당시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함께 그라쿠스를 지지했다. 그라쿠스는 얼마 후 살해되었지만, 그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함께 가난한 시민들에게 공유지를 분배하는 일을 맡은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32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한 뒤 페르가몬에 망명했다가 사망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의 뒤를 이어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131년 마르스의 플라멘이었던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시기 옛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에서 아리스토니코스가 로마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두 집정관은 자신들에게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임페리움을 갈망했다.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의 권위를 이용해 동료 집정관이 플라멘이라는 이유로 로마를 떠나는 것을 금지했다. 민회는 플라쿠스를 지지했지만, 감히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거역한 플라멘이라는 오명을 사고 싶지 않았던 플라쿠스는 그에게 임페리움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무키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에 상륙한 뒤 기원전 130년 비티니아 왕국, 파플라고니아, 폰토스 왕국의 지원을 받고 미리나와 엘레아 시 사이에서 트라키아인들의 지원을 받은 아리스토니코스와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로마군의 완패로 끝났고, 그는 트라키아인들에게 생포되었다. 이후 적에게 사로잡힌 집정관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경비병을 때렸다가 살해되었다. 트라키아인들은 크라수스의 머리를 베어서 아리스토니코스에 넘겼고, 시신은 스미르나에 묻혔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이에 대해 그가 운명이 자신의 자유에 던진 슬픈 족쇄를 스스로 깨뜨리는 현명하고 용감한 일을 했다고 평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이중 한 명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결혼했고, 다른 한 명은 기원전 144년 집정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의 아들이며 기원전 121년 토지 분할을 위한 위원회의 일원이 된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결혼했다.